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6월 28일 날씨는 맑았다.
아침 일찍 조식을 간단히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인천 공항에 갔다. 메르스 때문인지 공항이 예전처럼 분비지 않아 좋다.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에 들어가 탑승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환전을 했다. 환율이 올라 500.000원을 줬더니 431.$을 받고 1110원을 돌려받았다.
10:45분 발 제주항공 이다.
비행기에 오르니 안내 멘트가 나온다. 이륙하는 비행기가 많아 조금 늦어진다고 한다. 잠시 후 비행기는 굉음과 함께 지상을 박차고 오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섬들이 아름답다. 이륙 30분 쯤 지나니 기상이 좋지 않아 기체가 흔들린다. 저가 항공이라 흔들리는 것이 안인가 하는 마음에 조금은 불안하다.
출발 한 시간 후에 기체우현으로 보이는 지상이 제주도가 안인가 생각 된다. 비행시간이 4 시간 넘는다고 한다. 조금은 지루하다.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 내리니 인천공항을 본 뒤라 시골같이 한산하다. 공항은 새로 지어 깨끗한 편이다.
공항 밖에 나가니 가이드가 인원 점검을 하고 있다. 우리말은 잘하나 분위기가 이국적이라 어디 사람이냐고 하니 한국인 이라고 하며 왜냐고 되묻는다. 피부가 검어서 그런다니까 이곳에 와서 10년만 살아 보란다. 공항을 나서니 화끈하다. 지금 밖의 온도는 44℃라며 햇 볓을 쪼이지 말고 차에 오르라고 한다.
처음 도착한 곳은 식당이다. 중식 후 베트남 남부 국립공원 엔뜨산으로 향했다.
길가 집들이 우리와는 다르다. 이곳은 불란서 문화의 영향을 받아 집이 뽀족하고 좁으며 전면은 좁고 뒤쪽으로 길쭉이 들어갔으며 4~5층으로 위로 올라갔다. 그중 주거공간은 2 층이란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문의 수자에 따라 세금을 부과한 관계로 전면에 만 문이 있는 뽀족한 집들이 길가에 국데 군데 취락을 형성했다.
논 가운데도 묘가 있어 물어보니 이곳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요시하여 부모가 죽으면 생전에 지정한 자리에 무덤을 만들고 삼년동안 아들들은 엄지손톱을 자르지 않고 길렀다가 삼년이 지난 후에 이장을 하는 데 아직 남아 있는 살점들을 엄지손톱으로 글어서 깨끗이 하여 이장하는 장례문화가 지금 까지 있다고 한다. 나는 불효자라 그럴까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주위에는 삼성의 전자단지가 넓게 자리 잡고 있다고 하나 반대편이라 보지 못했다.
앞으로 LG 전자단지가 대규모로 조성 된다고 한다. 이곳의 제품 불량률이 우리나라 보다 적다니 우리는 분발해야 하겠다.
베트남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얼마 던지 취직을 할 수 있으니 이곳에 오면 자기가 책임지고 취직을 시겨 주겠다고 큰 소리를 친다.
엔뜨산 국립고원에는 베트남 최초의 사원인 죽림사가 있다. 산중턱에 위치하며 조그만 사찰이나 경관이 수려하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가는 길은 비교적 잘 포장이 되어있다. 도착하니 대나무 모자를 나누어 준다. 이 모자는 뜨거운 햇살 막기에는 좋다. 처음 보는 스트릿카(타고 내리기에 편리하다)를 타고 산 밑까지 가서 산길은 날씨가 더워 케이불카를 택했다.
절에 올라 기념사진을 한 컽하고 청소비를 보태고 내려오는 길에 숲 사이에 이름 모를 꽃들이 있는 데 자세히 보니 무궁화 원종인가보다 꽃은 예쁘지 않았으나 담아왔다.
다음은 하롱베이로 향했다.
가이드의 멘트에 의하면 하롱베이는 삼천여개의 섬으로 이루어 졌으며 세계 3대 자연유산에 등재 된 수려한 곳이라고 한다. 거의가 무인도며 일부 큰 섬에는 주민이 살았으나 자연보존을 위하여 주민들을 완전히 철수 시켰다고 한다.
석식은 삼겹살에 뷔페식이다. 종업원들이 끝까지 시중을 든다. 술을 달라고 했더니 소주가 나왔는데 700m 정도 되는 데 29.5도다. 약간의 향은 있으나 곡주라서 거부감이 없이 맛이 있다. 술을 마시고 로얄로스터하롱호텔에 들어가니 깨끗하다.
6월 29일 날씨는 맑다.
조식 후 부두에 나가 목선에 올랐다. 10여분 정도 가다 정박 중인 배에 옮겨 타니 이곳에서 구명조끼를 나누어 준다. 적은 배에 8명이 탔다 동굴과 아름다운 섬 사이를 이리저리 두루 돌아보았다. 사진에서만 보든 섬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가는 도중 사공이 몇 군데 촬영을 하라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우리 일행을 직접 찍어도 준다. 고마워서 나오면서 천원을 줬더니 고맙다고 한다.
다시 먼저 배에 올라 꽤 오랫동안 이동하는 중에 진행 방향에 뽀뽀를 하는 형상의 뽀뽀바위가 보인다. 그러나 뒤로 돌아 가보니 물고기모양이다. 신기한 바위를 보며 어느 모퉁이를 돌아가니 멀리 정자가 있는 산이 보인다.
티톱섬이라고 한다. 티톱섬은 사회주의 국가 시절 스타린이 이곳을 방문 했을 때 이곳에 올라 보고 섬하나를 달라고 하니까 개인 것이 아니라 주지는 못하나 필요할 대는 언제든지 와서 쉬어가라고 했다는 설화가 있는 섬이다. 섬에 올라 경관을 바라보니 바다위에 섬이 떠다니는 모습이다.
내려와 동굴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는 중에 사공에게 돈 5천원을 주었더니 소양강 처녀를 우리들 보다 더 잘 부른다. 어는 굴을 지나니 원숭이들이 하나 둘 쫒아 나온다. 먹을 것을 던져 주니 받아먹으며 다이빙 모습을 보여준다. 돌아 나오는 길에 수상뽀트 놀이는 스릴이 만점이다.
선상에서 중식이 나왔는데 진수성찬이다. 관광이 아니라 맛 기행을 나온 기분이다. 맛도 있고 푸짐하다. 식사 후에는 조금 쉬는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에 이들은 장사를 한다. 액세서리를 사라고 조른다. 아이들이 깎는 다고해서 샀으나 시내에 나오니 바가지를 옴팍 썼단다.
나오는 길에 배가 고장이 나서 몇 분 소비하고 간곳은 마사지 집이다. 2시간 동안 5천원 이란다 별로 시원한 줄은 모르겠으나 시간에 비하여 서비스료가 싸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이곳의 옛날의 생활상의 풍자한 수상인형극(민속공연)이다 옛날에 TV에서 한번 본 기억이 난다. 별로 볼 것 없다고 했으나 재미있었다.
6월 30일 역시나 맑고 덥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택시와 오토바이가 경주하듯이 질주 한다. 차선도 없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데 사고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나는 운전을 못할 것 같다. 하노이로 나오는 길에 들린 곳은 이곳의 특산품인 노니 홍보관 이다. 차에서 내리니 햇빛에 서는 잠간을 기다릴 수 없이 해 빛이 뜨겁다. 우리의 인삼보다 좋은 세계가 알아주는 건강식품이란다.
이곳은 어디를 가도 평야지다. 들은 풀밭이 있나하면 모판이 있고 누렇게 읽은 벼도 보인다. 이곳은 3 모작이 가능하고 세계 3대 살생산국이란다. 논둑에는 바바나 나무가 심어저 있다.
점심은 여행 중에 길가 식당에 들르니 이곳은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차고가 있다. 점심으로 쌀국수가 나왔는데 참으로 맛이 있다.
하노이로 가는 길에 관광 상품 점에 들려 세라믹 팔찌 두 개를 샀다.(500불) 오는 길에 가이드의 멘트에 의하면 베트남에는 아직도 관광을 할 수 없는 곳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좋아 젖으나 월남전 당시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든 관계로 처음에는 그곳에 가면 돌 세례를 받았으나 지금은 달걀 세레를 받는 곳이란다. 교민들이 때마다 선물을 갗이고 찾아가서 화해를 기도한 결과 많이 순화되었으나 아직까지 관광은 못한다고 한다.
이곳도 개발이 한창이다. 멀리 철길을 내고 있는 곳도 보이고 고속도로를 만드는 곳도 보인다. 기존 길도 넓히고 있다. 고속도로는 중앙 분리대가 화단으로 넓게 조성해서 나무를 심었다. 이 나무(협죽도)가 병충해를 막는 효과가 있는 나무란다.
다음은 하노이 시내 관광을 했다. 시내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다니고 있다 역시 이곳도 국제도시다. 많은 외국인이 시내를 돌고 있다 우리일행은 전동 카로 한 바퀴 돌고 자유 시간을 한 시간 받아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 봤다.
시내를 도는 동안 지나는 차를 봤더니 전체 차의 반은 우리 현대와 기아차가 찾지 했고 단일 차종으로는 도요다가 제일 많았다. 호수가 롯데리아에서 냉커피를 마셨다. 홍황끼엠호수를 중심으로 36거리를 이루고 있는 하노이의 중심지라고 한다.
다음은 국회의사당, 호치민 관사, 집무실을 돌아 봤다.
군인들이 지키고는 있으나 어느 곳에 들어가도 제지하는 일이 없다.
다음은 라텍스 판매장에 들렸다 모든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다음에 찾은 곳은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경남빌딩이다. 이곳의 랜드 마크라고 한다.
73층 에 올라 시내를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지에 건물과 공원이 펼쳐졌다. 그림 촬영장에서 많은 사진들을 찍었다.
저녁 늦게 밥을 먹고 모영탄살라호텔에 들어 갔다. 하롱베이호텔보다는 못하다.
7월 1일 오늘도 역시 맑고 덮다
늦잠을 자고 8시에 일어나 조식은 걸렀다 9시 떠나오다 운동장 옆에 있는 우리국민이 운영하는 커피 시음장에서 커피를 마셨다 족제비 똥 커피라는 데 맛은 좋으나 사지는 않았다. 10시경 한식으로 중식을 하고 비행장으로 나왔다.
베트남은 옛날부터 우리와는 많은 인연이 있다. (우리나라에 귀화 性氏 수는 136개라고 한다.) 베트남에서 귀화한 성씨는 정선이씨와 화산이씨가 있다.
이 두 성씨는 12세기와 13세기 안남국의 왕자가 우리나라에 도래하여 정착함으로서 얻은 성씨들이다.
정선이씨의 시조는 안남국(베트남)의 왕자인 이양곤이다. 이 사람의 형이 바로 李 陽煥(이양환)으로 안남국의 5대왕인 신종이다. 이양곤, 이양환 두 형제가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결국 이양곤이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탈출하여 고려에 정착해서 살았고 그 5대 손 이의민이 고려 의종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해 큰 공을 세워 당대 제 3위의 위치를 굳혔다.
난이 일어 난지 7년 만에 정중부는 2인자인 경대승에게 살해되고 경대승도 5년 만에 병사하였으므로 자동적으로 제 3자인 이의민이 승계를 받아 무려 14년간 고려를 통치하였다.
12세기 정선이씨가 고려에 온 이후 13세기에는 또 다른 월남인이 이 땅에 왔다. 그는 이용상(李龍祥)으로 안남국 제7대 고종의 동생이다.
당시 이씨 왕조는 8대 혜종을 끝으로 진 씨에 의해 무너지는 상황에서 이용상이 고려에 왔다.
이후 이 용상은 고려가 몽고군의 침략했을 때 공을 세워 고려왕조로부터 <화산군>에 봉해져 화산이씨의 시조가 됐다.
월남 왕조중 비교적 영속한 왕조가 이씨 왕조로 지금도 월남에선 이 왕조가 출범한 날을 정부차원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이 식전에 초대되는 화산 이씨(花山李氏) 종친들은 출입국시 자잘한 요금이나 세금에 이르기 까지 귀빈대접을 받고 법적으로 베트남 국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그 연유는 월남에서 이 씨 왕조출범 후 4대까지는 선정을 베풀었고 국토도 늘렸으나 후반 5대에 진수도의 반란에 의해 혜종을 퇴위 절에 연금시키고 일곱 살 난 왕녀를 임금으로 받들고 그의 나이어린 조카로 하여금 결혼시켜 李氏 왕조를 진 씨 왕조로 바꿔버린 것이다.
진수도는 이씨 왕조의 반격을 막기 위하여 혜종을 자결토록 하고 혜종의 장례 날 모여든 이 씨 왕족을 몰살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흉계를 눈치 채고 유일하게 빠져나온 것이 혜종의 숙부인 왕자 이용상 이다. 진수도의 추적을 피해 정처 없이 떠나 흘러 흘러와 닿은 곳이 한반도 황해도 옹진 반도였다.
상륙한 곳이 화산이요 이곳에 정착하고 살았다. 마침 한반도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국토를 유린당하고 있을 때 이 월남 왕자는 몽골군을 막아내어 조정이 알게 되었고 고려 임금은 화산일대를 식읍으로 내리고 본관을 화산으로 하는 李氏 성을 내려 주었다.
지금도 황해도 화산 일대에는 이 월남왕자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몽골군의 침입을 막고자 쌓았다는 안남토성이 남아있고 그가 고국을 그리워 할 때 마다 조국 쪽을 향해 통곡을 했다는 월선암이며 이씨 왕조의 시조 이름을 딴 남평리(南平理) 그리고 월남의 나라 동리이름인 교지리(交趾里)가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인터넷에서 발췌 함)
길지 않은 여행이었으나 오랜만에 뜻있는 여행을 했다. 아직도 건강에는 이상이 없나보다. 그러나 집에 와서 긴장을 푸니 조금은 피곤했었는지 잠이 잘 온다. 부모로서 한일도 없는 데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아이들에게 감사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