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는 개미다. 개미는 지금도 개미다. 전에도 개미고 앞으로도 개미다. 일억 년도 훨씬 넘는 태고시절에 말벌과 같은 할아버지를 조상으로 하여 지금껏 진화를 해왔다는데, 사실일까 한번 정도 생각할 뿐, 개미는 개미다. 말벌과 개미들의 몸체가 비슷하게 생기고 또 숫개미가 봄이면 말벌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면 무슨 상관관계가 있음직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자들의 지식에 불과하다. '개미는 개미다'라고 단언하면서도 무엇을 개미라고 부르는 지 그 모습을 정확하게 기술하라고 하면 실제로 아는 바가 크게 없다. 개미가 무슨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개미한테 특정한 냄새가 나지도 않는다. 개미들의 페르몬은 사람에게 능력 밖이다. 장님이라면 정말 개미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냥 두 음절로 개미라고 말하기에는 개미들이 억울해 할 것이다. 눈이 달린 사람에게 땅위에서 기어 다니는 무수한 벌레가 있음이 눈으로 보이고, 또 비슷한 공통점을 지닌 어떤 곤충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이름을 새로 지어 부른다. 그게 개미다. 곤충이라는 이름도 어떤 개체 하나를 두고 하는 실체적인 이름이 아니라 그저 다리가 여섯 개 달린 벌레들을 인간 기준으로 총칭해서 부르는 개념적 단어다. 개미는 곤충이요. 곤충 중에서 우리는 개미라는 미물을 하나 정해놓았을 뿐이다.
개미는 분명히 곤충으로 더듬이도 있고 다리도 여섯이다. 머리와 가슴 그리고 배로 구성되어 있지만 가슴보다는 머리와 배가 유난스레 크다. 개미는 종류도 많아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종류가 12,000에 14,000종에 이른다고 한다.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많은 종류의 개미에 대해서 어떤 특징이 서로 다른 종의 기준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놈들이 여럿 있어서 이를 구별하기 위해 열심히 이름을 짓지만 별 소용이 없다. 한반도에도 120종이 넘는 개미들이 살고 있다는데 아직도 확실하게 분류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름들이 꽤나 보인다. 침개미, 납작자루개미, 짱구개미, 뿔개미, 곰개미, 홍가슴개미, 빨간불개미 등 무수한 이름들이 열거되고 있다. 나는 모른다. 처음 듣는 이름들이다. 사진이나 어떠한 이미지도 본 적이 없다. 이 이름들이 지니는 개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름도 몰라주는 개미들이 불쌍할지 모르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개미이름을 놓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개미들이 웃음을 터뜨릴 일이다. 개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개미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전혀 심상치 않음을 말하고 싶어 괜스레 개미에게 딴죽을 건다. 개미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딱 부러지게 어떤 개미라고 지칭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이 글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걱정스러운 것이다. 텍스트는 그 의미에 있어 한계가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개미이야기를 하고자 하니 그 모호함이 더욱 실감이 될 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과 산책을 하는 숲길, 그리고 달리기를 하는 벌판에는 개미들이 많다. 종류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검은 빛깔의 몸매를 지닌 개미로 길이가 일 센티 정도 된다. 검정개미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다른 하나는 크기가 2밀리 정도 될까 말까 하는 작은 녀석들이다. 짙은 갈색에 붉은 기운이 감돈다. 통상 불개미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자세히 관찰을 해보면 서로 다른 수많은 개미 종류들이 분류되겠지만 그렇다고 개미가 유별나게 특정한 어떤 개미가 되는 것도 아니어서 오늘의 등장개미는 그저 검정개미와 불개미뿐이다. 집마당에는 주로 검정개미가 산다. 잔디밭과 밭두렁에는 검정개미들이 지배하고 있다. 틈틈이 불개미도 보이지만 마당을 점령하고 있는 녀석들은 검정개미들이다.
검정개미들은 진딧물을 좋아한다. 각시원추리가 노란꽃을 피울 때면 하얀 진딧물이 대궁을 덮는다. 꽃들이 불쌍하다. 꽃을 감상해야 하는데 진딧물들은 불청객이다. 진딧물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검정개미들이 들락거린다. 대궁을 타고 새까맣게 올라와 진딧물의 꽁무니가 뿜어내는 진물을 탐식한다. 우리는 선택을 한다. 같은 생명이지만 원추리는 아름답고 진딧물은 추하다. 해충이다. 그냥 두면 원추리꽃이 잘 피어나지 않는다. 농약분무기나 아니면 모기약 살충제를 뿌린다. 진딧물들이 뚝뚝 떨어진다. 전멸이다. 개미들은 놀라서 도망을 간다. 살충제를 직격탄으로 맞은 개미들은 어리둥절하다가 죽어가기도 한다. 날벼락이 따로 없다. 개미들의 사전에는 살충제라는 어휘가 없다. 마당에 앉아 있거나 풀을 뽑기 위해 일을 하고 있으면 개미들은 발을 타고 올라온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다. 개미집을 건드렸거나 이동하고 있는 개미들을 방해하였음이 틀림없다. 몇 놈은 벌써 발에 밟혀 죽었을 것이다. 놈들은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한다. 검정개미들은 살갗을 날카롭게 물어뜯는다. 따끔하다. 개미산이라고 불리는 독이다. 크게 아프거나 부어오르지는 않지만 개미들이 연거푸 물면 언짢게 느껴진다. 사정없이 손바닥으로 후려쳐 죽이거나 툭툭 건드려 떨어지게 한다. 자유의지의 인간은 언제나 거침이 없다.
개미들은 이 땅에서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지구의 생물 중에서 개체가 제일 많아 약 사분지 일이 개미라 한다. 인간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마당에 살고 있는 개미들만 해도 아마 수만 마리 아니 수십만 마리도 넘을 것 같다. 개미가 땅주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미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고 도망 갈 녀석들도 아니다. 개미와의 공존은 숙명적이다. 하지만 우연히 부지불식간에 개미들은 나에게 죽음을 당한다.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은 전혀 아니다. 개미를 죽일 목적으로 무슨 짓을 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조그만 상처만 입어도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 내가 나를 통하여 배우듯이 내가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기에 나는 어지간해서는 동물들을 죽이지 않는다. 미물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환경주의자도 아니고 살생을 금하는 불교신자도 아니다. 개미는 곤충이고 미물이다.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그렇다. 보잘 것이 없는 생물이다. 개체수도 많다. 그 중에서 한두 마리야 보이지도 않는다. 개미들이 주민등록에 올려 있는 것도 아니다. 수십만 마리 중에서 수십 마리 정도가 원추리 대궁을 올라가다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신문에 날 일도 아니다.
개미들은 자기들에게 닥칠 위험을 미리 안다. 지진이 나기 전에 동물들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그러는데 지진까지 들먹일 이유가 없다. 날이 흐려 비가 올 지 않을 지는 마당에 가보면 안다. 비가 온다면 그 많던 개미들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날이 흐려도 개미들이 기어 다니면 그날 비가 오지 않는다. 개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곳에 구멍을 파고 집을 파 올린다. 모래알들을 하나하나 물어 구멍 밖에 동그랗게 둔덕을 쌓아 올린다. 빗물이 넘쳐드는 것을 방지하려 함이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오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걱정을 한다. 그 많은 개미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며칠 전에 잔디를 깎았다. 장마철에 비가 계속 와서 그냥 두었더니 잔디가 볼 상 사납게 키가 웃자랐다. 전동기에 달린 칼날이 매섭게 돌아갈 때마다 잔디들은 깎여 나간다. 잔디가 아플 것이다. 잔디만이 아니다. 풀숲에 숨어 집을 짓고 살던 개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지진이 일어난 것보다 더 큰 재난이다. 검정개미들은 나무 둥지 밑에 집을 짓기도 하지만 마당 여기 저기 모래집을 수없이 올려놓았다. 봉실봉실 개미집들이 솟아 있다. 개미들은 부지런히 모래알을 물어 집을 짓고 있기도 하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잔디깎기가 지나가면 개미집들은 박살이 난다. 공든 탑이 무너진다. 집만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목숨도 위태롭다. 발에 밟혀 죽기도 하겠지만 윙윙 돌아가는 칼날에 무수한 몸뚱이가 잘려 나간다. 요행히 살아난 놈이 깎인 풀더미에 숨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살아난다는 보장이 없다. 사람들은 풀더미를 모아 멀리 갖다 버린다. 퇴비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 속에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미들은 전진하며 페르몬을 남겨두어 냄새길을 만든다 했는데 사람이 강제로 이동을 시켰으니 냄새를 뿌릴 겨를도 없다. 냄새를 맡으며 집으로 귀환해야 하는데 이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잔디를 깎고 있을 때 개미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생각할 이유도 없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볕만 걱정이 되어 밀짚모자를 쓰고 차가운 음료를 찾는다. 개미들이 자기들끼리는 무슨 이름을 붙여 서로를 부르고 구분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뭉뚱그려 모든 개미를 개미라고 부른다. 모호하고 개념적이다. 죽음도 그렇다. 실재적인 사실이 아니라 생각으로만 추정되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개미가 죽어간다고 해서 무슨 처절한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 텍스트 상으로만 개미를 불쌍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개미들에게 인간들의 행동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하늘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있어도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그들은 알 수가 없다. 비오는 것에 대비하여 여러 방책을 수립하는 개미들도 잔디깎기 기계는 우주의 행성폭발처럼 날벼락이다.
불개미는 검정개미보다 그 개체수가 훨씬 많다. 사람들은 눈여겨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겠지만 실제로 불개미들은 우리들을 포위하고 있다. 녀석들은 육식동물로 추정된다. 검정개미도 불개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검정개미는 불개미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서로의 영역이 분명한가 보다. 검정개미들은 군체를 이루어 살고 있지만 이동을 할 때 보면 보통 혼자 다니고 있다. 무리를 지어 줄을 서지도 않는다. 죽은 벌레나 동물들의 시체에도 잘 매달리지 않는다. 하지만 불개미들은 다르다. 이른 아침에 벌판의 농로를 지나다 보면 많은 생물들이 죽어 있다.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지렁이가 제일 많다. 말라 죽어 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어 꿈틀거리는 지렁이도 있다. 그 모든 지렁이에 불개미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몇 마리가 될지 어림잡을 수도 없다. 붉은 색이 도는 갈색 불개미들이 풀섶에서 종대를 지어 지렁이 사체로 진격하고 있다. 먹이를 품고 되돌아가는 녀석들도 있다. 먹이를 잘라 여러 마리가 함께 싣고 가는 것도 보인다. 잘은 모르지만 대개는 그 자리에서 먹이를 배에 채우고 돌아가는 것 같다. 애벌레에게는 배에 가득 채운 먹이를 토해내어 먹일 것이다. 지렁이 사체는 점점 줄어들어 흔적도 없어진다. 지렁이뿐만 아니다. 버려진 사체로는 달팽이와 개구리도 있고 뱀도 있다. 참게도 있고 심지어는 새들도 있다. 참매가 먹다 남긴 비둘기 사체 또는 족제비에게 당한 이름 모를 새의 새끼들까지 보인다. 지렁이 한 마리에 붙어 있는 불개미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한마디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불개미들이 지렁이를 뒤덮고 있고 또 그 주위에도 온통 불개미다. 비가 오고 그 이튿날 농로에는 무수한 지렁이와 달팽이들이 널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개체마다 수많은 불개미들이 붙어 있다. 언제인가 불개미들이 산길에서 이동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길 위에 무슨 붉은 화약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줄을 짓고 있었다. 궁금해서 따라 가보니 백 미터도 넘도록 그치지 않았다. 그 대열은 숲으로 올라가서 더 이상 확인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살고 있는 것일까.
집 주위에 사는 불개미들은 운이 없다. 작년 봄부터 대문 옆 사철나무 밑에 개집을 만들어 놓고 진돗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두어 달 전부터 불개미들이 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개밥그릇을 보면 불개미들이 가득하다. 밥그릇에 남아 있는 유기물을 취하기 위해 어디서 몰려 왔는지 개미들이 그릇을 새까맣게 덮고 있다. 주위에도 온통 불개미들이다. 개가 먹다가 흘린 찌꺼기들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먹거리를 볼 수 있다니 불개미들에게는 횡재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하루에 두 번 사람이 나타나서 개미들의 세상을 엎어 놓는다. 개밥을 주기 위해 밥그릇을 들기가 겁이 날 정도로 달라붙은 불개미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입으로 불어보기도 하고 풀밭에 퉁퉁 털어보기도 하지만 불개미들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잘못 다루면 불개미들이 몸에 달라붙어 옷 속으로 침투한다. 온통 개미천지다. 물로 닦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개미들은 우물가에서 물에 씻겨 사라진다. 그들의 비명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혼란이 닥쳤을 것이다. 또 개밥그릇을 매번 물로 깨끗이 닦을 이유는 없다. 귀찮기도 하다. 개먹거리를 통째로 그냥 개밥그릇에 쏟아 붓는다. 불개미들 위로 밥과 국물이 쏟아진다. 개미들은 즉사했을 것이다. 진돗개는 그릇 바닥까지 핥아 먹으니 개미들은 진돗개의 밥통 속으로 들어가 소화가 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불개미들은 무리를 지어 집으로 침투하기도 한다. 집안에 개미떼를 들여놓을 수는 없다. 발견 즉시 살충제를 과감하게 뿌려 처치해야 한다. 죽은 사체들은 빗자루로 쓱쓱 쓸어낸다. 금년 들어서 내가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을 살해하였는지 모른다. 수만 마리도 넘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개미들에게 미안하거나 용서를 구할 필요성을 느껴본 적은 없다.
나는 착한 사람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착한 게 무엇이냐 물으면 얼른 대답은 못하겠다. 맹자孟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늘이 주신 성性 자체가 착하니 나도 그럴 것이다 생각을 하고 있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仁의 발단이라 하였다. 인은 유교에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실재적인 개념이요 또 존재다. 인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선험적 실재다.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예로 들며 설명하는 맹자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중용中庸의 첫머리도 우리를 깨닫게 한다. "하늘이 명한 것 이를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 이를 도라 하며, 도를 닦는 것 이를 교라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성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쉽게 답할 수가 없다. 동아시아 철학 특히 유학에서는 천년이 넘도록 이를 두고 말이 많다. 주자朱子는 간결하게 성은 리理다라고 주장한다. 성즉리性卽理다. 리理는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적 실체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데아와 비슷한 실재다. 물론 궁극적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이데아를 주장하는 플라톤에 비해서 주자의 리가 사람 냄새가 더 난다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육상산陸象山이나 왕양명王陽明이 주장하는 심즉리心卽理에 비해서는 딱딱할 만큼 교조적이다. 성性의 바탕이 되는 요소는 성誠이다. 주자는 성誠에 덧붙여 지경持敬도 강조한다. 성과 경은 성을 따르는 방법인 동시에 교敎의 실천방법이다. 동아시아의 형이상학은 언제나 인간의 모습을 지니는 실천적 도덕적 철학이다. 조선의 유학자 퇴계 이황 선생은 이를 몸소 실현한 대표적 인물이다. 성과 경을 통해 사람들은 지선至善을 찾게 된다. 지선은 인간이 궁구해야 할 최고의 선을 말한다. 유교에서 군자와 소인을 나누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성 자체에 무슨 차등을 둔 것은 아니다. 단지 도를 따르는 배움의 정도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를 뿐이다. 게으름이 덕지덕지 켜로 쌓인 나는 그 동안 닦아놓은 배움이 별로 없고, 또 성과 경에서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으니 군자나 성인의 덕을 이룰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나도 하늘이 주신 성을 타고났음이 틀림없고 본디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사람이 분명하다. 착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물으면 그것 또한 간단하지 않지만 쉽게 생각해서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선에 속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착한 사람인 내가 개미를 수없이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지만 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유별난 점이 있다. 언제인가부터 나는 들판에서 달리기를 할 때, 높은 산을 등산을 할 때, 마당을 거닐 때, 그리고 길거리를 걸을 때 주로 땅바닥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앞을 향해 가야 하겠지만 많은 경우 눈을 내리 깔고 땅을 쳐다본다. 땅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개미들의 세상이다. 오늘도 들판에는 무수한 검정개미들이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 발이 그들을 밟지 않도록 나는 가급적 조심을 하며 달리기를 하였다. 얼마나 되는 개미들이 생명을 건졌을까. 참으로 심성이 착하다. 비가 온 날이면 나는 길가에 나온 달팽이를 주워 풀섶으로 던진다. 지금까지 백 마리 아니 그 이상 되는 달팽이가 나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그러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다. 사자나 호랑이들은 착한 짐승들이 아니다. 왜가리나 백로들도 착한 동물이 아니다. 그들은 태생이 남을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못된 팔자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도 이렇듯 사람들처럼 최고의 선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것일까. 누가 또는 무엇이 그들이 악하다고 규정하는 것일까. 원추리를 살리기 위해 나는 진딧물과 개미들을 죽인다. 선택적이다. 집안으로 들어온 모기와 파리는 필살이다. 만 년 전부터 아니 그 전부터 개와 닭, 양과 염소, 돼지와 소는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면서도 결국 몸을 바쳐 죽어야 했다. 사람이 동물과 달라 사람이 사람인 이유가 따로 있다고 하지만 착하다는 어휘는 정녕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또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하니 따질 일은 아니지만 나는 개미 한 마리만 놓고도 머리가 혼란스럽다.
내일에도 나는 개밥그릇에 달라붙어 있는 개미들을 죽일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에 얼마나 많은 미물들이 깔려 죽을 지는 나도 아는 바가 없다. 그저 고양이같이 커다란 동물이 치어죽지나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도 개미들은 사람보다 오래 살 것이라고 믿는다. 지구를 지배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개미들일지도 모른다. 일사불란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개미들이 인간들을 의식하며 멸종되기에는 그들의 개체가 너무 많다. 그들의 진화도 눈부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니면 다른 행성에서 사는 고도로 진화된 개미들이 지구에 나타나 지구의 인간들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아마 착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동물일 것이다.
오늘 올리는 음악은 Raga Todi다. 아침에 듣는 라가다. Todi에는 광범위할 정도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올리는 라가 토디가 무슨 토디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라가의 독특한 음계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데 음악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여 어쩔 수가 없다. 자세한 설명을 붙여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안 된다. 양해를 바란다.
참고로 악기 비나의 사진을 싣는다. 비나는 남인도의 대표적 악기다. 그 연원은 수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현재는 무수한 종류의 비나가 있어 일일이 열거하기가 곤란하며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그 특징을 구별하기가 힘들다. 아래 사진은 비나의 일종인 Vichitra Veena로 특이하게도 fret(괘)가 없다. 이 악기는 20세기 초 Abdul Aziz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창안하였다 한다. 두 번째 사진에 보는 것처럼 대부분의 비나는 괘가 있다. 괘가 없는 탄주 현악기로는 중국의 고금이 대표적이다.
악기 Vichitra Veena
악기 Veena의 구조
Ragamala - Ragini Todi
*** Ragamala 그림에 대하여
인도의 전통 회화에 대해서 아는 바가 극히 적다. 인도음악을 수집하여 블로그에 올리면서 인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음악과 더불어 그와 관련된 회화가 발전되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음악이 있으면 그 음악에 대비되는 그림들이 항시 그려져 왔던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다. 인터넷을 찾아 라가 회화에 대한 설명을 옮긴다.
Ragmala painting, is based on the Indian system of Ragas or musical modes. Each painting is associated with a specific melodic movement and has the same effect on the viewer as the Raga when sung, has on the listener. Ragmala painting is a tradition exclusive to India and has given to India art some of its greatest masterpieces.
Ragamala Paintings are a series of illustrative paintings from medieval! India based on Ragamala or the 'Garland of Ragas', depicting various Indian musical nodes, Ragas. It stands as a classical example of amalgamation of art, poetry and classical music in medieval! India
Ragamala paintings were created in most schools of India painting, starting in the 16th and 17th century and are today named accordingly, as Mughal Ragamala, Rajasthan or Rajput Ragamala, Pahari Ragamala and Deccan Ragamala.
In these painting each raga is personified by a colour, mood, a verse describing a story of a hero and heroine (nayaka and nayika), it also elucidates the season and the time of day and night in which a particular raga is to be sung; and finally most paintings also demarcate the specific Hindu deities attached with the raga, like Bhairava or Bhairavi to Shiva, Sri to Devi etc. The paintings depict not just the Ragas, but also their wives, (raginis), their numerous sons (ragaputra) and daughters (ragaputri).
Six principal ragas present in the Ragamala are Bhairava, Dipika, Sri, Malkaunsa, Megha and Hindola and these are meant to be sung during the six seasons of the year; summer, monsoon, autumn, early winter, winter and spring.
History: Sangeeta Ratnakara, is an important treatise of the 12th century A.D. on the classification of Indian Ragas, which first time mentions the presiding deity of each raga.
14th century onwards, they were described in short verses in Sanskrit, for |Dhyana, 'contemplation', and later depicted in a series of paintings, called the Ragamala paintings.
Some of the best available works of Ragamala is from 16th and 17th century, where it flourished under royal patronage, though by 19th century, it gradually faded.
개미는 개미다. 개미는 지금도 개미다. 전에도 개미고 앞으로도 개미다. 일억 년도 훨씬 넘는 태고시절에 말벌과 같은 할아버지를 조상으로 하여 지금껏 진화를 해왔다는데, 사실일까 한번 정도 생각할 뿐, 개미는 개미다. 말벌과 개미들의 몸체가 비슷하게 생기고 또 숫개미가 봄이면 말벌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면 무슨 상관관계가 있음직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자들의 지식에 불과하다. '개미는 개미다'라고 단언하면서도 무엇을 개미라고 부르는 지 그 모습을 정확하게 기술하라고 하면 실제로 아는 바가 크게 없다. 개미가 무슨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개미한테 특정한 냄새가 나지도 않는다. 개미들의 페르몬은 사람에게 능력 밖이다. 장님이라면 정말 개미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냥 두 음절로 개미라고 말하기에는 개미들이 억울해 할 것이다. 눈이 달린 사람에게 땅위에서 기어 다니는 무수한 벌레가 있음이 눈으로 보이고, 또 비슷한 공통점을 지닌 어떤 곤충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이름을 새로 지어 부른다. 그게 개미다. 곤충이라는 이름도 어떤 개체 하나를 두고 하는 실체적인 이름이 아니라 그저 다리가 여섯 개 달린 벌레들을 인간 기준으로 총칭해서 부르는 개념적 단어다. 개미는 곤충이요. 곤충 중에서 우리는 개미라는 미물을 하나 정해놓았을 뿐이다.
개미는 분명히 곤충으로 더듬이도 있고 다리도 여섯이다. 머리와 가슴 그리고 배로 구성되어 있지만 가슴보다는 머리와 배가 유난스레 크다. 개미는 종류도 많아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종류가 12,000에 14,000종에 이른다고 한다.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많은 종류의 개미에 대해서 어떤 특징이 서로 다른 종의 기준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놈들이 여럿 있어서 이를 구별하기 위해 열심히 이름을 짓지만 별 소용이 없다. 한반도에도 120종이 넘는 개미들이 살고 있다는데 아직도 확실하게 분류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름들이 꽤나 보인다. 침개미, 납작자루개미, 짱구개미, 뿔개미, 곰개미, 홍가슴개미, 빨간불개미 등 무수한 이름들이 열거되고 있다. 나는 모른다. 처음 듣는 이름들이다. 사진이나 어떠한 이미지도 본 적이 없다. 이 이름들이 지니는 개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름도 몰라주는 개미들이 불쌍할지 모르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개미이름을 놓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개미들이 웃음을 터뜨릴 일이다. 개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개미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전혀 심상치 않음을 말하고 싶어 괜스레 개미에게 딴죽을 건다. 개미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딱 부러지게 어떤 개미라고 지칭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이 글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걱정스러운 것이다. 텍스트는 그 의미에 있어 한계가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개미이야기를 하고자 하니 그 모호함이 더욱 실감이 될 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과 산책을 하는 숲길, 그리고 달리기를 하는 벌판에는 개미들이 많다. 종류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검은 빛깔의 몸매를 지닌 개미로 길이가 일 센티 정도 된다. 검정개미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다른 하나는 크기가 2밀리 정도 될까 말까 하는 작은 녀석들이다. 짙은 갈색에 붉은 기운이 감돈다. 통상 불개미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자세히 관찰을 해보면 서로 다른 수많은 개미 종류들이 분류되겠지만 그렇다고 개미가 유별나게 특정한 어떤 개미가 되는 것도 아니어서 오늘의 등장개미는 그저 검정개미와 불개미뿐이다. 집마당에는 주로 검정개미가 산다. 잔디밭과 밭두렁에는 검정개미들이 지배하고 있다. 틈틈이 불개미도 보이지만 마당을 점령하고 있는 녀석들은 검정개미들이다.
검정개미들은 진딧물을 좋아한다. 각시원추리가 노란꽃을 피울 때면 하얀 진딧물이 대궁을 덮는다. 꽃들이 불쌍하다. 꽃을 감상해야 하는데 진딧물들은 불청객이다. 진딧물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검정개미들이 들락거린다. 대궁을 타고 새까맣게 올라와 진딧물의 꽁무니가 뿜어내는 진물을 탐식한다. 우리는 선택을 한다. 같은 생명이지만 원추리는 아름답고 진딧물은 추하다. 해충이다. 그냥 두면 원추리꽃이 잘 피어나지 않는다. 농약분무기나 아니면 모기약 살충제를 뿌린다. 진딧물들이 뚝뚝 떨어진다. 전멸이다. 개미들은 놀라서 도망을 간다. 살충제를 직격탄으로 맞은 개미들은 어리둥절하다가 죽어가기도 한다. 날벼락이 따로 없다. 개미들의 사전에는 살충제라는 어휘가 없다. 마당에 앉아 있거나 풀을 뽑기 위해 일을 하고 있으면 개미들은 발을 타고 올라온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다. 개미집을 건드렸거나 이동하고 있는 개미들을 방해하였음이 틀림없다. 몇 놈은 벌써 발에 밟혀 죽었을 것이다. 놈들은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한다. 검정개미들은 살갗을 날카롭게 물어뜯는다. 따끔하다. 개미산이라고 불리는 독이다. 크게 아프거나 부어오르지는 않지만 개미들이 연거푸 물면 언짢게 느껴진다. 사정없이 손바닥으로 후려쳐 죽이거나 툭툭 건드려 떨어지게 한다. 자유의지의 인간은 언제나 거침이 없다.
개미들은 이 땅에서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지구의 생물 중에서 개체가 제일 많아 약 사분지 일이 개미라 한다. 인간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마당에 살고 있는 개미들만 해도 아마 수만 마리 아니 수십만 마리도 넘을 것 같다. 개미가 땅주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미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고 도망 갈 녀석들도 아니다. 개미와의 공존은 숙명적이다. 하지만 우연히 부지불식간에 개미들은 나에게 죽음을 당한다.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은 전혀 아니다. 개미를 죽일 목적으로 무슨 짓을 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조그만 상처만 입어도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 내가 나를 통하여 배우듯이 내가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기에 나는 어지간해서는 동물들을 죽이지 않는다. 미물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환경주의자도 아니고 살생을 금하는 불교신자도 아니다. 개미는 곤충이고 미물이다.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그렇다. 보잘 것이 없는 생물이다. 개체수도 많다. 그 중에서 한두 마리야 보이지도 않는다. 개미들이 주민등록에 올려 있는 것도 아니다. 수십만 마리 중에서 수십 마리 정도가 원추리 대궁을 올라가다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신문에 날 일도 아니다.
개미들은 자기들에게 닥칠 위험을 미리 안다. 지진이 나기 전에 동물들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그러는데 지진까지 들먹일 이유가 없다. 날이 흐려 비가 올 지 않을 지는 마당에 가보면 안다. 비가 온다면 그 많던 개미들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날이 흐려도 개미들이 기어 다니면 그날 비가 오지 않는다. 개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곳에 구멍을 파고 집을 파 올린다. 모래알들을 하나하나 물어 구멍 밖에 동그랗게 둔덕을 쌓아 올린다. 빗물이 넘쳐드는 것을 방지하려 함이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오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걱정을 한다. 그 많은 개미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며칠 전에 잔디를 깎았다. 장마철에 비가 계속 와서 그냥 두었더니 잔디가 볼 상 사납게 키가 웃자랐다. 전동기에 달린 칼날이 매섭게 돌아갈 때마다 잔디들은 깎여 나간다. 잔디가 아플 것이다. 잔디만이 아니다. 풀숲에 숨어 집을 짓고 살던 개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지진이 일어난 것보다 더 큰 재난이다. 검정개미들은 나무 둥지 밑에 집을 짓기도 하지만 마당 여기 저기 모래집을 수없이 올려놓았다. 봉실봉실 개미집들이 솟아 있다. 개미들은 부지런히 모래알을 물어 집을 짓고 있기도 하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잔디깎기가 지나가면 개미집들은 박살이 난다. 공든 탑이 무너진다. 집만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목숨도 위태롭다. 발에 밟혀 죽기도 하겠지만 윙윙 돌아가는 칼날에 무수한 몸뚱이가 잘려 나간다. 요행히 살아난 놈이 깎인 풀더미에 숨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살아난다는 보장이 없다. 사람들은 풀더미를 모아 멀리 갖다 버린다. 퇴비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 속에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미들은 전진하며 페르몬을 남겨두어 냄새길을 만든다 했는데 사람이 강제로 이동을 시켰으니 냄새를 뿌릴 겨를도 없다. 냄새를 맡으며 집으로 귀환해야 하는데 이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잔디를 깎고 있을 때 개미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생각할 이유도 없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볕만 걱정이 되어 밀짚모자를 쓰고 차가운 음료를 찾는다. 개미들이 자기들끼리는 무슨 이름을 붙여 서로를 부르고 구분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뭉뚱그려 모든 개미를 개미라고 부른다. 모호하고 개념적이다. 죽음도 그렇다. 실재적인 사실이 아니라 생각으로만 추정되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개미가 죽어간다고 해서 무슨 처절한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 텍스트 상으로만 개미를 불쌍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개미들에게 인간들의 행동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하늘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있어도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그들은 알 수가 없다. 비오는 것에 대비하여 여러 방책을 수립하는 개미들도 잔디깎기 기계는 우주의 행성폭발처럼 날벼락이다.
불개미는 검정개미보다 그 개체수가 훨씬 많다. 사람들은 눈여겨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겠지만 실제로 불개미들은 우리들을 포위하고 있다. 녀석들은 육식동물로 추정된다. 검정개미도 불개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검정개미는 불개미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서로의 영역이 분명한가 보다. 검정개미들은 군체를 이루어 살고 있지만 이동을 할 때 보면 보통 혼자 다니고 있다. 무리를 지어 줄을 서지도 않는다. 죽은 벌레나 동물들의 시체에도 잘 매달리지 않는다. 하지만 불개미들은 다르다. 이른 아침에 벌판의 농로를 지나다 보면 많은 생물들이 죽어 있다.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지렁이가 제일 많다. 말라 죽어 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어 꿈틀거리는 지렁이도 있다. 그 모든 지렁이에 불개미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몇 마리가 될지 어림잡을 수도 없다. 붉은 색이 도는 갈색 불개미들이 풀섶에서 종대를 지어 지렁이 사체로 진격하고 있다. 먹이를 품고 되돌아가는 녀석들도 있다. 먹이를 잘라 여러 마리가 함께 싣고 가는 것도 보인다. 잘은 모르지만 대개는 그 자리에서 먹이를 배에 채우고 돌아가는 것 같다. 애벌레에게는 배에 가득 채운 먹이를 토해내어 먹일 것이다. 지렁이 사체는 점점 줄어들어 흔적도 없어진다. 지렁이뿐만 아니다. 버려진 사체로는 달팽이와 개구리도 있고 뱀도 있다. 참게도 있고 심지어는 새들도 있다. 참매가 먹다 남긴 비둘기 사체 또는 족제비에게 당한 이름 모를 새의 새끼들까지 보인다. 지렁이 한 마리에 붙어 있는 불개미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한마디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불개미들이 지렁이를 뒤덮고 있고 또 그 주위에도 온통 불개미다. 비가 오고 그 이튿날 농로에는 무수한 지렁이와 달팽이들이 널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개체마다 수많은 불개미들이 붙어 있다. 언제인가 불개미들이 산길에서 이동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길 위에 무슨 붉은 화약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줄을 짓고 있었다. 궁금해서 따라 가보니 백 미터도 넘도록 그치지 않았다. 그 대열은 숲으로 올라가서 더 이상 확인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살고 있는 것일까.
집 주위에 사는 불개미들은 운이 없다. 작년 봄부터 대문 옆 사철나무 밑에 개집을 만들어 놓고 진돗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두어 달 전부터 불개미들이 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개밥그릇을 보면 불개미들이 가득하다. 밥그릇에 남아 있는 유기물을 취하기 위해 어디서 몰려 왔는지 개미들이 그릇을 새까맣게 덮고 있다. 주위에도 온통 불개미들이다. 개가 먹다가 흘린 찌꺼기들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먹거리를 볼 수 있다니 불개미들에게는 횡재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하루에 두 번 사람이 나타나서 개미들의 세상을 엎어 놓는다. 개밥을 주기 위해 밥그릇을 들기가 겁이 날 정도로 달라붙은 불개미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입으로 불어보기도 하고 풀밭에 퉁퉁 털어보기도 하지만 불개미들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잘못 다루면 불개미들이 몸에 달라붙어 옷 속으로 침투한다. 온통 개미천지다. 물로 닦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개미들은 우물가에서 물에 씻겨 사라진다. 그들의 비명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혼란이 닥쳤을 것이다. 또 개밥그릇을 매번 물로 깨끗이 닦을 이유는 없다. 귀찮기도 하다. 개먹거리를 통째로 그냥 개밥그릇에 쏟아 붓는다. 불개미들 위로 밥과 국물이 쏟아진다. 개미들은 즉사했을 것이다. 진돗개는 그릇 바닥까지 핥아 먹으니 개미들은 진돗개의 밥통 속으로 들어가 소화가 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불개미들은 무리를 지어 집으로 침투하기도 한다. 집안에 개미떼를 들여놓을 수는 없다. 발견 즉시 살충제를 과감하게 뿌려 처치해야 한다. 죽은 사체들은 빗자루로 쓱쓱 쓸어낸다. 금년 들어서 내가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을 살해하였는지 모른다. 수만 마리도 넘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개미들에게 미안하거나 용서를 구할 필요성을 느껴본 적은 없다.
나는 착한 사람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착한 게 무엇이냐 물으면 얼른 대답은 못하겠다. 맹자孟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늘이 주신 성性 자체가 착하니 나도 그럴 것이다 생각을 하고 있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仁의 발단이라 하였다. 인은 유교에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실재적인 개념이요 또 존재다. 인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선험적 실재다.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예로 들며 설명하는 맹자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중용中庸의 첫머리도 우리를 깨닫게 한다. "하늘이 명한 것 이를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 이를 도라 하며, 도를 닦는 것 이를 교라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성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쉽게 답할 수가 없다. 동아시아 철학 특히 유학에서는 천년이 넘도록 이를 두고 말이 많다. 주자朱子는 간결하게 성은 리理다라고 주장한다. 성즉리性卽理다. 리理는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적 실체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데아와 비슷한 실재다. 물론 궁극적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이데아를 주장하는 플라톤에 비해서 주자의 리가 사람 냄새가 더 난다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육상산陸象山이나 왕양명王陽明이 주장하는 심즉리心卽理에 비해서는 딱딱할 만큼 교조적이다. 성性의 바탕이 되는 요소는 성誠이다. 주자는 성誠에 덧붙여 지경持敬도 강조한다. 성과 경은 성을 따르는 방법인 동시에 교敎의 실천방법이다. 동아시아의 형이상학은 언제나 인간의 모습을 지니는 실천적 도덕적 철학이다. 조선의 유학자 퇴계 이황 선생은 이를 몸소 실현한 대표적 인물이다. 성과 경을 통해 사람들은 지선至善을 찾게 된다. 지선은 인간이 궁구해야 할 최고의 선을 말한다. 유교에서 군자와 소인을 나누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성 자체에 무슨 차등을 둔 것은 아니다. 단지 도를 따르는 배움의 정도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를 뿐이다. 게으름이 덕지덕지 켜로 쌓인 나는 그 동안 닦아놓은 배움이 별로 없고, 또 성과 경에서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으니 군자나 성인의 덕을 이룰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나도 하늘이 주신 성을 타고났음이 틀림없고 본디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사람이 분명하다. 착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물으면 그것 또한 간단하지 않지만 쉽게 생각해서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선에 속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착한 사람인 내가 개미를 수없이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지만 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유별난 점이 있다. 언제인가부터 나는 들판에서 달리기를 할 때, 높은 산을 등산을 할 때, 마당을 거닐 때, 그리고 길거리를 걸을 때 주로 땅바닥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앞을 향해 가야 하겠지만 많은 경우 눈을 내리 깔고 땅을 쳐다본다. 땅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개미들의 세상이다. 오늘도 들판에는 무수한 검정개미들이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 발이 그들을 밟지 않도록 나는 가급적 조심을 하며 달리기를 하였다. 얼마나 되는 개미들이 생명을 건졌을까. 참으로 심성이 착하다. 비가 온 날이면 나는 길가에 나온 달팽이를 주워 풀섶으로 던진다. 지금까지 백 마리 아니 그 이상 되는 달팽이가 나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그러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다. 사자나 호랑이들은 착한 짐승들이 아니다. 왜가리나 백로들도 착한 동물이 아니다. 그들은 태생이 남을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못된 팔자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도 이렇듯 사람들처럼 최고의 선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것일까. 누가 또는 무엇이 그들이 악하다고 규정하는 것일까. 원추리를 살리기 위해 나는 진딧물과 개미들을 죽인다. 선택적이다. 집안으로 들어온 모기와 파리는 필살이다. 만 년 전부터 아니 그 전부터 개와 닭, 양과 염소, 돼지와 소는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면서도 결국 몸을 바쳐 죽어야 했다. 사람이 동물과 달라 사람이 사람인 이유가 따로 있다고 하지만 착하다는 어휘는 정녕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또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하니 따질 일은 아니지만 나는 개미 한 마리만 놓고도 머리가 혼란스럽다.
내일에도 나는 개밥그릇에 달라붙어 있는 개미들을 죽일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에 얼마나 많은 미물들이 깔려 죽을 지는 나도 아는 바가 없다. 그저 고양이같이 커다란 동물이 치어죽지나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도 개미들은 사람보다 오래 살 것이라고 믿는다. 지구를 지배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개미들일지도 모른다. 일사불란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개미들이 인간들을 의식하며 멸종되기에는 그들의 개체가 너무 많다. 그들의 진화도 눈부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니면 다른 행성에서 사는 고도로 진화된 개미들이 지구에 나타나 지구의 인간들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아마 착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동물일 것이다.
오늘 올리는 음악은 Raga Todi다. 아침에 듣는 라가다. Todi에는 광범위할 정도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올리는 라가 토디가 무슨 토디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라가의 독특한 음계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데 음악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여 어쩔 수가 없다. 자세한 설명을 붙여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안 된다. 양해를 바란다.
참고로 악기 비나의 사진을 싣는다. 비나는 남인도의 대표적 악기다. 그 연원은 수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현재는 무수한 종류의 비나가 있어 일일이 열거하기가 곤란하며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그 특징을 구별하기가 힘들다. 아래 사진은 비나의 일종인 Vichitra Veena로 특이하게도 fret(괘)가 없다. 이 악기는 20세기 초 Abdul Aziz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창안하였다 한다. 두 번째 사진에 보는 것처럼 대부분의 비나는 괘가 있다. 괘가 없는 탄주 현악기로는 중국의 고금이 대표적이다.
악기 Vichitra Veena
악기 Veena의 구조
Ragamala - Ragini Todi
*** Ragamala 그림에 대하여
인도의 전통 회화에 대해서 아는 바가 극히 적다. 인도음악을 수집하여 블로그에 올리면서 인도에서는 오래 전부터 음악과 더불어 그와 관련된 회화가 발전되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음악이 있으면 그 음악에 대비되는 그림들이 항시 그려져 왔던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다. 인터넷을 찾아 라가 회화에 대한 설명을 옮긴다.
Ragmala painting, is based on the Indian system of Ragas or musical modes. Each painting is associated with a specific melodic movement and has the same effect on the viewer as the Raga when sung, has on the listener. Ragmala painting is a tradition exclusive to India and has given to India art some of its greatest masterpieces.
Ragamala Paintings are a series of illustrative paintings from medieval! India based on Ragamala or the 'Garland of Ragas', depicting various Indian musical nodes, Ragas. It stands as a classical example of amalgamation of art, poetry and classical music in medieval! India
Ragamala paintings were created in most schools of India painting, starting in the 16th and 17th century and are today named accordingly, as Mughal Ragamala, Rajasthan or Rajput Ragamala, Pahari Ragamala and Deccan Ragamala.
In these painting each raga is personified by a colour, mood, a verse describing a story of a hero and heroine (nayaka and nayika), it also elucidates the season and the time of day and night in which a particular raga is to be sung; and finally most paintings also demarcate the specific Hindu deities attached with the raga, like Bhairava or Bhairavi to Shiva, Sri to Devi etc. The paintings depict not just the Ragas, but also their wives, (raginis), their numerous sons (ragaputra) and daughters (ragaputri).
Six principal ragas present in the Ragamala are Bhairava, Dipika, Sri, Malkaunsa, Megha and Hindola and these are meant to be sung during the six seasons of the year; summer, monsoon, autumn, early winter, winter and spring.
History: Sangeeta Ratnakara, is an important treatise of the 12th century A.D. on the classification of Indian Ragas, which first time mentions the presiding deity of each raga.
14th century onwards, they were described in short verses in Sanskrit, for |Dhyana, 'contemplation', and later depicted in a series of paintings, called the Ragamala paintings.
Some of the best available works of Ragamala is from 16th and 17th century, where it flourished under royal patronage, though by 19th century, it gradually fa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