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005년 2월 21일 (주)코오롱에서 정리해고되었습니다. 오는 7월 6일이면 500일이 됩니다. 자그마치
1년하고도 5개월입니다. 벌써 그렇게 세월이 가다니 우리도 놀랍습니다. 도대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뭘 먹고 살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
우리 스스로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옳지 않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자존심과 폐기물보다 못한 쓰레기처럼 내다버려진 것에 대한
깊은 슬픔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2004년은 전국의 화섬업체들이 경기불황을 이유로
구조조정의 된서리를 맞고 난 뒤였습니다. 그 전에도 정리해고 바람은 2001년에 울산의 효성과 태광산업을 휩쓸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곧
닥치리라는 사실을 우리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2004년 여름 노사 간 임단협 교섭 중 회사는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일부 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고 인원정리를 시행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습니다.
당연히 노동조합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원정리만큼은 안 된다"며 파업으로 맞섰습니다. 2500여 명이 넘는 경찰병력이 공장을 에워싼 가운데 진행된 파업은 64일 간
계속되다가 2004년 8월에 끝났습니다. 결국 노동조합은 임금동결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파업기간에 대한 무노동 무임금 적용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노후된 일부 라인의 폐쇄를 인정하고 전환배치에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회사는 "앞으로 인적 구조조정은 절대
없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사합의 뒤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2004년 크리스마스 하루 전날, 회사는 대규모 희망퇴직 실시를 발표했습니다.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발표였습니다. 노동조합은 합의위반이라며 강력히 반발했지만, 2000년부터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이 부실계열사 지원을 위해 빼돌린 2000억 원의
자금과 2004년 8월에 터진 코오롱캐피탈 자금 횡령사건의 불똥이 코오롱의 경영을 그대로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 지난 5월 26일 코오롱 정리해고자들이 청와대 인근의 한 공사장 내 크레인에
올라가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고공 시위를 벌였다.
ⓒ연합뉴스
회사는 처음에는 "미안하다. 하지만 회사부터 살려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회사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더라도 구조조정은 한다"고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표변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한 약속은 언제든 한 순간에 파기하면 되는 약속인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러고서야 어떻게 생산성을 높일 수 있으며
어떻게 직장에 충실할 수가 있겠습니까.
2006년 1월 강요와 협박 속에 코오롱
구미공장에서만 431명의 노동자가 강제퇴직 당했습니다. "당신은 인원정리 대상이다. 순순히 사표를 쓰지 않으면 정리해고 하겠다"거나 심지어
"당신은 회식 때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랑 잘 놀지도 못했다. 그래서 무슨 직장생활을 하느냐"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이대며 자행된
강제퇴직이었습니다. 그렇게 강제퇴직된 431명 중 418명이 같은 자리에서 바로 비정규직으로 재고용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조조정이란 게 다름 아닌
비정규직 확대라는 걸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노동자들은 몰릴 만큼 몰렸습니다.
합의도 휴지조각이 되고 고용이 개인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가 되면서 노동자들은 저마다 급격히 위축되었기 때문입니다. 2005년 1월 18일 회사는
다시 304명의 정리해고를 신고했습니다.
2005년 2월 1일, 도저히 잊으려 해야 잊을
수 없는 그날. 노동조합은 더 이상의 정리해고는 막아보겠다며 임금 15% 삭감과 상여금 200% 반납, 2005년 무교섭 타결을 내용으로
구조조정을 끝내자는 노사합의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일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17일 뒤인 2월 21일 회사는
전격적으로 78명을 정리해고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재벌 23위 코오롱이 보여준 두 번째
합의파기였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회사가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를
해야 했다면 왜 더 많은 임금삭감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78명의 정리해고자 명단을 보는
순간 우리의 모든 의문점이 풀렸습니다. 78명의 명단은 전현직 노동조합 간부 출신들이 대부분이고, 현장생활에서 관리자의 잘못된 지시를 거부해
왔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경영위기를 빙자한 노조 무력화라는 회사의 의도는 이로써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치에 닿지 않는 그같은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회사의 정리해고와 동시에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05년 7월, 노동조합 집행부가 사퇴하면서 임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정투위는 정리해고 분쇄와 추가 구조조정 저지를 목표로 정리해고자로 구성된 후보자들을 출마시켰습니다. 회사의 선거방해는 거의 광기에 가까웠습니다.
노동자들에게 휴대폰 카메라로 자신의 투표용지를 찍어오라고 하질 않나, 회사가 통제할 수 없는 조합원에게서 애초부터 투표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질 않나, 그 옛날 3.15 부정선거보다도 더한, 너무나 치졸한 수법들을 동원했습니다.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고 하는 나라에서,
초등학교 학생회장 선거도 선거관리위원회의 도움 아래 질서 있게 치러지는 민주화된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회사가 원하는 사람이
노동조합 위원장이 될 경우 추가 구조조정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적은 순식간에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7월 22일 엄청난
방해공작을 뚫고 우리가 민 최일배 후보가 위원장에 당선되었습니다. 회사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 충격적 상황을 무마하고자 회사가 내린 선택은
노동조합 선거관리위원장과 부위원장에 대한 협박과 매수였습니다.
7월 28일 선관위원장은
용역경비들의 경호 아래 선관위 회의를 개최하여 당선무효를 선언하고 회사 인사팀장과 곧바로 잠적해 버렸습니다. 10월에 회사 관리자가 작성한
<재선거전략>이란 문건이 발견되면서 회사의 조직적 선거개입과 부당노동행위는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회사에 정식으로 교섭을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구미시청도 인정하고 노동부도 인정한 10대 노조집행부를 회사는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선거관리위원장이 당선무효를 선언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코오롱은 구미시청도 노동부도 국가의 법도 미치지 못하는 절대왕국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노동조합의 공문은 내용증명으로
반송되었고, 심지어 "노조위원장을 사칭하자 말라"는 공문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막힌 대화통로를 열고 부당노동행위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2006년 2월 16일부터 22일 간의 단식과 전원
삭발로 회사에 항의했습니다. 3월 6일 새벽 5시에는 3명의 동료들이 구미공장 15만 볼트 고압송전탑에 올라가면서 우리는 이제 목숨까지 내건
투쟁에 나섰습니다.
3월 14일, 과천 본사 앞에서 천막농성 중이던 동료들과 위원장은
코오롱 본사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제발 대화 좀 하자"는 게 우리 요구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사장도 부사장도 노동부가 인정하고 법적으로도
정당한 노동조합인 우리와는 대화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꽉 막혔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3월 16일, 사장 면담을 요구하던 위원장은 경찰의 진압에 분노해 동맥
절단을 시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얼굴을 보게 된 사장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짧게 답할 뿐이었습니다. 임금조정을 통한 문제해결
의사를 묻는 질문에도 "돈이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회사가 무엇 때문에 100억 원에 달하는 용역경비 비용을 지출하면서 끝없이
사태를 몰고 가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회장과의 담판만이 남았습니다.
2006년
3월 27일 새벽 5시 코오롱노조 최일배 위원장과 10명의 노동자들은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의 자택에 들어갔습니다. 노동조합의 요구와 유서를
가슴에 품은 채였습니다. 회장 집 거실에 들어간 위원장은 거실 바닥에 앉아 "회장님을 잠시만 만나게 해달라. 전달할 내용이 있다"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이웅렬 회장은 끝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백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되면서 강제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절망과 분노로 몸을
떨던 최일배 위원장은 가지고 있던 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최일배 위원장과 황윤석 부위원장, 두 노동자는 구속되었습니다. 15만 볼트 철탑 농성장의 동료들은 울었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어도 대화 한 번
할 수 없는 현실과 위원장의 동맥절단 소식에 목이 메어 울었습니다. 검찰은 이때 처음으로 노사 직접교섭을 주선하겠다며 고공농성을 풀 것을
권유했습니다. 4월 7일부터 5월 말까지 코오롱 노사는 검찰의 주선으로 12차례의 대화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똑같았습니다. 회사는 "2005년도
명예퇴직금을 줄 테니 어떤 요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은 다시
닫혔습니다.
우리는 또 고공농성에 들어갔습니다. 5월 26일 청와대 앞 금융감독원
신축공사장 타워크레인 위에 3명의 노동자가 올라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코오롱 해고자들은 일터로 돌아가야 합니다!"라는 현수막을 펴들고
11일 간 농성을 벌였지만, 6월 5일 새벽 경찰 특공대의 물대포를 맞으며 짐승처럼 울부짖다가 개처럼 끌려나오고 말았습니다. 또 한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정리해고 500일을 앞둔 지금 우리 스스로도 언제 이 대화부재,
소통부재의 닫힌 문이 열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사가 어렵다기에 연간 1000만 원의 임금까지 반납했는데 그
대가는 정리해고였습니다. 부실경영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알짜배기 코오롱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웅열 회장은 어떤 고통을 나눠 졌습니까?
사회적 대화와 타협이 송두리째 기업의 횡포에 짓밟히는 현실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같은 질문은 20년, 25년을 코오롱에서 일하며 코오롱을 위해 청춘을 바친
노동자로서 우리들의 최소한의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빠를 대신해 일터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힘들게 보내고 있을
자식들의 눈망울이 아른거립니다. 거대 기업에 맞서 싸우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 아이의 웃음까지 빼앗은 이 전도된 현실을
우리는 결코 그냥 놔두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문제해결에 이웅열 회장이 나설 때까지 우리는 대화와 소통을 요구하는 호소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