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정조 즉위)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寅)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실사구시란...?★★★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를 거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실사구시이다.
이것은 《후한서(後漢書)》 <하간헌왕덕전(河間獻王德傳)>에 나오는 “수학호고 실사구시(修學好古實事求是)”에서 비롯된 말로 청(淸)나라 초기에 고증학(考證學)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공리공론(空理空論)만을 일삼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을 배격하여 내세운 표어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대진(戴震) 등을 들 수 있고 그들의 이와 같은 과학적 학문태도는 우리의 생활과 거리가 먼 공리공론을 떠나 마침내 실학(實學)이라는 학파를 낳게 하였다. 이 실학사상은 조선 중기, 한국에 들어와 많은 실학자를 배출시켰으며 이들은 당시 지배계급의 형이상학적인 공론을 배격하고 이 땅에 실학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실학파의 사회개혁 요구는 탄압을 받고 지배층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이 때문에 경세치용적(經世致用的)인 유파는 거세되고 실사구시의 학문방법론이 추구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정희(金正喜)이다. 그에 앞서 홍석주(洪奭周)는 성리학과 고증학을 조화시키는 방향에 섰지만, 김정희는 실사구시의 방법론과 실천을 역설하였다. 저서 《해국도지(海國圖志)》는 높이 평가된다.
★★★실학사상 이란......?★★★
조선후기의 사상계 일각에서는 기존의 양반 사회의 모순에 대한 내재적 비판에서 실학이 나타났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실학사상은 전통적 사회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일련의 사상체계를 말한다. 그러나 실학사상의 목적인 새로운 사회로의 희망은 절대로 유교적인 이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유교 본래의 민본사회로의 복귀를 의미한 것이 다. 즉, 실학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 개혁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그 사상이나 개혁의 논리는 종래의 성리학과 같을 수 없었다. 이 말은 형이상학적 이념대결에 서 민생의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실생활에 입각하여 그 모순극복을 위한 대안으로서의 실학이었다는 말이다. 실학사상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재야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러한 실학사상이 나타난 데에는 여러 가지의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 조선왕조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와해현상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즉, 16세기부터 변질되기 시작한 조선사회는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크게 모순- 특히 경제적 측면 - 을 드러냈으나, 위정자들은 근본적인 대책을 모색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보적 지식인들은 국가 체제를 재편하고, 민생을 안정시 킬 수 있는 개혁의 방안으 제시하게 된 것이다. 둘째, 조선왕조의 지배원리였던 성리학이 그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본질적인 대책이 요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은 합리적인 수습책응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다.
셋째, 조선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이 실학의 발생을 촉구하였다. 전쟁피해의 복구 과정에서 피지배층은 끊임없는 노 력으로 경제적 발전을 추구하였는데, 이와 같은 발전을 촉진하고 대변하는 사상으로서 실학이 나타났던 것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
새해가 밝았구나. 남자라면 새해를 맞으면서 반드시 그 마음가짐이나 행동거지를 새롭게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젊은 날에는 새해를 맞을 때마다 꼭 한 해 공부 과정을 계획해 보았었다. 예를 들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글을 뽑아 적어 두어야겠다는 식으로 계획을 세워 놓고 꼭 그렇게 실천하곤 했다. 왕왕 몇 개월이 못 가서 착오가 생겨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좋은 일을 행하고자 했던 생각이나 발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지지 않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 공부에 대해서 무수히 많은 글과 편지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아직 경전이나 예악(禮樂)에서 하나도 질문을 해 오지 않고 역사책에 관한 논리도 보여 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된 셈이냐? 너희들은 내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경시한단 말이냐? 내가 밤낮으로 초조하게 근심하며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너희들의 뼈가 점점 굳어지고 신체만 굳세어져 한두 해 더 지나 버리면 완전히 나의 뜻을 저버리고 야만적인 생활에 빠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초조감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그런 걱정 때문에 병이 나서 여름 내내 앓아 허송했고, 10월 이후에도 계속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마음 한가운데에 반 조각의 정성이라도 있다면 아무리 난리 속이라도 반드시 진보할 점이 있는 법인데 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 어째서 스스로 포기를 하려 드느냐, 영원히 폐족(廢族)으로 지내 버릴 작정이냐?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이 막혔다 하더라도 성인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박식한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꺼릴 것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사고하는 능력을 개발해 인정이나 물태의 진실과 거짓을 옳게 판단할 수 있는 장점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배로서 율곡과 같은 분은 어버이를 일찍 여의었음에도 그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얼마 안 있다 마침내 지극한 도를 깨우쳤고, 우리 집안의 선조 우담 선생께서도 세상 사람들의 배척을 받고서 더욱 덕이 높아졌다. 성호 선생께서도 난리를 당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이 분들 모두가 당대의 고관 대작 집안의 자제들이 미칠 수 없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음을 너희들도 일찍부터 들어오지 않았느냐?
폐족에서 재주 있고 걸출한 선비가 많이 나오는 것은,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들을 폐족에서 태어나게 하여 그 집단에 모범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귀 영화를 얻으려는 마음이 근본 정신을 가리지 않아 깨끗한 마음으로 독서하고 궁리하여 진면목을 바르게 뼛속에다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유배 생활에서 풀려 몇 년 간이라도 너희들과 생활할 수만 있다면 너희들의 몸과 행실을 바르게 잡아 주어 효제를 숭상하고 화목하는 일에 습관 들게 하며 경사를 연구하고 시례를 담론하면서 책을 서가에 진열하고 먹을 만큼만 식량을 비축해 두고, 원포(園圃)에 상마, 소과, 화훼(花卉), 약초 등을 심어 제자리에 가지런히 해 놓고, 그것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을 볼 것이다.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면 거문고가 놓여 있고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으며, 붓과 벼루, 책상, 도서들이 품위 있고 깨끗하게 갖추어져 있을 때 마침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그와 더불어 작은 닭 한 마리에 개천의 생선을 안주 삼아 탁주 한 잔에 맛있는 풋나물을 입에 넣고, 가산의 어려움으로 넉넉치 않더라도 서로 어울려 고금의 일에 정신을 쏟고 흥겹게 산다면 비록 폐족이라 하더라도 판단력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 삶을 부러워 할 것이다.
★★★누구에게 쓴 글인가?★★★
새해를 맞아 두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의 당부
★★★왜? 쓴글인가??...★★★
이 편지는 아버지인 정약용이 아들에게 남새밭을 기르면서 생활에 필요한 양식을 얻으라고 권유하고 있다. 또한 양반이라는 신분을 따지지 말고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이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호화로운 의식(衣食)을 탐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명심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생활의 가르침을 주기 위해 쓴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