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왕들이 나란히 출발선에서 아치를 수놓았다.신·구 홈런왕 이승엽과 장종훈이 5일 대구 개막전에서 나란히 시즌 첫 홈런을 날린 것.1회 이승엽이 좌중간 스탠드로 역전 투런 홈런을 꽂자 이에 질세라 장종훈은 4회 좌월 동점 솔로 아치로 화답했다.이승엽의 홈런은 올시즌 전체 1호였고 장종훈의 홈런은 400홈런을 향한 자신의 첫걸음,통산 301호.모두 시작이었다.
올시즌 프로야구는 사상 처음으로 40홈런과 50홈런 시대를 열었던 신·구 홈런왕에 의해 이렇게 막이 올랐다.
■고졸 신화를 만들어낸 영웅들
둘은 교복을 벗자마자 프로에 뛰어들었다.장종훈은 87년 세광고를,이승엽은 95년 경북고를 졸업한 뒤 ‘다이아몬드 정글’로 직행했다.하지만 출발은 너무도 달랐다.팀과 자신 모두 무명이었던 장종훈은 600만원을 받고 연습생으로 시작했고,세계청소년대회 베스트9의 이승엽은 당시 고졸 최고대우(1억3,200만원)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환경도 그랬다.부친이 건축업을 해 이승엽은 비교적 유복했지만 장종훈은 그렇지 못했다.
■내성과 외향의 캐릭터
신세대 이승엽이 도시형이라면 장종훈은 시쳇말로 촌놈인 시골형이다.3년전 장종훈이 고참이 됐을 때 구단은 팀의 주장을 맡으라고 제안했다.하지만 장종훈은 “내가 어떻게 그걸 맡느냐”고 손사래를 쳐 구단관계자를 실망시켰다.올해는 선뜻 주장을 맡았지만.
황병일 한화 타격코치는 장종훈이 올시즌 틀림없이 좋은 성적을 올릴 것이라고 확신한다.황코치는 3년간 7억원의 장기계약이 무엇보다도 그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승엽은 타고난 타자다.
그래서 투수로 들어오고도 타자로 성공했다.신인 첫해 플로리다 전지훈련에서 이승엽의 보직은 배팅볼을 던지며 프로의 맛을 보는 견습투수였다.하지만 장난삼아 배트를 잡아본 야간 스윙에서 눈에 번쩍 뜨이는 자질이 발견됐고 당시 박승호 타격코치의 1주일간에 걸친 끈질긴 설득 끝에 타자로 전향했다.이승엽이 해마다 고질적인 허리부상으로 스프링캠프에 지각 참가하고도 뛰어난 성적을 올리는 것도 그의 천재성을 에누리없이 입증한다.
■지독한 연습벌레
장종훈이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기 자신,스스로 흘리는 땀뿐이었다.빙그레시절 타격코치였던 강병철 SK감독이 밝힌 일화.삼진을 먹고 들어온 장종훈은 다음경기부터는 자기를 빼달라고 부탁했다.강코치는 장종훈을 한 번 쥐어박고 “그런 정신상태로 무슨 야구를 하느냐”며 호되게 꾸짖었다.그날 새벽녘 숙소에 돌아온 강코치는 불이 환히 켜진 방 하나를 발견했다.그때까지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는 장종훈의 방이었다.장종훈이 92년 41홈런을 정점으로 내리막을 걸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지적도 과거에 비해 줄어든 훈련량과 몸쪽 공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공을 두려워할 때 타자는 야성을 잃어버린다.천재가 아닌 장종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팔이냐 다리냐
장종훈이 94년 팔꿈치 수술 후 스윙폼을 수정했듯이 이쩔굘?올시즌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다른 점이 있다면 이승엽은 팔이 아닌 다리쪽이라는 것.팔꿈치 수술을 받은 뒤 장종훈은 얼굴쪽에 있던,배트를 잡는 팔의 위치(커?포지션)을 어깨쪽으로 옮겼다.전성기에 유격수 키를 넘어가는 홈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총알 같은 홈런타구를 날렸던 힘이 어쩔 수 없이 저하됐기 때문.
지난 겨울 몸쪽 패스트볼과 변화구에 대한 약점을 치유하기 위해 왼쪽 다리를 들어올리는 외다리 타법을 포기했던 이승엽은 다시 제 폼으로 돌아갔다.그리고 개막전에서 데뷔 후 처음으로 첫경기 홈런을 날렸다.과거에 비해 아무래도 파워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장종훈과 문제점을 알고도 옛날폼으로 돌아간 이승엽이 각자의 현안들을 어떻게 극복해낼지도 흥미로울 뿐이다.
■쫓고 쫓기는 고졸 신화
장종훈이 92년 41홈런을 쳤을 때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앞으로 10년 내 장종훈이 프로야구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울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하지만 10년이 흐른 지금 장종훈의 기록은 다시 이승엽이란 걸출한 고졸 좌타자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연차별 홈런페이스에서 장종훈을 모두 앞지르고 있는 이승엽에 의해 또하나의 고졸 신화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