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나라현. 아스카에서 이곳으로 천도한지 1300년을 맞아 당시 궁궐을 복원하는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2001년부터 180억엔을 들인 복원사업의 핵심은 이 대극전이다. 일본이 본격적 중앙집권적 국가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시점을 이곳으로 천도한 710년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탄생을 뜻하는 710년은 일본인들 마음속에 깊은 의미를 지닌다. 대극전 내부의 그림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일본인의 역사와 마음을 담는 작업이다. 벽화제작은 일본 화조화의 최고 권위자인 우메무라 아츠시씨가 맡고 있다.
"이곳은 정치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신들의 인정을 받아 신의 뜻에 따라 국가를 통치한다는 그런 발상 하에 이 건물을 건설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대극전 중심에 사신도 벽화가 그려진다. 주작, 현무, 청룡, 백호. 우리에게 낯익은 사신도지만 일본에서 사신도 벽화는 20세기 이전 매우 낯선 그림들이었다. 과연 이 벽화의 원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기토라 고분에 출토된 도래인이 그린 사신도 벽화를 참고하여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한반도에서 전해진 사신도. 그것이 이곳 나라 현에 대극전의 벽화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대극전 벽화의 원형이 있는 곳 아스카. 1983년 1300년의 잠에서 깨어난 기토라 고분. 이 고분은 아직도 신비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 길은 고구려로 향한다.
<기토라 고분, 고구려의 하늘을 품다>
일본 아스카에서 발견된 두 개의 아주 작은 고분. 기토라와 다카마스총. 이곳에서 일본 최초의 벽화가 발견됩니다. 20세기 일본 최대의 발굴 가운데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이 벽화들은 과연 일본에선 어떠한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 걸까요.
나라현의 작은 마을 아스카. 이곳을 일본인들은 마음의 고향이라 부른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이곳에서 잉태됐기 때문이다. 기토라 고분은 아스카 남부 소위 왕가의 무덤이 밀집한 지역에 위치한다. 1983년 발굴이후 지속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발굴조사과정에 참여하고 있고 지금도 기토라 고분의 보존을 위해 힘쓰고 있는 이노쿠마 카네카츠 교수(타치바나대 문화재학). 고분내부의 벽화를 처음 만나던 날 그때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첫 발견 이후 고분을 해체하기 않고 조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시경을 이용한 내부 관찰이 시도됐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벽화들이 나타났다. 선명한 색채의 사신도와 천문도. 예상치 못했던 벽화들을 마주하는 현장은 감탄과 흥분으로 가득 찼다. 현무 발견 이후 백호, 청룡이 차례대로 확인됐다. 2001년 주작이 발견되므로써 사신도를 다 갖춘 일본 유일의 고분이 됐다.
이노쿠마 카네카츠 교수 타치바나대 문화재학 "사신도 주에 주작을 발견했을 때에도 감동했었지만 천문도를 발견했을 때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분이었다."
작은 석실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별들이었다. 350 여개의 금박을 입힌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그 별들을 이은 선들로 68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었다.
하시모토 케이조 교수 칸사이 대학 "(당시 일본이) 천문에 관한 기술이나 지식이 있어서 이것을 기반으로 천문도를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기토라 천문도는 모델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지식의 원형이 있었던 것이다."
미야지마 교수(도시샤대 이공학연구소)는 천문도의 관측 지점을 분석했다. 분석결과 아스카의 34도가 아닌 북위 37도라는 것을 밝혀냈다.
"37도라 함은 아마 한반도의 어느 지역이 될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지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1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의 한계. 즉 주극권을 분석하여 관측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오차 범위를 감안해도 아스카에서는 볼 수 없는 별자리.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고구려의 천문도가 이곳 기토라에서 출토된 것이다.
하시모토 케이조 교수 칸사이 대학 "(일본에서) 천문도는 기토라에서 출토된 게 처음이다. 왜 천문도가 그곳에 그려져 있는가... 실제로 관측해서 천문도를 그려 넣은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천문도는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을 그린 화공들은 고분을 건축할 시기보다 수십 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 신라, 고구려 중 아마도 고구려계라고 생각한다. 그런 도래계 화공들이 그린 것이다."
기토라 고분에서 북쪽으로 약 1km 지점. 기토라 고분과 형제고분이라 불리는 다카마쓰총(高松塚)이 있다. 1972년 발굴 조사를 시작한 다카마쓰총. 특별사적으로 지정된 후 역사공원으로 단장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극채색화는 일본에선 매우 드문 대발견이었다.
와다 아츠무 카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지도연구원 "그 당시 23일 인가에 벽화가 발견되었으니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 다카마쓰총 석실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석실 서쪽에서 보인 여자군상이나 백호의 초록색, 노란 색채가 정말 다채로웠다."
고분 옆에 있는 벽화관. 모사된 벽화를 전시하고 있다. 현재 보존처리 중인 원본은 국보로 지정된 상태. 이 모사도는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 수십 명이 2년 반에 걸쳐 재현에 놓은 그림들이다. 다카마쓰총엔 기토라에서 볼 수 없는 인물군상들이 있다. 그중 서벽에 여자 군상도는 아스카의 미인도라 불리며 고대일본의 대표미술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다카마쓰총 천장에도 천문도가 그려져 있다. 기토라 고분보다는 간략한 형태이긴 하지만 중앙의 북극 오성과 28수의 별자리가 금박으로 빛나고 있다. 일본에서 벽화가 존재하는 고분은 단 2곳. 형제고분은 10년 간격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났다.
도노하시 아키오 교수 코베대학 미술사학 "일본에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두 개나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이 두 개의 고분이 아마도 마지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700년 이후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장을 하면 거대한 관이 필요 없기 때문에 큰 고분과 석실도 필요 없게 된다. 게다가 석실이 없어지면 그림을 그릴 공간도 필요 없고 작은 항아리면 충분하다. 일본에서는 고분이 필요 없어지는 시기에 다카마쓰총과 기토라고분이 만들어진 것이다."
6세기 초에 세워진 호류사(法隆寺). 고구려의 담징과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 금당벽화는 중국의 윈강석불, 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3대 미술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현재는 볼 수가 없다.
홋타 케이치 카시하라 고고한 연구소 지도 연구원 "호류사 벽화는 불타 버려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토라고분과 다카마쓰총의 벽화만 남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고분 벽화가 갖는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고분 발견 이후 보존을 위해 첨단기술이 총동원 된다. 석실 외부를 차폐시키고 방진시설을 설치했다. 또한 자동 온?습도조절장치까지 갖췄다. 발굴은 도굴로 파손된 구멍을 통해서만 이뤄져야 하기에 쉽지 않은 작업들이었다. 보다 선명한 영상을 촬영하기 위한 특수카메라가 개발됐다. 최초 발견 이후 발굴에 20여년이 소요됐다. 발굴은 더디지만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도노하시 아키오 교수 코베대학 미술사학(기토라 고분 보존대책 위원) "중국에도 벽화가 있고 고구려에도 있지만 설마 일본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일본은 뒤쳐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벽화가 발견된 것이다. 일본은 벽화 고분을 보존해 본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발굴 작업 중 석실과 벽화가 분리된 것이 발견됐다. 특히 청룡을 그린 회벽이 최대 1cm까지 부풀어 오른 것이다. 특수접착포로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1300년 동안 이 석실을 지켜왔던 벽화들에게 가장 큰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다카마쓰총 벽화에서 발생했던 곰팡이 문제보다 심각하진 않았지만 곳곳에 곰팡이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벽화 보존처리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만다. 문화재를 현지에서 보존하는 것이 원칙이란 측과 심각한 손상 우려로 벽화를 떼어 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영상을 보면서 벽에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다."
벽화를 떼어 내는 작업은 정교한 수술처럼 진행됐다. 우선 특수 코팅된 종이를 한 장씩 벽화에 붙였다. 충격흡수판을 붙여 벽화를 고정시키고 벽화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벽화를 떼어내는 과정은 일본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벽화보존에 관해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중국과 한국도 이 보존과정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1300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벽화가 앙상한 피부의 모습으로 석실 밖으로 들려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도노하시 아키오 교수 코베대학 미술사학(기토라 고분 보존대책 위원) "인간이 아무리 과학기술을 구사해도 보존이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1300년이나 잠자고 있었으니 더 오래 잠자고 있는 편이 좋았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발견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아쉬웠다."
벽화에 대한 사랑만큼 깊은 고민이 계속되고 있다. 이미 아스카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벽화를 아스카로 옮길 것인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는가.
이곳은 당시 궁궐이 있던 곳입니다.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사는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요, 그리고 이 두 고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일본 왕족의 고분들이 밀집된 지역입니다. 과연 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일본학계는 아직도 뜨거운 논쟁 중에 있습니다.
1300년 동안 이 고분 속에 잠들었던 주인은 과연 누굴까. 발굴 당시 두 고분 모두 도굴 당한 상태. 남아 있는 유물을 통해 조금씩 무덤의 주인에게 접근해 가야 했다. 벽화 속 여인들의 복장은 고구려 수산리 벽화의 여인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다른 요소들도 품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스커트는 중국과 고구려 모두에서 볼 수 있었고 손에 든 것도 중국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머리스타일은 한반도나 중국 모두에서 볼 수 없는 형태다. 이 복장도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일본 고대의 여성들 아마도 궁중의 여성들이라 추정되며 실제의 풍속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현무, 청룡, 백호 등의 발견에 이어 새로운 그림이 발견됐다. 벽화 하단에 십이지신상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십이지신상은 당나라와 신라에서 발견되는 조각상들. 특히 신라의 괘릉과 김유신 묘에선 석상의 형태로 발견된다.
홋타 케이치 "신라에서 십이지신상은 석실 안에 토우의 형태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기토라 고분은 조각상의 형태로 석실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벽화의 형태로 그려졌다. 그 점에서 기토라 고분은 신라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다양한 문화가 섞인 벽화. 그렇다면 두 고분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도굴에서 살아남은 일부 유물들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당나라 시대 거울이 발견된 것이다.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학 명예교수 "다카마쓰총에서 당의 해수포도경이 출토된다. 그것은 당나라 것으로 제작연대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다."
당나라에서 제작된 해수포도경(海獸葡萄鏡). 한 거푸집에서 6개의 거울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분에서 발견된 해수포도경의 제작연대는 7세기 말이었다. 기토라 고분에서 발견된 치아를 통해 피장자는 사?오십대 남성으로 밝혀졌고 기토라 고분이 다카마쓰총보다 조금 앞서긴 하지만 모두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두 고분은 왕가의 묘 터에 있다. 허가받은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 아니면 이곳에 묘를 만들 수 없었던 곳이다. 일본학계는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가능성 있는 대상들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범위를 좁혀 나갔다. 이노쿠마 교수는 당시 사망한 왕자들에 주목했다.
"황족과 연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디자인들과 중국의 천자(天子)와 관련 있는 것들이 있어서 피장자는 일본의 황족이라고 생각한다. 기토라고분이 다카마쓰총보다 조금 앞선 시대였다면 덴무천황의 다케시 왕자 무덤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덴무천황의 아들 오사카베 왕자의 사망은 705년. 그가 다카마쓰총의 주인이고 그보다 먼저 사망한 다케시 왕자가 기토라에 묻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다른 고분과 규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석실 안쪽의 크기가 가로 2.6m, 세로 약 1m, 높이 약 1.1m. 성인 두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기토라 고분 또한 거의 같은 크기다.
와다 아츠무 카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지도 연구원 "당시 고분 중에서 규모가 매우 작다. 그래서 다카마쓰총이나 기토라 고분의 피장자가 천황이나 왕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고분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천황릉들과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도노하시 아키오 교수 "문제는 ‘천황릉에 벽화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천황의 릉은 규모가 더욱 크고 게다가 팔각형이다. 이 안에는 벽화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카마쓰총 동벽 남자 군사)비단으로 된 갓에 짙은 녹색의 복장을 한 인물. 그가 신분 사회에 가장 높은 곳에 인물이란 것에 대해선 반론이 없다. 그가 황족이 아니라면 과연 누굴까.
센다 미노루 나라현립 도서 정보 관장 "상당히 신분이 높은 인물이었다고 추측된다. 당시 덴무천황의 일족이 아니면서 신분이 높았던 인물이 매장되었다면 백제왕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고 이전부터 주장해왔다."
(히노쿠마(檜前) 절터)다카마쓰총을 마주보는 언덕에 절터. 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에서 초석이 나왔다. 일본에서는 가장 큰 강당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중기단이다. 도래계들은 사찰을 세울 때 반드시 이중기단양식을 채택하였다."
이 사찰의 주인은 백제계 동안 씨. 5세기부터 이주해 이 지역에 정착했다. 이후 아스카 지역에서 강력한 호적세력으로 성장했다. 이 절은 두 고분의 중간에 위치한다. 절터엔 현재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을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다. 거주지역을 달리했던 도래인들. 이곳 아스카는 백제계 동안 씨가 가장 큰 규모였다.
와다 아츠무 "일본 고대사를 통틀어 가장 큰 세력을 떨쳤던 도래계 씨족으로서 백제 더 나아가 북남조의 문화를 수용했다. 그들이 7세기 후반 씨족 사찰로 히노쿠마사를 창건한 것이다."
나라시대 말엽에 이르면 이곳 주민의 8,90%가 백제계 동안 씨였다고 전해진다. 이 동안 씨가 협력했던 가문은 소가 씨. 백제계 소가 씨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아스카 중앙에 위치한 산기슭에서 발굴이 한창이다. 이곳은 소가 씨의 대저택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저택의 전체 규모는 지금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석무대라 불리는 이곳은 소가 씨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분에 사용된 돌들은 30여 개. 총중량은 2300톤에 이른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100년 동안 일본고대사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었던 소가 씨. 때론 천황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던 가문이었지만 마지막 후손은 이곳에서 목이 잘리고 만다. 소가 씨 가문이 몰락한 장소는 그들이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던 아스카사 앞이다.
아스카사(飛島寺). 소가 씨의 의해서 지어진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사찰이다. 도래계로 대표되는 불교계와 이를 반대하는 토착호족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계 도래인 소가 씨. 그는 승전 기념물로 이 절을 짓는다. 절을 착공한지 5년 만에 부처님의 사리탑이 세워진다. 이때 일본왕실의 장관들과 고관대작들 100여명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봉안식에 도열했다고 한다.
우에지마 호쇼 아스카사 부주지 "그 당시 일본이라는 이름이 아닌 왜국이라고 불리던 시기로 그런 일본에 처음으로 수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아스카사의 창건이다. 아스카사는 당시 대륙 문화의 집약체로서 그들의 기술로 세워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술이었으므로 아스카사를 중심으로 최첨단 문화가 모여들면서 발전하가 시작했다."
소가 씨가 축출된 후에도 백제와 천황과 긴밀한 관계는 상당기간 지속된다. 조메이 천황은 백제 궁과 백제 절을 짓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의자왕의 아들 선광이 일본으로 넘어오며 그를 백제왕으로 칭했다고 한다.
센다 미노루 "특별히 허가 받을 정도로 일본 천황가는 백제왕에 대해 매우 두터운 신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황가와 동일하게 대우하여 피장자를 그곳에 묻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백제왕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가?"
무덤의 주인이 황족 또는 백제왕이란 주장 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부호로 가득차 있다.
그곳의 피장자를 밝히는 과정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다카마쓰총 벽화에 그려진 여인들의 의상을 보면 고구려 벽화에 그려져 있는 여인들의 그것과 대단히 흡사합니다. 천문도 또한 고구려의 천문도라고 하는 데에는 의견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무덤의 주인이 백제계라면 왜 고구려의 그림을 그렸던 걸까요. 당시 아스카에는 백제계 도래인들만 있었던 걸까요. 이곳에도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진 아스카사. 아스카 대불은 15톤의 구리를 사용해 만들어졌고 당시는 30kg의 황금으로 도금돼 있었다. 그 황금의 반은 고구려의 영양왕이 일본에 보낸 것이다. 일본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존경받는 쇼토쿠태자. 일본을 중앙집권적인 율령국가로 만들고 불교를 기반으로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이곳 아스카사에서 만난 스승은 고구려 스님 혜자였다.
우에지마 호쇼 아스카사 부주지 "아스카사 창건 당시, 소가 씨는 절의 수장으로 취임하게 되는데 그는 스님이 아니었기에 고구려에서 혜자(慧慈) 백제에서는 혜총(慧聰)이라는 스님이 이 절에 거주하게 된다. 특히 고구려의 혜자 스님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된 사람으로 일본 불교 확대에 큰 힘을 발휘하였다."
595년 파견된 혜자는 이곳 아스카에 머물면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융성케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 최초의 절을 창건하는데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협력하고 본존인 아스카 대불의 주조에 쓸 황금을 보내오는 등의 일은 일반적 정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가쿠린사(鶴林寺). 일본 최초의 스님을 배출한 사찰이다. 그 세 비구니의 이름은 선신과, 선장, 그리고 혜선 그들의 스승은 고구려 승려 혜편이었다. 소가 씨는 자신의 딸 등 3명을 혜편의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훗날 이들은 백제 유학길에 올랐고 돌아와 일본 최초의 승려가 됐던 것이다. 당시 나라 아스카에서 포교활동을 펼치던 혜편은 반대파들의 살해 위협에 이곳까지 피신해 오게 된다. 은둔생활을 하던 그를 찾아온 인물이 있었다.
미키 에세이 가쿠린사 주지 "당시 불교에 대항하는 파가 거세게 반기를 들면서 혜편은 생명까지 위협을 받는다. 그래서 현재의 효고현인 하리마로 도망쳐 숨어 생활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12살의 쇼토쿠태자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몰래 이곳을 방문하여 혜편으로부터 불교의 가르침을 받았다."
일본의 불교를 전파한 승려 중 가장 먼저 일본에 도착해 포교활동을 펼쳤다고 기록돼 있는 고구려 승려 혜편. 이곳에 숨어 지내던 혜편을 왜 쇼토쿠태자는 찾아온 것일까.
"(쇼토쿠태자는) 불교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교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는 승려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태자에게 불교를 가르칠 만한 인물도 없었다. 그래서 쇼토쿠태자는 혜편 스님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이곳에 숨어 있던 혜편 스님을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 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태자의 방문에 이 지역 주민들이 통나무로 작은 궁을 만들어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당시 문을 재현한 흔적만이 남아 있다. 통나무로 만든 작은 궁. 하지만 아주 작은 집이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어린 태자의 원대한 꿈이 영글기 시작했다.
"쇼토쿠태자가 돌아간 이후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문은 굳게 닫힌 채로 열리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불개의 문(열리지 않는 문)이라 불린 것이다. 쇼토쿠태자만이 그곳에 들어가 혜편 스님과 둘이서만 공부했다고 한다."
혜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12살의 쇼토쿠태자. 그가 16살이 되던 해 이곳에 혜편을 위한 사찰 건립을 제시한다. 그 사찰이 현재 가쿠린사의 기원이 됐다. 고마(許麻) 신사. 원래 이곳의 이름은 고려신사다. 일본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이 신사는 특히 쇼토쿠태자가 고구려왕들을 위해 만든 신사로 알려졌다.
다나카 요지로 고마신사 궁사 "쇼토쿠태자는 고구려 사람들을 이 부근에 유치했다. 당연히 고구려 분들은 선조들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고마신사’를 만들고 싶어 했다."
5세기부터 일본에 대거 진출한 백제.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6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난다. 그리고 진출방법 또한 백제와는 전혀 달랐다.
훗타 케이치 "오사카 부근으로 들어올 때 자신들이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일본 생활에 적응한 후에 기술 등이 뛰어난 사람들이 중앙 정부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백제, 가야 사람들이 도래해 왔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에는 특별한 신분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들어오는 형태를 띄었다."
일본 교토. 호칸사 경내에 야사카 탑. 높이 46미터에 이 오층탑은 일본 최초의 목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찰의 건립에 관한 2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사노 젠유 호칸사 주지 "첫째 쇼토쿠태자의 창건설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주변에 거주했던 호족인 야사카씨가 그들의 씨족 사찰로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규슈로 건너온 고구려계 사람들이 이곳 주변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들 중 일부가 이곳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야사카 시는 고구려계 씨족이다. 이들이 세운 야사카 탑은 몇 번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 초석은 아스카시대 식 그대로 남아 있다.
"바닥면이 작고 높이는 높은 데도 불구하고 지진이 일어나도 쓰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로 만들어진 만큼 매우 선진적인 기술을 보유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른바 일본 고층건축의 기본적인 발상은 본래 이 오층탑에서 나왔다고 한다."
야사카 시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이 보낸 사신의 후예라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왜 이곳으로 왔을까. 6세기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당까지 대륙은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이때 고구려는 일본을 외교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전문가 집단을 파견한다. 야스카 신사는 그 후손의 흔적이다.
"주변에서 세력을 떨쳤던 야사카 씨 중에서 야사카노 미야쓰코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 이 절을 창건, 즉 씨족 사찰로 창건했다. 그리고 씨족의 신으로 현존하고 있는 야사카신사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교토의 기온마츠리. 일본의 3대 마츠리라 불리는 축제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곳이 야사카 신사. 하지만 이 신사의 기원과 고구려에 대한 역사를 찾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메이지 유신이후 도래계의 흔적을 일본역사에서 지워나갔기 때문이다.
백제계에 비록 소수였지만 고구려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고구려의 흔적을 추적하던 중 우리는 황문연(黃文蓮)이라는 고구려 화공집단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다카마쓰총과 기토라고분에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었습니다.
일본 교토 남부의 기즈강. 과거 고구려 마을이 있던 곳이다. 기즈강을 따라 상류와 하류에 각각 상고구려 마을과 하고구려 마을이 형성됐었다. 이 마을의 중심에서 고구려 절터가 발견됐다. 동서로 2백미터 남북으로 2백미터 규모의 큰 사찰이었다.
니카시마 사사시 키즈가와시 교육위원 "과거에 야마시로국 대고구려 마을(高句麗之里)이라고 불렸던 지역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대거 이주한 지역이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곳 고구려 사람들은 정신적 지주로서 고구려 절을 창건했다. 그들은 이 사찰에서 조상의 명복을 빌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찰을 조성할 시기는 고구려의 화공집단이 형성될 무렵이었다. 이들이 이 사찰건립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절터에서 발견된 자그마한 유물. 암기와 뒷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상이다.
"이것을 보면 눈, 코, 그리고 관 아래의 머리카락 등 불상, 불화를 그려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그려져 있다. 제와장이 심심풀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이 기와를 만들 때 신당에 색을 입히는 화가가 함께 참가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카미코마. 상고구려 마을이라는 뜻이다. 1300년에서 1400년 전 고구려의 사신을 맞는 영빈관이 만들어질 정도로 고구려가 교류가 활발한 곳이었다. 일본조종에선 공인화가집단을 두는데 고구려계의 두 집단이 이곳 출신이다.
"그 사람들의 이름에 야마시로 또는 황문(기부미)이라는 지명이 쓰이고 있는 이상 이 지역이 본원지라 하겠다."
고대 일본의 황족과 귀족의 계보가 적혀 있는 책. 황문씨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집단이었다.1)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엽에 걸쳐 조정에서 일하던 화가 집단 중 가장 크게 활약한 그룹은 고구려 계통의 황문씨였다. 훌륭한 화가 집단이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황문씨의 활약은 이곳 아스카의 두 고분에서도 나타난다. 일본학자들은 피장자에 대해선 의견을 달리해도 이 벽화를 그린 사람이 황문씨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와다 아츠무 "황문씨는 고구려계 사람이지만 덴지 천황, 덴무?지토우 천황 시대에 걸쳐 활약한 인물이다. 아마도 호류사의 불탄 벽화의 복원에도 관련이 있다고 추측된다. 마카마쓰총과 기토라 고분 벽화를 자세히 보면 기토라 고분의 경우 天文圖이지 장식도가 아니다. 천문도의 계보를 더듬어보면 역시 고구려의 밑그림이 황문씨 가문에 전해졌으며 이것이 벽화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황문씨의 활약이 돋보이는 시기는 덴무천황 때부터다.
도노하시 아키오 "지토천황과 몬무천황이 사망했을 때 황문씨가 장례식 준비를 일임 받는다. 장례식장을 설정하거나 장례식을 위한 복장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황문씨가 지휘하였다. 즉 빈궁사를 맡아 장례 준비를 지휘한 것이다."
수평을 재는 기구 일본 최초의 수증기를 황문씨가 헌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는 단순한 그림만 그리는 화공이 아니었다. 건축과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노쿠마 카네카츠 "황문씨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천황가의 패션 디자이너가 된다. 천황의 복장은 중국 천자의 복장을 흉내 낸 것이었다. 태양과 달, 북극성, 북두칠성, 용 등으로 장식한 새빨간 옷이었다. 황문씨가 그린 옷을 일본에 전했을 가능성도 높다."
아스카사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아스카 공방터. 다양한 물건이 제조돼 아스카 지역에 공급된 곳이다.
"이 동그란 곳을 도가니라고 해야 하나... 구리를 녹이는 용기를 놓고, 그 아래에 숯을 놓았기 때문에 지면에 탄 흔적이 있다."
주조기술자로서 많은 도래인들이 이곳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공방에서도 황문씨가 활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680년 경 덴무천황 시대에 구리를 주조했던 곳이다. 부본전(富本錢, 일본 최초의 화폐) 또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주조 기술이나 디자인을 담당한 황문씨도 여기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황문씨는 불경의 표지를 제작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고구려계의 씨족이었다. 그런데 동전을 주조하는 관직에 임명된 것이다. 그 직은 단순한 기술 관직이 아니었다. 일본관직 중 최고위층인 정호위의 귀족이 된 것이다. 불경 표지를 디자인하던 위치에서 일본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황문씨. 급속한 신분상승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672년 왕위를 둘러싼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규모의 내란에서 황문씨는 새로운 천황의 편의 선다.2) 이 내란 이후 호족세력의 판도가 새롭게 변한다.
도노하시 아키오 "672년에 대규모의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전 천황의 계통에서 덴무, 지토, 몬무라는 새 천황으로 정권이 교체된다. 이 당시 (쿠데타에) 협력한 것은 황문씨였다. 그전까지는 백제계열의 세력이 천황을 뒷받침했고 천황의 권력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이 쿠데타 이후에는 백제계 세력은 배제되고 고구려 계열의 사람들이 새로운 세 천황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멤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쿠데타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 지위가 수직 상승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본의 야쿠시사. 이곳에 내란 이전 황문씨의 활동상이 나타나 있다. 부처님의 발자국을 새긴 불족석. 이 불족석은 당나라에서 가져온 탁본을 기초로 만든 것이다. 탁본을 가져온 이가 바로 황문씨. 그는 불족석 위에도 다양한 그림 등을 가지고 왔다고 전한다. 당시 당나라에 파견된다는 것은 일본 조정에서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사신 황문씨가 대당국으로 향해 보광사에서 전한 것 이것이 두 번째 본이다."
"(황문씨가) 나라의 야쿠시사에서 불족석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문씨 가문은 뭐라고 할까? 그는 아스카 시대의 다빈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야쿠시사 금당 안에 약사여래상. 세계문화유산이자 일본의 국보다. 불상에 안치된 대좌는 불법이 전파된 당시 교류지역을 나타낸다고 한다. 대좌에는 사신도가 조각돼 있다. 이 사신도 제작에 황문씨가 참여했다고 보고 있다. 기토라 고분과 다카마쓰총에 그려진 사신도는 동일한 밑그림을 기초로 그려졌다는 설이 우세하다. 황문씨가 두 고분의 벽화를 그렸던 시기. 그 때는 이미 고구려는 멸망한 뒤였다. 고구려의 갈 수 없게 된 황문씨. 그에게 남은 건 황문씨 가문에 전해지던 도안 뿐 실제 고구려 벽화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당나라. 그곳에서 참고할 그림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도노하시 교수는 황문씨의 그림에서 다양한 문화요소가 함께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황문씨가 고구려에서 건너온 도래인이지만 아쉽게도 이미 고구려는 멸망했기 때문에 고구려에 가서 벽화를 직접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벽화 양식이나 주제 등을 참고하면서 일본의 풍속에 맞춰 바꾼 것이다. 선조들의 벽화를 기억하고 그것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는 황문씨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스카의 아주 작은 고분 기토라와 마카마쓰총. 이 고분벽화 제작을 황문씨가 했다면 과연 누가 황문씨에게 벽화 제작을 의뢰했던 것일까. 왕가의 묘 터에 자신의 묘를 쓰는 것을 허락 받을 수 있는 사람 중 벽화를 그리고자 했던 이는 누구일까.
"(신분의 구별은) 벽화의 유무와 그다지 상관이 없다. 단지 벽화를 그리고 싶다는 피장자 또는 유족의 바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벽화를 그릴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어야 한다. 황문씨는 본래 화공의 가계이다. 그러기에 벽화 작업은 선조로부터 이어져 온 기술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두 고분은 화가와 피장자의 문제로 집약해서 생각할 수 있다."
피장자를 밝히는 것은 학계의 남겨진 어쩌면 풀리지 않을지도 모를 숙제다. 그러나 낮은 화공의 신분에서 일본 최고의 귀족이 된 황문씨. 7세기 아스카 시대의 그의 활약상은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확실한 유물이 새롭게 발견되지 않는 한 이 두 고분의 주인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고향의 하늘을 품고 싶어 했던 고구려인 황문씨. 우린 아직도 아스카에서 그이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본 글의 내옹과 이미지의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 주 1) 황문연은 고구려 구사나왕의 후손이다. 2) 710년 황문씨 사망, 임신년의 공으로 사후 정사위의 지위를 받아... |
출처: 책을 벗 삼아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