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벌식 자판 이대로 좋은가
한성숙(월간 마이컴 기자)
인체공학자인 프랭크 길브레스는 "사람을 기계에 맞추는 것보다 기계를 사람에 맞추는 것이 비용이 적게 들고 사용하기 쉽다"고 주장했다. 자판을 어떻게 배열하느냐는 문제는 단순히 글쇠 위에 글자를 새기는 작업이 아니라 우리의 경쟁력과 미래를 새기는 작업이다.
자판뿐 아니라 한글 기계화 자체가 이제는 새삼스런 소재가 되었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10월이면 앞다투어 한글 기계화에 관련된 기사를 특집으로 다루던 컴퓨터 전문잡지들도 최근에는 10월이라고 해서 한글 문제를 끄집어 내지 않는다. 빠른 속도로 바뀌어가는 신기술의 흐름을 전달하는 데도 숨가쁘고, 또 그 쪽이 지닌 뉴스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한글 문제는 어느 새 우리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코드나 자판, 글꼴, 용어 한글화 등의 문제가 속시원히 해결될 것인가. 조합형과 완성형이 복수 표준으로 인정받아 일정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는 한글코드 외에는 이렇다 할 문제의 해결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도 말이다.
특히 자판 문제는 우리나라 자판 역사 40여 년, 표준 글자판을 제정해 보급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숙제로 남아 있다.
기존 자판 배제한 5벌식 표준
1900년대 초 이원익 씨는 영문타자기를 개조하여 12글쇠 7열의 84글쇠식 타자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타자기는 윗글자쇠(Shift key)를 누르는 횟수가 너무 많고 속도가 느린 탓에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본격적인 실용 타자기는 1949년 공병우 박사가 글자 모양보다 타자 속도에 우선 순위를 두고 만든 3벌식 타자기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58년 김동훈 씨가 초성 2벌, 중성 2벌, 종성 1벌로 개발한 5벌식 타자기는 속도보다 글자 모양에 신경을 써서 제작된 덕에 네모꼴 글자를 출력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사용자층을 확보했다. 당시 타자기 시장은 공병우식이 60%, 김동훈 식이 30% 정도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한다.
타자기의 대중화가 이뤄지자 저마다 다른 자판이 난립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표준자판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과학기술처를 중심으로 그 작업을 진행했다. 의도는 좋았으나, 당시 많이 쓰이던 3벌식과 5벌식을 배제하고 초성 1벌, 중성 2벌, 종성 1벌로 된 4벌식을 타자기용 표준으로, 인쇄 전신기용(텔레타이프) 표준으로 풀어쓰기 2벌식을 확정(1969년) 발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논쟁은 이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신문기자(6월 17일자)는 "공청회 한번 안 열어, 쉬쉬속에 4벌식 확정"이라는 제목 아래, 문화적인 접근 대신 기술적인 작업이라고 판단해 기한내 완성에 급급했던 점, 4벌식 안이 좋다 해도 객관적이고 공평한 과학적 비교작업에 소홀했던 점, 전문가 외에 일반 공청회를 열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이 자판 논쟁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고 1980년대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의 자판 싸움으로 불거져 나왔다. 과학기술처는 1982년 컴퓨터 자판 표준작업에 착수, 컴퓨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된 4벌식을 버리고, 2벌식을 컴퓨터 표준자판으로 확정했다. 뒤이어 1985년에는 컴퓨터와 타자기의 표준을 통일해야 한다는 명분은 내세워 한국기계연구소 연구보고를 토대로 타자기 표준마저 2벌식으로 바꿨다.
정작 심각한 반발은, 컴퓨터 표준자판 확정보다 80만대가 보급돼 있었던 수동식 타자기 표준을 2벌식으로 확정한 데서 생겨났다. 조선일보(1985년 5월 31일자)는 "한글 타자기 논쟁 재연, 정부 확정 통일안에 전문가 등 반발"이란 제목 아래 "이번 표준자판은 입력을 단순화하되 출력은 공문서 위조 등이 불가능하도록 글자 모양을 좋게 했다"는 당시 과기처 정보산업과장의 발언과 타자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함께 실었다.
타자 전문가들은 "2벌식은 기계식 타자기에 맞지 않다"며 "컴퓨터 자판에다 타자기 자판을 적용시키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처사이며 굳이 2벌식을 강행하려면 더 나은 방식을 찾아 개선해 나가고, 2벌식으로 통일이 어려울 바에는 차라리 현행 2원체계를 그대로 둘 것" 등을 주장했다.
컴퓨터 시대에 재연된 자판 논쟁
결국 자판 논쟁은 타자기와 컴퓨터 사이의 자판 통일문제로 옮겨져 더욱 엉킨 실타래가 되었다. 현재는 타자기의 급격한 쇠퇴로 4벌식과 5벌식은 사라지고, 2벌식과 3벌식이 남아 있다.
2벌식은 표준이라는 위상 덕분에 2벌식 컴퓨터 자판이 생산, 보급되고 있고, 3벌식은 개발자인 공병우 박사를 중심으로 그 편리함을 인정하는 이들이 사용하고 있다. 3벌식 자판을 주장하는 2벌식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닿소리는 왼손으로, 오른손은 홀소리를 치도록 한 2벌식은 초중종성이 있어 닿소리를 칠 빈도가 높은 우리 말의 원리상 왼손에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도깨비불 현상'이다. '우리교육'을 입력한다고 생각해 보자. '우' 다음에 'ㄹ'을 입력하면, 당연히 보여야 할 '우ㄹ'대신 엉뚱하게 '울'이란 글자가 나타난다. 홀소리 'ㅣ'를 쳐야 비로소 '우리'가 보인다. 이는 초성과 종성을 같은 음소로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판을 치면서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한글 구현원리를 거스른 잘못된 입력방법이라는 것이다.
연달아 같은 글자를 입력해야 하는 연타문제는 타자속도와 관련된 문제다. '국가'라는 글자를 2벌식으로 입력하면, 'ㄱ','ㅜ' 다음에 'ㄱ'을 연달아 입력해야 한다. 받침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입력속도가 빠른 경우 십중팔구 오타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3벌식 주장자들의 의견에 공감한다고 해도 실제 2벌식에서 3벌식으로 선뜻 옮아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물론 매킨토시 컴퓨터는 이미 3벌식 자판을 지원하고 있고, IBM PC 호환기종에서는 '아래한글', '이야기', '한메한글', '한메타자교사' 등과 같은 한글 프로그램이 한글 3벌식을 2벌식과 함께 지원하고 있지만 컴퓨터를 살 때부터 2벌식 자판을 접하고 2벌식을 익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2벌식을 쓰면서 특별히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미국 드보락 자판 제2표준 인정
좋은 자판은 어떤 자판인가, 이만영 박사(고려대 행동과학연구소)에 따르면 한글 자판을 제대로 만들려면 한글 타건운동, 타건 행동 컴퓨터 시뮬레이션, 타건 훈련법, 자판 평가법, 자판 설계, 남북 자판 회의 대책, 경험적 자판 비교, 타건 안구 운동, 필기 행동, 한글 표준 텍스트 데이터베이스 등 각 분야의 체계적 연구에 국어학, 심리학, 교육학, 체육학, 전산학, 산업공학, 전자공학 분야의 공동작업이 필요하다고 한다.
효율성을 인정받아 쿼티 자판과 함께 표준으로 지정된 미국의 드보락 자판이 그 모범적인 예다. 1930년대 워싱턴 대학의 교육학 및 심리학 교수이던 오거스트 드보락(Dvorak) 박사가 개발한 드보락 자판이 만들어지는 데는 19세기 말 프랭크 길브레스 부부가 연 구한 인체공학적 성과에 드보락의 제자였던 거투르드 포드가 논문에서 '왜 the 같은 간단한 단어가 가장 빈번하게 오자가 나는가'에 대한 연구성과를 아우른 것이다.
또한 드보락의 처남인 윌리엄 딜리가 터득한 안 보고 치는 타자법, 10년만에 완성된 거투르드 포드 등의 타자행동 연구결과도 그 바탕이 됐다.
이 결과 1982년 미국 국립 표준국은 드보락 자판의 우수성을 인정, 표준으로 지정했다. 1백년 넘게 써오던 쿼티자판(QWERTY-영문 자판의 왼쪽 두번째 줄에 있는 글쇠들을 묶어 지은 이름으로 국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영문자판이다)의 비합리성을 인정했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해 쿼티와 드보락을 함께 표준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내려지는 데는 50여 년의 시간과 수많은 연구성과들이 필요했다.
중국 연변대학의 김진용 교수는 올 1월 서울에서 중국에서는 자판 특허를 신청한 6백여 명 중에서 1분에 1백50~2백타의 입력속도를 내도록 만든 '5필자형' 개발자에게 1등상을 주고, 2백만원을 상금으로 주는 등 자판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편 자판배열과 입력방식은 다양하고, 정보교환규격만 준수하면 되는 일본은 더욱 빠른 속도로 입력할 수 있는 한자 자판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차원에서 제작, 보급하고 있다.
컴퓨터 사용에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자판을 1~2년 사이에 새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세대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자판을 사용하고 있다 해도 자판의 효율성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함께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1994년 10월 우리교육
첫댓글 오래 전 글이군요. 아직까지도 2벌식 자판은 그대로 남아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