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것 입니다....
-------------------------------------------------------
my own private idaho 에 관한
my own private story
리버 피닉스의 엄마를 찾는 길과 키애누 리브스의 아버
지에게로 돌아가는 길. 그 두갈래의 길. 이 영화는 그 두갈
래의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길. 옛날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메타로로 이용했던
것.
엄마찾기-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 데니 라방의 비틀
거리는 그림자는 아기의 뒤뚱한 걸음걸이와 겹쳐지고, 그
아기를 얼러주던 젊은 엄마, 그들, 아기와 엄마를 바라보던
데니 라방, 알렉스.
리버 피닉스가 기면 -발작을 일으켜 정신을 잃을 때면
나타나는, 황량한 들판과 구름이 마구 몰려가는 하늘, 바
람, 낡은 집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어머니. 영화 중간중
간마다 삽입되던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떼들의 빛나
는 비늘과 수면에 반짝이는 오후의 햇빛. 어떤 영화 평론
가는 [도망쳐 나왔던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 come
back home?) 미국 청소년들의 상황]이라는 표현을 썼지
만...... 리버 피닉스가 돌아가고 싶었던 곳이 가정이라고 생
각하는가? 歸巢本能-그런 본능이 정말로 있는지, 있다면
오직 '가정'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리버 피닉스는 (그리고 나는) 쉬고
싶어 한다는 것 뿐이다. 쉬고 싶다. 이제 스물살이 되고,
요람을 잃어버린 나는, 마음 놓고 쉬는 법을 거의 잊어 버
렸다. 잠을 잘 때조차도 나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악몽에
가위 눌린다. '가정'이란, 내게 있어서는, 또다른 '세상'일 뿐
이다. 20여년간 관계 맺었던 부모님. 나는 당신들의 어깨들
딛고 올라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는데, 그 때, 그 어깨위에서
나는 당신들을 배반할 지점을 보아 버렸다. '청무우밭인가'
했던 것은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김기림)이었고, 그 깊
이 모를 푸른 자유는 죽음과 등을 맞대고 있었다. 힘겹게
부모님이 만들어 놓은 토대위로 기어 올라간 순간, 나는
내 요람을 영원히 잃어 버렸다. 여태껏 내가 편안히 꿈꿀
수 있었던 그 공간은 허위로 가득찬, 먼지나고 숨막히는
박제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혼자 내던져짐. 리버 피닉스는
그 외로움과 긴장을 견딜 수 없을 때면 기면 발작을 일으
켜 갑작스럽게 깊은 잠을 빠진다. 아직 약한 그가 할 수
있는 대응은 그런 수동적 거부밖에 없 는 것이다. 잃어 버
린
'엄마'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어를 꿈꾸면서. 이것은
결핍의 상태이다. 리버 피닉스는(그리고 나는) 무엇을 잃어
버렸는지 알고 있지만 다시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
도 잘 알고 있다. '바다로간 나비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
어 公主처럼 지쳐 돌아오던가'(김기림) 아니면 아키루스가
되어 하늘 높이 날았다가 깃털을 이어 붙인 초가 녹으면
그대로 추락하는 것이다.-'추락하지 않고 바다건너 나갈 수
있도록 지금은 얌전히 네 날개를 만들라'라는 충고가 얼마
나 어처구니 없는지는, 이제 여러분도 알고 있다. 그것은
평생 낡은 깃털만 주워 모으며 둥지 주위만 맴돌라는 소리
라는 것은, 알고 있다. 더 이상 속지않아!-이 지점은 리버
피닉스의 첫 번째 결핍의 심연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리버 피닉스에게 있어 (그리고 내
게 있어), 그것은 '그 사람을 통해 세상 전부를 사랑하라'는
Erich Fromm 충고나 '타인을 통한 자아발전'이라는 심리학
적 목적과는 무관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음이고,
상대방의 영혼에 그 특성에 감염되는 것이다. 그 순간, 사
람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을 비켜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
이다. 그것은 모든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희적인 것이다. 나는 물론 잘 알고 있다. 잘 살아내기 위
해서는, 한 사람의 건실한 몫을 다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그런 식의 '유희적'인 사랑은 곤란하다는 것을. 하지만, 어
쩌란 말인가. 사람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것이 있
기 마련이다. 리버 피닉스는(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피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나는 '사람'을 사랑함이라고 썼다. 리버
피닉스가 사랑한 사람은 그와 동성인 키에누리브스였다.
갑자기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Gay해방을 지지한다는 국제사회주의자들로부터, 동성애는
神이 금지한 것이라는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까지. 동성애에
대한 내 입장은 이 글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리버
피닉스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
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차별적인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양성애자 소년은, 양성애자라는 이름대신, '사랑에 익숙
한 소년'이라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는 적절한 호칭인 것
같다. 리버 피닉스가 사랑한 사람은 키애누 리브스다. 그는
예전부터 남자들이랑 자는 것은 단지 돈 때문이고, 돈 안
받고 다른 남다랑 자면 Homo Sexual이 된다고 말해오던
터였다. 하지만, 엄마를 찾아가는 길.리버 피닉스는 키애누
리브스와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숙을 하면서, 그에게 처음
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 장면은 기막히게 아름답고 슬
프다. 내가 본 소설,영화등 등을 통들어 가장 아름다운 사
랑의 고백이다. 어떤 이는 나더러, 이루지 못할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답고 슬픈 것이냐고 물었지만, 그건 핵
심이 아니다. [사랑이 이루어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異性을 사랑해서 가정을 만드는 것이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앞에서 쓴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그것 자
체로 완결적이며 그것 자체가 슬픈 일이다. 그런 감염과
일상과 동떨어진 유희는 얼마나, 슬픈 일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 대상이 同性이고, 게다가 '정상적으로(!)' 이성을
사랑하고 결국에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버리는 키애누
리브스였기 때문에, 한 번 더 거부당했고 더 지독하고 슬
퍼보였을 뿐이다.
리버 피닉스가 사랑한 키애누 리브스.- 그의 '아버지에
게로 돌아가기'
그는 리버 피닉스와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고 자기의
길로 갔다. 그것뿐이다. 리버 피닉스와 함께 찾아갔던 이
탈이라에서 한 소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리버 피닉스와
함께 왔던 시골길을 이제 그 소녀와 되돌아가는 것, 그로
인해(?) 리버 피닉스가 혼자 방안에 틀어 박혀 그 무겁고
씁쓸한 공기를 호홉하는 것. 키애누 리브스는 결코 '다치
지' 않지만 그걸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리버 피닉스는
그 무게를 혼자 견뎌야 하는 것뿐이다. 키애누 리브스에게
어떤 작위나 무작위를 요구할 수는 없다. 이런 일은, 실은
종종 발생한다. 나는 다만 '나의 몸짓'을 했을 뿐인데 저
사람은 '상처'를 받는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는 오히려 '상
처'받는 사람에게 강해질 것을 요구할 수 있을지언정 '상
처'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 -'상처'라니,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단어이다.-키애누 리브스는 그 길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버린다. 市長이자 부자인 아버지. 여
태까지의 부랑자 생활을 정리하고, 아버지가 죽자 그 유산
을 물려받고, 이탈이아 소녀와 함께 정장을 차려입고, 근사
한 식당에서 지방 유지들을 만나며, 옛날 부랑자 생활동안
'진정한 아버지'로 여겼던 보브를 외면하는, 정해진 일련의
포즈들.그는 '내팽개쳐버리기보다는 살짝 비켜가는, 또 비
켜감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백민석) 사람이다. 그에게는
부랑자 생활이란,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그 속박에서
벗어날 잠깐의 일탈이엇고, 이제 다시 '정상의 세계'로 편
입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길'이다. 영화의 뒷부분. 키애
누 리브스가 한때 '진정한 영혼의 아버지'라 여겼던 부랑자
대장 보브의 장례식과, 그의 진짜 아버지, 돈 많은 시장의
장례식이 나란히 거행된다. 키애누 리브슨 당연히, 검은 양
복을 입고, 따분한 표정을 한 이탈리아 소녀와 함께, 찬송
가가 울려퍼지고, 목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성경을 읽는 시
장의 장례식에 앉아 있다. 리버 피닉스는 다른 부랑자들과
함께 보브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있다. 보브의 장례식. 그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에서 그들은 찬송가 대신에 보브
의 이름을 외치고 서로 엉키고 날뛰며 그들의 아코디언 따
위의 악기로 죽은 이를 애도하는데, 키애누 리브스는 다만
말쑥하게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 '정상의 세계'로
편입한 그에게는 죽음조차도 수많은 계산과 儀式이 얽혀
있는 것이며, 그래서 죽음조차도 정직하고 숙연하게 받아
들일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은 곧 유산일 뿐이다.
마지막 장면. 영화는 첫 장면으로 되돌아 간다.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와 그 앞에 서 있는 리버 피닉스. 길에는
모두 표정이 있다고, 자신은 '길의 감식가'가 될 거라고 그
는 말한다. 이제 그는 그의 길을 안다. 리버 피닉스는 다시
기면 발작을 일으킨다. 이제 그의 길이 어떤 표정인지도
아록, 자신은 길의 감식가가 될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 그는 무섭고 긴장하는 것이다. 쓰러진 그의 곁을 지
나면서, 어떤 이들은 정신을 잃은 그의 소지품을 빼앗아
가지만 다음에 온 사람들은 그를 차에 태워 준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왜 이런 일기같은 글을, 영화 Idaho를 빌려 쓴 걸까?
여러번 썼듯이 나도 건실한 생활인, 키애누 리브스가 택한
길의 장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삶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까지 똑똑히 알고 있다. 다만... 한걸음 한걸음씩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고, 그
것은 오직 '정상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정상/비정상이란 대
체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어떤 위험한 상승을 시도할 때
비로소 새로운 지평이 열리며 볼 수 있다는 것을, 평범한
생활로 머뭇거리며 이야기 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性
的 人間]이라는 소설에서... 이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는
냐는 아버지의 말씀에 주인공 j는 자기 기만을 승인하는,
순응주의적 현실 생활로 복귀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딘
다. 그 때 j는 체념의 감정과 함께 오랜 표류 끝에 구조 받
은 자의 감각을 느낀다. 하지만 오엔 겐자부로는 그 구조
를 '적의 배에의한 구조'라고 표현한다.
대학에 들어와서 4년. 나는 아직 내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에 놀라워 한다. 아! 내 심장은 이렇게 뛰고 있구나.
그것보다 더 신기한 것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덧붙이고 싶다. 나 '마음을 드디어 견딜 수 없다
해도' 항상 아슬하고 위태하다 해도 내 심장 뛰는 소리에
귀기울일 거라고.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겠노라고. 아마 그
럴 수 있을 거라고.
*1. 키애누 리브스의 극중 이름은 스코트 이고, 리버 피
닉스의 이름은 마이크. 하지만 2년전 마약과 자동차 사고
로 죽은 리버 피닉스와 이제 speed 따위로 헐리우드 스타
가 된 키애누 리브스에 대한 내 애정의 편차를 드러내고
싶어서 배우 이름을 그대로 썼다.
*2. 글 속에서 인용한 것은 30년대 시인 김기림의 '바다
와 나비'라는 굉장한 시와 90년대 소설가 백민석의 '내가
사랑한 캔디'라는 별로 보잘 것 없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