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과 한국교회의 개혁
1. 종교개혁의 역사
16세기 초엽 성 프란키스쿠스, 페터 발도, 얀 후스, 존 위클리프 등의 중세교회 내의 개혁자들은 수세기에 걸친 교회생활의 타락상을 폭로하면서 개혁의 깃발을 들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인문주의 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중세교회에 팽배한 미신과 도덕적 부패에 대해 공격하면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함을 촉구한 바 있다.
16세기의 가톨릭교회는 서유럽의 정치생활에 깊이 관여하면서 부패해지기 시작하였다. 면죄부와 성물의 판매와 더불어 성직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교회는 암울한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개혁의 불길은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주임사제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인식하면서, 95개조 반박문에서 교황은 연옥에 관한 권한이 없고 의로운 행실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면죄부의 체계를 공격하였다. 그는 성경의 절대적인 기준에 입각하여 그 당시의 가톨릭교회에 개혁의 붐을 일으켰던 것이다.
마틴 루터와 더불어 존 칼빈 역시 종교개혁의 주춧돌 역할을 하였다. 칼빈은 1536년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출판했다. 이 책은 새로운 개혁운동을 포괄적이고 조직적이고 신학적으로 다룬 최초의 논거였다. 칼빈의 강력한 지도 아래 개신교는 확고한 교리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성도들의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이념을 제네바 도시에서 실현하기를 힘썼다.
종교개혁은 개혁교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16세기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어갔다. 16세기 중엽 루터주의는 북유럽을 지배했고, 동유럽은 보다 급진적인 다양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온상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녹스가 장로교의 설립을 이끌었는데, 그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2.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요인
우리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요인을 교회의 타락에서 찾아야 한다. 첫째로 교리적인 변질이고 둘째로 윤리적인 타락인 것이다.
첫째로 중세교회의 변질된 교리 때문에 개혁은 필요하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자연신학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교황의 권위를 올려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위적인 노력과 선행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그릇된 가르침과 함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이는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기에 이르렀다. 칼빈은 개혁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 그의 저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의 152쪽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불경건한 왕국을 견고히 세우기 위한 구실로 교회 이름이 오르내릴 때......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만을 자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참된 교회란 무엇인가? 그 통일성은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도록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둘째로 중세교회의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해 개혁은 필요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교황, 신부, 수도사들은 교권과 재물과 여자에 탐닉하여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을 몰랐다. 그들은 마치 홈니와 비느하스와 같았다. 수도원은 사창가로 전락하였으며, 교회는 교권 때문에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증한 정치판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가련한 신자들의 돈을 뜯어내기 위해 하나님의 속죄권과 함께 천국 입장권을 돈을 받고 팔아먹으려 했던 것이다. 칼빈의 저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라는 책의 151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오늘날 소위 ‘주교’라 불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도, 인간적인 법에 의해서도 전혀 저들의 소명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죄악이 종교지도자들 가운데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거룩함은 교회의 속성이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거룩함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는 계속하여 개혁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를 세워주셔야 할 것이다.
3.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문제점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모토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의 안경을 끼고 성경이라는 거울에 비쳐진 한국교회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서투른 논리이지만 돌 맞을 각오를 하고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문제점들에 대해 일곱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1)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지향함에 대하여
중세교회의 타락은 화려한 성당건물을 추구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황이라는 자는 화려한 성당건물에 대한 욕구 때문에 신자들의 돈을 뜯어내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무분별한 대형교회의 경쟁적인 건축 붐에 대해 우리는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적지 않은 경우 영리 목적을 위해 기도원이나 기도제단이 운영되며, 화려한 시설을 갖춘 교회당이나 교육관이 일주일에 몇 번 정도만 사용되어지는 예가 허다하다. 많은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호주머니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많은 사례비를 챙기며, 해외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한다. 심지어 자기 품위를 위해 고급승용차를 지향하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전 교인의 제직화에 대하여
목회자들은 평신도의 사역자화가 아닌 평신도의 제직화를 꿈꾸고 있다. 적지 않은 대형교회가 회사를 운영하듯이 교역자들을 직원처럼 다루고 있다. 여교역자들은 마치 일용 노동자처럼 취급되며, 교회는 그들에게 회사만큼이나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많은 교역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일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위한 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가 우상이 된 것이다.
3) 복음적인 설교를 하지 않음에 대하여
현대의 설교자들은 교인들에게 새 생명을 받아들이기 전에 옛 삶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 그들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기독교가 결코 불쾌하게 비위를 건드리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성도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십일조를 잘 해야 한다.”는 식의 기복주의적인 설교, 혹은 기독교적인 성공관이나 리더십이 복음적인 설교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다.
4) 세속의 흐름을 따르는 교회 음악에 대하여
얼마 전 중국에 있는 나의 한 친구는 인터넷으로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한국의 OO신학 대학교의 학생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찬양인도를 하는 청년들이 힙합을 출 때의 옷차림을 하고 요즘 한국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되는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 쓴 채로 찬양인지 유행가인지 모를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는 것이다.
찬양은 경외심으로 부르는 것이지 낭만적인 감정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찬양의 곡들을 보면 전부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극하기에 좋은 것이며, 교인들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찬양은 손가락으로 꼽아보아야만 할 실정이다. 심지어 어떤 교회의 강대상은 극장에서 하듯이 찬양을 “연출”하고 있다.
5) 예배를 대신하는 교회 프로그램들에 대하여
오늘날 교회의 성장을 위한 방편으로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자주 교회에 도입되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 중 다수는 충분히 성경의 기준에 비춰서 검토된 것이 아니며, 단지 교인들의 열정을 부추기기에 적합할 뿐이다. 이러한 프로그램들로 인해 교인들은 성경의 기준에 있어서 분별력을 상실해왔으며,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재미에 치우치는 신앙 집회나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친교 활동 역시 예배로 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가 이러한 프로그램들로 인해 방해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가 진실로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라 예배를 드린다면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우리에게 도리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쾌감을 주게 될 것이다.
6) 실재가 없는 이론에 대하여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수많은 신앙서적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 신학지식은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신학교 교수는 사도 바울이 알았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론으로는 아는데 그 이론에 해당되는 실재는 우리의 삶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론이 실재를 대체해버린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론으로 알면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 주인 되신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알면 그 이론을 하나님께서 주인 된 실제 삶의 자리에 대체해버린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론적인 가르침을 실제로 자기가 정직하게 살아야 할 삶의 자리에 대체하고 있다.
성경에서 이론과 실재에 대해 언급될 경우 실재는 곧 이론이었고, 이론은 곧 실재였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실재가 빠진 이론에만 몰입하고 있으니 이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7) 죽은 정통주의에 대하여
오늘날 적지 않은 한국교회에서는 예배가 형식으로 드려지고 있다. 예배가 형식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말은 찬양과 설교를 포함한 예배의 순서들이 인위적인 틀에 매여 있으며, 교인들이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들의 예배에 성령님의 자리가 없음을 의미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말하기를 교회가 타락할수록 예배는 형식화되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화된 예배는 “죽은 정통주의”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책 “부흥”에서 죽은 정통주의에 대해 정의하기를 하나님에 관한 이론은 정통인데 그 이론에 해당하는 삶 즉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가 없는 것이 죽은 정통주의라고 하였다.
보수적이지만 실재가 없는 교리, 이것은 곧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아닐까...... 오늘날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신학을 소유했다고 자처하는 적지 않은 목회자들의 경우, 그들이 알고 있는 개혁주의는 단지 이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가! 하나님에 대한 이론은 개혁주의에 입각해 있는데 그 이론에 해당되는 삶에는 개혁주의적이라고 할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4. 개혁자에게 맡겨진 과제
의식이 뚜렷한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든지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인식하고도 남을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는 이것을 고쳐야 해” 라는 비판적인 담론으로 믿음의 동료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인 담론만으로 한국교회는 개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개혁자는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서야 할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나는 느헤미야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한 후 글을 마치려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능욕을 당하고 예루살렘성이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느헤미야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그는 수일동안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였던 것이다(느 1:4). 그 당시 예루살렘성이 폐허가 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몇몇이 모여 앉기만 하면 “유다가 이래서 망했다”, “예루살렘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식의 담론으로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느헤미야만 그런 반응을 보였던가? 아마도 그는 개혁자의 길을 택하였기 때문이리라. 그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다시 재건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느꼈으며, 그 소명에 대해 가볍게 입에 올리지 않고 묵묵히 그 과업을 수행해나갔던 것이다(느 2:12).
오늘날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든지 느헤미야가 걸었던 길을 택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존 칼빈, 김동현역, 『종교 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 솔로몬, 2002
에이든 토저, 『예배인가 쇼인가』 규장, 2004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 복있는 사람, 2006
이환봉, 『개혁주의 사상』 (강의안)
탁명환, 『교회 개혁을 위한 제언』
Daum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