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
2005년 5월 5일 어린이날은 24절기 중 여름의 문턱을 알리는 입하였습니다. 일기예보를 들으니 오후에 비가 많이 온다고 하였지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맞는 일이 두려워 산행을 포기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또한 어린이날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어쩐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경험상으로 보아 어린이날에 비가 온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요.
여주 이천을 지나는 도로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니 모내기가 한창이었습니다. 모내기를 서두르는 이앙기는 비닐 보온 못자리에서 기른 묘판을 싣고 백로 마냥 어슬렁거리며 모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청송군 위치한 주왕산(720.6m)은 백두대간의 등줄기가 국토 동남부로 뻗어 나온 지맥에 위치하였습니다. 수많은 암봉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빚어내는 절경으로 이루어진 주왕산은 우리나라 3대 바위 암산의 하나로 불리우며 1976년 3월 30일 12번째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덕군의 2개군 5개면에 걸쳐 있습니다. 주왕산은 수백 미터 높이의 바위가 병풍처럼 솟아있어 신라 시대에는 석병산이라 부르다가 통일신라 말엽부터는 주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 군요.
산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인 바, 신라 말에 당나라의 주왕이 이곳으로 망명하여 살았던 산이라 하여 주왕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신라 제 38대 왕으로 추대되었던 상대등 김주원이 이곳으로 은둔하여 살았던 산이라하여 주왕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더군요.
전자의 주왕은 중국 당나라 때의 주도로 그는 진(秦)나라의 회복을 꿈꾸며 후주천왕을 자칭하고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주도는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주왕산의 옛 이름인 이곳 석병산까지 쫓기어 왔다하는군요. 이에 당나라 황제가 신라왕에게 주도를 잡아 줄 것을 요청하자 마침내 주도는 신라 마장군 형제들에 의해 이곳 주왕굴에서 최후를 마쳤다고 전합니다.
후자의 주왕은 신라 제 37대 선덕왕 때의 상대등 김주원으로 그는 제38대 신라왕으로 추대되었으나 하늘이 돕지 않아 왕위를 양위할 수밖에 없었던 불운의 왕자였습니다.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고도 때마침 장마로 불어난 알천을 건너지 못하여 대궐에 입성하지 못한 왕이었습니다. 이 기회를 노린 이찬 김경신을 추대하려는 세력들은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며 상대등 김주원을 배척하고 이찬 김경신을 왕으로 옹립하였던 것이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상대등 김주원은 천혜의 요새인 이곳 주왕산으로 은둔하여 이찬 김경신의 세력과 대치하면서 왕위 회복을 노렸다고 전해옵니다.
두 가지의 전설은 저마다의 역사적인 근거와 의미를 가지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저는 후자의 전설이 주왕산의 유래에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이후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자리에 올라 왕권을 굳힌 이찬 김경신은 상대등 김주원과 화해하고 지금의 강원도 강릉지방을 영지로 주어 명주태수로 살게 하였으니까요.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후에도 유사한 홍수로 되풀이 되었으니 그것은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과 이회창 대통령 후보와의 경쟁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강원도 강릉에는 유사이래의 홍수가 나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태풍 루사로 인한 폭우로 물난리가 나자 노무현 후보는 서둘러 강릉을 방문하여 사태를 파악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그는 어렵사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강릉(江陵)이란 지명이 주는 느낌과 경주 알천의 홍수, 홍수의 난관을 건넌 김경신과 노무현, 홍수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김주원과 이회창,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이렇게 비유하는 일이 한낮 어리석은 일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유사하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이후 무열왕 김춘추의 적손들은 강릉김씨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주왕산은 바위산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암산(岩山) 중의 하나로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대전사(大典寺) 뒤편의 기암(旗岩)을 비롯하여 병풍바위, 주왕의 식수를 퍼올렸다는 급수대(汲水臺), 두 마리의 청학과 백학이 어울려 살았다는 학소대(鶴巢臺), 시루봉 등 하늘로 치솟은 우쭐우쭐한 바위들이 장관이었습니다. 산자락에는 천년고찰인 대전사를 비롯한 사찰과 암자들과 주방계곡, 월외계곡, 절골계곡 등의 아름다운 계곡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계곡에는 제1,2,3폭포와 달기폭포가 있고 주왕굴, 무장굴, 연화굴 등의 바위굴이 있었으며, 주왕산(720m), 가메봉(882m),장군봉 등의 산봉우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공원내에는 달기약수터가 있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의 배경인 아름다운 주산지(注山池)가 있었습니다.
산의 입구에서 본 주왕산의 모습은 별반 색다르지 않았습니다. 깃발을 꽂은 듯한 봉우리란 이름의 기암(旗岩)이 여기가 주왕산의 입구임을 알려줄 뿐이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 대전사에 이르는 길에 식당문을 여는 상인들로부터 도토리 만한 산밤 몇 알을 얻었습니다. 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고 가라며 건네는 작은 친절이었는데 갓 구운 따끈한 알밤을 쥐어 주는 손길이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었습니다.
기암의 어귀에 자리잡은 대전사 앞뜰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소박한 3층 석탑이 붉고 둥근 연등에 둘러싸여 석탄일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내의 담장가에는 연등보다 더 붉고 고운 작약이 환하게 피어 길가는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기암의 좌측으로 우회하여 장군봉을 향하여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이 매우 가파라서 금세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장군봉에 올라 전망을 보니 기암의 위세가 대단하였는데 암벽을 등반하는 기술이 없는 한 기암을 탐헙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장군봉을 지나 금은광이로 오르는 길에는 태풍에 쓰러진 소나무들이 많았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솟은 소나무들이 태풍 루사와 매미의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송진 채취에 시달린 상처투성이의 노송이 많았습니다. 송진을 채취하느라 빗살무늬처럼 칼집을 넣은 60,70년대의 가슴 아린 흔적을 지닌 채 숲길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월미기재를 지날 때에는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경쾌하여 가만히 들어보려고 걸음을 멈추었더니 놈은 인기척에 놀랐는지 더 이상 반응이 없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이에 드릴로 구멍을 뚫은 듯한 자욱이 있는 굴참나무가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아마도 딱따구리가 파놓은 구멍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아마도 딱따구리는 이 나무에 둥지를 틀 요량으로 나무 밑둥에서부터 탐색을 하였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람 키를 넘을 만한 위치에 주먹이 들어갈 정도 크기 두 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그 안을 살펴보니 나무는 속이 삭아서 비어 있었습니다. 딱따구리는 그 예리하고 단단한 주둥이로 이 나무가 속이 비어 있음을 미리 알아내었던 모양입니다.
성재를 지나는 때에는 이름모를 덩굴식물을 발견하고 기버하였습니다. 문제의 덩굴식물은 하트모양의 둥근 잎에 노란 주머니꽃을 피웠는데 그 모습이 자못 신기하였습니다. 마치 전래동화 혹부리 영감에서 혹부리 영감이 달고 나오는 자루 모양처럼 생긴 자루꽃이 주렁주렁 걸린 모습이었습니다. 덩굴 식물원을 가꾸기에 아주 좋은 식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을에 이곳을 지나게 되면 이 식물의 씨앗을 받아두었다가 파종을 하여 보아야 하겠습니다.
금은광이재에서 주방계곡으로 내려와 제3폭포에 다달았습니다. 2단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한창 가물었는데도 물소리가 시원하였습니다. 이어 제2폭포와 제1폭포로 이어지는 계곡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마치 선경에 들어온 기분을 들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오늘 밤에는 오랜 가뭄 끝을 알리는 흡족한 비가 내릴 터입니다. 그럴진대 비가 내린 후의 산을 찾는 이들은 오늘보다 서너 배는 더 멋진 풍경을 만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청학 백학 두 마리의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까마득이 높은 벼랑위의 학소대, 그 맞은 편의 암봉 시루봉을 지나는 간결하고 깨끗한 주방계곡에는 산달래가 곱게 피었습니다. 수달래는 산철쭉의 다른 이름으로 피는 시기와 모양이 진달래와 철쭉을 반쯤 닮았습니다. 수달래는 왕왕 산골짜기 개울가에 피어 제 그림자를 물빛에 드리우는 꽃이기에 오히려 애절해 보이기도 하는 그런 꽃입니다. 그런 때문인지 주왕산 주방계곡을 장식하는 수달래는 그 옛날 주왕굴에 은거하던 주왕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신라 마장군의 철퇴를 맞아 최후를 마칠 때 흘린 피가 주방계곡을 타고 흘렸으며 그 후로 이곳 주방계곡에는 수달래가 붉게 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곳 청송군에서 주왕산 국립공원의 수달래를 보호하기 위하여 출입금지의 휴식년제 구간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5월에 산철쭉 수달래가 피는 시기에 맞춰 관할 지자체인 청송군 문화원 주최 수달래 축제 행사를 열고 있었습니다.
주왕암과 주왕굴, 망월대와 급수대는 신라 제 38대왕으로 추대되었던 상대등 김주원과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이찬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고자 내란을 일으킴으로 김주원이 왕위를 양보하고 석병산으로 은신하여 터를 잡은 곳이 주왕굴이요. 그의 아들과 딸이 달을 바라보았던 곳이 망월대이며 주왕암에는 퍼마실 샘이 없어 두레박으로 계곡의 물을 퍼올려서 식수로 하였던 곳은 급수대라 불리우는 것입니다.
통일신라 후기로 갈수록 왕권 쟁탈의 암투는 극에 달했습니다. 삼국통일의 대란 후에 찾아온 평화 시대는 곧 사치와 방탕의 시대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절대 권력을 노리는 왕족과 연합한 귀족 세력들은 저마다의 세력을 과시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왕권 다툼으로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호족은 분열되었으며 혁명을 일으켰다 실패한 왕족들은 와신상담 이를 갈았습니다.
산을 내려와 꽃돌가게를 겸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꽃돌을 갈아 국화꽃, 매화꽃 무늬를 찾아내어 만든 작품을 감상하며 칼국수를 주문하였습니다. 산에 와서는 산채비빔밥을 먹는 것이 제격이지만 오늘은 어제의 음주도 있고 날도 흐린 터라 칼국수를 주문하였습니다.
주인은 칼국수를 기다리는 나그네의 무료함을 덜어주고자 산채 나물을 넣어 지진 부침을 내어 놓았습니다. 사각거리며 씹히는 나물 맛이 향긋하였습니다. 칼국수를 반쯤 먹어 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공기밥을 내왔습니다.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라서 배고 고플 것을 염려해서인지 아니면 오늘 첫 손님이어서인지는 잘 알 수 없었으나 고장 인심이 꽤나 친절하였습니다.
식당가에는 ‘주왕산 사진세상’이라는 간판을 내건 가게도 있었습니다. 이 지방 향토 사진작가이자 문인협회 회원인 윤학용씨는 주왕산 사계절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하며 때로는 작품을 팔기도 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래로 찻집 공방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나이 든 부부가 함게 하는 가게였는데 이 가게에는 오동나무 병풍이 있었습니다. 오동나무판에 불경을 각자로 새겨 담고 장식을 달아 만든 병풍이었습니다. 수공도 수공이려니와 질 좋은 오동나무나 은행나무에 진실한 삶의 자세의 경구를 깎아 담는 자세또한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가까이에 주산지가 있어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기회에 1박 2일의 야영으로 주왕산을 다시 답사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아쉬움을 달래야만 하였습니다.
지음!
신록과 바위와 전설이 붉은 수달래와 하얀 폭포처럼 아름다운 산, 주왕산은 이제 막 시집온 새댁처럼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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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으면서 멋진 사진과 함께 역사이해에도 도움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