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정헌대부 형조판서(諱 鍈) (추판공)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
1733(영조9 계축)년 6월21일 출생, 조선 후기의문신. 본관 은진(恩津)이요. 자 화숙(和叔). 호는 추판(秋判). 10대 조부 좌참찬(左叅贊) 기수(麒壽)이시고. 7대조부 예조참판(禮曹叅判) 원종훈 선무공신 좌찬성(左贊成)증직 석경(錫慶(範))이시고, 생부 선릉참봉(宣陵叅奉) 양필(良弼)이시고, 양부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광필(匡弼)의 아들이다.
외 조부 순흥안씨 안홍만(安弘萬)이시며, 처부 전주이씨 참봉(叅奉)이한성(李漢誠)의 따님으로, 1731(영조7 신해)년 2월 9일 출생 하시여, 정부인이시며 1802(순조 2 임술)년 8월 23일 수 72세로 하세 하시니 有 1남 2녀를 두셨다.
1753(영조 29 계유)년 10월 17일 당년 21세에 정시 2(殿試)문과(文科).병과(丙科) 9위로 급제하여 지평(持平)으로 출사 하셨고. 1754(영조 30 갑술)년 2월 14일 전 가주서(假注書)영(鍈)에게 황조에서 내린 귀한 옥등과 주준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는데 그 아버지 양필(良弼)이 가지고 들어오니, 임금이 등 준명(燈 樽銘)을 친히 짓고 이어서 전조(銓曹)로 하여금 양필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대개(大蓋) 영(鍈)의 칠대조인 석범(錫範)이 수로(水路)로 세 번째 경사(京師)에 갔을 때에 마침 상원절(上元節)이었는데 숭정 황제(崇楨 皇帝)가 옥등(玉燈)과 주준(酒樽)을 내렸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중에 이 일을 말한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기이하게 여기고 가져다가 친히 보았다.
임금이 보고 특별히 여겨 부친을 선능 참봉을 제수하였다.
(왕조실록그대로) 1762(영조 38임오)년 1월 30일 세손의 가례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황단 (皇壇)에 친제(親祭)할 때에는 삼학사(三學士)의 자손 및 오충신(五忠 臣)의 자손으로 관직(官職)이 있는 자는 모두 배제(陪祭)하게하여 내가 황명(皇明)을 위하여, 충절(忠節)을 장려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주서(注書) 송영(宋鍈)을 특별히 승륙(陞六) 시켰는데. 그의 선 조가 황조(皇朝)에서 옥등(玉燈)과 보물을 받은 것 으로 인해서 였다. 1765(영조41 을유)년 6월 20일 사헌부지평(持平)으로 제수하였다. 10월 3일 사헌부 장령으로 이임하고, 1767(영조43정해)년 1월 3일 장령으로 이임되며. 3월19일 장령(掌令)으로 이임하고, 4월 24일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공(鍈)을 특체(特遞)하라고 명 하였으니 감역(監役)을 복구(復舊)할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월 26일 공(鍈)의 발계(發啓)가 이와 같았으니 제주의 표류 민을 불러 성명 과 노정을 묻고 무명 과 쌀을 내려주었다. 10월 17일 사헌부 장령으로 이임하고. 1769(영조 45 기축)년 11월 29일 장령으로 이임하며. 1770(영조 46 경인)년 3월 30일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으로 제수 하였다. 5월 21일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으로 삼았다. 11월 27일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이임하였다 1771(영조47 신묘)년 2월26일 세자(世子)시강원(侍講院)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4월 14일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제수하였다, 9월25일 사간으로, 11월 20일 집의로 왕자나 대군 등의 차자 외 에는 차진 할 수 없게 하였다. 1772(영조48 임진)년 3월 5일 사헌부(司府) 집의(執義)로 삼았다.
7월 4일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로 이임하고, 7월12일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로삼았다.
임금에게 숙배(肅拜)하지 않았다는 일로 장기현(長鬐縣)에 투비(投鼻)되었다.
왕법(王法)을 흔쾌하게 바로 잡을것을 청하고, 또 이인(李姻)에 대해 전형(典刑)을 밝게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임금님이 여선형(呂善亨)의 율(律)이 가볍다 하여 특별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하는 전형을 베풀게 하고. 환궁(還宮)하게 하여 다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 하였다.
1775(영조51 을미)년 11월 17일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에 제수 되었으며, 11월 17일 대사간 영이 패초(牌招)를 어긴 이유로 장기현에 귀양을, 1776(영조52 병신)년 五월 六일 낙안군수(樂安郡守)로 삼았다.(구전이다) 12월 29일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삼았다가, 1778(정조2무술)년 6월 15일 양양 부사(襄陽府使) 송영(宋鍈)은 세세한 업무는 상세히 살피지만 대체에 부족한 것이 애석하고, 아우 전(銓)은 좌우참찬(左右叅贊)을 역임 하였으며, 1780(정조4 경자)년 8월3일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추도기(秋到記) 참고관(參考官)를 행하였다.
9월 8일 승지 이익선. 이형원을 체차하고 공을 임명하였다. 10월11일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가. 12월 2일 승지로 삼는다. 하였다. 12월 8일 승지을 체차하였다. 12월 20일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삼았다.
1782(정조 6 임인)년 3월 21일 대사간으로 제수하였다. 6월 22일 갑산부사(甲山府使)로 삼았다. 1784(정조8갑진) 8월27일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별시사(別試射)시관을 행하였다 9월18일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제수하였다. 1785(정조9을사)년 6월 29일 대사간으로 삼았다. 1786(정조 10 병오)년 1월 25일 대사간으로 이임 되고, 8월14일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으로 제수한다.
1787(정조 11 정미)년 12월22일 이조참의(吏曹叅議)로 삼았다. 1789(정조 13 기유)년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으로 삼는다. 1793(정조 17 계축)년 11월 28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있을때 관아에 늦게 이르렀다 하여 파직 당하 였다.
1795(정조 19 을묘)년 3월 21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임하였다. 1796(정조 20 병진)년 3월6일 의금부(義禁府) 당상으로 있다가“법관으로서 법을 잘 지키 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같은해 4월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주청으로 풀려났다.
1808(순조8무진)년 2월 25일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으로 이임 되었다. 1812(순조12 임신)년 3월 6일 정헌대부(正憲大夫) 형 조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문관대호군(大護軍)으로 추판공(秋判公)또 판서공(判書公)으로 불리셨으니 기로사(耆老社)문관 정2품 이상의 실직에 있던 70이상 노인을 우대하는 관청으로 기로사(耆老社)에 입사를하였다,
5월 28일(기해) 대호군(大護軍)송영(宋鍈) 80세 졸 이라고 이조실록에 기록되엿다.
“국왕견신“”(원문토달기) 예조좌랑한석윤 유제 우 졸 형조판서 송영지령 왈 역사 三조 흡주 일갑 묘 세 양정의 용옥입면 추선고편 우성권 도성 조화진무반원폐 호수 졸 관직 유래자 유구도불사 우회 미원확집 영묘을미이간장 불발 박성원계 영해재즉 시적 장기 불요 불수 동조 진상 루비민사 일시근약 추승이경주류부 생노 훈화 복이 완후자서 제질포홀영문 정조 영고 가탄루치 은언규연팔질 정력 불건부 성취 양인 염지선 수제서루(즉영수각루명)원장 추관(즉형판)환조 미기체철부단 강령 고종재 경해감조실 기구 박뢰우감 지 제고교리임백희 제진관지우승지 계제문 참찬공 전 제이생 문참판 엄기척하생 음 현감남이수 즉공지 제 오손빙부 조문치 전인질이문헌 납유성 사우엄 음 동추사 건즉공지친사 이음 현감흥운 송 탈시
(국왕(순조12)이 예조좌랑을 고인(宋 鍈)에게 치제(致祭) 제물과 제문을 보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 원본 화마(火魔)소실 하였다,
조선순조실록에 기록되어 내려온다.
遺 品 (사진으로 보실수 있음)
1753년자, 1812년홍패, 추판공년보전, 추판공유고전,
추판공친필경진 원 이조, 호조. 형 예조.병조, 추판공묘도, 현매리 휘양필 호패
출처 : 朝鮮王朝實錄五一수록, 司馬榜目. 淸選考1권 2권, 國朝榜目(규장각106). 增補文獻考. 銀臺先生案, 號譜. 한국고전종합. 한국역대인물 대백화사전.등등
참고 : 秋判公年譜. 秋判公親筆庚辰. 秋判公庚辰. 叅判公年譜. 科私錄.
宋氏珎藏全. 遺稿全. 魚雁帖.등등
가문에 맥을 이어갈 장남 상렴(祥濂)은 1819년 가정대부 (嘉靖大夫)이조참판(吏曹叅判)를 역임하였다
八代孫 송 용 인(宋容寅) 삼가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