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상 스님은 해방공간의 지식승이자 교육자이다.
1945년 해방직후, 왜색불교 청산을 주창하며 열린 제주불교혁신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청년승려이다.
또한 식민지하에서부터 한국전쟁 직후 그가 예비검속될 때까지 제도권 안팎에서 민중계몽과 지식청년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에 각별한 열정을 보였던 지식인이다.
그러나 원문상 스님의 행장을 확인할 일차적인 객관적 사료가 절대 부족하다. 때문에 여기에 조사된 내용은 일부 문헌기록을 제외한 상당부분은 증언채록이라는 구술사(口述史) 연구방법을 통해 정리되었다.
원문상은 해방공간의 제주불교계 대표적 지식승려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궤적에 비해 자신의 출생지이자 입적할 때까지 청장년기의 주 활동 공간이 되었던 제주지역에서조차 그동안 조명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근현대시기의 제주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작업이 그간 시도되지 않았던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그의 죽음이 4·3의 연속선상인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예비검속에 의해 처형된 ‘좌익사상범’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사고가 최근까지도 제주사회 전반에 뿌리깊게 잔재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세수(世壽) 갓 마흔을 넘기고 짧은 생을 마감한 그였지만 일제 식민지하에서 약관의 나이로 보여준 야학활동 등 민족계몽에 대한 열정과, 해방직후 중앙 불교교단과 제주교계의 가교역할을 수행하며 불교혁신운동의 단초를 마련하는 등 20세기 우리 역사의 최대 혼란기의 한 가운데서 그가 보여준 치열한 삶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문상 스님은 1908년 무신생이다. 제주도 중문면 하원리 469번지에서 부친 원춘생(元春生)과 모친 송옥(宋玉)씨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原州) 속명은 경오(京午) 관명은 문상(文常) 법명은 법회(法回) 법호는 만허(滿虛) 아호가 초당(初堂)이다.
그의 동생인 원경화(京花, 관명은 인상, 법명은 혜관)도 해방공간에서 불교 혁신운동에 같이 몸담았고 최근까지 제주도 법화종 원로로 활동하다 2000년 속랍 84세의 일기로 입적한 스님이다.
원문상 스님은 하원소학교를 졸업 후 빈핍(貧乏)한 집안 형편으로 진학이 어려워지자 15세 무렵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 고학했다.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나왔고, 한글학회 회원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출가 시기와 은사 등도 분명치 않다.
다만 1930년대 후반 그의 나이 서른 무렵에 경북 기림사에서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불교사연구회에서는 그의 행적을 찾기 위해 몇 차례 기림사를 조사 방문했으나 단서를 찾지 못했다.
1947년 제주지역 승려들의 이력을 자필로 기록한 ‘교적부’에도 유독 그의 이름이 빠져 있다.
그것은 당시 불교혁신운동을 주도하던 그가 대흥사 계열의 승려와 백양사 계열의 승려간에 끊이지 않는 알력다툼에 실망해 고향인 하원리로 돌아가 교편을 잡고 그 당시 제주교무원과 거리를 두고 있던 시기인 탓이다.
한편 그는 서울에서 고학하던 시기에도 고향을 왕래했다. 20대 중반에는 고향 하원리에 잠시 돌아와 ‘소년명진회(少年明進會)’를 조직, 낮에는 강습소와 밤에는 야학을 열어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후 1930년대 말, 경북 토함산 기림사에서 출가 삭발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 등지에서의 장기간 고학생활로 중앙의 동향에 밝았던 그가 해방을 맞으면서 중앙과 지역불교의 중추적 가교역할을 자연스럽게 맡는다.
실제로 8·15해방 직후 출범한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가 9월22∼23일 서울에서 전국승려대회 개최하고 이것을 각 지방으로 홍보하는 과정에서 제주지역은 원문상 스님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전국승려대회 직후인 1945년 10월경 원문상 스님이 상경했다가 귀도 직후에 제주불교청년단과 준비위원회가 조직됐고, 또 제주에 불교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던 그가 1945년 12월 2~3일 관음사 제주읍내 포교당인 대각사(前관음사 중앙포교당)에서 열린 ‘조선불교혁신 제주불교승려대회’의 부의장을 맡아 이일선, 오이화 스님등과 함께 불교혁신을 주도한 중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이 대회에서 결정한 주요 내용은 이렇다.
승려의 대처식육(帶妻食肉)과 내연화주(內緣化主) 동거를 절대 금지하고, 사찰 내 제반 수입은 화주 및 주지 주관의 단독적 처리를 절대 엄금하자는 의견을 내놓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그리고 속가(俗家)에서 용왕(龍王)·토신(土神)·산신(山神)·운표중창불(運表中唱佛)·구병시식(救病施食) 등을 폐지하며, 사찰 내에서는 금고(金鼓)·범음(梵音)·화청(和請) 등을 금지하여 전통불교사상을 정립시키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지나치게 민간신앙과 밀착된 모습으로부터의 탈피는 근대 제주불교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제야말로 일제 하에서 왜곡되었던 불교의 위상을 바로잡아 제대로 된 불교사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회 이후 중앙에 파견될 제주대의원으로 만장일치로 원문상 스님이 추대된 점에서도 그의 위상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제주불교청년단 결성 회의록과 승려대회의 명부, 그리고 동 승려대회의 회의록이 게재된 ‘법계(法界)’라는 잡지가 지난 1997년 제주시내 본문사에서 발견되면서 밝혀진 연구 성과이다.
그러나 당시 제주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백양사와 대흥사 계열의 승려간의 알력다툼으로 종무활동에 한계를 느낀 그가 모든 소임을 사직하고, 1947년 고향인 하원으로 돌아와 중문중학원에서 역사와 한문·국어 등을 가르치며 평범한 교육자의 길을 걷던 중 억울하게 예비검속되어 희생됐다.
중문중학원은 현(現) 중문중학교의 최초 전신으로 원문상 스님과 제주 중문면 출신의 이경주라는 두 사람에 의해 설립된 학교이다. 처음에는 비인가 학교였으나, 4·3 당시 서귀포지역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전부일 소령의 도움으로 남원면 미악산 일대의 삼나무를 벌목해 학교를 신축하면서 교명(校名)을 전부일 소령의 ‘부’자와 중문의 ‘문’자를 합성해 ‘부문중학교’로 개칭하고 1950년 4월2일 정부인가 정식학교로 설립한 것이다. 또한 중문면의 주민들을 설득하여 집집마다 돌 한 덩이 쌓기 운동을 전개해 ‘석조전’이라는 웅장한 건물을 교내에 신축하는 등 원문상 스님의 헌신적인 활동은 그칠 줄 몰랐다.
때문에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교사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신뢰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의 교직생활 중에 1948년 4·3이 일어나고 그 연장선인 예비검속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영문도 모른 채 그토록 초라하게 세상과 등질 줄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부문중학교로 인가될 때 서북청년단 출신의 전문규라는 인물이 교감(혹은 교장 직무대리로 증언)으로 부임해오면서 설립자인 원문상·이경주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 갈등이 깊어져갔다.
증언자들은 전문규를 포악하고 독선적 성격의 인물로 기억했다.
부임해온 그가 학교운영을 전횡(專橫)하면서 빚어진 마찰이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8월 어느 같은 날, 원문상·이경주에게 4·3 가담혐의가 씌워져 군경에 체포된 후 희생됐다.
이것이 확인 가능한 원문상 스님의 마지막 행적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스님의 상좌인 오춘송 스님 등이 은사의 시신을 수소문하여 백방으로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1950년 7월 7일자의 서귀포 경찰서 ‘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원문상 스님의 검거사유는 ‘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경주 선생의 경우는 ‘산사람에게 망원경 제공’이다.
그러나 그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그를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증언했다. 원문상과 이경주를 시기한 전문규의 모함으로 아까운 두 생명이 희생됐다는 소문이 당시 지역에 널리 퍼졌었다고 대부분 증언했다.
그렇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대다수의 4·3희생자들의 사유에서 보듯 그 또한 애먼 죄를 뒤집어쓰고 부당한 국가공권력에 의해 공비토벌이라는 명분아래 이름 모를 수많은 양민들 속에 섞여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어디선가 싸늘한 주검으로 묻혀 갔을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 불혹을 막 넘긴 마흔 셋이었다.
근현대사의 가장 혼란했던 시기, 해방공간에서 청년승려이자 투철한 교육자로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스님의 넋은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있다.
/제주불교사연구회·제주의 소리 기자
첫댓글 옛날에 불렀던 '하원경치가'는 원문상선생님이 작사한 것이다. 평양경치가를 모방해 지은 것이라 전한다. 곡도 평양경치가의 곡을 그대로 차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선생은 제주불교사의 기록대로 예비검속으로 행불자가 되었으나 삼면유족회에서 세운 위령비 속엔 선생의 이름은 없다. 바로잡는 운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