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구간 : 갈령 삼거리 - 형제봉 - 피앗재 - 천황봉 - 문장대 - 밤티재 - 늘재 - 청화산 - 조항산 - 고모령 - 밀재 - 대야산 - 촛대봉 - 불란치재 - 곰넘이봉 - 버리미기재(갈령삼거리-0.7-형제봉-1.56-피앗재-5.66-천황봉-2.58-신선대-1.17-문장대-4.45-밤티재-3.3-늘재-2.49-청화산-3.7-갓바위재-1.15-조항산-4.35-밀재-1.25-대야산-4.55-버리미기재=36.91)
접속구간 : 갈령-1.2-갈령삼거리=1.2+36.91=38.11km)
2. 산행 일정 : 9월 15일 20시 40분 출발, 16일 1시 갈령 도착, 1시 11분 갈령서 등산 시작, 18시 31분 버리미기재 도착
3. 종주자 명단 : 최현찬(산행부대장, 경주교도소), 권종훈(산행부대장, 경주월성중학교), 손승락(경주월성중학교), 방진홍(왕산농장, 직전회장)
4. 운전자 : 김형락, 이교훈
5. 차량 제공 : 우성열
6. 도움 주신 분들 : 김칠원, 손정락, 김형락, 이교훈
오늘도 백두대간을 가는 날, 이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감도 생기고 백두대간이라는 말만 나와도 괜히 가슴이 설레임을 솔직히 숨길수 없다.
단지 얼마만큼 빨리 완주를 하느냐가 문제인 것 같다. 생각 같아서는 최단구간에 최단시간으로 백두대간을 완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
오전에는 전일제 클럽활동이라 국립경주박물관에 가서 학생들에게 성덕대왕신종에 대해 설명을 하고 전시실을 이곳 저곳 다니면서 설명을 해주니 어느때 보다도 학생들이 진지한 자세로 경청을 하며 의문이 나면 수시로 질문을 하니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아마 오늘 산행은 상당히 긴 거리에다 시간도 많이 걸릴텐데 다소 걱정은 되면서도 좋은 산행이 될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전일제를 마치고 볼링장에 있는 이상명 편집부장에게 가서 정기산행 발송 우편물을 받아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함께 가지고 박일환 총무 가게로 갔다. 마침 대구에 출장을 가고 없어서 사모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잘려고 해도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손운락 사무국장이 전화를 해서 잠을 깨운다. 최현찬 산행부대장이 아침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오늘 산행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순간 오늘 산행은 포기를 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최현찬 산행부대장에게 전화를 하니 차는 폐차를 시켰지만 몸은 괜찮다고 한다. 천만다행이다.
오늘 산행은 어떻게 할까 물으니 일언지하에 약속을 지켜야 된다며 무조건 가겠다고 한다. 백두대간 종주대의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지와 집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자세가 아닐까요?
경주일요산악회 회원 여러분! 이러한 정신자세야말로 앞으로 우리 경주일요산악회를 이끌어갈 원동력이 될 것이며, 밝은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사무국장이 다시 전화를 해서 방진홍 직전회장님도 함께 가기로 하였으니 준비물을 같이 구입하라 한다. 방진홍 직전회장님은 낮에는 용마관광 산행팀을 이끌고 칠곡에 있는 유학산에 산행을 다녀와서 백두대간 팀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생을 하는지 동참하여 직접 보고 싶다며 무리해서라도 따라오셨다. 정말 고맙습니다.
짐을 챙긴 후 손승락 회원과 최현찬 산행부대장을 태우고 가서 함께 장을 보고 회장님댁에 도착하니 몇 분의 회원들이 배웅하러 먼저 나와 계신다. 마침 회장님이 급한 볼일이 있어서 차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돌아올 때까지 30여분을 기다리니 차가 왔다. 예정보다 다소 늦게 출발(20시 30분)을 해서 고속도로에 진입을 하니 건천휴게소 못미쳐서부터 도로가 막히기 시작하여 칠곡 휴게소에 도착하니 22시 40분이다. 평소보다 많이 지체된 시간이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23시 6분에 출발하여 갈령에 도착하니 16일 1시 정각이다. 준비를 해서 1시 11분 갈령을 출발하여 갈령삼거리에 도착하니 1시 39분이며 2주전 내려갈때와 지금 올라가는 시간이 거의 비슷하게 걸린것 같다.
아마 우리종주팀이 빠른 산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오르막 구간에서 다른 팀들보다 시간을 많이 단축하는것 같다.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거의 속도에 차이가 없을 정도이니까.
갈령삼거리에서 직진을 해서 오르막 구간을 가다 보면 경사가 심해지면서 앞에 바위가 우뚝 서있는 803.3m의 형제봉에 이르며, 1시 54분이다. 갈령에 있는 이정표에는 형제봉까지 1시간 30분으로 되어 있지만 43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국수봉을 지나면서 백두대간은 경상북도 상주시를 지나가다가 형제봉에 이르면서 다시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경계를 따라가게 된다.
형제봉 정상 밑 할배바위를 왼쪽으로 끼고 급경사지대를 내려선 후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고 바위구간을 지난다. 오르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바위 사이를 지나 왼쪽 능선으로 가다보면 바위지대를 통과하게 되는데 2시 20분에 지나간다.
완만하게 내리막을 내려오다 보면 숲으로 우거진 사거리 공터가 나온다. 여기가 600m의 피앗재이며, 2시 24분에 도착하니 오른쪽으로는 희미한 길이 보이고 왼쪽길은 아주 뚜렷하며 만수동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하며 산행기를 적는다. 주위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처럼 숲속에서 하늘을 쳐다보니 나뭇잎 사이로 초롱초롱 별이 쏟아질것 같이 빛난다.
경주에서는 하루하루 생활에 시달리다 보니 새벽에 밤 하늘을 쳐다볼 기회가 별로 없는데 대간을 종주하면서 부터는 영롱한 밤 하늘을 쳐다 볼 기회가 그만큼 많아졌다. 간혹 휴식을 취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 쳐다보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쳐다보는 이유는 혹시 비라도 내리면 어떻게 하나 싶은 걱정 때문이다.
오던 길을 직진하여 오르막을 잠시 오르면 639m봉이다. 오른쪽 능선을 따라 북동방향의 바윗길 능선과 양쪽 급사면을 이룬 능선으로 진행하면 오르내림이 반복되고 3시 3분 속리산 구조 61번 지점이 나오고 계속 해서 가파르게 오르면 667m봉이다.
왼쪽 능선을 따라가다 보니 오른쪽 숲사이로 장각동 마을의 불빛이 깜빡거리며 시야에 들어오고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니 멀리 어둠속에서 비슷한 봉우리 두개가 보인다. 그 봉우리는 형제봉이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완만하게 오르내리면 작은 소나무가 우거진 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지며 능선을 다시 오르내리다 3시 20분 폐허가 된 헬기장에 도착했다. 오른쪽에도 길이 나 있지만 대간길은 왼쪽길로 내려가야 하며, 모처럼 나타나는 산죽밭을 지난다.
3시 27분 오른쪽에 바위를 두고 왼쪽으로 돌아 다시 바위 사이를 올라오면 한동안 오르막과 평지길이 연속해서 이어진다. 3시 39분 전망좋은 낭떠러지 바위지대에 도착하여 남쪽방향을 바라보니 계곡에는 불빛이 보이고 멀리 있는 산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으며 하늘에는 영롱한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다.
바위지대를 지나 계속 오르막 구간을 올라가면 묘가 나오고 대간길은 좌측능선으로 올라가며 4시 9분에 바위지대를 지나니 전망이 좋다. 4시 13분 대목리 가는 하산길에 도착하니 긴급구조 표지판이 있고 속리 04-05가 표기되어 있으며, 이정표에는 문장대까지 가는 길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부터 나무계단이 놓인 직진길로 접어들면 천황봉까지는 계속해서 급경사 오르막이며 산죽이 많이 있다. 나무계단을 몇차례 지나고 바위지대를 지나면 계속해서 산죽이 나오고 밧줄이 설치된 곳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휘어져 산죽이 우거진 곳을 올라서면 1057.7m의 정상이며 4시 28분에 도착하였다.
정상에 도착하니 하늘에는 유난히 별들이 반짝이며 하현달이 어두운 빛을 발하는 가운데 사방으로 눈앞에 거치는 것이 없이 올망졸망한 멀고 가까운 산봉우리들이 어둠속에서 참으로 장하고 아름답다.
정상에는 대리석으로 된 표지석과 이정표가 있고 한강, 금강, 낙동강의 삼파수를 이루는 곳으로 한남금북정맥의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
표지석에는 이곳은 조선의 삼대 명수 삼파수, 달천수, 우통수 중 삼파수의 발원지 입니다. 삼파수(三派水)란 동으로 낙동강, 남으로는 금강, 서로는 남한강으로 흐르는 물을 말하며 이곳 천황봉에서 나누어지며, 천황봉 1058m 1994년 10월 속리산 번영회라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 문장대에서 흘러내리는 세가닥의 물에 관해서 적고 있다. 예로부터 이 물은 '속리산 삼파수'라하여 좋은 물의 으뜸으로 일컬어져 왔다.
여말 선초의 문신 이행은 달밤에 술통을 실은 소를 타고 산수를 노닐어 기우자라는 호를 얻은 사람인데 충주 달천의 물맛을 으뜸으로 치고 속리산 삼파수를 그다음으로 꼽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 적힌 바와 같이 달천 역시 속리산 삼파수의 한 가닥이니 속리산 삼파수야 말로 우리나라 좋은 물의 으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천황봉을 주봉으로 하는 속리산은 곳곳이 암봉으로 가득하며 봉우리와 능선마다 오랜 세월의 풍우로 인해 화강암 바위들이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으며 속리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구봉산, 광명산, 지명산, 미지산,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 등 모두 여덟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높은 봉우리가 아홉개 있다 하여 구봉산으로 불리던 것이 신라 때부터 세속 속(俗), 여읠 리(離), 뫼 산(山), 즉 세속을 여의는 산이라 하여 속리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문헌비고>에는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들이 구름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 같이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산이라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속을 여읜 산, 속리산은 의연한 봉우리들이 하늘로 우람하게 치솟고 그윽한 계곡이 고요할 대로 고요해 세속에서 한참을 벗어난 이 산 속에 '법이 머문다'는 법주사가 들어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또 속리산은 여덟개의 이름, 여덟개의 석문, 여덟개의 대에 여덟개의 봉우리까지 유난히 여덟이라는 숫자와 인연이 깊다.
불교에서는 팔정도라 하여 여덟이라는 숫자를 매우 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기억해 볼때 이 또한 심상치 않은 불연(佛緣)을 느끼게 한다.
8개의 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 등이며,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 등 8개의 대가 있으며, 최고봉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 등 8개의 봉우리와 수정교, 태평교 등 8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3개 만이 남아 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려 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俗離 俗離山)는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헌강왕때 법주사와 부근 암자들을 둘러보고 읊었다는 시이다.
그것은 산은 속세와 인연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은 인간에게 겁을 주듯이 또는 잘난 듯이 거기 그저 뽐내어 서 있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느끼고 깨우치게 해주고 싶어서 폭풍우와 북풍한설을 늘 맞으며, 철따라 옷을 바꾸어 입어가면서 거기 인간 앞에 늘 그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하나 은폭동에 남겨진 송시열의 시가 더욱 마음을 끌게 하는데
'도도하게 흐르게 망정인 것이 물인데
어찌하자고 여기서는 바위 뒤에서 물소리만 울리는가.
때묻은 세간 인간들이 행여 여기 발을 씻을까 두려워서
흐름은 감추고서 소리만 내는구나'
(洋洋爾水性 何事石中鳴 恐濯世人足 藏源但有聲)
어쩌면 사람도 이런 이치가 아닐까.
드러내놓기 보다는 내면의 충실이 더 값지다는 것을...
속리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법주사가 창건된지 233년 후인 신라 선덕왕 5년(784년) 진표율사가 이곳에 이르렀을때 들판에서 밭갈이 하던 소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자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들도 저렇게 뉘우치는 마음이 절실한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죽하랴"하며 머리를 깎고 진표율사를 따라 입산수도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데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법주사가 대찰로서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은 진표율사와 그의 제자들이 이곳을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으로 삼아 발전시키면서부터이다. 이후 법주사는 금산사, 동화사와 함께 대표적인 법상종 도량으로 1500년을 하루같이 불법의 등을 밝히고 있다.
석가모니불이 입멸한지 56억 7,000만 년이 지난 뒤 우리가 사는 지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을 행한다는 미륵불을 주존불로 모시는 법상종 도량답게 법주사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잡아당기는 것은 거대한 청동미륵불이다.
그 외에도 5층 목탑으로 561개의 기둥으로 받쳐진 팔상전, 대웅전의 삼존불, 석련지, 쌍사자석등, 사천왕석등, 마애여래의상 등이 있다.
그리고 이능화의 조선무속고는 또 이 절에 관해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 옛날에는 정월 대보름날마다 눈이 허옇게 덮인 법주사 경내를 사부대중들이 손에 손에 남근목각상을 치켜들고 지신을 밟듯 몇 바퀴씩 돌았다고 한다.
속리산 산신이 성모대자재신이라는 여신이라 그녀에게 남근을 먹여 산자락에 생산과 풍요를 기원한 말하자면 그것도 보편적인 남근숭배사상에 근거하는 하나의 종교적 행사이니 그만큼 법주사는 불교가 이 땅에 뿌리내리기 전부터 있어온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있다 할 수 있겠다.
또한 속리산을 오다보면 고려 태조 왕건이 길을 닦았다는 말티고개의 열두 굽이길을 지나면 우산 모양의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 103호)이 수령 600년의 노구가 힘에 겨운듯 지팡이에 의지한 채 서 있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순례자에게 힘없이 손을 흔든다.
세조의 법주사 순례때에 늘어진 소나무 가지에 연(가마)이 걸릴 것 같아 "연 걸린다"하고 소리치자 축 늘어져 있던 가지를 들어 연을 지나가게 했다. 또 세조 일행이 한양으로 돌아갈 때 갑자기 비가 내렸는데 이 소나무 아래에서 무사히 비를 피할 수 있었다 한다.
이에 세조가 "올 때도 신기하게 연을 피해 주더니 가는 길에 또 비를 막아 주니 기이한 인연이구나"하며 소나무에게 정이품의 품계를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어둠을 뚫고 돌길과 산죽지대를 내려오면 해발1015m 지점에 천황봉 0.4km, 비로봉 0.8km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4시 53분에 통과하여, 다시 법주사 갈림길에 도착하니 천황봉 0.6km가 나오고 4시 58분에 지나친다.
키 작은 산죽밭이지만 비교적 넓은 길에 중간중간 있는 바윗길을 지나 천황석문에 이르니 5시 6분이다. 왼쪽으로 하산길이 있지만 대간길은 직진하여 계속 오르막을 올라가면 1032m의 비로봉이 나오고 5시 15분에 통과하여 가파른 내리막 돌계단을 지나면 이정표가 나온다.
큰 바위 사이로 내려갔다 올라서고 봉우리 갈림길에서 다시 내려갔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면 키 큰 산죽밭을 지나면서 완만해지고 다시 오르내리다 보면 입석대이며 안내판이 있고 시간은 5시 27분이다.
입석대는 글자 그대로 선돌이다. 열린 돌위에 비석처럼 우뚝 선 돌로 해발 1016m에 위치한 입석대는 조선시대 명장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서 7년 수도 끝에 신통력을 얻어 세운 것이라 전해오고 있다.
나무계단으로 오르내리다가 보면 신선대 갈림길 안내판이 나오고 아래로 경업대로 가는 나무계단 길이 보인다.
경업대는 임경업 장군이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치겠다고 벼르며, 산속에 숨어 스승인 운여대사(독보대사로도 불림)를 모시고 심신단련을 연마하던 곳으로 경업대 동북쪽으로 500m 지점에 토굴과 암자가 있다. 암자는 수도를 하던 곳이며 토굴속에는 장군이 마시던 장군수라는 샘물이 있다.
계단길을 오르면 길은 넓어지고 평탄해지면서 신선대 휴게소에 이른다. 휴게소 뒤쪽에는 화장실이 있으며 마당엔 파라솔이 몇 개 있고 바위에 오르면 내속리면이 발아래에 펼쳐지며 5시 43분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돌계단을 내려가다 다시 오르고를 반복하다보면 문수봉에 이르고 문수봉에 도착하자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오늘 일출은 6시 13-4분 경에 볼 수 있을 것 같다.
걸어서 가면 도저히 문장대에서 일출을 맞이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뛰기 시작하였다. 뒤따라 오던 손승락 대원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서 뛰어오고 최현찬 대원은 뛰지 말고 걸어서 가자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간을 종주 하면서 일출을 제대로 본 적은 1구간 제석봉에서 맞이한 일출 외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산행시간이 벌써 6시간 정도 지났지만 일출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엄청난 빠른 속도로 뛰어서 문장대 휴게소를 지나고 안내판을 지나 철계단을 통해 문장대에 올라서니 곧바로 침묵속의 어둠을 꿰뚫고 붉은 불덩어리 하나가 꿈틀거리며 온누리를 밝히면서 힘차고 박력있게 솟구쳐 올라온다.
광명과 환희와 감격의 순간이요, 생명탄생의 순간이요, 천지개벽의 순간이다. 이 찰나의 순간을 무어라 표현해야 될지 짧은 문장 실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방법이 없음이 애통하고 단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6시 14분경 솟아 올라온 일출은 가히 절경이었다. 주위는 온통 운해로 뒤덮여 바다 가운데 섬이 떠 있는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많은 산을 다녀 보았지만 설악산 일출 다음으로 멋있는 일출이었던 것 같다. 그 광경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으리라...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보다 먼저 다섯사람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뒤따라 올라온 손승락, 최현찬 대원과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데 또 두명의 산악인이 올라왔다.
아~ 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신선하고 상쾌하며 감동적인지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리라...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대간 종주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을 갖고 싶고 산의 너그러움을 배우고 싶다. 아집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마음이 조금은 더 여유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마음이 힘들때면 찾아지는 산, 그 긴 능선을 지나오면서 피곤한 몸속에서 그리움이 자라남을 느낀다. 그리고 무심의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느끼고 호흡하고 깨닫고 싶은 이내 심정...
잠시 조망을 구경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갈길을 재촉하여 문장대를 내려오니 문장대에 대한 안내판이 있었다. 올라갈 때는 일출 보기에 급하다 보니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내려오면서 보니 해발 1,054m의 문장대는 원래는 구름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라 하였으나 세조 임금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라 칭하게 되었다 하는데 이곳을 세번 올라오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아마 본인도 세번을 올라보았으니 이제 극락에 갈수 있는 기본 자격은 취득해 놓은것 같군요.
그리고 문장대 표지석 앞에서 다시 사진을 촬영하고 혹시 물이 부족할까봐 문장대 휴게소에 들러 물을 보충하려고 하니 생수 한병(500ml)에 2000원을 달라기에 그냥 나와서 밤티재 가는길을 찾았다.
이리저리 길을 찾아 헤매다가 문장대 안내판 옆 울타리를 넘어 헬기장에 도착하니 6시 45분이다. 잠시 후 7시에는 홀쭉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빠져나갈수 있지만 뚱뚱이 들은 조금 고생을 해야만 통과할 수 있는 바위 틈새를 지나면서부터 암릉과 바위지대가 시작된다.
암릉과 바위지대는 속리산 등산로 가운데서는 가장 험하고 위험한 코스가 아닌가 생각된다. 몇차례에 걸쳐 바위와 암벽을 오르내리다보면 위험한 구간에는 밧줄을 설치해 두었으며 헷갈리는 지점에는 표지리본과 빨간 페인트로 표시된 방향을 따라가면 되는데 중간에 우회로도 나오지만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마루금을 밟아보기 위해 암벽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바위지대를 오르내리다 보면 산죽과 소나무가 있는 지점에서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지고 안부를 지나 큰 소나무와 바위를 오른쪽으로 우회하면 산죽이 없어진다. 이후 계속해서 바위마다 빨간 페인트로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으며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면 밧줄이 묶인 소나무가 있고 여기서부터 암릉구간이 끝이 나는데 7시 40분이다.
916봉을 지나 바위와 소나무 지대를 통과하면 능선이 이어지다가 가파르게 오르다 보면 왼쪽 바위에 진행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다. 내리막을 내려와 안부를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이 나오고 오른쪽에 큰 암봉이 있으며 소나무와 바위가 있는 봉우리에서 바윗길을 내려서면 급한 내리막 지대이며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고 바위틈으로 오르면 평탄한 길이 이어지게 된다.
갈림길이 나오며 오른쪽 길은 시어동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잠시 후 594m봉이 나오고 계속 진행하다 보면 완만한 능선으로 길이 잘 나 있으며 내리막을 내려서면 500m의 밤티재에 내려서게 된다.
밤티재에는 8시 22분에 도착하였으며 낙동강, 한강 분수령이기도 하며, 문장대 온천을 연결하는 346번 지방포장도로로서 화북면 중벌리의 자연부락인 밤치 혹은 밤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있는데 차량이 가끔씩 지나 다니고 우리는 혹시 물이 부족할까 걱정이 되어 물을 보충하기 위해 도로를 따라 계곡까지 내려가 보충하려 했지만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눈치라 앞으로 아껴먹기로 하고 9시에 늘재를 향해 출발했다.
절개지를 급하게 오르면 갈림길에서 왼쪽을 택하여 오른다. 왼쪽으로 길이 휘어져 소나무숲을 지나 밧줄이 설치된 바위를 올라서면 전망좋은 바위지대가 나오면서 문장대와 속리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692.2m봉에 올라서면 늘재와 청화산과 대야산 등이 보이며 9시 20분이다.
정상을 지나 완만한 능선을 오르내리다 하니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네와 젊은 사람 두사람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15분 정도만 더 가면 늘재가 나오고 물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타이어 참호가 있는 곳을 지나 992번 지방도로인 380m의 늘재에 9시 56분에 도착했다.
늘재에는 보호수인 음나무와 성황당과 노송 몇그루가 어우러져 있다. 음나무는 면나무로 1982년 10월 26일 지정되었으며 지정 당시 수령은 320년, 지금은 340년 되었으며, 소재지는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64번지이다.
여기도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이며, 도착하자마자 최현찬 대원은 피곤하여 길가에 누워 눈을 감아 버린다. 보기에 너무 너무 애처로워 여기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길정도로 갈등이 생기지만... 왜? 이런 고생을 자초하는지?
본인은 산행기를 쓰고, 손승락 대원은 물통을 들고 좌측에 있는 청화산 퇴비공장에 가서 물을 보충해 오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서낭당 뒤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고 왼쪽을 택하여 소나무숲을 지나면 경사를 더해 가는 오르막이 시작되고 전망대에 오른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휘어 넓은 바위와 소나무를 지나 계속되는 오르막을 지나면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 바위가 나온다.
계속해서 급경사와 바윗길을 지나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바위를 왼쪽으로 끼고 오르면 전망대이다. 완만한 오르막 능선이 이어지다가 경사를 이룬 급사면 능선을 지나 11시 6분 넓적바위 전망대에 이르니 속리산 연봉과 도장산이 보인다.
계속해서 오르막을 오르니 헬기장이 나오고 11시 29분이다. 헬기장에서 잠시 후 바위로 올라서면 984m의 청화산 정상이다. 정상은 아마 표지석과 표지목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이며 11시 31분이다.
정상에는 철쭉나무 한그루와 표지목 사이에 표지석이 있으며 서로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표지석에는 백두대간 청화산 970m, 상주시청산악회 1996년 11월 17일이 적혀 있으며, 표지목에는 백두대간 970m, 청화산 문경군청등산회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지도상의 높이와 표지석과 표지목의 높이 차이가 14m나 된다.
날씨는 더운데다 최현찬 대원이 너무 피로하고 지쳐 정상에서 사진촬영도 하지 않은채 나무 그늘에 가서 잠시 동안 꿈속을 헤매고 있는 동안 손승락 대원과 사진 촬영을 하고 산행기를 적는다.
아직도 멀리 북동쪽 방향으로는 운무로 구름바다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마을과 계곡사이로 들판이 보이고 남동쪽(오른쪽)에는 원적사가 있으며 정상 바로 앞에 있는 도장산 사이로 난 계곡이 그 유명한 쌍룡계곡이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 곳이다.
11시 45분 청화산을 출발하여 내리막길을 내려오다 5분정도 지난 지점에서 갑자기 왼쪽으로 꺾어지게 되며 바로 가게 되면 신화단 하산길과 시루봉으로 가게 되는데 시루봉은 정상부분의 암벽이 튀어나와서 떡시루 같이 생겨서 시루봉이라한다.
왼쪽으로 꺾어 내리막을 내려오면 경사는 완만해지며 북쪽에 조항산이 보이고 바윗길 능선이 나온다. 다시 오르막이 되며, 858m봉에는 12시 15분에 도착하였다.
바윗길을 내려서서 넓고 평탄한 능선으로 진행하며, 경사길을 내려가다 봉우리를 하나 넘어 바윗길을 오르면 801m봉이 나오고 12시 34분에 통과 하였으며 801m봉을 지나자마자 내리막 바위지대가 나온다.
오르내림을 하다보면 769m의 갓바위재 삼거리가 나오고 13시 9분에 도착하였으며 대간길은 직진을 하게 되는데 바로 헬기장이 나오고 주변은 억새가 많다. 왼쪽은 의상저수지 하산길이며 리본이 많이 달려있다.
여기서 조항산까지는 암릉구간이 자주나온다. 헬기장을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정상이 손에 잡힐듯이 보이며 위험한 암릉구간을 즐거운 마음으로 통과하니 13시 35분이며 계속해서 3분을 더 오르니 조항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문경군 청산악회에서 세운 951.2m 조항산을 알리는 표지목과 백두대간 조항산 951m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으며 약 6m정도 앞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표지석 뒷면에는 백두대간을 힘차게 걸어 땀속에서 꿈과 희망을... 아아! 우리들 산하...' 대한산악연맹 경북연맹, 산들모임 산악회, 단기 4332년 기유 11월이라 적혀 있었다.
정상 주변은 넓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으로는 채석장이 세군데나 파헤쳐 놓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곳이 보이며 남쪽으로 속리산과 청화산 북쪽으로는 둔덕산과 희양산 그리고 대야산 등의 조망이 가능하다.
13시 54분 조항산을 출발하여 북서쪽(왼쪽)으로 경사진 내리막을 내려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며 14시 1분이다. 왼쪽길은 의상저수지로 가는 길로서 표시리본이 많이 달려 있지만 대간길은 오른쪽길을 택하여야 하며 급경사 내리막을 한참 내려가면 완만해진다.
다시 완만하게 오르막을 오르면 737m봉이 나오며 넓은 공터를 이루고 있다. 계속하여 내리막으로 진행하면 능선길이 이어지는데 신갈나무 숲을 지나 오른쪽 봉우리를 두고 내려서면 돌무더기가 쌓여 있으며 옛날 백두대간을 넘던 680m의 고모치 사거리가 나오며 14시 17분이다.
고모령에 도착하자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에 현인이 부른 비내리는 고모령이 떠오른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떠나올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아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던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급경사 능선길을 급하게 올라가니 889m봉이 나오고 14시 44분에 도착하였으며 오른쪽길은 마귀할미통시바위를 거쳐 둔덕산 가는 길이 나 있다. 이 갈림지점에서 북쪽으로 854m봉을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849m봉에 이르니 바위와 소나무가 있다.
가파른 경사 내리막을 내려가다 보면 우회길이 나온다. 왼쪽에는 아주 큰 집채바위가 나오고 바위를 올라서 가면 급경사 내리막이 계속된다. 바위를 오른쪽으로 우회하면 앞에 보이는 산은 바위이고 능선이 이어진다. 가파르게 바위를 내려가다 갈림길 봉우리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면 오른쪽에 바위를 끼고 조심해서 급경사를 내려가면 안부에 이르게 된다.
북쪽으로 올라 바위와 소나무가 있는 봉우리에서 급경사를 내려서면 밀재가 나오고 701m의 밀재에는 15시 36분에 도착하니 이정표가 있다. 가은 JC특우회가 세운 이정표에는 왼쪽으로 송면 5.2km, 오른쪽으로 월영대 1.8km, 지나온 통시바위 2.5km, 가야할 대야산 1.5km가 표시되어 있으며 넓은 공터와 소나무숲을 이루고 있다.
왼쪽은 장수 마을인 농바위 마을과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가는 길이며, 오른쪽은 다래골 용추계곡과 경북 가은읍 벌바위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며 50m쯤 가면 계곡에서 물을 구할 수 있다.
직진하면 대야산까지는 계속 경사진 오르막과 바윗길이다. 양쪽으로 바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이 나타나면서 왼쪽에 코끼리 바위를 지난다. 계속해서 능선을 오르면 커다란 대문처럼 보이는 바위에 이르게 되고 이 큰 대문바위 사이를 지나 능선을 옆으로 가면 전망대 바위가 있으며 전망이 아주 좋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앞에 바라다 보이는 채석장은 산꾼들을 짜증나게 만든다.
돈도 좋지만 대간을 저렇게 무참히 훼손하고 있다 생각하니...
대야산 오름길은 바위들의 전시장을 보는듯 아기자기한 암능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간 중간 굵은 밧줄에 매달리며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중대봉 가는 길과 능선이 이어지며 바로 앞에 대야산 정상이 보인다. 여기서 급경사를 10여m를 내려선 다음 다시 바위지대를 올라가면 정상에 도착하게 되는데 16시 23분이다.
정상에는 백두대간 대야산 930.7m 문경시 산악 연합회 2000년 11월에 세운표지석이 있으며 삼각점도 있다. 그리고 이정표에는 피아골 월영대 1시간 20분, 밀재 40분, 촛대봉 1시간 30분이 적혀 있다.
대야산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괴산군과 문경시쪽에 각각 선유동 계곡을 거느리고 있는 대야산은 계곡에 반석과 소(沼) 등이 이어져 있으며 특히 삼송리 농바위 마을은 전국적으로 소문난 장수마을이다. 한때 모 유업회사에서 TV상품 광고의 배경으로 삼았던 곳으로 이 일대가 맥반석의 성분이 계곡물에 스며들어 풍부한 미네랄과 차디찬 계곡수가 흐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문경쪽은 대야산 제일의 명소인 문경팔경중 하나인 용추다. 여기는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 촬영지이기도 하며 거대한 화강암반을 뚫고 쏟아지는 폭포아래에 하트형으로 패인 소가 윗용추이며 이곳에 잠시 머물던 물이 매끈한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아랫용추를 만들었으며 주변 바위에는 옛날 용이 승천하면서 남긴 용비늘 자국이 있다.
또 하나 달 뜨는 밤이면 바위와 계곡에 달빛이 비친다는 월영대가 있다. 문경 8경은 문경읍 상초리의 새재계곡, 가은읍 원북리의 봉암사 백운대, 가은읍 완장리의 선유동 계곡, 가은읍 완장리의 용추계곡, 산북면 김룡리의 운달계곡, 동로면 수평리의 경천댐, 마성면 신현리의 진남교반, 농암면 내서리의 쌍룡계곡 등이 1986년 12월 24일 선정되었다.
정상에서 간식을 간단히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부산서 오신 분들이 많이 올라와서 사진 촬영도 하고 시껄벅적하다. 아침에 부산서 일찍 출발해서 왔지만 오면서 차가 많이 막혀 늦었다고 한다. 마침 옆에 있던 부산 아주머니가 사탕을 먹어라고 주었다.
정상에 서니 3주전 정기산행을 왔을때 보다는 날씨가 많이 시원해진 느낌이들며 바로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하산길이 있는데 이 길은 피아골로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피아골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풍으로 유명한 지리산 피아골도 있다
정상에서 16시 37분 출발하여 반드시 직진을 해서 바위지대를 통과하니 가파른 내리막이 나온다. 급경사 길로 상당히 위험하며 중간 중간 로프를 설치해 두었지만 겨울에는 항상 얼어 있기 때문에 안전에 유의해야 할 구간이다. 아마 지금까지 오면서 가장 경사가 심하고 위험한 곳이니 조심을 해서 내려와야 할 것 같다.
급경사 지대를 내려서니 16시 51분이며 우뚝 솟은 대야산 정상 모습이 힘차고 박력있으며 너무나 아름답고 멋있게 보인다. 촛대재를 지나 오르다 보면 암벽지대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으며 힘들게 오르면 668m의 촛대봉이며 17시 15분에 도착하니 허물어진 묘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용추방면의 능선이 이어진다. 이정표에는 대야산 1시간 30분, 버리미기재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적혀있다.
부근은 암벽이며 여기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어 북쪽 능선으로 진행하면 내리막이 나오고 다시 신갈나무숲 내리막으로 완만하게 진행하다 510m의 불란치재에 17시 35분에 도착했다. 옛지도에는 도로가 이곳 불란치재로 나와 있으나 지금은 도로가 없으며 오른쪽은 벌바위 마을쪽으로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상관평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신갈나무 숲을 완만하게 올라 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휘어 완만한 능선으로 진행하다보면 헬기장에 이른다. 직진길 능선으로 가파르게 오르면 큰바위가 나오고 멋지게 솟아 있는 미륵바위를 돌아 계속하여 오르는데 장시간의 산행으로 인해 모두가 약간은 지친 상태이며 733m의 곰넘이봉이 나오고 전망이 너무 좋다.
왼쪽으로 휘어 바위를 오르면 가파른 내리막이 나오고 군데군데 바윗길을 지나면 버리미기재 도로와 벌바위쪽으로 채석장이 보이고 이후에도 종종 바윗길이 나오고 안부를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다.
오른쪽에 넓은 바위를 지나 내리막을 내려서면 안부가 나오고 다시 내려서다가 오르막으로 진행하면 시멘트 참호가 나오고 헬기장이 나오며 계속해서 진행하다 보면 Y자 갈림길이 나오고 왼쪽으로 내려서면 낙엽송 지대가 나타나고 460m의 버리미기재에 도착한다. 버리미기재는 913번 지방도로로써 2차선 포장도로이지만 노선버스는 없으며 도로표지판에는 함창 43km, 가은 16km라 적혀있다.
버리미기재에서 기다리고 있던 방진홍 직전회장님과 김형락, 이교훈 회원님이 너무너무 반가워하면서 열렬히 맞이해 주었다. 옆에 기다리고 있던 경남 남해에서 오신 남해산악회 회원님들도 함께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새벽 1시 11분에 갈령에서 출발하여 18시 31분 버리미기재에 도착할 때까지 암벽과 바위를 뚫고 높고 낮은 대간길을 17시간 20분 동안 오르내리면서 죽어라 걸었으며 함께 한 대원들 모두 너무 너무 고생 많이했습니다.
그리고 남해산악회 회원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들이라며 그 중 한분이 하시는 말씀 왈 앞으로는 백두대간 호랑이들이라 불러야겠다며 별명을 붙여 주셨다. 그러면서 참조하기 위해 홈페이지 주소를 적어 달라기에 적어준 후 사진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먼저 출발을 하였다.
차를 타고 오면서 지나온 대야산과 다음 구간에 가야할 희양산을 바라보며... 또 한 구간을 마쳤다는 행복감과 함께 들판에는 황금 물결이 일렁이고 있지만 피땀 흘려 지은 농사가 제 값을 받을 수 있을지 한편으로는 걱정이 든다.
가은에 도착하여 모처럼 삼겹살과 소주로 하루 산행의 피로를 풀고 경주에 도착하니 23시를 넘어선 늦은 시간이다. 운전을 하신 김형락 회원님, 음식값을 지불한 이교훈 회원님 그리고 전날 산행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함께 동참해 주신 방진홍 직전회장님 모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