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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蔡萬植, 1902.6.17~1950.6.11] |
한국의 소설가. ㆍ본관 평강(平康) ㆍ호 백릉(白菱) ㆍ활동분야 문학 ㆍ출생지 전북 옥구(沃溝) ㆍ주요저서 《레디 메이드 인생》(1934),《탁류(濁流)》 |
◇ 인간과 생애
채만식은 1902년 군산시 임피면 취산리에서 부친 채규섭(蔡奎燮)과 모친 조우섭 사이의 5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 사서삼경 등을 깨우쳤으며 9세가 되어서야 임피보통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1918년 서울로 유학, 중앙고보(中央高普)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과 가정의 어려움으로 1년6개월만에 학업을 단념하고 1923년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취직하게 된다. 이때 조선문단에 단편「세길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한다. 1926년에는 조선일보로, 이후 개벽사(開闢社)로 자리를 옮긴다.
이에 앞서 그는 중앙고보 2학년인 18세때 집안의 강권으로 한살위인 함라면 은선흥(殷善興)과 결혼, 3남매를 두었으나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숙명여고 출신인 둘째부인 김씨영(金氏榮)과 재혼한다. 34세때인 1935년 서울에서의 기자생활을 청산하고 개성으로 가 중형 준식(俊植)의 금광업을 도우며 창작에 몰두한다. 1938년에는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서울로 피신했다가 1945년 봄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고향 임피로 돌아와 8·15 해방을 맞는다. 이 해에 아버지와 큰아들의 상을 당하게 된다.
1949년 6월 탁류의 인세수입 37원과 몇편 소설의 원고료를 합해 익산시 주현동에 난생 처음 집을 마련한다. 그러나 무리한 집필로 폐환이 악화돼 감당키 어려운 치료비 때문에 집을 처분하고 나머지 돈으로 마동 269번지에 반토담집 초가를 사서 이사한다.
그해 6월 6·25사변이 발발하기 보름전인 1950년6월 11일 4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가난과 질병의 외로운 생활
소설가 홍석영(前 원광대교수)의 말처럼 「작가 채만식의 길지 않은 생애는 가난과 질병과 싸우면서 온몸으로 문학과 대결해온 고독한 생활」이었다. 그는 초혼의 실패로 가정생활 역시 불우했다. 그러면서도 불패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니고 있어 중학시절 축구선수였으며 대학에서는 학교대표선수를 맡기도 했다. 그는 꽃을 지극히 사랑한 반면 심한 결벽증이 있었다.
그의 완벽증은 작품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작품마다 신경질적일 만큼 세심한 솜씨를 보여 부호 하나라도 허술히 하지 않았으며 문장 서술에 있어서도 철저히 냉정함을 유지하였다.
그러한 직설적인 태도는 문단생활에도 그대로 드러나 교제가 깊은 문인들이 많지 않았다. 백철(白鐵), 이무영(李無影), 최정희(崔貞熙) 정도와 친하게 지냈으며 제자 역시 최태응(崔泰應) 한사람에 그쳤다. 그는 한때 동반작가(同伴作家)의 위치에 있었으나 문학가동맹이 좌익단체 임을 알고 곧장 관계를 끊었다. 어떤 조직이나 이데올로기에 묶이는 걸 한사코 싫어했다.
그는 기회 있을때마다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 나름대로의 특수한 생활과 이데올로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끝내 거부했고 단발령에도 맞섰다.
그러한 그도 일제말기에는 일제의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글을 몇편 남겼으며 훗날 민족의 죄인이라는 글을 써서 자책하기도 했다.
◇ 문학세계
채만식의 작품은 소설 87편, 희곡 28편, 산문 평론 수필 등 3백45편에 이른다. 그는 소설 뿐 아니라 희곡분야에 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무대에 올려진 희곡은 1편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그에 대해서는 풍자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김유정(金裕貞) 이상(李箱) 등과 함께 풍자적 방법으로 문학사상 특별한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대표할만한 장편소설로 「탁류」「태평천하」「금의 정열」을 들수 있고, 단편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소망(小妄)」「치숙(痴淑)」 등을 꼽을 수 있다.
주제면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세태를 사실적으로 그린 것과 지식인의 암담한 생활을 시니컬하게 표현한 내용으로 나눌 수 있다.
자료출처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1. 그의 작품세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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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류 | ||
<조선일보>에 연재(1937. 10-1938. 5)된 장편 소설. 식민지 시대의 혼탁한 물결에 휩쓸려 무너지는 한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사회의 어두운 세태를 그린 작품. 특히, 계속된 불행 속에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초봉'과 시대의 탁류에 휘말리지 않고 건강성을 지켜 나가는 '계봉' 두 자매의 삶의 모습이 대비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채만식 소설의 바탕은 아이러니이다. 부정적 인물을 소설의 전면(前面)에 내세우고 긍정적 인물을 후면(後面)에 두거나 희화화(戱畵化)할 때, 이 아이러니는 두드러진다. 특히, 부정적 인물들은 더욱 치밀하게 묘사되거나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로 등장하며, 긍정적 인물들은 부정적 인물의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소심한 심성을 지니고 등장한다. <탁류>의 경우, 정 주사·고태수·장형보 등의 부정적 인물들은 남승재·정계봉에 비해서 지나치리만큼 자세히 관찰되며 줄거리 전체를 압도한다. 그 결과, 긍정적 인물들의 세계관은 희미하게 제시되는 반면에 부정적 인물들의 세계관은 날카롭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부정적, 긍정적 인간형의 중간 지점에 '초봉'이가 위치하고 있다. 이 소설은 2년 여의 '탁류' 속에서 그녀가 겪는 비극적 운명의 기록인 셈이다. 그 결말은 비극의 정점인 '살인'에까지 이른다. 그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 중농이었다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정 주사는 그 돌파구의 하나로 '초봉'에게 은행원 고태수와의 결혼을 강요한다. 효(孝) 사상에 민린 '초봉'은 이를 받아들인다. 타락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 남편이 된 고태수와 살게 된다. 그러나 꼽추 장형보의 등장으로 결혼 열흘만에 남편을 잃고 정조까지 유린당한 '초봉'은 과부 신세가 되어 예전의 상전이자 아버지의 친구인 약국 주인 박제호에게 몸을 의탁한다. 하지만, 박제호 역시 타락한 인물이어서 '초봉'은 그의 첩이 되는 것으로 낙착된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첩살이 하는 동안 딸 '송희'를 낳아 고립된 행복이나마 가꾸어 나가던 '초봉'에게 장형보가 다시 나타나 자식의 양육권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그녀의 가정은 다시 파괴되고, 자신의 운명을 파멸시킨 장형보에게 몸을 맡겨야 하는 운명으로 곤두박질친다. '초봉'은 장형보가 자신의 불행의 원인임을 깨닫고 형보를 죽이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제3의 비극이 되고 만다. 결국, 이 작품은 당대 사회를 속악(俗惡)하기 이를 데 없는 '탁류'로 보고, 그 탁류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살을 갉아먹고 있는 도시 하층민의 생활 방식을 고발하고 있다. '초봉'이의 비극적인 삶을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가난·싸움·투기·간통·흉계·횡령·탐욕·추행 등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을 동원하고 있다. | |||
- 태평천하 | |||
채만식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태평천하'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반어적 제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어적인 수사로써 현실과 인물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높여간 것이죠.
또한 비판과 비아냥(냉소)로써 풍자를 극대화하고 있기도 합니다. 태평천하에 보면, 윤직원 영감을 중심으로 한 가족사가 엿보이는데, 윤직원 영감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가문의 이익을 위해 민족이나 민족구성원따위는 관심없는 인물입니다. (염상섭의 삼대에서의 '조의관'과 유사함)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절부터 마적떼에게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던 까닭도 있지만, 윤직원은 '이 세상 우리만 빼고 모두 망해버려라"고 외침으로써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문 지키기에 급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전노적인 치부로 결국 대지주가 된 직원은, 권력에의 욕심을 두게 되고 그것은 고스란히 손자들인 종식과 종학에 대한 기대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종학이 일본유학중에 사회주의 운동을 함으로써 투옥되게 되고 결국, 그 집안은 풍비박산나는 결과를 맞게 되지요. (일제는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사회주의 운동을 심히 탄압했습니다. 그러니 종학의 사회주의운동 참여는 집안까지 말아먹을 수 있는 충분한 원인이 될 수 있지요) 윤직원은 기대했던 종학의 의외의 행동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며, "칙칙 깍어죽일 놈"..."이 태평천하에..이 태평천하에..."이런식으로 울부짖지요. 1930년대는 우리민족에게 매우 암울했던 시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정책과 탄압이 더욱 악랄해지기 시작해서, 지식인이나 일반 민족구성원들이 자기 뜻을 이루기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유독 윤직원에게는 '태평천하'였던 것이죠. 마적떼도 없고, 치안도 일본순사들이 지켜주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재산도 지켜주고, 결국,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자신에게 있어서는 매우 유리하고 이익이다 라는 반민족주의적이며 이기적인 합리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 |||
- 식민지 부르주아의 초상-「금의 정열」 | |||
<금의 정열>(1939)의 주상문은 일제말 군비 조달을 위한 산금장려 정책과 금값의
폭동으로 일약 부르주아로 성장한 광산업자다. 30년대 소설에서 이러한 인물의 출현이 느닷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한설야의 <황혼>(1936)에서 금광으로 자본 축척을 하여 경재업체를 인수하는 방적공장 사장 ‘안중서’가 등장한 바 있다. 이제 작가는 ?윤직원 같은 지주 및 고리대적 상업자본가가 아니라- 주상문으로 대표되는 신흥 부르주아의 모습을 형상화 한다. 작품 서두에 상문이 서울서 거처하는 B호텔을, 맞은 편의 “귀족적”인 조선호텔에 비해 “시민적인 자리가 잡힌……간편하고도 호사스러운 처소”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곳이 새롭게 부상하는 부르주아들의 취향에 어떻게 들어맞는지 꼼꼼하게 보여 주고 있다. 더욱이 <금의 정열>은 봉건적 잔영이 드리워진 윤직원과 달리, 속물적이나 좀 더 자 본에 투철한 근대적 부르주아로서의 주상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주상문은 그의 아우가 동경에 가서 문학공부를 하겠다는 사실에 못마땅해 한다. 가령 젊은 금광왕인 그가 보기에 선 비입네, 문학입네 이런 것들은 현금 화폐의 논리에서 볼 때 “고대 사람의 가구나 기명 같은 것을 앞에 놓고 앉아서 거기에 어린 전설을 상상으로 즐기는 듯”한 것으로 치부한다. 무력한 순범에 비해 탐욕성을 바탕을 둔 주상문의 부르주아 특유의 금성을 향한 강한 모험적 활동성 등이 우리 소설사에서 보기 드물게 잘 그려지고 있다. 대량의 화폐가 상문 게로 집중되는 양상들을 다각도로 보여 주는데, 가량 상문은 광상 개발에서 더 많은 이익과 효율적인 채금을 위해 수굴이 아닌”트렌처”등의 기계에 자본 투자를 하여 무한한 이윤을 좇는다. 트렌처로 채금하면 그 땅은 다시 농사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 되는데, 상문의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이윤이 있기만 하면 대담해지는 자본의 모습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또한 <금의 정열>에는 주상문 같은 부르주아 이외에도, 중일 전쟁이 일어나 전시에 재산을 금과 바꿔 들이는 유행으로 금 밀수가 성행하여 민간인들의 금붙이를 사들여 중국등지로 밀수출하는 중간 조직들의 모습을 통해 이른바 “전시상업”의 현실이 실감나게 묘사된다. 그리고 변호사, 의사들도 자신의 직업을 저버리고 금광에 몰두하는데, 그들은 “금광은 적어도 백만원이 기준인데, 의사질이야 다리 도척이 납뛰듯해두 거저 돈 십만원, 그렇잖으면 몇 만원이니 전연 계단이 다르잖습니까?”라며 금광 투기에 나선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 중에는 미두 대신 선산을 잡혀 금광에 나서는 자들도 있어, 발자크의 <인간희극>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금전욕의 이상대비로 말미암은 자본주의의 병리를 그리고 있다.요컨대 <금의 정열>은 중일 전쟁을 계기로 강화된 전시 자본주의 하에 기형적으로 성장한 부르주아의 초상을 그린다. 그러나 이러한 형성을 띤 식민지 부르주아의 부정성이<태평천하>에서와 같이 집중적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상문이 갖고 있은 부르주아적 생명성 및 정열이 적극적으로 묘사될 뿐, 식민지 부르주아로서의 주상문의 사회적 성격 및 문제점은 제대로 형상화 되지 않는다. 이는 역시 일제 말기로 올수로 불투명해지는 작가의 역사적 전망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채만식은 본격적 전시 자본주의 체제로 접어든 일제 말의 현실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제 식민지 조선은 자본주의적 발전에로의 방향 밖에 없고 따라서 이 작품에서 이러한 사회발전 방향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주상문 같은 부르주아의 역동성이 작가에게 다가온다. 가령 이들 부르주아들은 “낡은 ‘전설’의 고향”이 아닌 “세기의 ‘사실’을 솔직하게 호흡하는 生理의 소유자들”이다. 물론 채만식은 부르주아가 가진 속물성을 비판하다. 가령 주상문을 무력감에 빠트리게 하는 유일한 존재가 그의 연인인 전문학교 문과 출신 ‘은봉아’다. 봉아를 둘러싼 상문과 군범의 삼각관계가 이뤄지는 듯도 하나, 실상 선병질적인 처녀 봉아는 무력한 인텔리 순범은 물론이요, 부르주아로서의 매력은 있으나 결국 속물적일 수밖에 없는 주상문에게도 권태 와 실망을 느낀다. 즉 봉아는 속물주위로 가득한 시대와 대비되는 순수성 혹은 낭만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작품 말미 봉아의 죽음은 사사로운 죽음이 아닌 온전한 생명이 거세된 시대 에 대한 절말으로 읽을 수 있다. 채만식의 <모색>에 등장하는 인텔리 여성 ‘옥초’가 바로 봉아와 같은 인물 유형이다. 여자 전문 문과를 졸업한 옥초는 자신이 맞닥뜨리게 된 사회의 속물성에 강한 환멸감을 느낀다. 특히 동경 유학 시절 이상에 불타던 그녀의 옛 애인이 이제는 현실과 타협하여 읍회의원이 돼서 ‘시대적 카멜레온’ 내지는 거리의 약장수 같은 협잡꾼의 속취만을 풍겨, 옥초로 하여금 환멸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채만식은 주상문 같은 자들이 갖고 있는 부르주아적 속물성에 대한 환멸만 그릴 뿐, 그것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하지 못하고 있기에, <금의 정열>은 더 이상의 리얼리즘 문학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채만식의 초기 단편들은 대체로 삶의 한 단면을 통해 인생 자체의 구도를 압축하여 형상화시키고 있다. 이때의 작품들은 일인칭 서술상황이라는 형태적 특성을 지니면서 ‘나’의 체험과 관찰이 바탕이 되어 있다. 즉, 자신의 체험과 의식이 서사진행에 중심적 기능이 됨으로써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현실성을 드러냄으로써 자기현시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출세작 <세길로>가 이에 속하는데 이는 일종의 보고적 성격을 띰으로써 다분히 그 서술은 감정적이며 수행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작가가 식민지라는 비뚤어진 현실에서 더욱 격심해진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비판적 입장에 서게 되고 따라서 스스로 변화를 꾀하게 된다. 그것이 이른바 인물시각적 서술상황에로의 기법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점은 허구적 세계 속의 내부적 관점과 대상이 삼인칭화되어 나타남으로써 묘사의 촛점을 한 인물의 의식 내에 고정시키면서 밖에 있는 서술자가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기법으로 구성해 간다. 이럴 경우, 인물묘사에 있어 작가는 스스로 중립적인 전지적 입장에 서서 장면제시의 방법에 치중하여 그것을 즐겨 이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인물시각적 서술상황에서는 서술자의 기능이 보다 제한적이 되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동화>, <병이 낫거든>, <명일> 등을 들 수 있다. 이에서 다시 서술자의 시점은 작가주석적 입장에서 서서 외부적 초점화를 견지하면서 작중세계로의 적극적 개입을 통하여 자신의 견해와 의식을 직접 드러내다가 대상세계에 대한 시각을 작중인물의 의식내부로 고정시키면서 초점화의 위치를 허구적 세계 내부로 이동하게 된다. 작품 <레디메이드 인생>이 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는 작가주석적 방법과 인물시각적 서술방법이 병용된 경우가 된다. 그러다가 부분적으로 나타났던 작가주석적 방법이 다음 시기에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데 장편 <탁류>와 <금의정열>이 그 경우이다. 이는 일종의 「전지적 시점」으로서 작가는 이러한 시점을 선택함으로써 그 자신의 사상·감정·지각을 통하여 제시할 수 있는 모든 정보의 영역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서술진행과 구별되는 스토리 외적인 서술층으로서 이를테면 「웃지 맙시다. 삼남이는 저더러 웃는 줄 알고서 이실직고를 하든것이랍니다.」했을 때의 「웃지 맙시다」는 독자에 대해 서술자가 직접적으로 交話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작가주석적 서술자가 스토리 외부에 위치함으로써 생기는 대상과의 사이의 거리는 작품 속에서 풍자를 위한 기본적 요소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풍자는 이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날카롭게 의식하는 데서 빚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자란 인간의 생존에 대한 절실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모색과 해결점을 구하려는 리얼리즘의 적극적인 기능으로서 현실비판의 정신을 내장하면서 아울러 현실에의 저항의지를 지니고 있다. 채만식의 경우, 풍자문학이란 그 자체의 우용성과 더불어 리얼리즘의 한 적극적인 접근방법으로서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의 간접화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또한 채만식문학에 대한 평가에 있어 따르는 문제는 문학사적인 평가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84편이나 되는 많은 작품 중 굳이 풍자성이 짙은 몇몇 작품에 한해서만 논급되는 등 그동안 적잖이 소외되었다가 70년대에 들어와서야 문학과 현실의 등가관계에서 또는 문예사회학에의 관심에서 갑자기 재평가하기에 이르른 데서도 볼 수 있다. 어차피 채만식의 풍자문학이 사회와의 대응관계에서 살펴볼 때 작가의 자전적인 환경요인과 더불어 부에 따르는 부조리에 대한 경제적 감각이 유달리 첨예했던 점을 하나의 소재원으로 분석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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