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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가의 사람들
-모든 생몰년월일은 음력 기준이며, 단기 4278년(1945년) 이후 출생자는 양력을 병기했습니다.
◇ 백익 伯翼
字大號官中郞將右僕射本中原浙江省蘇洲龍興府人
자는"대호", 벼슬은 "중랑장우복야"이시고, 본래 중국 중원 절강성 소주 용흥부 분이시다.
◇ 보고 保皐
字正集少字弓福 唐祖右丞相來東國淸海鎭大使
(?-846) 자는 "정집", 어렸을 때 자는 "궁복"이시다. 당나라의 "우승상"을 지낸 바 있고, "청해진대사"를 지내시었다.
◇ 해 [籤][앞의 첨자와 모양이 비슷한 글자임]
字孟仲官至左丞相
자는 "맹중", 벼슬은 "좌승상"에 이르시었다.
◇ 우 羽
字春夏復入唐官大元帥仁臣相公
자는 "춘하", 다시 당에 들어가 벼슬이 "대원수인신상공"에 이르시었다.
◇ 원 源
官至大司馬大將軍 邊亂負其五歲子諱吉 浮東海泊于朝鮮江原道江陵
벼슬이 "대사마대장군"에 이르시었다. 변방에 난리가 나서 다섯살난 아들 "길"을 데리고 동쪽바다를 항해하여 조선의 강원도 강릉에 정박하시었다.
◇ 길 吉
改諱貞弼字寧父號圃蔭中國蘇州龍興府人也生五歲隨父避亂寓東十年返華登第官吏部尙書爲閣老金南錫所誣()來東國居嶺南仁同與金宣平權幸攝麗太祖統三國以功爲大相晩年乞骸退去安東卒與權金二公竝享于古昌廟
이름을 정필로 바꾸었으며, 자는 영부, 호는 포음으로 중죽 소주 용흥부 분이라. 5세에 부친으로 따라 난을 피해 우리 나라에서 10년을 머무르고 중국으로 돌아가 벼슬이 이부상서에 이르렀다. 소인배 김남석이 모함하여 우리 나라로 돌아와 영남 인동에 정착하셨다. 김선평, 권행과 함께 고려 태조를 도와 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대상이 되시었다.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에서 생을 마치셨다. 권, 김 2공과 함께 고창묘에 배향되시었다.
[異本]改諱貞弼東國永居故爲始祖太師公貞弼 禧宗文德十三年生 復入唐力學登第八山講學第子數千人天子禮招甚動不得已起官至吏部尙書
이름을 "정필"로 바꾸고, 우리 나라에 정착하시니, 이 분을 "시조"로 하며 이분이 바로 "태사공"이시다. 四十八君의 각 지파는 모두 太師公을 始祖로 하며 관이 다름은 조선시대까지도 통일된 족보가 없어, 중조의 군호나 거사의 지명 등으로 관향을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씨족이 나뉜 것이 아니라, 본관이 다를 뿐이다. 희종 문덕 13년에 태어나시어,다시 당에 들어가 학문에 힘쓰시니 "팔산강학"에 오르시었고, 제자가 수천명이었는데, 천자께서 예를 갖추어 부르시니 벼슬이 이부상서에까지 오르시었다. [벼슬을 지내던 당시 세상사람들이 당세의 공자라 칭송하였는데, 이를 시기한 小人 金南錫이 모함하는 바 있어 다시 東國으로 돌아옴] 安東張氏始祖 忠獻公 안동장씨의 시조이신 "충헌공"이시다. 고려태조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때, 古昌郡에서 金宣平(안동김씨 시조) 權幸(안동권씨 시조)등과 전공을 세워 三韓壁上功 三重大匡 太師의 작위를 받고, 古昌君으로 봉해지고, 安東大都護府의 벼슬을 하사받고 忠獻公이라는 시호를 받음. 權幸은 원래 金씨였다고 전하는데 고창(지금의 안동)의 수령으로 있던 중, 위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三韓壁上功臣으로 되고 왕건으로부터 權이라는 성을 받게 되었다. 太師 忠獻公께서는 고려 5代 景宗 3년에 돌아가시어 묘는 安東 西門밖 天燈山에 모시었다.
보천 寶千
字文淑後梁 高麗太祖庚寅十一月十三日生官至吏部尙書大司馬大將軍左僕射
자는 문숙, 후에 량이라 하시었고, 고려 태조 경인년 11월 13일생이시다. 벼슬이 "이부상서 대사마 대장군좌복야"에 이르셨다.
◈ 광평시랑공 유 廣評侍郞公 儒
新羅末生於瀛洲尙質縣新羅之衰避兵吳越依錢氏高麗太祖統三乃東還光宗以解華語累授客省每中國使至必使張某[手賓]按之官至廣評省侍郞
공의 휘는 유(儒)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영주 상질현에서 신라말에 태어나 고려초에 광평시랑을 역임하였는데, 고려사를 살펴보면 공이 일찍 병란을 피하여 중국오월로 들어가 중국어를 익히고 고국에 돌아온 후 고려 광종조에 출사했다. 중국어에 능통하므로 여러 차례에 걸쳐 객성(客省)을 제수하고 언제나 중국에서 사신이 들어오면 반드시 공으로 하여금 영접하게 하였다.
◈ 충숙공 연우 忠肅公 延祐
공의 휘는 연우로 시랑공의 맏아들이다. 상질현(지금의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서 태어나 고려 성종조에 벼슬에 나가 호부상서(戶部尙書)로서 현종 6년(1015년) 11월에 세상을 마치시니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와 충숙의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와 동국통감에 따르면 고려 현종 원년에 부통사로서 30만 군대를 이끌고 통주에 진을 쳐 거란족을 방어하였다. 신해년에 거란이 경성을 함락했을 때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는데, 하공진(河拱辰)이 붙잡혔다는 풍문을 듣고 신하들이 모두 달아났으나 채충순(蔡忠順)·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 등과 더불어 끝까지 왕을 떠나지 않고 호종하여, 그해 7월 중추사(中樞使)를 거쳐 8월에는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었다.
1014년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와 더불어 거란침입 이후 군액(軍額)의 증가로 백관의 녹봉이 부족해지므로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할 것을 건의하였다. 갑인년 상장군 최질과 김훈 등의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유배되었으나, 다음 해인 을묘년 3월 왕이 서경의 장락궁에서 훈신들과 연회를 개최하여 김훈, 최질 등을 주살하고, 공을 호부상서로 삼았다.
고려사악지에는 "한송의 밤하늘에 달빛은 밝고 경포의 가을 바다 물결은 잔잔한데 슬피 울며 나는 갈매기 한 쌍이여.(月白寒松夜 哀鳴來又去 波安鏡浦秋 有信一沙鷗)"라는 공의 "한송정가(寒松亭歌)"가 나오는데, 이는 공이 강릉현감으로 좌천되었을 때 경포대를 짓고 이 시를 지어 걸었다고 한다.
<흥성장씨 족보>
◈ 중랑장 영 英
공의 휘는 영(英)이니,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진헌사(進獻使)로서 원나라에 들어가 모든 주선을 예에 맞추어 행하니 황제가 아껴 특별히 병부상서의 직과 천호를 제수하고 아울러 말 40필과 소 25두, 수레 5량, 활 2부를 하사하였으며 귀국후에는 관이 3품에 이르렀다.
"동국에 솟아있는 저 높은 누대여, 누 앞에는 한강물이 잔잔히 흐르네. 빛은 푸른 까치배에 흔들리고 그림자는 흰갈매기섬에 떨어졌네. 하늘은 저멀리 지평선에 닿았고 낮은 저 하늘엔 땅이 둥실 떠오르는 듯 하네. 창문에 스며드는 맑은 바람 밝은 달 풍경에 도취되어 오래도록 머물렀네.(東國有高樓 樓前漢水流 光搖靑雀舫 影落白鷗洲 望遠天疑盡 入窓風月好 下榻重掩留)"라는 시가 전해진다.
<흥성장씨 족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용안편(龍安編)에 흥성장씨(興城張氏) 중시조(中始祖)인 영(英)에 대한 단편적(斷片的)인 기록(記錄)이 있다.
<史料 1> 以進獻使入元 周旋中禮 皇帝褒賞 特除 百戶俄陞千戶 給馬四十匹 牛二十五頭 車五兩 弓矢二部命還國 官至 三品
< 해략> 진헌사(進獻使)로 원(元)나라에 들어가 모든 일을 처리함에 예법(禮法)에 어긋나지 않아 황제(皇帝)가 특별히 백호(百戶)에 제수(除授)하고, 곧 천호(千戶)에 승급시켰다. 말(馬) 40 마리와 소(牛) 25 마리와 수레(車) 5 량(兩), 궁시(弓矢) 2부(二部)를 하였다. 고국(故國)에 돌아온 후 벼슬이 3품(三品)에 이르렀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중시조(中始祖) 영(英)이 고려(高麗) 후기(後期)에 외교관(外交官)으로 중국(中國)의 원(元)나라에 갔다는 것과 그의 관계(官階)가 고위(高位)에 있었다는 것, 또한 중국(中國)의 황제(皇帝)로부터 돈독(敦篤)한 신임(信任)을 받고 백호(百戶), 천호(千戶)의 관직(官職)에 제수(除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말, 소, 수레 등의 하사품(下賜品)을 받았다는 것은 외교업무(外交業務)에 유능(有能)하고 예법(禮法)에 밝은 인물임을 추측케 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중시조(中始祖) 영(英)이 1291년 경 출생했다면 그 시기는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17 년에 해당된다. 당시 고려(高麗) 왕조는 몽고(蒙古)의 속국(屬國)으로 자주성(自主性)이 상실(喪失)되던 때이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충선왕조의 문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편집자 주>
진헌사(進獻使)는 원(元)이 강요(强要)한 공물(貢物)을 가지고 중국(中國)에 가는 사신(使臣)인데, 황제국(皇帝國)의 까다로운 절차(節次)와 위압적(威壓的)인 처사(處事)에 유연(柔軟)하고 탄력적인 태도로 이를 극복(克服)하고 본국의 국익을 위해 능동적인 외교 정책을 수행하는 중차대(重且大)한 임무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영(英)은 진헌사(進獻使)로 파견되어 국익(國益)에 손상(損傷)이 가지 않으면서도 또한 원(元)의 질책(叱責)과 압력(壓力)의 빌미가 되지 않도록 의례(儀禮)나 절차(節次)에 어긋남이 없이 현명(賢明)하고 능란(能爛)하게 대처(對處)하였던 것이다. 원(元)의 중압(重壓)된 분위기(雰圍氣)에서도 의연(毅然)하고 무게가 있는 인품(人稟)과 사리(事理)가 정연(整然)하고 조리(條理)있는 언행(言行)은 황제(皇帝)와 조정대신(朝廷大臣)들 사이에 깊은 인상(印象)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돈독(敦篤)한 신임(信任)까지 얻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상국(上國)에 공물(貢物)을 헌납(獻納)하는 속국(屬國)의 사신(使臣)임에도 불구하고 파격적(破格的)인 예우(禮遇)로써 백호(百戶)의 관직(官職)에 제수(除授)되고 곧 천호(千戶)로 승급(陞級)시켰다는 것은 영(英)의 신임도(信任度)와 능력(能力)을 짐작할 수 있다.
몽고(蒙古) 제일주의(第一主義)를 표방한 그들이 고위관직(高位官職)을 독점한 상태에서 법적(法的)인 한계선(限界線)을 넘어 원(元)나라의 현직 장교로 발탁(拔擢)되었다는 것은 영(英)의 능력(能力)과 인품(人稟)을 인정(認定)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英)이 진헌사(進獻使)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시기(時期)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원(元)의 공주(公主)를 배행(陪行)하고 귀국(歸國)했던 단서(端緖)로 추적(追跡)해 볼 수 있다.
영(英)은 귀국(歸國) 후에 3품의 관직(官職)을 지냈다고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그 후의 행적(行蹟)은 자세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단지 용안현(龍安縣)에 은둔(隱遁)하여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학문(學問)에 전념하면서 일생(一生)을 보냈다는 기록(記錄)이 있을 뿐이다.
뒷날 그의 손자(孫子) 원적(原績)을 찾아 간 원(元)의 사신(使臣)이 세속(世俗)의 모든 욕망(慾望)을 버리고 자연(自然) 속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한 고결(高潔)한 선비를 찬양했다는 시(詩)를 통해 용안현(龍安縣) 무학산(舞鶴山) 북록(北麓) 와룡동(臥龍洞)에서 3 대(代)까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흥성장씨 홈페이지>
◈ 헌 軒
문과에 급제하여 중훈대부로 영광, 낙안군수를 지냈다.
<흥성장씨 족보>
흥성장씨(興城張氏) 족보(族譜)에 중시조(中始祖) 英-(子)得寶-(孫)軒-(曾孫)合 순으로 가계 (家系)가 기록(記錄)되어 있다.
영(英)의 손자인 헌(軒)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영광군(靈光郡) 지사(知事)를 역임하였다.
◎ 중훈대부(中訓大夫)로 낙안군(樂安郡) 지사(知事) 또는 영광군(靈光 郡) 지사(知事)를 역임하였으며 처음에는 남원(南原)에 살다가 말년 (末年)에는 흥덕(興德)에서 살았다.
◎ 영광(靈光) 지사(知事)는 흥덕(興德)의 동문(東門) 밖 승상동(丞相洞)에서 살았다.
< 주요 행적 >
⊙ 흥덕(興德)의 동문(東門) 밖 승상동(丞相洞) 거주
⊙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입으로 흥덕 지역 불안 증대
⊙ 사병(私兵)을 육성(育成)하여 향토 방위 계획 수립
⊙ 1378년 (禑王 4 년) 왜구(倭寇) 대거 침입
⊙ 이성계(李成桂)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가 되어 토벌 작전 수행
⊙ 왜구(倭寇)의 대부대(大部隊) 운봉(雲峰) 집결(集結)
⊙ 장헌(張軒)의 흥덕(興德) 민병(民兵) 출동, 관군과 합세
⊙ 황산(荒山) 대첩 , 적장 아기발도(阿其拔都) 사살
⊙ 이성계(李成桂)의 돈독한 신임 획득
⊙ 위화도(威化島) 회군, 이성계(李成桂) 정권 장악
⊙ 장헌, 영광(靈光)과 낙안(樂安) 군사에 제수됨- 왜구에 대처하는 조정의 조치
<참고> 이후의 헌(張)의 행적(行績)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남원시(南原市) 송동면(松洞面) 세전 리(細田里) 뒷산에는 큰 묘(墓)가 있다. 예로부터 주민들은 이를 장장군(張將軍) 묘(墓)라 부 르고 있는데 이는 헌(軒)의 묘(墓)로 추측할 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세전(細田)의 명칭을 들 수 있다.
장씨족보(張氏族譜)에 "中訓大夫 知樂安郡事 或知靈光郡事 始居南原 末年 還居興德" 이란 기록은 이를 충분히 증명하는 단서(端緖)가 되며 사성공(司成公) 응량(應梁)의 성장지(成長 地)와 그의 손자(孫子) 사촌(沙村) 경세(經世)의 출생(出生) 또한 세전(細田)으로 알려져 있다.
세전의 명칭의 변화를 살펴보면 이 마을을 "장부자집"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이는 장응량(張 應梁), 장건(張健), 장경세(張經世)의 3대가 연속 문과에 급제(文科及第)하였고 또한 중앙(中 央) 관료(官僚)로의 봉직(奉職)하면서 당당한 위세를 떨쳤던 명문(名門) 부호(富豪)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인근의 농토는 모두 "장씨네 밭" → "장밭(張田)"→ "잔밭" → "세전(細田)"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향토사가(鄕土史家)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장씨촌(張氏村) 뒷산에 "장장군(張將軍) 묘(墓)"라는 분묘(墳墓)는 영광군사(靈光郡 事) 헌(軒)의 묘(墓)임을 시사(示唆)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흥성장씨 홈페이지>
◈ 선공감정공 합 繕工監正公 合
공의 휘는 합이요, 호는 초산(楚山)이니 자질이 영매하고 재기가 뛰어났다. 가친이 영광군수로 계실 때 태종과 친교가 있었는데, 태종이 즉위하자 은총이 심히 두터워 여러 번 출사하도록 불렀으나 벼슬을 마다하므로 특별히 선공감정의 직을 제수하였다. 공은 벼슬에 뜻이 업쇼어 산수와 풍월을 즐기며 경학과 예의를 닦았다. 태종과 함께 즐기며 술을 마시다가 과음으로 세상을 떠나자, 태종이 애통해 하며 예장을 명했다.
<흥성장씨 족보>
⊙ 호(號) 초곡(楚谷), 부친 영광군사(靈光郡事) 헌(軒)
⊙ 성장지(成長地) - 흥덕(興德)의 동문(東門) 밖 승상동(丞相洞)
⊙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과 친교(親交), 관포지교 행함
⊙ 태종 왕위(王位) 등극, 선공감정(繕工監正) 제수
⊙ 관직 사양, 경학(經學) 예학(禮學) 심취
⊙ 심온 사건에 연루
⊙ 세종 즉위, 특명을 받고 평안도 시찰
⊙ 태종의 초치로 궁궐 연회 참석
⊙ 별세 후 남원 대곡방 신원산에 예장
⊙ 배위(配位)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딸
⊙ 4남(男) 3녀(女)를 출생 (出生), 장자 (長子) 윤승(允升), 차자(次子) 윤신(允愼), 3남(男) 윤문(允文), 장녀(長女) 김하(金河)처, 차녀(次女) 박정(朴禎) 처, 3녀(女) 이건문(李乾文) 처, 4남(男) 윤무(允武)
<흥성장씨 홈페이지>
◈ 감찰공 윤승 監察公 允升
⊙ 조(祖) 영광군(靈光郡) 지사(知事) 헌(軒)
⊙ 부(父) 선공감정(繕工監正) 합(合)
⊙ 출생 - 조선(朝鮮) 건국(建國) 직후(1395년)로 추정
⊙ 성품(性稟) - 강직(剛直), 영오(英悟),
⊙ 품성 - 어려서부터 학문(學問), 문장(文章)이 남달리 뛰어남
⊙ 문과(文科) 등제 후 조산대부(朝散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 세조 찬탈에 분개, 사직 후 흥덕(興德) 은거
⊙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 수차 천거, 사양 불취
⊙ 두문불출 경사(經史) 탐독, 격물치지(致知) 학풍 실천
⊙ 배위(配位) 하빈 이씨(河濱李氏)
⊙ 4남 출생 - 장자(長子) 돈암공(遯菴公) 조평(肇平), 차자 중직공(中直公), 치평(致平), 3 자(子) 직장공(直長公) 계평(屆平), 계자(季子) 부사직공 (副司直公) 극평(克平).
⊙ 묘소 - 남원(南原) 대곡방(大谷坊) 신원동(新院洞), 실전
⊙ 거창군(居昌郡) 주상면(主尙面) 희여치(羲餘峙) 지장곡(地 藏谷) 배위 묘소에 초혼 합장
<흥성장씨 홈페이지>
◈ 기장현감공 윤신 機張縣監公 允愼
⊙ 호(號) 반구정(伴鳩亭), 부 감정공(監正公) 합(合)
⊙ 출생 1595년 경으로 추정
⊙ 문종(文宗) 2년 출사(出仕) 사정(司正), 호군(護軍) 역임
⊙ 세조(世祖)의 논공 행상 때 3 등에 책록
⊙ 남해현감(南海縣監), 기장현감(機張縣監) 봉직 선정(善政) 기념, 거사비 건립
⊙ 소근포(所斤浦) 첨절제사(僉節制使) 역임
⊙ 만년(晩年)에 사직 후 두포(杜浦) 반구정(伴鳩亭) 건축,
⊙ 배(配) 남원진씨(南原晉氏)
⊙ 1 남 1 녀 출생 - 외아들 만호(萬戶) 경원(敬原), 여(女) 고희(高熹) 처
⊙ 묘소 -남원시(南原市) 수지면(水旨面) 남창(南蒼) 솔산(率山)
<흥성장씨 홈페이지>
◈ 참군공 윤문 參軍公 允文
⊙ 부(父) 선공감정(繕工監正) 합(合).
⊙ 장형 윤승(允升) 차형 윤신(允愼), 아우 윤무(允武)
⊙ 1409년 출생으로 추정.
⊙ 세조(世祖) 원년(1455년) 참군(參軍) 봉직
⊙ 세조(世祖) 원년(1455년) 12월 27일 3등 공신 책록
⊙ 세조 2년 사륙신 사건 발생, 아우 윤무 연루
⊙ 조카 극평과 함께 남하하여 은둔
⊙ 처가 거주지인 나주로 이거
⊙ 조카 극평과 처질녀와 혼인 주선
⊙ 나주 문평 등에 참군공 후손 거주
<흥성장씨 홈페이지>
◈ 사과공 윤무 司果公 允武
⊙ 감정공 합(合)의 7남매 중 막내로 1410 년(추정) 경 출생
⊙ 세조(世祖) 원년(1455년), 무과(武科) 급제(及第)
⊙ 충순위(忠順衛) 부사과(副司果) 봉직
⊙ 궁술(弓術)과 용맹(勇猛)이 뛰어났으며 경회루(慶會樓) 활쏘기 대회에서 모두 관혁(貫革)을 명중시킴
⊙ 유응부(兪應孚)의 신임(信任) 획득
⊙ 1456년(世祖 2년) 사육신(死六臣)의 단종 복위거사(復位擧事) 발생
⊙ 유응부(兪應孚) 피포로 신변 위험 예감, 청안(淸安)으로 잠적(潛跡)
<흥성장씨 홈페이지>
◇ 장윤화 張允和
?∼1422(세종 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흥덕(興德). 1388년(우왕 14) 별장으로 있으면서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지공거를 맡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감승(監丞)으로 있으면서 순군(巡軍)에 갇혔다가 풀려나왔으나 소유하고 있던 전민(田民)을 속공(屬公)당하였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등용되어 1413년(태종 13)에는 강원도·영길도(永吉道)의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민간에 쌓인 폐단을 교정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이어 1418년 사헌부집의로 있으면서 잘못이 없는 안성군수 권상온(權尙溫)을 탄핵하고 취조한 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파직당하고 의금부에 하옥되어 곤장 60대를 맞고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직첩이 환급되었으며,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의금부진무로 있으면서 일을 민첩하게 잘 처리하여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또한, 친척인 당시의 권세가 박은(朴)의 여러 차례에 걸친 천거에 힘입어 판전사(判典祀)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 옮겼으며, 상왕 태종이 관장하고 있던 병조의 지병조사(知兵曹事)를 겸하여 세력을 떨쳤다. 곧 이어 병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이때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것을 기화로 상왕의 교지를 누설시킨 일이 있었는데, 당연히 사형을 당할 것이나 상왕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다.
1419년(세종 1) 이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권세를 믿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공무를 빙자하여 사복을 채웠으나 권세가 무서워 아무도 감히 탄핵하지 못하였다.
1421년 전라도수군처치사 박초(朴礎)와 영암군수 박희중(朴熙中)에 의하여 50여 조목에 이르는 자신의 비리가 폭로되자 박은 등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치며 구명운동을 하는 한편,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감영의 창고를 불태워버리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파직당하고 1422년 부여에 귀양가 있던 중 죽었다.
태종의 근신으로 총애를 받았으나 비루하고 탐학하였으며 자신보다 뛰어난 자를 미워하는 등 시기심이 강하였다.
<장씨(張氏)의 유래와 본관-한국의 역대인물-디지털한국학>
◈ 돈암공 조평 遯菴公 肇平 (1429년 ∼ 1501년)
⊙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윤승(允升)의 장자
⊙ 자(字) 자형(子衡), 호(號) 돈암(遯菴)
⊙ 세종(世宗) 신미(辛未) 음서(蔭敍) 충순위(忠順衛)
⊙ 단종(端宗, 1453년) 때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
⊙ 세조 왕위를 찬탈, 순창 추산(追山) 은거
⊙ 십로계 조직 - 귀래정 신말주(申末舟), 돈세 조윤옥(趙閏屋), 전부장(前部將) 이윤철(李允哲), 현감(縣監) 김박(金博), 오유경(吳惟敬), 한승유(韓承愈), 안정(安正), 설산옥(薛山玉), 설존의(薛存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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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직공 치평 中直公 致平
⊙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윤승(允升)의 제 2자
⊙ 세종(世宗) 13년(1431년, 추정) 출생
⊙ 중직대부(中直大夫) 봉상시(奉常寺) 부정(副正)
⊙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윤승(允升)의 제 2자
⊙ 사륙신 사건 발생, 흥덕 은둔(隱遁), 근거 : 치평, 사위 김걸, 딸 묘소 흥덕 소재
⊙ 단종 피살 후 3 년 상복 예(禮)를 다 함
⊙ 신귀래(申歸來) 말주(末舟) - 남주(南州:湖南)의 절신이라 찬사
⊙ 현 묘소 - 전남 나주시 동강면 대전리 월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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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공 계평 直長公 屆平
⊙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윤승(允升)의 제 3 자(子)
⊙ 1441년 출생 추정
⊙ 단종(端宗) 복위(復位) 거사 실패(失敗) 후 남하 남원 은둔
⊙ 모친 하빈이씨(河濱李氏)와 거창으로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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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직공 극평 司直公 克平 (1443년 ∼ 1515년)
⊙ 자(字) 사균(士均)
⊙ 감찰공(監察公) 윤승(允升)의 제 4자
⊙ 1443년(世宗 25年) 출생
⊙ 의리(義理)와 명분(名分) 중시하는 학풍
⊙ 화려(華麗)한 문체(文體) 배격하는 사장(詞章)
⊙ 사륙신 사건 후 숙부(叔父) 윤문(允文)와 동행 남원(南原) 은둔
⊙ 성종(成宗) 때 나주(羅州) 초동(草洞)으로 이거(移居)
⊙ 함평이씨(咸平李氏)와 혼인(1480년 경 추정)
⊙ 정여창(鄭汝昌)과 돈독한 교유(交遊)
⊙ 조정(朝廷)의 친명(親命)으로 충무위(忠武衛) 부사직(副司直) 봉직
⊙ 연산군(燕山君) 10 년 갑자사화(甲子士禍) 후 귀향, 후진 교육
⊙ 1515 년(中宗 10년) 향년(享年) 73 세(歲)로 별세(別世)
⊙ 묘소 - 나주시(羅州市) 다시면(多侍面) 분토동(粉土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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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호공 경원 萬戶公 敬原 (世宗朝∼成宗朝)
⊙ 품성 - 의기(義氣)가 높고 지조(志操)가 강한 무장(武將)
⊙ 1452년 경(文宗 2년) 관직(官職)에 출사(出仕)
⊙ 1455년 2 월, 3등 공신에 책록
⊙ 성종(成宗, 1485년) 7월, 어란포(於蘭浦) 만호(萬戶)
⊙ 이 후 마도 만호(馬島萬戶) 전임
⊙ 만년, 남해 현감, 기장 현감 역임
⊙ 사직 후 반구정 구축, 음율과 음시로 만년을 보냄
⊙ 배위(配位) 진양하씨(晋陽河氏)
⊙ 묘(墓) 쌍분(雙墳), 전북 순창군 동계면 수정리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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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은공 현 癡隱公 俔 (1501∼1573)
⊙ 자(字) 현지(俔之), 호(號) 치은(癡隱)
⊙ 연산군(燕山君) 7 년, 나주(羅州) 초동(草洞)에서 출생
⊙ 품성 - 효성(孝誠) 지극,
⊙ 김건(金健) 문하(門下)에서 수학
⊙ 인종(仁宗) 을사년(乙巳年, 1545) 천거로 화능참봉(和陵參奉) 제수, 불취
⊙ 1566 년 흥성장씨(興城張氏) 병인초보(丙寅草譜) 편찬
⊙ 선조(宣祖) 계유(癸酉) 7 월 1 일, 73 세로 별세(別世)
⊙ 부인(夫人) 경주최씨(慶州崔氏), 아들 : 이길(以吉), 이경(以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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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우공 이길 野憂公 以吉 (1529∼1595)
⊙ 자(字) 천응(天應), 호(號) 을계(乙溪) 또는 야우(野憂)
⊙ 부친 현(俔), 모친 경주최씨(慶州崔氏)
⊙ 1529년 1월 24일 나주(羅州) 초동(草洞) 태생.
⊙ 성품 - 천자(天資) 영민(英敏), 신동(神童) 찬사(讚辭),
⊙ 율정(栗亭) 최학령(崔鶴齡)에게 사사
⊙ 1555년(乙卯), 생원(生員) 등제(登第)
⊙ 1560년(庚申), 승사랑(承仕郞),통사랑(通仕郞) 문과(文科) 급제(及第), 이조(吏曹)봉직(奉職)
⊙ 1562년(壬戌),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부임
⊙ 1564년(甲子), 선무랑(宣務郞, 종6품) 승진,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 겸 남학훈도(南學訓導) 봉직(奉職)
⊙ 1573년(癸酉), 장성현감(長城縣監) 취임(就任)
⊙ 이해, 부친(父親, 俔) 별세(別世)
⊙ 1575년(乙亥), 평양(平壤) 서윤(庶尹) 불취(不就), 종부시(宗簿寺) 첨정(僉正)
⊙ 1576년(丙子), 익산(益山) 군수(郡守). 군민(郡民)이 선정비(善政碑) 건립(建立)
⊙ 1581년(辛巳), 이조(吏曹) 정랑(正郞)으로 전임
⊙ 1583년(癸未), 사간원(司諫院) 봉직(奉職)
⊙ 1588년(戊子), 진산(珍山) 군수(郡守)로 전임(轉任)
⊙ 1591년(辛卯),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 승급(昇級)
⊙ 1594년(甲午), 공홍도(公洪道, 당시 忠淸道) 관찰사(觀察使) 불취
⊙ 1595년(乙未), 이조참판겸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
⊙ 대박산(大朴山) 기슭에 야우정(野憂亭) 건축
⊙ 기대승(1527∼72), 변이중(1544∼1611), 윤두수(1533∼1601) 등과 교유
⊙ 1595 년 5 월 28 일 서거(逝去)
⊙ 부인(夫人) 양성이씨(陽城李氏), 재취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 3 남 2 녀 출생
⊙ 나주 보산사(寶山祠)에서 유림(儒林)들이 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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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성인, 참군 휘 현俔의 자이니 을묘년에 진사進士, 사간司諫이 되고 임진왜란에 임습정등과 모병창의하여 호남각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실지 회복의 대역을 이루다.
<장씨천년사>
◇ 송정공 이경 松亭公 以慶 (1539∼1614)
⊙ 자(字) 천휴(天休), 호(號) 송정(松亭)
⊙ 부친 현(俔), 모친 경주최씨(慶州崔氏)
⊙ 천품(天稟) - 엄격강직(嚴格剛直) 도량(度量) 웅대
⊙ 유년 작시 "용근(龍根)은 곧게 구천(九泉)으로 들어가고 철간(鐵幹)은 저멀리 높은 하늘을 바치고 있네(龍根直到九泉中 鐵幹高撑萬里空)"
⊙ 1592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 발생
⊙ 여러 선비와 규합(糾合) 의병(義兵) 조직
⊙ 도체찰사(都體察使) 이덕형(李德馨) 서찰 발송 내용 "선비는 나라를 지탱하는 원동력(原動力)이니 국가(國家)의 흥망성쇠가 그들에게 달려 있으며, 군사(軍士)란 그 정예(精銳)함이 중시(重視)되는 것이지 수효(數爻)의 적고 많음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장수(將帥) 또한 무인(武人)들만이 전임(專任)하는 자리가 아니다. 저 옛날 당(唐)나라 때에도 문관(文官)들이 장수(將帥)를 보좌(補佐)하여 혁혁(赫赫)한 전과(戰果)를 올렸고, 송(宋)나라 때에는 문신(文臣) 학자(學者)들도 병법(兵法)을 익혀 사령관(司令官)이 되어 북쪽 오랑캐의 침구를 잘 막아 냈었다. 지금과 같이 미증유(未曾有)의 국난(國難)을 당한 이때 어찌 무장(武將)에게만 적(敵)의 궤멸(潰滅)을 기대(期待)하고 있는가?"
⊙ 도원수(都元帥) 권률(權慄,1537∼99) 요청으로 의병(義兵) 인솔 순천(順天) 진군
⊙ 1598년 의병(義兵) 지휘(指揮) 왜교성 공격
⊙ 왜병(倭兵) 퇴각, 초동(草洞) 귀향
⊙ 학문(學問) 진흥(振興)하기 위해 학교(學校) 수리
⊙ 조정(朝廷)에서 목릉참봉(穆陵參奉) 제수, 불취
⊙ 1615 년(乙卯) 향년(享年) 77 세로 별세(別世)
⊙ 부인(夫人) 금성나씨(錦城羅氏)
⊙ 슬하에 2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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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성공 응량 司成公 應梁 (1495∼ 1562)
⊙ 자(字) 창수(昌秀)
⊙ 부친 석(錫), 모친 숙인(淑人) 남원양씨(南原梁氏)
⊙ 학풍 -'의(義)는 이(利)와의 조화(調和)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이다.(義利之和也). 따라서 의(義)는 모는 일의 시초(始初)요, 모든 이(利)의 근본(根本)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義者百年之始也 萬利之本也)
⊙ 1534년(中宗 29년 甲午)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 1543년 (癸卯) 3년 예조(禮曹) 좌랑(佐郞), 곧 형조(刑曹) 좌랑(佐郞)으로 전임 겨울, 형조(刑曹) 정랑(正郞)으로 승급(昇級)
⊙ 1544년 (甲辰) 여름, 함경도(咸鏡道) 도사(都事), 곧 춘추관 기주(記註)에 부임
⊙ 1445년 (乙巳) 여름, 공조(工曹) 정랑(正郞)이 됨. 국왕 인종(仁宗), 장생전(長生殿)에서 승하(昇遐),
⊙ 1446년 (丙午) 여름,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으로 제수(除授) 됨
⊙ 1447년 (丁未) 여름 영광(靈光) 군수(郡守)로 부임
⊙ 1449년 (己酉) 예조(禮曹) 정랑(正郞), 형조(刑曹) 정랑, 곧 봉상시 첨정으로 전임
⊙ 1450년 (庚戌) 봄,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로 봉직 여름, 익산(益山) 군수(郡守:종4품)로 나가 3년 봉직
⊙ 1453년 (癸丑) 6월, 은계도(銀溪道) 찰방(察訪)이 됨 9월, 장흥(長興) 부사(府使: 종3품)로 부임
⊙ 1456년 (丙辰) 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으로 다시 들어 옴 가을, 상주(尙州) 목사(牧使: 정3품)로 나가 4년 봉직
⊙ 1459년 (己未) 내섬시(內瞻寺) 첨정(僉正) 봉직 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으로 임명, 칭병(稱病) 불취(不就)
⊙ 1460년 (庚申) 7월,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에 제수됨
⊙ 1462년 (壬戌) 정월, 예빈시(禮賓寺) 정(正)이 됨 6월 23일 별세, 향년 66세, 7월 남원(南原)으로 운구(運柩) 9월 17일 풍악산(楓岳山) 을좌(乙坐) 신향원(申向原)에 장례
⊙ 배(配) 흥양송씨(興陽宋氏) 계배(繼配) 안산김씨(安山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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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공 응허 經歷公 應虛 (1498∼ 1558)
⊙ 자(字) 문수(文秀),
⊙ 부친 : 석(錫), 모친 숙인(淑人) 남원양씨(南原梁氏)
⊙ 품성 - 효성(孝誠) 봉양(奉養) 지극, 우애(友愛) 돈독, 기개(氣慨) 숭상. 의지력(意志力) 강인, 건장(健壯)한 풍모
⊙ 웅지를 펴고자 궁마(弓馬) 등 무예(武藝) 수련
⊙ 1537년(中宗 32년 丁酉) 무과(武科) 합격
⊙ 도총부(都摠府) 경력(經歷) 제수
⊙ 만경현령(萬頃縣令) 부임
⊙ 1555년(乙卯年) 달량포(達梁浦) 왜변(倭變) 발생 - 토벌작전 참가
⊙ 1558년 별세, 선산 수정리 풍악산 서향에 장례
⊙ 배위(配位) 숙인(淑人) 안동권씨(安東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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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세 張經世
1547(명종 2)∼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흥성(興城, 興德). 자는 겸선(兼善), 호는 사촌(沙村). 남원출생. 아버지는 정랑 장건(張健)이며, 어머니는 양공건(楊公健)의 딸이다. 종부(從父)인 급(伋)에게 입양되었다.
재질이 총명하여 5, 6세에 벌써 글을 해독할 줄 알았다. 주로 가학(家學)을 전해받은 그는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두루 통하고,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맥을 이었으며, 따라서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가를 이루었다.
사우관계로는 당시 덕행이나 문명으로 드날렸던 노진(盧)을 비롯하여 김복흥(金復興)·양사형(楊士衡)·최상중(崔尙重) 등을 들 수 있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9년 43세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교서관저작을 거쳐 1593년 공주제독관으로 있다가 얼마 뒤에 승문원박사로 옮겼다. 이어 공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도사로 나갔으며, 1602년에는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금구현령을 자청해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실정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이후로 벼슬을 단념하고 시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작품으로 〈정부사 征婦詞〉·〈상사곡 相思曲〉 등을 남겨 후세에 문명을 떨치기도 하였다.특히, 광해군 때 지은 〈유선사 遊仙詞〉나 이황(李滉)의 〈도산육곡 陶山六曲〉을 모방하여 국한문으로 쓴 〈강호연군가 江湖戀君歌〉는 그의 우국애군(憂國愛君)의 충정과 존주척륙(尊朱斥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1615년 69세로 죽어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사촌집》이 전한다.
<장씨(張氏)의 유래와 본관-한국의 역대인물-디지털한국학>
⊙ 호(號) 사촌(沙村), 자(字) 겸선(兼善)
⊙ 생가 조부 응량(應梁), 양가 조부 응허(應虛), 생가 부친 건(健), 양가 부친 급(伋)
⊙ 1557년 생모(生母) 양씨(楊氏) 별세(別世), 1565년 생부(生父) 별세, 1568년(戊辰年) 조모(祖母) 권씨(權氏), 1571년 양모(養母) 조씨(趙氏) 별세
⊙ 1585년 가을, 생원(生員) 합격, 1589년 태극책(太極策)으로 문과(文科) 급제(及第)
⊙ 1589년 부친 급(伋) 별세, 3년 시묘(侍墓)
⊙ 1592년 임진(壬辰) 4월, 왜란 발생 9월 29일, 공주(公州) 제독관(提督屬) 교관(敎官) 승문원(承文院) 박사, 예조(禮曹) 정랑, 전라도 도사(都事) 역임
⊙ 1594년 휴전(休戰) 성립(成立), 국왕(國王) 배알
⊙ 공주(公州) 제독관(提督官) 임명
⊙ 공조좌랑(工曹佐郞),
⊙ 백성을 안무(按撫)하고 우국(憂國) 시 남김
⊙ 정유란 발생, 모친, 장형과 동반 옥천으로 피난
⊙ 1598년, 강화(江華) 이거 우국시(憂國詩) 남김
⊙ 1589년 왜병(倭兵) 철수(撤收), 남원(南原) 귀향
⊙ 1600년(庚子)10월 27일, 무공랑(務功郞) 교서관 박사
⊙ 1601년(辛丑)1월, 선교랑(宣務郞) 성균관 전적(典籍) 7월 20일, 공조 좌랑, 8월8일, 봉훈랑 승급
⊙ 1602년(壬寅) 9월 18일, 금구(金溝) 현령
⊙ 1603년(癸卯), 사직 귀향, 봉양에 힘씀
⊙ 1607년(丁未), 순국의사 김경로(金敬老) 충절사(忠節祠) 배향 주선
⊙ 1611년(辛亥), 유선가(遊仙詞) 87 節 지음
⊙ 1612년(壬子)2월,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 12曲 지음, 11월 4일 별세
⊙ 1649년(己丑), 노봉서원 창건 배향(配享) 건의
⊙ 1786년(丙午), 사림(士林)의 합의로 주암서원(舟巖書院) 배향(配享)
<흥성장씨 홈페이지>
◇ 장경홍 張景弘
흥성인, 휘 신지信之의 자이니, 1592년(선조 25년) 임진란에 이지득李止得과 더불어 흥양포 접전에서 용전하다가 순사하다.
<장씨천년사>
◇ 장집 張緝
흥성인, 주부 휘 이문以文의 자이니, 관官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으로 1593년(선조 26년) 왜적과 싸우다가 정유년에 남원전투에서 순의하다.
<장씨천년사>
◇ 장의표 張義杓
흥성인, 1592년(선조 25년) 임란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진영에서 왜적과 정면충돌하다가 제장들과 순절하다.
<장씨천년사>
◇ 장몽세 張夢世
흥성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나라에 보답할 뜻을 세우고 분충의거奮忠義擧하여 도처에서 왜적을 격멸하여 증 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하다.
<장씨천년사>
◇ 장환 張喚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유신(幼新), 호는 용계(龍溪). 증 판서 승세(升世)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였다. 어버이가 병이 들어 위독할 때 똥 맛을 보고 경중을 짐작하였고, 임종이 가까워져서는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내어 먹이는 등 갖은 수단을 다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을 시묘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생각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거상중이었는데,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영연(靈筵)을 모셔다가 아우 희()에게 부탁하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뒤 행재소로 달려가다가 여산(礪山)에 이르러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향리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김류·신흠(申欽) 등 당시 재상들과 같이 난을 평정하는 데 충성을 다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소무공신(昭武功臣)1등과 영사공신(寧社功臣)2등에 녹훈되고 이어서 병조좌랑에 기용되었다. 그뒤 감찰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금부도사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으며, 난이 평정되자 그 공으로 남원부사가 되었다. 뒤에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남원의 절의사(節義祠)에 제향되었다.
<장씨(張氏)의 유래와 본관-한국의 역대인물-디지털한국학>
◇ 죽당공 흡 竹塘公 恰
자(字)는 면재(勉齋), 호(號)는 죽당(竹塘)으로 사촌(沙村)의 증손(曾孫)
그의 부(父)는 수작호군(壽爵護軍) 복원(復元)이며, 조(祖)는 음첨중추부사(蔭僉中樞府事) 증(曾)이다.
그는 1627년(丁卯)에 남원부(南原府) 주포방(周浦坊) 유촌(楡村)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기질(氣質)이 총명(聰明)하고 용모가 준수(俊秀)하였다고 한다. 두 아우와 함께 당촌(塘村) 황위(黃暐, 1605∼1654)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수학(修學)하였다.
특히 3 형제(兄弟)의 우애(友愛)는 매우 깊어 밤낮으로 동거(同居)하며 집안 일이 생기면 스스로 먼저 나서려 애를 쓰고, 시(詩)와 예(禮)에 대해 토론(討論)을 즐겨하며, 혹간 잘 못한 일이 있으면 서로 충고(忠告)하여 군자(君子)된 도리(道理)를 강조하였다.
또한 형제(兄弟) 중 하나가 병석(病席)에 있으면 촌보(寸步)도 병실(病室)을 떠나지 않았으며 하루 빨리 쾌유(快癒)되어 삼형제(三兄弟)가 함께 모일 수 있는 날을 고대(苦待)했다는 기록을 통해 후세인(後世人)의 귀감(龜鑑)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들 3 형제(兄弟)는 문재(文才)가 뛰어나 인근 사람들의 촉망(囑望)을 받았으나 1660년 흡(恰)이 34세의 짧은 생애(生涯)를 마치었고, 형을 잃은 슬픔에 비통(悲痛)을 이기지 못한 아우 열(悅)도 1 개월 후 사망하였다.
죽당(竹塘)의 시문(詩文)은 연체록(聯체錄)을 통해 전해 오고 있는데, 형(兄)이 먼저 시(詩)를 지어 두 아우 열(悅, 號 鶴橋)과 업(號 曉村)에게 주면 두 아우가 형이 지은 운(韻)에 맞추어 답(答)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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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석 張 ?
1687(숙종 13)∼1764(영조 40).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흥덕(興德). 자는 호이(浩而), 호는 낙와(樂窩). 우익(宇翼)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재질이 뛰어났으며 한때는 문학에 뜻을 두고 공부하려고 하였으나 집이 워낙 가난하여 포기하고 고모부인 통제사 이석관(李碩寬)을 따라다니며 궁술(弓術)과 마술(馬術)을 배워 1714년(숙종 40) 무과에 급제하고, 1717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그뒤 벌등진만호(伐登鎭萬戶)·가리진수군첨절제사(加里鎭水軍僉節制使)를 거쳐, 훈련도감파총(訓鍊都監把摠)으로서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궁성의 경비에 충실하여 큰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730년에는 송내성(宋來成)의 무고에 휘말려 문화현(文化縣)에 유배되었다가 1732년에 풀려났으며, 1736년 함흥부원군(咸興府院君) 어유구(魚有龜)가 훈련도감에 있으면서 초관(哨官)으로 추천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56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칠순경축기념 때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1763년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장씨(張氏)의 유래와 본관-한국의 역대인물-디지털한국학>
◇ 여력재 헌주 餘力齋 憲周 (1777∼1867)
⊙ 자(字) 유장(幼長), 호(號) 여력재(餘力齋)
⊙ 1777년(正祖 2 년 丁酉) 9 월 27 일 나주(羅州) 다시면(多侍面) 송촌(松村) 출생
⊙ 부친(父親) 제갑(齊甲) 모친 나주나씨(羅州羅氏)
⊙ 자질(資質) 영민(英敏), 성품(性品) 강직(剛直)
⊙ 8세, 족숙(族叔) 운달(運達)에게 학문(學問) 수학
⊙ 15세, 읍시(邑試)에 응시 우수한 작문(作文)으로 주위의 찬사
⊙ 1807년 (丙寅, 당 31세) 봄, 회덕(懷德) 유학(留學), 송치규(宋穉圭, 號:剛齋)의 문하생이 됨
⊙ 1813년(癸酉, 당 37세), 증광별시(增廣別試)에 응하여 문명을 떨침
⊙ 1819 년(己卯) 부인(夫人), 1826 년(丙戌) 부친(父親) 별세, 대과(大科) 포기
⊙ 1824 년 갑신보(甲申譜) 편찬
⊙ 1837 년 (丁酉, 당 61세) 관찰사 김흥근(金興根.1796∼1879) 추천, 불취
⊙ 1838 년(戊戌,당 62세) 스승 강재(剛齋) 별세, 오촌(鰲村) 조문, 제문(祭文)과 행장(行狀) 작성
⊙ 1846 년(乙巳 당년 70세) 관찰사(觀察使) 김경선(金景善) 천거, 불취
⊙ 공(公)후학 교육 전념, 봄, 여름 과제(課題) 부여, 가을, 겨울 강독(講讀) 송경(誦經)
⊙ 신암(申巖)과 12 동지회(同志會) 결성, 향음례(鄕飮禮) 제정(制定)
⊙ 초학지남(初學指南) 1권 저술, 학동(學童) 교육(敎育) 지침서(指針書)
⊙ 1857 년(丁巳) 가을 언우(彦愚) 사망, 시력 상실 학문(學問) 궁구(窮究) 계속
⊙ 어사(御史) 성이호(成彛鎬), 학행(學行) 포상(褒賞)
⊙ 1860 년(庚申) 아들 언풍(彦豊) 작고
⊙ 1863 년 계해보(癸亥譜) 편찬(編纂)
⊙ 1867 년 정묘(丁卯), 관찰사(觀察使) 서상정(徐相鼎) 조정(朝廷) 추천, 사양
⊙ 1867년 4 월 3 일 미시(未時) 별세, 향년(享年) 91 세
⊙ 부인(夫人) 나주임씨(羅州林氏), 자녀 2남 4녀
<흥성장씨 홈페이지>
◇ 초의선사 의순 艸衣禪師 意恂 (1786∼1866)
⊙ 1786 년 무안군(務安郡) 삼향면(三鄕面) 왕산리(旺山里) 출생
⊙ 부친(父親) 주팔(籌八), 모친(母親) 밀양박씨(密陽朴氏)
⊙ 유년 때 익사 순간, 운흥사(雲興寺) 스님이 구출, 불교(佛敎) 입문
⊙ 대흥사 완호대사(玩湖大師)에게 초의(艸衣) 법호(法號) 받음
⊙ 운수행각, 선지식(禪知識) 탐구, 경·율·론(經·律·論) 통달
⊙ 22 세 때, 화순 관봉사(觀鳳寺)에서 금당선사(塘禪師)에게 선(禪) 수학
⊙ 대흥사(大興寺) 연담선사(蓮潭禪師)에게 수학(修學)
⊙ 다산(茶山)에게 유학(儒學) 시문(詩文) 배움
⊙ 월출산(月出山) 백운동(白雲洞) 탐방, 백운도(白雲圖) 그림
⊙ 30 세 상경(上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상면
⊙ 명사(名士) 교유,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형제, 권돈인(權敦仁)
⊙ 제주도 추사(秋史) 면회
⊙ 추사(秋史) 귀향 중 대흥사(大興寺) 방문,
⊙ 금강산(金剛山) 대관령(大關嶺) 등, 유람, 다수의 시서화(詩書畵) 남김
⊙ 낭암(郎巖) 스님에게 탱화(撑畵) 화법 전수(傳受)
⊙ 50세 때 일지암(一枝庵)으로 소치(小痴) 허유(許維, 1807∼90) 내방, 그림 전수
⊙ 다도(茶道) 부흥,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思想) 피력
⊙ 대흥사(大興寺) 13대 대종사(大宗師)가 됨
⊙ 저서 《선문사변만어(禪門思辨漫語)》1 권, 《이선래의(二禪來儀)》1 권, 《초의시고(艸衣詩考)》2 권,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1 권, 《동다송(東茶頌)》1 권, 《다신전(茶神傳)》1 권 .
⊙ 1866 년, (高宗 3 년) 별세(別世), 향년(享年) 81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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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재모 張載模
1883(고종 20)∼1945.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경선(景善). 호는 성수(聖樹). 전라남도 승주출신. 연(演)의 후손으로, 일환(日煥)의 아들이다.
충절이 대단하고 무예가 뛰어나며, 특히 포술(砲術)에 능하였다. 1908년 2월 전라남도 보성 동소산(桐巢山)에서 안규홍(安圭洪)의 의병진에 합류, 좌우익장(左右翼將)이 되어 보성을 중심으로 파청(巴靑)·진산(眞山)·원봉(圓峰)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고 전공을 세웠으며, 가령치(加嶺峙) 야간전투 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씨(張氏)의 유래와 본관-한국의 역대인물-디지털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