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27호입니다.
12월 초에 걸린 독감이 여전히 흔쾌히 낫지가 않아서 한 보름째 집에서 '칩거' 중입니다. 오늘은 하도 오래 집에만 있었더니 몸이 찌부둥~ 해서 아침나절에 잠시 산책을 나갔다 왔더니 그래도 좀 나은 편이네요. 그래도 나갈 만하니 좀 나은 것인가요? 그래도 중병이거나 심한 것은 아니니 걱정 마시길. 마침 도서관이 노는 크리스마스 방학이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가요? 여하튼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번 독감 지독하네요...
그동안 저에게 짧은 편지 혹은 성탄, 새해 엽서 보내 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대신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참 '모두에게 공평하게' 답장이 가지 않은 이유는 보시다시피 위에서 말씀드린 이유 때문입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몸이 좀 나아지는 대로 바로 편지 드릴게요.
아차, 하지만 이 경우 단 한 가지 예외는 제 제자들일 겁니다. 보신 것처럼, 제가 한국에서 떠난 지 어언 6년째로 접어드는데 아직도 때마다 종종 편지를 보내 주는 고마운 제자들이 있습니다. 처음 강의 나가면서 다짐한 것이 '실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어떤 문제라도 들고 와 같이 나눌 수 있는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었지요(뭐 그렇다고 제가 '실제로' 그런 선생님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여하튼 편지를 보내 준 우리 제자들은 다 답장을 받았겠지? 이 경우 답장은 어떤 경우에도 늦어도 3-4일 혹은 맥시멈 1주일로 하는데 혹 이 기간이 지나도록 답장을 못 받은 친구들은 뭔가 잘 못된 것이니 내게 알려주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야후에서 요즘 '배달 사고'가 종종 나니 확인 요망...]
여하튼 오늘은 그런 대로 몸도 좀 나아지고 더구나 세모고 해서 언제나 그렇듯이 혼자서 '특집'으로 통신을 꾸며 봅니다. 이번 호를 그 처음으로 하여 모두 3회로 구성될 이번 시리즈 주제는 '통신 선정 2003 올해의 인물'입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스트라스부르 통신은 '시대와 무관하게' 그리고 참으로 '시대와 무관한' 주제를 그저 조용히 혼자 천착해 보려 합니다. 자, 그럼 통신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 3명을 감상해 보실까요? 일단 두 사람은 한국인이고 한 사람은 미국인입니다 - 하지만 차라리 그냥 세 분 모두 '지구인' 혹은 '우주인'(cosmopolites)이라고 해 두지요.
그런데 이 분들은 모두 이 세상 분들이 아닙니다. 세 분 모두 올해 유명을 달리 하셨지요. 그런 면에서 제게는 개인적으로 올해가 슬픈 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와 마호멧과 부처의 역사적 육신(肉身) 혹은 색신(色身)보다 그들의 정신, 말씀을 의미하는 법신(法身)이 더 중요한 것이었듯, 그들의 삶도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빛과 평화와 온안함을 가져다 주는 그런 것이었다는 면에서 저의 마음은 다시금 평화로와 집니다.
모쪼록 이 분들의 삶에서 겪은 모든 힘든 일과 몰이해와 이해 받지 못함으로 가려진 그들의 큰 뜻이 귀 기울일 줄 아는 모든 뒷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다시금 제 빛, 제 소리, 제 가치를 얻게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가장 먼저 소개해 드리는 분은 '우리말글 지킴이' 이오덕 선생님입니다(통신 하나에 한 분씩 나갑니다. 나머지는 어떤 분들일까요? 궁금...^^).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혹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아래 기사를 몇 개 읽어보시면 ... 일단 간략한 '동사무소 호적계' 류의 소개는 될 것 같고요...
대학 시절 이후 이오덕 선생님이 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온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연히 서점에서 꺼내 펼쳐 본 그분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한길사, 1986) 이후였습니다. 86년이면 참 오래 전 일이지만 그때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요.
이 책은 시골 초등학교의 평교사, 교장 선생님을 지내신 선생님이 자신과 여러 선생님들이 재직하시던 학교 어린이들의 글을 모아 펴낸 '모음집'을 교재 삼아 올바른 글쓰기, 교육을 논하시는 책인데요 제가 일전에 - 이것도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요 - 이 책에 대해 추천(?)의 글을 쓴 적이 있거든요. 90년 경 정도이던가 동아리 후배들이 신입생을 위한 책들을 좀 추천해 달라기에 주저 없이 이 책을 당시 골랐던 한 20여 권 중 맨 첫머리로 올렸지요(아마 저는 당시 석사 초입이었던 것 같고요).
[30분 후 - 그래서 그 글을 올리려 했는데 ... 지난번 대청소하면서 사라져 버렸네요...-_- 도저히 찾을 수가 없네요. 여하튼 그 글을 찾게 되면 다른 책들과 함께 통신으로 올려 보도록 하지요.]
여하튼 '동시'란 어른들이 어린이의 마음으로 쓴 것이며, 어린이가 쓴 글은 그냥 '어린이글'이라 불러야 한다는 말씀, 하도 일본어와 영어 등 번역 어투가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을 제치고 언론과 학술서를 비롯한 글들에서 범람한다는 지적, 우리말글 가꾸기 ...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를 '울린 건' - 정말 울렸습니다 - [일하는 아이들],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우리 언제 참선생 노릇 한번 해보나] 등에 실린 어린이들의 글, 그 어린이의 보이지 않는 삶,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선생님들의 날카로운 그러나 따뜻한 마음의 눈길이었습니다.
다음은 선생님이 편하신 어린이 글모음 '일하는 아이들' 중에서 몇 개 골라 본 것입니다. 함 읽어보시길.
[비료 지기]
안동 대곡분교 3년 정창교
아버지하고 동장네 집에 가서 비료를 지고 오는데 하도 무거워서 눈물이 나왔다. 아이들이 창교 비료 지고 간다 한다. 내가 제비 보고 제비야, 비료 져다 우리 집에 갖다 다오, 하니 아무 말 안 한다.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 나는 슬픈 생각이 났다.
1970년 6월 13일
[방학]
문경 김룡초등 6년 김점순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선다. 할아버지는 논에 갔다 오시다가 오늘 학교 못 간다. 일을 해야 밥을 먹지, 놀고 어찌 먹나, 하신다. 나는 화가 나서 이제 3일만 가면 방학인데 안 가면 어떻게 해요, 했더니 할아버지는 집으로 들어가신다. 나는 동무들과 학교에 오면서 방학을 안 하면 일을 안 할 것인데 방학이란 소리도 듣기 싫다. 일을 어찌 할까, 했다.
1972년 7월 20일
[이총매미]
안동 대곡분교 3년 박청자
이총매미가 우네. 소리도 곱게 이총 이총 하며 우네. 복숭아나무에서 궁디를 까불석 까불석 하며 소리를 지른다. 해자네 할머니가 저 매미는 울다가 세월 다 보내겠다 하신다. 온 마을이 떠들썩하다.
1970년 6월 10일
1970년이면 참 오래죠? 여하튼 ... 참 슬프고 아름다운 글들입니다. 제 소개는 이상이고요 ... 제가 철학을 하는지라 저 세상이나 천당, 명계(冥界)의 문제는 다만 세계관의 문제일 뿐이라 생각하지만, 하나의 문화적 약속이자 상징 체계로서 ... 마지막으로 다음의 말씀을 선생님의 영전에 올립니다.
"선생님의 차고 맑은 글과 정신, 젊은 날 제 가슴 속에 따뜻한 기운을 주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올곳은 뜻, 오늘 저와 아이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시는 길 부디 편안하시길, 삼가 명복을 빕니다."
* 뱀발.
1. 아참, 그전에 다음은 이오덕 선생님의 책들을 모은 국내 한 인터넷 서점의 해당 페이지인데 모두 43권의 책들이 검색됩니다. 절판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구할 수 있지요. 특히 자녀가 있으신 분들께는 꼭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통신 읽으신 후 꼭 한번 살펴보시길:
http://www.yes24.com/home/search/searchresult.asp?SID=KnkHcKvFTjONZA4LucllT1ExqPwFsWjKgo6elLZfofufOxYr*Jd1MHena&qdomain=%C0%FC%C3%BC&query=%C0%CC%BF%C0%B4%F6
2. 아래의 글들은 대략 이오덕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리는 기사, 추도의 글 그리고 생전의 인터뷰, 선생님에 대한 소개의 글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 시간 되시면 함 읽어보시길.
------------------------
"아동 문학가 이오덕씨 별세"
(서울=연합뉴스) 신지홍 기자
아동 문학가이자 우리말 연구가인 이오덕씨가 25일 오전 7시께 충북 충주시 신리면 광월리 710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고인은 수년간 지병을 앓았다 회복했으나 노환 탓에 최근 다시 악화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큰아들 이정우씨는 "부친께서 부고를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말고 장례가 끝난 뒤 '즐겁게 돌아갔다'고 전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빈소는 자택이며 발인은 오는 27일께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 043-857-4777
고인은 1925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 40여 년을 교직에 몸담았다. 1955년「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했고 1971년 동아일보에 동화, 한국일보에 수필이 당선됐다.
한국 아동 문학상(2회)과 한길사의 단재상(3회) 등을 수상했다.
1986년 교직을 떠난 뒤로는 아동문학 비평과 우리말 바로 쓰기 운동에 헌신했다. 「우리 문장 쓰기」「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등 50여권의 책을 펴냈다.
shin@yna.co.kr
<이오덕씨 연보>
▲1925.11.14 경북 청송군 출생 ▲1943.2. 영덕 농업학교 졸업 ▲1944.2. 초등 교원 자격시험 합격, 4월부터 경북 청송군 부동면 부동 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 시작. ▲1955.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 발표. ▲1971.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동화 '꿩'으로 아동 문학가 등단. ▲1983.8.20 한국 글쓰기 교육 연구회를 만들어 우리 글 바로 쓰기 가르침. ▲1986.2. 경북 성주군 대서 국민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남. ▲1988.4. 제3회 단재상 수상. ▲1965.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펴냄. ▲1990. 「우리말 바로쓰기」펴냄. ▲1992. 「우리문장 바로쓰기」「우리문장 바로쓰기 2」펴냄. ▲1993.5. 「이오덕 글쓰기 교실」펴냄. ▲1995.10. 「우리글 바로쓰기」전3권 완간. ▲2002.8. 「문학의 길 교육의 길」「어린이책 이야기」펴냄. ▲2002.10. 은관문화훈장 수상.
======================
[조선일보] 관련 작품/기록 사항
이오덕 작품 일람(축약)
[동시집] ▶ 허수아비도 깍꿀로 덕새를 넘고/보리/1998 ▶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소년한길/2001
[동화] ▶ 나도 쓸모있을 걸/창작과비평사 ▶ 꽃 속에 묻힌 집/창작과비평사
[산문집] ▶ 시정신과 유희정신/창작과비평사/1977 ▶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청년사/1978 ▶ 일하는 아이들/청년사/1978 ▶ 거꾸로 사는 재미/범우사/1983 ▶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한길사/1984 ▶ 교육일기/한길사/1989 ▶ 우리글 바로쓰기/한길사/1992 ▶ 우리문장 바로쓰기/한길사/1992 ▶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보리/1993 ▶ 이오덕 글 이야기/산하/1994 ▶ 무엇을 어떻게 쓸까/보리/1997
[시집] ▶ 별들의 합창/아인각/1966 ▶ 탱자나무 울타리/보성문화사/1969 ▶ 일하는 아이들/청년사/1978 ▶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청년사/1979 ▶ 우리반 순덕이/1985
[기타] ▶ 진달래/1954 ▶ 꿩/1971 ▶ 개구리 울던 마을/1981 ▶ 우리말로 살려 놓은 민주주의/지식산업사/1997.5 ▶ 울면서 하는 숙제(동화)/산하/1998.11 ▶ 참교육으로 가는 길 ▶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
===========================================
<`우리말 살리기'에 헌신한 아동문학가 故 이오덕씨>
(서울=연합뉴스) 신지홍 기자
향년 78세로 별세한 아동문학가 이오덕씨는 우리말글 지킴이로 더욱 유명했다. 1925년 경북 청송생인 그는 1944년 초등학교 교편을 잡아 평교사에서 교장까지 43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5공화국 말기인 1986년 2월 "전두환이 하도 발악을 하고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까 그만 몸서리가 나서" 스스로 교직을 그만두었다고 전해졌다. 꼿꼿하고 타협하지 않은 그의 성품은 아동문학의 실명 비평과 우리말글 지킴을 위한 실천에서 드러났다.
1983년 '한국 글쓰기 교육연구회'를 만든 고인은 「우리 문장 쓰기」,「우리글 바로쓰기」등의 집필과 공동 대표를 지낸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의 활동 등을 통해 우리말 오용을 질책하고 한글 전용 운동을 벌였다.
고인은 일제 식민기를 거치면서 겨레말이 망가졌고 이후 지식인들의 맹목적인 서구 추구로 번역투의 글이 범람하면서 우리말이 크게 훼손됐다고 보았다. 우리말글을 살리는 것이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주장했다.
지식인들의 번역투와 아이들이 어른을 흉내내는 말글을 추방하고자 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아동 문학가로서 고인은 1955년 동시 '진달래'를 「소년세계」에 발표했고 1971년 동아일보에 동화, 한국일보에 수필을 당선시켰다. 한국 아동 문학상(2회)과 단재상(3회) 등을 수상했다.
특히 열등의식 등에 사로잡힌 나머지 아동문학이 삶과 동떨어진 '동심주의'로 흐른 것을 나무랐다. 그러면서 고된 삶에 부딪혀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생활 동화의 영역을 개척하라고 촉구했다.
고인은 수준이 형편없는 동화들이 좋은 책으로 소개되는 것은 감언만 늘어놓는 아동문학 평론가들의 '주례사 비평'의 책임이라며 평론가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호되게 질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의 생활 글을 모은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등과 수년간의 지병(신장염)을 잠시 떨치고 만년에 발표한 「문학의 길 교육의 길」「어린이책 이야기」등은 그런 맥락에 놓여 있다.
지병이 악화되자 4년 여전 충북 충주시 신리면 광월리 농촌으로 갔다. 영면에 들기 전까지도 원고지와 펜을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유족들에게 "부고를 알리지 말고 '즐겁게 돌아갔다'고 추후 전하라"고 했다.
============================
[프레시안] "일하는 아이들의 영원한 선생님" 고인은 '일하는 아이들'의 영원한 선생님으로 유명하다. 고인은 1925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1944년 초등학교 교사가 된 이래 43년 동안 교직에 몸담았다. 재임 기간 중 부산과 경남 함양에서 7년 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고향인 경북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고인은 특히 60, 70년대 농촌에서 어린 초등학생들과 생활하며 그 아이들의 생활글을 모아 책으로 펴냈는데, 그것이 유명한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일하는 아이들>이다. 농촌 아이들의 살아 있는 감성과 말, 생각이 담긴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이 책은 고인의 벗인 고 김녹촌 선생의 <마을 심는 아이들>과 더불어 '아동문학' '노동문학'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문학평론가인 김이구 창작과 비평사 실장은 몇 해 전 고인을 "이오덕은 일하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동이고, 참된 아동문학은 일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활과 감정과 꿈을 그들의 편이 되어 그리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는 '이오덕 평'을 했었다. 이에 대해 고인은 지난해 펴낸 생애 마지막 평론집에서 "1990년대 이후 지나친 사교육과 컴퓨터에 대한 몰두로 옛날처럼 뛰어 놀지 않는 등 아이들의 생활이 크게 바뀌었다"며 "아동문학도 이런 현실 속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담아 낼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자신의 아동관을 보완 설명했다. 고인은 "이제 '일하는 아이들'은 과거처럼 노동에 종사하는 아이들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일도 하고 무엇을 만들고 기르고 관찰하는 아이들로 확대 해석해야 한다"며 "아이들의 그런 현실을 제대로 알고 정확하게 그리기보다는 책상에 앉아 상상만으로 글을 쓰는 요즘 아동문학 작가들의 태도에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우리말 지킴이 고인은 생전에 고 미승우 선생, 백기완 선생 등과 더불어 50여권의 우리말 관련 저서를 펴낸, 우리말 지킴이로도 유명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나온 글, 방송에서 쓰는 말을 보면 참 답답하고 서글프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됐나 하는 참담한 생각이 든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 우리 겨레말이 다 망가졌다. 우리 말글을 제대로 살려 써야 하는데, 부모들로부터 잘못된 말글을 배우고 자랐으니 아이들이 제대로 배울 수가 없다. 배울 사람들이 일본글을 자꾸 읽다 보니까 머리 속에 한자말만 떠오르고 그걸 또 뒷 세대가 배우고 하는 거다. 예를 들어보자. '전혀'라는 말을 참 많이 쓰고 있는데 그건 '아주' '도무지' '조금도' 이렇게 써도 된다. 그러나 일본말 번역어가 몸에 배어서 그 말만 쓰고 있다. 배운 사람들이 책이나 강연에서 '벌써'라는 살아 있는 우리말을 두고 '이미'라는 생활 공간에서는 죽은 옛말을 쓰는 것도, 일본말 '스데니'의 번역말로 '이미'를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먼저 말이 있고 그 다음에 글이 있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이 밥 먹고 일하고 잠자고 하면서 쓰는 말을 살려 글로 써야 한다. 그런데 그게 거꾸로 돼서 지금은 아이들조차 책에서나 나오는 우리말이 아닌 말을 쓰고 있다." 고인이 생애 마지막으로 지난 5월말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개탄이다. "반민주 망령 부활은 용납할 수 없다" 고인은 생전에 민주-민족운동에도 헌신적이었다. 고인은 1986년 2월 천직으로 여기던 교직을 떠났는데, 고인의 표현을 빌면 이유인즉 "전두환이 하두 발악을 하고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까 그만 몸서리가 나서"였다. 그후 고인은 주요 시점마다 위협에 개의치 않고 여러 민주 인사들과 함께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지난해 11월말에는 대선 과정에 냉전 세력의 준동이 극에 달하자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만길 상지대 총장, 고은 시인 등 지인들과 함께 '현 정국을 우려하는 지식인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냉전 근본주의자들과 극단적 세력이 되살아나는 듯한 상황을 바라보며, 반민주적 망령의 부활을 보는 것 같아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민주주의에서 반민주주의로,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서 갈등의 길목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만큼 반민주-반통일세력을 상대로 제2의 민주화 운동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평생을 곁눈질함이 없이 일하는 아이들과 우리말, 그리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살다간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태견/기자
--------
[이하 댓글]
26년전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이 호진 / 2003-08-25 오후 8:47:28
오후에 cbs뉴스를 평소처럼 청취하다 아동 문학가와 평론 문단의 원로라는 아나운서의 도입 멘트에서 철렁 사슴이 가라앉았는데 방정하지 못한 저의 예감은 비통하게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부고를 받고 말았습니다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이제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26년 전 선생님과 보냈던 시간들을 반추하며 명복을 빌었습니다 선생님 부디 고이 잠드시고 그토록 애닮아 하셨던 이 땅의 아이들은 살아남은 이들의 몫으로 남겨 두시고 한 점 걱정 없이 하늘에서 지켜봐 주십시오, 선생님..
이제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경북 안동군 임동면 지례리의 길산국민학교는 수몰 지역의 이전으로 영원히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지만 선생님께서 저희들 가르침 속에서 세상에 내놓으신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의 책 속에 영원히 존재하리라 생각합니다 길산국민학교는 그렇게 살아 있을 겁니다
선생님과 보낸 초등학교5-6학년은 지금도 제가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인성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혹을 바라보며 지금껏 나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인 위해를 남에게 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온전히 선생님의 책과 말씀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가끔씩은 언론 매체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안부였기에 언제까지나 무탈하시리라 믿은 이 제자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그 어리석음이 졸업하고 결국은 26여 년의 게으름 되어 결국 생전에 한번 뵙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 부디 평안히 잠드시고 지금 선생님 계신 곳에 60-70년대의 그런 일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이젠 조금은 당신 자신도 추스리는 여유 속에서 제자들을 보다 듬어 주십시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옛 제자 이호진 올림
------------
우리 언제 참선생 노릇 한번 해볼까
제자 / 2003-08-26 오전 12:42:50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건 70년대 <창작과 비평>에 실렸던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라는 글에서였지요.
이원수님의 동시를 흠모하신 선생님(그분의 동화 '꼬마 옥이'의 해설도 선생님이 하셨지요.), "어른이 어린이의 마음으로 쓰는 시가 동시고, 어린이가 쓰는 시는 아동시"라고 정의를 내려 주셨던 것,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원수님 외에는 죄다 '유희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실명 비판하셨었지요. 어린이를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하고 다들 한낱 어른의 유희 대상으로 본다고 통렬히 비판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선생님을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왔습니다.
비록 한번도 직접 뵙지는 못했어도, 아니 뵐 생각조차 안 했지만, 그간 선생님이 내신 책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죄다 읽어 왔고 늘 교감을 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언제 참선생 노릇 한번 해볼까>라는 책을 읽었을 때의 감격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사가던 날> 등 아이들의 글모음만 보다가 젊은 선생님들의 탄식과 희망이 들어 있는 '선생들의 글모음'을 봤을 때의 그 감격!! 선생님과 젊은 교사들이 그토록 정답고 진실 되게 교류하시면서, 우리 교육의 미래를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또 실제로 준비하고 계시는지를 그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전교조가 탄생했을 때 신문지상에는 친숙한 이름들이 보였더랬습니다. 그 몇 년 전에 선생님께 깊은 탄식으로 하소연하던 분들의 이름이...
오늘의 전교조가 선생님의 삶과 정신을 결코 잊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니 조금만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
정말, 사람 냄새 그윽하셨던 선생님 강요한 / 2003-08-25 오후 9:52:11
80년대의 어느 해 여름-. '저게 소백산이오'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말씀하시던 선생님. 당신이 근무하시던 경북 성주의 국민학교를 찾아 취재하러 갔다. 고무신 신어 시골 촌로 같던 교장 선생님. 일이 끝나자 '밥은 먹고 가야지요'하시며 교문 앞 허름한 슬레이트 집으로 안내하셨다. 식당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어두컴컴한 방, 부지깽이로 불 때던 할머니가 선생님을 보며 일어서고 삭은 멸치젓과 묵은 김치가 올라온 오래된 밥상, 앞으로 좋은 글 쓰라며 격려해 주시던 선생님.
그러한 이오덕 선생님이 십 수 년 뒤 과천으로 이사오셨다. 해마다 설날이면 세배 가야지, 세배 드리러 가야지 이러구러 차일피일 세월만 까먹었다. 버스 두 번만 갈아타도 갈 수 있는 과천땅 결국 뵙지 못하고 멀리 충주에서 세상 뜨셨다.
선생님은 담담히 가셨겠지만 인사 한번 올리지 못한 내가 오늘은 원망스럽다. 그 회한이 가슴을 친다.
선생님, 뒤늦은 세배 받으시지요. 빈소에서 올리는 절은 아니올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이젠 좋은 나라 가셔서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쉬시지요.
진실로 사람의 모습을 처음으로 깨닫게 하셨던 이오덕 선생님. 오염된 제 눈을 제대로 뜨게 해 주셨던 선생님.
-----------------
삼가 고인의 명목을 빌면서.... 고라파덕 / 2003-08-25 오후 7:34:46
이오덕 선생님을 아마 두어 번 뵌 것 같다. 그때 선생님은 한신대에 시간 강의 나오셨는데... (86년에 교직 그만 두시고 시간 강의 다니셨던 것 같다...) 스쳐 지나가면서, 아무런 대화도 없었지만...
이오덕 선생님을 존경한 이유는, 그의 신조가 올곧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글은... 어린이 다울 때 가장 좋고 올바른 것이라는 신념...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우리말을 편하게 쓴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는 신념... 그래서 그분이 펴내신 "우리말 바로 쓰기"를 사서 보면서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80년대 말 사구체 논쟁이 한창일 때, 이오덕 선생님은 그들을 꾸짖었다. "신식 국독자니, 식반론"이니 하는 그 끝없는 한자 용어들 - 그게 도대체 말이 되냐... 나중에 보니 확실히 이오덕 선생님의 비판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자기들만의 논쟁은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더군요.
이 사회에서 신념에 따라 올곧게 사시는 분들이 몇 있더군요. 그 가운데 한 분이 이오덕 선생님이셨고... 존경할 만한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에 난 이 사회가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달팽이 / 2003-08-25 오후 9:08:53
고마왔습니다.
무지막지하던 80년대에 선생님같으신 스승이 계셔서 마음의 의지처로 삼고 꿋꿋하게 버텨 올 수 있었던 사람이 저 하나뿐이겠습니까? 선생님의 '교육 일기'를 읽고 제가 받아 왔던 교육을 얼마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편히 가십시오.
=================
[동아일보] 2003/08/25 18:08
"명복을 빕니다" - 이오덕 아동문학가 겸 말글 운동가
25일 별세한 이오덕씨는 미리 준비해 둔 유언장에서 “죽음을 밖에 알리지 말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러 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했다. 임종 직전에도 “장례를 끝내 놓고서 ‘즐겁게 갔다’고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할 만큼 허례허식을 멀리했다.
그런 그가 평생에 걸쳐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은 외래어의 부자연스러운 표현에 젖어 든 한국인의 언어생활과 현실 생활에서 멀어진 채 지나치게 상상력에만 의존하는 아동문학의 허식이었다.
일제 강점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교직에 투신한 그는 5공화국 말기 잘못된 교육행정을 지적하는 글을 썼다가 시달림을 당한 끝에 1986년 정든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미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소신으로 열여덟 차례나 학교를 옮겨 다니는 고생을 한 뒤였다.
교직을 떠난 후 그는 95년 내놓은 3권 짜리 ‘우리글 바로쓰기’ 등 저술과 강연을 통해 바른 우리말 지키기 운동에 몰두했다. 그는 우리말과 글이 일본어와 서양 언어의 직역투에 크게 오염돼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어 직역투인 ‘∼적(的)’을 적당한 우리말 표현으로 바꾸고 ‘이미’ 대신 ‘벌써’를, ‘전혀’ 대신 ‘도무지’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등 실제 삶에 바탕을 둔 우리말 표현을 살려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1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를 통해 아동 문학가로 등단한 그는 ‘머리로 쓴 글’과 ‘가슴으로 쓴 글’의 차이를 한결같이 강조했다.
“아동 문학 작가는 책상머리에서 상상만으로 글을 쓸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연과 벗하고 일하는 어린이들의 삶을 그려내야 한다”고 강조한 것.
특히 그는 교사 생활 중 접한 어린이들의 꾸밈없는 글을 자연스러운 글쓰기의 모범으로 보아 ‘일하는 아이들’, ‘우리집 토끼’ 등 아이들이 쓴 글로 여러 권의 동시집, 동화집을 엮어 내기도 했다.
1965년 첫 책을 발간한 이래 고인이 집필 혹은 책임 편집해 내놓은 책은 모두 53권. 90년대 중반부터 신장염으로 투병 생활을 해 온 그는 99년 충북의 농촌 마을로 거처를 옮겨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실천해 왔다.
투병 중에도 ‘문학의 길 교육의 길’, ‘어린이책 이야기’를 한꺼번에 출간했으며 2002년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오마이뉴스. 추도의 글]
"선생님의 책으로 생각의 품을 키웠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조경국 기자
'즐겁게 돌아갔다' 이오덕 선생님께선 이 말씀만 남기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들었습니다. '아직 바른 뼈대를 세우지 못했다'고 교육계에 쓴 소리 하시고 '어린이들은 생각하지 않고 상업주의에 물들어 간다'라며 출판계에 일갈하시던 글과 말을 이젠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릇된 길을 가는 후학들을 따끔하게 혼을 내시던 선생님께서 '즐겁게 돌아갔다'는 한마디만 남기셨다니 떠나시면서 이 세상에 한 점 미련이나 후회조차 두실 마음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후회하고 죄송스런 생각을 가진 이는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봅니다.
작년 이맘 때, 선생님께선 몇 년간의 투병 생활을 마치자마자 붓끝을 모아 <어린이 책 이야기>를 출간하셨지요. 그 책의 출간 기념으로 출연하셨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대쪽같은 목소리로 어린이를 위한 책을 내는 출판사와 작가들이 정작 어린이를 위하지 않고 눈앞의 돈벌이에 급급하다 혼을 내셨습니다. 사회자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으시고 하실 말씀 다 하시던 그 정정함에 '글이나 말씀이나 성격이 그대로 나오시는 구나'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의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습니다. 자주 드나들던 헌책방에서 만난 '삶과 믿음의 교실'을 통해 올바른 배움과 가르침은 이래야 하는구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결국 오로지 대학 이외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현실이 더 고달파지는 부작용으로 돌아왔지만 그 한 권의 책으로 선생님의 팬이 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글 바로쓰기', '우리 문장 쓰기', '세 번째 소원', '참교육으로 가는 길'등 선생님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한번도 뵌 적 없지만 선생님의 책을 통해 글쓰기와 생각의 품을 넓혔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옆에 계셨다면 항상 혼이 날 꼴찌였겠지요.
이제 선생님의 책을 처음 접했던 열아홉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서른 살 한 아이를 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학부형이 되고 선생님께서 항상 걱정하셨던 '시험공부를 경쟁으로 시키는 교육의 해독'을 다른 입장에서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께선 '삶과 믿음의 교실'이 나온 이듬해 1979년 4월 '씨알의 소리'에서 입시 위주의 교육에 대해 모두가 평등한 자리에서 서로 남을 생각하며 도와 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물리적 욕망을 채우는 것이 살아가는 목표요 길이 되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창조의 정신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방해물로 여긴다'며 걱정하셨습니다. 그 고민을 선생님께선 교단에 발을 디디실 때부터 짊어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짊어지고 오셨던 고민을 몇 년 후면 저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되새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무렵이면 선생님께서 바라던, 그리고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바라던 그런 올곧은 교육이 이뤄질는지요. 저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꺾여진 해바라기의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툭툭 털어 버리고 떠나신 선생님. '즐겁게 돌아갔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말씀이 지금까지 읽었던 선생님의 글보다 왜 그렇게 여운을 남기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볼 수 없다는 슬픔이 한없이 밀려옵니다.
'우리가 인간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지만, 자연에서 배우게 되는 것은 선이요 위대한 인간적 깨달음'이라 하셨지요. 선생님께선 이제 한줌 흙이 되어 선의 근원인 자연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멀리서 두 손 모아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
[오마이뉴스]
"이오덕 선생이 걸어온 길"
25일 타계한 이오덕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미리 써 놓은 친필 유언장에 죽음을 밖에 알리지 말고 장례를 간소히 치르라고 신신당부했다. 피붙이처럼 가까운 지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한 뒤 장례식에 불러들이는 폐를 끼치지 말라고 했으며, 조화든 조문이든 일절 받지 말라고 했다. 살아온 내내 그러했던 대로 고인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청빈을 실천하려 한 것이다.
1925년 경북 청송의 농사꾼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44년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 42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와 교감, 교장을 지냈다. 86년 2월 5공화국 정권이 “하도 발악을 하고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까 그만 몸서리가 나서”(<한겨레> 2003년 5월27일치 35면) 스스로 교직을 그만두기까지 고인은 어린이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것을 동화로, 동시로 표현하는 아동 문학가였다. 어린이의 마음과 눈으로 본 우리말과 글은 배웠다는 사람들이 쓰는 어려운 한자말과 외국말로 뒤범벅된 국적불명의 언어였다. 자연히 선생은 우리말과 글을 바로잡고 올바로 쓰는 일을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선생이 우리 말글살이의 중심으로 놓은 것은 뭇사람이 쓰는 살아 있는 입말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일상의 언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고인은 특히, 노동 현장에서 땀흘려 일하는 것이 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함을 힘주어 말하곤 했다.
“책만 읽어서는 마음과 몸 모두 병들게 됩니다. 육체노동을 해야 건강을 찾을 수 있어요. 책 읽기란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관념 체계를 그저 받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스스로 현실 속에서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라야 비로소 신념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쓴 53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는 우리말에 대한 사랑, 민중의 삶에 대한 관심, 겨레의 장래에 대한 염려로 애틋했다. 타계하기 석 달 전에 <한겨레>와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몸이 좋아지면” 한국 아동 문학사를 정리하는 책, 한국 아동문학 작품론을 깊이 탐구하는 책, 그리고 살아온 삶을 차례로 되돌아보는 회고록을 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읽고 쓰기를, 우리말과 얼을 어루만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고인을 가까이 모셨던 출판사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은 “선생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리말의 본디 아름다움을 찾아내 그것을 쉼 없이 알림으로써 우리를 커다란 각성으로 이끄신 분”이라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
[한겨레]
"선생의 큰 뜻 받들겠습니다"
이제 누가 지켜주리까!
며칠 하늘 무너지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선생께서 세상 버린다는 하늘의 기별이었습니까. 번개와 우레 수없이 번갈고, 무더기비 쏟아 내려 남한·북한·임진강에 검붉은 시위 넘치더니 마침내 임께서 쉼 없이 외시던 “나라사랑, 겨레사랑, 우리말 사랑”의 외침을 한데 모아 던지신 호통이었습니까.
한자·왜말·서양말은 치우고 치워도 밀려들고, 마침내 서너 살 아이들까지 꼬부랑말을 외워대는 턱없는 세상을 두고 떠나시나이까!
돌이켜 보면, 선생께서 누리신 일흔 여덟 해가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었습니다. 일제와 미군정에 전쟁과 오랜 독재를 거쳐 21세기를 맞은 지 3년째, 우리 역사에서도 참으로 수상한 세월을 선생께서는 꿋꿋이 버틴 참스승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8·15 해방을 한 해 앞두고 교단에 서서 40 여 년을 한결같이 두메 학교를 돌며 어린이들을 가르치셨으니, 그 세월 또한 참된 스승의 삶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동시와 동화를 써 오신 것은, 삿된 것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의 마음과 말이 바로 ‘참된 것’이고 사람 살리는 길임을 확인해 가는 또 하나의 실천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불선의 도·자비와 무엇이 다르며, 예수의 사랑과 무엇이 다른 것이겠습니까
마침내 많이 배우고 힘세다는 자들이 이끌어 가는 나라의 말글 형편이 온갖 잡동사니들로 더럽혀지는 것을 보시고 싸움을 벌이셨으니, 그 뭉뚱그림이 90년대 초에 나온 <우리글 바로쓰기>와 숱한 저작들이었습니다.
거기엔 <한겨레신문>에서 따온 잘못된 보기들이 많았습니다. 명색이 한글 전용을 내건 신문의 글이 이런 식이니 크게 반성하라는 뜻인 줄 알고 뼈저리게 느꼈던 부끄러움이 새롭습니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화요일에 만난 사람’ 등의 지면에서 선생을 뵙고 말씀을 듣고자 했던 90년대 초 선생께서는 과천에 살고 계셨는데, 굳이 당신께서 공덕동 산비탈 신문사까지 나오셔서 말씀을 주셨으니, 이제사 그 송구스러움이 뼈에 사무칩니다.
두어 달 전 선생님의 병세가 심상찮다며 10년 여 만에 다시‘한만사’에 모신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습니다. 그때만 해도 말씀이 분명하시고 기력도 괜찮아 보였다는 안부가 마지막이 될 줄 모른 것은, 또한 세상 짚어 내는 슬기가 모자라고 어른 모시기에 게으른 까닭임을 스스로 통탄합니다.
어른다운 어른과 스승다운 스승이 더욱 드물어 가는 이 시대에 선생마저 잃게 되었으니 허전하고 애통한 마음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과 남의 글로써 창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글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남은 이들이 할 몫은 선생의 큰 뜻을 받들어 더욱 매진할 일인 줄 압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하옵고, 부디 저승에서도 굽어보시어 원체 착하고 슬기로운 겨레가 더는 어리석고 못난 겨레로 기울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옵소서.
2003.8.25
삼가 최인호(한겨레 교열부장) 드림
====================
[한겨레] 이오덕 인터뷰 (2003년 5월 26일)
"우리말글 사랑 놓지 못하는 이오덕씨 - 먹고 일할 때 하는 말 놔두고 배운 분들은 왜 한자말 쓰는지"
아동 문학가 이오덕(78) 선생은 우리말글살이 운동에 평생을 바쳐 온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의 실천은 머리띠 묶고 거리의 군중을 향해 목청을 돋우는 광장의 실천이라기보다는 만년필과 원고지를 무기로 삼아 7천만 언중을 향해 말글살이의 바른 길을 알리는 골방의 실천이었다. 이 선생은 4년 전 경기도 과천에서 충북의 한적한 농촌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아들과 손자, 그리고 아장아장 걷는 증손자까지 4대가 함께 자연의 품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후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 지병을 양약으로 다스리다 얻은 부작용으로 그는 지난 겨울 ‘이제 목숨을 놓아야 하는가’싶은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몸이 쇠약해진 상황에서도 그는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신록이 더욱 짙어지면서 기운을 조금씩 회복해 가는 이 선생을 충주시 신니면 수월리의 거처에서 만났다. 집필실 겸 침실로 쓰는 방은 빼곡이 들어찬 책으로 고서향이 가득했다. 그가 좋아한다는 서양화가 밀레·고흐·고갱의 그림이 낡은 책들과 낯선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건강이 몹시 나빠지셨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 상태가 좀 나아져 흰죽을 조금씩 먹고 있습니다. 7~8년 전부터 신장염을 앓았어요. 병원에 입원도 하고 수혈을 하기도 했는데, 의사 처방대로 몇 해 동안 약을 받아먹었다가 위장이 나빠지니까 위장약까지 아홉 가지를 먹었어요. 그런데 6~7개월 전부터 약을 먹으면 다 토해 내는 거예요. 음식 맛이 없어지더니 4~5개월 전부터는 아예 죽도 먹지를 못했어요. 그러다가 서울에 대체 의학을 하는 분이 있어서 거기 한 주에 두 번씩 올라가 치료받고 도움 받고 하면서 몸이 나아지고 있어요.
한동안은 ‘수명이 다했나 보다’, ‘그만 떠나는 게 좋겠다’ 그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세상 인연 다 끊어 버리면 해방이 되잖아요. 그런데 마음 한켠에서 ‘나만이 할 일이 남았는데’, ‘세상에 정말 보탬이 되는 일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욕심을 버리지 못 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아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하실 일이란 게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쓰도록 이끄는 일이실 텐데….
= 신문이나 잡지에 나온 글, 방송에서 쓰는 말을 보면 참 답답하고 서글픕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됐나 하는 참담한 생각이 들어요.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 겨레말이 다 망가졌어요. 일제 때부터 일본글을 읽고 번역하고 그러면서 배운 글과 말이 우리 글과 말을 온통 뒤덮어 버렸습니다. 우리 말글을 제대로 살려 써야 하는데, 부모들부터 잘못된 말글을 배우고 자랐으니 아이들이 제대로 배울 수가 없습니다. 배운 사람들이 일본글을 자꾸 읽다 보니까 머리 속에 한자말만 떠오르고, 그걸 또 뒷 세대가 배우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전혀’라는 말을 참 많이 쓰는데, 그걸 ‘아주’ ‘도무지’ ‘조금도’ 이렇게 써도 되는데, 그 일본말 번역어가 몸에 배어서 그 말만 쓰는 거예요. 먼저 말이 있고 그 다음에 글이 있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이 밥먹고 일하고 잠자고 하면서 쓰는 말을 살려 글로 써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게 거꾸로 돼서 지금은 아이들조차 책에서나 나오는 말, 우리말이 아닌 말을 쓰고 있습니다.
- 그 동안 아동문학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으셨는데, 늘어나고 있는 아동 출판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 전에 동화도 쓰고 동시도 쓰고 아동 문학 이론 비슷한 글도 쓰고 했는데, 제대로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말을 살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우리 겨레의 정신을 바로잡고 얼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소설가고 시인이고 학자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고칠 생각을 안 하니, 아이들에게라도 우리말을 제대로 이어주겠다고 생각해서 아동문학에 관심을 기울였지요. 하지만 요즘 아동문학이나 아동 출판을 보면 걱정이 앞섭니다. 아이들의 정신이나 인간성을 올바르게 기르려는 좋은 작품을 쓰기보다는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또 아이들 공부시키려는 부모들의 욕심에 맞는 책만 많아지고 있어요. 우리 민족을 살려야겠다는 게 아니고 돈이 되니까 동화 작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동 출판계가 아이들 상대로 책 팔아먹는 장사판이 되고 말았어요.
또 하나 큰 문제가 있는데 외국 아동문학 시장입니다. 우리나라 작품의 질이 떨어지니까 외국 문학 질이 높아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동 문학 판이 외국 문학 번역 시장이 돼 버렸습니다. 완전히 식민지 문학입니다. 아무리 좋은 외국 작품도 그것만 아이들에게 줄 때는 우리 것은 모조리 형편없고 서양 것만 좋다는 생각을 심어 주게 됩니다. 그런 책을 보면 서양 사람 서양 생활이 나오고 그걸 그대로 따라 배우고 서양 문화를 동경하게 됩니다. 아동문학이 민족의 말과 글, 얼과 정신을 전달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인데 그것마저 서양 사람 되게 하는 것으로 다 찬 겁니다.
학교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 그래요. 절망이지요. 교육이 경제 논리에 치우쳐서 아이들을 경제 동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서로 사정없이 싸우고 경쟁하고 적이 돼서 그 중 가장 센 놈, 독한 놈 세워서 엘리트라고 만들어 내는 일, 그걸 교육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이가 자살해 죽었는데, 아유 참, 분노가 일어나고 절망감이 들었어요.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도 예사로 압니다. 학교교육이고 가정교육이고 도무지 살인 교육, 출세 교육뿐입니다. 아동문학이 학교교육의 해를 풀어 주는 것이 돼야 하는데 아동문학도 부모들의 미치광이 같은 교육열에 휩쓸려 가고 있어요.
우리 것, 우리 민족을 강조하시다 보니 한쪽에선 선생님을 보수주의자로 보기도 합니다.
= 글쎄요. 나는 진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민족이라는 것에 매여 있다고 한다면 그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외세가 지배하고 있고 남북이 갈려 있는데 아직은 민족에 집착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민족 살리고 나서야 세계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나는 민족에 얽매이는 사람은 아닙니다. 보세요, 여기 걸린 그림들. 나는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나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볼 때마다 이들이 서양 사람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과 비교해 보면 더 동족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나라 어떤 화가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그린 적 있습니까 나는 전통이라 해도 잘못된 것이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우리 민족의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할 때라는 것이지요.
건강이 안 좋으신 중에도 여러 권 분량의 원고를 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지난해 열린 월드컵을 보면서 응원 현상 중심으로 우리 교육 문제를 다룬 글을 써 두었습니다. 내가 젊은 사람들 비판도 많이 했지만, 그 기가 막힌 교육을 받아 왔는데도 그렇게 싱싱한 모습 보면서 희망을 느꼈습니다. 또 아동문학에 관한 이론을 두 권 분량으로 썼습니다. 일제 식민지와 분단을 거치면서 우리 아동문학이 어떻게 식민지 문학, 반공 문학, 분단 문학이 됐는지, 또 신판 식민지 문학이 됐는지 정리하는 글입니다. 시사문제 중심으로 쓴 원고도 한 권 분량이 되고요. 몸이 이렇게 말이 아니니 제대로 손질을 못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나아지면 내가 살아온 이야기, 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써 보고 싶습니다.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오마이뉴스. 추도의 글]
"겨레의 큰 스승 이오덕 선생 고이 잠드시다. 선생은 우리말을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박도 기자
오늘 어둑새벽 신문을 펼치다가 일면 기사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운명 소식을 알았다. 출근 후, 오전 수업을 마치고 곧장 무너미 마을로 달려갔다.
그런데 당신이 죽으면 반드시 가족장으로 치를 것, 부고는 장례 후에 알릴 것, 일체의 부의금과 조화도 받지 말 것을 말씀과 글로 남기셨다고, 각계에서 보내 온 조화마저 빈소 밖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뒤로 놓였고, 조문객들이 빈소 참배도 못하고 밖에서 서성였다. 평소 선생의 성품을 아는 분은 마지막까지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가셨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안면이 있는 자부님이 먼 곳에서 달려온 조문객들을 빈소로 안내를 해서 분향은 했으나 선생의 마지막 저승 가는 차비는 끝내 드리지도 못한 채 나왔다.
'박 선생 먼 길 오느라고 고생했어요. 내일 수업 있을 텐데 요기나 하고 어서 가세요.' 이오덕 선생님이 다정히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내일(2003년 8월 27일)이 발인인 줄 알면서도 조용히 빈소를 물러나 대원휴게소에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선생은 한자말과 외래어, 외국어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아주 고집스레 우리말을 지키고 되살리는 일에 평생 동안 온몸을 바치셨다.
그 모습은 마치 일제 시대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만주 벌판을 누볐던 독립 투사처럼 거룩하기만 하다. 하긴 총칼을 들고 제국주의자와 맞서 싸운 것만이 독립운동의 전부는 아니다. 붓을 들고 우리말과 얼을 지키는 선비도 그에 못지 않은 독립 투사다.
1997년 여름, 선생을 뵙고자 과천 주공 아파트로 찾아갔다. 좁은 아파트 안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찼다. 부엌 밥 짓는 곳과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통로를 뺀 곳은 모두 책이었다. 큰 밥상 위에도 신문과 책들이 수북히 쌓였다.
"박 선생, 이 신문들 좀 보세요. '뾰족탑'하면 될 텐데, 하나 같이 '첨탑(尖塔)'이라고 하고 있어요. 한글만 쓴다는 <한겨레신문>조차도 그렇게 쓰고 있어요."
그 무렵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을 헐어 내는 보도 기사에 대한 선생의 불만이었다. 선생은 모든 인쇄물을 예사로 보지 않고 꼼꼼히 보셨다. 그런 후, 잘못된 표기나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 외국어로 적은 말은 일일이 찾아서, 글쓴이나 편집자에게 낱낱이 알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오덕 선생의 바탕 뜻은 다음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외국말과 외국 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민주고 통일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는 것이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3년 뒤에 이루어질 것이 20년 뒤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민주와 통일의 바탕이 아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이 아주 변질되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과 남의 글로써 창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한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이 세 가지 바깥 말이 들어온 역사도 한자말-일본말-서양말의 차례가 되어 있는데, 한자말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말에 스며든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말은 한자말과 서양말을 함께 끌어들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이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
내가 책을 펴내면서 선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자 아주 꼼꼼히 읽으신 후, 여러 부분을 교정해 주셨다.
식탁→밥상,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데도, 이따금씩→이따금, 교육이란 미명으로→교육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입장→처지, 주방→부엌, 야채→채소/남새, 획일적→판에 박은 듯이, 국민/민초→백성, 먹거리→먹을거리 ….
나는 선생이 일러주신 대로 글을 고쳐 놓고 보니 훨씬 깨끗하고 쉬웠다. 이밖에도 '~적(的)', '그녀', '및', '등', '에 있어서', '에의' 따위도 일본말의 찌꺼기라고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말로 고쳐 쓰거나 아예 못 쓰게 하셨다. 또, 서양 말법을 따른 '-었(았)었다'라는 과거 완료형 시제는 우리 말법에 없는 잘못으로 우리말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깨트린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얼굴을 붉혔다. 나는 해방 후 세대로 우리말과 글을 50여 년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왔는데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서 별 다른 생각 없이 한자말이나 외래어 일본 말투, 서양 말법을 예사로 써 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녀'에 대한 선생의 보탬 말씀을 듣고는 남녀평등에 대한 높은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왜 하필 여자를 가리킬 때만 '그녀'라고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남자를 가리킬 때면 '그남'이라고 해야 되지요. 남녀 없이 '그'로 쓰면 됩니다."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몸 바친 선생은 '우리말 우리 글 바로 쓰기' 못지 않게 사람 교육에도 깊은 생각과 뚜렷한 철학을 가지셨다.
"사람이 사람답게 자라나려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삶이 있다. 그 첫째는 일하기인데, 사람은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고, 일을 해야 사람이 된다. 일을 해야 사람다운 태도를 가지게 되고, 일을 해야 사람다운 생각을 하게 되고, 사람다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일하는 가운데서 깨치고 찾아낸 것이 가장 올바르고 확실한 앎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도 일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사람의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즐겁게 하는 것말고는 없다.
일이 즐겁고 그 일이 공부가 되려면, 그 일이 자연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다.
옛날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보다 더 큰 스승은 없었다. 사람이 자연을 배우고 자연을 따라 살면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이 제대로 된다.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아름답고 참된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자연을 배반하고 거역하면 사람은 병들고 스스로 망한다. 자연이 없는 교육은 죽음의 교육이고, 자연을 떠난 삶은 그 자체가 죽음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가난의 체험이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가난해야 물건을 귀하게 쓰고, 가난해야 사람다운 정을 가지게 되고, 그 정을 주고받게 된다.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이 넉넉해서 흥청망청 쓰기만 하면 자기밖에 모르고, 게을러지고, 창조력이고 슬기고 생겨날 수가 없다. 무엇이든지 풍족해서 편리하게 살면 사람의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고, 무엇보다도 자연이 다 죽어 버린다. 가난은 어렸을 때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이 가난은 책으로 배울 수 없다. 가난하게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를 아무리 책을 통해 읽어도 자기 스스로 굶어 보지 않고는 굶주린 사람의 마음을 몸으로 알 수는 없다. 텔레비전으로 어떤 사람들의 가난을 보았다고 해도 그것은 가난을 구경한 것밖에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육에는 일과 자연과 가난이 사라졌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그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참된 사람 교육은 될 수 없는데, 이 세 가지가 죄다 없으니 무슨 교육이 되겠는가? 지금 우리 교육은 이 세 가지를 싹 쓸어 없앤 자리에 딱딱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고 그 속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는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아귀다툼을 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무슨 사람다운 교육이 되겠는가?"
또, 선생은 생명의 존엄성과 자연 환경에도 큰사랑을 지녔다. 과천에서 아드님이 사는 충주시 신니면 수월리(무너미) 마을로 거처를 옮긴 후 대여섯 차례 찾아뵈었다.
무너미 마을은 장호원에서 충주로 가는 길 중간쯤 오른쪽 산골 마을이다. 야트막한 고갯마루에는 아드님 내외가 농사를 지으면서 밥집, 우리 농산물을 파는 가게도 열고 있었다.
선생은 거기서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 중턱 개울가에다 아담한 글방으로 꾸며 놓았다. 이 글방은 아드님이 아버지를 위해 손수 지었다는데 그 방안도 온통 책으로 가득 찼다. 책꽂이에는 우리말 우리 글 바로쓰기에 대한 자료와 사오십 년 전 코흘리개 제자들의 글모음을 여태 보배처럼 간직해 두었다.
처음 무너미 마을로 찾아뵈었을 때는 글방 창문 앞 오이 덩굴 얘기를 하셨다. 그때 들려준 말씀이 <우리 말 우리 얼> 제16호에 실린 바 선생이 손수 그린 그림은 생략하고 글만 옮겨 본다.
[자연, 이 놀라운 생명 - 우리가 무심히 먹고 있는 조그만 열매 하나에도… - ]
"창문 앞 오이 덩굴이 자꾸 뻗어 올라가는데, 나중에는 창틀 아주 위쪽까지 올라갔고, 거기 오이가 달렸다. 너무 높아 따지 못하고 두었더니 오이는 자꾸 굵어졌다. 그래도 오이는 감 따는 장대로 어찌어찌 해서 겨우 오이를 땄는데, 크게 놀랐다. 무거운 그 오이를 받쳐 준 것이 받침대 나무의 옹이였던 것이다. 그 옹이가 있는 곳까지 가서 오이를 받쳐 놓았으니, 오이 덩굴은 눈도 귀도 코도 입도 손도 발도 다 있고, 마음도 다 있는 것이 틀림없다."
다음 번에 찾아뵈었을 때는 몹시 앓은 뒤라서 아무나 귀찮을 만도 한데, 멀리서 찾아온 손을 무척이나 반겨 맞았다.
"요즘은 시골사람들도 어진 마음씨를 잃어 가고 있어요. 아무 산에다 덫을 놓아 마구잡이로 들짐승을 잡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가 하면, 온 들에다 농약이나 제초제를 마구 뿌려서 생명체의 씨를 말려요."
마침 밥상 위에 있는 쭉정이 강냉이 송이를 보여 주셨다.
"이 강냉이 송이가 무슨 말을 할까요? 낮에 감자 껍질, 사과 껍질 같은 걸 거름으로 버리러 뜰 앞에 나갔다가, 매화나무 옆에 지난해 다 거둔 강냉이 그루터기에 보잘 것 없이 조그만 송이 하나 있기에 주워서 까 보았더니 글쎄 죄다 쭉정이에 딱 한 알 한 개만 굵직하게 꼭 바윗덩어리, 아니, 큰 금 덩어리 같이 붙어 있는 것 아닙니까? 쭉정이를 대강 세어 보니 115개였습니다. 죽은 알 115개가 한 개를 살려서 이렇게 엄청나게 굵은 금 덩어리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모진 추위에도 얼어죽지 않고, 그렇게 굶주리던 온갖 날짐승도 차마 이 강냉이 한 알만은 먹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 사람이 조그만 이 강냉이 송이의 백 분의 일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이 강냉이 송이를 모셔 놓고, 쭉정이 수대로 백 열 다섯 번 절을 하고 나서, 그가 하는 말을 듣기로 작정했습니다."(<우리 말 우리 얼> 제28호)
나는 이따금 사람의 말이 그리울 때면 수화기를 들고 선생의 말씀을 들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럽고 맑은 말씀이 들려 왔다.
지난 설날 아침에도 전화로 세배를 올리자 훈훈하고 겸손한 사랑이 넘친 말씀이 마치 돌아가신 할아버지 말씀처럼 내 귀에 닿았다.
요즘 우리나라는 날이 갈수록 외국의 문화가 밀물처럼 덮쳐 와 우리 문화가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철없는 백성들은 자식에게 제 나랏말보다 외국말을 더 먼저 가르치겠다고 부부 별거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사대사상에 빠진 학자나 관리들이 국제화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영어의 공용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세태에 우리는 우리말의 큰 지킴이요, 어린이 교육에 큰 버팀목을 잃었다.
외딴 산골에 묻혀 사셨던 진짜 애국자 이오덕 선생님! 부디 편안한 세상에서 명복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이승에서 못다 누린 금실지락을 저승에서는 꼭 누리십시오. 선생님이 남기신 많은 글과 말씀은 두고두고 뒷사람들이 배우고 깨칠 것입니다.
2003년 8월 26일 박도 두 번 절 올립니다.
2003/08/26 오후 10:47
출처 : http://galki.net/musical/?no=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