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야기 1장-----
강림의 겨울을 한마디로 얘기하기란 그리 쉽지않다.
1960년대---
해가 땅거미 질 때쯤이면 집집마다 굴뚝마다 파아란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곤 하였다.
시커먼 무쇠솥에서는 통감자와 맷돌로 타겐 옥시기쌀, 하얀 쌀 한줌이
어우러져 잡곡밥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있었다.
밥하는 아낙들은 밥물이 넘쳐흐를까봐 반찬을 만들다가도 얼른 뚜껑을
열곤하였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뚜껑사이로 비집고 올라온 끓는 물이
솥가장자리로 주루룩 흘러내리면 무지하게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가마솥하면 뭐니뭐니해도 가장 좋았던 것이 바로 누룽지였다.
5일장에다 시장도 멀고 가게도 없는 산간마을에서 누룽지는
단연 최고의 과자였다. 아니 과자이상이었다.
요즈음 스텐냄비에서 나오는 누룽지는 어림 반푼도 없었다.
밥이 다 되어 눌어 갈 때쯤이면 가을겆이가 끝난 벼그루터기가
남아있는 논 한가운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자치기를 하던
악동들이 마지막 점수를 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저녁을 다 짓고난 엄마는 아들을 찾아나섰다.
“ 바우야이--------”
“-----------”
“ 남우야이------”
“ 종덕아------”
“ 바우야이---”
그러나 고래고래 부르는 엄마의 부름에는 아랑곳 하지않고
논바닥이 깜깜할때까지 자치기를 쳐댔다.
자치기를 잘만드는 아이도 남일이와 승용이었다.
싸리나무 양쪽을 대각선으로 잘라 톡치면 잘 튀어 올라야했다.
이 싸리나무를 때리는 몽둥이는 문프레나무가 좋았던 같다.
어떨때는 자작나무를 쓰기도하였다.
연기 끌음으로 새까맣게 그으를대로 그으른 부엌의 석가래와
대들보를 보면 수십년간 아궁이에 장작을 디렸다 땐 것 같았다.
한겨울 강바람이 쌩쌩 세차게 불어대면 어떨때는 굴뚝으로 밀고
들어간 역풍때문에 아궁이로 연기가 도루 나와 온통 부엌에는
연기가 가득하였고 아낙들의 눈물을 쏙 빼내었다.
그러나 엄마는 사랑하는 새끼를 생각하여 그 연기를 다 마셨다.
정바우는 조금 덜하지만 외양간과 함께 붙어있는 우리의 옛날 부억은
더 시커멓게 그을렀다.
밥을 다 짓고 나면 엄마는 장작 숫불덩이를 화로에 잔뜩 담아
안방으로 날랐다.
장작불로 달군 구들장이 밤새 식구들의 등짝을 데우다가 새벽녘이 되면
거의 다 식어 기상직전 한시간 남짓이 항상 어려웠다.
시골집은 벽채가 엷어 난방이 잘 될리없었고 위풍 또한 만만치않았으며
얇은 한지나 유리로 된 방문은 아침이면 하얀 성애가 가득 서리곤 하였다.
감자 옥시기밥과 짠지로 허기진 배를 때우는 것이 보통의 일상이었다.
한겨울의 밥상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얼음이 둥둥 뜬 허연 동치미였고
김장독에서 갓꺼낸 빠알간 무와 배추짠지였다.
앞마당에 김장독을 묻고 짚으로 꼬깔콘 모양의 지붕을 덮어 보온을
한다고 했지만 강림의 동장군을 이길수는 없었다.
빠알간 무 한개 젓가락에 푹끼어 밥 한술 떠넣고 한입 뚝 베어먹던
그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배추짠지는 날씨가 너무 추우면 살짝 얼어 한 입 물으면 얼음이 서걱서걱했다.
밥상을 물리면 긴긴 밤이 이어졌다.
전기가 없던 그시절 집집에는 등잔 아니면 남포불을 켰다.
이 등잔불은 주로 석유를 썼는데 끄름이 무지하게 많이 났다.
잠자기전 서너시간 정도 켜놓고 저녁을 보내곤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면 식구마다 콧구녕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남포는 투명한 호야를 겉에 씌우는데 몇시간 지나면 그름이 유리에 달라붙어
아침이면 매일 호야를 청소하느라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호야가 대단히 얇아 자칫 잘못하면 깨지기 십상이었다.
이 남포불은 등잔보다 훨씬 밝았지만석유가 몇배나 더들어 웬만한 집은
사용하지를 못했다.
저녁을 물리고 두어식경 지나면 입이 궁금하였다.
입이 궁금하면 화롯불을 뒤적거리며 감자 서너개와 고구마 두어개를 파 묻었다.
화롯불은 감자 고구마 밤을 구워 먹는데는 최고였다.
타지도 않으면서 은근하게 골고루 잘도 익었다.
없던 시절 궁하게 지내던 시절 서로들 큰거 먹으려고 전쟁을 하였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렇게 강림의 밤은 깊어만갔다.
도리께질하랴 밥하랴 낭구하랴 자치기하랴 지친 강림의 식구들은 그렇게 잠에 떨어졌다.
새벽녘 저 머얼리서 희끄므리한 여명이 밝아오면 뒷간에 올랐던 붉은 수탉이 작은 눈가의 흰창을 드러내고 홰를 치면서 곤하게 나가 떨어진 상봉이 진호 정숙이 옥산이 순자 순희를 깨워 흔들어댔다.
당시 초등학생쯤되면 누구든지 지게를 졌다.
상업을 주업으로 하는 정바우에 사는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 상우야---”
“ 예---”
“ 곧 게울이 드리닥쳐어--. 앞산에 가서 장작이란 솔가지 잘라다,
헛간에 잔득 쌓아야한다아---”
당시 강림일대는 소나무가 지천에 널렸다.
가을겆이가 끝나면 누구나 겨울 땔감이 겨울문턱에 서 기다리고 있었다.
팔뚝에서 넓적다리통만한 굵기의 소나무를 한발정도 되게 잘라
지게위에 올렸다.
어린 소년들의 등짐에 맞게 지게위에 올려 산길을 꼬불꼬불 돌아
산마루에 내려와서는, 잠시 저 먼발치에 있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랑스런 초가집을 쳐다보며 이마에 몽글몽글 맺힌 땀방울을 식혔다.
앞산을 내려와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강뜰에 매어놓은 황소들이
게으른 울음을 으음메---하고 울어댔다.
당시 부곡에서 노뜰까지 가리네에서 개건너까지 강림일대의 모든 강가는
군데 군데 누런 소들이 풀들을 뜯어 먹는 천국이었다.
자치기를 일찍 끝낸 목동들은 강가로 황급히 달려가 황소 암소를
데려오곤 하였다.
그렇게 한 보름 정도를 통나무를 해 뒷뜰에 부려놓았다.
통나무를 어느정도 했다싶으면 다시 통나무 중간부분을 톱으로
패기좋은 길이로 자르고, 도끼로 통나무를 비스듬히 큰도마위에 눟여놓고
나무를 패기 시작했다.
장작을 패는 기술 !
이것은 강림 아저씨들만의 숙련된 비법이었다.
나무결을 잘잡아 일거에 내려 찍어야만 힘도 덜들고 잘 팰수가 있었다.
벙어리 삼룡이에 보면 장작을 잘 패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모습이
강림의 전경이었다. 다 팬 장작은 헛간 처마밑에 차곡차곡 쌓으면
겨울 눈도 안맞고 든든하였다.
집집마다 초겨울에는 여기저기 장작을 패는 소리가 마음을 푸짐하게 하였다.
장작을 다하고 나면 이번에는 소나무에서 낙엽이 되어 떨어진
솔가지를 하러 나갔다.
통나무를 지던 맨 지게위에 이번에는 바소쿠리를 얹어
단단하게 장착하고 바소쿠리위에는 갈퀴를 얹었다.
보통 굵은 철사나 대나무가지를 휘어서 만든 갈퀴는 솔가지나
낙엽을 끌어 모으는데는 그만한 농기구도 없었다.
골짝골짜기에 쌓인 바싹 마른 솔가지를 가득긁어 바소쿠리에 잔뜩쌓아
집으로 나르곤 하였다.
불쏘시게나 금방 불을 피우는데는 솔가지만한 것도 없었다.
장작과 솔가지만 있다면 그리고 싸리나무만 있다면 그 어떤 겨울도 끄떡없었다.
강림의 겨울은 지금 생각해보면 보통 영하 10도에서 20도 사이는 왔다갔다
했던것같다.
그래서 초등학교다닐때 그 겨울을 이기려고 솜바지저고리 입고다니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종환이나 효범이 상우 형 들이 그랬다. 당시 국민학상들이 바지저고리를 걸쳤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도 문화혜택을 덜 받았다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깡촌이었다는 뜻이었다.
한겨울 가장 힘들었던 것이 딱하나 있었다.
그것은 한밤중에 볼일을 보는 일이었다.
‘ㅎㅎㅎㅎㅎㅎㅎㅎ’
‘ㅠ ㅠ---’
첫댓글 선배님 가설 극장도 묘사해 보세요. 강변 자갈밭에 광목 포장 둘러치고..........몰래 숨어보다 틀켜서 혼나던얘기.....
남일이 우리 동창인데 어렵게도 군생활을 했지 나라에서 잘 보살펴 주어야 할텐데....
서울 어린이대공원 주차원으로 있다고 들었는데~ 최근에는 소식 못들었네요.
그때그시절 누구나가 어려워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그때가 그리워지네요.. 장날 모처럼 온 약장수 구경도 좋았고요 운동회날 점심때 먹던 국밥은 또 일품이지요..
추위하면 강림이 대단하고 눈 또한 엄청왔고 문고리에 손이 쩍쩍붙었던던 기억이 ,얼음이 서걱한 김치등...
읽으면 읽으수록 추억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