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나룻터」는 조선 태조때 큰 독기(纛旗, 깃발)가 강류를 따라 지금의 뚝섬 부근으로 떠내려오자 나라에서 그 후 이곳에 독재소를 설치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렸다 하며, 원래 깃발의 이름이 뚝이었기 때문에 "뚝도(纛島)", 또는 "뚝섬"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1967년 뚝섬 한강변
『東國與地備考(동국여지비고)』山川條(산천조)에 「纛島(독도)는 禿白(독백)이라고도 하는데 豆毛浦(두모포) 상류에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는 경상도.강원도의 세곡운송을 위하여 선착장을 두고 한강을 오가는 세곡선을 관리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강원도에서 오는 목재가 하여되는 곳으로 변하여 나라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한 바도 있다.
남쪽 강안(江岸)에 있던 奉恩寺(봉은사)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자주 가던 도성 부녀자들이 관선(官船)은 비치되지 않았으나 사선(私船)이 수척 있어서 배삯을 받고 건네 주었다.
호조(戶曹)에서는 이 곳에 수세소(收稅所)를 설치하여 상류로 부터 용산.마포항으로 내려가는 목재등을 실은 공사 선박의 세금을 받았기 때문에 운수선(運輸船)의 기항지가 되어 숙박업의 성황을 보기도 했다.
마조단은 말(馬)의 돌림병을 예방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天駟星(천사성) 즉 先牧(선목). 馬社(마사). 馬步(마보)를 제사지내던 檀(단)으로 살곶이 다리 서쪽 언덕 위에 있었으며 純宗(순종) 2년 (1908)에 폐지 되었다.
마조단의 기원은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고려시대 의식(儀式)이 있는 것을 보 아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답습으로 볼 수 있으나 조선시대 어느 왕 때 마조단을 쌓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春官通考(춘관통고)』,『文獻備考(문헌비고)』에서도 옜터가 있다고만 기록 되어있다.
英祖(영조) 25년(1749)에 소의 돌림병 때문에 살곶이 목장 안에 단을 쌓고 先牧을 제사하였는데 位版(위판)은 奉常寺에서 새로 만들었으며, 또 각 고을에 명하여 고을 중앙에 단을 만들어 先牧의 神位(신위)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여 재앙과 돌림병을 물리치게 한 기록이 있으며,
그 뒤 正祖(정조) 20년(1796) 정월에 마조제는 이해부터 仲春(중춘)의 中氣(중기)후 剛日(강일)중 길일을 택하여 지내게 하였다.
한양대학교 옆 성동구 행당동 58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다리는 조선시대 세종 2년(1420)에 공사를 시작해서 중단후 성종 6년(1475)부터 성종 14년(1483)에 완공된 다리로 1973년 서울시에서 수리복원하여 현재 반은 돌이고 반은 콘크리트로 되어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긴 대교여서, 「경성부사 3권」에는 실측한 결과 교폭이 20척(尺)(약 6m), 길이가 258척(尺)(약75.75m)이라고 되어 있다.
이다리는 교각을 횡렬로 4열, 종열로 22열을 배치하고 3장의 장대로 건너 지른 위에 다시 동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되어 있으며, 좌우의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았다.
기둥돌 아래는 네모난 주초(柱礎)가 있고 그것은 물밑 받침돌에 의하여 지탱되도록 하였으며, 기둥은 유수(流水)의 저항을 줄이기 위하여 마름모꼴로 다듬었다.
전체적인 수법(手法)으로 보아 교각(橋脚), 횡방(橫枋), 종방(縱枋), 교관석의 구성과 형태가 조화 있고 면밀하게 구축되어있으며 각부의 석재(石材)가 장대하고 질박하여 호쾌한 느낌을 준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되어 교통·통신상 중요한 구실을 담당해 왔다.
살곶이다리라는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뚝섬이라 불리어 오던 이곳은 옛부터 살곶이벌 이외에 관중, 관교, 동교등으로 불리어졌다.
살곶이벌은 한강과 중랑천이 합하는 바로 그 중간에 있으므로 자연이 평야가 형성되어 졌으며, 따라서 이곳은 조선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되었고, 임금의 매사냥터였다.
태조는 즉위 3년(1394) 아직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이곳의 고려이궁을 객사로 삼고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 동교에 나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는데 , 이 때에 응봉에서 활을 쏘았던 바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포 도요연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는 다음해 3월 한강위 곧 지금의 응봉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을 설치하였다. 한편 살곶이벌은 국왕의 군대사열장으로도 이름났던 곳이었다.
이 곳에 사당을 세우게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蛾嵯山(아차산)에서 이곳까지 출몰하여 인명을 해치는 백호(白虎)를 잡기위해 남이장군이 이사당 부근에서 기거하며 지키다가 호랑이가 나타나자 맨주먹으로 잡았다
이에 주민들은 그를 기려 이곳에 사당을 세운 것이 유래라고 한다.
세운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79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사당을 백호당이라고도 한다. 당 안에는 남이장군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음력 10월 1일에 제사를 지내는데 부정한 사람은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있고 제삿날은 동리 축제일이 되고 있다
조선조 임금이 가끔 이 정자에 나와서 말 기르는 것과 군대의 연무를 사열하기도 했던 곳으로 지금 이곳에는 수령이 약 600년 정도 되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있어 구 지정나무로 관리하고 있으며 인근 주민들에 의하면 지금의 천주교성당이 들어서기전 뚝도면출장소가 설치되었고 비교적 지형이 높은 둔덕으로 홍수시에는 주민들의 대피장소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첫댓글 운명하신 도깨비 박사 조자용 선생님에 의하면 뚝섬에는 "둑신사(纛神祀)"가 있던 곳이며 바로 치우를 제사하는 사당이 있었다는 곳이다. 치우기를 둑기(纛旗-독,둑, 도 등의 음가로 읽힌다)라고 하며, 치우제를 둑제라고 한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도 둑제를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