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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춘문예공모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해동공자
갑론을박 / 황석연
등장인물
갑 : (가로 줄 무늬 상, 하의 착용. 검은 헬멧 착용)
을 : (세로 줄 무늬 상, 하의 착용. 검은 헬멧 착용)
분신들 : (기괴한 분장이나 가면을 쓴 인형 형태의 배우들.)
일러두기
분신들은 마치 퍼포먼스를 하듯이 극의 긴장감과 고저를 이루는 역할을 한다. 코러스처럼 고통의 소리를 하모니로 내거나 극중 효과인 휘파람을 불거나 하모니카를 연주하기도 한다.
무대는 정사각형 입방체 상자 속처럼 꾸며진다. 마치 뇌 구조와 같은 느낌을 주면 좋겠다. 그 상자 벽의 찢어진 구멍 사이로 인형의 손들이 빠져 나오기도 하고 마치 사념의 빛이 레이 져 광선처럼 혼란스럽게 나오기도 한다.
막이 오르면.
어둠 속, 스폿 라이트가 강렬하게 한 곳을 집사하면 의자에 앉아 있는 갑.
상자 벽 구멍 난 사이로 흰 장갑을 낀 여러 개의 손들이 마치 춤을 추듯이
움직인다.
사이.
흰 장갑 손이 사라지고 구멍 사이로 어지럽게 빛이 쏟아 져 나온다.
갑을 중심축으로 희 노 애 락의 가면을 쓴 인형들이 갑의 주변을 빠르게 돌며 움직인다. 움직임이 고저를 이루고 갑, 비명을 지르며 몸을 솟구치듯 일어선다. 주변을 돌던 인형들이 일제히 갑의 주위를 돌다 스톱 모션.
갑은 두려운 표정을 짓고 전기에 감전 된 듯 부르르 떨다가, 슬로우 모션으로 얼굴에 다양한 표정의(존재의 불안) 마임을 짓는다. 의자에 힘겹게 앉으면.
암전.
어둠 속 누군가, 조용히 부르는 휘파람 소리에 이어 단조의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온다. 조명 밝아지면, 그 입방체 상자 속에 갑. 의자에 앉아 깊은 상념에 빠져있다. 사이. 또 다른 갑의 분신인 을. 휘파람을 불며 갑을 향해 살며시 다가와 귓가에 속삭인다. 을. 갑의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누군가 네 영혼의 한 귀퉁이를
예고도 없이 한 입 베어문 거 같기도 해서 마치
니 표정은 상처난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어
을 : 왜 너만 의자를 독차지 하고서, 눈을 감고 생각을 하는 거니? 내게도 기회를 주어야 되는 거 아니니? 그 헬멧은 외부의 충격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쓰고 있는 거야? 뭐가 두렵지? 길 잃은 아이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을 감추고서 마치 부처님의 열반처럼 고요한 척은 다 뭐야?
갑 :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을 : 도대체 니가 줄곧 무슨, 그 의자에 앉아서 알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게 뭐야?
갑 : (눈을 뜨고, 노려본다. 감정의 분노를 달래며)... 내 생각을 알고 싶어?
을 : 니 생각을 알고 싶은 건 아냐. 어쩌면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고 수상하기도 해.
갑 : (일어선다. 노려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을 : 글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뭔가 그물망에 잡힌 생선처럼 팔딱거리는 니 모습이 어찌나 안타까웠는지 몰라. 추억의 피라미드 밑 부분을 누군가 확 당겨버려 내장이 텅 빈 정육점 고깃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했고 게다가 뭐랄까? 누군가 네 영혼의 한 귀퉁이를 예고도 없이 한 입 베어 문 거 같기도 해서 마치, 니 표정은 상처 난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어.
을. 눈치를 보다가 의자에 앉으려고 하면, 갑. 황급히 밀치면, 나가 뒹구는 을.
갑. 얼른 자리에 앉는다. 을 화가나 벌떡 일어나 다시 의자를 빼앗으러 다가오면, 갑은 잔뜩 경계를 하며 이빨을 들여 내 보이며 으르렁 거린다.
을 : 우리 교대로 앉아 보는 게 어때? 그 의자 양보 할 생각 없니?
갑 : 여기에 앉을 생각을 하는 구나.
을 : 나도 그 의자에 앉아서 생각을 해보고 싶어. 한 번만 기회를 줘!
갑 : 넌, 이 자리가 좋아 보여?
을 : 그냥, 한 번 앉아 보고 싶어서 그래.
갑 :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니?
을 : 뭐, 조금은 서 있는 나에 비하면 안정감도 있어 보이고, 더구나 하모니카도 앉아서 불고 싶어...,
갑 : 정말, 내가 행복해 보여? 너도 나처럼 무거운 헬멧을 쓰고 내 흉내를 내고 싶은 거야?
을 : 그러게. 근데, 이 헬멧을 내가 너처럼 왜 쓰고 있는 거지?
갑 : 존재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아? 이런 내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인다고?
을 : 의자에 앉아 보지 않은 나에 비하면 조금은 행복해 보이고, 뭐랄까? 여유도 있어 보이고, 좌우대칭인 균형감각도 멋져 보이고, 서 있는 나는 늘 다리도 아프고, 가끔은 균형을 잃기도 해.
갑 : 내가 왜,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 하나?
을 : 눈을 감고 있다는 거 근사하잖아. 그건, 모르긴 해도, 뭔가 상상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원하는 대로 넌, 뭐든지 꿈을 꾸고, 그 꿈에 취해도 보고, 지겹다 싶으면 꿈에서 깨면 되고, 의자에 앉지 못한 나는 그게 너무 부러워서 미치겠어. 왜 의자가 한 개 뿐일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어. 두 개가 있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 되잖아. 각자 사이좋게 앉아서 마주보며 대화도 나누고. 얼마나 합리적이야?
갑 : 의자가 두 개면 몸이 두 개가 필요해. 몸은 하나야. 넌 그냥 홀로그램에 불과해!
을 : 뭐라고? 그럼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건 뭐야? 나는 도대체 뭐냐고?
갑 : 뭔지 궁금해? 니가 부러워하는 이 의자가 때론 행복하기도 하지만, 때론 무척 고통스러울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을 : 고통스럽다고? 때론 고통의 짜릿한 맛도 있어야지, 늘 즐거울 수 있나? 난 서있는 게 고통이야. 의자에 앉아서 그 고통을 살짝 맛보고 싶어.
갑 : 눈을 뜨면....
을 : 눈을 뜨면, 뭐가 왜?
갑 : 온갖 것 들이 눈 속으로 들어 와. 빛의 속도로 뇌를 휘감아 돌지. 뇌 속은 그야말로 폭풍이 몰려와 파라다이스를 삼켜 버리지.
을 : 그 잃어버린 뇌의 낙원은 복원조차 힘들다는 건가?
(뭔가 생각 하다가 불쑥) 그렇다면 우리가 태어날 때 우는 것도?
갑 : 온갖 잡것들이 쑤시고 들어오니깐 슬퍼서 우는 거지.
을 : 우리가 이승을 떠날 때 장엄한 유언을 남기고 떠 날 때도?
갑 :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목 놓아 울지. 그 많았던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와 서야.
을 : 그 요망한 잡것을 떨구어 내기란 참 눈물겨운 기나긴 삶의 여정이네.
갑 : 우린 마치 원처럼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지. 뒈진다가 뭐겠어?
을 : 뒈진다는 게 뒈지는 거지.
갑 : 되어 진다는 것. 우리가 원래 왔던 곳으로 되어 진다는 거지, 우리가
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간다고 하잖아.
을 : 하,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뭔가 되어 진다?
갑 : 여기에 존재하기까진 수많은 길을 돌고 돌아 여기에 서 있다는 거 몰라?
을 : 죽어도 좋아 라는 말은 뭐지? 조합이 묘하잖아‘죽어도’라는 말은 좀
슬프고 외롭고 위험한 말이라면 ‘좋아요’ 라는 말은 왜 뒤에다 갖다
붙였지?
갑 : 살고 싶다는 강한 부정이 죽어도 좋다는 긍정의 표현이 아닐까?
을 : 뭐 내 질문에 대한 대답치곤 애매모호한데? 그럼 살고 싶다는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자세는 뭘까?
갑 : 늘 바뀌는 새로운 의자에 앉아, 삶의 찬가를 부르며, 사는 거지.
경이로운 이 의자에 앉아서!
을 : 니가 앉은 의자는 도대체 몇 번째 의자지?
갑 : 말했잖아, 돌고 돌다 보면 어느 날 눈을 번쩍 뜨면 이 의자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지겹고 외로운 전쟁을 하는 거라고.
을 : 누구와?
갑 : 나 자신을 둘러 싼 모든 번뇌.
을 : 백팔번뇌 뭐 그런 거? 이를테면 전생, 내생, 금생, 뭐 그런 거?
갑 : 내 눈을 봐. 뭐가 보이지?
놀라서 보는 을, 갑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 다 본다.
을 : 눈동자 속엔 아무것도 안 보여, 뭐야, 내 모습이 보이는 데?
갑 : 너도, 온갖 것들 중에 하나야.
을 : 그 온갖 것들이란 뭐지?
갑 : (노려보며) 사념.
을 : 뭐, 사념? 그 사념이 무림고수처럼 너의 뇌 속에서 장풍을 쏜다는 거니?
갑 : 1초와 1초 사이에도 그 사념은 끼어들지. 그 사념이 분열을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새끼 사념을 낳고 그 새끼 사념이 또 다른 사념을 낳지.
을 : 그런데도, 넌 그 의자를 혼자서 독차지 하는 구나. 그 사념이란 게
도대체 뭔지가 궁금해!
갑 : 사념은 걱정이나 근심 따위야. 너도 그런 혼란을 겪고 싶은 거냐?
을 : 나 참. 정말이지 짜증나네. 그럼 도대체 해결 방법은 없다는 거니?
갑 : 머리통이 붙어 있는 한 불가능 하지.
을 : 그럼, 이 머리통을 수박처럼 쪼개 버리면 안 될까? 사념의 씨는 뱉어
버리고 유혹적인 빨간 속살은 말끔히 먹어 치우면 되잖아, 그러면 뇌는
텅 빈 풍선처럼 가볍고 얼마나 좋아?
갑 : 텅 비인 풍선처럼?
을 : 그래 텅 비인 풍선처럼. 언젠가는 어느 이름 모를 별에 도착해서 꽃으로
피어나겠지. 사념의 꿈나무로.
그런 갑, 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갑 : (손가락 까딱인다) 이리 가까이, 와 봐.
을 : (와서 본다)
갑 : 내 코끝에 뭐가 매달려 있는 거 같아?
을 : 코딱지?
갑 : 자세히 보라고? 안보이니? 소멸의 냄새.
을 : 소멸의 냄새? 그럼 먼지처럼 왔다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뭐, 그런 존재의
사라짐인가?
갑 : 코끝에 매달려 있는 건 죽음이야. 목숨이 뭐지? 목에서 숨을 쉰다는 뜻이지.
코 숨은 뭐지?
을 : (놀라서) 코로 숨 쉰다는 건가?
갑 : 코에서 호흡이 끊어지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시체야.
을: 아, 싸늘한 시체.
갑 : 정리하자면, 탯줄을 끊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호흡이 코끝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존재이고, 호흡이 멈추면 소멸이야.
을 : 그러니깐, 우리 모두는 코끝에 죽음을 매달라고 산다는 건가?
갑 : 그렇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우린 곡예와도 같은 위험한 외줄놀이를
하고 있는 거야.
을 : 뭐야?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는 데 숨도 꽉 막히는 것 같고.
내가 왜 이러지?
갑 : 인간이 존재의 간식처럼 만들어 낸 그 어떤 종류의 믿음의 안경을 써보곤
해도....
을 : 믿음의 안경? 믿음의 안경이라니? 그건 또 뭐야?
갑 : 말씀의 안경이지.
을 : 말씀의 안경을 쓰면 마음의 치유가 좀 되지 않을까?
갑 : 마음의 치유를 해보아도, 급수 높은 인간을 제외한 우리 같은 지질한 인간은 코끝의 죽음의 불안한 그림자를 벗어 날순 없어.
을 : 우리같이 급수 낮은 인간은 도대체 어떤 방법도 없다는 건가?
갑 : 니가 예쁘게 화장을 하고 귀고리를 하고 값 비싼 진주목걸이를 하고
귀부인처럼 거울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을 해봐. 뭐가 보이지?
을 : 아름다운 귀부인이라면 자랑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겠지.
갑 : 거긴, 아마도 해골바가지를 쓴 여인이 보일거야. 그게 우리의 최종모습이야.
을 : 뭐야 지금! 누가 널 그렇게 두렵게 하지? 그 철갑을 두른 사념이야?
갑 : 좀 더 가까이와 내 눈을 봐.
을. 다가서면. 갑이 헬멧을 한 대 쿵 쥐어박는다. 다시 노크를 하듯 똑 똑.
을 : (자신도 모르게 복화술로) 누구세요?
갑 : 누구세요? 하고 묻는 너는 누구냐? (사이) 뭐야?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을 : (모호한 표정) 글쎄. 누가 물어보긴 한 것 같긴 한데? 누구지?
갑 : 너는 모르지만, 분명, 니 머릿속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게 틀림없어.
을 :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다니!? 누가 내 머리 안에서 월세 사는
거야?
갑 : 머리 다시 대 봐.
을. 머리를 불안하고 근심스러운 표정 짓고 조용히 갑에게 들이댄다.
갑. 을의 헬멧에다 주먹으로 노크를 한다.
을 : (.......)
갑 : (다시 똑, 똑, 똑. 두드린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을 : (불쑥, 복화술로) 이 안엔, 아무도 없어요.
갑 : (놀라보며) 들었지? 아무도 없다고 하잖아.
을 : (굉장히 놀라) 그런데, 누가 자꾸 대답을 하고 있는 놈은 누구지?
갑 : 녀석은 꼭꼭 숨은 거야.
을 : (놀라서 보며) 곱창 모양 꽉 찬 내 머릿속에 숨을 곳이 있기나 해?
갑 : 너한테 들키면, 곤란하니깐 저러는 거야.
을 : 세상에, 누가 내 머릿속에 들어가 앉아 있는 거지? 그럼, 내 머릿속에 의자가 놓여 져 있다는 건가? 내가 그 토록 앉고 싶어 했던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정체불명의 저자는 도대체 누굴까?
갑 : 자문자답.
을 : 뭐야? 나 자신한테 내 스스로가 물어 본다?
을은 혼란스러운지, 안절부절 하면서 왔다 갔다 한다.
앉아 보기도 하고 서 보기도 한다.
갑 : 그만 왔다 갔다 해. 정신 사나워.
을 : (멈추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줄곧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말없이 나와 늘 동행하면서 무슨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나?
나도 모르게 늘 존재했다면? 그래! 너처럼, 그 놈은 늘 머릿속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생각을 한 거야. 넌. 그 놈을 노크를 해서 눈을 뜨게 한 거야!
갑 : 그 놈과 너는, 다르다고 생각하니?
을 : 그 놈이 그 의자에 앉아서 날, 조종하고 있는 거야. 비행접시를 조종하는
외계인처럼....(갑을 뜨악하게 보며) 세상에, 그 놈도 우리처럼 헬멧을 쓰고 있을까?
갑 : 천 개의 눈을 가진 천개의 팔을 가진 그 놈이 어쩌면 널 조종할 지도
모르지.
을 : 머리에 뿔이 사슴처럼 돋아난 괴물이면 어쩌지? 아. 무서워.
갑 : 천 개의 눈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저 괴물의 속셈은 뭘까?
을 : 아마도, 니가 앉은 그 의자에 내가 앉기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갑 : 갑인 나의 의자에 을인, 니가, 앉기를 응원 한다는 소리야?
을 : 내가 물론 그 의자에 앉고 싶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는 그저 호기심에
앉고 싶었어. 근데, 그 녀석은 의지가 강해, 내가 살의를 느꼈던 건, 그 놈이 날 그렇게 조종을 해서 그런 거 일까?
갑 : 뭐야? 나한테, 살의를 느꼈다고?
을 : 니가 아니고, 내 머릿속에 앉아 있는 눈이 천 개인 놈. 니가 의자를 독차지하고 앉아 있는 게, 늘 불공평 하다고 생각을 한 거겠지.
갑 : 만약에, 내가 너에게 이 의자를 양보 한다면, 넌 아마도 미쳐버릴지도 몰라.
을 : 내가 어째서 미쳐야만 하니?
갑 : 너와 머릿속에 앉아 있는 또 다른 괴물이 동시에 생각을 한다고 생각을 해봐.
을 : 동시에? 그러니깐 생각과 생각이 부딪히면?
갑 : 엄청난 정신 분열을 초래 할 걸?
을 : 방법이 뭐야? 방법을 가르쳐 줘! 머릿속 의자에 앉은 그 놈을 암살 해 버려야 하나?
갑 : 어떡하긴, 머릿속의 그 의자를 치워 버려야지.
을 : 그게 가능해? 그 놈은 오래전부터 늘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갑 : 그 의자를 빼앗아 니가 앉으면 돼.
을 : 그 놈은 너처럼, 절대로 의자에서 일어날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그 놈은
늘 승자고 난 늘 패자인 거 같은데? 니가 승자고 내가 패자인 지금처럼.
갑 : 어쨌든, 눈을 감고....
을 : 눈을.... 감으면?
갑 : 그 놈이 모습을 조용히 들어 낼 거야.
을 : 뭐라고 해야 의자를 순순히 내어 줄까?
갑 : 자리를 좀 양보해 달라고 말해.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고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고 해.
을 : 그렇게 말해도 그 놈이 쉽게 양보를 하지 않으면, 어쩌지?
갑 : 밖에 안락하고 쿠션이 좋은, 기막힌 의자가 있으니, 나가서 앉아 보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 봐.
을 : 그럼. 천개의 팔을 한 그 놈이, 천개의 눈으로 째려보며 내 말을 순순히 믿을 까?
갑 : 내가 앉은 이 의자가, 그 놈이 보기엔 너무나 마음에 든 거야.
을 : 보기엔 딱딱하고 그저 평범한 의자 일 뿐인데?
갑 : 보기엔 그렇지. 이 의자는 가끔은 살찐 소파의 감촉처럼, 혹은 한껏 부푼 식빵처럼 폭신폭신 하게 느껴지곤 해. 때론 엉덩이에 뭐라고 귓속말도하기도 하고. 때론 나와 상관없이 따로 행동하기도 해.
을 : 정말이야? 이 의자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구나.
갑 : 넌, 눈에 보이는 것만 믿니?
을 :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분명 내 눈엔 딱딱한 나무재질로 된 의자 인 거 같은 데? 너와 한 몸인 것처럼 말하니깐. 그렇게 보이기도 해.
갑 : 하긴, 한 번도 앉아 보지 못했으니 네가 혼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해.
을 : 그럼, 내게 기회를 좀 줘.
갑 : 넌, 여기에 앉으면 안 돼.
을 : 머릿속에 든 그놈한테는 기회를 주면서 나에게는 이렇게 경계하고 불친절하게 구는 이유가 뭐야.
갑 : 니가 앉으면, 머릿속 의자에 앉은 그 놈이 흥미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
을 : 뭐야. 풀리지 않는 수학 공식처럼 점점 어려워지는데, 그 놈을 만나자니
천개의 눈초리가 두렵고, 안 만나자니. 뭔가 불안하고 초조하고 도대체 방법이 뭐냔 말이야.
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한다. 재주넘기도 하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한다.
사납게 쏘아보는 보는 갑.
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안보이는 세계가 지배한다는 거 모르는구나
때론 안보이던 것이 모습을 나타내면 당황해
갑 : (버럭) 야!
을 : (멈추고 본다)
갑 : 정신 사납다고 자식아. 거기 서 봐.
을 : (멈추고 선다)
갑 : 가부좌 자세 알지?
을 : 알아. 상놈의 다리 말고 양반 다리님.
갑 : 유머라고 하는 소리야?(을. 뱀 혀처럼 빠르게 날름거린다)조용히 가부좌 자세로 앉아봐. 한 번 더 혀로 지랄 떨면 면도날로 그 혀 자른다.
을 : (혀 쏙 집어넣고) 갑의 횡포야? 을은 뭐 반란도 못하나? 너무 권위적이잖아.
갑 : (눈알을 부라리고) 앉을 거야? 설 거야?
을 : (기죽고. 앉는다. 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본다) 이렇게? 됐어?
갑 : 그래. 잘하네.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을 : (허리를 편다)
갑 : 양 손 모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들고, 무릎위에 올려 놔.
을 : 이렇게?
갑 : 눈을 감고.
을 : 눈을 감고.
갑 : 집중을 해. 호흡을 천천히 마시고 내 쉬고 반복을 해봐.
을 : (눈을 감고 집중을 하려고 애쓰며, 호흡을 내시고 마시고 반복을 한다)
사이
갑 : 어때? 뭐가 좀 보이나?
을 : 깜깜해.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관객석에 숨죽이고 앉아 있는 것처럼.
갑 : 의자에 앉은 그 놈이 아직도 안 보여?
을 : 아. 짜증나. 제길.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 들어.
갑 : 악당은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법이야. 인내심이 필요해.
을은 끙끙 거리며 집중을 해서 보려고 하나, 영상이 잘 잡히질 않는다.
을 : 도대체 뭐야? 아무것도 없어. 메아리만 들려와.
갑 : 메아리 소리?
을 : 내가 뭐라고 소리를 쳐 봐도, 아주 공허한 메아리 소리만 들려 와.
갑 :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을 : 이를테면, 의자에 앉은 분 어디 계세요? 하고 마음으로 불렀어.
갑 : 호, 마음의 소리로?
을 : 어라, 뭔가 보여. 희미한 가로등 아래 누군가 실루엣처럼 누군가 보여.
갑 : 실루엣처럼? 정말 뭐가 보인다구?
을 :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뿌연 안개처럼 뭔가 감질나게 아, 감질나게 조금씩 보여....
갑 : 좋아. 좀 더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뭔가 모습을 들어 낼 거야.
을. 일 어나난다. 마치 그 영상이 보이기나 한 것처럼 손을 뻗는다.
갑 : (궁 금) 어때? 보이기 시작 한 거야?
을 : 점점 윤곽이 선명하게 잡혀 가고 있어. 아. 아. 저게 뭐지?
갑 : (답답하다) 뭐지? 뭐가 보여? 의자에 앉아 있는 그 놈이 정말 보여?
을 : 아, 뭐야. 저건!(사이) 그 놈이 아니고, 그 년이야!
갑 : (놀라서) 뭐? 그 놈이 아니고 그 년이라고?
을 : 세상에나, 여자인거 같아. 아냐. 여자가 분명해!
갑 : 뭐?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니? 그놈이 언제 그 안에서 성전환 수술을 할 시간이라도 있었다고?
을 : (침을 삼키고. 황홀감에 젖어) 더구나 아무것도 입지 않고 그냥 앉아 있어.
을은 보이는 대상 가까이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멈추고,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본다.
갑 : (침을 삼킨다) 그래도 최소한 이브처럼 잎사귀로 가리지도 않았어?
을 : (킁킁 맡으며) 혼자 보기엔 너무나 떨려. 좋은 향기가 나. 뭐랄까?
가슴이 벅차오르는 지독한 암 컷의 내음.
갑 : 너의 아래가 딱딱해 질 만큼, 그렇게 치명적인 자세로 앉아 있나 보구나.
을 : 모든 세포가 일제히 발기 할 만큼. 내 존재가 홀라당 뒤집힐 것 같기도 하고...(은근한 눈길로)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갑 : (믿기 어렵다는 표정) 그래서? 그리고 또, 뭐가 보이지?
을 : 그녀가 이젠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반복하고 있어.
갑 : 제기랄, 오므렸다 폈다? 그 가랑이 사이에 혹시?
을 : 응, 그건 말하기가 곤란해.
갑 : 왜? 왜, 곤란하다는 거지?
을 : 그녀가 엄청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는 것 같아.
갑 : 수줍으면, 더욱 더 다리를 오므리고, 그것을 가려야지. 젠장. 갈보처럼 확 보여주나?
을 : 너도 이리로 와서 보라고. 너무나 수줍어하는 눈빛이 내 모든 죄를 사하여 줄 것 같아. 점점 아, 다리를 점.. 점..(가쁜 숨) 아, 정말, 내 눈을.... 어디다가 둬야 할지 혼란스러워....
갑 : 날, 속이려 드는 건 아니겠지?
을 : 내가 널 속여서 얻는 이익이 뭐가 있다고?
갑 : 이런 젠장! 궁금해서 미치겠는 걸?
갑. 궁금한지 조심스레 의자에서 일어나 을 가까이로 간다.
을의 머리를 잡고 들여 다 볼 순간, 을은 갑의 목을 순간, 움켜잡고 힘껏 조인다.
칵칵 거리는 갑. 조명. 꺼진다.
사이.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 휘파람의 하모니. 상자 벽에서
흰 장갑을 낀 손들이 불쑥 불쑥 튀여 나와 손짓을 한다.
다시 조명 들어오면, 그 입방체 상자 속에 을이 의자에 앉아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 세로로 난 줄무늬 바지 대신, 줄무늬 치마를 입고 있다.
갑은 그런 을의 얼굴을 노려보며 주위를 배회한다. 무척 지루한 지 빨리 뛰기도 하고 천천히 걷기도 하고 구르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고 분주하다.
그러다가 무척 지겨운 표정을 짓고 을의 얼굴을 힐끔 본다.
을 : (눈을 번쩍 뜬다. 한참 정면을 응시한다)
갑 : (놀라 보며) 뭐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지?
을 : (다시 눈을 감는다)
갑 : 치사한 자식아, 눈을 떠 봐. 꼴에 치마까지 입고 그 년 행세를 해?
을 : (눈을 뜨고 요염하게 웃는다)
갑 : 웃어? 니가 요염 떨면 여자로 보일 것 같아?
을 : 어쩌나? 내가 너처럼 보여서 많이 억울하나 보구나.
갑 : 독재자였던 나에게 쿠데타 일으키고 의자 앉아보니깐 기분이 어때?
을 : 생각보다 뭐, 딱히 그저 그래. 뭐랄까? 생각이 좀 더 많아 진거 같기도 하고 머리가 더 복잡해 진 것 같기도 하고.
갑 : 그럼. 한 가지 묻자.
을 : 여러 가지 종합적으로 물어봐도 돼.
갑 : 머릿속의 그 여자 아직도 있기는 한 거야?
을 : (도취되어) 지금은 은밀하게 샤워를 하고 있어. 눈부시게 하얀 속살을 들어 내고서.
갑 : 뭐? 샤워 중이라고? 니 머리 안은 조그만 원룸이 이구나. 티브이도 있고 소파도 있고 냉장고도 있나 보지? 침대 위엔 방금 벗어버린 팬티와 브래지어도 있나 보지?
을 : 근데, 좀 아쉽긴 하다.
갑 : 뭐가 좀 아쉬운 데?
을 : 찰랑거리는 긴 머리가 중요한 부분을 커튼처럼 가려져서.
갑 : 아이 정말 짜증나게. 머리를 크게 좌우로 흔들어 보라 그러지?
을 : (빙긋 웃으며) 그래 볼까?
갑 : 그래 자식아, 이왕이면 헤드뱅잉을 해 보라 그래!
을 : (실눈처럼 하고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다.)
갑 : 뭐야? 그 치명적이다 못해 뱀의 간교한 눈빛처럼 웃는 그 미소는 뭐지?
을의 눈이 빠르게 쉴 사이 없이 깜빡인다. 갑이 을처럼 눈 깜빡임을 흉내를 낸다.
갑 : 지랄. 이젠 바~비 인형이 되고 싶은 거야? 눈 알 빠지겠다. 아주 여자가
되고 싶어서 미쳤구나?
을. 호들갑스럽게 웃더나, 검은 헬멧을 벗는다. 순간 긴 머릿결이 쏟아진다.
화 닷 놀라는 갑.
을은 유혹적인 미소를 띠우며 눈을 깜찍하게 빠르게 반복적으로 깜빡인다.
을의 말투는 전에 을보다 확연히 말투가 여성스러워진다.
을 : 어때? 아직도 내가 남자로 보이니? 천개의 눈이 사라지고 눈이 딱 두 개여서 실망했어?
갑 :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보며)뭐야?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럼 을은 거기에 묶어놓고 병인, 네가 등장한 거야?
을 : 너의 분신인 을에 이어 병의 등장이 신선하지 않아? 아직도 믿기지 않으면? 은밀한 거길 보여줘?
갑. 여자로 변한 을의 모습이 실감이 나는 지 을의 주위를 돌며 자세히 관찰을 하며 머리 결을 만지기도 하고 냄새도 맡기도 하고 손도 잡아본다.
갑 : (부들부들 떨며) 그럼 넌? 그동안 나와 줄곧 토론 했던 그 놈이 분명 아닌 거네.
을 : 나 참, 자기는 감각이 너무 느리다. 그 재수 없는 줄무늬 바지 찾는 거구나.
갑 : 그럼. 을, 이, 란 놈은 어떻게 한 거야?
을 : 내가 앉았던 그 의자에 꼼짝 없이 앉아 있어. 그것도 밧줄에 꽁꽁 묶여서. 호. 호. 호. (일어선다) 이제 나의 필살기인 헤드뱅잉, 보고 싶어?
갑 : 너의 정체성이 나를 혼란 속에 빠트려. 그래 확 까봐. 당당하고 자신 있게 찰랑 거리는 머리로 날 어떻게 속였을지 몰라도. 은밀한 거긴 속이진 못할걸? 빨리 그 치마를 벗지 그래?
을 : 그 의심 참 오래가네. 너, 내가 아직도 내가 그 놈이라고 착각하니?
난 그래도 너처럼 서있게 하지 않고 의자에 앉혀서 묶어둔 거야. 아름다운
배려지.
갑 : 머리 안에 있던 여자가 내 앞에 서 있는 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을 : 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보이지 않은 세계가 지배한다는 거 모르구나.
때론, 안 보이던 것이 이렇게 모습을 나타나면 누구나 당황해.
을, 헤드뱅잉을 한다. 눈치를 살피 던 갑. 잽싸게 헤드슬라이딩을 해서
을의 발목을 움켜잡는다. 넘어지는 을의 스커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콱 잡는다. 당황해서 얼굴이 벌게진 을. 순간 표정이 모호해지는 갑.
갑 :(당혹스런 표정) 뭐야. 텅 빈 동굴처럼 공허하고 허무한 이 느낌은 뭐지?
을 , 갑을 힘껏 걷어차면, 나뒹구는 갑. 빈손을 노려보며, 허탈하게 웃는다.
갑 : (공포에 질려) 뭐야? 없잖아. 호두 알 두 개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을 : 왜 내가 자웅동체처럼 보이나? 블랙 홀 같은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아?
갑 : 들어가면? 뭐!
을 : 네가 원래 꿈이었던 그곳으로 돌아가지. 무념무상이었던 태아였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야. 왜 두려워? 자. 나와 한 몸 되고 싶지?
갑. 두려운 표정으로 을의 얼굴을 노려본다.
갑 :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배회) 넌, 그 의자에서 결코 행복 하진 못할 거야. 사념이 너를 집어 삼킬 거다.
을 : 생각과 생각 사이에 끼어드는 버라이어티 한 생각들?
갑 : 왜? 아직 까진 아기의 잠든 마음같이 고요해? 부처님의 열반의 경지야?
을 : 고요하다 못해 벅찬 희열이 회음부에서 소용돌이치다가 이마 한복판에서
절정에 이른다면 어쩌겠어? 궁극적인 해탈에 이르는 경지인 쿤달리니라고 모르겠어?
갑 : 물론, 마음이 가끔 장난을 치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잠시고....머잖아, 쥐 도 새도 모르게 분노, 불안, 공포가, 햄버거 속 살코기처럼 잔뜩 짓눌려 누군가의 입속에 들어가 짓뭉개지는 것처럼 엄청난 고통이 마귀 떼처럼 몰려 올 거다.
을 : 그런 괴물과도 같은 이 의자에서 여태 것 혼자 독점 했던 건 뭐였지?
갑 : 몰라서 물어?
을 : 그럼 이 의자가 무언지 두 마디로 표현한다면 뭐예요?
갑 : 뭐랄까? 껍데기, 혹은 거죽.
을 : (놀라며) 껍데기 혹은 거죽이라면?
갑 : 아직도 모르겠어? 쓸쓸한 빈 들판의 영혼 혹은, 지친 삶의 지루한 긴 여행이지.
을 : 뭐야? 왜 날 자꾸, 혼란에 빠뜨리는 거지? 의자를 너무 폄하하는 표현 아닌가?
갑 : 이 의자는 잠시 우리가 빌려 쓰는 몸이야.
을 : 몸이라면? 이 의자가 존재의 탈을 쓴 껍데기에 불과 하단 말이니?
갑 : 나도 한 땐 집착을 했고, 어쩌면 지금도 집착을 하는지 몰라.
그 환상의 그물 같은 이미 짜여 진 프로그램 속에서 말이야.
을 : 의자에 앉아 있던 니 모습이 참 좋아 보였는데, 이게 그저 환상의 의자라고?
게다가 프로그램이라면, 우린 그저 이미 짜여 진 프로그램대로 살아간다는거니?
갑 ; 이제 좀 실감나나? 딱딱했던 뇌가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지 않나?
을 : 좀 두려운 생각이 드는데? 뭐야? 점 점... 아, 터질 것만 같아서. 뇌란 바다에 뜬 배가 파도에 출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갑 : 그 의자는 죽음의 아름다운 긴 그림자를 늘 달고 살지.
을 : (노려보며) 그렇게 말하지만, 내가 당장 일어서면 니가 곧 앉게 될 걸?
갑 : 난, 의자에 앉고 싶진 않아. 생각의 괴물과 싸우는 데 내 생애의 모든
에너지를 탕진 했으니깐.
을 : (일어선다)뭐야? 몸이 왜 이렇게 답답하지? 뭔가 불안해, 점점 무서워지고, 왜 이러지?
혼란스러워하는 을. 어느 듯 가면을 쓴 인형들이 상자 벽에 유령처럼 서 있다.
그들은 서 있다는 게 무척 괴로운지 고통의 신음소리를 마치 코러스처럼 하모니
를 이룬다. 갑. 을의 주위를 거친 호흡을 내 뿜으면서 서서히 돈다.
갑 : 방패와 칼을 들고 갑옷을 입었다고 해도 그건 삽시간에 스며들어, 넌 결국 백기를 들어야 할 걸? 다시 머릿속으로 도망치고 싶지?
을 : 그렇긴 해도, 호두 같은 뇌 속에서 납덩이처럼 무겁게 잠을 자고 싶진 않아.
의식이 없이 무의식 상태에서 있다는 것도 난 두려워. 정말 두려워져!
갑 : 내가 노크를 하지 않았다면, 넌 그 놈을 인질로 잡아 두진 않았을 텐데
너무나 안타까워.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질주를 하는
것처럼. 내가 널 끄집어 낸 건 너무나 큰 실수였어.
을 : 어쩌지? 너무나 긴장해서 입안에 침이 말라 바삭 구운 과자처럼 금방 부서질
것만 같아. 그토록 열망하며 앉고 싶었던 이 의자가 고작 내게 준건 무가치 감이야. 내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 못하는 가수면 상태와도 같은, 이 트랜스! 그냥 거기에 그렇게 있을 걸 왜 나를 끄집어내서 이런 더러운 불균형 상태에 이르게 했지?
가면을 쓴 인형들이 바닥에 쓰러지고 꿈틀 꿈틀 거리며 벌레처럼 기어서간다.
갑 : 그건, 시작에 불과해, 내가 그 요사스런 괴물과 사투를 벌이면서 마음을 달래느라 늘 눈을 감고 명상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 예를 들어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를 코끼리로 생각 했어. 그 코끼리가 사라지는 걸 그냥 보면 된다고 하지만, 코끼리는 뭘 남기고 갔는지 알아?
을 : 뭘 남겼는데?
갑 : 코끼리 똥!
을 : 코끼리 상아가 아니고 똥이라고?
갑 : 그래, 코끼리 똥. 분노의 흔적이 남은 거지. 그 똥엔 파리 떼가 몰려들고
아무리 파리 떼를 좇으려고 해도 파리는 집요하게 코끼리 똥을 원하지.
마인드 컨트롤? 요가? 명상? 참선? 그게 분노를 더 크게 만들어.
을 : 아~ 정말. 미치겠네. 없앨 수가 없다는 걸? 왜 그렇게 길게 설명해?
갑 : 그 만큼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사념 같은 괴물을 떨구기가 어렵다는 거지.
을, 갑자기 일어서더니, 의자를 힘껏 걷어찬다. 보는 갑. 기어가던 가면 쓴 인형들이 혼비백산 일어나 사라진다.
을 : 우리, 앉지 말자. 너도 앉을 생각 마! 이 의자 자체를 없애 버리자.
갑 : 내 말에 충격이 컸나 보구나. 그렇다고 의자를 걷어차니? 그 의자를 걷어
차기가 얼마나 힘든데, 너는 간단히 차 버리는 구나.
을 : 왜? 간단히 차 버린 나의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은 건가요?
갑 : 그 의자를 걷어 차 버리면 모든 사념은 사라지니깐.
을 : 사념이 모래폭풍처럼 불어와서 차버렸어. 내 머리가 이스트에 잘 부풀은 반죽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아서.
갑 : 우주의 빅뱅처럼? 폭발직전이야? 어렸을 적 밤하늘의 별을 보고
느꼈던, 아득해지는 공간처럼? 정말, 이젠 앉지 않을 거야?
을 : 누군가 자비를 베풀어 주지도 않
[당선소감] “20대 보낸 대학로 돌아가 산란의 고통 즐기겠다”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이 있다고 우기고 썼던 희곡이 ‘당선’이라는 연락을 받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삶의 낯선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뭔가 가슴이 텅 빈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선의 영광을 제게 안겨준 경상일보 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다른 분야에서 활동을 하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비로소 25년 만에 연극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20대를 연극의 열정으로 보냈던 대학로에서 다시 연어의 회귀처럼, 찬란한 산란의 고통을 즐기겠습니다.
연극에 대한 열정을 지펴 준, 일산 동지들인 연극과 후배인 신택기, 동광자, 서경희, 극단 인산인해의 창단과 작품 준비 중인 엄현수 감독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차례의 암 수술을 이겨내고 지금은 재활 중인 아내에게 희곡당선이 조그만 위로의 선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연극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연극 파이팅!
-황석연-
1958년 경남 김해 출생
1980년 서울예대 연극과 졸업
[심사평] “내면세계의 갈등 표출해 삶의 근원적 화두 이어간 수작”
희곡 작품을 심사할 때마다 언제나 설렘과 기쁨과 고통이 수반한다.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희곡은 작업환경이 열악하고 작가수업도 연극과 문학을 넘나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라 응모자가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무조건 작품에 대한 기대를 하며 읽는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그 힘들게 열정적으로 쓰고 있는 예비 희곡작가에게 낙선의 아픔을 겪게 한다는 것은 피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이번 심사대상작품은 예심을 거치고 본심으로 넘어온 열편이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개성을 보여주었으나 몇 작품은 기발한 주제임에도 지나친 비속어와 욕지거리의 난발 그리고 패륜적인 내용으로 거부감을 갖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을 지나다보면 ‘예술은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는 표어를 보게 된다. 이 표어는 꽤 오래 동안 붙어있고 보는 사람마다 모두 공감하며 나 역시도 예술은 모름지기 독자나 관객, 관람자에게 어떤 기쁨이나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다. 이런 관점에서 열편의 우열을 가려 우선 상위권 세편을 골라 거듭 정독하고 고심한 결과, 전과 7범 8범인 두 도둑이 도둑질하러 들어간 집의 가난한 임산부를 돕는 ‘경사慶事’는 진부한 주제이긴 해도 극적 전환이 밝고 재치가 있어서 호감이 갔지만 극본작성에 오점이 있어 제외하였고, 함께 일할 극작가를 찾으려는 연출가의 기발한 계획을 문단 현실에 빗대어 살짝 꼬집으며 코믹하게 반전의 묘미를 보여준 ‘쇼’는 당선작의 주제로는 좀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갑론을박甲論乙駁’은 내면세계의 갈등요소를 갑, 을 관계로 표출하여 논쟁토록하면서 극을 전개시키는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대화가 간결하고 안정적이면서 철학적인 내용도 가미하여 삶의 근원적인 화두를 특이한 방법으로 이어간 수준급의 작품이어서 무대화 했을 경우 더욱 돋보일 것으로 믿어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앞으로 기대해볼 작가로 예견한다.
전옥주
1960년대 현대문학으로 등단
희곡집 <낮공원산책> <아가야 청산가자> <꿈지우기> <영혼의 소리>산문집 <꽁보리밥과 풀빵> <하나 되기 위하여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이야기> 등
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 공연윤리위원회 전문심의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