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의 불운
아우구스투스는 많은 운이 따른 남자였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 만큼은 영 풀리지 않았다.
자신부터 외동딸 하나 외엔 얻지 못했고 이 외동딸은 대를 잇고자 하는 아버지의 집념속에 돌림 받는 결혼을 당해야 했다.
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누스 시절 스크리보니아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스크리보니아는 폼페이우스와 사돈 관계로 이는 당시 실세였던 폼페이우스와의 정략 결혼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이로 그들의 결혼은 율리아가 태어나기도 전에 깨져버렸다.
이혼 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리비아와 결혼을 할 수 있어 행복했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리비아는 이미 전 남편으로부터 두 아들이 낳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자식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으로는 단지 율리아뿐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가 14세 때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의 첫 아들 마르켈루스와 결혼시켰다. 이는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보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을 손자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꿈은 2년 후 자식 없이 죽은 마르켈루스로 인해 끝나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16세에 과부가 된 율리아를 2년 뒤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아그리파와 결혼을 시켰다. 당시 아그리파에겐 아내가 있었는데 강제로 이혼시킨 상태였다. 42세의 아그리파와 18세의 율리아의 결혼 생활은 의외로 행복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3남 2녀가 출생되었다. 그런데 이 결혼도 9년만에 아그리파의 갑작스런 죽음은 끝나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에게 더 많은 자손을 얻으려고 자신의 부인 리비아가 데려온 전 남편의 아들 티베리우스와 결혼을 시켰다. 31세의 남편과 28세의 아내는 나이에서는 잘 어울렸다. 그런데 이 결혼은 처음부터 문제가 발생 되었다.이는 티베리우스가 강제로 이혼한 전 아내 빕사니아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혼하자 마자 별거 상태가 되었고 율리아는 졸지에 버림 받은 여인이 되었다.
율리아가 언제부터 행실이 나빴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녀 37세였던 기원전 2년 아우구스투스는 중대한 결단을 필요로 했다. 율리아에게 자유분망한 남자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율리아가 이혼한 상태였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율리아가 이혼을 요구했다해도 아우구스투스가 원치 않았을 것이다. 건전한 가정을 위해 16년전에 만든 ‘정식 혼인에 관한 법’을 제정한바 있는 그로선 자신의 딸의 이혼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 법적으로는 티베리우스의 아내로 남아있는 그녀의 이 행동은 간통죄가 된 것이다. 특히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법’에서는 남편이나 아버지가 아내나 딸의 불륜 관계를 보고도 숨기거나 아무런 조치를 않으면 ‘간통 방조죄’로 처벌 받는 다는 규정이 있어 결국 아우구스투스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가부장권으로 딸의 재산을 몰수하고 유산 상속권을 박탈한 다음 나폴리 서쪽 70키로 떨어진 판타탈리아 섬으로 종신 유배시켰다.
당시 율리아와 불륜 관계를 맺은 남자들은 모두 추방당했는데 단 한사람 안토니우스 만큼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그는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참패를 당하고 죽은 안토니우스의 아들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부부관계였던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에게 그를 기르도록 했고 친조카처럼 대했다. 또한 나중엔 그를 집정관과 속주 총독에까지 출세를 시켜주었다. 아마도 그에 대한 배신과 분노를 아우구스투스는 도저히 삭힐 수 없었던 것 같다.
율리아는 16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그의 나이 53세로 생을 마감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불상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기 8년 외손녀 율리아도 동일하게 유배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유배당한 이유는 어머니 율리아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남자와의 관계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간통을 죄로 법으로 규정하면서 건전한 가정을 되살리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70세 넘은 황제의 분노와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생 자신의 핏줄을 잇는데 집착했고 혈육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 그 혈육에게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는 체념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무 문제 없는 살아가고 있는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의 둘째딸 아그리피나를 티베리우스의 양자인 게르마니쿠스와 결혼시켰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3남2녀가 태어났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3대 황제 카리쿨라이고 그의 누이동생은 5대 황제 네로를 낳았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율리아가 받은 유배형은 시인 오비디우스의 유배형이란 문학 사상 특이한 사건을 낳았다. 시인 오비디우스의 죄목은 “사랑의 기술”이란 시집을 펴낸 것이었다.
시집의 1권과 2권은 어떻게 행동하면 여자를 정복할 수 있는가를 남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제3권은 어떻게 하면 남자들을 정복할 수 있는가를 여자들에게 가르쳐준 작품이다. 이 작품이 율리아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이유였다.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영묘
영묘 근처에 있는 Via del Corea(한국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