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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公案)의 뜻과 그 기능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닫게 된 계기[機緣]를 사람들이 공안(公案)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공안(公案)이라고 한 것은 관청에 있는 문서에다 비유해서말한 것입니다. 국가에는 법령이 있어야만 왕도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는지를 알 수 있읍니다. 공(公)이란 훌륭한 도(道)를 깨달아 세상사람들에게 그 길을 모두 함께 가도록하는 지극한 가르침이며, 안(案)이란 성현들께서 그 도(道)를 수행하는 바른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자라면 누구든지 관청을 설립하지 않을 수가 없고, 관청이 설치되면 자연히 그것을 운영하는 법령이 없을 수가 없읍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른 이치를 받아들여 법령을 만들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박멸하려고 그러는것 입니다. 공안(公案)이 시행되면 바른 법령이 통용되고, 바른 법령이 통용되면 천하의 기강이 바로잡히면 왕도정치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우치게 된 계기〔機緣〕를 공안(公案)이라 이름 붙인 이유도 역시 위와 같은 뜻에서 그랬읍니다. 그러니 이것은 한 사람의 억지주장이 아니라 신령스런 근원에 딱 들어맞고, 묘지(妙旨)에 계합하여, 생사와 굴레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안은 언어나 문자로 따지는 것을 초월하며, 이것은 시방삼제(十方三世)의 수많은 보살과 함께 똑같이 지니고 있는 아주 지극한 도리입니다.
그것은 생각이나 이치로 알수도 없으며, 언어로 전할 수도 없으며, 문자로써 설명할 수도 없으며,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도 없읍니다. 마치 독(毒)을 바른 북을 둥둥 울리게 되면 듣는 이는 모두 그자리에서 죽는 것과도 갈으며, 큰불구덩이 속에 갓난아기가 들어가면 그대로 타죽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영산(靈山)에서 말한 '별전(別傳)'이라는 것도 이를 전한 것이며, 달마스님이 말한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도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이 분리되고 5가(五家)로 갈라진 뒤로부터, 모든선지식(善知識)들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부처님의 별전(別傳)과 달마스님이 그대로 지적한 도리〔直指之道〕를 전하려고 애를 썼으니, 마치 손님이 찾아오면 즉시에 주인이 나오는 것처럼 했읍니다. 우두법융선사에서 마조도일선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안종사들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로 번개처럼 즉각에 본성을 드러내주시니, 귀를 기울여 따져볼 겨를조차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삼세근[麻三斤]', '똥 묻은 막대기[乾屎궐]'와 같은 공안(公案)은 사량분별로써는 조금도 알 수 없읍니다. 위와 같은 공안에 부딪치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사량분별로는 뚫을 수가 없읍니다. 오직 눈 밝은 사람만이 언어나 문자가 끊어진 자리에서 알아차릴 수가 있읍니다. 한곡조 부르고 거기에 한 곡조 화답하는 것이 마치 공중을 날아가는 새처럼 자취가 없고, 맑은 물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비록 천 갈래 만갈래 길로 이리저리 방자화게 사량분볕한다 해도 알 수가 없읍니다. 멀리는 영취산에서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인[拈華示衆] 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또 그밖에 1700공안(公案)만이 어찌 그러했겠읍니까!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읍니다. 오직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 야지만 알수 있는 도리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사량분별이나 증진시키고 그저 이야깃거리의 밑천이나 삼으려고 공안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장로(長老)라는 뜻은 즉 총림(叢林)이라는 관청의 최고 관리자이며,「전등록」에 실려 있는 말씀은 선풍을 드날릴 묘안들을 기록한 공문서입니다. 옛 사람들이 혹은 제자들을 지도 하거나 혹은 대문을 잠그고 수행에 정진하던 여가에, 틈틈이 평석하거나[拈] 판단하거나[判] 노래하거나[頌] 다른 논지률 펴거나[別傳]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 바로 「전등록」입니다.
어찌 보고 들어 따지는 죽은 지혜만을 증장시키고, 끝내는 눈밝은 고승대덕 스님들에게 대들어 실력을 겨루려고 한 말씀이겠습니까? 이렇게 한 이유는 대법(大法)이 장차 피폐해지는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편을 자세하게 베풀어 후배들의 지혜의 안목을 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모두 본래의 진면목을 깨닫게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공(公)이란 뜻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안(案)이란 뜻은 기필코 불조(佛祖)의 깨달음과 동일하에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안(公案)이 풀리면 번뇌의 알음알이[情識]가 사라지고,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생사의 굴레가 공(公)해지고, 생사의 굴레가 공(公)해지면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읍니다. 위에서 말한 '불조(佛祖)의 깨달음과 동일하게 만들겠다'라는 뜻은, 중생들이 생사의 번뇌 속에서 제 스스로 꽁꽁 묶여 풀려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상황을 두고 한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자리이지만 할수 없이 중생들을 위하여 말로 표현한 것이며, 형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이치이지만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형상으로 드러내어서 미혹의 오랏줄이 풀려지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깨달음외 자리에 어찌 언어나 형상을 들먹거릴 수가 있겠읍니까?
세상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불공평한 사건이 생기면 반드시 관청에서 공정하제 재판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이조(吏曹)에서는 공포된 법조문을 근거로 공평하게 재판해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선하는 자가 깨달은 부분이 있으나 제스스로 획신을 못하겠으면 스승에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스승은 공안(公案)을 근거로 하여 의심을 풀어줍니다. 공안이란 바로 번뇌망싱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의 횃불이며 보고 듣는 것에 얽매인 결박을 끊어주는 날카로운 칼날입니다.
그런가하면 공안이란 번뇌의 뿌리를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도끼이며, 성인과 범부를 가려내는 신령스러운 거울입니다. 조사들의 본뜻이 공안 때문에 분명하게 밝아지고,부처님의 마음이 공안 때문에 드러납니다. 번뇌를 밀끔히 털어버리고 불조의 혜명을 드러내는 데에 이 공안보다 더 좋은 길잡이는 없읍니다. 이른바 공안이란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할 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어른거리지도 못합니다.
아아 ! 슬프도다 ! 미망에 빠진 인간들은 근본자리를 돌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총명만을 밑천으로 삼아 요리조리 사량분별만 하여 언어나 문자로 깨달으려 하는구나! 그리하여 끝내는 마음자리를 깨달으려 들지 않습니다. 방(棒)이나 할(喝) 등의, 방편의 채찍으로 몰아대는 마차는 결국 번뇌와 망상이 우거진 숲속에 처박히고, 용(龍)이나 코끼리처럼 훌륭한 조사스님네들의 말씀은 결국 사량분별하는 잘못된 함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량분별하게 되면 그 결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욕정이 눈가에 넘치고 취사선택하는 어리석음이 가슴에 가득하여집니다. 옛 스님들이 말한, '제호(醍호)가 도리어 독약이 된다'라는 비유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총림이 무너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슬프도다! 이것은 마치 법령을 집행하는 담당관이 법령을 미끼로 삼아 사람들의 뇌물을받아서 호의호식하는 꼴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개인적인 사리사욕에 빠지면 아무리 공명정대하게 하려 해도 세상이 잘 다스려질 까닭이 없습니다.
공안에 집착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 아닙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조사의 공안(公案)은 본래 참선하는 사람이 의심이 생겨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니 옛사람이 깨달은 마음자리는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도 같고, 혹은 커다란 북이 두들기는대로 소리가 나듯이, 상대에 따라 그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공안이란 다른 사람의 의심덩어리를 풀어주는 것에 불과한 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중시하지 않으며 한 법도 남들에게 준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공안이란 선배들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서 마지못해 주고받은 짧은 얘기입니다. 그러다 그것들이 총림에 전해져서 깨달은 이들이 이것을 공안이라고 후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원래의 공안은 분명한 도리에 근본하였는데 요즈음 총림이 되어가는 모양을 보니 전혀 처음의 분명한 도리는 없어진 듯합니다.
그리하여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거나 달마스님이 인도 땅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삼세근〔麻三斤〕이다, 혹은 똥 묻은 막대이다, 혹은 수미산(須彌山)이다, 혹은 망상 피우지 말라[莫妄想]는 등등으로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도(道)가 낮은 사람을 인도하려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감파(勘婆), 화타(話墮), 탁발(托鉢), 상수(上樹) 등등으로 대답하는 것을 도가 높다고 평합니다.
그런가 하면 후학을 제접하는 방편으로 3현(三玄)을 나열하여 귀결시키기도 하며, 혹은 모든 언어를 과판(科判)하여 4구(四句)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 구구절절한 말들을 1700공안(公案)으로 정리하고, 그 각각에 이름을 붙여서 서열을 매기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난 잘 모르겠읍니다. 위와 같이 한 것이 본래 눈밝은 종사들외 본 뜻인지?"
나는 대답했다.
"조사외 말씀은 아주 공적(空寂)하여서 인위적으로 꾸민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 가는대로 쓴 것이지, 애초부터 사량 분별하여 선택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무릇 모든 것이 달마스님이 흘로 전한 뜻[單傳之旨]에 근본을 둡니다. 그러므로 말을하기 시작하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보여주니, 결코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읍니다.
비유하자면 다름과 같습니다. 달이 하늘에 떠 있지만 동쪽으로 가는 사람이 바라보면 달이 동쪽으로 가는 듯하고, 서쪽으로 가는 사람이 달을 바라보면 달이 서쪽으로 가는 듯합니다. 그런가하면 움직이지 않고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자는 '달이 나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있구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빠져 있는 소견으로 서로 동쪽, 서쪽, 혹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달리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름달이 허공에 뜨면 실로 '동쪽이다','서쪽이다'하는 것도 결국은 움직이지 않는 원래의 자리를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쿵 저러쿵 공안에 대하여 서로 다른 말이 생긴 이유는 법의 근원을 획실히 깨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상대방에 따라 허공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진다는 비유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깨달은 선배 종사(宗師)들이 공안을 설명할 때에 혹은 생략하기도 하고 혹은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언어로 설명하는 본뜻이 혀끝에 있지 않다는 말로써 증거를 삼아 종사들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이해한 뜻으초서 종탈역순(縱奪逆順)으로 종횡무진하게 설명하는 정안종사의 말씀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치를 극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공안이 그에 알맞는 도리를 갖고 있읍니다. 그러나 각각 공안마다의 깊이는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 바다의 깊이를 재는 것처럼 깨달은 정도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져서 계속 들어가면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도달할 수 있읍니다. 이렇게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고 나서 흘연히 왔던 길을 되돌아보면 바로 이것이 바다였구나라는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약 그 깊은 곳에 몸소 도달해서 한번 뒤돌아보지 않았더라면 가슴 속의 의심덩어리를 집어내어 제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묻기를, '무엇이 부처인가요? '라고 하자 마조스님이 말하기를,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대답했읍니다. 이 공안은 비록 전에 참선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도 모두가 알았다고 지나쳐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그 지극한 뜻은 오래 참선한 선승(禪僧)이라도 거의가 잘못 알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그 사람에게 '무엇을 마음이라 하는가?'라고 다시 질문하면, 이것은 벌써 옆길로 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그 지시하는 당처(當處)에서 그대로 훌쩍 뛰어넘기를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쓱싹 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공안의 참뜻을 분명하게 알아서 마치 교통이 자유로운 십자로(十字路)위에서 그리운 어버이를 만나 달려가듯이 이리저리 따질 겨를 없이 단박에 깨쳐야 합니다.
혹 어떤 무리들은 전혀 참선도 하지 않고, 또 마음자리를 분명히 밝히지도 않고, 생사의 큰 의심덩어리인 번뇌를 절단하지도 않고, 오직 총명한 재주만을 믿고 고금의 문자만을 이리저리 따지고 연구하여, 그저 그럴듯한 언어로 비교하고 헤아려서는 고금의 공안을 모두 알았노라고 자만하기도 합니다. 그
러나 이것은 자신이 생사의 근본을 몰랐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무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하는 솔직한 사람만도 못합니다. 솔직한 사람은 지금까지는 공안의 깊은 뜻을 몰랐으나, 어느날엔가 홀연히 신심(信心)을 일으켜 똑 바로 공안을 참구(參究)하기만 하면 명확하게 깨닫는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오직 총명하고 영리하기만 하여 머리 속에서만 미리 알아버린 사람은 절대로 다시는 올바른 믿음을 내어서 명확하게 깨닫지 못할 겁니다. 요즈음 총림에서는 남의 말 듣는 데에 급급하며, 또한 참선하는 이들을 대접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언어나 문자로만 따지는 무리들은 근본자리에 부딪치게 되면 화두 한 귀절 대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어려운 책을 읽듯이 쩔쩔맵니다. 이 무리들이 알음알이로 공안의 뜻을 풀어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마치 그물 속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가득차게 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읍니다.
진정한 선객[本色道流]은 이와 같은 나쁜 독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고금의 기연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이리저리 따지려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단박 깨우쳐 생사의 바른 뜻을 꿰뚫어버립니다. 마치 눈앞에 수만길이나 되는 장벽이 서 있는 것처럼 오래도록 공안을 참구하다가 홀연히 의심덩어리를 타파합니다. 그러면 백천만 가지 공안의 심천(深淺), 난이(難易), 동별(同別)이 한꺼번에 뚫려서 자연히 남에게 묻지 않게됩니다.
가령 마음의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는데도 자기 자신에게 되물어 참구하려 하지 않고 끌내 남들이 열어 보여주기를 바란다면, 비록 석가모니부처님과 달마스님이 간과 쓸개를 꺼내어 보여준다 해도, 오히려 그 마음의 눈만을 멀게 할 뿐입니다.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첫댓글 느끼는 바가 정말 큽니다.감사합니다()()()
진정한 선객이 그리워도 집니다 그려 어리석은 친구가 이글을 읽고 깨달은다면 그또한 그의 복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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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승이 보기에는 위의 말씀을 나눈 분들이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나 참으로 공안을 꿰뚫어 확철히 깨달은 분들의 말씀이라고 감파되지 않소이다. 다만 각각의 자기 소견일 뿐인즉 이런 글을 읽어서 공부에 유익 할 것이 없다고 하겠소이다. ()
따라서 오직 열심히 공부 할 뿐임을 명심하시기를 당부하오이다.() 만일 이 산승의 말씀에 이의가 있어 반론제기를 한다면 조목을 들어 증거하여 일러드리겠소이다.()
반론은 아니옵구...잘못 되었다면 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새겨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큰스님의 지혜를 빌려 주시옵소서.()()()
객승의 견처는 체증하지 못한 분상으로 사료되나, 천목스님은 법의 근원을 깨치고 객승의 견해를 올바로 시정하여 보인 것으로 사료되옵는데, 어느 조목에서 사견임이 드러났습니까? 큰스님의 가르침을 삼가 청합니다. 합장삼배()()()
천목 중봉스님의 절절한 이끄심이 보이는군요..산방야화에 제자와 스승의 문답 형식으로된 지침서 입니다.묻는 제자는 학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질문을 하엿고 스승(천목 중봉)은 아주 세세히 가르침을 주신 글 입니다.참구 하지 않는 공안은 입속에서 평생동안 우물거리다 되뱉는 풍선껌 입니다.
언어나 문자로만 따지는 무리들은, 근본자리에 부딪치게 되면 화두 한 귀절 대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어려운 책을 읽듯이 쩔쩔맵니다. 이 무리들이 알음알이로 공안의 뜻을 풀어 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마치 그물 속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가득차게 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진정한 선객〔本色道流〕은
이와 같은 나쁜 독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고금의 기연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이리저리 따지려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단박 깨우쳐 생사의 바른 뜻을 꿰뚫어버립니다.] 이 얼마나 좋은말씀 인가요.
이산님이나 그렇게 하시도록하시오. 자기 성찰이 시급하지 않소이까? 남의 말 되새김질은 하지 않아도 다들 읽어보셨소이다. 어찌 입들만 그렇게 놀릴 줄 알았지 스스로 닦아 證得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소이까?아시겠소이까? 입을 가벼이 하지 마시구려.()
예..스님.저는 알음 알이를 버리려 무척이나 노력 했습니다.버리려 버리려 해도 쌓여 있는 識은 의식을 하던 안하던 공부에 끝없는 방해를 일으키는걸 겪어 왔습니다.단 한번이라도 의정이 돈발함을 느껴본 사람은 그 알음알이가 얼마만큼 끈질기게 작용하는지 압니다.수많은 불조사님들께서 글을 새기고 분해하면서 뜻으로
이해하려는걸 용납하는글을 본적이 없습니다,.오죽하면 책도 보지 말라고 할정도로 참구 하는데 방해됨을 가르키셧습니다.그리고 저는 살아 잇는 동안은 끝없이 공부 할것이니 심려는 놓으셔도 됩니다.
닦아 증득한다 함에 대해서 표현 해봅니다. 공부가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면(최소한 절로 의정이 돈발할때면) 그후부터는 인위적인(유위)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공부가 되어갑니다.절실함의 차이는 있지만 공부가 되어가는것은 틀림이 없는 일입니다.이때를 표현하여 無作之作이라고도 하더군요.닦음 없이 닦아지는
때 이기도 합니다.이런 경지에 이르러 말로 표현할수 없는것을 얻음없이 얻음도 있습니다.깨닫는것만이 증득이 아닙니다.과정중에는 많은것을 증득해 나갑니다.그런것을 말로 표현하면 아는 사람은 참인지 거짓인지 그냥 알수 잇습니다.단지 말을 안할 뿐이지요.
이산님,어찌 깨닫는 것이 증득이 아니오? 본인 스스로 "깨닫는것만이 증득이 아닙니다.과정중에는 많은것을 증득해 나갑니다." 하시니 이렇게 異說을 하셔서는 않될 것오 "알음 알이를 버리려 무척이나 노력 " 한 이치고는 너무 아는 말이 기오. 향후로는 말을 줄이시오.이산님 정도 아는 채 할 살림 쌓은 분들은 많소이다.
깨닫는것만이 증득이 아닙니다 라는 말에는 깨닫는것도 증득이다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는체를 않습니다.그리고 말을 줄이는것보다 바른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 사람입니다.말해야 할때 말하는것이 아는체 한다고 하신다면 말해야 할때 침묵하는 다수는 무슨(?)체를 한다고 해야 하겟습니까?스님께서는
공안에 문답하는것이 닦아 증득 하는것이라고 하시렵니까?참으로 햇갈리고 어렵군요.
이보시오. 말을 하되 말다운 말을 하여 상대가 듣고 보아 오해가 없어야 하거늘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식으로 구렁이 담넘어 가듯 어물쩡 자기 말을 합리화나 하려드는 것이오? 공안을 살펴 그 도리를 이르고 인가를 받는 것이 공부가 아니고 닦음이 아니라 하는 것이오? 여기에는 무엇하려고 들어와서 남이 한 말들을
익혀 나열하면서도 아는 채를 하지 않았다 하는 것이오? 이산님이 아는 닦아 증득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오?그렇게 아는 이라면 여기 들어와서 얻을 것이 없을터이니 장소를 옮기시는 것이 더 유익 할 것이 아니겠소? 더 입을 함부로 벌려 아느 채 하지 마시기를 당부하는 바올시다.
알겠소이까?이산님이 아니라도 이곳에는 아는 것이 많은 이들이 수 없이 많소이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더 입을 함부로 벌리지 마시오.공안의 도리를 알기에 답다는 것을 우숩게 말 하는 것이오? 모르니 아예 방패막이로 하는 소리오?선문을 모르는 이라면 경의 뜻을 알리가 없음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오.
禪은 실상이요 經은 그 실상의 이치를 말로써 들어보인 것임을 분명히 안다면 참으로 입을 열어 아는 소리를 할려면 선과 교에 무불통지(無不通知)가 되어야 함을 모르시고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말씀이오. 알겠소이까?
아무리 대오확철 한이라도 들어보이는 그 말이 오류가 있어 바르지 못하다면 그것은 바른법문이라 하지 못할 것이니, 말이란 바르게 들어보여야 할 것이오. 석가세존께서 하신 말씀이 오류가 있더이까? 누가 한 말씀이든 그 들어냄이 잘못이 있다면 그 법문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 살펴 가려야 할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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