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고향의 고려 왕릉 (王陵)
※우리고향에는 고려의 왕 중 일곱분의 왕의 묘가 있다 3대/정종(定宗), 5대/경종(景宗), 6대/성종(成宗), 16대/예종(睿宗), 17대인종(仁宗),20대/신종(神宗), 30대/충정왕(忠定王)
고려조 세계표(高麗朝 世系表)
➀태조(태조)→➁혜종(惠宗) →③정종(定宗) →④광종(光宗)→⑤경종(景宗)→⑦목종(穆宗) →욱(旭)→⑥성종(成宗) →욱(郁)→⑧현종(顯宗)→⑨덕종(德宗) →⑩정종(靖宗) →⑫순종(順宗) →⑪문종(文宗) ⑬선종(宣宗) →⑭헌종(憲宗) ⑮숙종(肅宗) ⑯예종(睿宗)→⑰인종(仁宗)→⑱의종(毅宗) ⑲명종(明宗)→㉒강종(康宗)→㉓고종(高宗)→㉔원종(元宗) ⑳신종(神宗)→㉑휘종(熙宗) ㉕충렬왕(忠烈王)→㉖충선왕(忠宣王)→㉗충숙왕(忠肅王)→㉘충혜왕(忠惠王)→ →㉛공민왕(恭愍王)→㉘충혜왕(忠惠王) →㉙충목왕(忠穆王) →㉚충정왕(忠定王) →㉛공민왕(恭愍王)→㉜우왕(禑王)→㉝창왕(昌王)→㉞공양왕(恭讓王)
고려 제3대왕 정종 안릉(高麗 定宗 安陵)
재위기간 945년-949년. 집권3년
개풍군 청교면 양능리 안 능동에 있다. 고려 제3대왕으로 명은 요 태조의 둘째 아들이다. 기유(기유=949년)정종4월 왕이 병으로 위독하여 모제를 불러서 내선하고 제석 원에 이어되고 여기서 서거하였다. 재위 4년 형수27세이다. 왕은 성품이 불교를 좋아하고 의기심 이 많았고 고집이 대단하였다. 시호를 문명이라 하고 묘 을 정종이라 칭하고 안능에 안장하였다. 비(妃)는 박씨 문공 왕후를 부장 하였다.
생애와 가계 (요약)
정종(定宗, 923년~949년은 고려 제3대 임금(재위: 945년~949년)이다. 휘는 요(堯), 자는 천의, 시호는 문명(文明)이다. 정종은 태조와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사이의 아들이며,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왕위를 엿보았다.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朴述熙 혹은 朴述希)를 제거하고, 혜종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왕식렴(王式廉) 등의 도움을 받아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왕규(王規)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는 등 여전히 왕권이 확립되지는 않았다. 임금으로 즉위하자마자 그는 서경 천도를 천명했다. 이것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즉위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 개경의 민심이 그에게 등을 돌린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개경의 호족들과 백성들의 불만을 더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그는 점점 불안해 했고 친동생인 왕소 마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947년 후진에서 유학하다 거란에 붙잡혀 그곳에서 벼슬하던 최광윤이 고려에 사신으로 와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라는 보고를 듣고 광군(光軍) 30만명을 양성하기도 했다. 948년 9월, 동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치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우레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든 이후 계속 병석에 있다가 이듬해 3월에 죽었다. 능은 개풍군 청교면 양능리의 안릉(安陵)이다. 문공왕후 박씨(文恭王后)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 경춘원군(慶春院君)
※문공왕후 박씨(文恭王后 朴氏, 생몰년 미상)는 고려 정종의 왕비이다. 본관은 승주(昇州). 견훤의 사위였던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영규(朴英規)의 딸이다. 고려 정종의 정비(正妃)로 책봉되었으며, 그녀의 여동생도 정종의 왕비(문성왕후, 文成王后)가 되었다. 또한 그녀들은 시아버지 태조의 제17비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도 친자매 사이이다. 사망 후에는 정종의 정비로써 태묘에 부묘되고, 정종과 합장하여 그 능호를 안릉(安陵)이라 하였다.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 고려 정종의 제2비. 후백제 견훤의 사위였으나, 고려에 귀순해 삼중대광에 오른 영규의 딸. 정종의 제1비인 문공왕후와 자매간이다. 왕자 경춘원군과 공주 1명을 낳았다. 아버지 영규는 견훤이 장남 신검(神劍)과의 불화로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자, 고려에 귀순할 뜻이 있던 차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공략하자 고려의 공신이 되었다 고려가 후백제를 통합한 뒤 신라 왕통을 계승한 박씨가문과의 혼인으로 왕실의 위상을 높이고, 후백제 계열의 호족들을 효과적으로 포섭하려는 정략에 따른 것으로, 문성왕후는 뒤에 왕자 경춘원군(慶春院君)과 공주 1명을 낳았다. 경춘원군은 광종(光宗) 때 정치적인 이유로 생명을 잃었고, 공주는 태조의 아들 효성태자(孝成太子)와 혼인하였다. 高麗史
고려 제5대왕 경종 영능(高麗 景宗榮陵)
경종(景宗, 955년~981년)은 고려 제5대 군주(재위: 975년~981년)
청교면 탄동리 진 봉산 동쪽에 있는 능이다. 고려 제5대왕이며 명은 주요 광종의 장자이다. 신사981년 여름 왕이 병이 들어 당제인 개령군 을 불러 손을 잡고 나라일 을 부탁하고 마침내 왕위를 내 놓았다. 재위6년 형수26세이다. 시호를 헌화라 하고 묘를 경종이라 부르고 진 봉산 동록에 안장하다.
능역 너비 약 47m, 길이 약 83m, 능 높이 약 4m, 지름 약 12m. 경종은 955년(광종 6) 9월 광종(光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965년 태자로 책봉되고 975년 즉위하였다. 981년 7월 재위 6년 만에 26세로 정전(正殿)에서 죽어, 경기 남쪽 산기슭에 장례를 지냈으며, 1096년(숙종 1) 6월 그의 신주를 영릉으로 옮겼다.
능제(陵制)는 “원릉(園陵)의 제도는 힘써 검약을 따르도록 하라”는 그의 유조(遺詔)를 따랐음인지 비교적 간소하다. 능역은 열석(列石)으로 3단면으로 구별되어 있고, 병석(屛石)은 높이 약 85cm, 한 변의 길이는 272cm로 12각으로 둘러져 있다. 또, 각 면석에는 12지신 상(十二支神像)이 입상(立像)으로, 동물머리에 홀(笏)을 든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석수(石獸)는 4구가 있으며, 그 모양은 포복 형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고, 석인(石人)은 1쌍이 남아 있다. 능을 지키기 위해 산직장상(散職將相) 4명이 파견되었다
생애와 가계 (요약)
경종(景宗, 955년~981년)은 고려 제5대 군주(재위: 975년~981년)이다. 휘는 주(伷), 자는 장민(長民), 시호는 헌화(獻和)이다. 광종과 대목황후(大穆皇后) 황보씨(皇甫氏)의 아들이다.
생애 광종이 강력히 추진하였던 호족세력 숙청의 폭풍 속에서 부왕과의 관계마저 좋지 못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975년 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나중에는 정사를 멀리 하고 오락과 음탕한 생활에 빠져 지냈다. 981년 음력 7월 병세가 위독해지자 사촌동생 개령군(開寧君: 성종)에게 양위하였으며 같은 해에 병사하였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탄동리에 위치한 영릉(榮陵)이다. 업적 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여 고려의 토지제도의 시초를 마련하였다. 송나라와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여 사신의 내왕이 잦았다. 가계 헌숙왕후김씨(獻肅王后) ,헌의왕후 유씨(獻懿王后),헌애왕후 황보씨(獻哀王后) 목종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王后)
※헌애왕후 (獻哀王后 964~1029 /천추태후(千秋太后) 고려 태조(太祖) 왕건의 손녀로 제5대 경종(景宗)의 비(妃)이며, 제7대 목종(穆宗)의 생모이다. 목종이 즉위한 뒤에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리며 전권을 행사했으나, 강조(康兆)의 정변으로 권력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왕건(王建)의 일곱째 아들인 왕욱[王旭, ? ~ 969, 성종이 즉위한 뒤에 대종(戴宗)으로 추존]의 딸이며, 고려의 제6대 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의 친누이이다. 아버지인 왕욱과 어머니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가 모두 일찍 죽어, 할머니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동생인 헌정왕후(獻貞王后, ?~992)와 함께 황보씨(皇甫氏)의 성(姓)을 사용하였다. 황보씨는 황주(黃州)의 유력 호족(豪族)으로 신정왕후의 딸인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도 태조의 넷째 아들인 제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비(妃)가 되어 제5대 경종(景宗, 재위 975∼981)을 낳아 외척(外戚)으로 대를 이어 권세를 누렸다. 그리고 광종이 호족의 군사적·재정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등 중앙집권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자, 대목왕후를 앞세워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 헌애왕후는 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고종사촌인 경종(景宗)과 혼인하였는데, 경종이 즉위한 뒤인 980년 아들인 송(誦, 訟이라고도 함)을 낳았다. 하지만 981년 경종이 즉위 6년만에 죽자, 겨우 2살밖에 되지 않은 송(誦)을 대신해 헌애왕후의 친오빠인 왕치(王治)가 광종의 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고려의 6대 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다. 성종은 광종(光宗)을 계승하여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과거제도를 강화하고 지방 호족을 향리(鄕吏)로 편입해 통제하는 등 중앙집권적 개혁 정치를 전개하였다. 이 무렵 헌애왕후는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져 분란이 생기자 성종은 김치양에게 장형(杖刑)을 내린 뒤 멀리 유배를 보냈다.
※헌정왕후 (獻貞王后) 고려 경종의 비.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헌애왕태후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의 비가 되었으며, 경종이 죽은 뒤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며 대종의 동생인 욱(郁:安宗)과 정을 통하여 현종을 낳았다. 현종이 즉위하자 효숙왕태후에 추존되었다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추존왕)의 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친자매로 함께 경종의 비가 되었으며, 성은 외가의 성을 따라 황보(皇甫)라고 하였다. 경종이 죽은 뒤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며 대종의 동생인 욱(郁:安宗)과 정을 통하여 현종을 낳았다. 현종이 즉위하자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에 추존되고, 1017년 혜순(惠順)으로 가시(加諡)되었으며, 1021년 인혜(仁惠), 1027년(현종 18) 선용(宣容), 1252년(고종 40) 명간(明簡)으로 가시되었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開豐郡)의 원릉(院陵)이다.
고려 시대 경종(景宗)의 비(妃)이며, 현종(顯宗)의 모후(母后)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皇甫)씨의 능(陵).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영남면(岑南面) 현화리(玄化里)에 위치.
고려 제6대왕 성종 강릉(高麗成宗康陵)
재위기간 981년-997년. 집권 16년
개풍군 청교면 배야리 강능동에 있다. 997년(성종 16) 10월 성종이 36세로 죽자 이곳을 능으로 삼아 치장하였다. 높이는 3.6m, 지름은 12.6m이며, 능역에 돌담 ·둘레돌 등이 있다. 석수(石獸) ·석인(石人) 등이 세워졌으나 많이 훼손되었으며, 능 앞에 1395년(태조 4) 건립된 능비(陵碑)가 있다.
고려 제6대왕 명은 치 요 태조의 손자이며 부친은 욱이다. 정유16년 10월 왕이 병중 개령군을 불러서 이에 전의한 후 천왕사 에 왕의 거처를 옮겼다. 재위16년(997년) 형수 38세였다. 왕은 천성이 엄정하고 그 사람됨이 관홍하였다. 종사를 세우고 절의를 숭상하며 항상 현인을 구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정풍 쇄신 운동을 일으킴을 임무로 삼았다. 시호를 문의라 하고 묘를 성종이라 부르고 강릉에 안장하다.
고려 성종의 생애와 가계
성종(成宗, 960년~997년)은 고려 제6대 군주(재위: 981년~997년)이다. 휘는 치(治), 자는 온고(溫古), 시호는 성종강위장헌광효문의대왕(成宗康威章憲廣孝文懿大王). 태조의 손자이고, 대종(戴宗)과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의 아들이다.
생애 성종은 981년(경종 6년) 경종이 위독하자 내선(內禪)으로 왕위에 올랐다. 본래 전왕이자 사촌형인 경종은 성종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와의 사이에서 이미 2살 된 아들 송(목종)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가 없었기에 대신 왕위에 오른 것이다. 또한 성종이 광종의 사위라는 것도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982년(성종 1년) 경관(京官) 5품 이상으로 하여금 봉사(封事)를 올리도록 하여 정치의 득실을 논하게 했다. 이에 참여한 최승로 등 유학자의 자문·건의로 신정(新政)을 단행하고, 고려 초창기의 제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했으며, 유교를 국가의 지도 원리로 삼고 중앙 집권적인 봉건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해에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백관(百官)의 칭호를 개정하였고, 983년(성종 2년) 3성(省)·6관을 두었으며, 서무를 분장(分掌)한 7시(寺)를 설치하는 등 중앙 관제를 제정하였다. 또 언론(言論)을 맡은 사헌부(司憲府), 군국(軍國)의 기밀기관인 중추원(中樞院) 등을 두었다. 한편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지방에는 처음에 12목(牧)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팔관회, 연등회를 폐지하고 왕의 내리는 명령인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로 낮추는 등 북송에 사대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군대가 고려에 침입하자 서희를 적진에 보내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또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넓혔다. 995년(성종 14년) 잠시 중단된 개혁을 재개하여, 6관(官)을 상서 6부(尙書六部)로 하는 등 관제를 개편하였으며, 지방 행정 구역을 10도(道)·12주(州)로 나누어 다스렸고,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하여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서울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학문과 농업을 장려하였다. 밖으로는 995년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동북·서북 지방에 특히 유의했다. 997년 음력 10월에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開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능은 개풍군 청교면 배야리 강능동에 강릉(康陵)이다.
가계 (家系) 문덕왕후 유씨(文德王后) ,문화왕후 김씨(文和王后),원정왕후(元貞王后)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 연창궁부인) ,원화왕후(元和王后)
※문덕왕후 유씨(文德王后) 고려 제6대 성종의 제1비. 고려 제4대왕인 광종의 딸이다.할머니인 태조비 신명순성(神明順聖)왕태후의 성을 따라 유씨(劉氏)라 칭하였다.처음 태조의 손자이며 사촌간인 홍덕원군(弘德院君) 규(圭)에게 출가하였다가 사후에 다시 성종에게 재가하였다. 이 경우 친계 사촌간의 혼인이며, 성종은 광종의 사위자격으로 제5대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즉위한 것이 된다.전남편인 홍덕원군과의 사이에 선정왕후(宣正王后)를 낳았고, 성종과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시호는 문덕왕후이고 성종의 묘실(廟室)에 합장되었다. 高麗史
고려 16대왕 예종유능(睿宗裕陵)
청교면 유능리 총능동에 있다. 고려 16대왕 명은 후 숙종의 큰아들이고(1106-1122년)임인1122년 종17년4월 병이 갑자기 악화 위중하였다. 재위17년(1106-1122년) 수는 45세임. 시호를 문효로 하고 묘를 예종 능호 는 유능 이라 한다.
예종은 1079년(문종 33) 숙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1098(숙종 3) 태자로 책립되고 1105년에 즉위하여 1122년(예종 17) 45세로 죽어 성의 남쪽에 장례를 지냈다. 능은 높이 약 3m, 직경 약 8m이며 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병석(屛石), 석난간(石欄干)의 부서진 파편만 남아 있을 뿐, 석인(石人) ·석수(石獸) 등을 비롯한 석물은 거의 일실되었으며, 정자각(丁字閣)터로 보이는 유지가 있다. 또한 왕은 변경을 넓히고자 윤관 장군(尹瓘 將軍)을 중용하여 여진을 정벌한 것은 유명한 고사이다.
예종 의 생애와 가계
예종(睿宗, 1079년 ~ 1122년 재위: 1105년 ~ 1122년) 고려 제16대 군주이다. 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 시호는 예종명렬제순문효대왕(睿宗明烈齊順文孝大王)이다. 숙종과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 柳氏)의 아들이다.
약력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써 1107년에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정벌하여 섬멸하고 이듬해에는 함흥평야에 9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과 9성 방비의 어려움,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로 인하여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반환하였다.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으며 112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칭하자, 요(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거부하였고 1116년,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經籍)을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부흥시켰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바로 아악(雅樂)이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고 1119년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였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의 공신인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으며 2년 뒤인 1122년 4월에 승하하였다. 능은 개풍군 청교면 유능리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가계 순덕왕후 이씨(仁州李氏) ※순덕왕후 이씨, 또는 문경태후 이씨(順德王后, 文敬太后 李氏, ?-1118년)은 고려 예종의 왕비이다. 본관은 인주(또는 경원, 지금의 인천). 조선국공 이자겸(李資謙)의 둘째 딸이며, 태어난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원래 인주 이씨 집안은 문종 때부터 왕비를 배출한 집안으로, 문벌 귀족이라 할 수 있었다. 훗날 아들 인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인종의 외조부가 되는 이자겸은 자신의 다른 두 딸(순덕왕후의 동생들)을 인종과 결혼시켜서 보다 막강한 권력을 노리게 된다. 하지만 이자겸이 축출된 후 인종에게 시집간 두 딸은 인종의 이모가 되는 이유로 폐비가 된다. 순덕왕후는 1108년(예종 3년)에 입궁하여 연덕궁주(延德宮主)에 봉해졌고, 1109년(예종 4년)에 사제에서 원자(훗날의 인종)을 낳았다. 이어 1114년(예종 9년)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4년 뒤인 1118년(예종 13년)에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인종 / 승덕공주(承德宮主) ,흥경공주(興慶宮主),문정왕후 왕씨(文貞王后) 숙비 최씨
고려 제20대왕 신종 양능(神宗陽陵)
재위: 1197년 - 1204년
청교면 양능리 안능동에 있다. 고려 제20대왕 명은 탁 인종의 아들이고 갑자(1204년)정월 왕이 유고로 왕이 되기 전해 12월에 악성병에 앓기 시작하여 61세로 서거함. 시호는 정효 묘는 신종 능은 양능 이라 한다.
생애와 가계 신종(神宗, 1144년~1204년)은 고려 제 20대 군주(재위: 1197년 - 1204년)이다. 휘는 탁(晫), 자는 지화(至華), 시호는 신종경공정효대왕(神宗敬恭靖孝大王).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다섯째 아들이다.
생애 평량공(平凉公)에 봉해진 뒤 최충헌(崔忠獻)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으며 1198년,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었고 관서(關西) 민가의 안대(安碓)를 금지하였다. 같은 해 만적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명주(강릉)와 동경(경주), 뒤이어 진주와 전주, 합주(합천)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1199년에 최충헌이 문무관의 인사행정(人事行政)를 도맡았는데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같은 해에 수양장도감(輸養帳都監)과 오가도감(五家都監)을 두었다. 1202년에 탐라(제주도)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소부소감(少府少監)인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郞將) 이당적(李唐積)을 안무사(安撫使)로 보내어 평정하였다. 1204년 등창이 심하여 태자에게 양위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며 능은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양릉(陽陵)이다.
가계 선정왕후 김씨(宣正王后 金氏 ?~1222)) ※고려 목종(穆宗)의 제1비. 아버지를 잃고 성종의 딸로 자랐으며 목종은 성종의 사위로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추측된다. 희종 양양공(襄陽公), 효회공주(孝懷公主) ,경녕궁주(敬寧宮主)
고려 제30대왕 충정왕 총능(忠定王聰陵)
청교면 유능리 총능동 에 있다. 의 서자 모는 희빈 윤씨이다.
생애와 가계 충정왕 (忠定王,1337년~1352년) 고려 제30대왕(재위: 1348년- 1351년)이다.
생애 충혜왕과 희비 윤씨 소생 아들로 이복형 충목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의 뒤는 아들 왕제대신 그의 숙부 공민왕이 차지하였다.
가계 부왕 : 충혜왕. 모후 : 희비윤씨. 이복형 :충목왕. 이복누이 :장녕옹주 아들 : 시중공(侍中公) 왕제(王濟), 그의 아들 시중공 왕제는 왕위는 계승하지 못하였지만 혈통을 이어갔다. 숙부 : 공민왕
※최근의 고향에 있는 고려 왕릉(高麗王陵)들의 모습
최근의 고향의 왕릉들은 한서대학교 장경희(문화재보존학) 교수가 2005년부터 북한당국과 교섭하여 청교면에 있는 현지를 직접방문해서 촬영한 사진이며 보고 느낌 점에 대한 것을 한겨레신문사의 노형석 기자가 기사를 게재한 내용이다. 1950년 6.25전쟁이후 60여년 만에 고향인 청교면에 있는 고려왕릉(高麗王陵)의 모습이 분단이후 최근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고려 왕릉은 대체로 통일신라 능묘의 전통을 계승해 산기슭에 304층 단을 쌓고 맨 윗단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들은 봉분을 쌓고 아래로 석등 .문. 무인석 .제향각 등을 배치했다. 고려왕릉 대부분의 능역(陵域)과 주변 환경은 일제 때 집중적인 도굴 피해를 입었고 한국 전쟁( 韓國戰爭)때의 파괴 등을 거치며 심하게 훼손돼 석물들이 파괴. 분실돼 대다수는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당국이 주변 숲을 베고 능역(陵域)안까지 다량 논밭을 만든 데다 관리에 소홀해 봉분과 층 단(層壇), 석물(石物) 등이 처참할 정도로 망가진 사실이 확인됐다. 장 교수는 당국 간 협력을 통해 체계적인 복구, 보존대책을 시급하게 세워야 할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왕릉(王陵)들이 석축이 파묻히고 난간석이 나뒹굴고 농지 개간이나 남벌로 민 묘(民墓)처럼 초라한 모습이다. 사진으로 공개된 고려 왕릉들은 관리소훌 등으로 무척 황량한 모습이지만 10-14세기 우리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북한쪽은 이후 주요 왕릉들은 보존 급 유적으로 지정했으나 야산 곳곳을 남벌하고 농지를 개간하면서 능역이 크게 축소됐다. 고려6대왕 성종왕릉(成宗王陵)의 경우 병풍석과 석축이 파묻혔고 고려5대 경종왕릉(景宗王陵)은 장명등, 석성, 망주석이 사라졌다. 고려 제20대왕 신종왕릉(神宗王陵)은 잘못된 복원으로 깨진 난간석이 굴러다니고 민 묘(民墓)처럼 왜소한 몰골로 변했다. 현지의 산에는 나무가 없어 큰비가 오면 무덤 흙이 계속 쓸려 내려갈 수밖에 없는 만큼 종합 방제대책이 필수적이라고 한서대학교 장 교수는 말했다. 자료출처/한겨레신문에서 발취하였음
양능리 수락암동(水落岩洞)의 고분(古墳) 청교면 양능리에 있다. 용수산 남방 수락암동에 있으며 서기 1916년경에 발견되었다. 현실(玄室)은 장방형(長方形)으로서 좌(左) 우(右) 후(後) 삼면 벽(三面壁)은 여러 층(層)으로 절석(切石)으로 쌓아서 만들고 벽(壁) 하부에는 백호(白虎), 청용(靑龍), 현무(玄武)를 각 채색(彩色)으로서 그리고 상부에는 각 면에 삼구식(三軀式)의 방위(方位)신상(神像)을 만들어 놓았다. 이 신상(神像)들은 어느 것이나 의관을 착용하고 관위에 기 방위(方位)에 해당하는 동물의 상(像)을 나타나고 있다. 정면입구의 문짝을 세우고 닫는 면에 방위신(方位神) 및 주작도(朱雀圖)를 그려 놓았다. 필채가 온아하고 자세 또한 잘 어울린다. 천정(天井)은 삼석(三石)을 늘어놓아 만들고 그림을 그렸는데 무엇을 그려 놓았는지 알 수 없다. 동 고분은 현실(玄室)속으로 내려갈 수 있고 실내는 2.7m 폭은 3.6m 높이는 2.7m 정도이며 사면 벽(四面壁)은 대리석을 절석(切石)하여 쌓고 천정(天井)은 3개의 대반석(大盤石)으로 덮었다. 벽화(壁畵)는 대부분이 벗겨지고 내부는 텅 빈 동굴로서 중앙에 장방형(長方形)으로 석기(石基)가 있다. 관(棺)은 없고 목편(木片) 및 인골편(人骨片) .토기의 파편이 있다. 이 분묘는 일제 때에 총독부의 보호를 받은 것으로 이면에 철조망을 치고 좌에 표석을 세웠다. 표문(標文)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양능동 제1호분 서기 1916년 6월 조사를 끝내고 1917년 수리를 끝내어 1918년 12월에 벽화를 복사했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每日申報 1916.6.16 기사 靑郊面 陽陵里 水落岩洞 朝鮮總督府博物舘은 開城郡 靑郊面 陽陵里 水落岩洞에 있는 古墳 發堀에서 12支像을 그린 衣冠한 文官 12人의 壁畵 等을 發見하다. 同 古墳은 其 洞名으로 推想하여 高麗 神宗의 陽陵으로 보고 있다. 효자묘(孝子墓) 고남문 현에 있다. 어느 댁 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설에 따르면 이 묘(墓)의 손(孫)은 대대로 매일 성묘(省墓)하여 묘전(墓前)에 배례(拜禮)의 흔적이 나타나 손과 무릎 의 자리에 잔디가 자라지 못하여 절하는 자리가 드러나고 있어 지나가는 선비들이 이 묘(墓)에 예(禮)를 행하고 지나가는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옆에 옹달샘이 있어 과객(過客)들은 갈증을 풀며 효자 묘(孝子墓)에 배례하고 휴식하는 곳이 되어 있다. 고려 고분군(高麗古墳群) ▣ 진봉산 서쪽에 위치하고 모두 도굴되었다 ▣ 대장군 장붕익(張鵬翼/1646~1735) 묘(墓).탄동리 진봉산 북쪽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자는 운거(雲擧), 호는 우우재(憂憂齋)이다. 교리를 지낸 차주(次周)의 손자이다. 1699년(숙종 25)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거쳐 창원부사를 지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병마절도사와 총융사(摠戎使)를 지냈다. 형조 판서로 있을 때 군함(軍艦)의 개조도를 새로 작성하여 해전(海戰)에 대비하였다.) ▣ 조장군(趙將軍)묘가 탄동리 산후동 도선암(道詵庵) 밑에 있다. ※조준 (趙浚, 1346~1405)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고려 말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개국의 경제적인 기반을 닦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 전 후로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주장했으며, 태종을 옹립하였다. 그해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1400년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 때 태종을 옹립하여 영의정 부사에 오르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시문에 능했고, 토지제도에 밝은 학자로 하륜(河崙) 등과 함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였다.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송당문집(松堂文集)이 있다. 토지제도에 밝은 학자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제1대왕 태조(太祖)왕건 877년-943년 재위기간 918년-943년. 25년 고려 태조 왕건은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복지겸(卜知謙) 등의 추대를 받아 철원(鐵圓:鐵原)에서 즉위하여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 통합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崇佛政策) 등으로 세력구축에 힘썼다. 이때 한반도 내의 형세는 후삼국(後三國)의 분열기였는데 935년 신라를 병합하였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하였다. ‣출생과 성장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고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으로 송악(개성)에서 출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후삼국시대에 궁예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그 세력이 송악에까지 미치자 궁예의 부하가 되어 그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주에서 견훤의 군사를 무찌르는 등 군사 활동에 있어서 큰 공을 세웠다.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 청주 및 당성(唐城: 지금의 南陽), 괴양(槐壤: 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飡)이 되었다. 이어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켜 그 부근 10여개의 군현을 쳐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어 이해에 그동안 쌓은 공으로 알찬(閼飡)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飡)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고려의 건국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 한편으로는 이 이흔암의 모반사건은 조작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 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 안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제도적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 유도(取民有度)의 표방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라 말기 이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하였으며, 각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919년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후백제, 고려의 후삼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 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 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켰는데 이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후삼국의 통일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지방)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 해 10월에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졌다. 마침내, 936 년 왕실내분으로 혼란한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왕건은 혼인 정책으로 호족세력을 끌어 모은 것으로 유명한데, 왕건의 후비는 모두 29명이라 한다. 또 죽기 전 대광 박술 희에게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이후 역대 왕들이 좋은 계율로 삼아 정치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훈요 십조> 1. 국가의 대업은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사원 경영에 문란함이 없도록 하라. 2. 도선이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마라. 3. 왕위계승은 장남, 차남 그리고 형제 순으로 한다. 4. 외국의 풍속을 무조건 본받지 마라. 5. 3년마다 서경에 1백일 이상 머물러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라. 6. 연등회와 팔관회를 시행하라. 7. 간언을 받아들이고 참언을 멀리하라. 8. 후백제 지역의 사람을 등용하지 마라. 9. 인사원칙에 충실 하라. 10.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경사를 섭렵, 국정에 참고하라. 이 같은 훈요십조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 태조는 통일 직 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친히 저술하여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해야 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에는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천하의 왕건 태조도 943년 5월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으로 그의 제 1비 신혜왕후 유 씨가 함께 묻혀 있다
※ 천년의 눈물’…모습 드러낸 개성의 고려 왕릉
한겨레 | 입력 2009.03.09 08:00 | 수정 2009.03.09 10:51
[한겨레] 석축 파묻히고 난간석 나뒹굴고 장 교수가 공개한 사진들 가운데 왕릉은 모두 12기다. 2대 혜종에서 시작해 정종(3대), 경종(5대), 성종(6대), 현종(8대), 문종(11대), 순종(12대), 예종(16대), 신종(20대), 원종(24대), 충목왕(29대), 충정왕(30대) 등이다. 태조 왕건의 비 신성왕후, 경종의 비 헌정왕후, 신원 미상의 왕족 무덤떼인 칠릉떼 등도 소개됐다. 고려 왕릉 가운데 현재의 모습이 확인된 것은 첫 임금인 태조의 현릉과 31대 임금인 공민왕의 현·정릉 2곳뿐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장경희 교수 제공
고려왕실의 근친혼 경종의 네 왕비는 고종사촌, 친사촌, 외사촌 자매[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3.06.16 06:52 / 고려사의 재발견 경종 ① 왕실의 근친혼
지금 황제(*경종)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명문(銘文)이 삼각형 바위 왼쪽에 새겨져 있다. ‘태평 2년(977·경종 2년)’은 좌상이 만들어진 시점이다. 태평은 송나라 태종의 연호다. 경종은 연호를 송나라 것을 쓰되,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조용철 기자
고려 5대 국왕 경종(景宗: 955∼981년, 975∼981년 재위)은 6세 되던 960년부터 즉위 직전까지 15년간 지속된 광종이 일으킨 숙청의 광풍을 뚫고 어렵사리 즉위한다.
고려의 근친혼 풍습을 비난한 『동국통감』. 조선 성종 때 편찬됐다.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를 삼았다. 이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내물이사금조)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