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5:1-9
요단 서편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단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마음과 정신이 녹게 됩니다. 싸울 의욕과 전투력이 완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상황에서 전쟁의 필요성도 사라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무너뜨리지 못한 여리고 성을 얕볼 수는 없기 때문에 더욱 전세를 가다듬어야 하는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집단 할례를 명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요단강을 건너기 전 싯딤에서 해치우고 완쾌된 후에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더 낫지 죽이기로 작정한 것인가? 전쟁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우리를 가지고 노시는군! 이러한 불평이 백성 전체의 목소리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멀쩡한 강과 바다를 두 번이나 가르고 마른 땅을 밟고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문에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호기심과 궁금증이 있었겠어요? 무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았을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인데, 아마도 그들은 아주 민첩한 정탐꾼을 보내서 그들이 누구인지 파악했을 것입니다. 아주 신중한 눈을 밤의 어두움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며 감시하고 또 감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죽은 자들처럼 엎드러져 아물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본다면, 가나안 족속들의 바닥에 떨어진 사기는 땅을 박차고 하늘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전의 상태보다 더 충만한 전투력을 자랑하며 칼을 뽑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도 할례를 행하되 예비병도 남기지 않고 몽땅 그렇게 한다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이런 불평을 쏟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지금 출애굽 2세대가 처한 상황은 조상들의 불평이 쏟아질 때보다 더 심각합니다. 그때는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의 장대함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한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장대한 적들을 눈 앞에 두고 모든 장정들이 할례를 행하여 죽은 시체와 같이 되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있습니다.
조상보다 갑절의 불평을 쏟아 부어도 합당한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호수아의 말에 온전히 순종하여 진중 각 처소에서 낫기를 기다리는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40년 동안 중지되었던 할례가 속계되는 것을 애굽의 수치가 지나간 것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속뜻을 파악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불평과 낭패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려우면 실패고, 형통하면 승리라는 도식이 인간의 상식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늘나라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최고의 성취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극도의 패역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맥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줄을 잘못 섰다는 후회와 다 털어 버리자는 궁시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실패가 최고의 승리라는 이러한 역설을 우리는 믿음으로 동의하는 자들입니다.
스데반의 죽음도 우리에겐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말씀의 실상을 교회의 유산으로 남겨준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복음은 신속하게 사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스데반의 죽임은 외관상 실패의 최종적인 모습처럼 보이지만 가장 큰 승리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할례 문제를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궁극적인 승리는 그들의 신분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녹아서 전의가 상실된 가나안 족속들과 싸운다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부족을 없애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 같은 인간과 난처한 환경이 몽땅 사라지는 것은 인간의 지극히 인간적인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장대한 적들이 눈 앞에 있고 아군들은 할례로 인해 사흘간 누워 있어야 하는 상황은 분명 사람의 발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생각이며 그분의 뜻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일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약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데,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서 이러한 언약이 모든 전쟁을 통해 거두어야 할 전리품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전리품도 그분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싸운 싸움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열매는 보이지 않는 먼 원인도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입니다.
영적 전쟁 이후에 적들이 섬멸되고, 전리품이 짭짤하고, 자신의 이름에 영웅이란 칭호가 따라붙는 것을 인하여 즐거운 분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거룩한 전쟁을 이익의 방편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에서 신령한 결과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아간은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수7:21)”게 됩니다. 아이성의 패배는 여기에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백성답게 대우해 주셔야 하는데 한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민족 전체를 패하게 만드시고 가나안 정복의 기세를 무참하게 꺾은 것은 해도 너무한 것 같습니다. 그것도 바람에 불리면 날려갈 것 같은 조그마한 도시에서 그렇게 하신 것은 대외적인 이미지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일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상식 밖의 일을 행하시는 걸까? 사람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은 언제나 인간의 한계와 근본을 알게 하고 고치시는 하나님 특유의 섭리입니다.
육체의 생각으론 하나님의 전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전쟁 그 자체보다 그 이후의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입니다. 바울도 이를 잘 알고 영적 전쟁의 무장방식과 그런 무장방식이 무엇을 위함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말하면 전쟁의 열매가 무엇인가? 이것을 고려하면 모든 전쟁은 믿음으로, 진리로, 의로, 복음으로, 구원으로, 말씀으로만 싸워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다른 방식으로 싸우면 성령의 열매는 절대 맺지 못합니다. 모든 일을 행하는 것 자체에 매이게 되면 육체의 현저한 악취가, 하나님의 뜻을 붙들면 성령의 향기로운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장정에게 일제히 할례를 행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붙들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는 그의 백성이라는 언약의 표증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상징적인 행위가 할례라는 말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가장 리얼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끝까지 불렀던 일제시대 순교자들의 마음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면 분명히 적들의 공격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노출되는 것인데, 멸절될 것 같은데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광야에서 불순종 때문에 싸늘한 시체가 되었던 조상들은 살고자 해서 그렇게 되었고, 출애굽 2세대들은 죽고자 했기 때문에 살게 된다는 오묘한 진리가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에서 이와 동일한 상황이 또 한번 연출됩니다(삼상4:5-11). 그때는 상징인 언약궤도 빼앗기고 죽음도 당하게 됩니다. 엘리의 시대에 언약궤를 앞세우는 것은 더 이상 여호수아 시대의 할례처럼 하나님의 언약과 뜻을 붙드는 행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블레셋을 떨게 했지만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전쟁에 하나님의 명의를 차용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쫄딱 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성령의 열매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에서 밀려 나올 것입니다. 인간적인 전쟁에 패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을 붙드느냐의 싸움이 바로 영적 전쟁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