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사료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9의 고령현 건치연혁조에 나오는데 그 원문사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建置沿革 本大伽倻國[詳見金海府山川下] 自始祖伊珍阿?王[一云內珍朱智] 至道設智王 凡十六世五百二十年[按崔致遠釋利貞傳云 伽倻山神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 金官國王惱窒靑裔二人 則惱窒朱日爲伊珍阿?王之別稱 靑裔爲首露王之別稱 然與駕洛國古記六卵之說 俱荒誕不可信 又釋順應傳 大伽倻國月光太子 乃正見之十世孫 父曰異腦王 求婚于新羅 迎夷粲比枝輩之女 而生太子 則異腦王 乃惱窒朱日之八世孫也 然亦不可考]
■ 번역문
본래는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다.【자세한 것은 김해부(金海府) 산천편(山川篇)을 보라.】 시조는 이진아시왕(伊珍阿?王)인데【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세 520년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석리정전(釋利貞傳)을 살펴보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으니, 뇌질주일은 곧 이진아시왕의 다른 이름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락국 옛 기록인 육란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하여 믿을 수 없다. 또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세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인데, 신라에게 청혼하여 이찬(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를 낳았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뇌왕은 곧 뇌질주일의 8세손이 되는 셈이다.】
■ 신화분석
정견모주 신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9의 고령현 건치연혁조에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 성종 때 편찬되었는데, 연산군 때에 개정이 되었고 중종 25년(1530)에 다시 내용을 보충하여 간행한 것입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우리 나라 지리서로서는 가장 종합적인 책입니다. 이 책 속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이나 『석순응전』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시대 초까지는 전해졌던 책입니다. 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 유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가야의 시조와 마지막 왕, 대가야의 존속 기간,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설화 등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신화에서 우리는 대가야의 시조는 이진아시왕이며, 그의 다른 이름이 뇌질주일 또는 내진주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조의 어머니는 가야산신인 정견모주이고, 아버지는 천신인 이비가지였습니다.
대가야의 건국신화를 일반적으로 정견모주신화라고 해왔습니다만, 사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진아시왕 신화 또는 뇌질주일 신화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보면 시조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을 아버지로 하고, 곰에서 변신한 웅녀를 어머니로 하여 탄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웅녀신화라고 하지 않고, 웅녀의 몸에서 난 시조 단군의 이름을 따서 단군신화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주몽신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몽은 천제(天帝)를 아버지로, 하백의 딸(河伯女)을 어머니로 하고 있지만, 우리는 고구려 건국신화를 하백녀 신화라고는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는 전해져 오는 대가야 시조신화를 인용하면서도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뇌왕이 신라에 청혼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과 혼인한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9년조 기사에도 나오고 있고, 그 결혼이 깨어지게 된 사연이 『일본서기』 계체기 23년 3월조에 나오고 있어, 전혀 사실 무근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산신을 정견모주라고 하고 있는데, 그 이름은 불교적(佛敎的)인 성격이 강합니다. 정견(正見)이란 말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 중의 한 덕목입니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언(正言)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정사유(正思惟)정념(正念)을 말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처음의 것이 정견으로 바른 견해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모주(母主)라는 말은 성모(聖母)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영남지방에는 산신을 성모라 칭한 신화가 많습니다. 지리산 성모, 선도산 성모 등이 그 예입니다. 특히 선도성모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탄생과 관련한 선도산의 성모로 유명합니다. 이와 같이 가야산신도 본래는 성모로 불렸다가 훗날 불교의 영향을 받아 정견모주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대가야에 불교가 들어오게 된 시기는 5세기 이후이기 때문에, 이 신화는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산신은 대개 여신이므로 이 신화 속에는 재래의 산신숭배 사상이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산신숭배의 풍속으로 인해 높은 산에는 산신에 제사하는 고당(姑堂), 또는 노고단(老姑壇)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정견모주의 두 아들 뇌질주일과 뇌질청예 중 한 명은 대가야왕이 되고 다른 한 명은 가락국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뇌질주일은 또한 이진아시라고도 하고 혹은 내진주지라고도 하였습니다. 뇌질과 내진은 같은 말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합니다. 뇌질과 내진은 음이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뇌질의 뜻은 ‘노리들, 노리도리’, ‘누리들, 누리도리’란 말입니다. 노리, 누리는 ‘세간(世間)’, ‘세상(世上)’의 뜻이고, 들, 도리는 ‘평원(平原)의 뜻입니다. 이진은 물론 말은 다르나 그 의미는 비슷한 것입니다. 이진(伊珍)에서의 이는 ’위(상)‘의 뜻이고, 진은 들, 도리로 읽습니다. 이진은 ‘웃돌?웃도리’의 뜻이 됩니다. 아시라는 말은 ‘아기 알치 알지’와 같이 ‘귀인(貴人) 존장(尊長)’의 의미입니다. 결국 이진아시란 ‘웃돌아시’, 또는 ‘웃돌아치’란 말로, 이는 ‘세상을 다스리는 귀한 사람‘이란 뜻인 것입니다.
다음 뇌질주일의 동생 격이 되는 뇌질청예는 가락국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자가 말한 바와 같이 가락국 수로왕이 되는 것입니다. 수로왕은 〈가락국기〉에서는 구지봉에서 다른 다섯 알과 같이 금궤에 담겨 하늘로부터 내려와 처음 화생(化生)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가야 설화에서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에 교감되어 형인 뇌질주일과 같이 탄생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뇌질청예란 말은 왜 나오게 되었을까요? 또 청예는 무슨 뜻일까요? 청예에 대해서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인 소호 금천씨와 연결시키는 견해가 있는데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즉 중국의 태고적 전설에 청양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황제(皇帝), 이름은 헌원(軒轅)의 맏아들 현효(玄?)이며 또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라고도 했습니다. 청예란 말은 이 청양의 후예란 의미인 ‘청양예’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락국의 왕실이 헌원의 후예이고 소호금천씨의 자손이라는 점은 『삼국사기』권41, 김유신 열전에 인용된 김유신비문에서도 보이고 있습니다. 가락국의 시조가 헌원의 후예 소호금천씨의 자손이라고 하는 전설은 이미 신라통일시대 초기 즉 7세기 중엽에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을 청예라고 하고, 동시에 대가야의 뇌질주일과 상대시킨 것은 전래되어 오던 신화가 중국적으로 윤색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그 권위를 빌려 시조신화를 더욱 신성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윤색은 중국문화 수입이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에 가해졌을 것입니다. 중국 고전에 관한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던 최치원이 그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아무리 윤색이 가해졌다 해도 신화의 원형은 변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화에 담겨져 있는 역사적 사실성을 추려내기 위해서는 신화를 만든 사람들이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덧붙인 부분에 대한 재해석과, 여러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가해진 후대의 윤색부분을 걸러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유에 숨겨진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인류학, 민속학, 고고학 등의 보조과학도 활용해야 하고, 구성과 전승의 과정에서 가해졌던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은 후대의 윤색들도 적절히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고고학 및 인류학, 민속학 등의 연구 성과를 신화의 내용에 대비해 보는 것도 신화에 담겨진 원래의 모습을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성씨 족보 왕자관(王者觀)과 같은 유교적 윤색, 고조선 단군신화의 제석(帝釋)사상, 신라 알영신화의 미륵사상, 가야 허왕후신화의 아유타국과 같은 불교적 윤색, 간지(干支)와 역년(曆年)의 표기에 보이는 주갑설(周甲說)이나 갑자혁명설(甲子革命說)과 같은 도교적 윤색 등을 걸러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화가 올바르게 역사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과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건국신화는 역사적 사실의 반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건국신화의 해석을 바탕으로 가야 초기사의 많은 부분이 해명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 참고 문헌
이영식, 〈신화와 역사〉『한국사와 한국인 -전근대편-』, 부산경남역사연구소 편, 2001. 정중환, 〈駕洛國記의 文獻學的考察〉『伽倻文化』3, 伽倻文化硏究院, 1990; 『加羅史硏究』, 혜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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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사이버 박물관(http://www.daegaya.net)에서 퍼온 자료임. 대가야와 가야 연맹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하는 글이다. 한번씩 읽어보고 가야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