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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세기 스크랩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경주시 안강읍, 포항시 흥해읍, 기계면 답사
이익중(8기) 추천 0 조회 109 06.12.16 20:1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경주시 안강읍, 포항시 흥해읍, 기계면 답사

답사일시:2006.11.19(09:00-16:30)

답사참가자: 김명석님, 박채정님, 오종식님, 송미령님, 손남숙님, 이익중님, 이지은(김경환, 김시환)님, 김량한님, 이세훈님.

답사안내자: 김환대님, 김정원님.

답사경로: 창녕박물관-흥덕왕릉-종덕재(창녕조씨 시조묘소)-귀래정-인비 고인돌-칠포리 암각화-칠포 해수욕장.


09:25 창녕박물관 집결 그리고 출발이다.

일주일 전부터 전 회원에게 연락을 취해, 참가여부를 확인하고, 오늘 일정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집을 나섰다. 여장을 꾸리고 나서 대경 아파트에 나와 있던 이지은(경환, 시환) 씨 일행을 낚아채어 차에다 싣고, 박물관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경환이와 시환이는 오늘 일정에 대해 청문회를 하는 듯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약간 상기되어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박물관에 도착하여 먼저 와 있던 회원들과 오늘 일정을 약간 공유한 후에 차에 올랐다. 이번 답사는 두 달 전부터 벼르던 탓에 여러 회원들도 복장에 음식이 넘어가듯이 자연스레 일정을 자연스레 삼키는 것 같았다. 1389(김명석 선생님의 차)가 앞장서고, 2501(나의 백마)은 뒤따라갔다. 앞장서는 차의 꼬리를 놓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원하게 확장된 국도 5호선을 줄달음 지면서 달렸다. 운행을 하면 좋은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록을 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나는 틈틈이 여러 회원들에게 자주 반문한다.

그 사이에 차는 창녕우시장을 지나 현풍-달성터널-화원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최근들어 화원에서의 병목현상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2501이 북대구IC를 지나 포항방면으로 진입한 시간은 10시 20분 쯤........화원에서 정체되는 탓에 1389의 후미를 놓쳐 전화를 했다. 중간 정착지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안강읍 사무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프리하게 페달을 밟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논밭에 널려 있는 곡식과 과일이 춤을 추면서  지나간다.


11:27 안강읍 사무소 도착.

앞서 갔던 차가 포항으로 접어던 것이 아니라, 경주방향으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2501은 안강읍 사무소를 보물찾기를 하듯이 이정표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계면 방향으로 진입하여 안강읍 사무소에 도착했다. 읍사무소에 내려 휴식을 취했다. 일요일인데도 무슨 일인지 직원이 나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읍사무소에 들어가 직원들로부터 약식의 안내를 받고, 간단한 책자도 받았다. 그 책자 속에 安康이 신라(新羅)의 파사이사금(婆娑泥師今) 23년(108)에는 비화현(比火懸)으로 칭했다고 한다. 여기 나오는 비화라는 단어가 우리를 그토록 당겼는지 모른다. 비화가야의 근거를 찾고자하는 뿌리에 대한 갈증이랄까? 그 만큼 뿌리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 지역 사람들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강력한 에너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남의 역사를 도둑질하는 지도 모르겠다. 바꾸어 얘기하면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을 찾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늘 우리를 안내하기한 김환대 씨(문화유산답사회 카페운영자)와 뒤에 도착한 회원들은 한데 모여 간단한 식사를 하고 떠나기로 하고, 인근의 중국집(신성옥)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각자 준비해온 중참과 함께 요기를 하고 차에 올랐다. 창녕의 정체성과 관련지어, 원삼국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초점을 잡고 있었다. 안강초등학교에 먼저 입성했다. 김환대 씨의 말로는 여기에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支石墓)가 있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실제로 고증이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안강초등학교를 나와 인비고인돌을 찾아가는 길에 흥덕왕릉을 찾았다.

 안강초등학교 전경

 


흥덕왕릉(興德王陵-신라제 42대왕)을 찾아가다.

지정번호: 사적제 30호.

지정년도: 1963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시대: 835년경(신라하대).

크기: 지정면적 6만 1983㎡.

종류: 능.

 

 소나무 숲을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마치 산너머 동해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 처럼 들린다.

 괘릉(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과 마찬가지로 왕릉의 입구를 알리는 화표석이 장승처럼 서 있다.

 

 왕릉을 지키는  문인상과 무인상이 입구에서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다.

 왕릉비의 이수와 비신은 망실되고 귀부만 우두커니 앉아있다.

 원주의 거돈사지의 탑비를 바치고 있는 귀부는 일만 만의 무늬를 하고 있고, 법천사지 탑비의 귀부는 임금 왕자 무늬를 새기고 있다.

  네 마리의 사자석상들이 왕릉을 수호하고 있다.

 흥덕왕릉에서 창녕향토사연구회원들과 함께......

13:10 종덕재정당(種德齋正堂)을 찾아가다.

지정번호: 경북문화재자료제 91호(1985.05.05).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1115-2.

크기: 정당 정면 6칸, 측면 2칸(사묘재실).

 

 종덕재정당(種德齋正堂)

 신라태사부마 도위창성부원군의 묘

창녕조씨 시조인 태사공(太公) 조계룡(曺繼龍)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1757년(영조 33)에 세운 재실이다. 1817년(순조 17)에 묘단비를 세우고 1832년(순조 32)에 묘각을 중건하여 종덕재(種德齋)라 명명하였다. 1929년 창녕조씨 대종회에서 중수하였고 6·25전쟁 때 일부 파손되었으나 다시 중수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초정일 창녕조씨 문중에서 묘제를 거행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설명-


창녕조씨의 시조공이 이곳에 묻혀있다

의아하게 받아들여진다. 창녕조씨의 득성비는 화왕산성안에 있고, 시조공의 묘소는 경북 안강에 있다. 창녕조씨의 가계를 조사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창녕조씨의 이동경로가 혹시 비화현, 비화가야의 연결고리가 되지 않을까? 상상력을 발동해 본다. 그렇게 연결이 된다면 얼마나 신나는 여정이 될 것인가?


그래도 우리의 초점은 고인돌에 있다. 왜냐하면 창녕의 정체성을 보다 깊은 시간대에서 끌어오고 싶은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비화가야에 대한 기록이나 금석문이 나왔다면 우리가 이렇게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나 현재 비화가야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 연구회는 발품을 팔아서 옛 사람들의 발자국을 모자이크해야 한다. 마치 퍼즐 문제를 하나씩 엮어가듯이.........


13:30 경주 귀래정(慶州歸來亭)을 찾아서......

종목 : 경상북도민속자료 제94호(1991.05.14).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다산2리 1074.

관리자 : 여강이씨문중(이두환).

 귀래정에는 연못이 파져 있었고, 지붕은 팔작지붕을 따르고 있었다.

 귀래정에는 토종 향나무만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었다.

귀래정은 순창에도 있다. 유일한 귀래정은 아닌 듯싶고,

왠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생각난다.


矣乎(이의호)                                  아서라!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복기시)       세상에 이 내몸 얼마나 머무를 수 있으리오!

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       가고 머물음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무엇위해 어디로 그리 서둘러 가려는가?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                     부귀영화는 내 바라던 바 아니었고,

帝鄕不可期(제향불가기)                    신선 사는 곳도 기약할 수 없는 일.

懷良辰以孤往(회양진이고왕)              좋은 시절 바라며 홀로 나서서,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지팡이 세워두고 김매고 북돋운다.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어보고,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지어본다.

聊乘化以歸盡(요승화이귀진)              이렇게 자연을 따르다 끝내 돌아갈 것인데,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복해의)       천명을 즐겼거늘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


조선 영조 31년(1755)에 여강 이씨 천서문중에서 지은 건물이다.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검교를 지낸 바 있는 이철명(1495∼?) 선생을 추모하여 1930년에 귀래정으로 하였다. 귀래정은 육각평면 구성으로 구조 결구 법과 조원구성의 독특성을 지니고 있어 한국 전통건축과 조원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4:10 인비고인돌 암각화.

높이: 140㎝ , 너비: 135㎝.

두 자루의 선각된 마제석검의 길이: 38㎝.

자루의 길이: 23㎝ , 20㎝.

칼날의 길이:15㎝, 18㎝.

새김법: 쪼아파기.

시대: 청동기 시대.

 

 인비고인돌

 마제석검의 모양을 새겨놓은 고인돌 암각화.

 

인비고인돌을 찾아가는 길에 포항시 기계면을 지나게 되었다. 기계면 사무소를 지났다. 들녘 언덕에 잘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홍조를 띤 아가씨의 볼때기처럼 탐스럽다. 고인돌 분포지점을 정확히 몰라 몇 번을 다람쥐 채바퀴돌다가 겨우 찾았다. 여기에서 김환대님의 동지 김정원님(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졸)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 분의 안내를 받았다. 논바닥에 놓여있는 고인들이 띄엄띄엄 띠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중에 논가에 있던 지석묘에는 마제석검모양이 선각(線刻)되어 있었다. 일종의 바위그림이라고 설명했다. 후대에 그려놓은 것처럼 선이 투박했지만, 문화재 관계자로부터 고증이 된 것이라고 했다. 기계천을 따라 줄줄이 띠처럼..... 김정원님은 “포항시 흥해면 칠포리 암가가화에서 시작한 청동기인들은 형산강 지류인 곡강천, 기계천을 따라 멀리 영천의 보현천문대까지 하천변에 고인돌군이 마치 띠를 형성하여 분포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원삼국시대이래로 지역의 족장세력이 권력의 중심을 이루면서 이 뱡향으로 이동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뱡향은 사로국의 형성과정과도 연결되겠고, 또한 군-소 토착세력의 형성과정과도 연결될 가능성이 많다. 머리 속에서 그려지는 모양새를 뒤로하고 우리는 동해 칠포리를 향했다.


15:50 칠포리 암각화

인비 고인돌 군에서 13:05에 출발하여 16:50에 도착했다. 곤륜산 너머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어느새 겨울바람이 되어 살을 날카롭게 찌른다. 귀면형상의 문양이 풍화가 심한 바위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다. 칠포리 바위그림은 우리나라 암각화의 시조이다. 곤륜산의 암각화이외에도 암각고인돌, 성혈고인돌, 농발재 암각화, 신흥리 오줌바우 등도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영천의 보현천문대까지 연결된다는 것인가? 칠포리 암각화는 바위의 재질이 화강암이 아니라 사암(砂巖)이기 때문에 선각(線刻)하기에는 용이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암각화는 20여 군데 분포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크게 보면 巖刻畵(바위그림)은 두 종류로 파악이 된다.

하나는 울진의 천전리 암각화와 고령의 양전동 암각화는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비는 주술적인 성격이 띤다고 한다면, 함안 도항리 암각화, 포항 인비리 암각화, 여수오림동 암각화는 고인돌 암각화로써 묘제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곤륜산에 위치한 칠포리 암각화의 문양이다.

 칠포리에서 연구회를 안내한 긴환대님(문화유적답사회 운영자)과 김정원님(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사)과

 창녕향토사연구회원들.....

 곤륜산에서 바라본 농발재의 모습

16:10 칠포리 앞바다에 서다.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김환대님과 김정원님과 작별하고 우리는 곤륜산을 휘~감아돌았다. 칠포리 해수욕장이 나왔다. 칠포리 암각화에서는 곤륜산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제야 우리가 동쪽 바다에 접해있다는 것을 알았다. 매서운 겨울바람 때문에 모가지를 투구 속에 집어 넣고, 동해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그 동안의 여독(旅毒)을 씻기라도 하듯이 곳곳에서 플래쉬가 터져 나왔다. 돌아오면서 내내 상쾌한 나의 머리 속에서는 오늘 여정의 필름를 되감고 있었다.

 

 글: 이익중.

사진: 이익중.

참고자료: 삼국사기, 문화재청 자료, 네이브 백과사전, 안강읍지, 경주시 문화유적분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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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6.12.16 20:18

    첫댓글 답사할때 안내를 해 주었던 김환대님(문화유적답사회 운영자), 김정원님(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사)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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