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모님의 첫 번째 발현 (A.D. 40. Saragossa, Sp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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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께서는 이미 승천하시기 전에도 발현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을 기점으로 시작해 초기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박해를 피해 많은 신도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는 교회의 확장을 위한 하느님의 안배였습니다. 박해를 피해 남부지방으로 나아간 야고보 사도는 안티오키아 지방과 아프리카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가 스페인 북동쪽 마을인 사라고싸(Saragossa) 마을을 지나가고 있을 때 그는 전도사업의 실패로 말미암아 크나 큰 낙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깊은 기도 중에 있을 때 복되신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성모님의 모습이 각인된 나무상과 기둥모양의 비취색 나무 조각을 주시며 이곳에 그녀를 위한 교회를 지으라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일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성전을 짓는데 준비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때 지어진 성전이 성모님께 바쳐진 최초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예수살렘으로 돌아온 후 헤로데 아그리빠에게 붙잡혀 열 두 제자 중 첫 번째로 순교하게 됩니다. (A.D. 44) 이 때 성모님께서 야고보에게 주신 성모상과 나무기둥은 아직까지 그 성전에 보관되어 있으며 특별한 때에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합니다.
* 성모님 발현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성모님을 위한 교회를 세워라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서방에서 교회를 지을 때 그 교회는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지만 그 교회의 이름은 어느 성인의 이름을 따오는 데서 비롯합니다. 이를 어느 성인께 봉헌(dedicate) 한다고 합니다. 어느 성당 이름이 성 야고보 성당이라고 할 때 그 성당이 예수님이 아닌 성 야고보를 위한 성당이 아니듯이 성모님께서 하신 말씀은 교회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지으라 하신 뜻인데 이러한 관례를 모르는 우리나라에서는 성모님께서 "나를 위한 교회를 지으라"고 번역하곤 했습니다.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2. 로사리오의 성모님 (1208 Prouille,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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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제였던 도미니크 구스만은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극성을 부렸던 이교도 집단인 알비파 (Albegesian) 의 활동을 저지하고자 하는 사명을 맡고 있었습니다. 알비라는 지방에서 성행했던 이 이단은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갈랐습니다. 즉 식사, 음주, 결혼, 출생, 재산 소유 등 육체에 속한 것은 모두 악이므로 이를 포기하고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완전한 사람이다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구약에서 기술된 하느님의 모습 중 인류를 단죄하시는 부분, 즉 물로써 노아를 제외한 모든 인류를 멸하시고 불로써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고 이집트인들을 홍해의 범람으로 단죄하신 하느님을 악으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류는 악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인한 것이 아니라 주장했고, 성체 성사, 견진 성사, 고해, 혼인성사 등을 부정했으며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교회 안에서의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새로운 종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1208년 교황의 특사가 알비파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있고 난 후, 교황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북부지역에 있는 군주들이 알비파를 지지하는 툴루즈 지방 군주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보내지만 그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아 교착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군대로써 이단의 물결을 잠재울 수 었었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도미니코 사제로 하여금 알비파의 이단을 반박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미니코 사제가 모든 힘을 다 기울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209년 그분이 Prouille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묵주(로사리오)를 주시며 '이단과 모든 죄악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모든 사람에게 묵주기도를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 발현에 대한 실제적 증거는 확실치 않으나 도미니코 성인은 그곳에 도미니크회를 설립하여 수도자들을 양성, 알비파의 활동을 저지하였습니다. 그 결과 단 시일 내에 10만여 명의 이단자들이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가톨릭 신자들은 열심히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 한 예로 1571년, 360척의 배가 서방 그리스도 국가를 침략해 왔을 때도 신자들의 로사리오 기도로 인해 불과 200척의 배로 승리할 수 있었는데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그 날을 로사리오 축일로 제정하여 기념했습니다.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3. 가르멜산에서의 발현, 스카폴라 성모님 (1251년 아일스포드 영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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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께서는 영국이 그리스도교화 되는 것을 도우시기 위해 영국에 여러번 나타나셨었습니다. 성모님이
나타나셨던 곳들은 성지로 정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어느 수도회에 소속되어있던 시몬 스톡 수사는 성모님께대한 신심이 아주 깊었던 분이었는데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모든 곳을 순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251년 어느 날 성지 순례 중에 있던 그에게 아기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님께서 나타나시어 갈색 스카폴라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이 스카폴라를 너의 수도회를 위하여 주노라. 이것은 나를 가르멜 산의 성모님으로 공경하고 있는 너와 그리고 모든 하느님의 자식을 위해 얻은 특별한 은총을 표시하는 것이란다. 이 스카폴라를 착용하며 봉헌된 삶을 살다 죽은 사람들은 영원한 지옥불로부터 구함을 얻게 되리라. 이 갈색 스가폴라는 구원을 상징하는 표식이며 위험으로부터 방패가 된다. 이 갈색 스카폴라는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평화와 특별한 보호에 대한 언약을 뜻한다".
성모님께서 스톡 수사에게 주신 스카폴라는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기다란 천으로 만들어져 어깨에 걸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나중엔 일반인들도 착용할 수 있도록 자그마한 두 조각의 헝겊을 끈으로 연결해서 만들었습니다. 두 헝겊에는 가르멜 산의 성모님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이후 스톡 수사는 영국,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주로 대학교가 있는 도시 근처에 가르멜 수도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가르멜 수도회 회원들은 모두 성모님께서 주신 스카폴라를 착용하고 다녔는데 다른 수도회에서도 그 모양과 색상을 조금씩 변형하여서 착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카폴라의 모양과 색상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수도회에 소속되어있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 스카폴라는 성모님의 신심과 매일의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임을 드러내주는데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종교적인 상징물이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이 스카폴라의 보급과 사용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이 스카폴라는 가톨릭 신자로서 성모님을 공경하며 성모님에 대한 봉헌을 약속하는 상징에 불과한 것이며 이 스카폴라 자체가 구원을 약속하는 성물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묵주를 가지고만 있고 묵주기도를 안 한다면 그 묵주가 아무런 효용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이 성모상이나 성인들의 동상과 초상화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면서 그를 더 가까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듯이 스카폴라를 착용하며 "매일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희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스카폴라를 단순히 액땜을 해주는 부적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4. 과달루페 성모님 (1531년 멕시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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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성모님께서는 1531년 멕시코에서 51세 되는 겸손한 농부였던 후완 디에고라는 인디언에게 네 번 나타나셨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으로 말미암아 천만명이 넘는 멕시코 원주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되었으며 스페인 정복자들과 멕시코 원주민이 가톨릭 안에서 화합될 수 있게 되었고, 어린이들을 희생 제물로 삼는 것이 근절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시기 전에는 한 번에 8천명의 어린이를 제사의 희생물로 바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후안 디에고가 입고 있던 옷에 그분의 모습을 새겨놓으시는 기적을 만드셨는데 그 영상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 없이 남아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발현
1531년 12월 9일 토요일, 동이 트기 전에 후안 디에고는 산티아고 성당에서 성모님께 봉헌하는 새벽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가던 중 티피야카크라는 언덕을 지나갈 때 언덕 정상에서부터 아주 예쁜 새들의 울음소리 같은 달콤한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세상에! 내게 이렇듯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지금 혹시 천국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황홀해 졌습니다. 그 노랫소리가 그치자 언덕 정상으로부터 "후안, 후안 디에고" 하고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급히 언덕을 기어올라가 정상에 다다르니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 모습은 그가 한 태어나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여인의 옷은 해를 등지고 있는 듯이 황금빛 광채를 내고 있었으며 그녀가 서있는 주변도 보석인양 반짝거리며 무지개 빛을 띠었습니다. 그녀가 "후안, 나의 가장 겸손한 아들아, 어디를 가느냐?" 하고 물으시자 후안은 "여인이시며 아이이신 분이여, 저는 미사에 참여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는 중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 "가장 겸손한 아들 후안아, 잘 들어두어라, 나는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 우리가 섬기는 참 구주시며, 모든 것을 창조하신 , 하늘과 땅의 주인인 천주의 모친이다. 나는 이 곳에 성당이 급히 하나 세워져 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한다. 이 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길 "주교한테 가서 네가 보고들은 것을 모두 전하여라" 고 하셨습니다.
후안은 그 길로 멕시코시티로 가셔 주교를 찾았습니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그때는 일개 농부가 주교님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주교를 만나서 모든 일을 이야기했지만 주교는 그리 쉽게 믿지를 않는 눈치였습니다. 다만 좀 더 생각을 한 후에 연락을 주겠다 하며 후안을 돌려보냈습니다. 후안은 자기가 맡은 바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주 슬퍼하며 그 고갯길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성모님께서 후안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후안은 성모님께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보고 드리고는, 자기는 너무 미천하여 성모님의 뜻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끔 해주십사 요청드렸지만 성모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한번 더 주교에게 가서 동정녀 마리아가 너를 보낸 것이라 하고 이곳에 교회를 세우는 일을 곳 시작하라고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후안은 주교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을 테지만 그분의 뜻에 따르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음날 후안은 아침 일찍 주교를 찾아갔습니다. 역시 어렵게 어렵게 해서 주교를 만난 그는 슬픔에 잠겨 울면서 '성모님을 다시 뵈었으며 바위 언덕 위에 성당이 세워지는 일이 그분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사려 깊은 주교는 이 순진하고 단순한 농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반복했는데 후안은 매번 일관성 있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주교는 마침내 후안에게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징표를 보여달라고 성모님께 청하라 요구했습니다. 주교는 후안을 내보낸 후 시종 둘을 시켜 후안의 뒤를 밟으라 지시했습니다. 그들은 후안의 뒤를 쫓았지만 이내 그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주교에게 야단맞을 것이 겁이나 주교에게는 거짓으로 '후안이 나쁜 일을 꾸미고 있다'고 보고 한 후 다음 번에 나타나면 아주 혼내줄 것을 다짐했습니다. 성모님을 다시 뵌 후안은 모든 것을 보고 드렸는데 성모님께서는 다음날 아침에 후안에게 그 징표를 주시겠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수고했으니 편히 가서 쉬고 다음날 아침에 보자고 하셨습니다.
후안에게는 베르나르디노라는 숙부가 있었는데 그 때 숙부는 전염성 열병에 걸려 앓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성모님께 가서 징표를 받기로 약속했지만 그는 숙부의 병간호를 하느라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날 화요일 아침, 숙부의 병세는 더욱 심해져 그 날을 넘기지 못하실 것 같아 보였습니다. 숙부도 그것을 느끼고 후안에게 신부님을 모셔와 종부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후안이 성당으로가 신부님을 모셔오려면 그 고갯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러면 성모님을 만나게 되어 시간을 빼앗길 것 같기에 그는 다른 길을 택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셔서 후안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후안은 무안한 김에 "성모님 안녕하신지요, 건강은 어떠십니까?" 하고 여쭙고 자신의 숙부가 역병으로 곧 죽게되어 종부성사를 위해 신부님을 모시러 급히 가는 길임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는 "나의 보호 하에 있는 너는 아무 걱정할 것이 없느니라" 하시면 후안의 숙부의 병도 다 나았음을 알려주셨습니다. 후안은 너무 기뻐 어서 주교한테 가져갈 징표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후안에게 처음 성모님을 뵌 그 언덕의 정상으로 가서 여러 가지 꽃들을 꺾어 오라 하셨습니다. 언덕 정상에 도착한 후안은 그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페인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카스틸라 장미 및 아주 여러 가지 장미꽃들이 피어있었는데 그때는 아주 추운 시기라 장미꽃이 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미꽃잎에는 밤이슬이 마치 진주처럼 맺혀있었습니다. 후안이 꽃을 꺾어다 성모님께 보여드리니 성모님은 손수 꽃을 가지런히 나열하시고는 후안이 입고 있던 틸마에 담아주시며 후안의 목에 옷자락 끝을 돌려 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하시길 "이것이 내가 주교에게 주는 징표이니 그에게 가서 알리되 원하는 징표를 가졌으니 이 자리에 성당을 세워야만 한다고 일러다오. 그리고 이 징표는 주교 이외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도록 해야한다." 하셨습니다.
후안이 주교의 성을 찾아가서 주교님을 만날 것을 청했지만 시종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젓번 일로 후안을 호되게 욕보일 것을 계획했기 때문입니다. 후안은 낙담하여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시종 하나가 후안이 무엇인가를 틸마에 감추고 있는 것을 알아내고 그에게 다가가 확인하려고 하였습니다. 후안은 성모님께서 일러주신 것 때문에 애써 감추고자 했지만 그들은 곳 그것이 장미꽃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모두들 그 꽃을 빼앗으러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것인지 장미꽃을 만지려는 순간 그 꽃은 진짜 꽃이 아닌 천에 그려지거나 수놓아 진 것처럼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종은 곳 주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주교는 곧 후안이 주교가 원한 징표를 가져온 것을 알아채고는 지체 없이 그를 불러 오라 일렀습니다. 주교 앞에 불려간 후안이 틸마 속에 있는 장미꽃을 풀어놓는 순간 후안이 입고 있던 틸마에는 후안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의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주교는 그 모습을 보고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주교는 후안이 입고 있던 틸마를 벗겨서 제대 옆에 걸어 놓아 모두들 이 기적의 그림 앞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후안은 주교가 청하여 하루 더 주교의 집에 머물고는 주교와 다른 몇몇 사제들과 함께 성모님께서 성당을 세우길 원하신 곳에 들린 후에 사제 몇몇과 함께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먼저 숙부를 찾아가 보니 그는 집 앞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후안의 숙부 베르나르디노는 '성모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병이 다 나았다 하시며 그의 조카는 자신의 일로 주교에게 보냈음을 일러주셨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과달루페의 성모 마리아라고 부르거라' 하신 후 사라지셨다고 말했습니다. 과달루페는 스페인 말로 늑대의 강이란 뜻으로 에스트리마두라 라는 곳에서 발견된 성모와 아기 예수상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때 후안과 함께 있던 스페인 사제들의 귀에는 베르나르디노가 말한 것이 과달루페로 들렸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러나 아즈텍 원주민들에게는 과달루페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성모님께서 베르나르디노에게 아즈텍 원주민 말로 "돌 뱀을 짓밟는 자" 라 하신 말씀이 스페인들의 귀에는 과달루페로 들렸던 것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당이 세워지기 원하셨던 그 곳에 원주민 봉사자들이 13일 만에 골격을 세웠으며 그 해 성탄절에는 성모님의 성화가 그 성당 제대 옆에 걸려지고 성전 강복과 함께 미사가 거행되었습니다. 후안은 그 성지 옆에서 집을 짓고 살면서 순례자들에게 성지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평신도는 영성체를 자주 할 수 없었는데 주교의 특별한 배려로 후안은 일주일에 세 번 영성체를 영할 수 있었답니다. 선인장을 원료로 만든 틸마에 그림을 그리면 아무리 길어도 20년 이상 보존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성화가 그려진 틸마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색채와 그 선명함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보존되고 있답니다.
1921년에는 누군가가 이 성화가 모셔져 있는 제대 밑에 폭탄을 설치되어 폭파시켰는데 제대와 청동 촛대가 산산조각이 난 상황에서 제대 바로 위에 있던 성모님 성화를 덮고 있던 유리에는 금도 가지 않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도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의 의미
성모님의 발현으로 말미암아 천만명의 멕시코인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자행되어오던 악습인 희생 제물로 어린이를 바치는 일이 근절되었고, 정복자인 스페인들과 원주민들을 하나의 신앙에서 일치되었습니다. 멕시칸들에게는 이 발현이 투쟁과 처참한 생활의 종결, 위로와 평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합니다.
참고문:
Eliot, Ethel Cook (1960) Our Lady of Guadalupe in Mexico. In John Delanay, A woman clothed with the sun. 김 승희 (안젤라) 부분 역)
website: http://web.frontier.net/Apparitions/guadalupe.html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5. 라방에서의 발현 (1798년 베트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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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나 베트남은 우리보다도 더 오래된 가톨릭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8세기 말엽 베트남은 여려가기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스러운 때였습니다. 이 때 베트남 왕국은 둘로 갈라져 북부는 트린 왕이, 남부는 누옌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이 손이라는 사람이 농민반란을 일으켜 두 왕국을 점령한 뒤 나라는 통일시켰습니다. 타이 손이 왕위에 오른 후 얼마 안되어 죽고 그의 아들 칸 틴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한편 왕위를 빼앗긴 누옌은 자기의 권력을 되찾으려고 노력을 했는데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루이 16세의 지지를 얻어냅니다. 이에 격분한 칸 틴 왕은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1798년 8월 그는 반 가톨릭 칙령을 선포하고 모든 가톨릭 교회와 수도회를 파괴할 것을 명합니다. 가장 혹독하고 비참했던 박해가 이때부터 시작되어 1886년까지 계속됩니다.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누옌 왕이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1802) 얼굴에 낙인을 찍거나 죽음에 처하는 등의 가톨릭에 대한 박해는 누옌 왕조가 망할 때(1884)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바로 이 비탄의 시기에 성모님이 베트남의 라방(La Vang)지역에 나타나셨습니다. 성모님의 첫 번째 발현은 박해가 시작되던 해인 1798년이라고 전해집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도시로부터 라방의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는데 그들은 더위와 사나운 짐승들,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밤이면 그들은 몇몇 소그룹으로 모여 묵주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은 놀랍게도 긴 망토를 입으시고 아기 예수님을 두 손에 안으신 체 양편에 천사들을 동반한 아름다운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합니다. 복되신 성모님은 그들을 위로하시며 주변에 있는 나뭇잎을 끓여서 약으로 사용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성모님은 또 그들에게 그 장소로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기도의 응답을 듣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첫 번째 발현이 있은 후로 성모님께서는 같은 장소에 박해가 계속 되었던 백년 동안 나타나셔서 박해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신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많은 도피자들이 이 곳 라방에 모여 성모님을 기념하기 위한 작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 때는 라방을 벗어나 도시로 들어가다 잡힌 30여명의 신자들이 라방의 작은 교회에서 화형을 당할 것을 요청해 그대로 되기도 하였습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매년 많은 순례객들이 꽃송이를 들고 묵주기도를 하며 이곳에 모여들었습니다. 1886년 박해가 공식적으로 끝나자 가스파 주교는 라방의 성모님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를 지을 것을 명하였습니다. 험난한 지형과 자금의 부족으로 이 교회를 완성하는데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교회가 완성된 1901년 이틀 동안 만 이천명의 신자들이 축성식에 참석했습니다. 매년 증가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1928년에 더 큰 교회가 세워졌지만 베트남 전쟁 때인 1972년에 파괴되었습니다. 라방에서 기도의 응답자가 계속 증가하자 1961년 4월 베트남 주교협의회는 라방의 성교회를 국립 성마리아 센터로 지정했고 1962년 8njf 교황 요한 23세는 라방의 교회를 라방 대 교회(Vasilica of La Vang)로 승격시켰습니다. 1988년 6월, 교황 요한 바울로 2세께서는 117명의 순교자에 대한 시성식을 집전하시고 라방의 성모님의 중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6. 기적의 메달 성모님 (1830년 루드박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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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어느 여름날, '성 빈센치오와 바오로 사랑의 딸회'의 24살 난 입회자는 잠이 들어있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깨었습니다. "캐서린, 캐서린, 일어나세요. 복되신 동정녀께서 성당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세요." 일어나보니 하얀 옷을 입은 5살 먹은 아이가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복되신 동정녀를 뵙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캐서린 라보레는 아이를 따라 성당으로 갔습니다. 성당에는 자정 미사를 위한 듯 촛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약 30분이 지난 뒤 자정이 되었을 때 그녀는 비단옷이 스치는 듯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가 위를 쳐다보았을 때 밝은 빛에 둘러싸인 채 지도 신부님의 의자에 앉아 계신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보았습니다. 캐서린을 성당으로 안내한 아이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이십니다." 캐서린은 무릎을 꿇고 동정 마리아 무릎에 손을 얹었습니다. 동정 마리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딸아,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임무를 주어주시길 원하신 단다. 너는 많은 고통을 겪을 것이나 네가 한 일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이 드러나 너는 고통에서 일어서게 될 것이다. 너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될 것인데 그 때 까지는 고통중에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은총을 입게 될 것이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캐서린에게 미래에 일어날 비참한 일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악에 빠져있다. 프랑스는 슬픔에 잠길 것이다. 왕권은 붕괴되고 전 세계는 갖가지 불행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발현은 다섯 개월이 지난 1830년 11월 27일 오후 5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성 요셉 성화가 있는 곳에서 묵상을 하고 있던 캐서린은 비단옷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을 돌려 그 곳을 바라보자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성모님의 손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흰색 지구본 위에 녹색 뱀을 밟고 계셨습니다. 잠시 후 타원형 모양이 성모님 둘레에 형성되었는데 그곳에는 금색으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라아님, 당신에게 의탁하는 우리를 위해 빌으소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캐서린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양을 따서 메달을 만들어라. 이것을 거는 사람들은 큰 은총을 얻을 것이다. 크나 큰 은총이 확신을 갖고 믿는 사람들에게 내릴 것이다."
이때 타원형의 모양이 돌며 캐서린은 뒷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뒷면에는 마리아의 첫 글자인 M 자가 가로
막대와 십자가 위에 겹쳐 놓여 있었습니다. M 글자 밑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심장이 있었는데 하나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었고 하나는 칼에 찔려 있었습니다. 그 둘레에는 열 두개의 별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잠시 후 이런 모습은 촛불이 꺼지듯 사라졌습니다.
이런 성모님의 발현에 대해 모든 것을 들은 그녀의 영적 지도 신부였던 아라델 신부는 캐서린의 진실성에 의구심을 가졌는데 그는 파리의 대주교를 방문하여 상의했습니다. 주교단의 세밀한 조사를 통해 결국 파리 대주교는 메달을 주조할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캐서린이 말하고 겪은 것이 가톨릭 신앙에 위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나서 이 메달로 인한 수많은 치유와 가톨릭으로의 개종이 보고되었습니다. 이 메달은 19세기 수백만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촉매가 되었고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를 반포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 교리가 반포된 지 4년 뒤에 있은 루르드의 마지막 발현에선 천상 방문자의 신분을 알아오라는 신부의 요청을 받은 버나뎃다에게 성모님께선 자신을 '무염시태'라 밝히시어 그 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셨습니다. 이 메달은 본래 성모님께서 당신의 무염시태를 선포하시고자 한 것이지만 믿음과 확신으로 이 메달을 목에 걸고 다닌 많은 사람들은 굳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 기적과 같은 병의 치유, 회개를 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메달은 기적의 메달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캐서린은 그녀의 남은 여생을 파리 교외에 있는 보호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밥을 짓고 빨래하기, 그리고 나중에는 노인들의 시중을 봐주는 등, 봉사 활동에 바쳤습니다. 그녀는 성모님의 발현을 보았다는 것에서 영광스런 삶을 애써 찾지도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회의 응달에서 묵묵히 성모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을 하였을 뿐입니다.
1876년 12월 31일 세상을 떠난 캐서린은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1933년 5월 28일 시복되었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성녀 캐서린은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모님의 그 사상을 몸소 실천하여 뭇사람들의 귀감이 되었기에 영광스런 성인이 된 것입니다. 성녀 캐서린은 사후에도 놀라운 기적을 사람들에게 선물했는데 캐서린의 고귀한 사랑의 정신에 예수님과 성모님이 기뻐하셔서 성녀의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파리의 루드박에는 성녀 캐서린의 시신이 지금까지도 전혀 부패하지 않은 채 120여 년 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7. 루르드에서의 발현 (Our Lady of Lourdes) (1858 루르드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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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서는 크고 작은 소요가 많이 일어났던 프랑스의 피레니에 살고 있었던 14살 짜리 허약한 소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858년 2월 11일 목요일에 버나뎃다는 그녀의 누이인 매리와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셋이서 나무를 하러 강변으로 갔습니다. 매리와 그녀의 친구가 강 건너편으로 가서 나무를 했지만 버나뎃다는 그냥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버나뎃다는 마사빌이라고 알려진 동굴 근처에서 태풍 같은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가 동굴로 갔을 때는 바람이 전혀 불지 않고 있었는데 동굴 입구에 있는 장미덩굴이 바람에 흩날리듯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동굴 안쪽에서 황금빛 구름이 나오고 곳이어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나오시더니 동굴 입구에 있는 장미 덩굴 위에 머무르셨습니다. 부인은 버나뎃다에게 미소를 지으시더니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하셨습니다. 버나뎃다는 두려움조차 잊어버리고 그 부인에게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와 부인이 기도를 다 마친 후에 (그 부인은 주의 기도와 영광송을 바쳤습니다), 그 부인은 서서히 동굴 안으로 사라져버리셨습니다.
버나뎃다는 6개월에 걸쳐 모두 18번 성모님을 뵙게 되는데 마지막 발현하실 때까지 그 부인이 누구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루르드에 나타나신 성모님의 주요 메시지는 '속죄하고 또 속죄하며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9번 째로 발현하셨을 때 성모님께서 버나뎃다에게 땅을 파서 거기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판 구멍이 나중에 성모님께서 약속하신 치유의 효력이 있는 샘물이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또한 버나뎃다에게 그 지방 담당 목자였던 피라메일(Peyramale) 사제한테 가서 그곳에 성모님의 발현을 기념하기 위한 성당을 지어달라고 전하라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제는 버나뎃다에가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한 다음 그녀에게 말하길 그 부인이 누구신지를 그녀에게서 알아내고 또 그 부인에게 동굴 입구에 있는 장미덩굴에서 꽃이 피어나는 기적을 행하여 달라 요청하라고 하였습니다. 3월 25일,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기념하는 축일(성모 영보 대축일)에 성모님께서는 기초적인 신앙교육을 받은 버나뎃다에게 "나는 무염시태이다" 라고 대답하심으로써 그 사제의 물음에 답하셨습니다. 이 '무염시태'라는 말은 그 사건이 있기 겨우 4년 전에 교황에 의해 공식 가톨릭교리로 승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프랑스 시골에 있는 배우지 못한 14살 짜리 소녀아이가 이 교리를 배워 알고 있을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성모님의 루르드 발현은 1862년에 공식적으로 승인이 되었으며 이 곳은 순식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순례지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신체적, 정신적 질환을 치유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순례객들이 몰려들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버나뎃다는 차츰 세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네버에 있는 노틀담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됐으며, 긴 시간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리다 1879년에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녀는 1933년 성녀품에 오르셨는데 이는 성모님을 뵈었기 때문이 아니었고 그녀의 삶을 오로지 단순함과 봉사로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시신이 아직까지 부패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8. 너크에서의 발현 Our Lady of Knock (1879 Knock, Ire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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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아일랜드는 갖가지 기근과 경제적인 극심한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갖가지 기근과 경제적 결핍으로 인해 공황으로 인해 이민의 물결이 다시 일어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 주님은 다시금 우리의 어머니신 동정녀 마리아를 보내셔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자녀들을 돌보시도록 하셨습니다.
그 때 놐 마이어 (Cnoc Mhuire)란 마을에는 성모님의 신심이 아주 투철한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과 열심히 노력하여 조그마한 성당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는 이 성당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던 사도 요한을 공경하는 마음에 요한 성당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1879년 8월 21일 메이요 (Mayo) 카운티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마을 사람인 마가렛 베르니라는 사람이 성당의 문을 잠그기 위해 성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성당 문을 잠그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이상한 빛이 성당을 덮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상념에 싸여있던 그녀는 그 이상한 현상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시간, 성당에서 일하고 있는 가정부인 메리 멕로린과 메리 베르니가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때 메리 베르니가 성당 벽 쪽을 돌아보며. "아니, 저 동상들 좀 봐! 당신은 왜 신부님께서 새로운 동상들을 구하셨다는 말을 안 했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서 일하고 있던 메리 멕로린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하며 어쨌든 좀 더 자세히 살펴보러 벽 쪽으로 다가가자고 했습니다. 그들이 성당 쪽으로 다가가자 메리 베르니가 소리쳤습니다. "이것 좀 봐, 이들은 동상이 아니야, 움직이고 있어. 바로 복되신 동정녀이셔."
그들과 다른 열 세 명이 비는 내리지만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았을 때 목격했던 것은 바로 하얀 가운을 입으시고 머리에는 커다란 왕관을 쓰신 아름다운 모습의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녀의 손은 마치 기도 중이신 모양 가슴에 모아진 상태였는데 이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즉시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천사들의 여왕이신 마리아이시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오른쪽에는 요셉 성인이 서 계셨으며 그녀의 왼쪽에는 사도 요한 성인께서 교황의 복장으로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성인의 왼쪽에는 제단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천사들에 의해 둘러싸인 십자가와 어린 양이 있었습니다. 이 형상들은 성당 한 쪽 벽 쪽에 위치했으며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슴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들이 있는 자리는 아주 말라있었습니다. 이 형상은 약 두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도 매우 밝은 빛이 성당 부근에 머무르고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그 후로 이 성당을 찾는 사람들에게 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너크 지방에 나타나신 성모님은 아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침묵의 성모님"이라고도 불리운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15명의 주민들에게 나타나셨음도 특이할 만 합니다. 성모님은 침묵하시면서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너크 지방에 나타나신 성모님을 처음에는 교구청에서 인정을 하지 않았지만 긴 조사과정을 통해 마침내 1936년 메이요 교구는 이 성모님 신심을 공식으로 인정하고 세상에 전파할 것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9. 파티마 발현 (1917 파티마 포루투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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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 발현 중 가장 유명한 발현이라 할 수 있는 파티마에서의 성모님 발현은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 사이에, 포르투갈에서 일어났습니다. 파티마 근처에서 3명의 양치는 어린이들 (프란치스코 당시 9세, 히야친따 7세, 루치아 10세;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따는 남매간이며 루치아와는 사촌간임) 에게 6번에 걸쳐 발현하신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현세의 모든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메시지를 지니고 하느님에 의해서 파견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전쟁과 유혈적 폭력에 의해서 문명이 처참하게 파괴되었던 시기였는데 성모님께서 요청하신 기도, 보속(reparation), 그리고 봉헌(consecration)이 받아들여지고 이행된다면,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에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파티마의 성모님께서는 그 어린이들에게 '전쟁이란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설명하셨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에 불순종의 대가로 전쟁, 기근, 그리고 성교회와, 교황, 가톨릭 신자에 대한 박해를 통해서 세상을 더욱 징계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러시아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징벌의 도구"이며, 온 세상에 무신론과 물질주의의 "오류"를 퍼뜨릴 것이며, 전쟁을 조장하고, 세상 어디에서나 신자들을 박해하고, 국가들을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
파티마에서 있었던 성모님의 모든 발현에 있어서, 복되신 어머니께서는
①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②가르멜산의 갈색 스카풀라를 착용하고,
③보속과 희생을 행하여야 할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러시아의 수중에 있는 무서운 징벌을 막고 "그 불쌍한 국가"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성모님께서는 교황과 세계의 모든 가톨릭 주교들에 의해서 러시아가 티없으신 성모성심께 공식적으로 봉헌되기를 요청하셨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신자들이 다섯 달 연속해서 첫 토요일보속의 신심행위를 행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전세계를 위한 성모님 메시지의 핵심은 성모님께서 1917년 7월에 3명의 어린 환시자들에게 알려주셨던 "비밀" 이라고 불리게 된 메시지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 비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처음 두 부분은 공개적으로 밝혀졌었습니다. 그 비밀의 첫째 부분은 "불쌍한 죄인들의 영혼이 가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장면"이었으며, 그리고 영혼들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와 희생의 행위에 대한 성모님으로부터의 긴급한 요청을 담고 있습니다. 비밀의 둘째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으며, 세계 평화의 조건으로서 러시아의 봉헌에 대한 성모님의 정중한 요청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러시아의 봉헌에 뒤이은 티없으신 성모성심의 필연적인 승리와 "그 불쌍한 국가"의 가톨릭 신앙으로의 회두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비밀의 마지막 부분(제3의 비밀이라고 알려져 있음)은 최근에서야 공개된 것으로 파티마의 환시자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루치아 수녀에 의해서 1944년 쓰여졌으며, 1957년 이래로 교황청에서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1960년에 세상에 공개될 것이라고 알려졌던 이 제 3의 비밀은 가톨릭 교회 내부에 발생될 혼돈에 관한 것이고, 1960년대에 시작되는 신앙의 상실과 교회 내에 만연될 배교(변절)를 예고하는 것으로 추측되어왔습니다. 그러나 2000년 6월 바티칸에서 공개한 제 3의 비밀에 대한 내용은 1981년에 있었던 교황임 살해 기도사건에 대한 예시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발표가 믿을 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3명의 발현 목격자들에게 "너희들은 불쌍한 죄인들의 영혼이 가는 지옥을 보았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나의 티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확립하시기를 원하신다. 만약 사람들이 내가 요청한 것을 행하면, 많은 영혼들이 구원될 것이며 세상에는 평화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모든 이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다가오는 10월에 큰 기적을 행하실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1917년 10월 13일, 약 70,000명의 목격자가 운집한 가운데, 그 어린이들이 일찌기 알려 주었던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큰 기적이 파티마의 하늘에 펼쳐졌습니다. 목격자들은 태양이 그 하늘에서 실제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으며, 또한 태양이 하늘에 있는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기 전에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현재 "태양의 기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초자연적 사건으로 평가되어져 왔습니다. 파티마에 관해 뛰어난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알메이다 가레뜨 교수가 말했었던 것처럼, 이 위대한 기적은 단순히 신앙의 영역이나, 혹은 과학의 영역에만 속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에 앞서서,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파티마의 메시지를 1930년이래 "믿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왔습니다. 연이은 다섯 분의 교황님들이 파티마 발현의 정당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당신들의 믿음과 승인을 공식적으로 표명해왔습니다. 여러 교황님들이 공식적인 순례 일정으로 파티마를 방문하셨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적어도 교황 재위 10년에 한번씩은 파티마를 방문하셨습니다. 교황성하께서는 1981년에 있었던 암살 시도 때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파티마의 성모님 덕택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건은 우연하게도 파티마 첫 번째 발현 64주년 기념일에 발생했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성모님의 중재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파티마에 머무시는 동안, 교황님은 성모님이 처음 발현하셨을 때보다도 오늘날에 "파티마 메시지가 더 유효하고, 더 긴급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에는, 나의 티없는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러시아가 나에게 봉헌되도록 하실 것이다. 러시아는 회개할 것이며, 평화의 시기가 세상에 주어질 것이다."
파티마에서 하늘의 여왕의 발현이 있은 이래로, 수없이 많은 책, 팜플렛, 녹음 테이프, 사진, 그리고 비디오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져서 성모님에 대한 신심과 봉헌이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파티마 발현에 대한 믿음과 성모님의 모든 메시지는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통적인 교의, 의식, 그리고 전통적 행위나 가르침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성모님의 메시지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위해서 계획되었으며, 그리고 세상을 전쟁, 기아, 난국으로부터 구하고, 가톨릭 교회를 배교와 혼돈으로부터 구하며, 수많은 영혼들을 영원한 파멸로부터 구하기 위한 하늘의 중재임을 믿고 있습니다. 파티마 메시지는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는 무서운 징벌로서 엄격히 경고하는 한편, 가톨릭 신자들과 선한 의지를 지닌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생명을 주고 믿음을 키워주는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오직 나만이 너희를 도울 수가 있다. 나의 티없는 성심은 너희들의 피난처이며, 너희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파티마의 성모님께서 알려주신 하늘의 무기
1. 묵주기도
파티마의 세 어린이들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묵주기도의 성모'라 밝히셨으며 매일 묵주기도를 암송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성심을 알고 성모님의 은총을 얻기에 가장 수월하고 가장 겸손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2. 첫 토요일 신심
1925년 12월 10일 도로테아 수녀회의 청원자이었던 루치아 수녀는 그녀의 방에서 어린 예수와 성모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가시로 둘러싸인 심장을 루치아수녀에게 보여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 딸아. 나의 심장은 배은망덕한 자들의 독성과 배은 행위로 매 순간 찌른 가시들로 둘러 싸여있다. ... 모든 사람에게 알려다오. 매달 첫 토요일, 다섯 달 동안 고해성사를 보며, 영성체를 하고, 묵주기도 15단을 바치며 보속의 마음으로 15분간 나와 함께 묵상을 한다면 묵상을 한다면 나는 그들의 임종시에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은총으로 그들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루치아 수녀와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 첫 토요일 신심은 지난 70년 동안 온 세계로 전파되었으며 예수 성심과 성모성심을 위로하고 수많은 영혼들을 구하기 위한 보속행위로서 수많은 사람의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파티마의 일곱기도문
파티마에서의 성모님의 발현 기간 중 세 명의 어린이들은 다섯 기도문 -둘은 평화의 천사로부터, 셋은 성모님께로부터-을 배웠습니다. 나중에 루치아 수녀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두 개의 기도문을 더 주셨는데 그 기도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묵주기도의 매 단 마지막에 바치는 구원송도 파티마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 중의 하나입니다.
1. 나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저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저는 당신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믿지 않으며, 찬미하지 않으며, 의지하지 않으며,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하느님 용서하여주십시오.
2. 오 예수님,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이며, 그리고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에 반하여 저질러지는 온갖 죄를 배상하기 위해서입니다.
3.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구하소서
4. 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흠숭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저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안에 계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5. 인자하신 성모성심이여,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 유럽, 그리고 온 세상을 구하소서.
6. 오 성모님, 당신의 원죄없으신 잉태를 통해서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 유럽, 그리고, 전세계의 회개를 저를 위해서 얻어주소서.
7.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이시여. 저는 당신께 끼쳐드린 독성, 모욕, 그리고 무관심에 대한 보속으로 전세계의 모든 감실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보배로우신 성체, 성혈, 영흔 , 그리고 신성을 당신께 바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과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의 무한하신 공로를 통해서 저는 불쌍한 죄인들의 회개를 당신께 간청합니다.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10. 보랭에서의 발현 The Virgin with the Golden Heart (1932년 보랭 벨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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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벨기에의 보랭이란 지역에 성모님께서 다섯 아이들에게 모두 33번 발현하셨습니다. 이 당시 유럽에서는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의 계시가 실현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즉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려 전 세계에 그들의 무신론적 사상을 퍼뜨리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며, 이태리에서는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하는 국수 사회주의자들이 교회를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권를 장악해 나찌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고 이런 와중에 세계는 대 공황으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재난 속에서 파티마의 경고를 끝날 때가 되었기에 성모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모친, 희망의 중개자로 오셨습니다.
보랭은 부루셀에서 남동쪽으로 60마일 떨어져 있으며 프랑스 국경에서는 겨우 2-3마일 떨어져 있으므로 이 곳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932년 11월 29일, 훼르난데, 알버트, 안드리와 두 길버테 등은 학교에 가는 길에 있는 수녀원을 지날 때 루르드 동굴을 본 따 만든 곳에서 하얀 옷을 입은 성모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들은 수녀원 문을 두드려 발러리아 수녀님을 불러내었지만 그 수녀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눈에 비친 성모님은 18-20세 가량의 젊은 모습이셨고 진한 파란색의 눈동자에 머리에서는 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주름이 많이 잡혀있는 긴 옷을 허리띠 없이 늘어지게 입고 계셨고, 그 하얀빛은 푸른색을 머금은 듯 하였습니다. 두 손은 합장하고 계시다가 사라지시기 전에 넓게 벌리셨습니다. 그 후로 32번 같은 장소에서 다섯 아이들에게 발현하셨는데 처음에는 본당 신부와 수녀원 원장 등 어느 누구도 아이들의 말을 믿으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장 수녀였던 데오필 수녀는 아이들이 성모님을 뵈러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수녀원 정문을 걸어 잠그고 사나운 개 두 마리를 풀어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Immaculate Virgin)"라 지칭하셨고 1932년 12월 31일 다서 아이 모두는 성모님의 황금 성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성심은 보오랭 발현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서 티 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성심인 것입니다. 그 동안의 발현에서 "항상 기도하라", "항상 착하게 살아라" 하셨고 마지막 발현에서는 "내가 죄인들을 회개시키리라" 하셨습니다.
발현 초기에는 보랭의 주민들도 이 사건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이 평범한 아이들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을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현 초기부터 이 성지에서 일어난 수많은 치유 사례들과 죄인들의 회개로 인해 마침내 1935년, 발현 조사위원회가 조성되어 1949년에 와서 성모님의 발현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보오랭 성지에서 이루어진 무신론자이며 공산주의자였던 한 청년의 회개로 말미암아 벨기에에 레지오 마리애가 설립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보랭에서의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는 파티마에서의 메시지를 반복, 강조하고 계십니다. 즉 기도(묵주기도), 희생, 그리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대한 봉헌 등을 반드시 실천하라고 재삼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중요한 명칭과 특권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즉 성모님 자신을 "티 없이 깨끗한 동정녀"라고 하셨고 또한 "천주의 모친"이라고 하심으로써 다른 모든 명칭과 특권들이 바로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왕이신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예수의 휘하에서, 은총을 가득 입으시고 성스러운 관계를 가지시며, 권리를 획득하시어, 유일하게 선택되신 여왕이신 것입니다. "그녀의 왕국은 그의 아들과 하느님의 황국과도 같다. 아무 것도 그녀의 영역에서 제외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1954년 비오 12세에 의해 마리아 천상 모후 축일을 5월 31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죄인들을 회개시키리라"고 하신 말씀은 보랭의 위대한 약속으로 이 발현의 독특한 의미를 갖습니다. 어떻게 한낮 피조물에 불과한 마리아가 죄인들을 회개시키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엄청난 힘을 부여하여 주셨고 또 그녀의 요청은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11. 바뇌에서의 발현 The Virgin of the Poor (1933 바뇌 벨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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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15일, 벨기에의 보랭에서 성모님의 마지막 발현이 있은 지 열 이틀 후에 성모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벨기에의 이름 없는 산골인 바뇌(Banneux)에서 12살짜리 소녀 마리에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심부름간 동생을 기다리기 위해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바깥을 쳐다보고 있던 마리에타는 마당에서 밝은 빛으로 둘러싸인 젊은 여인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녀는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신 채 하얀 가운에 파란색 허리띠를 두르고 계셨으며 머리에는 투명한 흰색 면사포를 쓰고 계셨습니다. 마리에타는 그녀의 오른쪽 발 밑에 있는 황금빛 장미송이와 그리고 오른 팔에 걸려있는 묵주를 보았습니다.
마리에타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장난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에타가 또 다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자 그녀의 어머니는 "아마도 복되신 동정녀이신가 보지" 라며 농담으로 대답하면서 바깥을 내다보니 사람 형상을 한 하얀빛이 마치 하얀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 쓴 형상을 한 것을 보고는 놀래서 "마녀다!" 하고 소리치며 커튼을 닫았습니다. 마리에타의 어머니에게는 마리에타가 보는 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리에타가 창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그 여인은 마리에타에게 미소를 지으며 서 계셨습니다. 마리에타는 며칠 전에 길에서 우연히 주운 묵주를 들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여러 단을 마쳤을 때 여인의 입술이 기도를 하는 양 움직였으며 마리에타를 향해 바깥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마리에타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녀의 어머니가 문을 잠가 못나가게 했으며 그녀가 창가로 돌아와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는 성모님은 떠나버리신 후 이었습니다. 다음날인 월요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화요일 아침, 그 지방 신부였던 제민 신부님은 몇 달만에 처음으로 아침 미사에 나온 마리에타를 보고 놀랐습니다. 성모님을 또 다시 뵈려면 자신이 먼저 가치 있게 준비되어 있어야 생각한 마리에타는 제민 신부님의 교리반에도 출석해 그를 감동시켰으며 급기야 신부님은 마리에타에게 변화가 생긴 것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평소 그녀의 단순함과 솔직한 면을 잘 알고 있던 신부는 그녀의 이야기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부는 마리에타를 성당으로 데리고 들어가 루르드 성모상을 가리키며 그녀가 본 것은 바로 루르드에 나타나셨던 성모님의 환영일 것이라는 확신을 얻고자 했지만 그녀는 그녀가 목격한 분은 앞으로 고개를 숙이셨고 한층 더 아름다우시다고 단호히 주장했습니다.
수요일 저녁, 마리에타는 그녀의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문 밖으로 나가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성모님의 발현을 또 다시 목격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두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 사이로 내려오시었는데 작은 모습으로부터 점점 커지면서 다가오셔서 마침내 마리에타로부터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셨으며 지상으로부터 1 피트 정도 떨어져 떠있는 구름 위에 서 계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마리에타에게 샘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시며 "이 물에 네 손을 담거라. 이 물은 너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에타를 내내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는 마리에타가 마치 미친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걱정이 되었지만 방해를 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마리에타를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마리에타의 아버지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가장 먼저 회개하여 개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목요일에 (1월 18일) 나타나신 성모님께 마리에타는 "사랑스런 여인이시여, 당신이 누구십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질문에 성모께서는 "나는 가난한 자의 동정녀이니라." 라고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샘터에서 마리에타가 다시 "이 샘물이 왜 저를 위해 마련된 것입니까?" 하고 질문하자 "이 샘물은 모든 나라를 위해, 특히 병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리에타에게 "너를 위해서 기도하겠다." 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7분간의 발현을 마치셨습니다.
그 후 모두 8 번에 걸쳐 마리에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나는 고통을 없애주러 왔다.", "나를 믿어라, 나도 너를 믿겠다. 기도 많이 하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3월 2일, "나는 구세주의 어머니, 천주의 어머니이니라. 기도 많이 하거라."는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바뇌에서의 성모님 발현은 주교 위원회에 의하여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조사되었으며 모든 증거가 수집되어 로마에 제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42년 5월, 지역 교구장인 커콥스 주교에 의해 "가난한 자의 동정녀"에 대한 공경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으며 발현 자체는 1947년에, 그리고 1949년에 이르러 환전한 승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보오랭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리에타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며 세인들의 관심을 떠나 평범한 삶에 만족하였습니다.
발현의 의미:
바뇌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동네로 동정녀 자신이 "가난한 자의 동정녀"라 부르셨습니다. 천국의 여왕으로서의 고귀하심 안에, 스스로를 가난한 자로, 또한 미소지으시며 아이들을 부르시는 어머니로 나타나셨다는 점이 바뇌의 혁신적인 의미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즉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자신이 전 인류의 특히 가난한 자들의 특별한 보호자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벨기에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시골의 가난한 자를 택해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라 볼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곳에서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과 베들레헴에 계신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하시어 우리를 더욱 당신의 자녀답게 만드시는 데 있습니다. 발현 이 후 설립된 각 국의 바뇌 기도 모임에서는 가난한 자, 고통 받는 자 들과 ,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미일 밤 7시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1) Maloy, Robert (1960) The Virgin of the Poor. In John Delaney (d.), A woman clothed with the sun: New York: A Division of Doubleday & Company, Inc. (김 승희 안젤라 부분 역)
2) Maloy, in A Woman clothed with the Sun; Wuillaume, Banneux: a message for our time, Banneux, 1995
성모님 발현 처음으로 |
12. 자이툰에서의 발현 (1968년 자이툰 이집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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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일부 발현자들에게만 보이는 성모님의 여러 발현들과는 달리 모두가 볼 수 있었고 발현 모습이 사진에 뚜렷하게 찍혔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68년 4월 2일, 이집트의 자이툰(Zeitoun)에 있는 콥트 교회의 성당 돔(둥근 지붕)에 천사나 천둥을 동반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것이었습니다. 자이툰은 2000여 년 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성가정이 피난을 가셨던 곳입니다.
(사진: 자이툰 성당 위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석양이 진 후 약 1 시간 반이 지났을 때 자동차 차고의 운전사와 정비공들은 길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경고 소리에 모두 놀랐습니다. 그리고 한 노동자가 거리로 뛰쳐나오며 소리를 질렀고 많은 사람들은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성당 돔 위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돔 위에서 걷기도 하였다. 이를 보던 사람들은 이 여인이 자살을 하려고 그렇게 높고 위험한 곳에 올라갔다고 생각하며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조심하세요. 잘못하면 떨어집니다."
사실상 동그란 돔 위에서 사람이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군가가 "성모 마리아다! 성모 마리아다!" 라며 외쳤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성모님께선 눈부신 광채에 덮인 형태로 돔 위에 나타난 것이며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자이툰의 성모 발현이 시작되었습니다.
발현 당시에 그곳에 나타난 비둘기들은 보통의 비둘기들과는 달리 크기가 컸고 밤에도 날아 다녔습니다. 교회 돔 위에 보였던 빛은 어떤 때는 오렌지색으로, 또는 연한 청색으로 교회를 후광처럼 둘러쌌었습니다. 자이툰에서의 성모님의 발현은 발현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즉 신자이든 아니든, 아니 오히려 회교도 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보였다는 매우 특이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음 웹사이트에 가시면 자이툰에 발현하신 당시의 자세한 설명과 사진, 동영상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zeitun-e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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