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문학작가대회>, 2006년 7월.
노동시의 역할과 의미
― 송경동 시인과의 대담 형식으로
맹문재(시인, 안양대 교수)
맹문재 : 송 시인, 오랜만이네요. 지난번 송 시인의 시집 『꿀잠』 출판기념회 때 보았는데 꽤 되었네요. 시집 출간을 다시 축하드립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송경동 : 지난 10여년 넘게 지속해 왔던 단체 상근 일을 올해로 접게 되어 생활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9년여 해왔던 <진보생활문예 삶이 보이는 창> 관련 일들도 모두 놓고 편집위원으로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꼭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일이 없어진 거죠. 그래도 지속되어 왔던 관계와 사업들이 있어 처음 계획대로 쉬고 있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더 바빠지고 있습니다. 소설가 이인휘 선배 제안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부위원장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주로 평택미군기지확장이전 반대 문화예술행동과 한미FTA저지 문화예술공대위 활동에 결합하고 있습니다. 전국노동자문학연대 사업으로는 <디지털노동문학자료관> 사업을 정리하고 있고요. 올 9월쯤 제3회 전국노동자문학캠프사업을 민주노총, 삶이 보이는 창, 작은책, 전태일문학상운영위원회 등과 함께 진행할 계획입니다. 삶이 보이는 창 관련 사업으로는 농민문화연대 사업을 구상 중인데, 아마도 11월 농민대회에 맞춰 가칭 ‘농민문화예술전’을 서울에서 진행하게 될 듯합니다. 구로 지역 일로는 지난 6월 25일 박영진열사 20주기 추도 문화제를 치렀습니다. 그 외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위한 전국순회 노동문화예술전’ 기획단으로 일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술전은 민주노총 내 공공연맹, 금속연맹 등 대중조직들과 민족미술인협회와 노동만화네트워크 등 문화예술단위들이 공동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자잘한 연대 요청 등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다. 모두 작년이나 그전부터 진행해 오던 사업들이거나 올해 계획되어 있던 사업들이어서 그냥 손을 놓을 수가 없는 형편들입니다. 사실 상근 활동을 접으면서는 한두 달이라도 자연이 있는 시골에 처박혀 살아 온 날들과 활동들을 정리해 보고, 게을리 했던 공부도 좀 하며, 이후의 삶을 생각해보고 싶었는데 거의 포기한 상태입니다. 가끔 평택 대추리에 가서 봄, 여름이 오고 가는 것을 실감하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갈구는 채우고 있습니다.
맹문재 : 인사말을 들어보니까 굉장히 바쁘군요. 노동문학의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힘쓰고 있으니 고맙네요. 저는 근래에 읽은 시집 중에서 송 시인의 『꿀잠』을 단연 꼽고 싶습니다. 물론 근래에 나온 표성배의 『개나리 꽃눈』이나 KTX여승무원들의 문집인 『그대들을 희망으로 기억하리라』, 윤임수의 『상처의 집』, 이소리의 『바람과 깃발』, 유용주 시집 『은근 살짝』, 김정구 유고시집 『내 붉은 노래』, 박운식의 『아버지의 노래』, 조기조의 『기름 미인』, 제14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작품집인 『비명-마이크로칩공장』, 『삶글』에 있는 시, 그리고 백무산의 시편들 모두 그 나름대로 소중하고 의미가 있지만, 송 시인의 시집은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꿀잠』은 근래의 시집에서 보기 드물게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와 같은 요소로는 노동 현장과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담았는데다가 환기력 있는 표현들, 상황에 대한 예리한 포착,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휴머니즘의 자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요. 그리하여 저는 <한국 현대 노동문학의 성과와 의의>라는 주제를 삼고 있는 이번 노동문학제의 발표문을 송 시인의 시집을 두고 대담 형식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심포지엄의 형식으로써는 다소 낯선 것이지만, 저는 이러한 형식이 좀더 구체적으로 노동시의 현황과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먼저 시집을 출간한 소감부터 묻고 싶네요. 시집을 출간하고 나니 어떤 기분(생각)이 드는지요?
송경동 : 첫 느낌으로는 무척이나 곤혹스럽고, 세칭 바닥 말로 하자면 쪽팔렸습니다. 시집 원고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구질구질한’ 삶의 내력 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게으른 시작 활동 속에서도 나도 좋은 시,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밑도 끝도 없이 자만에 찼던 뻔뻔한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가능하다면 시집 발간을 더 미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아이가 커서 이 시집을 읽으며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첫 시집을 묶는다는 기분이 새롭기도 하련만, 별 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그런 심드렁함을 주는가 봅니다. 수없이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 그리고 그들의 구체적인 삶들을 십수년 간 주변에서 지켜보며 사실 문학에 대한, 문학가에 대한 환상 같은 건 이미 깨져 있습니다. 그 깨진 환상이 저에게 대입되어 시집, 그게 뭔데! 라는 물음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젊은 날의 대부분을 나름대로는 사회변혁의 길 주변으로 몰아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세계는 아직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민주화가 진척되었다고 하지만 850만 비정규직 인생들이 말해 주듯 이윤의 논리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배척당하고 마는 이 사회는 여전히 부조리합니다. 부조리한 것까지도 어찌어찌 참아보겠는데, 이 사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꿈꾸는 기능마저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역사적 패배감이 한층 더 기세를 부리면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희망마저 걷어가 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시집을 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시를 쓰며 꿈꾸었던 제 시의 잠재적 독자들은 저와 비슷한 삶과 노동을 겪었고, 지금도 겪어가는 밑바닥 인생들입니다. 그나마 제가 잃지 않고자 하는 삶의 진정성인데, 하지만 그들은 지금과 같은 사회 구조와 체제 하에서는 절대로 저의 시집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시장의 손처럼 보이진 않지만 철저히 이데올로기적인 언론의 검열에 막히고, 상업화된 출판메커니즘에 막히고, 보수화된 문학 독자들의 입맛에 막혀서 말이죠. 오히려 제가 혹 문학인이라는, 시인이라는 허명에 물들어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위기감, 씁쓸함 같은 느낌을 받곤 합습니다.
사람들은 제 시집이 좀더 그럴듯한 출판사에서 나오거나, 아니면 나와서라도 여기저기 언론매체들에 홍보가 이루어지길 바랐고, 저도 내심 기대해보았지만, 중앙 언론의 어느 한 귀퉁이의 소식란에도 나오지 않는 무명시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담담하고 편합니다. 제가 저항하는 것이 이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이 세계에서 저의 자리는 더욱더 고요하고 드러나지 않는 곳일 수 있고, 저는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죽음을 경험해야 했던 수많은 선배 전사들의 삶을 떠올려보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보았던 순정의 날들을 떠올리며, 속화된 의식에 제가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첫 시집을 내고 나서 많은 생각들을 했네요. 사실 뒤돌아보면 별것 아닌데 시집을 내고 나면 흥분된 감정을 억제하기가 어렵지요.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공들여온 자기 작품이니까 애정 또한 깊은 것이지요. 중앙 언론에서 소개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무명 시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도 있듯이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시인과 함께하고 있다면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송 시인의 첫 시집의 제목이 『꿀잠』입니다. 시집 속에 들어 있는 한 작품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지요. 일용노동자들이 점심시간에 잠깐 눈을 붙이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어서 고단하지만 평온한 노동자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작품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의도가 있는지요? 독자들을 위해서 작품의 전문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전남 여천군 쌍봉면 주삼리 끝자락
남해화학 보수공사현장 가면 지금도
식판 가득 고봉으로 머슴밥 먹고
유류탱크 밑 그늘에 누워 선잠 든 사람 있으리
이삼십 분 눈 붙임이지만 그 맛
간밤 갈대밭 우그러뜨리던 그 짓보다 찰져
신문쪼가리 석면쪼가리
깔기도 전에 몰려들던 몽환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꿈자락 붙들고 늘어지다가도
소 혀처럼 따가운 햇볕이 날름 이마를 훑으면
비실비실 눈감은 채로
남은 그늘 찾아 옮기던 순한 행렬
송경동 : 특별한 의도는 없습니다. 시집 전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의미망을 함축할 수 있는 제목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노동문학이 한국사회에 싹트던 1980년대 중후반이거나 1990년대 초반쯤이라면 현장성이 물씬 풍기는 ‘쇠밥’이라든가, ‘용접꽃’ 등을 시집 제목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텐데, 주변에서 만류하고 제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새로움을 표현할 수 있는 기발한 시 제목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꿀잠이라는 동화책 제목 같은 것으로 기존의 시집들에 부여되어 있는 쓸데없는 권위에 저항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또 꿀잠이 전체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의 성격을 고루 포함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노동자인데 그중에서도 비정규직 하층노동자이고, 각성되지 못하였으되 자기의 삶에 간절한 갈구를 잃지 않고 있어 흙 묻은 감자나 고구마 같은 평범한 노동자, 소외된 노동의 시간보다는 해방된 노동의 시간을 지향하고 있는 노동자, 관념의 나무보다는 생활의 구체성을 좀더 사랑하고 있는 노동자, 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의 표현보다는 작은 일상에 반추와 즐김을 행할 줄 아는 노동자 등의 성격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시작 활동과 각종 사회활동에 나선 개인적인 생애사의 첫 국면으로도 적당하다 싶었습니다.
한편 노동시 하면 흔히 격렬한 이념적 갈등과 대립 지점에서 선명하고도 전투적인 당파성을 드러내는 시, 아니면 관념적 선동 문구들이 으레 등장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 역시 극복해야 할 점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활의 구체성과 정서를 풍부하고도 풍요롭게 드러내는 시 제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맹문재 : 잘 알았습니다. 시집에 나와 있는 송 시인의 약력을 보니까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약력을 따르면 시를 쓴 지는 얼마 안 되어 보이네요. 그런데도 불과하고 시의 성과가 놀랍습니다. 언제부터 어떤 동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습작기에 영향 받은 시인이나 상황이 있는지 등이 궁금하네요.
송경동 :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약력입니다. 작은 것이긴 하지만 현실과 타협한 부끄러운 면일 뿐입니다. 저는 그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단지 사회적으로 높게(?) 인정이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약력 부분에 ‘공개’라는 말을 넣었다가 구차하게 보여서 뺐습니다. 시를 인쇄된 형태로 처음 발표한 것은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펴낸 『삶글』입니다. 1992년경부터이지요. 하지만 좀더 공개적으로 독자들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서였지요.
그 차이가 저와 같은 이들에겐 무척이나 큰 의미일 수 있습니다. 실제 노동자문학운동의 중요한 핵심 문제 중에는 등단 제도가 있습니다. 시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누구나 현실의 권위나 명예와 상관없이 자신의 고양된 정서를 시적 운율을 통해 노래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추천을 받거나 인정을 받아야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범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적인 마음과 울림을 잃지 않고 표현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노동자문학과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바람입니다. 특화되어 사회적 권력이나 명예가 되는 시인, 소설가, 전문화되어 대다수의 사람들을 대상화시키는 문학에 반기를 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등단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는 약력을 붙이고 나니 낯부끄럽습니다. 김남주 선생님의 말씀처럼 ‘좆되부렀습니다.’
저는 근대 이후 형성된 부르주아 운동과 소부르주아 운동을 넘어 노동자계급 운동을 세워나가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내일을 여는 작가』나 『실천문학』 편집위원들의 역사적 안목과 좋은 문학을 추려내는 감식안 그리고 나름대로의 실천적 사회활동들을 존중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그들의 모든 판단이 제가 생각하는 역사적 사회적 계급적 권위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중적 권위를 빌려 저를 세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세워가지 못하고 그들에게 기댄 저의 행동이 그저 미안할 따름입니다.
제가 처음 시를 쓰게 된 것은 학교 선생님들의 강요에 의해서였습니다. 숙제로요. 그러다가 외부의 강요와 무관하게 순전히 제가 좋아 쓰게 된 것은 한 여선생님의 칭찬 때문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작문 숙제로 아무 생각 없이 써낸 시를 보고 선생님께서 과분하게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집안에서도 어디에서도 잘 들어보지 못했던 칭찬이어서 나도 잘하는 게 한 가지는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를 썼고, 또 쓰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존중(인정)받고 싶다는 삶의 결핍이 자연스레 시 쓰기로 저를 이끌었나 봅니다.
한참동안 잊고 살기도 했던 시 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것도 그 바람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년원과 뒷골목과 하층노동자 생활을 겪으면서 저는 잃어버린 존중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이, 나아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삶의 존중을 빼앗기고 있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돈과 빽과 연줄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한 것입니다. 결국 제게 시를 준 것은 소외와 결핍이 만연한 이 사회입니다. 천대받고 멸시받는 밑바닥 노동과 그 생활이었습니다.
습작기 시절, 구체적인 만남 속에서 영향을 크게 주었던 시인들로는 정희성, 이시영 시인과 작고하신 김남주 시인이 계십니다. 1991년 그분들이 함께 모여 있던 ‘한길문학예술학교’에 다니면서 여러 선후배들과 교류를 나누었고 좋은 문학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기능적이고 형식적인 것들 외에 제게 시를 가르쳐 준 것은 구체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노동하는 현장이었고, 그 상처 많은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맹문재 : 그럼 시집에 대해서 좀더 본격적으로 얘기해보도록 하지요. 「아침」과 「오토인생」을 보니까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저는 송 시인의 부친으로 읽었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소개를 좀 해주시지요. 밝히고 싶지 않은 내용은 안 하셔도 됩니다.
송경동 : 3남 1녀 중 차남입니다. 아버지는 읍내 장사꾼이셨습니다. 지금까지 직종을 한 스무 가지 이상 가졌던 것 같습니다. 말년에는 아파트 경비원을 하다, 지금은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법원 경매브로커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지금도 잘 모릅니다. 저의 아버지라는 것밖에. 그리고 늘 돈을 쫓아 이 일 저 일을 해왔던 사람이라는 것밖에. 사실 우리 세대의 부모님들이 그러하듯이 현실적인 삶 속에 가려진 인간적 진실과 면모를 자식들이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지요. 한때는 아버지를 증오하기도 했고 경멸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억척어멈이셨습니다. 평생 노동으로 지금은 양 무릎이 다 나갔지만 차일피일 수술을 못해 몇 년째 두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십니다. 혈압도 높아 몇 번이나 응급실로 실려 갔다 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여자가 무슨 공부냐고 책가방을 불태워 버렸다는 외할아버지 이야기이셨습니다. 꿈 많은 문학소녀였다는 이야기를 더 하고 싶으셨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마음 편하게 쉬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 듯합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도박이 집안을 어렵게 했습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집안에서 욕설이 터져 나오고, 그릇이 깨지고, 어머니 눈자위가 퉁퉁 붓곤 했습니다. 아침에 담벼락에 기대 볕을 쬐고 앉아 있으면 제가 왠지 더러운 벌레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시절도 행복하게 여길 나이가 되었습니다.
형은 현재 엘지정유(GS칼텍스로 개칭) 노동조합 해고자 신분입니다. 착한 성품인데 고등학교 졸업 후 일용공노동자로 전국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요즈음 가끔 파업을 하는 전남동부건설노조, 포스코 본사를 며칠 전에 점거했던 포항건설노조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형은 우연히 기회가 생겨 엘지정유에 경력사원으로 특채되어 들어갔습니다. 정규직에 임금도 꽤나 받아 좋아했는데, 살아온 내력을 속일 수 없는지 민주노조가 뜨자 적극적으로 가담해 2004년 파업지도부들과 함께 하다 해고되었습니다. 저의 남동생도 이 회사에 함께 다니고 있고, 노동조합 활동도 함께 했는데 정직 3개월로 다행히(?) 살아남았습니다. 삼형제가 일용공 노동자로 여천석유화학단지로 새벽 5시면 도시락 하나씩 들고 일 다녔던 적도 있습니다. 형제가 다 흔히 말하는 ‘노가다 인생’이라는 것이 부끄러워 저는 사촌형제 간이라고 하며 다니기도 했지요. 그래도 자신의 삶들을 배신하지 않고 ‘진짜 노동자’로 살아가려는 형제들이 무척이나 고맙고 소중합니다. 막내 여동생은 학생이던 시기, 남총련활동을 하다 만나 농민운동 하는 친구랑 결혼해 전남 장흥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끔 네 형제 집안이 서울 집회 현장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며칠 전 FTA집회 때도, 평택미군기지 투쟁현장에서도 형과 막내여동생 남편 친구를 만났습니다. 잠깐씩 인사만 하고 갈 길들 바빠 그냥 헤어지곤 합니다.
맹문재 : 이번 시집에서 보니까 현장에서 쓰는 용어들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출간 20주년을 기념해서 2004년에 새롭게 선보인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의 끝부분을 보니까 <낱말들 : 시대의 기억>이란 부록을 마련하여 현장의 용어들을 풀이해주고 있더군요. 낱말의 수가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의도는 참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송 시인의 시편들에서도 그러한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좀더 자세하게 물어보도록 하고, 오늘은 다음 몇 가지를 설명 좀 해주시지요.
질통, 곰빵(「공구들」) / 샤클, 마찌꼬바, 공상처리(「일상」) / 베셀(「용접꽃」) / 알곤선, 사게보리실(「철야」) / 조적, 방통, 덴죠, 닥트(「마지막 술집」) / 조하이(「나는 지금도 그 뜰에 가고 싶다」) / 아나방길(「길」)
송경동 : 현장에서 쓰이는 말들은 대부분 일본어가 많습니다. 근대 건축문화가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발달되었기 때문이지요. 시집을 엮으며 몇 번이나 우리말 표기를 고심했지만 적당한 말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또 현장감을 살리려는 취지에서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질통 : 골조가 선 건물바닥이나 벽면을 매끄럽게 마감하는 하급일. 나무로 만든 네 모통에 시멘트와 모래, 자갈, 물 등의 배합물을 담아 올리는 일인데 곰빵보다 훨씬 힘겹다. 그래도 잘하는 사람들은 세면물(시멘트를 고인 물) 하나 옷에 묻히지 않는다.
․곰빵 : 조적공(벽돌일)을 돕는 하급일로 지게 형식으로 짠 나무등판을 이용해 벽돌을 나르는 일. 한 짐에 벽돌 50개 이상을 쌓아 오르면 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3층 이상이면 한번에 못 오르고 받아치기를 한다. 임금은 보통 일당으로 나오지만 벽돌 한 차에 얼마 하는 형식으로 받기도 한다.
․샤클 : 쇠줄로 무엇인가를 묶으려 할 때 홀매치는 부분을 U자형의 쇠고리로 묶어야 한다. 이때 묶인 고리를 손쉽게 풀 수 있도록 U자형 쇠고리의 위로 터진 부분을 나사로 고정하게 되는데 이것을 샤클이다. 한쪽 부분이 돌리고 풀 수 있는 나사형으로 되어 있다.
․마찌꼬바 : 가내공장들을 포함한 작은 공장, 작업장들을 일컫는 말. 의류 계통에 많고, 철공장들에도 많다. 문래동 철마찌꼬바, 구로동과 독산동 청계천 근처의 의류마찌꼬바들이 유명하다.
․공상처리 : 작업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산재신고를 하고 산재보험을 통해 치료와 보상을 받는 게 정상적인 처리 방법이다. 하지만 이 경우 회사 측은 산재율이 높아져 다음 공사를 수주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신고를 하지 않고 적당한 치료와 보상을 직접 해주는 경우가 많다. 작업자들 역시 법에 대한 무지, 눈앞에 보이는 현금, 하루라도 더 일해야 하는 처지, 회사의 눈치 등을 고려해 곧잘 제의를 받아들인다. 대부분 주먹구구식이고 졸속이기 십상이지만, 비정규직 현장에서는 이렇게 며칠 치 임금으로 보상을 받고 낫기도 전에 나와 일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베셀 : 석유화학공장에 서 있는 원통형 쇠기둥들로 원유를 비등점에 따라 정제해내는 역할을 한다. 높이가 100여 미터에 이르는 것들도 있다. 태풍 등에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약간의 유동성을 주는데, 꼭대기에 올라가 있으면 그 흔들거림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멀미가 난다. 원통기둥을 뺑뺑 돌아 설치된 안전계단을 따라 올라가는데 힘에 부쳐 중간 지점에서 한번씩 쉬어야 한다. 급하게 닥친 대소변은 적당히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알곤선 : 아르곤의 준말. 알곤은 가스 원소의 한 가지로 무색, 무취, 무미한 기체다. 현장에서는 주로 알곤용접을 할 때 사용한다. 일명 티그용접이라고 한다. 알곤용접은 용접을 하려는 금속(모재)이나 용접봉이 공기 중의 산소와 고온에서 결합해서 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용접 부위를 불에 잘 타지 않는 알곤가스로 보호막을 쳐주며 하는 용접이다. 주로 정밀용접, 금형, 스텐, 얇은 철판부위 용접에 사용된다. 알곤통은 산소통보다 더 무거워 짊어지고 다니자면 어깨가 끊어진다.
․사게보리실 : 수직선을 보는 작업도구로 실 끝에 둥근삼각형의 쇠추가 달려 있다. 주로 토목이나 목공일에 쓴다.
․조적 : 주로 벽돌일을 말한다. 담을 쌓는 일이다.
․방통 : 건축일에서 주로 장판 깔기 전 매끄러운 바닥 마감일을 말한다. 대형 건물(아파트 등)의 경우에는 레미콘 차들로 배합물을 실고 와 압력이 높은 압축기 쇠관을 통해 마감재를 쏘아 올린다. 쇠관 안에서 배합물이 굳으면 안 되기에 점심도 빵으로 때우며 쇠관의 끝에 붙은 호스를 끌며 해종일 뜀박질을 해야 한다.
․덴죠 : 천장을 나무 합판 등으로 마감하는 일을 말하는데 내장목수들이 하는 일을 거든다. 덴죠들이 나가고 나면 도배나 칠쟁이들이 들어와 비로소 방이나 사무실의 외벽이 꾸며진다.
․닥트 : 주로 냉난방 및 집진 등 환기시설물, 그리고 그 일과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스텐이나 양철 등을 재료로 한다. 건축물일 경우 주로 천장 속에 시공한다. 가끔 첩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침입이나 탈출하기 위해 기어 들어가는 통이 모두 이 닥트 시설이다. 가끔 보수 공사를 하는데 좁은 천장 속에서 종일 엎드리고 하는 일은 정말로 힘들다. 더욱이 천장에는 단열 보온 등을 이유로 대표적인 발암물질인 석면을 깔아두는데, 유리조각처럼 서걱거리는 석면가루들과 먼지 속에서 하루를 버티는 일은 장난이 아니다.
․조하이 : 낱장으로 인쇄된 인쇄물을 제본하기 위해 순서대로 간추리는 일을 말한다.
․바라시: 건물을 지어 올릴 때 콘크리트 골조를 부었던 나무 형틀을 해체하는 작업을 말한다. 천장 바라시가 가장 힘들고 위험하다.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지는 나무판넬에 찍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름이면 콘크리트가 굳으며 내는 열 때문에 건물 내부가 찜통이어서 팬티에 못주머니만 차고 들어가 30분씩 번갈아 일을 하고 나오기도 한다.
․공구리: 목수들이 만들어 놓은 나무 형틀에 콘크리트 배합물을 넣거나 깔아 건물 골조를 만드는 일이다. 나무 형틀이 무게를 못 이겨 터지는 경우나 아예 형틀 자체가 무너지는 대형사고도 있다. 공구리가 굳으면 바라시가 들어와 형틀을 제거한다. 바라시가 끝나면 하스리들이 들어와 형틀이 밀리며 배 부른 곳, 터져 나온 곳 등을 정으로 쪼아 반듯하게 만든다.
․아나방: 재래식 공사장에서 임시 계단이나 발판 등을 만들 때 쓰는 긴 철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맹문재 : 어휘들을 친절하게 또 구체적으로 해주어 독자들이 송 시인의 작품을 읽을 때 큰 도움이 되겠네요. 이번 시집의 특징 중 한 가지는 다양한 작업 현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송 시인이 그만큼 다양한 일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주로 “일용공비정규직”(「암호명」)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어떤 노동을 했는지 듣고 싶네요. 「암호명」 역시 독자들을 위해서 전문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공친 날 함바
손톱 밑 때 빼고
깔끔한 옷 갈아입고
현장 입구 횡단보도 앞에 선다
하루쯤은 현장 아닌 곳에도 가보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
수첩 속 전화번호들이 각기 암호를 대라 한다
횡단보도 저 편의 길이 ‘암호’ 한다
내 암호명은 일용공비정규직
노동 이외엔 어울릴 친구가 없다고
빨간 신호등이 자꾸 깜박거린다
거리가
닫힌다
송경동 : 시에 나오는 대부분의 작업들은 조금씩이나마 다 해보았습니다. 주로 대형건물이나 아파트를 짓는 형틀 목수 일을 했고, 흔히 프랜트배관이라고도 하는 공업배관, 그리고 용접공 생활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일들이 건축과 관련된 현장일이라 꼭 그 업무가 아니더라도 다른 공정의 일들도 조금씩은 했습니다. 공업배관이나 용접일은 주로 큰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광양제철소 건설현장, 여천석유화학단지, 서산종합화학단지 건설 현장 등에서 일했고, 문학에 뜻을 두고 서울로 와서는 주로 지하철공사장 용접일과 인력소개소를 통한 날일을 다니며 각종 비정규직 일들을 했습니다. 공사장 함바에서 주로 자고 먹고 다녔고, 인력소개소 뒷방에서 아예 자고 먹고 다닌 적도 있습니다. 소년원에서 출감해 뒷골목 건달짓을 조금하다가 노동자 생활로 들어간 스무살 초입부터 근 10여간 ‘압축적으로’ 떠돌며 일했는데, 돌이켜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한겨울에 추워서 내복 세 벌을 껴입고도 몸에 한기가 들던 노동, 코팅 장갑 두 켤레씩을 겹쳐 끼어도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닳아진 구멍 사이로 맨 손가락들이 나오고 말던 노동, 비를 흠뻑 맞으며 용접을 하다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찌르륵 찌르륵 감전이 되고 말던 노동, 단 한번이라도 헛디디면 그날로 사망인 고층 빔 위에서 어떤 다람쥐나 원숭이들보다도 더 기똥찬 곡예를 부리던 노동, 천지에서 몰려든 인생 종착역들이 저녁마다 깔창 날리고 포크 들고 쑤셔대는 함바집에서도 잠만 잘 자던 노동, 한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완전무장하고(용접 불똥에 데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수천 도의 용접 불빛을 쬐며 쪼그리고 앉아 있던 노동, 맨 손으로 8겹짜리 시멘트 포장 700포를 찢어 까면 땀과 세면가루 버물어진 머리가 석고상처럼 뻣뻣하게 굳던 노동…… 고되긴 하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는 광부와 어부와 농부가 되어보지 못한 게 안타깝긴 하지만요.
맹문재 : 참으로 힘든 일들을 많이 해왔군요. 그래도 몸 다치지 않고 이렇게 저와 인연이 되었으니 고맙네요. 다양한 작업 현장이 나오는 것과 송 시인과 함께 일했던 “김씨” “최씨” “홍씨” “채씨” 등등 많은 동료들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역시 다음 기회에 좀더 소개 받도록 하고 「목발」에 나오는 “김씨”를 우선 소개해주시지요. 「뒷빽」에 나오는 “김씨”와 동일 인물인가요?
송경동 : 동일 인물은 아닙니다. 사실 소외된 노동의 현장에서는 김씨, 이씨, 박씨, 최씨 등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분류를 위해 그렇게 불릴 뿐입니다. 관리자들의 반말은 예사입니다. 그래도 작업자들은 늘 순진하고 착한 모습으로 관리자들을 대합니다.
김씨는 실제 만났던 인물인데, 경이로웠습니다. 오른발이 선천성 불구여서 목발을 짚고 일을 했습니다. 지하철 공사장은 일반 현장과는 다르게 무척 위험한 작업조건인데도 그는 누구보다도 잽싸게 일을 했습니다. 작업반장쯤 되는 사람의 먼 사촌뻘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랬으니 그나마 그 일거리라를 얻어 있을 수 있었겠지요. 그때 나이가 마흔 초반이었으니 지금은 쉰 중반 쯤 되었겠네요. 물론 노총각이었고요.
함바에서는 합판으로 대강 막아놓은 옆방을 쓰기도 했습니다. 저녁마다 그가 부르던 노래는 윤수일의 「아파트」였습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는 ‘다리’라는 가사가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장애자인 그는 ‘다리’라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를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부를 수 있을까 하고 의아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을 무척이나 잘했습니다. 나중엔 그의 목발이 어느 누구의 손이나 발보다 더 예민하고 잘 발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노동의 슬픔이기도 하면서, 경이로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사람의 위대함이죠. 저는 그 위대함이 자신의 위악을 걷어내는 방향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 사회적 모순을 걷어내는 창조적 힘으로 쓰이는 것을 꿈꾸어 보았습니다.
맹문재 : 「막차는 없다」「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거리 뼈해장국」등의 작품을 보면 “가리봉”이란 지명(공간)이 나옵니다. 그만큼 송 시인에게 “가리봉”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것인지요? 「오거리 뼈해장국」이 특히 와 닿는데 전문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네가 상처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가리봉으로 와. 아무도 없는 술집에서 뼈해장국 시키면
거기 네 설움이 울대째 넘어온 듯
퉁명스러운 감자 몇 알이 묻어나올 거야
때 타고 흙먼지 묻었지만
씻겨 놓고 보면 말갛던 네 옛 친구들이
퍽퍽하니 목에 메일지도 몰라
어우러져 한솥 펄펄 끓였어도
제각기 자란 토양 달라 한 맛내기 쉽잖던 시절
왜 우린 서로 뼈처럼 단단해지기만을 바랐을까
바람 불어 오거리 쓸쓸한 날
아무도 없는 해장국집 들러
다글다글 끓는 지난날 떠올리자면
거기 내 그리움도 얼큰히 풀려
고춧가루 서너 숟갈 더 퍼부어도 시원찮은데
지금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맵고 짠 기억들 올올이 가슴에 안고
열 갈래 스무 갈래
떠나간 친구들
송경동 : 이젠 제2의 고향이 된 듯합니다. 맹모삼천지교라고 좋은 환경만을 찾아 다녀도 부족할 판에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공돌이 동네, 도시빈민가를 제2의 고향으로 택했습니다. 처음 구로동(가리봉)으로 오면서 한국 문단의 대문호가 아니라 구로동 시인쯤으로 제가 이웃 사람들에게 불리고 사랑받고 기억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그 꿈이 달성되어 이웃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를 구로동 시인이라고 불러 줍니다. 무척이나 기쁜 일이지요.
처음 제가 구로동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들은 시큰둥했고, 사회주의권도 붕괴하는 마당에 무슨 ‘노동’을 화두로 삼고 가느냐고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문학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곳이기에 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구로동은 이전의 노동현장에서 얻을 수 없었던 다른 국면들을 학습하고 경험하고 실천하게 해준 산실이었습니다.
맹문재 : 여담 한 가지 묻지요. 「동네이발소」나「순례기」에는 “이발소”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이발소 대신 미장원에 가지만 저도 동네 이발소에 갑니다. 이발사의 투박한 인상과 손이 마치 고향의 아버지나 동네 아저씨같이 푸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송 시인이 단골로 가는 이발소는 어디에 있나요? 저도 언제 한번 들리고 싶네요.
송경동 : 제가 살고 있는 구로3동 성당 아래에 있었습니다. ‘수정이발관’이었는데 ‘ㅈ'가 떨어져나간 상태였지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모두 헐려 재개발에 들어가 있습니다. 두산아파트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는데, 전혀 다른 동네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단골로 가던 집은 아니지만 길가에는 아직 그런 이발소가 몇 군데 남아 있습니다. 와서 노곤노곤한 묵은 수건 내음을 맡으며 이 속도전의 사회를 잠시나마 잊어 보세요.
맹문재 : 「마음의 창살」 「묵비권」「나우정밀노조 해산총회」「잃어버린 안경」「너희들은 나를 폭격했다」「왜?」 같은 작품은 노동운동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송 시인의 시집이 우리 시대에 의미 있는 면 중의 한 가지는 전반적으로 노동시의 투쟁의식이 약화되고 있는데 반해 송 시인은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동안 노동시의 투쟁의식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는 쪽과 미학적 상상력을 약화시킨다는 쪽으로 견해가 달랐지요. 물론 두 가지 다 갖추면 되겠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지요. 어쩌면 영원한 과제라고도 할 수 있고요. 그래서 좀 어려운 질문이 될 수도 있겠는데, 노동시의 투쟁의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이 점은 오늘의 노동시가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요. 「마음의 창살」이라는 짧은 시 한 편을 일단 인용해보겠습니다.
잡범 징역 두 번 살며 배운 거라곤
내 밥그릇 두 개면
누구 하난 밥그릇이 없다는 것
내가 떡잠이면
누구 하난 새우잠이라는 것
낙하산 타고 들어온 놈 있어
세월 간다고 왈왈이 되지 않는다는 것
싸우려면 끝까지 싸워야지
도중에 그만두면 영원히 찌그러진다는 것
송경동 : 참 어렵지만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것은 오히려 시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 시대와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요? 제 견해로는 노동문학은 당연히 그 속에 ‘투쟁’의 문제를 내포하거나 더 적극적으로 외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에 ‘노동’을 붙이고자 한다면 어떻게 ‘투쟁’의 내용이나 지향이 빠질 수 있을까요? 일터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거기 일하는 사람이 화자로 나온다고 해서 ‘노동’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자본의 우위가 절대적인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성과 투쟁성을 견지하고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지요.
한편 ‘미학적 상상력’ 역시 사회의 산물입니다. 거기에는 다종다양한 계급적, 계층적 입장들이 정확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문학가들의 눈입니다. 노동문학의 미학성이 소부르주아의 미학을 따라 가거나 비교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문학은 다른 미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투쟁성의 미학, 연대성의 미학, 총체성의 미학이 거기 스며 있습니다. 오히려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투쟁성의 미학이 얼마만큼 교조적이거나 형해화되어 있지 않고, 현실 속에서 적실하고 사회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것인가 하는 면입니다. 미학은 따로 떨어져 있는 천상의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정교하게 세공되었는가에 따라 평가받는 것도 아닙니다. 삶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서와 구체적 삶의 질감이 얼마나 깊게 나와 있는지,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 어떻게 우리를 감동으로 이끌어내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당연히 자본에 복속된 기계 부속품과 같은 삶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합니다. 그 꿈이 사회적 역사적 상상력입니다. 한때는 자본가의 인성에 호소해 보기도 하고, 타협점을 제시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 그런 상상력으로는 자본의 양보와 포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다른 상상력을 발동합니다. 정해진 부르주아의 법을 넘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에 나서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투쟁의 상상력, 해방의 상상력입니다. 그것을 거세하면 어떤 노동문학도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문학의 화룡점정과 같은 부분을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투쟁성이 미학적 상상력을 거세할 수도 있다’는 무지한 질문에 진땀빼거나 몽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투쟁의 미학이 얼마나 당당한 것인지, 얼마나 깊고 웅혼한 것인지를 평가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설익은 사회과학적 관념의 피력과 얼마나 틀린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누구에게 강요할 성격의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변혁적 전위, 변혁적 프롤레타리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할 때 자연스레 삶으로, 문학으로 따라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은 소부르주아의 관점에서도 동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투쟁의 미학을 세워내야 합니다.
일상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부단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무수히 진행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과 동의, 동감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고립되지 않는 투쟁의 미학입니다. 문제는 노동문학 안에서 그런 실천이 부재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제 시가 특별하게 비쳐지는 그 자체는 저의 세계관으로 보면 기쁨이 아니라 아픔이고 고통이며 슬픔인 것입니다.
맹문재: 아주 확고한 신념을 가진 답변을 잘 들었습니다. 노동문학의 투쟁 미학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지만 그 방법에 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는데, 송 시인의 경우는 전체적이면서도 개별적인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문득 생각해보는 것인데, 투쟁하지 않고 승리할 수는 없을까요? 노동자들도 개발이며 생산의 영역을 개척해나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요?
다음 문제로 넘어가보지요. 송 시인은 시를 쓰는 일뿐만 아니라 노동운동가 혹은 문화활동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노동운동에 나서게 되었는지요? 지금까지 노동운동에 참여한 경우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일은 무엇이었는지요? 시집에서는 못했지만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세요.
송경동: 스무살 초반까지는 방황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토박이』나 『말콤 엑스』에 나오는 한 흑인 청소년을 보는 듯해요. 위악과 반항의 세월이었죠. 결국 소년원과 도시 뒷골목 생활을 거쳐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자임한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사회 구조상 노동자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죠. 어려서부터 보아온 5일 장터의 부모님들과 이웃 사람들의 악다구니 삶, 소년원과 도시 뒷골목에서 만난 수많은 개차반 인생들, 그리고 차별받고 천대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전락한 그들……. 저는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지,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삶은 늘 소외되고 고통스럽지 하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따로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를 읽지 않았지만 사회가 ‘모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모순’에 ‘모순’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자연스레 반항의식을 갖게 되어 출구를 모색하였는데, 그것이 글쓰기였습니다. 계급사회에서 권력과 부를 가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 펜 한 자루만 가지면 나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검열 없이 쓸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현장 생활 당시 초보적인 연대와 저항을 해본 적은 있지만 모두 즉자적인 분노나 요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황석영의 『객지』에 나오는 노동자 정도였겠지요. 서울로 올라와 주로 지하철 공사장 함바나, 친구들 자취방, 인력소개소 뒷방 등에서 생활하며 주경야독으로 사회 공부와 문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생활공간을 어디로 정할지 고민하다가 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는 구로동에 터를 잡았습니다. <구로노동자문학회> 활동을 축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모든 게 저에겐 자연스러웠습니다. 1990년 초반만 해도 동구사회주의권 붕괴를 맞으며 이념의 혼란이 거세져 많은 이들이 노동운동 진영에서 철수하던 시기였지만, 저는 그곳으로 가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라도 그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노동자들 곁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지역 노동운동과 교류를 하며 아직도 부족한 모습이지만 노동운동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문학운동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어 창작운동과 더불어 가는 진보출판운동을 개척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다른 노동문화운동과의 교류 및 연대의 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작운동과 더불어 카프와 같은 문예조직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개별적 창작운동과 더불어 집단적 조직적 문예운동 전선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자본주의 문화이데올로기와 구조들에 맞서 싸워나가기 위해서는 자기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맹문재: 근래에 평택 미군기지 이전 확장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는데, 그 상황에 대해서도 좀 들려주시지요?
송경동 : 흔히 시장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늘 그것을 시장엔 보이지 않는 ‘주먹’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주먹은 다름 아닌 물리력, 즉 군사력입니다. 사유재산제를 옹호하는 군대입니다. 모두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부당 착취한 사적 이윤을 지키는 군대입니다. 부르주아 법체계를 지키는 것도 이 조직된 공권력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공권력의 현대판 집중이 바로 제국주의 군대입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확장에 반대하는 것은 이런 사회적 맥락에 저항하고 그들을 해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자에 따라서는 평가를 달리하기도 하지만 저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군은 명백한 제국주의 군대입니다. 그들의 큰 손 아래 한국 사회의 온갖 악행과 부조리가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북한 문제를 계속 쥐고 가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군사적 헤게모니를 유지 관철하기 위해서업니다. 그들은 북한을 핑계로 동북아 전략지역에서의 군사적 패권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 표현이 ‘주한 미군의 동북아 전략군으로의 지위변환’입니다. 평택은 그냥 부대 이전의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되는 패권의 유지를 넘어 영구적인 주둔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평택은 그 싸움의 상징적 핵입니다. 평택을 통해 우리는 20세기의 야만과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군국주의의 실체를 폭로하고 응징하고자 합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 체결을 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로드맵이 어떤 힘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합니다. 그 둘은 모두 ‘폭력’으로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싸워 그 막강한 흐름을 막아낼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개별 싸움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택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내막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입니다. 저들의 아킬레스건을 붙잡고, 저들의 선한 얼굴들이 어떻게 굳어지는 지를, 그 선한 가면들 뒤에 어떤 파괴된 인성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밝혀내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승리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획득에 있습니다.
평택은 올해 들어 구체적으로 대립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5월 초가 분수령이었습니다. 그간 행정적으로만 압박을 가해오던 군대가 5월 4일을 기점으로 해서 물리력을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항의 구심이었던 대추초교를 강제로 파괴했고, 이 과정에서 100여명의 부상자와 400여명의 연행자가 발생했습니다. 농토를 훼손했고, 철조망을 설치했습니다. 이어서 민간인의 출입을 전면 통제했습니다. 7~8월 사이엔 또 한번의 대규모 유혈충돌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정부와 군대는 2차 집행으로 빈집 철거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평택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의 집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주민들과 사회운동과의 분리가 2차 집행의 핵심내용이 될 것입니다. 9~10월엔 주민 강제철거와 공사 집행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현재 정세로 보면 한미FTA 협상이 연동되면서 눈에 띄는 충돌을 자제하고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9월 예정된 3차 FTA 본협상과 한미정상회담 전에 노무협 정권은 어떤 식으로든 두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목표로 할 것임이 분명하고, 이 두 가지 선물이 한미정상회담에 바쳐질 것입니다. 얻고자 하는 것은 물론 흔들리는 정권의 재창출에 대한 모종의 약속이겠지요.
현재 문화예술인들이 갖는 평택싸움에서의 지위는 다른 어떤 단위들보다 큰 편입입니다. 주민과 문화예술인들의 싸움이 가장 큰 축이 되고, 거기 인권이 중요하게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른 전투적 전선운동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에 밀려 전면화 되기 힘든 상황입니다. 문화예술인들은 <들사람들>이라는 문예네트워크를 만들어 그간 12주간의 문화예술 공동행동을 진행해 왔고, 이 성과를 바탕으로 현재 단체들의 결합인 문화예술(인)단체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습니다. ‘대추리평화문화마을 조성위원회’ 사업과 강제 진압 당시 파괴된 ‘문화예술품 파괴 진상규명위원회’ 활동 등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맹문재 : 답변을 듣고 있으니 열성적인 활동에 다시금 박수를 쳐드리고 싶네요. 송 시인과 저는 한때 전국 노동자문학회 기관지 『삶글』을 기획 및 편집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야 이름을 거는 정도였고 송 시인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어찌어찌하다보니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만호 시인이 지난 겨울까지 어렵게 이끌어왔는데 그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무엇보다도 전국 노동자문학회가 활성화되지 않아서이겠지요. 다들 살기 어려워서이겠지만, 저는 참 안타까운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정말 다시 힘을 합쳐서 활동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IMF 이후 신자본주의가 물밀 듯이 들어와 우리 사회를 지배해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있고 비정규직은 무수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급기야 FTA협상이 합법적이고 공식적으로 민중들의 삶을 뿌리째 뒤흔들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문학 활동이라는 것이 미약하지만 연대하는 힘을 발휘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송 시인께서는 저보다 전국 노동자문학회 활동을 오랫동안 해왔으니 그 사정을 잘 알 것인데, 왜 잘 안되는지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 활성화될 전망은 없는 것인지요? 있다면 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송경동 : 전국노동자문학연대는 그 나름의 조직 형태가 있었지만 그 형태에서 기인한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역에 기반을 둔 조직이라는 성격이어서 대중문예운동이 중요 고민이었습니다. 그 역할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지만 활동 영역을 넘어 좀더 전선적인 문예운동을 감당해내려 했을 때는 하중이 따랐습니다. 지역 대중문예운동 조직만으로는 전국 전선문예지를 감당해내기 힘들었던 거지요. 그래서 발간을 생각할 때부터 범노동문학운동 진영의 수평적이고 폭넓은 참여와 공동 책임 하에 가지 않으면 힘들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소통과 연대가 부재했던 범노동문학운동 진영을 설정해 내고 규합해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전노문의 기관지 형태로 출발했는데, 핵심 일꾼층과 재정 및 내용의 재생산에 실패하고 말았죠. 이미 전노문의 각 지역노문들의 힘이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삶글』은 그래서 충분한 조직적 힘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속에서 피어난 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지역노문들의 정체 현상을 기관지 사업을 축으로 해서 뚫고 나가보고자 했던 악전고투의 노력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맹문재 선생께는 아직도 미안할 따름입니다.
전노문의 활동이 급격하게 위축된 데는 역시 전체 사회의 보수화가 원인이겠지만 그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전복하고 다른 세계로 이행해 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과 전망과 신념이 부재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계획과 전망의 부재는 무수히 많은 선진일꾼들의 전선 이탈과 혼란을 초래했고, 이런 난맥상이 전노문에도 투영되었습니다. 패배감에 빠진 선진 일꾼들의 낙오로 체계적인 교육과 학습, 창작의 맥이 끊겼고, 남아 있는 일꾼들도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며 비주체적인 활동으로 일관하다 보니 조직의 주인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운동에 대한 위기감과 패배감은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구체적 결합을 꺼려하는 조직적 흐름을 낳았습니다. 자연스레 소시민적 정서가 회원들 안에도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변화된 상황에 맞는 새로운 지역문학운동의 전형 개발에 실패한 것도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 전노문은 구체적인 지역노동자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문학 강습을 하고, 지역 문예지를 만들고, 도서대여운동을 하고, 지역 내에서 문학의 밤을 개최하고, 신설 노조들과 연대해 노조 소식지 편찬을 돕거나 행사 때 시 낭송단이나 시화전을 배치하는 등 지역 내에서 소통되는 구체적인 문학 활동의 전형들을 개발했습니다. 조직은 이처럼 사업이 있어야 움직입니다. 하지만 대중적 민주노조들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일반 노동교육과 문화제, 노조 소식지 편찬 등을 감당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더 전문적인 활동이 가능해졌습니다. 도서대여나 문학 강연을 꼭 노동자문학회가 아니어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때 지역노동자문학회는 어떤 사업을 통해 구체적으로 지역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어야 됩니다. 그렇지 못해 해오던 사업들이 관성에 빠지고 변혁성이 퇴색되어 회원들의 흥미를 자아내지 못했고 성과도 미비했습니다.
한편 문학 특성상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창작 역량을 갖춘 된 회원들은 지역을 넘어서는 문학 활동으로 관심과 활동 축을 옮기고자 하는 자연스런 욕구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어떤 연계나 대비책을 전노문은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또한 대중문예교육을 수행할 만한 체계적인 교육 내용과 교육 담당자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동호인 모임과 같은 활동은 유지되었지만 노동자 대중문학 교육기관으로의 위상은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과의 만남만이 아니라 문학창작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찾아 왔던 회원들을 계속적으로 활동하게끔 만들 내부 체계와 공적 구조 마련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노문에서 몇 년씩 활동했던 회원들이 이런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대학이나 타 기관에서 운영하는 문학교육 프로그램에 재수강을 하러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전체 사회 보수화도 원인이겠지만 자기 단위의 가장 기본인 노동자성(연대성, 투쟁성, 변혁성)이 옅어지고, 노동자 문학 재교육기관으로서의 자기 위상 획득에 실패하면서, 전노문은 침체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해결책까지 이야기해보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만, 저는 아직도 전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인천 노동문학제 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지 않나요. 노동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계속적으로 노동운동과 역사적 상상력을 공유하는 노동문학에 대한 논의는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실천을 집단적 조직적으로 모색하고자 하는 논의가 이어질 것입니다. 저의 경우 지역노동자문학회 활동을 접고 나니 이제야 다시 그 활동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소중한 것인가가 보입니다. 마냥 큰 것, 마냥 거창한 것만을 쫓는 게 아니라 지역 속에서 구체적인 노동 형제들을 만나 구체적인 싸움과 연대하며 알차고 오진 이야기를 문학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 매우 즐겁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실 지역 속에서 할 일은 무궁무진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가장 지역적으로 실천하면서도 가장 세계적으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멕시코 밀림의 사파티스타가 가장 지역적인 변혁의 실천을 통해 전 세계민과 교감하듯이, 일례로 구로노동자문학회 회원들이 구로지역 노동운동사를 써낸다면, 그리고 구로 지역에 살고 있는 3만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써낸다면, 그것은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보다 더 신나고 귀중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현재 대중조직들과 여러 문화운동들은 변화된 현실에 맞는 새로운 지역 거점 마련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변혁적 단위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사회운동, 때로는 관 조직들마저 예외가 아닙니다.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 또 여타 문화단위들은 몇 년 전부터 고민 수준이긴 하지만 지역노동자문화센터 건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골방에서 하던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합법적인 공간에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는 것입니다. 유려 깊은(?) 인천노동자문학회가 있지만 이 노동문학제는 조직형태상 준관조직인 인천문화재단이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각축전에서 누가 실력을 통해 주도권을 잡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조직이 역사적 적자로 남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어떤 방식으로든 지역은 다시 정리가 될 것입니다. 물론 문학은 규모가 아니기에 이런 지역 속에서의 문학적 헤게모니를 어떻게 잡을까라는 고민에 앞서 구체적인 창작운동을 고민하는 창작단위로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여하튼 지역 노동자 성격을 가진 문학운동 조직을 만든다면,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실현할까라는 재미있는 꿈을 꾸어보시길 희망해 봅니다.
맹문재 : 범위를 조금 더 넓혀 논의해보지요. 송 시인은 현재의 노동시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지요? 만약 침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저는 물론이고 노동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인들 역시 고민하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조혜영 시인과의 대담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는데, 그때 조 시인은 문학에 대한 자기 치열성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송경동 : 저는 역으로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노동시가 어디 있나요? 노동시인이 어디 있나요? 소설가가 어디 있나요? 스스로 그것을 영예로, 긍지로, 자신의 존재 근거이자 이유로 삼고 있는 문학인들이 몇이나 있나요?
이렇게 침체되어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많은 창작자들의 사상적 이반입니다. 노동자 계급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과학과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희박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세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아 왕래를 하는 창작자들도 소수를 제외하고는 커밍아웃하기를 두려워합니다.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구체적인 노동현장으로 삶을 밀어 넣지 않습니다. 그 결과 창작의 내용에서 노동의 문제가 빠지거나 창작 자체가 부진합니다. 아직도 동반자 작가들이 소수 남아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문학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자본주의 사회 속에 남아 있는 노동자 문학의 초라한 실정입니다.
남아 있는 노동자 시인들의 작품 경향은 몇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후일담 문학을 하는 경향입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며 그 의미를 반추해보는 것입니다. 번민이나 비애, 질문, 아름다웠던 기억의 복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과학으로 읽히기보다는 도덕으로 먼저 읽히고, 집단이 읽히기보다는 개인이 먼저 읽힙니다.
두 번째로는 일상의 목적 없는 반영들입니다. 이런 노동자 일상의 문학기록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있습니다. 과거에 비한다면 그 양이 현격히 줄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나마 과거에는 설익었더라도 노동자성을 집어넣기 위한 노력들을 많이 했던 반면 지금은 정말 일상의 기록들입니다. 즉자적인 분노나 경멸, 이젠 폭로로 느껴지지 않는 도식적 사회분석 정도가 양념처럼 가미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작품들이나마 활발히 생산되고 논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맹문재: 송 시인은 좋은 시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좋은 시를 쓰고 싶어 할 텐데, 그 기준은 시인마다 다르겠지요. 송 시인은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지 듣고 싶네요.
송경동 : 이제 와서는 막 고(GO)입니다. 좋은 시는 노동시입니다. 세상에 하소연하고 동정이나 호소하는 시, 애매모호한 정신적 상태를 애매모호하게 표현해 두고 그것을 정신병리학적으로 해부나 하는 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눈으로 보고 또 보는 시입니다. 엄정한 리얼리스트의 태도로서 그려내는 시입니다. 흔히 말하는 노동자주의나 계급환원주의에 매몰된 눈이 아닙니다. 다음 세계로 활짝 열려진 당당한 눈입니다. 자연주의의 현미경보다도 더 자세하게 사물을 관찰하고, 그 사물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관계를 드러낼 수 있는 눈입니다. 소부르주아 퇴폐의 문학보다도 더 진하게 인간의 복잡한 문제를 드러낸 것입니다. 비애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든, 위트와 풍자의 방식을 빌려 표현하든, 낯설게 하기를 통해 표현하든, 개인적 역사관을 담아낼 것입니다.
늘 오해가 발생하므로 부연해두자면 그 ‘눈’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 첨예했던 문학 논의의 어디에서도 그렇게 얘기해 본 바가 없습니다. 형식이나 제재가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해방으로 열려 있는 열정적인 형식이나 제재면 무엇이든 됩니다. 세계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운동과 행동을 통해 늘 수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맹문재: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있으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시집 계획이나 노동운동이나 문화운동 등 어떤 것이든지 괜찮습니다.
송경동 : 올해는 우스갯소리로 지명방어전의 시기입니다. 십여 년 지속해왔던 단체 상근활동을 정리하고 휴식과 정리의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고, 그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일들 중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동적으로 사업들을 챙겨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것인지 아니면 불건강한 것인지 고민이 많지만, 최소한의 약속들은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내년 초 휴식기를 가지며 앞으로의 역할과 삶의 문제들을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그간 밀쳐두었던 학습을 내용 있게 해보고 창작에도 적극적으로 매진해보고 싶습니다. 문학운동과 다른 문화운동을 아우르는 진보적인 예술 네트워크가 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현재 상태로는 나설 수 없는 처지여서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마흔을 넘기다보니 생계 등 현실적인 고민도 간간히 하게 됩니다. 너무 빨리 속화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 시론집 『한국 민중시 문학사』 『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 『지식인 시의 대상애』 『현대시의 성숙과 지향』 등.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