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신영록이 깨어나던 날 하늘로 간 여자축구 선수 | ||
우울한 소식만 가득했던 K리그에 오랜 만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심장마비로 쓰러졌던 신영록이 50여 일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한 것이다. 이날을 너무도 기다려왔다. 실의에 빠진 K리그에서 신영록이 보여준 기적은 한 줄기 희망과도 같다. 많은 이들이 신영록의 회복 소식에 마치 내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를 보낸다. 나도 기쁘다. 하지만 이 순간 우리가 잊고 있는 한 선수가 있다. 신영록이 깨어나던 날 한 여자축구 선수가 하늘로 갔다. 신영록 회복 소식은 잠시 미뤄두고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는 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많은 이들이 신영록의 회복 소식만큼 중요한 뉴스를 잊고 있는 것 같아 오늘은 척박한 한국 여자축구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운명을 달리한 故정정숙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려 한다. 슬프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를 기억해야 한다. 정정숙은 한국 여자 축구를 한 단계 발전시킨 인물이다. 대교 소속으로 경기에 나선 정정숙의 모습. (사진=한국여자축구연맹) 공 차는 게 마냥 좋았던 소녀 정정숙은 1982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두 살 위 언니가 잘 놀아주지 않자 동네 오빠들과 공을 차기 시작하면서 축구를 처음 접했다. 공을 갖고 노는 것 말고는 시골에서 딱히 할 게 없었다. 재능을 알아본 동네 오빠들은 ‘커서 축구 선수 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전문적인 축구 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시 정서상 여자가 축구선수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정숙에게 축구는 단지 동네에서 오빠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취미였다. 어릴 적부터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지역 내 육상 대회를 휩쓴 그녀는 울산현대여고 1학년 때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됐다. 그녀의 운동 신경을 알아본 코치의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다. 당시 한국의 여자축구는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하키와 핸드볼 등에서 임시로 선수를 차출해 팀을 꾸릴 정도로 체계가 없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통해 국제무대에 처음 나선 한국 여자대표팀은 중국에 0-8로 대패하는 등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정정숙은 이 모습을 보며 축구를 시작했다. 2002년 한국은 축구 광풍이 불었다. 2002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모두가 축구에 열광하던 시기였다. 때맞춰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도 서서히 생겨나고 있었다. 창단 2년밖에 안 된 숭민 원더스가 해체돼 INI스틸과 인천 헤브론 등 국내 실업 팀이 딱 두 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대교가 여자축구단을 창단한 것도 이때였다. 2001년부터 대표팀에 선발됐고 울산과학대를 졸업한 정정숙은 대교의 창단 멤버로 팀에 합류했다. 대교는 한일월드컵 조직위 경기운영부장을 역임한 최추경 감독을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정정숙은 대교 최고의 스타였다. 비록 중학교 2학년 이후 그대로였던 작은 키(153cm)가 단점으로 지적됐지만 빠른 발과 부지런한 플레이로 공격 최전방에서 상대 수비를 괴롭혔다. 대표팀에서의 입지도 확고했다. 한국 여자축구가 세계 수준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정정숙이 없는 대표팀은 상상할 수 없었다. 현재 여자축구 최고의 스타로 떠오르고 있는 지소연과 여민지 등도 정정숙의 플레이를 보며 축구선수로의 꿈을 키울 정도였다. 그녀는 여자축구 선수들의 우상이었다. 정정숙, 만리장성을 넘다 물론 그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한국 여자축구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인 2003년 미국 여자 월드컵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정숙은 국내 합숙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안종관 당시 대표팀 감독은 마지막까지 정정숙의 승선을 고민했지만 결국 그 자리는 당시 17세의 나이로 혜성처럼 등장한 박은선(당시 위례정산고)의 몫으로 돌아갔다. 월드컵 출전을 기대하고 있던 정정숙은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한국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2005년 8월 당시 대표팀은 중국전 15전 전패라는 엄청난 실력차를 실감하고 있었다. 대표팀은 중국과의 이 15차례 대결에서 3득점 70실점했다. 세 골씩이나(?) 넣은 게 대단할 정도의 실력 차이였다. 동아시아선수권 개막전에서 중국을 만날 때만 하더라도 대표팀은 한 골만 넣으면 성공적인 경기라고 자위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날 경기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송이(당시 여주대)와 함께 최전방 투톱으로 나선 정정숙은 전반 40분 페널티 박스 안에서 돌파를 하다 중국 수비로부터 페널티킥을 유도하는 데 성공했고 한진숙(당시 INI스틸)이 이를 침착하게 차 넣었다. 후반 들어 한 골을 더 추가한 한국은 이날 경기에서 중국을 2-0으로 격파하는 최고의 이변을 낳았다. 한국 여자축구 역사상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1990년 첫 대결에서 0-8로 대패한 뒤 1991년 아시아 선수권에서는 0-10으로 처참히 무너졌던 한국 여자축구가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꺾는 경사를 맞은 것이다. 이날 승리에 일등공신이 된 정정숙은 동료들과 부둥켜 안고 울었다.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 영원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중국을 직접 격파한 주인공이 바로 정정숙이었다. 정정숙(오른쪽)이 2005년 중국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얻어낸 뒤 환호하는 장면. 한국 여자 대표팀은 이날 경기에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격파하는 감격을 누렸다. (사진=연합뉴스) 한 경기 최다골과 또 한 번의 시련 그녀는 2006년 7월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여자 아시안컵 조별리그 태국과의 경기에 나선 정정숙은 혼자 6골이나 뽑아내는 괴력을 발휘하며 팀의 11-0 대승을 이끌었다. 이는 한국 여자축구 역사상 한 경기 개인 최다골 기록이다. 차성미와 박은선이 갖고 있던 네 골을 훌쩍 넘어선 대기록이었다. 이로 인해 정정숙은 3개월 뒤 2006 AFC 올해의 여자선수 후보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비록 수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짧은 한국 여자축구 역사에서 올해의 선수상 후보에까지 뽑혔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당시 정정숙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길선희, 리금숙(이상 북한), 마 시아오쉬, 장 얀루(이상 중국) 등과 경쟁했다. 정정숙은 월드컵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2006년 11월에 열리는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을 벼르고 있었다. 최상의 몸 상태를 자랑했고 중국도 넘어본 경험이 있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사상 첫 아시안게임 메달도 노려볼 만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도하에 가지 못했다. 대회를 잘 준비했지만 도하로 날아가기 직전 발바닥 건염이라는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된 것이다. 안인수 당시 대표팀 감독도 막판까지 정정숙을 데려가기 위해 기다려줬지만 결국 그녀 대신 권하늘(당시 위례정산고)을 대표팀에 뽑아야 했다. 그녀는 비록 대표팀에 뽑히지 못해 카타르로 날아가지 못했지만 이후 한 번 더 힘을 냈다. 창단 당시부터 대교를 이끌었던 최추경 감독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2007년, “반드시 우승을 차지해 감독님 영전에 우승컵을 바치겠다”고 다짐했고 이 약속을 지켰다. 정정숙은 2007년 추계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MVP까지 거머쥐면서 감격했다. 최추경 감독은 생전 정정숙을 딸처럼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자상하게 챙겨줬던 은인이었다. 정정숙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뒤 한 없이 눈물을 쏟았다. 정정숙은 우려곡절이 많은 선수였다. 2009년 초, 그녀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됐다. (사진=연합뉴스) 위암 3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 세대교체가 진행되면서 정정숙도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대표팀 자리를 물려줘야 할 때가 왔다. 지소연을 비롯해 쟁쟁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2009년 4월, 드디어 한국 여자축구의 숙원이었던 WK리그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노련한 고참이 돼 주장 완장을 차고 대교를 이끌고 있었다. 이전까지 연중 이벤트성으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던 여자축구 선수들은 리그가 출범하자 크게 흥분돼 있었다. 정정숙 역시 WK리그 개막을 앞두고 동료들과 구슬땀을 흘리며 꿈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개막전을 준비하면서 무리한 탓이라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 몸이 무거운 것이라 생각했다. 위염 증세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어겼다. 그러다 하루 하루 몸 상태가 악화되자 병원을 찾아 조직 검사를 받고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담당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위암 3기입니다.” 의사는 당장 수술을 권했고 결국 며칠 뒤 위의 90%를 절개하는 대수술에 들어갔다. 그토록 그리던 WK리그 무대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정정숙은 수술대에 누워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와중에도 수술 다음날 병원 근처를 걸으며 복귀 의지를 불태웠다. 2009년 10월에 정정숙과의 계약이 만료될 예정이었던 소속팀 대교는 계약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창단부터 함께 했던 주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선수로의 복귀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현역 선수로 활동이 어렵더라도 코치직을 제안하기로 하는 등 정정숙에게 힘을 실어줬다. 구단과 전국 각지 대교 직원들이 모든 3천만 원을 경기 하프타임에 전달하는 등 병원비 전액을 지원키로 하며 대교의 상징과도 같은 정정숙의 완쾌를 기원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같은 故최추경 전 감독의 집에 머물며 요양을 했고 시간이 나면 경기장을 직접 찾아 동료들을 응원했다. 정정숙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없었다면 한국 여자축구도 이만큼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작은 거인’ 이제는 별이 되다 희망적인 소식도 있었다. 다른 장기로 암 세포가 전이되지 않아 완쾌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이다. 정정숙은 하루 빨리 그라운드로 나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수술을 마치고 서서히 회복될 쯤 그녀는 또 다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2009년 8월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결국 회복 속도가 빨랐던 정정숙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는 대장 부위에 암세포가 전이돼 몸 상태가 극도로 악화됐다. 정정숙은 급격히 몸 상태가 나빠져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비록 대교에서 많은 지원을 해줬지만 그녀의 언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간호에만 전념해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2011년 6월 25일 저녁 8시 20분 세상을 떠났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후배들이 사상 첫 메달을 따내는 감격적인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고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도 밟아보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여자축구도 없었을 것이다. 열악했던 시기에 한국 여자축구의 역사를 하나 하나 직접 써 내려갔던 정정숙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여자축구는 지금 이 위치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영록이 깨어나던 어제(27일) 故정정숙은 경남 진주의 한 화장장에서 하늘로 떠났다. 어제는 한국 축구의 경사스러운 날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슬픈 날이기도 했다. 신영록의 기적적인 회복 소식에 가려졌지만 그 순간 하늘로 떠난 故정정숙도 한 번쯤은 떠올렸으면 한다. 지금의 한국 여자축구가 있기까지 엄청난 공을 세운 ‘작은 거인’ 정정숙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제는 하늘에서 아무런 고통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