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同名異人(동명이인)을 만나면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쉽게 가까워진다. 이름이 같다는 것만으로 대화의 물꼬가 쉽게 트이고, 알고 있는 사람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으로 얘기를 나누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산이나 유적지, 또는 그 곳의 지명이 이미 알고 이름이면 왠지 친숙하게 느껴진다. 1234차량을 운행할 때 내 번호와 같은 차량을 보아도 반갑고 내 고향의 차량만 보아도 반가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리라.
장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잔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 金殿(금전) - 금당이 있는 대웅전 * 碧宇(벽우) - 푸른 하늘
이은상님의 시에 홍난파님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면서 북녘 금강산의 장안사는 분단 이전에 사람들에게는 생전에 꼭 다시 찾아봐야 할 꿈의 대명사요, 분단 이후 말만 들어본 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들리는 이상향으로 자리잡았다. 통일이 되면 너나없이 가보고 싶은 곳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가슴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나 서산대사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장안사는 이미 우리 민족에게 정겨운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러기에 "장안사"라는 이름은 종교를 초월하여 어느 곳에서 만나도 반가운 사람의 얼굴처럼 다정하게 느껴진다. 부산 장기의 불광산에서 유서 깊은 장안사를 만나 반갑게 느꼈던 기억은 바로 알고 있는 이름을 만났기 때문이다.
여행객에게 낯설지 않은 느낌을 주는 낯익은 이름들. 그것은 경승지나 이름난 유적지에서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천안의 성남, 강진의 대구, 장흥의 부산, 예천의 장수, 제주의 남원, 진주의 금산, 부여의 마산, 영동의 양산, 서천의 판교 등이 초행의 답사객에게 아늑한 느낌을 준다.
경상도 북부 내성천 주변에는 이처럼 같은 이름에서 느끼는 다정한 곳이 있다. 용문사와 장안사다. 내성천이 마을을 휘돌아 안고 흐르는 "물돌이 마을" 주변에 에있어 물 맑은 예천의 경치와 그 곳의 유적지를 통해 조상의 숨결을 찾아본다 그 동안 이 곳은 오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는데 최근에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도시인들이 찾고 싶어하는 청정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기에 더 의미 있는 지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 예천의 의미
각 지방에는 그 나름대로 특산물이나 자랑할 만한 문화재가 있어 그 지방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한다. 인삼이 금산이나 풍기를, 고추가 영양을, 수박이 고창을, 모시가 한산을, 녹차가 보성을, (지금은 있지도 않지만) 똥돼지가 제주도를 대신하는 것은 특산물과 관련된 이미지의 연결이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어떤 영감을 받아서였는지 지명과 특산물과의 관계가 묘한 상관 관계가 있어 한 고을의 특산물은 지명만 보고도 짐작할 수 있다. 지명에 금(金)자가 있으면 금이 나고, 동(銅)자가 있으면 구리가 나고, 온(溫)자가 있으면 온천수가 쏟아진다.
예천(醴泉)은 지명으로 보아 술이 맛있는 곳이다. 단술 예(醴) 샘천(泉), 술맛을 달게 하는 샘이 있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술이 맛이 있으려면 우선 물맛이 좋아야 하는데 예천군에 감천(甘泉)면이라는 고을이 있는 것을 보면 이름만으로도 예천의 천연적인 조건을 짐작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백두대간 줄기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금천이 시원한 계곡과 바위틈에서 몸을 불려 낙동강으로 흘러가며 지하에 흘러들었으니 그 물맛이야 물어 무엇하겠는가.
2000년 3월에 개장한 예천 온천은 수질 검사 결과 PH 9.7 ∼10.25로 우리 나라 최고의 알카리수를 자랑한다. 지하 800미터에서 용출되는 원천수를 100% 제공하는 이 온천은 예천의 의미를 또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좋은 물을 마시고 사는 사람들은 정신이 맑아 목표 지향의 집중력이 강하다고 한다. 예부터 예천에 국궁의 명수들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리라.
"아들을 낳으면 새끼줄에 고추 대신 활을 매단다"는 이야기는 예천 지방에만 유행하는 말이다. 김진호가 세계 속에 한국을 양궁의 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곳도 알고 보면 그런 전통에서 나타난 결과다. 지금도 예천에는 각궁(국궁)을 만드는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 있는데 400여 만원을 호가하는 활을 만드는데 넉 달 이상이 걸린다고 하니, 물 맑은 예천 사람이 아니고는 쉽게 이루어 낼 수 없는 장인정신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최북단으로 역시 물과 술의 합성어로 이루어낸 수주(水酒)라는 이름의 현이었는데 예천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통일 신라 경덕왕 16년(757)부터다. 그후 고려 시대에는 여러 차례 다른 이름으로 개명되어 불리다가 조선 태종 16년(1416)에 다시 예천이라는 옛이름을 회복하였다. 그 까마득한 옛날에도 예천이라 이름을 사용한 데는 그만한 안목과 이유가 있었으리라. 예천의 주변 경관을 보면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자연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은 같을 수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 예천의 자랑
낙동강 천삼백리 길에서 문화의 꽃이 활짝 피었던 곳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이다. 백두대간의 곳곳에서 발원한 천(川)들이 합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과정에서 상류지역( 예천, 안동, 상주)과 중류지역(구미, 왜관, 선산)과 하류지역(대구, 김해, 부산) 등 그 지역에 맞는 문화의 꽃을 피우도록 자연조건을 형성했다.
그 중에서도 상류지역은 고봉준령과 어울리는 골 깊은 계곡들이 뼈대있는 선비를 불러들였고, 물 맑은 천들은 곳곳에 음풍농월하기에 좋은 금빛 백사장을 열어 강호가도를 구가하게 하였다. 그 속에 살았던 선비들의 문화가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것은 이 곳 문화 의 젖줄인 내성천이 있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꿋꿋한 문화를 꽃피우게 한 내성천.
봉황산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영주의 무섬마을을 안아 흐르다가 산태극 물태극의 극치를 이루는 의성포를 끼고 101.8km를 흐른다. 예천에는 자랑스런 문화재가 많지만 이번에는 내성천을 중심으로 자연이 빚어낸 경승 회룡포, 비룡산과 보물급 문화재가 있는 용문사, 예천 권씨의 유적을 찾아 나선다.
1. 내성천과 회룡포
영주 안동 문경을 거쳐 예천에 삶의 터전인 분지를 만들고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내성천은 천이라고 하기에는 흐르는 물의 양도 많고 넓이도 넓다. 웬만한 곳의 강과도 같은 수준이다. 그런데도 강이 아닌 천이다. 아마도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 합류하는 삼강나루에서 내성천이 끝나기 때문에 낙동강과의 관계에서 명명된 것이 아닌가 한다. 중류나 하류의 금호강, 황강, 남강, 밀양강과 같이 江이라는 지위를 받은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상류지역의 지류를 강이라 하기에는 낙동강에 대한 예우가 아닌 듯하여 川이라 하지 않았나 싶다.
이 내성천에는 의성포라는 섬아닌 섬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귀양지였으나 조선말 고종대에 의성 사람들이 처음으로 삶의 터전을 닦으면서 의성포라 했다. 고대 백제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부여와 닮은 지형을 찾아 '나라'라 이름 짓고 자기들이 살던 '나라'와 같은 느낌을 받으며 향수를 달랬던 것처럼, 이들도 대대로 살아온 의성을 떠나면서 정들었던 이름을 잊지 않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소시민들의 소박한 정서가 깔려 있는 의성포는 지방자치제도의 냉정한 현실 속에서 그 이름을 잃었다. 예천을 찾는 외지 사람들이 '의성포'이기 때문에 의성에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의성을 찾기 때문에 최근에 '회룡포'라 이름을 고치고 이정표도 모두 회룡포로 고쳐 바꿔 달았다. 지방 자치제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면서 제 고장을 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이해가 가는 처사다. 중부고속도로의 "중부 휴게소"가 "음성 휴게소"로 바뀐 것은 의성포와 회룡포와의 관계나 다름아니다.
회룡포는 용이 승천하기 전 힘을 받기 위해 휘감았던 몸을 힘차게 틀어 펴는 모습이다. 맞은 편 비룡산 정상의 제 1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면 물방울 다이아 목걸이가 다소곳이 초록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목에 걸려있는 모습이다. 영주의 무섬마을을 크게 반원으로 휘감아 힘을 받은 내성천이 이 곳에서는 산을 안고 한 바퀴 깎아질러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물방울 모양을 만든 것이다. 손아귀로 꽉 쥐면 금방 끊어져 동그란 섬이 될 것만 같은 회룡포 마을은 그 많은 세월을 흐른 물줄기도 겨우 10도 정도의 한 뼘을 뚫지 못하고 350도만 에돌아 뱀처럼 흘러 간다.
그러나 제 2전망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은 또 하나의 신비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산태극 물태극의 극치를 말하지만 나는 산태극 물태극도 비켜간 생명의 신비를 본다. 이 곳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은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태아의 모습이다. 비룡산을 향해 뻗어 있는 마을은 태아의 머리고, 물이 뚫지 못해 육지로 이어진 가는 생명선은 태아의 목이다. 그 앞산으로 뻗어 나간 줄기는 태아의 몸통인데 사람이 살지 않은 산중
제2전망대에서 바라본 회룡포 마을
이라 움직임이 없이 진중하고, 머리 부분의 회룡포 마을은 주민들이 비닐하우스의 특용작물 재배와 논농사를 짓느라 항상 바쁜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들은 뱃속 태아의 활달한 생명력이다. 이 태아가 세상에 나온다면 진중한 움직임으로 보아 아마도 이 고장의 선비를 빼닮은 사내녀석일 것이다.
산태극 불태극이 이루는 생명의 신비는 볼수록 심오하다. 이 태아를 감싸고 흐르는 내성천의 물은 생명을 키우는 양수이기 때문에 언제나 맑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화된 현 시점에서도 내성천은 눈이 부시도록 맑고 깨끗하다. 영주 공업단지의 산업폐수와 주변의 생활 오수가 흘러들어도 금빛 모래는 양수를 정화시킨다. 우리 나라의 지형이 노년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산이 부드럽고 계곡을 지난 하천도 그리 깊지 않아 장마철이 되면 범람하기 쉬워 토사를 많이 쓸어가지만 내성천의 물줄기는 항상 도도히 흘러 생명을 키워내고 있다. 내성천은 곧 예천의 생명이다.
2. 비룡산
산은 높아야만 명산이 아니고 물은 깊어야만 맛이 아니다. 높지 않아도 큰 산에서 찾을 수 없는 역사가 있고 그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면 이미 산으로서의 가치를 초월한다. 오히려 하층민들의 작은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흔적이 있다면 작은 산의 의미는 큰 산에 들을 수 있는 메아리보다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의성포가 회룡포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비룡산 때문이다. 먼저 비룡산에서 회룡포를 조망한 다음 회룡포 마을에서 비룡산을 올려다 보면 비룡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풍수지리를 따질 것 없이 외형에 나타난 형세만으로도 비룡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더구나 해발 200m 내외의 낮은 산이고 보면 높이 뛰기 위해서는 최대한 움츠려야 하는 운동의 반작용을 이해하게 된다. 그 작고 낮은 비룡산에 장안사와 원산성, 봉수대 등의 군사 유적지가 있다.
나지막한 산비탈에 앉아 고관대작이 아니라도 누구나 쉬게 찾을 수 있는 도량(道場). 장안사는 그렇게 편안한 느낌으로 답사객을 반긴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면 민초들의 처절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삼한시대 마한이 백제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시대에는 이 곳이 신라의 최북단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와 숱하게 싸운 접전지역이가. 최전방 국경에 살던 사람들은 평화시대라 하더라도 항상 불안하기 때문에 정신적 위안을 찾을 곳이 필요했으리라. 그래서 예천에는 곳곳에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더구나 다른 지역보다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와 남편을 잃은 아낙네와 아버지를 잃은 어린것들의
아픔을 달래 줄 곳이 필요했을 것인데 전쟁터였을 원산성 가까이 그 역할을 하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 바로 장안사다.
장안사의 역사는 꽤 깊어도 정확한 사적기나 기록이 없어 밝힐 수 없으나 의상대사의 제자 운명선사가 설립했다는 전설만으로 역사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다행히 사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원효나 의상이나 자장이 직접 세웠다는 것을 피한 것만으로도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귀에 익은 가곳 '장안사'만으로도 다정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다만 사찰 경내의 건물들이 최근에 지은 것이어서 전통 건축의 미학을 찾을 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래서 답사는 격전지였던 원산성을 먼저 보아야 한다. 흔히 외지 사람을 사전 조사가 미흡하고 지리에 밝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장안사로 진입하지만 용주시비가 있는 회룡포 마을 입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성을 둥근 원으로 쌓았다 하여 원산성이라 하는데 흙과 돌을 섞어 쌓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다. 성벽은 그리 높지 않으나 주변 여건상 천혜의 요새를 이룬다. 일단 산 정상에 올라 서면 주변이 한 눈에 들어오고 내성천이 감싸고 돌아 방어에도 도움이 된다. 굳이 해자가 없어도 내성천이 1차 방어의 역할을 충실히 해 준다.
산의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봉수대는 교육을 위해 원형을 살려 주는 것이 좋겠지만 예산 탓이었는지 관광객이 많지 않은 탓인지 사각 탑형으로 하나만 복원해 놓아 아쉬움이 남는다.
(* 봉화대는 고려중엽부터 사용한 통신수단인데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 연기와 횃불의 수로 위급한 상황을 알렸는데 평상시 1거(炬), 적이 나타나면 2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넘어오면 4거, 적과 접전을 하면 5거를 올렸다. 그래서 봉돈에는 다섯 개의 구멍을 내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했다. )
봉돈에는 항상 말똥 쇠똥 늑대똥 등을 준비해두었다. 이 똥들은 빗물에 젖어도 잘 타서 장마철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였다. 만일 비상사태가 있어 연기나 불로 연락하지 못할 때는 봉수를 관리하는 봉수꾼이 직접 달려가 연락을 취해야 한다.
3. 예천 권씨 종택과 초간정
권씨를 말하면 안동 권씨를 떠올린다. 대구의 공산에서 김락 신숭겸의 희생을 치르며 극적으로 살아난 왕건이 후백제를 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 고창(古昌 안동의 옛 이름)의 세 호장에게 감사의 뜻으로 내린 성씨가 안동 김씨(김선평), 안동 장씨(장길) 안동 권씨(김행)다. 거기에 견훤의 막강한 힘에 눌려 수세에 있던 자기에게 안심을 시켜 준 고장에 대한 영원한 정표로 고창군을 동쪽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의 안동(安東)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안동 권씨는 그렇게 왕건의 사성(賜姓)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천 권씨는 안동 권씨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예천 권씨는 원래 흔(昕)씨였다. 시조 흔적신(昕迪臣)은 예천의 호장이었는데 안동 권씨의 집안으로 장가들었고, 그의 3세 흔창수와 5세 흔승조 역시 안동 권씨와 혼인을 맺었다. 6세 흔섬에 이르러 고려는 제 29대 충목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묘하게도 충목왕의 휘(諱)가 흔(昕)이었다. 국왕의 이름을 성씨로 사용하는 것은 불경죄나 다름없기 때문에 부득이 성씨를 바꿔야 했다. 그래서 흔섬(昕暹)은 외가가 안동 권씨이고 시조와 선대 할아버지도 안동 권씨와 혼인을 맺었기 때문에 권씨 성을 택하고 본은 세거지(世居地)명을 좇아 예천으로 하여 안동 권씨와 구별하였다.
예천 권씨는 손이 귀하여 번창하지 못하다가 5세 권선(權善)대에 이르러 가문이 번창한다. 다섯이라는 숫자와의 인연을 예감했음인지 권선은 다섯 아들 이름의 항렬을 다섯오(五)자로 하여 오행, 오기, 오복, 오윤, 오상으로 지었다. 5세손의 다섯 아들 이름에 들어 있는 다섯 오(五)자. 이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조정에서는 또 다섯 오(五)자를 이용하여 오복문(五福門)이라 하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권오복이 무오사화(1498) 때 김종직의 문인(門人)이며 김일손과 친하다는 이유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극형을 당했다. 화를 피하기 위해 일부가 안동 권씨로 흡수되어 잠시 아픔을 겪었지만 권오상의 손자 권문해는 다시 가문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권오상은 용문면 죽림리에 예천 권씨 종택을 지을 때 후손 중에 '만석꾼의 부자가 나는 터'와 '당대의 학자가 나는 터'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학자가 나는 자리를 택하였다고 한다. 과연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 손자 권문해는 '대동운부군옥'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학 백과 사전과 '초간일기'라는 친필 일기를 남겼다.
대동운부군옥은 세종18년(1436)에 원나라 음시부(陰時夫)의 '운부군옥'을 번각한 것을 모방하여 엮은 백과사전이다. 단군 이래 선조대까지의 사실(史實)을 모아 지리, 국명, 문학, 예술, 국호, 성씨, 효자, 열녀, 화초, 동물에 이르기까지 11개항의 분류법으로 운자에 맞추어 배열한 이 책은 20권 20책으로 문학은 물론 조선시대 인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초간 일기'는 작가의 개인 생활을 소상히 기록해 놓은 일기인데도 당시의 정치와 사회상은 물론 임진왜란의 상황도 소상히 기록해 놓아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기록서다. 권오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권문해의 아들 권별(權鼈)도 '대동운부군옥'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해동잡록'을 펴 권씨 문중의 필력을 드러냈다.
예천은 안동과 풍속을 같이하기 때문에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많다. 용궁면소재지에서 분지로 열려 있는 논마지기를 반마장쯤 건너다보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보인다. 권오상이 지었다는 바로 그 집, 예천 권씨 종택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세월을 홀로 지켜온 듯 500년 묵은 향나무가 자기 이름표와 같은 안내문을 외면하고 기우뚱 서있다. 집 밖에서 보면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도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쯤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지세인데, 신선이 학과 어울려 노는 선인농학(仙人弄鶴)의 명당이라 한다.
함안의 정여창 생가는 집터도 넓고 부속 건물도 많아 웬만한 강원도 산골 마을보다 커보여도 건물간의 위계를 중시하는 구조다. 건물의 위치와 배열이 그것인데 ㅁ자 구조의 특색을 보이는 경상도 북부지방의 가옥은 본채와 익사(翼舍)의 관계로, 또는 건축물의 기능에 의해 위계가 나타난다. 이 곳은 조선 중기 이후 영남 사대부들이 즐겨 짓던 별당식 건물로 처마에는 부연을 내어 팔작 지붕의 품격을 더해주며 육중한 건물의 날렵한 모습을 잘 살렸다. 정면 4칸 건물 중 왼 쪽은 온돌을 내었고 3칸은 대청마루로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그 왼쪽 백승각(百承閣)에는 대동운부군옥의 판목 677매와 옥피리, 자치통감강목 전질 120권, 초간일기, 해동잡록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곳에서 나와 면소재지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예천 학생 수련원 쪽으로 5분정도 달리다 보면 평지 위에 우뚝 선 절벽이 병암정을 이고 있는데 꼭 들러봐야 할 명소다. 잠시 더 달리면 초간정이 있다. 매봉과 국사봉 사이에서 예천방향으로 흐르는 금곡천 주변을 달릴 때는 산과 산 사이에 열린 밭이다. 경승이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은 평지다. 그 틈에 몇 그루 소나무가 보인다 싶더니 자연은 금새 답사객을 깊은 계곡으로 빠뜨버린다. 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 습곡형으로 푹 패인 물길이 평지를 뚫고 흐르기 때문에 깊은 계곡에 빠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주변은 채소나 인삼을 재배하는 밭인데도 초간정 주변만은 깊은 산중처럼 느끼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평야지역에서 보이는 물길은 제방이 있어 아무리 많은 양의 물이 흐른다 해도 깊은 느낌이 없는데, 밭 사이로 흘러온 적은 양의 이 물길은 땅 속으로 흘러들어 보는 이까지도 땅 속으로 끌어들인다. 나도 모르게 자연 속에 끌려 들어간 물아일체의 경지다. 초간 권문해 선생은 자연의 오묘한 멋을 그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던 모양이다. 자연 암반 위에 막돌로 기단을 쌓고 정?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이 낭떠러지 위에 자리잡고 있어 초간정 위에 올라서면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이다. 또 한 번의 착시에 의해 자연에의 침몰이다.
초간정의 현액은 정면의 초간정사보다 개울을 향한 모서리 쪽의 석조헌(夕釣軒)이 더 운치있다. 지금은 무릎에 잠기는 정도의 깊이지만 그 옛날에는 낚시를 즐길 만큼 깊었다는 반증이리라.
선조 15년(1582)에 지은 건물이 임란과 광해군 때 불타는 수난을 겪었으나 1870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49세에 낙향하여 많은 저술을 남긴 곳치고는 너무도 고상한 느낌이다.
초간정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맞은편 비석에서 바라봤을 때 왼 쪽 두 번째 기둥에 있는 선명한 도끼자국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
* 장고춤을 추던 기생이 물에 떨어져 죽자 그의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
* 죽림리의 예천 권씨들이 정자주위에 100바퀴 도는 사람에게 정자를 주겠다고 하자 어느 초립동이 99바퀴 돌고 물에 떨어져 죽었다. 그 후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
*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가 초간정을 100바퀴 돌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말을 듣고 난간을 돌다가 물에 빠져 죽자 그 부인이 도끼로 찍었다.
유서깊은 곳일수록 전설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 초간정도 그만큼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곳이라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계곡 물이 깊어지는가 싶더니 직각에 가깝게 꺾여 흐르는 그 정수리 부분에한 마리의 학인 양 단정하게 내려 앉은 초간정. 권문해 선생은 이 곳에 정자를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선비의 낙을 누렸으리라.
4. 용문사
예천의 진산 용문산은 해발 782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나 천년 고찰 용문사를 안고 있어 역사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하다. 더구나 양평의 용문사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초행의 답사객에게도 다정한 느낌을 준다.
뮨돛씩【?15km 북방에 자라잡은 이 산은 절을 찾아가는 입구에서부터 역사가 실린 느낌을 준다. 절 마당까지 승용차로 올라갈 수 있지만 여기서는 산 입구에서부터 발품을 팔아 계곡의 물소리와 세월의 흔적을 느끼며 올라야 제대로 답사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울창한 거목 사이의 일주문을 지나면 흐르는 물소리도 목탁소리에 어울려 발걸음을 가볍게 부추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예천군 산천조에서는 용문산을 이르기를 "신라 때에 고승 두운이 이 산에 들어가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나가는 길에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갔다. 동구에 이르니 홀연히 용이 바위 위에 나타나 맞이하므로 용문산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태조는 두운선사의 법력(法力)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백산의 희방사를 창건한 신라 말기의 스님 두운선사. 두운선사를 위하여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칙명으로 절을 중건하고 매년 쌀 150석을 하사하였다. 이후 용문사는 고려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크게 번창하였는데 이로 보아 예천 지역의 호족들도 전란기에 견훤보다는 왕건을 도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곳에는 대장전(보물 145호) 윤장대(보물 684호) 용문사 교지(보물 729호) 목각탱(보물 989호)를 소장하고 있어 유서 깊은 사찰의 사격(寺格)을 자랑한다. 그러나 건물들은 1984년 5월 화재로 일부가 불타버렸다. 다행히 새롭게 복원하거나 부속 건물들을 신축하여 웅장한 맛은 갖추었으나 건물에 실린 역사의 무게를 읽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 대장전(보물 145호): 사찰이나 서원, 종가 등에는 장서를 보관할 전각이 있다.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서각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고 예천 권씨 종택에도 백승각이라는 장서각에 초간 선생의 기록물을 보관하고 있다. 용문사에는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수장하기 위한 전각이 있는데 이것이 보물 145호인 대장전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현종 11년(1670)에 중수하였다. 내부는 마루를 깔았고 중앙 후면 양단에 회전식 윤장대가 한 쌍 갖추어져 있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하였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인데 공포는 내외 3출목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2포씩 더 넣은 다포식 건물이다. 건축 기법상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식이라서 건축사적으로 주목받는 건물이다.
* 윤장대(보물 684호) : 우리 나라의 많은 사찰 중 회전식 윤장대가 있는 곳은 용문사가 유일하다. 진천의 보탑사에 윤장대 1기를 설치했지만 고정식이고 최근의 작품이어서 아직 문화사적 가치는 없다. 그러나 용문사의 윤장대는 높이 4.2m, 둘레 3.37m로 크기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중앙의 둥근 기둥을 축으로 팔각형으로 이루어져 미적으로도 수려하다. 윤장대는 원래 대장경을 넣어두고 특별 법회 때 돌려가며 경전을 볼 수 있도록 만든 가구다. 이 윤장대는 국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혀 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목각탱화(보물 989호) : 탱화는 불교에서 부처나 보살의 초상, 또는 경전의 내용을 그려서 벽에 거는 그림을 말한다. 용문사에는 그림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나무에 조각한 것이다. 숙종 10년(1684)에 조성한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그 가법이 정교하여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목가탱화는 가로 2.5m, 세로 2.1m이며 광배와 당초문 등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 교지(보물 729호): 교지(敎旨)는 조선조 때 임금이 4품 이상의 문무관에게 내리는 사령(辭令)인데 이 곳 용문사에는 세조3년(1457)에 내린 사패교지(賜牌敎旨)가 있다. 사패교지란 고려, 조선조 때 왕족이나 공신에게 전지(田地)나 노비를 하사하거나, 또는 전공을 세운 향리에게 부역(賦役)을 면해주는 것을 임금이 확인하여 내린 문서를 말한다.
세조는 불심이 강했던 임금으로 알려진 만큼 전국의 사찰에 은전을 내린 일이 많은데, 경상감사와 예천수령에게 용문사를 잘 보살피고 잡역을 면제해 주라는 전지를 직접 수결(手決)하여 내렸다. 이 교지로 보아 당시 용문사의 위치를 알 만 하다.
5. 석송령 (천연기념물 294호)
수령 600년. 나무도 이 정도의 나이가 들었으면 형편없이 늙어야 한다. 그러나 영험이 있는 탓일까. 600년의 풍상을 겪어온 소나무는 아직도 청춘이다. 막걸리를 좋아해 주민들이 매년 열 말이 넘는 막걸리는 부어 준다니 막걸리는 나무의 나이를 잊게 한 모양이다.
높이 10m, 흉고 직경 4.2m. 동서로 32m, 남북으로 22m. 나무가 만드는 그늘만도 300여평이라 하는데 수평으로 쭉쭉 뻗은 가지가 무거워 지주로 받쳐준 것 외에는 외형상 아무 이상이 없다.
나이가 비슷한 속리산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은 높이 15m 둘레 4.5m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곧은 수형을 이루어 석속령과는 대조적이다. 더구나 정이품송은 영양주사를 맞으며 후손을 키워야 할 정도로 야위어 가는데 석송령은 용이 되어 승천할 날을 꿈꾸고 있는 듯 용의 몸통을 닮은 반송(盤松)의 날개가 싱싱하다.
이천 백사면에 있는 수령 270년의 반룡송(蟠龍松천연념물 381호 반룡 -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땅에 서리고 있는 용)도 수고 1.3m 부분에서 또아리처럼 몸을 꼬고 있어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가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수직으로 자라는 것보다 수평으로 자라는 것이 땅의 기운을 많이 받는 듯 석송령과 반룡송은 서기가 있고 기상도 꿋꿋하다.
석송령은 600여년 전 홍수로 석간천(石間川)에 소나무가 떠내려오자 석평(石坪)마을 사람이 건져 이 곳에 심었단다. 나무는 잘 자라 신령스런 기운까지 품고 있어 석평의 신령한 소나무란 뜻으로 석송령이라 했다.
1920년 경 이 마을의 이수목(李秀睦)이라는 노인이 후사가 없자 자기 땅 1500평을 나무에게 기증하여 나무는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당연히 국가에 매년 1만원 가량의 재산세를 납부하며 그 땅의 소출로 마을 학생들에게 석송령 장학금을 지급, 인재 양성의 덕을 쌓고 있다.
(용궁면 금남리 금원 마을에 수령 500년된 팽나무가 있는데 이는 4000여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음. 천연기념물 400호로 황근목(黃根木)이라 함)
예천에는 없는 것이 없다고 했다. 내성천과 금천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분지에서 생산되는 쌀과 산비탈을 경작지로 일구어 생산한 마늘, 고추는 예천땅을 부유하게 한 곳으로 만들었다. 산과 사이에 열린 땅, 요즈음에는 경사가 급한 곳에도 사과나무를 심어 일교차가 심한 산중의 특산물로 자리하고 있다. 옛날부터 식량 생산이 용이한 곳은 강자들에 의해 유린당하기 쉬웠다. 더구나 적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은 두말할 것도 없다. 예천은 그런 곳이었다. 삼국의 혼란기에 죄없이 죽어간 병사들이 많았고 버려지듯 묻힌 무덤은 무심한 세월에 마멸되어 숲 속에 버려져 있다. 그들의 영혼을 위해 지도자들은 도량을 건립하게 하여 예천땅에는 사찰이 많다.
예천에서 돌아봐야 할 유적지는 보문사, 명봉사 등 보불급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 많고 용봉향교, 무이서당, 옥천서원 등 유교의 문화를 찾아 볼 곳도 많다. 특히 회룡포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용궁 서원은 전학후묘의 전통과 건물의 위계에 따라 일자로 배치한 서원 구조의 전범을 엿보기에 좋은 곳이다. 더구나 퇴색한 기둥에 단청을 하지 않아 옛스런 분위기를 한껏 돋우어 잊고 살았던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고맙다.
반면 최근에 개축한 옥천서원은 화려한 맛과 경제적 여유를 느끼게 한다. 공방전, 국순전 등 가전체 소설을 쓴 임춘 선생의 문학적 업적과 생애를 음미하기보다는 임(林)씨들의 최근 행적을 알아보기에 좋은 곳이다.
물 맑고 산 좋은 예천. 28번과 34번 도로가 예천 시내를 중심으로 4차로로 확장되었고 중앙고속도로도 개통되어 그렇게 멀던 예천은 한층 가까워졌다. 더구나 경상도 북부의 하늘 길을 열어 단숨에 날아갈 수 있는 예천 비행장은 유적지를 찾는 답사객의 가슴을 한껏 부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