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경.1
*지울말
3월 31일 경 ‘천도교는 어떤 종교여야 하나’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적이 있습니다.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로 ‘천도경’을 만들어 장생주가 유용한 글임을 알고 외우는 사람이 많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생주풀이를 현대적으로 사실적으로 풀이한 글이 필요하며 이를 제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천도에 대한 생각을 다듬다보니 예상밖으로 많은 시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천도경’을 읽고 이해가 가신다면 그 순간 그 글은 님의 글입니다. 이해한 분의 소유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해했다는 것은 뇌회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몸의 일부가 된 것이므로 이해한 분의 것이 된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용도로 자신의 글처럼 통째로 가져가 쓰셔도 좋습니다. 그래서 더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듬어진 ‘천도경’이란 책이 나와 많이 팔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장생주를 삶의 지침서로 외우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천사님과 우리가 바라는 한울사람들의 세상이 이뤄지리라고 봅니다.
[천도경]
머리말
천도경은
동학적 천도를 밝히는 글이며
장생주를 이르는 말입니다.
천도는
‘한울님의 길이요,
한울님이 인간에 이르는 길이요,
인간이 한울님에 이르는 길이요,
한울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장생주는
21자로 된 동학의 주문이며
천도를 밝히는 글이며
한울사람이 되는 글입니다
한울사람은
몸 속에 계신 한울님을 모신 사람입니다.
장생주의 뜻을 알고 장생주를 외우면
한울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장생주의 뜻을 밝히어
장생주의 뜻을 쉽게 외도록 만든 것이
천도경입니다
차례
1 장생주 내력
2 장생주
3 장생주의 낱말 해설
1)至氣
(1) 무극
(2) 허령
(3) 섭명
(4) 일기
(5) 지성
[000] 지기한울님이 인간에 이르는 길
(1) 빅뱅으로 화생
(2) 미립자로 화생)
(3) 물질로 화생
(4) 생명으로 화생
(5) 마음으로 화생
[마음의 소재들]
[마음의 발현]
[‘지기’를 끝내는 말]
[000]인간이 지기한울님에 이르는 길
2)今至
3)願爲 大降
(1)기화
[자연기화]
[인지기화]
강령· 대강
*강령주문의 요약
[0]모시다의 개념
[일반개념]
[단독개념]
4)侍
(1) 내유신령 외유기화
(2) 각지불이자
5)천주의 의미
(1)지기한울님
(2)기화한울님
(3)물화한울님
6)造化定
7)永世不忘
8)萬事知
4.장생주 맺는말
5.한글주
6.모시는 수련
(1)현송과 묵송
(2)사유수련
(3)기화수련
7. 맺음
1. 장생주 내력
‘장생주’는 수운(최재우)님이 1860년 4월 5일 경주 가정리 용담정에서 한울님으로부터 체험을 통해 받은 천도경입니다. 이처럼 새벽에 떠오르는 해님처럼 존귀한 장생주를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분이 수운님이므로 그 전후사를 먼저 알아보려고 합니다.
수운은 1824년 10월 28일 경주 구미산 아래 가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 근암(최옥)은 경상도 지방 향시에서는 8번이나 합격한 유학자였는데 두 번이나 상처하고 62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어서 동생의 장자 제환을 양자로 들여 집안 대소사를 맡기고 용담정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제자 중에 한모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고모가 20세에 무자식으로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와 10년을 수절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사정을 선생께 아뢰고 재혼할 것을 권하였으나 근암은 이미 환갑을 넘은 나이라 거절하였습니다. 하루는 집에 돌아가 보니 안방에 웬 부인이 누워 있어 의아해 했는데 제환의 말인 즉 바깥마당 대추나무 밑에 단정한 부인이 쓰러져 있어 급한 김에 집에 모셨다는 것입니다. 부인이 정신이 들어 물어 보니 자기는 금척리 사는 한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새벽녘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신기한 기운이 온 몸을 휩싸 이끌어서 여기까지 와서 쓰러졌나 봅니다. 라는 것이다. 틀림없는 제자 한모의 고모였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천분인가 싶기도 하고, 박절하게 돌려보내기도 그렇고 해서 그날부터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10개월후에 남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 수운이 6세 때에 모친이 돌아가셔서 그는 세 살이나 위인 조카 세조를 따라다녔습니다. 그의 눈은 유난히 깊고 그윽했던 모양입니다. 큰 아이들이 역적의 눈이라고 놀려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노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서 아버지 근암의 귀여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8세에 이르러서는 용담정에 가서 공부하게 됩니다. “꿈 속에서 주고 받은 노래”에서
“팔세에 입학해서 허다한 만권시서 무불통지 하여내니 생이지지 방불하다”
라고 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 들면서 자기가 재가녀의 자식이어서 친척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무시당하고 과장에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하늘을 보고, ‘하늘도 끝이 있겠지,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했습니다. 그리고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했습니다. 그래서 14세에 이르러서는 혼자 경주에 가서 산 같은 무덤과, 높은 첨성대와, 아름다운 불국사의 천년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을 설득하여 금강산에 갈 여비를 얻어 길을 떠납니다. 그는 당시 보고들은 바를 “꿈속에서 주고받은 노래(몽중노소문답가)”에서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고,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 답지 못하다"
라고 유학의 가르침이 제몫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금강산 ‘유점사’에 여장을 풀고 불서를 구해다 읽었습니다. 금강산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고, 골짜기마다 다니며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금강산을 목적지로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 목적한 바였습니다. 이 같은 그를 이상히 여긴 스님들은 반야심경찬 등을 전해 주며 ”오온개공五蘊皆空...색불이공色不異空“이라고 물질이나 정신이 모두 공이요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으므로 다 환상이요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수운은 그렇게 모두가 공이요 허상이라면 피안인들 허상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님이 걱정하시는 모습이 자꾸 떠올라 집에 가서 책이나 더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높은 봉오리에 오르고 싶어 허위허위 올라 쉬는데 몸이 나른해졌습니다. 마음이 비고 무위의 상태에 빠지는 듯 싶었는데, 돌연 선계가 보이고 깃옷 입은 신인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꿈속에서 주고받은 노래’에서 아래와 같이 읊고 있습니다.
“금강산 상상봉에 잠깐 앉아 쉬다가, 홀연히 잠이 드니 꿈에 깃옷 입은 한 도사가, 가르쳐서 하 는 말이, 골 봉오리 겹겹이고 인적은 적적한데 잠자기는 무슨 일고, 수신제가 아니 하고 강산구경 하단 말가. 효박한 세상사람 탓할 것이 무엇이며, 가련한 세상 사람 궁궁에 있단 말 웃을 것이 무엇이며, 불우하다 한탄말고 세상 구경하였어라....하원갑 지나 거든 상원 갑 좋은 때에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이 세상 무극대도 이어 무궁 아닐런가....깨어 놀라 살펴보니 볼 수 없게 되었더라”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깃옷 입은 신선은 보이지 않고 혼자 바위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인의 신선 같은 모습과 무극대도가 나온다는 그 말씀은 생시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 속에 각인되어 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주렴계(周濂溪1017-1073)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보면서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며,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본래 무극이다.(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本無極也)”라고 한 ‘무극’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무극을 장횡거(1020~1077)는 氣로 보고. 정이(1033~1107)는 리로 보고 소옹(1011~1077)은 ‘마음’이라고 보는 것을 살폈습니다. 각기 다르게 보는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내 몸 속에 리, 기, 허령이 있어 오성(인의에지신)이 착하지 않음이 없다(在吾腔子裏理氣虛而靈 五性無非善)(’근암집‘ 봉독천명)”라고 하셨고 “심체는 본래 허령이다(心體本虛靈)(’근암집‘ 면단제)”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 속에 무극의 리, 기 ,허령이 있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렇게 가르침을 주던 아버님은 그가 17세(1840년) 되는 해에 돌아가십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입오르내리던 결혼 말은 숙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3년 상을 치르고 나면 결혼을 해야 하므로 식솔을 부양할 일이 걱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술·침술에 대한 책을 보게 되었으나 잡술이라 여겨지고, 복술(卜術)에 대한 것도 보게 되었으나 인과가 없는 황당한 소리라 점점 더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그는 19세(1842)에 울산에 사는 월성 박씨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밤중에 집안에 불이 나서 가제도구 등 일체를 구하지 못하고 맨몸으로 빠져나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형 제환 네 식구는 지동으로 수운 네 식구는 용담으로 분가하게 됩니다. 수운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공을 세운 7대조 정무공처럼 무장이 되려는 생각을 갖고 전술과 말 타고, 활 쏘고, 칼 쓰는 것과 같은 무술을 연마합니다. 그러나 몇 년 전(1840)에 청나라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크게 패했다는 사실이 점점 크게 떠올라 활 쏘고 칼쓰는 무술을 연마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져서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지금까지 익혀온 유학도 조리가 없을 뿐더러 ‘리발기발’의 공론만 일삼는 소득이 없는 학을 외워 남에게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허례허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떠돌이 장사 길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천한 장사를 한다고 따가운 눈총을 받고, 산골짜기에 처를 혼자 남겨두고 객지로 떠돌 수만도 없어서 처를 처가에 맡기고,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정직하게 장사를 하기로 맘먹어서 단골을 많이 확보하여 돈을 꽤 벌게 됩니다. 또 그가 유식한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를 글방 선생님으로 앉히고 자식들을 맡기고 후하게 대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세속에 안주해 가는 자신이 싫어져서 자신을 들여다보니 또 다른 자기가 ‘도’를 절실히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허송 세월만 한 것 같은 자신에 혐오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자가 이제 그만 정착생활을 하자고 권하는 말을 더 이상 미뤄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31세(1854) 되는 해에 처가가 있는 울산 여시바윗골에 논 여섯 두락을 마련하고 초가집을 짓고 정착하게 됩니다.
그 후 그는 10년 동안 모아 온 책들을 정리하고 독서와 명상 위주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버님의 “내 몸 속에 리, 기, 허령이 있다”는 말씀을 그는 잊지 않아서 맹자의 “만물은 다 나에게 갖춰졌다.(萬物皆備於我)”라는 말이나 주자의 ‘일 물은 일 태극을 각기 구비한다(一物各具一太極) (태극도설해)”’라고 한 것과 같은 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유학의 우주관은 주로 무극-태극-음양-오행-만물로 화생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본체인 무극 태극이 만 물 속에, 나에게 갖춰져 있다는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몸에 무극을 갖춘 존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흥비가‘에서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고 읊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정체가 무궁한 신적 존재란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명상할 때에는 의식을 자기 몸 속에 보내 자기의 정체인 무극의 ‘기, 허령’ 등을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의식을 자기 몸에 보내면 자신의 숨소리나 몸의 느낌을 느끼게 되고 점점 무위의 상태가 되어 깜밖하는 순간 속의식으로 바뀌어 거울 같은 맑은 세계를 보게 됩니다. 이 같은 비몽사몽 같은 데에 이르러 그는 노승으로부터 책을 한 권 받는데, 이를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합니다. ‘도원기서(道源記書)’에 실린 내용을 간추려 옮겨 봅니다.
“소승은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사람이올시다. 한갓 불서나 읽었으나 아무런 신험도 없어서 백일 공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에 다소 신효가 보이는 것 같아 지성으로 감축을 드렸습니다. 공을 마치는 날 탑 아래에서 우연히 잠이 들었다가, 홀연히 깨어나 탑 앞 을 보니 한 권의 책이 탑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를 거두어 들쳐보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승이 그 즉시 산을 내려와 팔방을 두루 다니며, 혹 박식하다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곤 했지만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생원님이 박식하다는 소문을 우러러 듣고 책을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노승이 책을 공손히 올려서 예로서 받아 읽어보니 유교나 불교의 글로도 해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살펴보니 책은 보이지 않고 다만 ‘기도하라’는 내용만이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순간 책이나 명상만으로 도를 얻으려 하지말고, 한울님에게 기도하라는 깨달음이 몸을 엄습하였습니다. 공맹 시대에는 우주의 시원자로서의 하날님을을 믿었는데 주렴계의 신유학 이후로는 우주의 시원자를 ‘태극·리·기·심’처럼 원리로서 이해 온 것이 동양의 도덕이 무너지고 뒤지게 된 원인이라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극을 원리로 삼아야 할 뿐만 아니라 다시 하날님을 위하고 믿고 신앙해야 도덕이 바로 서서 부유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33세(1856)에 4월 8일 양산 천성산 내원암에 가서 3층 단을 쌓고 49일간 한울님께 기원하는 데 이릅니다. 한울님에게 기도하는 목적을 ‘도원기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49일을 축원하는 데 마음에 늘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울님이 내리셔서 가르침 주시기 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울님을 예전처럼 하늘에 있다고 보는 것은 허무지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울님은, 유일자이므로 몸에 갖추고 있는 ‘무궁한 나’인 ‘태극 허령 기’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몸에 보내 기도하였습니다. 태극이 신적 존재라고 관념적으로 아는 것에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야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몸 속의 태극이 신적 존재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정성을 다하면 감응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몸 속의 무극 태극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기원하다 보니 몸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몸을 오랜 동안 의식하게 되면 겉의식이 사라지고 속의식이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운도 40일이나 넘도록 한울님이 내리셔서 가르침을 주시기를 기원해서 속의식에 이르러 거울 같은 투명하고 맑은 영을 보게 됩니다. 이 투명한 거울에 신비한 영상들이 떠오르는데 47일째 되는 날 80세이신 숙부께서 돌아가시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숙부께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더 기원만 하고 있을 수 없어서 산을 내려가기로 작심했습니다. 스님들이 아직 약정한 날이 이틀 남았는데 어째서 산을 내려가시냐고 물어서 ‘숙부님께서 환원하셨네요’라고 말하니 모두 의아해 했습니다. 마침 고향에서 인편으로 연락이 와서 스님들은 수운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신인이 났다고들 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고향 마을 사람들도 수운을 영통한 사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34세(1857) 7월. 천성산에 있는 자연 동굴인 ‘적멸굴’에서 49일 祈天 수련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내원암에서 47일간 기원했을 때 숙부께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는 작은 영통은 있었으나 정작 원한 한울님의 가르침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연동굴인 험지에서 정성을 다해 기원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하루에 한끼씩 아침만 들면서 ‘을묘천서’에서 신인이 나타났듯이 오직 한울님이 나타나시어 가르침 주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심신에 맑고 투명한 영대가 어리어 심신이 신령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끝내 한울님은 나타나 가르침을 주지 않았습니다.
낙심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용광업을 운영하다가 논과 집을 빗에 넘기게 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조카 세조의 권유에 따라 용담정으로 돌아오기로 합니다. 조카 세조는 수운이 돌아와 공부에 전념해서 용담정이 예전처럼 다시 학문하는 사람들의 곳으로 회자되기를 바랬습니다. 그것이 집안의 명예를 살려내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전부터 여러 번 권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운은 다른 방도도 없어서 조카의 권유에 따라 36세(1859) 10월에 용담으로 돌아옵니다. 이때의 심정을 ‘용담가’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습니다.
“구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依舊)하고 초목은 함정(含情)하니 불효한 이내 마음 그 아니 슬플소냐. 까막까치 날아 들어 조롱을 하는 듯고, 솔·잣나무 울울하여 청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 마음 비감 회심 절로 난다.”
용담으로 돌아온 그는 학문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교훈가’에서
“구미 용담 찾아들어 중한 맹세 다시 하고...자호 이름 다시 지어 불출산외 맹세 하니 그 의 심장 아닐런가.”
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세상을 건지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제선’에서 ‘제우(濟愚)’로 고쳤고 호도 최치원의 ‘孤雲’에서 ‘雲’자를 따서 ‘水雲’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방문 머리에는 ‘불출산외(不出山外)’라는 글귀를 써서 붙였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민가에서처럼 정안수를 모셔놓고 정성드리 듯이 한울님에게 가르침을 주실 것을 기원했습니다.
37세(1860) 되는 해. 4월 5일은 장조카 세조의 생일이었습니다. 새벽 일찍 인편에 새 의관을 보내 왕림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세조는 수운이 ‘불출산외’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편에 의관까지 갖춰 보내면서 모셔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가게 됐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겸손하게 인사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자리에 앉으니 남의 자리에 앉은 것처럼 심기가 더욱 불안정했습니다. “여기는 네자리가 아니야”라고 자리에서 밀어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참고 앉아 있으려니 진땀이 나서 견디기 힘들어 음식을 좀 뜨고는 일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에서 벗어나니 진땀은 멈추었지만 대신 몸이 공중으로 뜨는 것 같아서 중심을 잡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신발을 신자말자 부리나케 집을 향해 걷는데 마치 발이 공중을 밟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람에 연이 밀려 날려가듯이 그렇게 밀려 집에 당도하였더니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려왔습니다. 그래서 마루에 겨우 앉았더니 심신이 신령한 기운에 휩싸여 태극이 무한히 커졌다 사라지고 다시 궁궁이 커졌다 사라지곤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포덕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득해지고, 몸이 떨리고,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스런 말씀이 홀연히 귓속에 들려왔는데... 두려워 하지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한울님이라 이르거늘 너는 한울님을 알지 못하느냐?...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게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고대하던 한울님의 말씀이라 황송하고, 반갑고, 감격하여 눈물이 줄줄이 흘러 빰을 적시었습니다. 한참 후 수심정기 하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바닥 없는 함정에 빠진 듯 한데, 무궁하고, 맑고, 성스럽고, 두려운 무극의 세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것이 우주의 본체인 허령이요 일기요, 무극이요, 지기라는 전일적 앎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지기가 영부로 화생하고 한울님 말씀으로 화생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또 지기가 천지로, 만물로, 인간으로 화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만사를 알았다는 통달감이 희열이 온 몸에 퍼졌습니다. 그 때 그는 다시 한울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데 논학문에 있어 옮깁니다..
“몸이 몹시 떨리면서 몸에는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몸 속에서는 강화의 가르침이 있었는데(內有降話之敎)...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사람들은 천지를 알아도 귀신을 모르니 귀신이란 것도 나니라. 너에게 궁무궁한 도에 미치게 하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라.’”
이때 그는 몸 속에서 한울님 말씀이 들려오는 것을 듣고 한울님이 몸 속에 계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이 네 마음’이란 것은 한울님 마음이나 사람의 마음이나 같다는 것이요, ‘귀신도 나다’란 것은 귀신과 한울님도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반대되는 개념들이 다 같다고 한 것은, 천지 만물이 하나인 지기의 화생임을 깨우쳐주기 위함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한울님은 말로서 주문을 전해주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깨달음을 통해서 전해주시려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말보다는 체험이 더 확실한 앎이 되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수운은 현상계 밑에 거대한 존재자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울님 말씀대로 체험을 살펴서 기화를 원하는 강령주 8자와, 한울사람이 되는 성주문 13자와 도합 21자의 주문을 짓는데, 이를 ‘장생주’라고 한 것입니다. 맺는 말을 보면 “지기에 지극히 화하여 지극한 한울사람이 되게 하옵소서(至化至氣 至於至聖)”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장생주가 새로운 도덕적 한울사람이 되는 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운은 새로운 도덕심이 발하여 두 여종을 한 분은 며느리로 삼고 한분은 딸로 삼습니다. 장생주에는 사람의 심정을 참되게 개벽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교훈가’를 보면
“십삼 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입도한 세상사람 그 날부터 군자 되어 무위이화 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 아니냐”
라고 했습니다. ‘십삼 자’는 ‘장생주’ 안에 들어 있는 ‘성주문’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13자의 첫 글자는 ‘侍天主’인데 몸 속의 한울님을 모시면 한울님을 닮아 그 날부터 군자 즉 한울사람이 되므로 만권시서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만권시서의 목적이 도덕 군자가 되는 데 있는데 13자만 익혀도 도덕적 한울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경전의 자구만 익히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간단한 장생주의 의미를 익혀서 도덕적 인간이 되라는 권고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또 ‘수덕문’에서
“정성이 지극한 아이는 다시 사광의 총명도 부러워하지 않고, 용모가 환태된 것은 마치 선풍이 불어온 듯하고, 오랜 병이 저절로 낫는 것은 편작의 어진 이름도 잊어 버릴만 하더라.(極誠其兒 更不羨師曠之聰 容貌之幻態 意仙風之吹臨 宿病之自效 忘盧醫之良名)
라고 했습니다. 지기에 화하는 기화가 이뤄지면 심신이 맑아지고, 환해지고, 성스러워져서 머리가 총명해지고, 용모가 환해지고 숙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장생주를 외워서 도덕적인 한울사람이 되고 숙병이 낫게 되므로 많은 사람이 입도해서 외우게 됩니다. 그런데 성리학만이 유일한 정도라고 보던 조정은 선전관 정운구로 하여금 수운을 잡아오도록 명합니다. 그래서 정운구는 3인을 대동하고 1863년 11월 20일 경주를 향해 떠납니다. 이때 도중에서 듣고 본 것을 적어 올린 글을 보면 얼마나 빨리 일반의 호응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문경 새재에서 경주까지는 4백여리나 되며 고을도 십여 군이었습니다. 동학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날마다 듣지 않은 날이 없고 경주를 둘러싼 여러 고을에는 더욱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심하였습니다. 주막집 아낙네도 산골 초동도 주문을 외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름하여 ‘위천주’ 또는 ‘시천주’라고 하였는데 편안해 하고 기이해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장생주를 외워 똑똑한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조정에서는 부담 스럽고 두려움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수운은 3월 10일 대구에서 사도로써 정율을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以邪道 亂正律 宜當處刑)고 참형을 당합니다.
그래서 장생주도 죽음을 맞이했다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다시 살아나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