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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주의 |
인물/학파 |
내용 |
고대 |
과정주의 |
크라틸루스 |
모든 것이 변하기에 불변의 도덕 법칙은 없다. |
쾌락주의 |
에피쿠로스 |
A에게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 B에게 그릇될 수도 있다. | |
회의주의 |
엠피리쿠스 |
그 어떠한 최종적이고 확고한 결론도 도출할 수 없다. | |
중세 |
의도주의 |
아베랄드 |
행동의 옳고 그름은 행동한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결정. |
주의주의 |
옥캄 |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언제나 똑같이 결정하지 않으신다. | |
명목주의 |
옥캄 |
서로 다른 개별적인 행동들만 있을 뿐 정의 자체는 없다. | |
근대 |
공리주의 |
벤담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낳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
실존주의 |
키에르케고르 |
최고의 임무는 도덕 법칙을 초월하는 것이다. | |
진화론 |
헉슬리 |
진화과정을 돕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 | |
현대 |
정서주의 |
에이어 |
윤리적인 진술은 주관적 감정에서 우러난 충고일 뿐이다. |
허무주의 |
니체 |
선의 토대인 하나님이 없으므로 인간이 알아서 해야 함. | |
상황주의 |
플레처 |
모든 윤리적 결정은 편의적이고 상황에 따른 결정이다. |
긍정적인 관점에서 도덕률 폐기론은 개인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절대적인 도덕 법칙을 부정하기 때문에 당연히 윤리를 개인의 책임 문제에 종속시키게 되는 것이다. 도덕률 폐기론은 도덕의 객관성보다는 인간의 윤리적인 차원에 치중하기 때문에 지극히 인격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률 폐기론은 절대적인 도덕 법칙을 부인하기 때문에 도덕 법칙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으로 귀결된다. 객관적인 도덕 법칙을 부인한다는 것은 모순이며 자기 기만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도덕 법칙의 척도는 객관적인 도덕 법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도덕률 폐기론에 의하면 도덕 법칙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데 이는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마다 개별적인 윤리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옳고 그름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률 폐기론은 비효과적인 것이라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3. 상황주의
상황주의는 부동한 상황에서 일률적인 도덕 법칙의 적용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의 기준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상황주의는 극단적인 율법주의와 도덕률 폐기론 사이의 중간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상황주의에 의하면 도덕 법칙은 우리의 삶에서 흑백논리로만 답변이 되는 게 아니다. 모든 시공적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 의해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상황주의에 따르면 도덕 법칙은 실제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에 있어서 변동이 허용되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사랑으로 행한 것인가 아닌가 라는 명제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다. 즉 상황주의는 사랑이라는 공통분모에 따라 행하는 것이라면 어떤 행위든지 선하다고 보는 것이다. 설령 일반적인 윤리 기준에서 어긋나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가 사랑에 의한 것이라고 할 경우, 그것을 탈선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의 목적에 의해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윤리적인 가치가 사랑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우리는 공의가 없는 사랑이 온전한 사랑일 수 없다는 교훈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사랑에 따른 행위라 할지라도 공의에 따른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상황주의에 따르면 도덕 법칙은 인간 삶의 실재를 떠나서는 거론될 수 없다고 하는데, 이는 윤리의 객관성과 절대성을 부인하는 입장으로서 도덕률 폐기론으로 이르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률 폐기론이 받는 비평을 동일하게 받아야 하는 것이다.
4. 일반주의
일반주의는 구속력 있는 윤리 규범의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 일반적인 확신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서 어떠한 시공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윤리 규범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리주의자들도 포함되는데, 공리주의에 의하면 어떠한 행위가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그 행위의 결과가 어떠한가에 따라 판단된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에 의하면 소위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 거론되는데, 이는 어떤 행위이든지를 막론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위는 선하고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위는 악하다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고대의 에피쿠로스학파가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쾌락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공리주의에 의하면 윤리 규범은 그 자체가 독단적으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행위는 결과와 관련할 때에야 그것의 도덕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쾌락으로 귀결되는 행위가 윤리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쾌락인가? 벤담은 그가 목적으로 삼는 쾌락이 행복 내지 지복을 의미한다고 언급하였다. 이어서 그는 문명화된 쾌락은 비 문명화된 쾌락들보다 더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으며, 지적 쾌락들은 감각적 쾌락보다 더 소중히 평가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규칙이나 규범이 공리주의자들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만은 않다. 규칙이나 규범이 지켜질 때 사회질서가 유지된다는 일반적인 통념 때문에 규칙이나 규범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규칙이나 규범을 지키는 행위 자체가 도덕적인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규칙이나 규범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어떠한 행위의 결과가 항상 파악되는 게 아니라는 것에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규칙이나 규범이 필요한 것은 단지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본보기가 될 때 사회에 초래될 혼란에 대비한 것일 뿐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규칙이나 규범에 대한 준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유용할 뿐이지 실제로 그러한 규칙이나 규범이 보편적인 요소로 인정되어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들 역시 삶의 규칙을 정한다. 이는 그러한 규칙 자체가 일차적으로 윤리적인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좋은 결과라는 부수적 가치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규범을 정하는데, 일반적으로 거짓보다는 진실을 삶의 규범으로 정한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을 말할 경우 사회에 초래되는 혼란을 피하기 위한 것이지 진실 자체에 도덕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실은 항상 존중히 여겨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거짓을 말하기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사회에 더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경우 공리주의자들은 서슴지 않고 진실보다는 거짓에 도덕적인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만일 공리주의자들이 어떤 행위에 대해 윤리적인 가치를 부여했다면 그것은 그 상황에서만 윤리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가 항상 일관성 있게 좋은 결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따라서 동일한 행동도 결과에 따라 선하게 평가될 수도 있고 악하게 평가될 수도 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수단이 어떠하든지에 관계없이 목적만 올바르면 된다는 식의 윤리 체계로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 체계라는 의미에서 일반주의가 되는 것이다. 비록 상치하고 있는 규범들 가운데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에는 앞장서고 있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볼 때 일반주의는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무조건적 절대주의
윤리적 절대주의는 앞에서 언급된 윤리적 상대주의와는 달리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짓이 허용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선행이나 악행은 그것의 결과와 관계없이 그 자체가 선악 간에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절대주의에는 무조건적 절대주의와 상충적 절대주의 그리고 차등적 절대주의가 포함되는데, 먼저 무조건적 절대주의에 대해 언급하겠다. 무조건적 절대주의에 의하면 거짓은 그것이 좋은 결과로 귀결된다할지라도 엄연히 비도덕적인 것이며, 마찬가지로 진실은 그것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 할지라도 엄연히 도덕적인 것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악한 행위는 항상 악이라고 규정지음으로 필요악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큰 죄가 지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작은 죄를 범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것 역시 무조건적 절대주의에 의하면 정죄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일시적인 악이 영원한 선을 이룰 수 없다는 명제 하에 선한 결과를 위한 필요악의 실재를 외면하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어거스틴은 약간의 거짓이 필연적으로 개입되더라도 속마음이 올바르다면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는 전제를 내세우고 있다. 반면에 선행은 항상 선하다고 평가되는가? 어거스틴은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이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특별한 경우, 자선이 선행일지라도 악한 행위로 정죄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절대주의에 대한 모순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임마누엘 칸트 역시 무조건적 절대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는 보편적인 도덕의무를 정언명법이라고 불렀다. 윤리적 의무는 상황에 따라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의무라는 것이다. 의무는 결과에 상관없이 의무인 것이다. 즉 선행은 그것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가 선행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의무에 따를 경우 나쁜 결과가 초래되는 특별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칸트는 이에 대해 도덕 법칙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인간의 삶에는 치명적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실보다는 거짓을 말해야 할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화 하는 것이 때로는 책임회피가 되며, 태만의 죄에 빠지는 것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존 머레이는 절대적인 도덕 법칙이 두 개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양자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모든 도덕적 갈등들은 겉으로만 그러할 뿐 실재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를 필요로 할 까닭이 없거나, 아니면 이러한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기적을 바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적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윤리적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무조건적 절대주의는 다시 숙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6. 상충적 절대주의
상충적 절대주의는 도덕적 모순의 실재성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을 필요로 할 상황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사람을 살리고 거짓말을 하든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고 사람을 죽이든지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죄를 짓기는 마찬가지이며, 덜 나쁜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상충적 절대주의의 입장이다.
상충적 절대주의에 의하면 도덕적인 갈등의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든지 죄를 짓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충적 절대주의를 주장했던 인물은 마틴 루터이다. 그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가령 누군가가 도덕적 갈등에 처하여 죄(덜 나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면 죄를 저지른 후 그리스도의 속죄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인 딜레마가 존재하는 것은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상이 타락했으므로 인간이 사는 곳에는 그 어디에도 도덕적인 딜레마가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든지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틸리케는 인간이 가령 덜 나쁜 쪽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덜 나쁜 쪽을 선택한 것이 현세의 절대적인 규범과 일치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용서받아야 할 행동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상충적 절대주의는 도덕적 절대들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무조건적 절대주의와는 달리 도덕적인 모순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도덕적 현실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면이 상충적 절대주의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즉 타락한 세상에서 생존하기에 부득불 덜 나쁜 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예수님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라는 문제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타락한 세상에서 삶을 사셨는데, 그렇다면 도덕적 모순에 대처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도덕적인 모순에 대처하여 어떠한 선택을 하셨다면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도덕적인 모순을 겪을 필요가 없으셨다면, 신자가 도덕적인 갈등에 처할 때 예수님께서는 신자의 모델이 되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인 된 인간을 대신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상충적 절대주의의 맹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라고 언급되어있다. 즉 예수님께서도 타락한 세상에서 사셨기에 도덕적인 갈등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하여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도덕적 갈등에 처한 인간의 선택이 덜 나쁜 것에 대한 선택이라고 하기보다는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차등적 절대주의가 될 것이다.
7. 차등적 절대주의
상충적 절대주의가 도덕적인 갈등에 처한 인간의 최선의 선택에 대하여 덜 나쁜 죄를 짓는 것이라고 평가하는 반면, 차등적 절대주의는 이에 대해 더 올바른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즉 도덕적인 갈등에 처한 인간이 부득불 양자택일을 해야 할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죄를 짓기는 마찬가지라고 할 때 덜 나쁜 쪽을 선택하는 것은 덜 나쁜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더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라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차등적 절대주의의 입장이다. 차등적 절대주의를 따르는 인물들에는 어거스틴과 칼빈 등이 있다.
차등적 절대주의에 따르면 보다 높은 수준과 낮은 수준의 도덕법칙이 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큰 계명에 대하여 질문하는 율법사의 물음에 답변하심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살펴보면 높은 차원의 의무와 낮은 차원의 의무 중에서 부득불 하나를 어겨야 할 상황에서 낮은 차원의 의무를 어기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 어떤 정죄도 하지 않으셨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어야 하는 더 큰 의무 앞에서 외인이 먹어서는 안 될 진설병을 그들에게 건네준 작은 의무에 대한 불복종을 예수님께서는 정죄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다른 실례도 많이 들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의무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상치되는 경우, 즉 부득불 하나를 지키고 다른 하나를 어겨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갈등이 존재할 경우 인간의 말에 복종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며, 정부의 권위에 순복하기보다도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더 큰 의무를 준수하기 위해 작은 의무를 어긴 것에 따른 죄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차등적 절대주의는 더 작은 의무를 어기는 것에 죄책이 따르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즉 죄책은 불가피한 것에 대해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높은 차원의 의무를 지키기 위한 더 낮은 차원의 의무를 어긴 것에 따른 책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면제해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차등적 절대주의는 도덕법칙의 제정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분께서 규칙보다는 자비를 원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상충적 절대주의는 죄가 불가피한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차등적 절대주의는 그렇지 않다. 보다 큰 의무를 따르기 위해 부득불 작은 의무를 어겨야 할 경우, 이러한 행위는 예외 시 될 수 있는 행위라기보다 면제될 수 있는 행위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차등적 절대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할 때, 상황주의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중요한 차이는 차등적 절대주의가 상황주의와는 달리 도덕 법칙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야고보서 2장 10절의 말씀을 통해 차등적 절대주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데 이는 이 말씀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씀은 모든 죄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율법의 통일성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경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마 12:31, 요 19:11). 그리고 우리는 크고 작은 의무 중 하나를 어겨야 할 상황에서 덜 나쁜 쪽을 선택함으로, 아니 더 나은 쪽을 선택함으로 올바른 일을 했다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