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 맥주 춘추전국시대
주세법 개정으로 규제 풀려… 소규모 양조장 제조 맥주
외부 유통 가능해져 수제 맥주 전문점 확산
맛 음미하며 먹는 술로… 필스너·스타우트·IPA
다양한 맛 즐기기 위해 작은 잔 샘플러 메뉴도
지역 경제 살리는 新사업
인삼·오미자·홍삼 넣은 지역 특산 맥주 개발
맥주 만드는 법 배워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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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서울에 있는 수제 맥주 전문점에서도 각 지역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다양한 맛과 향의 맥주를 맛볼 수 있게 됐다. 개성 있는 맛을 뽐내는 수제 맥주들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수제 맥주 열풍’이 불고 있다. 사진은 서울 상수동의 수제 맥주 전문점 케그비에서 파는 필스너, 페일에일, IPA, 바이젠, 쾰시, 포터 맥주(왼쪽부터). / 김지호 기자
'여름에는 맥주, 겨울에는 소주'라는 공식이 깨졌다. 보통 추운 겨울엔 시린 속을 뜨끈하게 데워주는 소주나 사케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겨울엔 여름 메뉴였던 '맥주'를 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맛집 애플리케이션 식신 핫플레이스에 따르면 올겨울(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맥주를 검색한 횟수는 6만5451건으로 지난겨울(2013년 11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5만2749건에 비해 24.1% 증가했다. 대표적인 겨울 주류였던 사케를 검색한 횟수가 24.2%나 줄어든 것과는 대조적이다. 겨울철 주류 검색어 1위였던 소주는 맥주에 최다 주류 검색어 자리를 내줬다.
이 같은 맥주 강세는 지난해부터 주류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수제 맥주'의 힘이 크다. 최근까지 한국에서 맥주는 갈증을 해소해주는 시원한 술 또는 소주나 양주를 섞어 폭탄주를 만드는 술로 대접받는 경우가 많았다. 2013년 말 기준 한국의 맥주 총 생산량은 215만7344kL. 이 중 95.46%를 오비맥주, 진로 하이트 등 대기업이 만드는 과점 구조다. 이들의 주력 상품은 하이트, 카스같이 탄산의 상쾌함과 부드러운 목 넘김이 특징인 라거(Lager) 맥주였다. 달콤한 밀 맥주, 씁쓸한 흑맥주 등 다양한 수입 맥주를 경험해 본 사람이 많아지면서 주당(酒黨)들 사이에 '한국 맥주는 싱겁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2012년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한국 맥주는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기사까지 나오자 설 자리는 더 좁아지는 듯했다.
수제 맥주의 등장은 맥주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크래프트 비어, 하우스 맥주 등으로 불리는 수제 맥주는 대기업이 아닌 '마이크로브루어리'(microbrewery·5kL 이상 75kL 이하 규모의 소규모 맥주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뜻한다. 양조장마다 서로 다른 제조법을 사용해 각기 다른 맛과 개성을 지니는 게 특징이다. 마이크로브루어리에서 만든 맥주를 공급받아 판매하는 수제 맥주 전문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차보윤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 협회장은 "지난해부터 서울 이태원과 홍대, 강남 등을 중심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수제 맥주 전문점이 전국적으로 1000여개에 이른다"고 말했다. 식신 핫플레이스에서 '수제 맥주'를 검색한 횟수도 지난겨울에 비해 2.38배(6545건)로 증가했다.
개성있는 맥주 찾는 사람 늘어 대전 유성구에서 2003년부터 마이크로브루어리인 '바이젠 하우스'를 운영하는 임성빈 사장은 한 달에 7번 만들던 맥주를 지난해 4월부터는 한 달에 17번씩 만들고 있다. 지난해 4월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이곳에서 만든 맥주를 외부에 납품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마이크로브루어리에서 만든 맥주는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가게에서만 팔 수 있었다. 규제가 풀리자 "수제 맥주를 공급해달라"는 요청이 전국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맥주 생산량을 월 5000L에서 1만L까지 늘리고 직원 6명을 추가로 고용했다. 임 사장은 "이전에는 맥주를 가져다 팔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와도 팔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전국 40여 군데에 맥주를 공급하고 있다. 매출도 규제가 풀리기 전보다 50% 늘었다"고 말했다.
기존 주세법에서는 마이크로브루어리에서 술을 만들어 판매하려면 대지 200㎡ 이상, 창고 100㎡ 이상이라는 매장 설치 요건을 갖춰야 하고 양조장에서 술을 판매하는 곳까지 배관시설을 설치해 맥주를 이동해야 했다. 양조장과 가까운 곳에서 맥주를 팔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제 맥주는 집집마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만든 특색 있는 맥주라는 뜻에서 하우스 맥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존 주세법에 따르면 수제 맥주는 맥주를 만든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말 그대로 '하우스' 맥주였던 셈이다.
수제 맥주가 집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게 된 건 지난해 4월 주세법 시행령이 일부 개정되면서부터다. 소규모 맥주 양조장에서 만든 수제 맥주의 외부 유통이 가능해지자 특색있는 수제 맥주를 받아 판매하는 전문점이 잇따라 생겨났다.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있는 수제 맥주 전문점 '케그비'는 10여 군데의 마이크로브루어리에서 생산한 맥주와 수입 수제 맥주 등 30여종을 판매한다. 법이 개정되면서 다양한 맥주를 판매할 수 있게 되자 출판사 편집자 등 3명이 의기투합해 지난해 5월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가장 큰 용량의 잔이 500㏄다. 일반 호프집에서 2000㏄, 3000㏄짜리 큰 통에 담은 일반 생맥주를 파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맛이 다양해진 만큼 여러 가지 맥주를 다양하게 맛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280㏄짜리 잔에 서로 다른 4종류의 맥주를 담아 파는 '샘플러' 메뉴도 판매한다. 이 가게 최유성 사장은 "법이 개정되면서 서울에서도 각 지역의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독특한 맥주를 들여올 수 있게 돼 수제 맥주 전문점을 열기로 했다. 꿀꺽꿀꺽 들이켜는 술이었던 맥주가 이젠 맛을 음미하며 먹는 술로 인식이 바뀌는 시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 협회에 따르면 국내 소규모 맥주 양조장은 40여곳이다. 수제 맥주 전문점들도 자신만의 맥주를 제조할 수 있는 양조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며 한국 맥주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전직 이코노미스트지 기자 다니엘 튜더씨가 차린 수제 맥주 전문점 '더 부스'는 지난해 7월 경기도 판교에 소규모 맥주 양조장을 만들었다. 튜더씨와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김희윤씨는 "특별한 맥주를 원하는 손님들을 위해 다음 달부터는 직접 만든 맥주를 한정판으로 제공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수제 맥주 전문점이 인기를 끌자 대기업들도 수제 맥주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신세계푸드는 지난해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수제 맥주 전문점 '데블스 도어'를 열었다. 천하장사 소시지로 유명한 진주햄은 지난 10일 국내의 대표적 마이크로브루어리로 꼽히는 카브루를 인수해 수제 맥주 전쟁에 합류했다.
수제 맥주 인기에 별별 사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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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로브루어리인 바이젠하우스는 지난해부터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임성빈 사장은 “가게를 연 지 12년 만의 최대 호황” 이라고 했다. / 신현종 기자
전문가들은 수제 맥주 관련 시장이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시장조사업체인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0% 이상이 '수제 맥주를 마실 의향이 있다'고 답했고, 10명 중 6명은 '앞으로 수제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더 많아질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했다.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은 지난해 9월에 1년짜리 비어 소믈리에·브루 마스터 (맥주 전문가) 과정을 개설했다. 첫 학기에 22명이 '맥주 전문가'가 되겠다며 등록했다. 와인 전문가인 소믈리에처럼 다양한 맛의 맥주를 만들고 관리하며 이를 추천해줄 수 있는 맥주 전문가를 양성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변정우 경희대 관광대학원장은 "맥주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하고 알코올 도수가 낮은 대중적인 술로 소비량 또한 가장 크다. 수제 맥주 시장이 점차 확대되고, 맥주 전문가에 대한 수요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제 맥주는 지역 경제를 살리는 신(新)사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역별 특산물을 이용해 만든 맥주를 전국적으로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김포파주인삼농협은 6년근 인삼과 김포 쌀로 만든 맥주 '에너진'을 생산한다. 경북 문경의 경산동네영농조합이 판매하는 오미자 맥주도 조만간 문경 시내에 판매점을 내고 관광지인 문경새재에서도 판매할 계획이다. 제주개발공사는 제주산 맥주보리로 만든 맥주 '제스피'를 판매하고 있고, 홍삼 맥주를 만든 전북 고창은 중국과 수출 계약을 맺었다.
일본에서는 240여개에 달하는 지역 특산 맥주 '지비루'가 인기다. 한국에서 로컬 비어(지역 특산 맥주)를 생산하는 업체는 10여곳으로 아직 걸음마 단계다. 김진진 농림축산식품부 식품산업진흥과장은 "지역 농산물 소비를 활성화하고 지역 경제를 살리는 새로운 산업으로 로컬 비어를 육성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직접 맥주를 만들어 먹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재료와 공간을 제공해주는 서울 성동구 옥수동 '소마공방'에는 지난해부터 맥주 만들기 과정을 문의하는 사람이 부쩍 들었다.
여기서 맥주를 제조하는 데는 10만~20만원 정도가 든다. 잘 익은 보리를 갈아 약한 불에 우려 몰트를 만들고 여기에 물과 맥아즙을 넣고 끓인다. 여기에 홉(Hop)을 넣고 냉각한 뒤 효모를 넣어 발효시키면 맥주가 된다. 발효, 숙성까지 40일이 걸린다. 김성준 대표는 "맥주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느냐는 문의가 하루에 5건 이상 들어오고 있고 수강생은 한 달 30여명 정도다. 최근에는 기업이나 동호회에서 단체로 오는 경우도 많아 지난해에만 1200여명의 단체 손님이 맥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