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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늘푸른극단
사)한국연극협회 남양주지부
등장인물
태석(떠돌이 대장장이)
신영(득수의 딸)
귀옥(태석의 처)
득수(태석의 친구, 장돌뱅이)
진주댁(퇴기, 주막집 주인)
배노인(목수)
박노파(엿 만드는 할머니)
영달(시외버스 기사)
영식(귀옥의 아들)
혜정(영식의 약혼녀)
작부
아이(진주댁 아들)
약장수
동동크리무 장수
사내(득수는 쫒는)
형사 1,2
쇠전 노인
소주인
이장(화전민 마을)
상여 소리꾼(화전민 마을)
장꾼들
주막집 손님들
화전민들
그 외 다수
시골장터
(확성기에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는 새마을 노래가 들려온다.)
70년대 중반의 전형적인 시골장터 풍경.
약장수 너스레 소리.
“뻥”튀밥을 튀기는 요란한 소리
대장장이의 쇠 소리. 농부 한사람 다가와 태석이 만들어 팔려고 내놓은 낫 등을 살펴보며 입을 연다.
태석 넘에 밥통에 방뎅이를 걸쳐 쌓소.
농부 저기, 요놈 끝으리 쪼까 갈아 주시오.
태석 스텡이라 안 되것는디.
농부 그래도 요것이 미젠디.
태석 미제고 뭐시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제.
농부 그래도 미젠디,
태석 요놈도 미제여.
농부 시방은 딸딸이로 맹근 것이 더 값도 싸고 잘 팔리는디.(농부의 말에 벌컥 화를 내는 태석)
태석 누군 모타 돌릴지 몰라서 팔뚝 빠지게시리 풍로질을 허것소! 기계로다가 쌩 돌린다치믄 하루에 낫 오백개 빼내기는 식은 죽 묵기제! 하지만 기계로 만든 연장허고 풍로 바람으로 참 숯불 이파서 맹근 연장허고 같간디!
농부, 태석의 말에 무안을 당한 듯 한마디 툭 대꾸한다.
농부 딸딸이로 맹그러 냄사 돈도 벌고 좋제잉. 힘이 남아돌아 풀무질이여. 미련시리.
말을 마친 농부, 휙 사라지자, 태석이 기분이 상한 듯 혼잣말을 내뱉는다.
태석 네미 씨부럴 놈이여!
음향 - 큰 숨을 한번 토해내고는 다시 묵묵히 메질을 시작하는 태석.
-암전-
쇠솥에 끓고 있는 술국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낡은 축음기에서 춘향가 중 월매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술집 주모답지 않은 곱상한 차림의 용모의 진주댁이 탁자에 않아 소리를 따라한다.
태석 여기, 뽁국 한 그릇 주셔!
진주댁, 태석을 보고 역시 걸쭉하게 응대한다.
진주댁 어숭 가져오믄 뽁국 끓여 줄끼다. 그란데 그 어숭이 힘을 쓰겄나? 다 늙어 갔고?
태석, 짐을 내려놓으며 가운데 탁자에 앉는다.
태석 싸게 한 잔 내와. 목 타 죽겄는디.
진주댁 오늘은 돈 많이 버렀는 감네. 목이 다 타고?
태석 모다 돌리는 대장간 땜시 이 일도 이제 못해 먹겄어.
진주댁 다음은 어디 장인교?
태석 갈담장. 거그가 이칠장 아녀.
진주댁 갈담장 가믄 콩잎 담그거나 사다 주이소.
태석 돈만 주어. 아, 꽉꽉 발바서 따러.
진주댁 식사는 우짤끼고?
태석 식사는 필요 없고, 이따가 따로 밥만 한 그릇 주면 뒤야.
진주댁 아이고, 젊은 색시 얻을라꼬 그리 돈을 아끼나?
태석 나 죽으면 진주댁이 초상 치러 줄것이여? 장바닥이나 떠돌다가 언제 밥숟가락 놓을지 모르는 목숨인디? 내 관 짜고 장례치를 돈은 지니고 있어야할 것 아녀.
하면서 쭈욱 막걸리를 한번에 들이키더니 이내 기분이 풀어진듯 진주댁의 엉덩이를 슬그머니 매만진다.
진주댁 김대장도 좋은 시절 있었을 때 마, 대장간이나 하나 차렸으면 그 무겁은 쇳덩이 안 매도 되고 장돌림 신세도 면했을 거 아이가.
태석 어는 씨러배 아들놈이 돈 벌라고 대장장이가 되었갔디? 그까짓 돈이사 마음먹기 달린 것 아니 것소! 이 대장장이는 일은 말이여. 속에서 불댕이가 솟데끼 화가 나고, 오장육부가 녹데끼 걱정이 있어도 매질만 한 번 하고 나믄, 갼하게 없어지는 걸 다른 이들은 모를 것이여.
진주댁 아이고 나도 이런 세월이 다 있었네. 보이소! 내 모습이 꼭 춘향이지예.
태석 뭐! 월매 갖고만 그려.(웃음)
진주댁 득수 아제 찍은 것도 여있네. 함 보이소.
태석 아, 싸게 밥이나 줘!(화를 내며)
진주댁 꼭, 득수 아제 이바구만 나오면 이까드라. 도대체 와 저 카노? 전에는 시상 천지에 둘도 없는 친구드만!
태석 득수 그 놈은 급살을 당해도 시원찮을 놈이여. 지놈이 내 가슴팍에 요로콤 못을 박아 놓고도 지명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여. 시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니였냐 말이여.
영상 - 득수와 태석 길을 걸으며 노래 사~사랑을 하려면 요~ 요렇게 한단다. 요 내 사랑 변치 말자 굳게굳게 다진 사랑 어화 둥둥 내 사랑 둥당가 둥당가 둥기 둥기 내 사랑 꽃과 나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우리네 사 사랑은 아이가이가 좋고 좋은 사랑
태석 마을 입구로 걸어오는 장면 영상 “영식아 아버지 오신다야!”태석 걸어오는 장면 영상 “영식이 아버지 오셔라”
태석 태산 같이 높은 사랑 바다 같이 깊은 사랑 어화 둥둥 내 사랑아 둥기 둥기 내 사랑아 명사십리 해당화 같이 연연고은 내 사랑아 연평 바다 그물 같이 얼퀴고 설퀸 내 사랑아 사랑 사랑 내 사랑아 둥기 둥기 내 사랑아
- 암전 -
버스 지나가는 소리. 햇살이 비치는 버스 차창 곁에 기대어 잠시 잠에 들었던 태석이 퍼뜩 깨어난다. 태석의 시선이 반대쪽 자리에 자주색 반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에 머문다. 신영은 자신의 옆 좌석 아낙네의 품에 안겨 잠든 소녀의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소녀의 손에서 인형을 훔쳐내 자신의 가방 안에 얼른 감춘다.
태석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했지만 무표정하게 다시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버스 멈추는 소리. 헌병과 순경 승객들을 둘러보며 검문을 시작한다.
아줌마 어매! 어매! 어찌야 쓰꼬. 어매! 어찌야 쓰꼬!
안내양 상봉리디요?
아줌마 도둑이야! 아무도 못 내린당께. 아무도 못 도망가게 싸게 문 닫어! 이 안에 내 돈 훔쳐간 도둑놈이 있슨께, 싸게 지서로 차 돌려! 언릉! 오매 어찌야 쓰꼬! 오매 어찌야 쓰꼬!
순경 버스는 가도 디야! 신분증. 물고구마 아녀! 당신 큰 집에 갖다온 적 있지? 있구마이! 아씨 별이 몇 개여?
헌병 야, 아직 이걸 들고 다니네. 백순경님! 이거 뭔 줄 아세요? 이거 모루에요. 매질할 때 쓰는 거.
태석 아, 젊은 양반이 그런 걸 다 아시네.
헌병 네, 저희 삼촌도 화순서 대장간 하시거든요.
태석 아, 그러신가?
순경 다 치우셔!
태석 아, 그러지라.
순경 아가씨 이리 와봐. 소지품 내놔 봐. 어딜 가는 길이여.
신영 신장리 지나 단천골이요.
순경 거가 집이여.
신영 아뇨, 서울이요.
아줌마 아따 선상님. 그런데다 넣어 났것소! 요런 스타킹에도 잘 감춘다는디!
순경 아줌씨! 단천골엔 왜 가는디?
신영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요. 장례치루러 가는데요.
순경 니 아부지 땅에 묻으로 가는디 스마일 뱃찌는 왜 달구다니는가잉. 이것도 풀러 봐 잉.
아줌마 아, 싸게 풀러 보랑께.
신영 (보따리를 푼다)
순경 너 얘기 엄마여.
신영 (고개가로 짓는다)
순경 장례치루러 간담서? 그란디 이런 걸 뭐더러 쌓아 갖고 다녀?
신영 아저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아줌마 아이고, 어찌야 쓰꼬! 그놈의 돈이 여기 있어 부렀네. 내가 언제 고쟁이 속에 넣어 놨디야. 참말로 이놈의 돈이 발이 달렸던 모냥이여? 미안허요. 선생님들 수고들 허시오.(뛰어나간다)
순경 치마가 너무 짧은디? 아저씨도 머리 좀 깍으시오. 아저씨. 신분증.
신영 무대 언덕위에 서있다.
신영 아저씨. 신장리는 어디로 가요?
태석 따라와. 아까 그 차가 막차였는디, 참새 걸음으로 밤새 걸을 참이여!
- 영상 -
세찬 눈보라가 몰아 쳐온다.
벌판을 걸어오는 태석과 신영.
영상 끝나면 폐가 안. 신영 노래를 부른다.
신영 아저씨 종이 있어요?
태석 없는디? 쪼간 기다려 봐라 잉.
신영 됐어요. 사~사랑을 하려면 요~ 요렇게 한단다. 요 내 사랑 변치 말자 굳게굳게 다진 사랑 어화 둥둥 내 사랑 둥당가 둥당가 둥기 둥기 내 사랑 꽃과 나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우리네 사 사랑은 아이가이가 좋고 좋은 사랑
태석 시방 부른 그 노래 말이여. 퍽 오래된 노랜디? 니가 그 노래를 어떻게 아냐?
신영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태석 부친이 뭘 허셨던 분인디?
신영 숯을 구우셨어요. 화전도 좀 일구시구요.
태석 넌 서울서 뭘 허냐?
신영 명동에 있는 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 안내양을 했는데요, 몸이 아픈 거 아니냐고 그만두랬어요. 난 피곤해서 잠깐씩 졸은 거 뿐 이였는데, 처음엔 평화시장에 있는 다락방에서 미싱 시다를 했어요. 새우처럼 등을 구부려서 하루에 16시간씩 가위질을 했는데요. 너무 힘들어서 깜빡 잠이 들면 작업반장이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서 잠을 깨웠어요. 우리 시다들은 밥을 먹을 때도요. 제대로 씹을 시간도 없었어요. 밥 위에 먼지가 내려앉아도요, 젓가락으로 먼지를 걷어내고 그냥 밥을 먹었어요. 일 년 쯤 있다가 친구 소개로 구로동에 있는 메리아스 공장으로 옮겼어요. 거긴 유니폼도 있었구요. 밥도 맛있었어요. 김씨라는 작업반장이 있었어요. 오바로크 기술자였는데요. 나한테 참 잘해줬어요. 시간도 잘 쳐주고, 잔업도 자주 빼주고, 동무가 없을 땐 영화구경도 시켜주고요. 유원지도 같이 놀러갔어요. 작업반장 아이를 갖었어요. 그 사람은 영등포에 있는 허름한 병원으로 날 데려갔어요. 까운에 땟자국이 있는 나이 많은 의사가 고무장갑을 끼면서 누우라고 했어요. 분명히 마취를 한다고 했는데 허리를 칼로 찌르는 것 같이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어요. 엄마! 엄마! 엄마! 병원을 나오니까 밖은 어두워져 있었어요. 골목길은 냄새가 나고 더러웠어요. 난 병원 쪽을 돌아보며 침을 뱉었어요.(침을 뱉다가 간질병으로 이어진다)
사~사랑을 하려면 요~ 요렇게 한단다. 요 내 사랑 변치 말자 굳게굳게 다진 사랑 어화 둥둥 내 사랑 둥당가 둥당가 둥기 둥기 내 사랑 꽃과 나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우리네 사 사랑은 아이가이가 좋고 좋은 사랑
태석 오사랄 놈! 그 놈이 그때부터 다 속셈이 있었던거여. 분첩을 줄 때부터 수작질을 꾸미고 있었다니께.
득수(소리) 태석아 분첩이 이뿐 것이 눈에 띄 길래 하나 샀다. 요놈 네 각시 갖다 줘라. 자 가불자고! 그라믄 순창장서 보세!(영상과 함께/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DJ멘트 소리)
멘트 - 단기 4289년 4월 9일 음악의 향기 시간입니다. 첫 곡은 아일란드 민요 아, 목동아를 바이올린 연주로 들으시겠습니다.
태석 아! 아! 살살! 살살! 그러다가 고막 다치겄소.
귀옥 아휴! 뭔 엄살은.. 쪼까 게시오. 다 나와가니께.
태석 아! 아!
귀옥 아이고, 이게 뭣이여 지져분허게. 귀지가 꼭 솔방울 만헌게 쌓여 있구먼.
태석 어~ 귓속이 뻥허고 뚫렸구먼.
귀옥 그란께 세수헐때 귓속도 깨끗허게 닦으시오, 콧구멍 속도 잘 씻고. 알긋지라.
태석 그려.
귀옥 이짝 귀. 영식 아부지. 이 장터 저 장터 떠돌아 댕기는 장돌림 그만 두고, 읍네에 쪼까난 대장간 하나 차립시다.
태석 아, 나가 돈이 어디 있간디 대장간을 차려.
귀옥 이 집을 줄이면 될 것 아니것소.
태석 이 집은 절대로 손 못돼. 아번님이 물려 주신건디. 그라고 난 이리 저리 떠돌아 댕기는게 좋터라. 답답허지 않고.
귀옥 무신 역마살이 끼었나? 이 분첩 참말로 영식이 아부지가 샀어라.
태석 아, 그럼.
귀옥 당신 요로코롬 고운 걸 고룰 줄 모르는디? 언능 바른대로 말 허시오. 누가 요놈을 사줬소.
태석 득수가!
귀옥 그라지라. 득수 아제지라. 득수 아제니께 요런 거를 고룰 줄 알제
태석 우리 각시 업어 줘야제. 나 없을 때 집에서 수고 많았슨게.
귀옥 당신은 업어주는 거 밖에 몰라라. 시두 때 두 없이.
태석 싸게 업히라니께.
귀옥 영식이 깨요. 겨우 잠들었는디.
태석 어화 둥둥 내 사랑아/ 둥기 둥기 내 사랑아/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은을 주면 너를 사랴/
장면 변화 선술집
득수 태석아! 왔냐. 한 잔 혀라.
태석 오래기다렸제. 근디, 너 얼굴이 안 좋다. 뭔 일 있었냐?
득수 태석아! 암만 혀도, 나가 일을 벌려야 쓰것다.
태석 뭔 일?
득수 비단을 사 갖고, 쪽 물을 들여 팔믄 열곱이 넘는 장사거든 광주에 포목점 크게 하는 놈이 물건만 갖고 오면 파는 건 문제 없다더라. 태석아! 나 돈 좀 꿔줘라.
태석 그려(호주머니에서 돈을 찾는다)
득수 한 이십만원은 있어야 쓰것다. 비단 10필 살라믄. 시방이 딱 쪽물 드리긴 좋은 계절인디야. 한 달 허면 열 곱이 나온다니께.
태석 나가 그만한 돈이 어딨냐. 그라고 거시기 이참에 네가 장에 내다 파는 일은 그만두면 어떨까? 그냥 물만 들여 주는 것이 자네 성품에도 맞고, 거시기 맴도 더 편안해 지고 말이여.
득수 진주댁! 술 비었당께. 아따 뭐허요, 안주거리 더 안네오고! 집어 칠꺼여. 니 말대로 다 집어 칠꺼여.
태석 너 왜 이러냐?
득수 장사 그만 두라메. 진주댁 가서 가세 갖고 와. 가세. 네 저놈의 천때기들 모다 싹뚝싹뚝 잘라 벌랑게. 가서 가세 갖고 와. 네가 친구여! 네가 내 친구믄 날 믿는 것이여. 고것이 친구여. 그란디, 뭣이 어쩌고 저쩌야! 날 보고 평생 물쟁이로 썩어 지내라고.
태석 그려, 득수야 나가 잘 못 혔다. 잘 못 혔어.
득수 진주댁 가세 갖고 와. 가세. 내 저놈의 천때기들 모다 짤라 버릴란게.
태석 (Top) 득수야! 너 이놈 갖고 필요한 돈 빌려 써라. 우리 집문서여. 귀옥이도 득수 아제 일이라니께 별 말 없드마이. 자~
영상 - 막 읍내로 들어서는 태석과 신여. 삼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두 사람 잠시 머뭇머뭇 거리다가 태석이 말한다.
태석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쓰것구먼. 신장리 가는 버스가 아직까지 있을란지 모르것네. 하여간 장례 잘 치르고.
신영 (꾸벅 절하며) 안녕히 가세요.
태석 그려.
태석, 신영과 작별하고 큰길 저쪽으로 올라오는데 그 자리에 잠시 밍기적 거리고 있다가 발걸음을 옮기는 신영.
- 영상 -
어두운 부엌 안에 할머니가 조청을 끊이는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있다. 태석, 방금 만든 엿 토막 하나를 덥석 입에 물고 소리친다.
태석 시방! 뭐허는 짓이여!
최할머니, 가슴이 떨어져라 놀라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디 껄껄거리는 태석을 알아보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최할머니.
최할머니 이 오사랄 것. 난 또 순사가 왔는지 했네. 오메 놀래 부렀네.
태석 그런게 아줌도 거시기 밀가루나 옥수수 같은 것으로 엿을 맹그시오. 뭐더러 비싼 쌀밥 쪄서 엿을 맹근다고 요로고롬 속을 태우시오.
최할머니 날더러 길바닥에서 파는 깡통 엿이나 맹글라고? 엿 맹그는게 무신 도적질 허는 것도 아닌디 일 한번 하자믄 꼭 도적질 허듯끼 숨어서 혀야 하는 시상이니? 당췌 원!
태석 아짐.(귤을 건네주며)
최할머니 왠 비싼 밀깡이여. 눈땀시 낼 장날에 장사치들도 많이 못나오게 생겼구먼.
태석 아 근디, 뭔 일로 사람까지 넣어서 날 보자고 기별을 혔소. 나가 보고 잡아서.
최할머니 그 화상이 보고 잡퍼. 실은 말이여. 몇 칠전에 김대장 안사람이 다녀갔어. 귀옥이 말이여.
태석 지까짓게 여가 어디라고 함부로 찾아와!
최할머니 달포 후에 집안에 뭔 중요한 일이 있담서 꼭 한번 들려 달라든디. 옛날 현천마을 집을 다시 사서 거그서 살고 있다드만.
태석 소금을 뿌려서 당장 쫒아 냈어야제. 아 그 인간도 아닌 걸 발길을 들여 놓게 했단 말이여.
최할머니 꼭 좀 들려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어.
태석 그깐년이 날 만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여.
최할머니 밥 뜸들이는디 밥이나 먹고 가~
태석, 최할머니가 건네준 쪽지를 건성 한손에 쥔 채 기와집을 나선다. 그러나 왠지 마음이 크게 흔들린 것을 감출 수 없다.
- 대합실 -
대합실 난로가. 졸고 있는 신영. 운전기사 소주병을 까고는 오징어 한 마리를 난로 뚜껑 위에 올려놓는다. 왠지 좀 껄렁한 끼가 있는 영달.
신영 아저씨 단천골 가는 버스 언제 와요?
영달 (경상도 말로) 단천골? 쌍계사 너머? 거기 버스 몬간다. 눈 때문에 나도 아까 하동서 겨우겨우 왔는데 돌아가지 몬하고 여기서 날밤 안 새나.
신영 오늘 꼭 가야 하는데
영달 꼭 갈라믄 걸어가는 수 밖에 없데이. 대신 얼어 죽을 각오하고. 영하 십오도가 넘는다 카든데
신영 (밖을 보며) 큰일 났네.
신영, 불현듯 자신의 다리에 시성이 가자, 신고 있던 스타킹이 난로 불에 타버려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한다.
신영 어 스타킹이 탔네. 에이 산지 얼마 안 된 건데.
신영, 스타킹이 타 버린 것이 못내 속상한 듯 곁에 있는 영달도 의식하지 않고 무심코 자신의 다리를 자꾸 매만진다. 영달, 신영의 하얀 다리를 바라보다가 다소 엉뚱한 신영의 모습에 딴 생각이 슬그머니 치솟는다. 영달, 소주 한잔을 털어 넣고 신영에게 권한다.
영달 한잔 할라요? 눈도 왔는데,
영달, 슬쩍 신영의 반응을 살피는데 신영이 싫다는 대답을 하지 않자 소주를 따라 신영에게 건네준다. 신영, 소주를 쭉 들이키자 오징어를 찢어준다.
영달 잔을 비웠으면 돌려야제.
신영, 영달에게 잔을 돌려주며 소주를 따라준다.
영달 와, 아가씨 주법이 딱 됐네. 따르는 폼도 딱 됐고,(마시고 신영에게 다시 잔을 돌린다)
앗따 술 맛 좋네. 자 한잔 더 받으이소.
신영, 한잔을 더 받아 마신다. 술기운에 몸이 풀리는지 다소 기분이 들뜨는 신영.
영달 아가씨 술 어디서 배웠소. 주법이 딱 됐는데.
신영 밤차
영달 밤차? 홍익회에서 일했나?
신영 (킥킥 웃으며) 우리 가게 이름인데... 내가 전에 있었던
영달, 그제서야 그곳이 술집 이름임을 알고 신영에게 노골적으로 수작을 붙인다.
영달 (서울말을 흉내 내며) 아가씨 내가 스타킹 사줄까? 우리 말 만 통하믄 열 컬레두 사 줄 수 있어.
신영 (오징어를 입에 문채) 왜 내가 남한테 거저 받아요?
영달 그럼 우리 화투치기 하까? 분위기를 바꽈서... 응?
읍내 골목에 자리 잡은 오래된 여인숙. 밤바람이 벌판을 스치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온다.
태석, 쪼그려 앉은 채 빌린 냄비로 여인숙 아궁이 불 위에 라면을 끓이고 있다.
이윽고 라면이 다 끓자 냄비를 들고 여인숙 방으로 들어가는 태석
- 과거 -
어두운 부엌 안에서 밥상을 차려 들고 나오는 귀옥, 방문이 닫혀있는 단칸방을 향해 걸어간다.
고무신을 벗어놓고 툇마루로 올라서는 귀옥, 아내가 벗은 신발 옆에 남자의 구두 한 켤레가 보인다. 순간 방문이 열리자 밥상을 든 귀옥이 들어가고 벽에 길게 드러누운 친구 득수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스르르 방문이 닫히자 귀옥을 껴안는 득수의 그림자. 두 사람 한데 엉켜 바닥에 눕는다. 담벼락에 선 채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이 쌓여 멍하니 서 있는 태석을 향해 사나운 개가 이빨을 드러내며 마구 짖는다.
운전기사와 신영, 마주앉아 화투를 치고 있다. 판이 끝나자 점수를 세는 운전기사 영달.
영달 홍단, 청단에 싸리약, 비약... 내가 또 이백점 이깄다. 그라믄(점수 적은 것을 합산하면) 니가 내한테 줄게 다 천이백점이다.
신영 (약이 오른 듯) 빨리 돌려요.
영달 계산하고 하자. 천이백원 도고.
신영 한 판 더 하구요.
영달 니 돈 없제? 그라믄 옷 이나 벗어라. 한 벌에 삼원쓱이다. 와 비싸네!
신영, 가만 생각하다가 목에 두른 스카프를 벗는다.
신영 됐죠? 인제 돌려요, 화투
영달, 노골적으로 말한다.
영달 시간 버리지 말고 함 하자. 내 이천원 주께.
영달, 천원짜리 지폐 두장을 꺼내 신영에게 주며 덥석 신영의 오른손을 잡는다. 그러자 신영의 차가운 나무 의수를 느끼는 영달, 기분 잡친듯 내 뱉는다.
영달, 웃옷을 확 벗어젖히며 신영에게 달려든다.
영달 그라믄 밑에만 벗고 하자.
신영, 영달과 몸싸움을 하다가 영달의 손목을 깨물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방을 뛰쳐나간다.
자그마한 마당 곁으로 길게 뻗은 마루를 뛰어가 불쑥 불 켜진 방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신영.
태석, 잠자리에 들기 위해 옷을 벗고 있는데 느닷없이 신영이 울먹이며 뛰쳐 들어온다.
신영 살려주세요.(태석을 알아보고) 아저씨 살려주세요.
신영, 태석 뒤 방구석에 웅크려 숨는다. 영달, 흥분한 채 방안의 신영에게 소리친다.
영달 내가 우엤는데? 빨리 나온 나!
신영 (영달을 향해 태석을 가리키며)나, 아는 아저씨에요.(태석에게 확인하며) 그렇죠, 아저씨?
영달 쇼 하네. 나와! 마저 화투쳐서 내 돈 갚아야제 천이백원!
신영 (훌쩍이며) 장난인데 뭐!
영달 장난? 비싼 방값내고 장난 화투 치러 왔나 니?
태석, 내심 신영과 영달의 실갱이에 간여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신영 (태석에게 사정하듯) 아.. 저.. 씨...
영달, 태석이 신영 편을 들지 않고 가만있자 불쑥 방으로 들어와 신영을 다독인다.
영달 누가 잡아 묵나. 화투마저 치자카는데
영달, 신영을 일으켜 데리고 나간다. 신영,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듯 영달의 손에 붙들려 막 방을 빠져나가는데 태석의 소리가 나직이 들려온다.
태석 돈 주면 되겄지... 잃은 돈.
영달과 신영, 태석을 바라본다,
태석, 전대 꾸러미 안에서 꼬깃꼬깃한 백원짜리 지폐 열두장을 헤아려 영달에게 건네준다.
태석 여기 있수... 천이백원.
영달, 태석을 빤히 노려보자 태석이 부탁하는 어조로 조용히 입을 연다.
태석 놔 주씨요.(더듬으며) 내 먼 조카.. 딸인디..
영달, 태석의 표정이 절실하게 느껴져 신영을 포기하고 만다.
태석의 손에서 받아든 돈에서 이백원을 돌려주는 영달
영달 방 값 천원만 받을끼구마.
영달, 사라지자 방문을 닫으며 다시 방으로 들어오는 신영.
신영 돈을 뭐 하러 줘요. 내가 호군줄 알아 나쁜 새끼!
신영, 핸드백에서 분첩을 꺼내 열어 거울을 보며 범벅이 된 검은 자국을 지운다. 이때 태석의 시선이 신영아 들고 있는 분첩에 머문다. 낯익은 분첩이다.
태석, 어떤 강한 느낌에 이끌려 분첩을 바라보면 불국사의 석가탑이 그려져 있다.
그런 태석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화장을 고치고 분첩을 탁 닫는 신영.
태석 물어볼게 있는디.. 니가 가지고 있는 그 분첩 말이다. 워디서 난 것이여?
신영 아버지가 준 건데요.
태석 부친이 돌아가셨다구 혔제?
신영 네
태석 부친 고향이 어디시냐?
신영 벌교라고 그러시던데요.
태석 부친 함자가 득자 수자 쓰시냐? 예전에 염색도 허셨고?
신영 네. 김득수씨요. 근데 우리 아버지 어떻게 아세요?
태석 (사실을 확인하고) 옛날 장터에 같이 좀 다녔제.
신영 (하품하며) 세상이 넓고도 좁다더니. 이렇게 아저씨랑 만난 것도 인연이네요.
태석 결국 그렇게 갖구먼. 다 지 업보여. 지 업보를 치룰라니께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간거여.
신영, 말을 마치자 금세 잠에 빠져든다. 어느새 새근새근 자고 있는 신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바람이 세차게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 과거 -
장터가 활기를 띄던 어느 장날의 풍경. 장터 구석에 거적을 두른 간이 대장간이 보인다.
태석, 얼기설기 쌓은 화덕 앞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메질을 하고 있다.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물끄러미 태석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 태석이 입을 연다.
태석 너그들 선상님한티 두들겨 맞을 때 있제.
아이들 네.
태석 선상님이 너그들 때릴 때 워디 미워서 때리는가? 사람되라고 때리제.
아이들 네.
태석 (담금질을 시작하며) 연장 맹글 때 시우세 매질하는 것도 마찬가지여. 그라고 이 풍무질은 여자 다루드끼 다루어야 되는 법이여. 뭔 말인지 알것냐?(웃음)
약장수 태석이! 태석이. 싸게 와봐.
태석 시방 한 잔 할 짬이 없어.
약장수 싸게 가 봐야 한다니께.
태석 이따 해 질녁에 목포집에서 보드라고.
약장수 득수가 시방 강물에 빠져 죽겠다고 난리법석을 치고 있구먼. 암케도 태석이 자네가 가 봐야 쓰것네.
태석 뭔 일 있었는가?
약장수 쪼까전에 술 취해서 와갔고는 쥐약을 달라고 허길래. 기분이 영~ 거시기혀서 약을 안 팔았제. 그 길로 강가로 달려간 모냥이여.
태석 그 자식 또 술주정이여.
약장수 나무장사하는 석돌이가 봤다는디. 득수가 목포집서 놀음을 허다 설래꾼들한티 돈을 홀딱 다 털려버렸다는구먼.
득수 난 죽어야 헌당께! 나 죽어야 돼! 나 죽어야 된당께! 나 봐! 나 보랑께!
태석 너 대체 왜 그려!
약장수 식칼이패들이 사람도 죽이는 놈들인디, 미련스럽게 그 패들하고 화투장을 잡어.
태석 너 대체 얼마나 잃었다고 이 난리냐? 오늘 번 돈 다 잃었냐?
득수 난 죽어야 돼. 난 죽어야 된단께.
태석 물건도?
득수 난 죽어야 된다니께!
태석 잊어부러라. 아, 돈은 또 벌믄되제. 나가 오늘 많이 벌었슨께. 우리 그 놈 반쓱 나누자 잉.
득수 미안하다 태석아! 날 용서할 수 있겄냐? 아녀, 절대로 용서 못 헐 거여.
태석 친구사이 용서 못 헐 일이 뭐있겄냐?
득수 니 집문서도 다 날려부렀다.(태석이 뛰쳐나간다)
식당에 식칼일행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이때 태석 들어온다.
태석 저 여그 식칼이라는 분이 뉘시오?
식칼 나가 흑산도 식칼인디? 나한테 뭔 볼일 인가? 으잉, 올 봄에 꿔간 보리 서말 갚을라고?
태석 지 친구 몰라 뵙고 큰 실수를 헌 모양인디, 집문서 좀 돌려주셔.
식칼 놀음하다 잃은 돈 물어내라 것이 헌법에 나온당가? 새법에 나온당가?
태석 제발 좀 돌려주셔. 시방 제가 가진 돈 다 드리것소.
식칼 아따 술 맛 떨어져부네. 아그들아 가자! 아따 뭔 놈의 날씨가 구질구질혀.
태석 (식칼의 앞을 가로막고 무릎을 꿇고) 집문서 좀 돌려주셔. 요로코롬 빌것소.
식칼 어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거여. 한 번 지나가분 판은 지나가분 판이고, 이 식칼의 성깔을 건드려서 오진꼴 보지 말고, 좋은 말할 때 돌아가라고!(발로 태석을 찬다)
태석 집문서 돌려 달라니께!(식칼의 멱살을 잡으며)
식칼 (태석을 때리며) 네미 지랄하고 자빠졌네. 에이 씨벌 놈!(칼을 꺼내며) 일주일 내로 집 비워부러라 잉. 그 정돈 나가 봐 줄라니까.
태석 내 집문서!(식칼의 등에 낫으로 찍는다. 식칼의 똘마니들이 태석을 때린다. 이때 경찰 들어온다. 태석 오라줄에 묶여 끌려간다. 주제음악 들려온다)
두부장수가 종을 치며 지나가는 읍내 비좁은 골목길을 걸어오는 귀옥.
골목 끝에 다다르자 누군가 불쑥 골목 앞을 가로막고 나선다.
귀옥, 흠칫 놀라 바라보면 득수다.
태석 철창 안에 있다.
득수, 귀옥에게 뭔가 열심히 얘기하고 있다.
굵은 쇠창살이 처진 창가에 치적치적 비가 내리고 있다. 기결수복을 입은 태석.
양산을 쓰고 득수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귀옥. 서로 친하게 어깨에 붙은 것을 털어주기도 한다.
보따리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막 출소한 태석이 들뜬 걸음으로 집으로 향해 걷는다.(영상)
태석 멘트 4년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나오니께, 시상이 많이 바꿔져 있었제. 그 넓은 뻘도 그새 다 논으로 변했고.
어두운 부엌 안에서 밥상을 들고 나오는 귀옥, 단칸방으로 향한다. 댓돌위에 놓인 남자 구두 한 켤레. 방문을 열면 친구 득수가 편한 자세로 벽에 기대여 누워있다. 밥상을 든 귀옥이 들어가면 다시 문이 닫히고 귀옥을 껴안는 득수의 그림자. 두 사람 한데 엉켜 방바닥으로 쓰러진다.
담벼락에 우뚝 선채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에 쌓인 태석. 태석 방문을 연다. 귀옥, 득수 놀란다.
태석, 금분처럼 깔린 모래밭에 주저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울음을 토해낸다.(영상)
신영 아저씨! 아저씨!(태석을 발견하고) 아저씨! 아저씨! 주무시는 거 같아서 인사도 못드리고 나왔어요. 안녕히 가세요.
신영, 태석 곁을 떠나 반대쪽 거리로 나선다. 태석, 신영을 향해 소리친다.
태석 그쪽으로 가면 워떻혀. 버스 정류장은 이쪽편인디.
신영 신장리 가는 버스가 끊겼대요. 눈땜에... 걸어가려고요.
신영, 다시 뒤돌아 발길을 옮긴다. 그 때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치는 태석.
태석 걸어 가! 그 꼴을 하고 걸어가! 이 미친 것아! 거기가 삼십리가 넘는 길인디 이 꼴을 하고 걸어가? 눈가에 얼어 뒈질려구 환장 혔냐! 니 머리엔 대체 뭐가 들었간디, 미련한 짓만 골라서 허냤 말이여! 니 에비 죽고 너까지 송장 칠려구 이꼴하구 걸어간다는 거여!
태석, 몹시 성난 얼굴로 신영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신영의 팔을 나꿔채며 어디론가 끌고 간다.
소리 - 야가 입을 것인디 솜바지 하나 주시오. 털장화도 한 켤레 꺼내 주시고....
태석 죽어도 싸지! 암 죽어도 싸구말구! 눈도 편히 못 감었을꺼여. 지가 그 짓을 허고도 편히 눈을 감았을 것 같혀?
신영, 솜바지와 털신으로 바꿔 입은 차림으로 태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길을 떠날 차림으로 무거운 모루를 어깨에 다시 둘러매는 태석, 신영을 앞장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다.
영문을 몰라 태석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는 신영을 향해 태석이 소리친다.
태석 뭐하고 있어! 싸게 따라오지 않구! 해질녘까지 닿으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할텐디!!
신영, 그제서야 태석이 함께 동행해주는 것을 알고 기쁜 듯 그 뒤를 따른다.
- 영상 -
꽁꽁 얼어붙은 강
하얀 눈길
태석 목도리를 신영에게 걸쳐준다.
멀리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낡고 초라한 병풍 한 폭이 둘러친 빈소 앞에 득수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놓여있다.
동네이장. 빈소 앞에 큰절을 하고 일어난다.
누군가 빌려준 듯한 삼베 상복에 새끼줄까지 이마에 두른 신영. 마치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멍하니 서 있는데 동네이장이 신영을 향해 절을 하자 앉아 있던 태석이 맞절을 하라고 신영에게 손짓한다. 동네이장 맞절을 끝내고 주머니에서 심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조의금으로 방바닥 위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태석과 신영을 향해 입을 연다.
이장 아니 신영이 너 이 눈길에 어떻게 왔냐?
신영 저 아저씨가 데려다 주셨어요.
이장 어이고, 이런 고마울 때가. 얘, 신영아. 시방은 땅도 얼어 팔수도 없고 한께, 천상 몇 일 기다렸다가 눈이 녹으면 그때 장례를 치러야 쓰겄다. 그란디 준비는 좀 해 왔냐? 아, 장례 치룰 돈 말이여.
신영 못 구했어요.
이장 허이고, 이거 야단났구마이.(농에서 천을 한 필 꺼내며)너그 아부지가 숨을 거두기 몇 일 전인가, 나를 부르더니 쪽물 들인 요 천으로 수의를 맹그러 달람서 달랑 요놈 하나 냉겨 놓고 떠나 부렀다. 당장 품값은 줘야 수의를 맹글테고, 관짤 낭구도 거져 얻을 수 없는 노릇이고, 하다못해 상여꾼들 막걸리라도 멕여야 상여를 맬 것이 아닙니까이. 여그야 겨우 끼니나 이어가는 동래라 추렴할 것도 없고, 얘 신영아 상주가 되 갖고 빈손으로 오다니 너도 참 딱한 아이다.
태석 저 거시기 요놈 갖고 어떻게 해 보쇼.
이장 (이장 돈을 받으며) 아이고 이놈이면 그럭저럭 되겄네요. (일어서며) 그럼 구할 것도 알아보고 지서에 전화로 화장 신고도 한 통 넣어야 것고... 낼 바람이나 안 불어야 헐틴디
이장, 막 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스친 듯 태석에게 묻는다.
이장 저 성함이 워찌 되시오?
태석 나 김가요?
이장 혹시 저 김태석씨 아니당가요? 상냥간 일 허시는?
태석 날 어찌 아시오?
이장, 짐작이 맞는다는 듯 숨을 토해내며 다사 태석 앞에 앉는다.
이장 역시 그러셨구만요이. 시방 주신 돈이 크다면 큰 돈 인디. 아, 그런 돈을 선 듯 내실 때 생각이 딱 스치더란 말이여. (농에서 뭔가를 꺼낸다) 득수 지헌티 수의를 부탁허던 날 자기가 죽고나면 이 편지랑 요 보따리도 김태석이란 친구헌티 꼭 좀 전해달라고 유언을 남기더란 말이시. 저 갈담이나 오수 곡성 장터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람서 아주 신신당부을 합디다요. 그라믄 고인이 원하는 대로 잘 전해드렸구마이. 지는 낼 날 밝는 대로 다시 오겄습니다.
태석, 봉투 안에서 오래된 편지 한 뭉치를 꺼내 그중 하나를 들여다본다. 밀봉한 채 소인이 찍히지 않은 우표가 붙은 편지 겉봉에는 박석태씨 전상서 라고 쓰여 있다. 다시 뒷장을 살펴보는 태석, 그곳에는 이 귀옥 올림 이라고 발신인이 적혀있다. 태석,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다른 편지들을 살펴보면 십여통의 편지가 모두 자기 앞으로 수신인이 되어 있으며 또한 모두 부인 귀옥이 보낸 편지이다.
득수 (소리) 태석이 보시게. 그날 일을 사실대로 밝혀야만 내가 이승을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네. 자네가 그때 교도소에 있는 동안 자네 안사람은 바느질로 살림을 이어가고 있었네. 그 날 난 자네 안사람에게 일감을 구해 주느라 읍네 포목점 주인에게 소개를 시켜주고 돌아오는 길이였네. 청요리집에서 화주를 한 잔한 난 기분이 그럴 수 없이 좋았다네. 다 그 쪽빛 때문이었어. 하늘은 온통 쪽물을 들인 듯 푸르딧 푸르렀네. 내가 쪽물을 들인 자네 안사람의 치마저고리는 눈이 시리다 못해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네. 어릴 때 날 버리고 집 나간 울 엄니 치맛자락 같아서 였을까? 난 그대로 돌아가기가 싫어 자네 안사람에게 술상을 봐 달라고 억지를 부렸네. 참말로 순간적인 일이었네. 마침 그때 자네가 나타났던 거여. 난 그 길로 죽으려고 했네. 그 길만이 자네와 귀옥에게 사죄할 길이라고 여겼으니께. 근데 참아 죽을 수가 없었네. 오히려 난 귀옥에게 되돌아가 이참에 차라리 함께 살자고 사정을 했네. 그란디 귀옥인 내가 해준 치마저고리와 그 분첩까지 돌려 주구마이. 그 날 이후 수십 차례 자네한테 편지를 썼지만, 붙이지 못했네. 태석이 날 부디 용서해 주게나.
- 과 거 - (영상)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상을 차리는 귀옥.
득수 벽에 기대 있는 모습, 귀옥이 밥상을 들고 오자 귀옥을 덥석 껴안고 방바닥에 쓰러뜨린다.
귀옥, 득수를 밀쳐낸다. 득수, 절실한 표정으로 귀옥에게 함께 살자며 석가탑이 그려진 분첩도 자신이 선물한 것이라고 밝힌다. 귀옥, 분첩을 꺼내 득수를 향해 내던져버린다.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문을 여는 귀옥 문 앞에 서 있는 태석과 시선이 마주친다. 득수 역시 태석을 발견한다. 황망히 자리를 떠나는 태석. 귀옥, 태석을 부르며 달려간다. 그러나 아무 대꾸 없이 뒤도 한번 안돌아보고 저만치 언덕위로 사라져가는 태석. 귀옥, 어느 나무아래 선 채 애타게 태석을 부르지만 태석은 멀리 모습을 감춘다. 망연자실 홀로 오랫동안 서 있는 귀옥.
신영 아저씨. 우리 아버지가 아저씨한테 무슨 나쁜 짓 했죠. 그쳐. 우리 아버지는 요, 술 주정뱅이에 거짓말쟁이에 나쁜 바람둥이에 8살생일 날이었어요. 아버진 날 장터에 데려가서 새 운동화도 사주시고요. 자장면도 사줬어요. 그때 자장면을 처음 먹어 봤어요. 너무 맛있어 가지구요 다 먹은 빈 그릇을 막 할탓더니 한 그릇을 더 시켜줬어요. 그리고 중국집을 나왔어요. 아버진 볼일을 보고 근방 온다면서 뽑기를 하고 기다리라고 돈 백원을 줬어요. 뽑기를 십원어치 이십원어치 할 때까지 아버진 돌아오지 않았어요. 백원을 다 써버릴 때까지 아버진 돌아오지 않았어요. 뽑기 장수 아저씨도 자리를 떠나고 장터는 어느새 캄캄해지기 시작했어요. 난 막 울면서 텅빈 장터 안으로 아버질 찾아다녔어요. 그때 마침 동네 아저씨를 만났어요. 그 아저씬 아까 우리 아버지가 어떤 아줌마랑 버스를 타고 떠나는 걸 봤다고 했어요. 난 아저씨를 따라 단천골로 돌아왔어요. 집에도 아버진 없었어요. 몇 일 밤을 아버지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방 안은 나 혼자였어요.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무서워서 막 소리를 질렀어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나쁜 놈!!! 아버지 나쁜 놈!!! 아~!!!!(간질)
태석 그려, 네 아부진 나쁜 놈이여. 아주 나쁜 놈이여!! 그란디 어쩔것이냐. 느 아부지 이미 떠났다. 떠난 사람 위해 우리가 뭘 어쩔것이냐. 느 아부지 묻어주자. 까짓거 잘 묻어주자. 느 아부지 묻을 때 느 아부지가 우리한티 한 그 몹쓸 짓들도 다 같이 묻어버리자.(신영 울며) 그려, 그려.
상여소리 불상하다 이내 일신
인간 하직 망극하다.
무정세월 여류하여
원수백발 돌아오니
전통하고 애답도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 말아
명년 삼월 봄이 되면
너는 다사 피련마는
우리인생 한번가면
다시 가기 어려워라
북망산천 돌아갈 제
어찌 할꼬 산심험로
언제다시 돌아오리.
이 세상을 하직하니
불쌍하고 가련하다.
태석과 신영, 언덕 위에 올라 득수의 뼛가루를 말없이 흩날린다. 굽이굽이 펼쳐진 눈 덮인 산줄기를 향해 허공 위로 날아가는 하야 잿 가루. 음악 끝난다.
신영, 난로 가에 우두커니 서 있다. 잠시 후 태석이 다가온다. 태석, 신영에게 차표 한 장과 삶은 계란 몇 알을 건네준다.
태석 요건 전주꺼정 가는 차표고, 이건 가다가 시장할 때 요기혀.
신영, 고개를 끄덕이며 태석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가득 두 눈에 맺혀 있다. 태석, 뭔가 눈치채고 신영을 향해 묻는다.
태석 그라고 서울가믄 요놈 갖고 뭔 기술이라도 배우도록 혀.
신영 (태석의 돈을 뿌리치며) 싫어요. 제가 왜 아저씨 돈을 받아요.
태석 옛날 느 아부지랑 장사 다닐 때 내가 빚진 것이 있어서 그려. 그걸 샆아야 내가 마음이 편허겄다.
그 말을 안 믿는지 가만히 서 있는 신영의 손에 돈더미를 슬며시 쥐어주는 태석.
태석 저그 신영아!(어렵게 다시 입을 연다)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디, 니 분첩 말이여. 석가탑이 그려진 그 분첩, 나 헌티 줄 수 있겄는가?
신영 (배시시 웃으며) 아저씨 애인 있구나.(가방에서 분첩을 꺼내고, 스마일 뺏지도 건낸다) 여기요. 아저씨도 이젠 좀 웃으세요. 스마일~
태석 (분첩을 받아들고, 웃는다)
이때 공터에서 출발하려는 버스 차장이 “버스 떠납니다이!” 하고 소리친다.
텅 빈 대합실에 홀로 남은 태석, 가만 생각에 잠기더니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펴본다.
아내 귀옥이 최씨 할머니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쪽지다.
잠시 후 뭔가 결심한 듯 한 태석, 매표소로 다가가 매표구의 소녀에게 말한다.
태석 사천 한 장 주시오.
쪽지에 적힌 번지수를 찾아 음 골목을 기웃거리는 태석. 저만치 자그마한 포목점을 발견하고 다가간다. 포목점 벽에 내걸린 명패에 쪽지에 적힌 것과 같은 주소와 아내의 이름이 적혀 있다.
태석, 떨리는 마음으로 닫혀있는 유리문을 통해 조심스레 안을 살핀다. 조촐한 포목점 가게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다. 이 때 옆방에서 “야야” 하는 여인의 소리가 들린다.
맞은편 방문이 열리며 키가 큰 청년이 “네 어머니” 하고 대답하며 나타나 가게 안마루를 가로질러 옆방 문을 연다. 태석, 엉겁결에 모습을 숨긴 채 지켜본다. 귀옥, 고운 여자 한복을 바느질 하고 있다.
귀옥 영식아! 영식아!
영식 어머니 부르셨어요.
귀옥 그려, 니 각시 좀 불러오그라, 혼사 때 쓸 이 옷 좀 입혀보자. 칫수가 맛나 볼라고 그려.
영식 (맞은편 방을 향해 외친다) 혜정씨! 여기 좀 와봐. 어머니가 부르셔!
귀옥 (혀를 차며) 혜정씨가 다 뭐냐. 낼 모레면 각시 될 여자헌티. 너 벌써부터 여자헌티 잡히면 못써! 등신같이.
태석, 창문 틈으로 이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다. 오늘에야 비로소 자신에게 아들이 있었음을 알게 된 태석 또한 아내가 자신에게 연락해 달라는 일이 아들의 결혼 때문이었음을 직감한다.
태석,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안을 조용히 지켜본다. 영식의 신부감인 혜정이 나온다.
혜정 왜요, 어머니.
귀옥 (한복을 건네주며) 이 저고리 입어봐라.
영식 와~ 곱다. 그 위에다 그냥 입어봐.
혜정 어때요, 영식씨.
영식 와~ 선녀가 따로 없네.
혜정 정말요. (귀옥 헛기침)
영식 우리 어머니 바느질 솜씨야 우리 읍네에서 초고잖아. 그거 몰랐지?(웃음)
귀옥 옷 테가 나는구먼. 딱 맞다. 저녁이나 안쳐야 쓰겄다!
영식 어머니! 저 이 옷 만드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제가 한번 업어드릴게요.
귀옥 치아라! 나가 니 가시헌티 눈치보일이 없어 니 등에 업혀.
영식 아휴, 괜찮아요. 한 번 업히세요.
혜정 그래요 어머니!
영식 어화 둥둥 내 사랑아/ 둥기 둥기 내 사랑아/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은을 주면 너를 사랴/ 창평바다 그물 같이 얼퀴고 설퀸 우리사랑
귀옥 창평에 바다가 어딨냐? 인석아! 창평바다가 아니라 연평바다여.
영식 연평바다 그물 같이 얼퀴고 설퀸 우리사랑
귀옥 영식아!
영식 네, 어머니.
귀옥 어제 꿈에 느 아부지가 보이더라. 내가 시집 올 때 해드린 양복을 차려입고 저 동네 어귀로 걸어오는 꿈을 꿨다. 혹시 느 아부헌티 안 좋은 일이 생긴거 아녀?
영식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늘 보고 싶어 하시니까 꿈에서라도 보이시는 거예요. 어화 둥둥 내 사랑아/ 둥기 둥기 내 사랑아/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은을 주면 너를 사랴/
귀옥, 남자 한복 윗도리를 영식에게 건네준다.
조용히 바라보고만 서 있는 태석. 귀옥, 안방에서 나와 진열장 위에 쓰고 남은 천 조각을 올려 놓는데 문득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귀옥, 다가가며 조금 전에 안보이던 분첩 하나가 마루 끝에 놓여 있다.
분첩을 집어든 귀옥, 분첩을 가만히 열어보면 석가탑이 그려진 옛날 자신의 것이다.
귀옥, 서둘러 유리문을 열어젖히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간다. 급해진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귀옥. 그러나 태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영식과 혜정, 갑작스런 귀옥의 행동에 가게 밖으로 따라 나와 귀옥 곁에 선다.
(분첩과 깨엿)
영식 왜 그러세요, 어머니.
귀옥 니 아부지가 방금 다녀갔다.
영식 (놀라며) 네? 제가 찾아보겠어요.
영식, 태석을 찾아보려 바삐 나서려는데 태석의 마음을 읽은 귀옥이 영식의 팔을 잡는다.
귀옥의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다.
귀옥 그럴 것 없어. 그 고집이 워디 가겄냐. (분첩을 매만지며) 니 아부지 다시 올 것이구만, 곧 다시 올 것이여.
- 영상 -
태석, 멀리 흰 눈이 쌓인 산줄기를 향해 굽이굽이 펼쳐진 길 위를 저벅저벅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