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로 가는 길목에는 이제 곧 부처의 세계로 진입하게 됨을 알리는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다. 그것은 깃발을 거는 막대기와 받치기 위한 돌기둥으로, 찰간지주(刹竿支柱)라고도 한다. 깃발을 거는 막대기라는 의미의 당간과 이 당간을 세우는 기둥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형태는 두 기둥을 60∼100cm의 간격으로 양쪽에 세운 것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면이 편평하고 수직인데 반하여 뒷면은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고 둥글며 옆에는 당간을 받치기 위해서 2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 아랫부분에는 당간을 세우는 간대(竿臺)나 기단이 마련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당간은 석재 또는 철제로 만든 것이나 대개 목재를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재료상의 이유로 부석사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숙수사지 당간지주, 미륵사지 당간지주, 금산사 당간지주, 중초사지 당간지주(827년) 등 주로 당간을 세웠던 통일신라시대의 석재 지주만 남아 있지만 드물게 갑사(甲寺)와 용두사지(龍頭寺址)에 철제로 된 고려시대의 당간이 전해지고 있다.
일주문
절의 문은 부처님의 세계, 불국정토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작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이 바로 일주문(一柱門)이다. 일반적으로 건물을 지을 때는 사방에 4개의 기둥을 세우기 마련이나 일주문의 경우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다. 그래서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일주문의 이러한 독특한 양식은 일심(一心)을 의미한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둥 두 개를 세워 일주문을 완성시키지만 범어사의 일주문은 돌기둥 위에 둥근 나무기둥을 올린 네 개의 기둥이 한 줄로 서서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황문
번뇌로 어지러진 마음을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하나로 다진 뒤에 계속 걷다보면, 금강력사(인왕)나 사천왕 같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을 모신 건물이 나타나게 된다. 금강력사상이 자리잡고 있는 문은 금강문(金剛門)이고 사천왕상이 모셔진 문은 천왕문(天王門)이다. 보통 사찰로 들어서서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을 만나게 되나 금강문이 없는 경우에는 바로 천왕문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왕문의 대문에다 금강력사의 모습을 그려 놓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세우기도 한다. 천왕문은 사천왕과 금강력사의 힘으로 절을 외호하고 나쁜 귀신 등을 내쫓아 사찰을 청정한 도량으로 만들려는 데 있다. 그리고 방문자의 마음을 다시한번 더 엄숙하게 하려는 뜻도 담겨 있다. 이곳에는 수미산 중턱의 동,서, 남, 북에서 불국정토의 외곽을 지키는 네 명의 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신음하는 마귀를 발로 밟고 커다란 칼을 손에 든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천왕은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지만, 착한 이에게는 상을 내린다고 한다.
불이문
천왕문을 지나서 수미산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 위에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不二門)이 서 있다. 이 불이문을 통과하여 불이의 진리로써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면 부처가 되고 해탈을 이룬다고 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님을 뜻한다. 즉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 선과 불선(不善)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불국정토인 것이다
범종각
범종각(梵鍾閣)은 범종이 있는 곳으로, 그 전각이 2층의 누각일 경우에는 범종루(梵鍾樓)라고 한다. 이 범종각은 일반적으로 불이문과 동일선상에 위치하는데, 그 까닭은 글자 그대로 범종각에서는 범천(梵天)의 종소리가 흘러 나오기 때문이다. 범천은 수미산 정상의 하늘에서 불이문으로 들어오는 구도자를 환영하고 그가 불이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는 하늘의 주악을 연주한다. 이 범종각에 때로는 범종만이 홀로 있기도 하지만, 규모 있는 절에서는 범종 외에도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등을 불전사물(佛殿四物
법당
법당(法堂)은 불교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을 모신 전각(殿閣)으로, 절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전각을 금당(金堂)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법당보다는 금당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초기까지는 본존불(本尊佛)을 모신 사찰의 중심건물을 금당이라고 하였다. 절 안에는 대웅전, 극락전, 명부전, 산신각 등 여러 전각들이 있는데 그 명칭들은 안에 모셔진 본존불의 성격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 즉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각각의 부처님의 세계를 축소하여 표현한 장소이다. 이곳에는 부처의 가르침과 불국정토임을 상징하는 여러 조형물로 장식되어 있다. 그 내부에는 예배의 중심이 되는 본존불과 양옆에서 본존을 보좌하는 협시보살이 불단(佛壇) 위에 모셔져 있고 그 뒤와 좌우에는 불화가 걸려 있다. 위쪽에는 천개(天蓋)가 있어 장엄함을 더하고 있다. 대들보와 천정에는 하늘을 날으는 용과 극락조(極樂鳥), 아름다운 연꽃과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많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불단 위에는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한 향로와, 화병, 촛대가 놓여 있다. 이외에도 음식이나 물, 차를 담는 발우(鉢盂), 정병(淨甁), 다기(茶器) 등이 배치되기도 한다.
대웅전
대웅전(大雄殿)은 항상 사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大雄'이란 부처를 가리키는 말로 진리를 깨달아 세상에 두루 펼친 위대한 영웅이란 뜻이다. 즉 이곳에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협시보살로 보통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위치하나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에 배치되기도 한다. 석가모니는 불교의 창시자로서 역사적인 부처이다. 석가는 종족의 이름이고 모니는 현명한 사람이란 뜻이므로 곧 석가족의 성자(聖者)라는 말로 석존이라고도 부른다. 이름은 싯달타, 성은 고타마에 해당한다. 석가의 모습은 처음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열반한지 약 500년이 지난 1세기경 전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그 형상이 규범화되었다. 형상에는 부처의 일생과 관련된 탄생불, 반가사유상, 고행석가상, 항마성도상, 최초 설법상, 열반상 등을 비롯한 단독상 이외에 석가삼존상, 석가 다보이불병좌상(釋迦 多寶 二佛幷坐像) 등이 있으며 이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팔상도(八相圖)와 석가설법도, 석가 중심의 군상도(群像圖) 등도 있다. 인도의 초기 불상은 대부분 석가불이며 중국이나 우리나라, 일본에서도 석가불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석가불은 입상일 경우에는 시무외인, 여원인의 손모양을 하고 좌상은 선정인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서는 항마촉지인과 지권인을 한 불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극락전
극락전(極樂殿)의 주불은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 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극락전은 일명 무량수전이라 일컫기도 한다.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을 가지고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48대원(四十八大願)을 세웠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로 정토사상의 발달과 함께 중국, 우리나라, 일본 뿐만 아니라 인도 및 서역 등에서도 일찍부터 널리 퍼졌던 것 같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아직 조상의 예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중국의 경우는 6세기 이후 유행하기 시작하여 7세기 후반경에 많이 제작되었다. 그 형상에는 단독상과 삼존상이 있는데 보통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손모양을 취하고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대세지보살 자리에 지장보살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삼국시대부터 아미타불을 보편적으로 신앙하게 되어 많은 작품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감산사 아미타석불입상을 비롯하여 불국사 금동아미타불상, 황복사 삼층석탑 출토 순금아미타불상 등이 단독상으로서 유명하다
대적광전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삼신(三身)이라고 한다. 법신은 報, 化의 근본이 되는 몸이다. 따라서 법신불을 '청정 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보신은 과보신(果報身)으로 수도의 결과로 이루어진 몸이란 뜻이다. 화신은 응화신(應化身)으로 역사적인 현재의 이 육신을 뜻한다. 그러므로 法, 報, 化가 별개의 몸인 동시에 한몸이기도 하다. 청정한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은 항상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법을 설한다고 화엄경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비로전(毘盧殿)의 주존불은 역사적인 존재인 석가모니불이 아니고 법신불인 비로자나불로 되어 있다. 좌우로 보신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경우도 있고, 문수와 보현 두 보살을 모시기도 한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한 보살이고, 보현은 덕행(德行)을 상징한 보살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청정한 법신(法身) 안에는 지혜와 덕행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형상은 보통 지권인(智拳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특히 9세기 중엽경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보림사 비로자나철불(858년), 도피안사 비로자나철불(865년), 축서사 비로자나석불(867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약사전
질병의 고통을 없애주는 부처인 약사불(藥師佛)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일명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동방 정유리광세계(淨瑠璃光世界)에 살면서 12대원(十二大願)을 발하여 모든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해 주는 의왕(醫王)으로서 신앙되었던 부처이다. 약사여래본원경에 의하면 약사불의 정유리세계는 아미타 정토와 같고 그 좌우에는 일광과 월광의 두 보살이 모시고 있으며 또 권속으로 12신장(十二神將)을 거느린다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다른 여래와는 달리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지만 원래는 보주(寶珠)를 쥐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약사경변상도(藥師經變相圖)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조상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신라 선덕여왕 때 밀본(密本)법사가 약사경을 읽어 왕의 병을 고쳤고 경덕왕대에는 경주 분황사에 거대한 약사불을 안치했다는 삼국유사 권 3 및 권 5의 기록에 따라 7세기 중엽부터 약사불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표적인 예로서 신라시대의 분황사 금동약사불을 비롯하여 백률사 금동약사불(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방어산 마애약사불(801년) 등이 전해지고 있다.
미륵전
석존 다음으로 부처가 될 보살로, 미륵불 또는 자씨(慈氏)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이라고도 부른다. 원래 석존의 제자로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석존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세상에 출현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석존 때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미륵불이다. 인도에서는 보살형의 모습으로 과거 7불과 함께 조성된 예가 있으며 중국에서는 미륵신앙이 일찍부터 유행하여 북위시대에 조상이 많이 만들어졌고 당, 송대에는 미륵하생경에 의한 미륵정토변상도(彌勒淨土變相圖)도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 때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으며 회화나 조각에 그 예가 많이 남아 있고 특히 삼국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도 일반적으로 미륵보살로 볼 수 있다.
관음전
관음보살을 모신 사찰의 전각이 관음전이다. 사찰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대자대비를 기원하는 관음신앙의 성행과 함께 관음전(觀音殿)이 매우 많이 건립되어 있다. 이 관음전에는 '원통전(圓通殿)', '대비전(大悲殿)' 등의 편액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관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대자대비한 보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세에서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은 관세음(觀世音), 광세음(光世音), 관자재(觀自在)보살이라고도 한다. 초기 대승불교 경전에서부터 나오지만 특히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로 위난을 만났을 때 그 이름을 외우기만 하면 중생의 성품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구제해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로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왼쪽에서 협시하는 보살로서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화불을 새기고 손에는 보병이나 연꽃을 들고 있는 도상으로 표현된다. 또한 화엄경에 의하면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 거주한다고 한다. 이 보살은 관음신앙이 발달함에 따라 여러 가지의 변화관음으로 나타나는데 11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 索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을 비롯하여 여성형인 준제관음(准提觀音) 그리고 마두관음(馬頭觀音)과 같은 분노형도 나오게 되었다. 이 밖에 수월관음(양류관음), 백의관음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엽의관음(葉衣觀音), 다라존관음(多羅尊觀音) 등 특수한 이름을 가진 여러 관음을 모은 33관음도 있다. 관음보살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신앙되었고 대중에게도 가장 친숙했던 보살로 인도나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교문화 지역에 조각이나 회화 유품으로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관음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단독상과 아미타삼존의 협시로서의 예가 있는데 그중에서 경상북도 선산 출토의 금동관음보살상과 부여 규암면 출토의 금동관음보살상 등이 단독상으로서 유명하다
문수전
문수전(文殊殿)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모시고 있다. 석존의 교화를 돕기 위해서 나타나는 보살로 여러 보살 가운데 대표라 할 수 있고 관음보살 다음으로 많이 신앙되었다. 대승경전 중에서 특히 반야경의 내용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보살이다. 석가의 왼쪽 편에 서서 보현보살과 함께 삼존상을 형성하였으며 후대에는 비로자나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회화에서는 유마경변상도(維摩經變相圖)에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상대자로서 표현되는 예가 상당히 많다. 형상은 대일여래의 5지(五智)를 상징하는 5계를 머리에 맺고 있는 동자형으로 표현되지만 보통 보살의 모습으로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이나 경전을 들고 있고 왼손은 연꽃을 쥐고 있다. 대좌는 연화대좌가 일반적이나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獅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오대산(일명 청량산)을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였는데 이 신앙은 신라 자장법사에 의해서 우리나라에도 널리 퍼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문수보살상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1466년)이 대표적인 예이지만 드물게 사자좌와 흰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문수 보현보살상이 경주 불국사와 합천 법수사지에서 각각 출토되어 현재 대좌부분만 전해지고 있다.
보현전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자비나 이(理)를 상징하는 보살로, 보현전(普賢殿)은 이 보살을 주불로 한 전각이다. 대승불교의 보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보살로 모든 부처의 이법(理法)을 실천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맡고 있으며 또 중생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덕을 가졌다고 해서 보현연명보살,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엄경에 따르면 10대원(十大願)을 발해서 그 역할을 행하는 보살로 되어 있고 법화경에는 이 경의 수행을 권하기 위해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출현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문수보살과 짝을 이루어 석가불의 양 협시보살로 왼쪽에 문수, 오른쪽에 보현보살이 서 있는 삼존형식이 되었다. 형상은 일반적으로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밀교에서는 연화좌 위에 검을 쥐고 있는 보살로서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유행하지 못했으나 삼국유사 권 3에 의하면 신라 경명왕 때 흥륜사 벽에 보현보살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유품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감실에 있는 보현보살상 등이 남아 있다.
명부전
명부전(冥府殿)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는 보살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석가불이 열반한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육도(六道)를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해 주는 보살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 지옥의 시련에서 구해주는 것으로 신앙되어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 일본 등에서 특히 민간들의 깊은 믿음을 받았다. 지장시륜경, 지장보살본원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이미 여래의 경지에 이르렀고 무생법인(無生法印)을 얻었다고 한다. 형상은 보관을 쓰고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반면에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두건을 쓰고 손에는 보주(寶珠)와 석장(錫杖)을 지닌 스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지팡이(석장)로 지옥의 문을 두드려 열고, 밝은 구슬(보주)로는 어두운 세상을 광명으로 비추기 위해서 이다. 또한 단독상일 경우는 좌우에 명부를 주재하는 10대왕[시왕(十王)]을 거느리고 있으나 그 외에는 관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나 아미타 8대보살의 하나로서 표현되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단독상 또는 육도도(六道圖),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로 그려진 예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서 지장보살이 신앙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유행을 보게 되었으며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시대의 선운사 지장보살상이 있다.
산신각,칠성각, 독성각
부처님을 모신 법당 뒤쪽 한편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하여 모셔 놓은 조그마한 전각이 있다. 재물을 주는 산신(山神), 자식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七星), 복락을 선사하는 독성(獨聖)은 인간의 복을 관장하는 신들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구복(求福)적인 기도을 하였다. 3칸일 경우에는 산신과 칠성과 독성을 함께 모신 삼성각(三聖閣)이 되고, 한 칸의 건물을 지어 산신, 독성, 칠성을 따로 모실 경우에는 산신각, 독성각, 칠성각이라는 독립된 이름을 붙였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법당 앞에는 열반의 길로 들어선 부처의 영원한 몸이 머물고 계신 탑(塔)이 있다.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안치하는 건조물로 솔도파(率堵婆), 수두파(藪斗婆), 탑파(塔婆)라고도 한다. 원래는 부처의 사리를 넣기 위해서 돌이나 흙 등을 높게 쌓아올린 무덤을 말한다. 마하승기율 제33에서는 사리를 묻지 않고 다만 기념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공양, 예배하는 뜻으로 세워진 탑을 지제(支提)라 하여 탑파와 구별하고 있으나 뒤에는 이 두 가지의 이름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탑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분묘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불교 이전부터 행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불사리탑으로서의 성격은 석존이 열반한 후 그 사리를 여덟 곳으로 나누어 탑을 쌓기 시작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2~3세기 무렵에는 인도 아쇼카왕이 팔만사천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탑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는 성스러운 구조물로서 불교의 전파와 함께 각 나라에 널리 세워졌으나 나라마다, 시대마다 그 의미나 양식이 변하게 되었다. 보통 사리는 사리용기에 담아 탑 안에 봉안하게 된다. 인도의 불교미술 초기에 나타나는 기원 전후경의 산치대탑은 복발형(覆鉢形:엎어 놓은(覆) 바루(鉢盂, 음식을 담는 승려의 그릇으로 일반 밥그릇과 비슷하다) 같은 모양을 말한다.)으로 마치 분묘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나 점차 시대가 내려갈수록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형식이 만들어졌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옛 탑은 1,500여 기에 이르며, 국보와 보물의 약 25%가 탑이라는 점만으로도 탑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