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사망원인 통계 결과에 따르면, 한 해 전체 사망자 24만5771명 가운데 자살한 사람은 1만1523명으로 인구 10만 명 당 24.2명이었다. 전체 자살자의 28.8%가 60대 이상 노인층이었고 40대가 21%를 차지했다. 사망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20대와 30대의 경우는 사망 원인 중 자살이 1위를 차지했다. 한 해 동안 자살로 인한 사망자를 시간으로 환산하면 하루 평균 36명으로, 매 시간당 1.5명인 셈인데, 이것은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높은 수치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더 이상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2003년 4월 1일 홍콩의 유명배우 장궈룽(장국영/張國榮)이 자살했을 때, 세상은 떠들썩했다. 그는 홍콩섬 센트럴(中環)에 있는 만다린 오리엔탈호텔(文華東方酒店) 24층 객실에서 뛰어내려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그는 〈영웅본색〉 〈천녀유혼〉〈금지옥엽〉〈야반가성〉등 한국인에게 인기있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인기절정에 올라있던 41세의 나이에 세상과 이별했다. 그의 유서에는 “感情所困無心戀愛世”(감정이 피곤하여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라고 적혀있었다. 2005년 2월 22일 드라마 〈불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등에 출연해서 인기를 모았던 영화배우 겸 탤런트 이은주(25.여)씨가 아파트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녀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자신의 집 드레스룸에서 자살했다. 그녀의 유서에는 ‘엄마에게 미안하다’'일이 너무 하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명인사의 자살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자신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인 ‘자살’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영화〈죽은시인의 사회〉〈공동경비구역〉〈천국보다 아름다운〉등 자살을 모티브로 하는 영화가 참 많다. 그 가운데, 영화의 첫 장면에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서 붉은 눈물을 흘리며 “나 이제 돌아갈래!”를 울부짖는 김영호(설경구 분)의 얼굴이 스크린을 하나 가득 메우며 시작하는 영화 〈박하사탕 〉은 인간이 어떻게 자살의 문턱에 다가서게 되는가를 심도 깊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을 명감독의 반열에 설 수 있도록 한 작품인데, ‘리버스 모션reverse motion’으로 영화 전체의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보여주며 김영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적인 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역추적한다. 그리고 이 '거꾸로 가는 기차'의 이미지는 마지막 김영호의 생에 종지부를 찍었던 그 기차의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영화 전체를 시간을 거슬러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만들어 버린다.
영화는 주인공 김영호가 주식투자에 전 재산을 날린 사람으로, 경찰로 학생들을 고문했던 인물로, 80년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되어 사람을 향해 총을 쏴야했던 군인으로, 일용직 공장 노동자로 일했음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그 모든 과정은 동시에 우리 한국의 슬픈 근대사의 현장이었다. 영화는 그 거부할 수 없었던 삶의 현장이 김영호로 하여금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보도한다.
이것은 마치 에밀 뒤르켐의 책「자살론」이 인간의 자살을 분석하면서 내린 결론과 유사하다. 뒤르켐 이전에는 자살을 개인의 심리적인 면에서 그 원인을 분석했지만, 그는 자살이 엄연히 사회 현상이라고 읽는다. 뒤르켐은 자살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통계 자료를 조사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정신병이나 신경쇠약증 같은 것이 자살과 확정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자살을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을 구분하고, 개인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질 때 이기적 자살이 시행되고, 반대로 개인이 사회에 대한 통합의식이 너무 강하게 되면 이타적 자살을 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특히, 뒤르켐은 개신교 지역과 가톨릭 지역을 비교하여, 전자의 지역이 후자의 지역에 비해서 자살율이 높다는 것을 밝히고, 전통적인 규범 및 가치가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가톨릭 지역에 비해서, 개신교 지역은 상대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제시한다. 그의 책이 100년이 지난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그의 분석은 지금도 유효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박하사탕〉과 뒤르켐이 말하는 것처럼, 자살을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많은 사람이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변혁시켜 나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성경은 자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자. 성서에는 자살을 금지하는 특별한 규정은 없다. 물론, 성경에도 자살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구약의 사울과 삼손, 이히도벨과 시므리, 그리고 신약의 가룟 유다 등의 경우이다. 성경은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서 자살에 대한 어떠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성경이 자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십계명의 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규정과 인간의 피흘림에 대한 규정들(창9: 5,6)은 분명 자살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살인의 범주에 타인과 자신의 경계란 없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존재에 대한 살인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다(창 1: 26-27). 하나님 한 분만이 생명을 주인이시고 빼앗을 수 있는 권위를 가진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며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욥1:21).
필자는 자살하는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교회 안에는 지나치게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을 발견한다. 반복된 실수와 죄책에 대해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에서 죄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는 부정적인 면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강단은 한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동시에 선포해야 한다. 지금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기-존중(Self-Esteem)’에 관한 메시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gard)는 자신의 책「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것 같으면, 사람은 삶을 원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위험을 알게 될 때에 사람은 죽음을 원한다. 그러나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망이란, 한 번 죽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죽음으로 해결되지 않는 절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될 수 있는 출구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죽음 이후에 마주쳐야 하는 영원한 절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원한 절망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살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희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자살에 대한 숙고는 자연스럽게 안락사(euthanasia: right to die)1)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는데, 안락사에서, ‘Eu’는 영어로 ‘Good’이고 ‘Thanasia’는 영어로‘Death’ 의미를 가지는 고대 그리스어이다. 쉽게 말해서, 환자가 고통가운데 생명을 지속하기 보다는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달라는 것인데, 이러한 안락사를 다룬 영화중에서 2005년에 개봉된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빼놓을 수 없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란 제목은 상품이 1센트에 판매되는 1센트 가게에서 백만불 이상의 가치를 가진 물건을 발견한다는 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열악한 곳에서 보물 같이 귀한 것을 얻는다’거나 ‘뜻밖의 순간에 행운처럼 소중한 사람을 만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영화를 감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힐러리 스웽크, 모건 프리먼, 제이 바루첼, 마이크 콜터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까지 했다. 주인공 매기(힐러리 스웽크 분)는 시골 출신의 독신녀이다. 권투를 너무 좋아해서 권투선수가 되기를 원하여 복싱 체육관에 다니려 돈을 모으고 있었다.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 분)는 한때 잘나가던 권투 트레이너였지만, 딸과의 관계 때문에 스스로 세상과 멀어져 지내며 은퇴 복서인 스크랩(모건 프리먼 분)과 유일한 친구로 지내며 함께 낡은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프랭키가 운영하는 체육관에 매기가 찾아와 프랭키에게 트레이너가 되어주기를 요구한다. 매기의 끈질진 요청에 결국 프랭키는 그녀의 트레이너가 되기로 한다. 매기는 시합마다 승승장구한다.시합할 때마다 관중들은 ‘모쿠슈라(너는 나의 혈육이다)’를 외치며 열광적으로 응원을 한다. 그러나 매기는 마지막 시합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경추 손상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인공호흡기를 부착해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사지마비환자가 되어 힘든 치료과정을 겪게 된다. 매기가 고통가운데 있는 자신을 안락사 해달라고 프랭키에게 요구하고, 프랭키가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메기의 고통과 프랭키의 자비로움에 안락사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운데서도 안락사를 우리의 곁에 있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느니 차라리 그를 편안하게 죽음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락사를 그렇게 낭만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안락사의 이면에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중요한 문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안락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인간이 자기 생명의 주인이며,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앞에서 자살의 문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에게 자신의 생명을 중지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그 생명의 소유는 하나님에게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운운하지만, 아직 숨을 쉬고 살아있는 사람을 돌보는 가족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는 차원에서의 안락사는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가치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뺏을 수 있다는 생각은 보다 끔찍한 생각의 뿌리로 작용할 수 있다.2) 그리스도인에게 마지막 고통의 순간까지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행복이다. 그 기간이 아무리 길더라고 함께 나누는 시간은 축복이다.
필자의 아버님은 38년 동안 작은 교회를 섬기시다가, 8년 전 수요예배 설교를 마치고 집에서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아버님께 마지막 한마디를 드리고 싶어서 여러 차례의 심장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아버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셨다. 평소 유언대로 아버님의 시신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고 화장을 했다. 그러나 필자에게 지금까지도 아버님에게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를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올 4월에 개봉한 영화〈드리머〉는 이러한 자살과 안락사에 대해서 기독교적 시각을 갖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영화〈드리머〉속에 등장하는 경주용 명마의 이름이 바로 ‘소냐도르(소냐)-드리머’이다. 소냐는 경마 경기 중 넘어져 기수와 함께 경마장 트랙에 넘어지고 다리가 부러져 안락사를 언도받는다. 소냐를 안락사 하는 것을 딸 케일(다코타 페닝 분)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아버지(커트 러셀 분)는 소냐를 마구간으로 옮긴다. 여기서부터 명마 소냐의 새로운 운명이 시작된다. 전혀 쓸모없는 다리가 부러진 말,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명마 ‘소냐’를 안락사가 아니라, 사랑으로 돌봄으로써 마침내 브리더스컵 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적일 일구어 낸다. 그뿐 아니라, 소냐로 인해서 케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오래된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게 되고 서로를 향한 사랑과 신뢰의 회복하게 된다.
이 영화는 생명이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이 돌봄의 과정을 통해서 환자만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 자신이 몰랐던 것을 발견하고,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오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가 불우이웃을 돕는 다거나, 정신지체아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경험하게 되고, 그분들과 함께 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오묘함을 깨닫게 된다. 결국, 우리는 그분들을 통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살하고픈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격려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자 자신과 가족에게 호스피스와 재정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이다. 너무나도 쉽게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자기 아들 예수를 죽이셨다고 눈물로 그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아닐까? 우리민족의 역사 속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의 얼룩으로 물든 6월에 죽음을 생명으로 역전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한다.
첫댓글 이 글 또한 누구의 글인지 저자를 밝히면 더 좋을 듯 하네요.
제 글인데... 자꾸 출처를 밝히라고 하니까... 뭔가를 밝혀야 할 것 같고... 네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