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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4일 (목요일)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일어났다. 발 마사지를 받아서 피로가 회복이 되었는가보다. 샤워도 하고, 머리를 감고 수선을 떨었다. 08시 30분에 14층으로 올라가 식사를 하였다. 역시 베트남 쌀국수가 인기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과일도 맛이 있었다. 그 흔한 바나나도 이곳에서는 잘 팔리고 있었다. 조금만 먹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일어서면 포만감에 젖어들곤 한다. 우리가 그만큼 잘 산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침 인사를 아침 드셨습니까? 또는 밤새 안녕 하셨습니까? 로 했다. 못 살던 시절의 인사다. 맛있게 먹어라가 아니라 많이 먹어라 를 인사로 했던 시절이 불과 몇 년 전의 이야기던가. 지금은 먹는 게 걱정이다. 많이 먹지 마라. 조금만 먹어라. 우리나라가 역사 이래 이런 말을 인사 말로 한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를 생각했다. 호텔에서 09시 20분에 버스에 올랐다. 다시 하노이로 가야 하는 것이다.
(베트남 고속도로 풍경. 시클로와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자동차와 어울려)
버스에 오르자, 가이드는 말했다. 어떤 사람이 ‘성공’이라는 섬을 향하여 배를 타고 노를 젓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을 서둘러 가는데 힘이 들어 ‘친구’라는 짐을 물속에 넣었다고 한다. 갈 길은 멀고 뒤에서 쫓아오는 배들은 많아서 다시 ‘가족’이라는 짐을 바다 속으로 던졌다. 그래도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의 무서운 힘에 눌려 마지막으로 ‘건강’이라는 짐을 바다에 던지고서야 ‘성공’이라는 섬에 도착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로 맞았는데 자기를 향한 것인 줄 알았더니, 모든 짐을 싣고 자기를 뒤쫓아 온 사람을 향한 환호와 박수였음을 알고 다시 자신을 돌아봤을 때 자기는 이미 늙고 병들어 있더라는 이야기였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이 적잖다고 본다. 돈을 위해서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죽어서는 동전 한 닢 가져가지 못하면서도 천세를 누릴 것처럼 행동하는 불쌍한 사람들. 일찍이 불가에서는 『空手來 空手去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을 인간들이 새겨듣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가이드는 또한 『라이따이한』의 설움을 이야기 했다. 가이드는 또한 일본에서 식당을 하는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도 했다. 『사천만 원짜리 차용증서』를 주기 위해 급하게 일본으로 불렀고, 봉급날은 열 번도 넘게 전화를 하여 돈을 받더라는 이야기. 내 친 어머니가 맞는가를 몇 번이고 생각하게 했다는 그 이야기. 빚을 모두 갚은 날 어머니가 돌려주신 적금통장을 보면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는 가이드가 더 장하게 보였다. 언제나 훌륭한 어머니에게는 훌륭한 아들이 있게 마련이라는 말을 생각게 했다.
한국의 안전모 회사에서 베트남 국회에 로비를 했단다. 베트남 사람들이 모두 안전모를 착용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국회에 상정된 법안이 부결되었다고 한다. 하노이 시내에서는 안전모를 착용하는 것이 사고율을 높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전모가 오히려 시야를 가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 정부에서는 시내에서는 안전모 착용을 금하고 시외에서는 안전모 착용을 권장한다고 했다니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생활력이 강한 베트남 여자들! 그래서인가 넓은 들판에는 남자보다 여자들이 훨씬 많았다. 그런 베트남 여자들이 무능한 남편은 용서해도 바람피우는 남편은 용서치 않는다니 사람 사는 곳의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같은가 보다.
다시 「99 휴게소」에 도착했다. 10시 50분이었다. 커피, 노니주스, 연화차, 오디차를 한 잔씩 얻어 마셨다. 정말로 좋은 세상이다.
하노이 시내에 들어섰다. 넘치는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들과 자동차가 엉키고 설켜서 돌아가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탄 베트남 여자들은 모두가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얼굴을 그을릴까봐 그런가보다는 생각을 했는데 매연 때문이라고 했다. 이곳의 오토바이는 스즈끼와 혼다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고급은 몇 천 만원이나 한다니 자동차 탔다고 폼 잡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시내에서 시클로의 곡예는 아찔아찔 바로 그것이었다.
(시내 길거리에는 점쟁이들이 많다)
우리 일행은 시클로를 타고 하노이 시장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13시 05분이었다. 시클로를 타고 내가 맨 앞에 섰다.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렇게 곡예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나보다. 서민들의 시장은 생활 그 자체였다. 길가에 늘어 선 전깃줄, 전화선, 인터넷 선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거미줄이 아니었다. 무질서의 극치였다. 3층짜리 건물 앞에는 뭔가 뭔지를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용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베트남 정부의 경제고문으로 활동한다는 김 우 중 회장이 세운 대우호텔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이 어려울 때 이곳에 투자하기를 모두가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김우중 회장은 투자를 시작했고, 베트남 경제가 일어서게 도왔다고 한다. 그 점을 베트남 사람들은 지금도 고마워하고 잊지 않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과연 신의란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하노이 시장의 잡화상) (오토바이와 시클로의 조화)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사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면대상으로 거론 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업인들의 고충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저들이 돈 벌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되기도 어려울 것이고, 저들이 돈 벌지 않으면 국민들이 살아 갈 수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시클로를 탄 것은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언제 찍었는지 사진을 들고 서서 주인을 찾고 있었다. 살아가는 방법이 가지가지라는 것도 새삼스럽게 느껴졌고, 새로운 모습으로 깨닫게 되었다.
라텍스(Ratex)판매장으로 가는 하노이 시내 중심가에는 ‘되돌려준 칼의 호수’ 로 더 많이 알려진 ‘호안 키엠 호수’가 있다. 호수 북쪽으로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아름다운 프랑스 건물들이 자리한 외교관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호수를 끼고 나있는 양쪽 길에는 오토바이와 시클러와 자전거가 붐비고, 하노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15세기 중국의 명군이 침입했을 때 Le Thai To 왕은 호수의 거북이로부터 받은 신검으로 침략자를 물리친 후 다시 거북이에게 돌려주었다는 전설(還劍)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고무제품의 우수성과 베트남 고무의 특수성을 이야기 했다. 그렇게 좋다는 걸 모두가 부러워하기만 하였다. 베개용과 침대용이 주종을 이루는데 가격 또한 예사롭지를 않았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말이 실감 났다. 그래서 우리는 늘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고 살라지 않았는가. 우리 일행이『하노이 일번지』한식당에 도착한 것은 15시 정각이었다. 돼지고기 볶음에 상추쌈이었다. 역시 된장도 고추장도 풋고추도 있었다. 음식 때문에 배가 고플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 문묘문 - 우리나라의 성균관과 같다 )
15시 42분에 식당을 출발하여 공자 문묘(文廟 Van Mieu)로 향하였다. 1070년 공자를 모시기 위해 건립된 역사적인 건물로 베트남의 국자감이기도하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은 지금도 유교 사상이 우리나라 못잖다고 한다. 그래서 국제결혼을 하려는 사람들이 베트남 여자들을 선호하는 이유가 순종하고 섬기는 정신이 강하기 때문이란다. 베트남 최초의 대학이 문을 연 곳이기도 하며 베트남 학문의 전당이라고 한다. 자식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부모들의 마음이 비석을 닳게 할 정도였으니 과히 짐작할 만 하였다. 문묘는 타원형의 기와로 만든 지붕이 아주 멋있고 벽이 없이 탁 트인 건물과 넓은 경내는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전통 베트남 식 건물로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 되었으며 경내에는 1484~1787년간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새긴 82개의 진사제명비가 서 있다.
(82개의 진사 제명비)
(공자 문묘 정면- 이 문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속세 온갖 때를 씻어야 한다)
(합격을 기원하느라 얼마나 만졌는지 거북의 머리가 반질반질하다)
16시 34분에 공자 문묘에서 호치민 묘소(Ho Chi Min's Mausoleum) 로 출발 하였다. 호치민 사망(1969년) 후 1975년 9월 2일에 완공된 석재 묘소로 건물 내부에 호치민 주석의 시신이 유리관 속에 안치되어 있다고 했다. 호치민은 생전에 화장을 원했으나, 레닌, 스탈린의 예를 쫓아 베트남 국민의 단결을 표상하기 위해 묘소를 건물로 지었다고 했다. 묘소 뒤편에 호치민 생존 당시 거소 및 사무실용 목조건물이 보존되어 있고, 호치민 박물관이 있다.
(베트남 민족의 영웅 호 치 민 묘소)
묘소 전면에는 바딩(Ba Dinh)광장이 있어 국가 주요행사 장소로 쓰인다고 했다. 호치민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라고 해야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사람이 한 일은 그가 죽어서야 알게 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호치민 주석의 검소한 생활을 알게 하는 고가)
호치민 묘소에서 가까이에 있는 베트남 최초의 목조건물이며, 연꽃문양의 한기둥 사원인 일주사를 둘러보았다. 인간의 힘은 참으로 위대했고, 인간은 생각한 모든 것을 현실로 펼치고 있음을 보았다. 17시 25분이었다.
( 못꽃 사원인 일주사 )
하노이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18시 30분이었다. Noi Bai 공항이라 불리는 하노이 국제공항은 관광객들로 복잡했다. 역시 배 이사 혼자서 비행기표를 받고, 화물을 보내고, 출국 절차를 밟도록 애쓰고 있었다. U4232편 베트남 항공기, 19시 20분 하노이발 씨앰립착 21시 20분. 좌석 번호 14B였다.
(하노이 국제공항 ★ Noi Bai 공항 내부 전경)
탑승시간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이곳도 중국과 같은가 보다는 생각을 했다. 19시 40분경에 버스를 타고 가서 탑승을 하고, 21시 45분에 씨엠립 공항에 도착하였다. 늦어도 늦었다는 안내 방송도 없었고, 기내 방송은 생각도 못했다. 200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이 비행기는 좌석이 없어서 손님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장사가 잘 되면 손님도 손님으로 보이지 않고 돈으로만 보인다는 그 누구의 말이 생각났다. 오랜지 주스를 한 잔 먹은 기억이 나고, 더덜컹 소리를 들으며 착륙이 되었음을 알았다. 출국 심사를 끝내고 비행장을 나와서 버스에 오르니 22시 20분이었다.
가이드 이동민. 미혼. 캄보디아 생활 3년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첫째, 식수를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호텔에서 주는 물과 가이드가 주는 물외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둘째, 감기를 조심하라고 했다.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서 감기가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무척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도마뱀을 보고 놀라지 말라고 했다. 이곳에는 호텔 벽에도 도마뱀이 많으니 그러려니 하라고 했다. 열대지방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었다. 22시 35분에 ‘평양랭면’이라는 간판이 있는 식당으로 갔다.
(북한 처녀들의 무용 장면이다. 이들은 3개월에 한 번씩 교체된다고 했다)
북한에서 직영하는 식당이라고 했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으므로 좌석에 앉기만 하면 되었다. 붉은 색 원피스 차림의 20세 미만으로 보이는 처녀들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 저 나이에야 그냥 있어도 이쁘다 할 것인데 치장을 했으니 더 이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생채, 김치, 고등어 튀김. 고추, 콩나물 무침, 묵 등의 전통적인 우리 음식이 나왔다. 우리 입맛에도 맞았다. 시장하던 터라 나오는 데로 먹어 치웠다. 다음에 냉면이 나왔다. 메밀가루가 아니고, 감자가루가 들어가서 좀 질기다는 느낌을 받았다. 맛이 있었다. 화장실을 갔더니 소변기 주위에 물이 가득했다. 계산하는 아가씨한테 말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조금 있으니 공연이 시작되었다. 〈반갑습니다〉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하여 무용과 전통음악이 이어졌다. 서빙을 하다가도 자기 순서가 되면 금방 달려가 웃음 짓는 저들을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금방 저렇게 표정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평양 인민 궁전 대학습당인가에서 유치원 아이들의 그 무서운 꾸밈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쩐지 유쾌하기 보다는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한 웃음과 한결같은 표정관리가 이채롭다)
호텔에 도착하니 23시 45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정이 아닌가. 방 배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식당에서 제공하는 시원한 주스를 한 잔씩 마셨다. 우유가 들어 있는 과일주스였다. 403호실을 배정 받았다. 짐을 풀려고 하는데 배 이사가 왔다. 방을 바꾸자고 했다. 혼자서는 너무 방이 크다고 했다. 412호실. 한참을 걸어야 하는 가장 끝 방이었다. 이곳에서 이틀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정이 솟았다.
방과 방사이 전화 거는 방법 - 8+방번호, 모닝콜 시간 - 06시부터, 아침 식사 시간 - 06시부터 1층 로비, 가이드 이 동 민 012-428- 538, 출발 시간 - 07시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