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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총론
- 송영목 교수님의 “신약 개관” 요약본에 “신약 총론” 중의 일부 내용을 추가함 -
차 례
1. 서론 ‧ 3
2. 신약 총론 입문 및 정경론 ‧ 4
3. 신구약 중간기에서 ‧ 6
1)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인의 사상 ‧ 6
2) 1세기 유대의 분파 ‧ 7
4. 성경: 하나님의 구원드라마 ‧ 8
5. 신약연구의 역사 ‧ 12
6. 신약 해석 방법론 ‧ 15
7. 성경신학적 신약해석 ‧ 18
8. 복음서에 대하여 ‧ 20
1) 공관복음의 유래 ‧ 20
2) 복음서를 어떻게 공부할까? ‧ 23
3) 각 복음서의 특징들 ‧ 24
4) 요한복음의 시간법 ‧ 25
5) 복음서 요약 ‧ 26
9. 사도행전에 대하여 ‧ 28
1) 사도행전을 어떻게 공부할까? ‧ 28
2) 스데반과 빌립은 집사인가? ‧ 29
3) 사도행전 요약 ‧ 29
10. 서신서에 대하여 ‧ 30
1) 서신서를 어떻게 공부할까? ‧ 30
2)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롬 1:18-5:21을 중심으로 ‧ 31
3) 갈라디아서의 수신자에 대하여 ‧ 33
4) 야고보서에 나타난 창조 상징주의 ‧ 33
5) 서신서 요약 ‧ 33
11. 계시록에 대하여 ‧ 37
1) 계시록을 어떻게 공부할까? ‧ 37
2) 요한계시록 요약 ‧ 37
12. 신약의 중심주제로서의 하나님 나라 ‧ 39
1. 서론
디모데전서 5:18과 베드로후서 3:16에서는 신약의 문서들을 “성경”이라 불렀고, 4세기 말에 이르러 신약의 27권은 교회 회의에서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교부들은 “사도적 기원”, “지속적인 사용”, “교리적 정통성”을 정경의 기준으로 삼았다. 구약성경의 핵심이 그리스도 예수님인 것과 같이 신약성경의 핵심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인 것이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연결고리를 신약에서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에 언급되는 예수님의 족보는 구약 인물의 족보로 시작하며, 요한복음은 창세기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세례 요한에게서 잘 보인다. 우리는 세례 요한에 대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할 수 있다.
신약은 곧 새 언약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약에서 예언된 새 언약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시작되는 종말의 하나님 나라와 연관 짓는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민족주의적인 면을 극복하며,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적 삶의 중심지인 성전의 기능도 신약에서는 막을 내리게 된다. 새 언약시대에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새 이스라엘의 포로가 이미 끝났음을 가르친다. 한 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새 이스라엘 전체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2. 신약 총론 입문 및 정경론
신약에서 ‘새 언약’이라는 말은 5회만 등장한다. 이 경우 ‘새 언약’은 신약성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모든 족속을 위해 옛 언약을 성취하시고 세우신 약속이다. 나중에 이런 새 언약의 내용을 담은 책과 관련되어 ‘신약성경’으로 불리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신약성경이라는 말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과의 언약이 강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 성경은 신약의 개시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계시인 신약성경은 모든 세대에 그 적합성을 가지기에 과거에만 묶여있을 수 없다.
‘신약총론’은 ‘신약개론’, ‘신약서론’, ‘신약 정경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하지만 정경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학을 형성한다. 개혁주의에서는 정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신적 권위를 가진 ‘표준’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정경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교회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규범으로 주신 신적 권위를 가진 완성된 기록된 계시이다. 그렇다면 어떤 단계를 거쳐 이 정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1) 영원 전에 계신 말씀이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종말에 말씀하신 특별계시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2)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3) A.D. 30-50년경의 구전이 목격자들에 의해 전해짐
(4) 신약 헬라어 성경이 기록됨- 이 때도 구전이 있었으나 기록된 말씀에 의해 중요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화됨.
(5) 신약이 27권으로 교회에 의해 확정되기 전(특히 A.D. 397년의 카르타고 종교회의)에 274개의 대문자, 2785개의 소문자, 88개의 파피루스 사본들이 생기기 시작함, 가장 이른 시기의 사본은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
(6) 성경(사본)이 계속해서 필사되어 보급됨.
(7) 고대어 번역들이 생김(Vulgate, Syriac, Coptic 등).
(8) 현대어 번역들이 영어, 독어, 불어 등으로 출판됨.
(9) 1455년의 인쇄술의 발전으로 각국의 현대어 성경들이 출판됨.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을 율법으로 읽지 않고, 율법의 마지막이요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 읽었다(참고 롬 10:4, 히 1:2). 즉 구약을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으로 읽었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이해에 있어서 기본적 요소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 지향점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4세기 특히 367년경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편지’에 신약 27권의 이름이 열거되었다. 이 시기는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확증했다. 397년의 카르타고 공회도 역시 27권을 인정했기에 4세기경부터는 교회가 27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신약 정경의 기준들은 아래와 같이 다양하다.
(1) 사도 저작성: 사도가 썼다면 신약 성경에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중요하지만, 그렇다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은 어떻게 되는가? 사도 바울이 쓴 ‘라오디게아에서 오는 편지’(골 4:16)는 어떻게 되는가? 따라서 성령님께서는 사도만 성경 기록자로 선택하시지 않았다.
(2) 교회의 결정: 이것이 중요하지만 그렇다면 교회가 공적으로 수용하도록 결정해야만 정경이 되는가? 아니다. 정경성이 교회의 결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공중예배 독서 즉 초대교회의 예배 모임에서 낭독되었는가의 여부: 허마의 ‘목양서’와 ‘디다케’도 초대교회 예배 중에 읽혔는데 정경에서 제외되었다. 반대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는 예배 중에 읽히지 않았지만 정경이다.
(4) 그리스도를 증거함: 모든 성경이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성경의 본질과 성경의 권위와 타당성에 대한 모든 논의가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권위에서 그 중심과 초점을 갖고 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의 조망 아래에서’ 바르게 이해되며, 따라서 ‘정경 속의 정경’이라는 개념은 수용하기 어렵다.
(5) 고대성: 오래된 것이 정경성에 일치한다는 것인데, 이것도 하나의 참고 기준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경의 기준인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정경이시다.’ 즉 성경이 정경 자체로서 원래부터 권위를 가지기에 정경이지 다른 외부 요인으로 정경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의 자증의 원리이다. 저스틴 마터와 칼빈은 성경 자체가 정경으로서의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3. 신구약 중간기에서
1)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인의 사상
(1) 신론: 신구약 중간기에는 하나님을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초월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성호를 직접 사용하기를 주저하여 대신에 완곡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으로 표현했다.
(2) 천사론: 신구약 중간기의 외경에서는 천사들의 이름이 등장하며, 수호천사의 개념이 언급된다. 천사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 이해한 것이 신구약 중간기의 특징이었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천사보다 우월하신 분으로 소개한다.
(3) 마귀론: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들은 악한 영들로 인해 이 땅에 초래된 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에녹 1서에서는 “영들과 육체의 결합으로 낳아진 거인(창 6:4)들은 땅에서 악한 영들이라 불리며, 땅 위에서 거할 것이다. 악한 영들은 그들의 몸에서 발생했으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마귀들이 타락한 천사의 후예라는 것이 이 기간의 문헌에 담겨있으며,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이름은 “벨리알”(고후 6:15)이었다. 그 당시 몇 가지 방도가 마귀를 추방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믿어졌는데, 주문을 외우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여겼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느냐?”(마 12:27)고 반문하신 적이 있다.
(4) 율법관: 이 시기에 율법은 영구적이며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율법적인 종교가 발전되었다. 이 당시의 율법은 구전도 포함한다. 랍비들은 율법의 준수를 충실히 하는 것이 이후의 세상에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바울서신은 이러한 율법주의 가치관을 거듭 비판하면서 복음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5) 지혜: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인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는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지혜는 하나님의 능력의 입김이며, 전능하신 이의 분명한 영향이라...... 지혜는 영원한 빛에서 발해진 광채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흠 없는 거울이고, 그의 선하심의 형상이다.”
(6) 죄: 죄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외경 문헌들은 각각 다른 답을 제시한다.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는 죄의 기원을 마귀에게 돌리며, 집회서는 하와를 집중적으로 비난하며, 에녹 1서는 악한 천사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에스드라 2서는 아담을 비난하며, 세상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무거운 죄책을 짊어지고 가는 악한 곳으로 묘사한다. 당시에 제사는 속죄를 위한 주된 수단이었다. 선행과 구제, 순교, 조상을 기쁘게 하는 것도 역시 동일한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7) 윤리관: “피르케 아봇”에서 한 랍비는 삶의 주요 목적은 율법이 가르치는 바를 이해하고 그 교훈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의 총화로 인식되었다.
(8) 종말론: 이 당시 유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내세에 대한 신앙을 종교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었다. 에녹서에서는 스올(욘 2:2)을 죽은 자들의 집결지로 언급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그곳에서 작용하여 선인에게는 보상이, 악인에게는 징벌이 시행된다고 말한다. 피르케 아봇에서는 “임종 시 사람은 금이나 은, 보석이나 진주, 그 어느 것도 가져가지 않으며, 오직 토라와 그의 선행만을 가져간다.”라고 했다.
(9) 메시아 신앙: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주제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와 더불어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신앙이 나타나는데, 메시아는 왕국을 세우도록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 받은 자이다. “르우벤의 유언”에서 메시아는 레위에게서만 나온다고 말하며, 에녹 1서에서 메시아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인간보다 먼저 계시고 보다 뛰어나신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우리는 이러한 그릇된 이해를 요한복음 7:27에서 볼 수 있다.
2) 1세기 유대의 분파
(1) 바리새파: “구별된 자”라는 뜻으로서 바리새파는 경건한 자, 열심을 가진 자들이었으며, 예수님 당시에 약 6천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성전의 제사장 제도를 인정했으나, 부정한 것으로 믿었고 그것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바리새인은 헤롯과 헤롯의 가문을 보호하려던 랍비들과 연합되었을 것이다. 대다수의 바리새인은 산헤드린 회원이 될 수 없었지만 바리새인 중 엘리트인 서기관은 산헤드린 회원이 될 수 있었다.
(2)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마카비 당시인 B.C. 160년경에 출현하였다. 사두개파의 어원은 구약의 제사장 사독에게서 유래되었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쥐고 예루살렘 성전과 산헤드린을 장악했으며, 부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로마 정책을 폈다. 사두개파는 구전을 거부하고 모세오경만 받아들였으며 부활을 믿지 않았다(마 22:23).
(3) 에센파: 이 공동체의 규모는 쿰란에서 살았던 약 2백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은 제사장의 정결법을 공동체 전체 회원에게 요구하였으며, 절약하는 삶을 살았고 성전에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았다. 사유재산의 불허용과 상하복종식 구조, 성경공부와 금욕 등이 이들의 삶의 규칙이었다. 사해 사본은 에센파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열심당: A.D. 54년에 최초로 언급된 “시카리”는 “단검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인데, 로마와 결탁한 유대인 고위 관리들을 암살했다. 이들은 베스도 총독 때에 활발히 활동했다. A.D. 66년의 유대- 로마 전쟁에서 시작하여 그 이후로 “열심당”이라는 분파가 로마에 저항했다.
4. 성경: 하나님의 구원드라마
세상 역사를 ‘His story’ 즉 ‘그분의 이야기’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핵심 줄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시대마다 구원하기 위해서 펼치시는 3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시대마다 구원과 심판을 수행하신 하나님이 중심인물이다. 성경은 밋밋한 구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드라마틱한 구원의 이야기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의 막간과 총 6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제1막: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심- 창조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창 1-2장). 이제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피조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이것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실 하나님의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요 1장). 그리고 에덴동산은 계시록에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 즉 회복된 에덴을 미리 보여준다.
창조된 세상 속에서 사람은 창조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에덴동산의 왕으로 다스린다. 그래서 짐승의 이름을 붙인다. 아담과 하와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해야 한다. 사람은 자연과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폭군이 아니라 청지기와 같은 왕이다. 천국인 에덴동산은 온 우주의 축소판이다.
2) 제2막: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반역- 타락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창조의 선함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갈등을 초래한다. 그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통치의 청지기로 충성하는 대신에 거역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기쁨의 동산’ 에덴을 떠나야만 한다. 이제 천국은 닫혀져 버린다. 불확실하고 위험한 세상이 펼쳐져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3:15의 ‘최초의 복음’으로 사람을 영적이며 육적 죽음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3) 제3막: 왕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 시작된 구원
(1) 1장: 왕을 위한 백성
셋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준비하신다. 아브라함의 씨가 번성하여, 가나안을 차지할 것이며, 열방의 복이 될 것이다(창 15장). 이삭-야곱-요셉은 하나님의 백성의 족장들이다.
(2) 2장: 백성을 위한 백성
애굽에 내려간 야곱(이스라엘) 가족은 결국 중다한 족속을 이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그들이 거할 땅을 준비하신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으로 왕이신 여호와께 속한다(출 19-24장). 성막에서 하나님은 구속된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성막을 위해 출애굽기의 13장을 핼애). 레위기는 거룩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친다. 민수기는 약속의 땅으로 여행하는 것을 다룬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접경에서의 모세의 설교와 언약 갱신을 다룬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땅을 차지하는 과정을 다룬다. 이 땅은 거룩한 용사이신 여호와께서 앞서서 싸워 정복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담과 하와가 상실한 에덴동산이 이제 이스라엘을 위해 회복되어 가나안 땅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제2의 에덴동산인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교제해야 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열방의 빛이요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한 실패의 역사를 다룬다. 구별된 삶을 통해서 거룩한 전쟁을 수행해야 할 이스라엘이 오히려 이방 우상에 동화되고 만다. 결국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이 왕정국가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통치 대리인은 불신실하게 이스라엘을 다스렸지만 다윗은 신실하게 다스렸다. 그리고 솔로몬은 지혜롭게 다스렸고 성전을 건축했다. 하지만 솔로몬의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북과 남으로 나뉘었다(왕상 11:33). 남과 북의 신정통치를 위해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법을 선포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포로와 멸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스룹바벨, 에스라 그리고 느헤미야를 통해서 제2의 출애굽인 출바벨론이 발생한다. 제2성전이 건축된다.
선지서 후반부에 바벨론에서의 귀환을 다룰 때,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질 신약 시대의 회복도 같이 다루고 있다. 이것은 원근투시법이다.
(3) 막간: 끝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신구약 중간기
구약은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이 상대적인 평안 가운데 가나안에 사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된다. 그리고 그리스는 로마에게 정복된다. 인간 제국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이런 제국들의 속국으로 계속 남아있다.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 400년 동안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헬레니즘이 디아스포라는 물론 이스라엘에게까지 전파된 것과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 사상이 일어난 점이다. 시리아의 셀류키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B.C. 167년에 마카비 투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유다 마카비의 형 시몬이(그리고 하스모니안 왕가)이 독립된 이스라엘을 80년(B.C. 142-63)에 걸쳐 다스리기도 했다. 하지만 하스모니안 왕가는 결국 헬레니즘에 동화되어버렸다.
B.C. 63년에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헤롯 대왕이라는 꼭두각시를 세워 통치한다. 이 로마의 통치는 폼페이 장군 이래로 약 500년이나 지속된다. 아브라함부터 신구약 중간기까지 이스라엘을 지배한 5가지 사상은 다음과 같다. ① 유일신, ② 이스라엘이 선택받음, ③ 삶의 길로서의 율법, ④ 하나님이 거하시는 약속의 땅 그리고 ⑤ 하나님께서 백성을 만나시는 성전이다. 하지만 신구약 중간기 내내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이방인의 통치를 받게 되자 미래에 메시아를 통해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소망이 일어났다. 바리새인은 민족적 정결을 통해서, 에센파는 단절과 구분을 통해서, 사두개인과 제사장은 산헤드린을 성전과 중심으로 현실안주적인 통치를 통해서 열심당은 무력항쟁을 통해서 메시아의 구원을 소망했다. 그러나 50만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인 대부분은 어떤 특정 유대 종파에 속하지 않았다.
4) 제4막: 왕의 오심- 성취된 구원
성경의 절정적 드라마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된다.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예수님 안에서 발생한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심으로써 종말론적인 천국 운동을 시작하신다. 성령의 강력한 능력의 현시인 치유와 축귀 그리고 선포를 통해서 천국이 현재적으로 임한다(마 11:12). 스스로 건강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물리치시고, 죄인과 버림받은 자들을 환대하신다. 새로운 질서를 갖춘 천국에는 민족과 인종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천국의 왕이요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출애굽하심으로써 주님의 구속 사역은 성취된다. 예수님의 초림과 공 사역은 물론, 좁게는 주님의 부활과 승천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와 천국이 도래한 결정적 사건이다.
5) 제5막: 왕의 소식의 전파- 선교
(1) 1장: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행하신 첫 번째 왕적 통치는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신 사건이다. 성령께서 증인 역할을 감당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신다. 사도행전 2-7장은 예루살렘 중심의 복음전파 역사를 다룬다. 사도행전 8-12장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을 다룬다. 사도행전 13-28장에 의하면 바울을 통해서 로마 제국 전체에 복음이 전파된다.
(2) 세상 끝까지
바울은 자신의 대리 현존인 편지를 통해서 온 세상에 전파된 복음을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동터왔고, 천국은 현재적 실제라고 강조한다. 1세기의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 세상에 확장시켜야 했다. 이때는 종말의 때이며, 말세이고 천년왕국 기간이다.
6) 제6막: 왕의 귀환- 완성될 구원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마 24:36, 계 19:11이하). 그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가리키고, 신천지는 교회가 살 공간적 배경이다. 이 땅에 신천신지가 임한다(살전 4:17, 벧후 3:12).
5. 신약연구의 역사
1) A.D. 1세기 사도시대의 신약 연구
이 시기에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기이므로, 신약 기록을 위해 신약 저자들이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주요 관심이다. 신약 기자들을 단순한 기록자들로만 볼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작 목적을 위해 자료를 수집, 배열, (재)해석했던 신학자적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었다. ‘최초의 사도적 교부’라고 불리는 로마의 주교 클레멘트는 아마도 A.D. 96년경의 자신의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신약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히브리서, 산상보훈과 고린도전서를 인용했다. 따라서 1세기에 이미 신약해석이 활발했다고 할 수 있겠다.
2) A.D. 2-3세기의 신약 연구
저스틴 마터와 177년경 Lyon 지역의 주교이자 변증가였던 이레니우스는 요한복음의 로고스론에 관심을 가졌다. 이 당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알레고리적 해석의 대가인 동시에 학문적인 주석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오리겐은 문자적인 해석도 잘 고려한 사람이기에 일방적으로 풍유적 해석만 했던 사람을 보면 곤란하다.
3) A.D. 4-6세기의 신약 연구
오리겐으로 대변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반대되는 입장을 안디옥 학파에서 볼 수 있다. 안디옥 학파의 Theodore of Mopsuestia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이자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로 불리는 John Chrysostom이 대표주자들이다. 이들은 풍유적 해석을 부수적인 것으로 보아서 문자적 해석을 강조했다. 4-5세기의 몇몇 라틴 교부들은 바울서신에 대한 주석을 썼다.
4) 중세 시기의 신약 연구
중세의 성경해석은 4중 의미로 대변된다. 도덕적, 풍유적, 신비적, 그리고 문자적 해석. 이 네 가지 중 세 개가 비문자적 의미이기에 오리겐학파의 영향이 안디옥 학파의 영향보다 중세에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문자적 의미는 실제로 일어난 것을 가리키고, 풍유적 의미는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을 가리키고, 도덕적 의미는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을 가리키고, 신비적 의미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가르쳐준다. 이 시기에 여러 주석집이 등장했다.
5) 교회개혁 시기의 신약 연구
루터는 성경 원어의 중요성을 강변했다. ‘어휘와 문법의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중심으로 해석하다보니, ‘정경 속의 정경’ 개념으로 빠져버렸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칼빈에게서 우리는 문법-역사적 해석의 발전을 본다. 물론 이들은 그 시대의 아들이었기에 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세상-교회 역사적 해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약점이 있다.
6) 계몽주의 시기의 신약 연구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사람들로부터 교리적인 해석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제믈러의 공이 컸다. 제믈러는 성경신학을 더 이상 교의학의 증거 구절이나 제공하는 학문으로 생각하지 않고 독립된 분과로 만들었다. 제믈러의 제자인 J.J. 그리스바허는 신약 연구에서 교회개혁 후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인물이다. 그는 헬라어 비평사본을 편찬했으며 ‘공관복음서’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7) 19세기의 신약 연구
드 베테는 신약의 신학적 흐름을 3부류로 나누었다. 유대-그리스도적 흐름(공관복음, 행, 약, 벧전후, 유, 계), 알렉산드리아적 흐름(히, 요, 요1-3), 그리고 바울적 흐름(바울서신). 이것이 후에 튀빙겐학파의 창시자인 F.C. Baur에게 영향을 주었다. B멱에 의하면, 사도행전과 복음서는 2세기 작품인데 유대주의적인 성격과 바울의 이방적인 성격의 기독교의 대립이 거의 종결된 이후의 작품으로 본다. 그는 기독교가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형태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이 시기의 캠브리지학파의 두 거장인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그리고 비평학의 아버지 격인 쉴라이에르마허의 중요성은 간과될 수 없다.
8) 양식비평
양식비평은 성경 본문이 기록되기 이전에 그 내용이 말로 전해지던 구정 과정이 있었다고 전제하고 구전과정에서는 본문이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찾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양식비평의 임무 혹은 태동의 배경은 자료비평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료비평은 특히 모세오경과 복음서를 개인의 문화적 산물로 다루었으며, 대중 혹은 공유된 경험의 전승, 살아있는 전승의 저장소로 보지 않았다. 따라서 양식비평가들은 문학적 양식의 역사를 재발견하기 위해 문학 양식의 분석을 시도하였다.
양식비평의 한계와 약점을 언급해 본다면, 이들의 단편적인 신약의 접근은 복음서 기자의 전체적 사고와 의도를 이해하는데 부족하다. 그리고 양식비평은 성경의 최종본문이 가지고 있는 문맥은 무시하고 구전 단계에서 말해질 때의 상황만을 중시하기에 최종본문을 결국은 무시하고 말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종 본문으로서의 성경은 그 자체로서 이미 완결된 책이며 그 완성된 구조 안에서 의미를 가지며 (부수적으로) 문학적 힘을 가진다. 이런 단점이 편집비평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고 극복되었다.
9) 편집비평
편집비평은 구전 혹은 기록된 전승이 형성될 때에 동원된 편집 기술을 분석함으로 성경 저자의 역사적 신학적 관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양식비평에서 신약의 기록자는 단순히 전승을 모은 자에 불과하고 아주 제한된 의미에서 저자로 여겨졌다. 따라서 저자의 자료 사용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편집비평에서는 전승이 놓인 편집의 틀을 긍정적으로 다룬다. 따라서 양식비평에서 발견되는 방법론적인 불균형을 시정하는 역할을 한다. 즉 양식비평에서처럼 전승의 양식이나 삶의 정황이 초점이 아니라, 성경 기자가 접근 가능했던 자료의 사용, 불사용, 변경에 관심을 둔다. 양식비평에서 기자들은 전승 자료를 가위와 풀로 붙인 사람들이지만, 편집비평가는 그 가위를 사용한 손이 이미 신학의 손이며, 그들이 사용한 풀이 이미 신학으로 쑤어진 풀이라고 본다. 신약 복음서의 편집비평의 기초는 두 자료 가설인데 Q와 마가복음이 마태와 누가의 기본 자료라는 것이다.
편집비평의 한계 및 약점은 다음과 같다. 즉 자료비평에 의존하는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자료비평이 잘못 수행될 경우 편집비평도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편집비평은 편집비평가의 자기 확신에 머무르고 주관적이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편집 이전의 자료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편집비평에서는 주로 자료가 변경된 것을 보고 저자의 편집의도를 찾아내지만 변경 없이도 저자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기에 종합적으로 이 둘 모두에게 저자의 의도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로 이 약점 때문에 편집비평학자들 중에는 변경된 부분뿐 아니라 변경되지 않은 부분을 포함한 책 전체의 구성을 살펴보면서 저자의 의도를 찾으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구성비평’이라 부른다.
10) 20세기- 현재의 신약 연구
이 시기는 역사적 예수 탐구가 활발히 진행된 시기이다. 지금은 역사적 예수연구가 사회-과학적 해석의 도움을 받아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도 간과할 수 없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 기자들 당시의 신화적인 세계관은 서술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었는데, 우리가 현재에 신약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비신화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신학의 ‘새 관점’에 대해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다.
21세기 신구약 신학계에서는 전반적으로 학제간의 상호보충적인 해석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여전히 문법-역사적 해석에 기초한 계시사를 단차원적으로 연구하는 분위기는 한국에서 팽배하다. 그리고 여성신학, 제3세계 신학, 탈식민지 신학, 해방신학과 같은 이념비평과 이와 보조를 맞춘 독자 중심의 해석학이 포스트모던 해석학에서 영향을 많이 미치고 있다.
6. 신약 해석 방법론
해석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성경을 주석할 수 있지 않는가? 현대의 폭발적인 해석 방법론의 소개는 혼동을 초래하며, 그 중에서 분명히 개혁주의 해석과 전제에서 볼 때 문제가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해석학 없는 신약 석의와 신학은 연장 없이 사냥하는 것과 같다. 분명히 할 것은 신약 해석 방법론은 본문이 말하도록 돕는 것이지 본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해석학을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방법론으로 분류할 수도 있고, W.R. Tate처럼 ‘본문 배후의 세계, 본문 안의 세계, 본문 앞의 세계’로 분류할 수도 있다. W. Egger는 공시적 해석과 통시적 해석으로 양분한다. 물론 문학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은 신학적 해석을 위한 기초공사이다. 성경의 신적 기원과 모든 시대를 향한 적합성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우리는 성경의 인간적인 요소를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이 어떤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에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면 저자, 본문, 독자 이 세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1) 저자 중심의 해석방법론
주로 역사비평이 여기에 속한다. 실제 자자의 의도가 곧 본문의 의미라는 방식으로서 복음서의 경우,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찾아서 석의하려는 편집비평은 대표적인 저자 중심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저자중심의 해석은 저자의 의도를 살핌으로 역사적인 원래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을 가지는 장점이 있다. 한편 저자 중심의 해석의 약점은 저자의 의도를 찾기 위해 저자의 상황을 재구축할 때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극복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그 저자의 역사적 상황과 본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호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2) 본문 중심의 해석방법론
본문의 자세히 읽기가 여기에 속한다. 그 뿌리는 1950년대의 일반 문학에서 사용된 방법인 신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은 저자를 떠나 독립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탁자를 연구하려면 더 이상 탁자를 만든 사람의 상황과 제작 과정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우리 손에 들어온 완성된 제품, 완성된 연구 대상으로서의 탁자만 자세히 보고 연구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성경 주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종 형태로의 본문만 자세히 연구하면 되지, 저자의 상황이나 저자의 자료의 수집과 배열을 몰라도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자율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저자와 독자에게서 독립적인 본문을 전제로 하는 방법이다. 주로 본문의 언어, 구조, 문학적인 고안 장치들이나 특성을 살핀다.
구조주의와 서사비평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서사비평에서는 본문에 의해 만들어진 내재된 저자와 내재된 독자의 관련성으로 연구하지 혈육을 가진 실제 저자와 실제 독자가 결정적이지 않다. 주관성이 약점이며, 실제 저자와 독자를 무시하는 것 역시 큰 문제점이다. 하지만 서사비평은 이야기 구성, 인물, 시간 그리고 관점들을 찾는 점에서 유용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본문을 주도면밀하게 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3) 독자 중심의 해석방법론
단순화시켜 말하면 주로 포스트모던의 해석 경향이 여기에 속한다. 독자가 의미를 창출하거나 의미 창출에 공헌하나, 저자의 죽음을 선포하는데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저자 없는 독자는 없기 때문이다.
(1) 독자반응비평: 의미는 본문과 독자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며, 따라서 저자의 역할을 최소화한다. 독자가 앞 뒤 글의 흐름을 보고 논리적인 비약이나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는 예상과 회상을 통해서 틈을 메울 필요가 있는 부분은 메운다.
(2) 해체주의: 본문에 나타난 의미의 고정성-확정성을 거부하며, 독자가 주관적인 의미를 창출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독자반응비평과 긴밀히 연관된다.
(3) 이념적 해석: 이를테면 여성주의적 해석, 해방신학적 해석, 식민지 후기 해석, 한국의 민중신학적 해석이 이 부류에 속한다. 독자의 선입견을 할 수만 있으면 제거하여 객관적으로 해석하려는 비평시기의 해석 원리를 반대하며, 독자의 선입견이나 이데올로기는 해석에 있어 제거될 수 없는 것이며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제 없는 해석은 없기 때문이다.
(4) 개혁주의적 평가: 제 아무리 신기하고 좋게 보이는 방법론이라도 성경의 권위나 영감을 해치는 것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 그리고 해석학의 확장은 개혁주의 해석학을 숙지한 후에 할 일이다. 먼저 성경신학에 관한 입장과 개혁주의-전제주의적 인식론을 정리해야 한다. 이런 기초가 없으면 사상누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과 송영으로서의 해석학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근본주의에 머무르면 발전이 없을 것이다.
4) 성경을 읽는 방법
(1)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성령의 조명을 바라면서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
(2) 문법-역사적으로 읽어야 한다.
(3) 구원계시사적으로 읽어야 한다.
(4) 문맥을 따라 읽어야 한다.
(5) 반복해서 전체적으로 읽어야 한다.
5) 성경을 적용하는 방법
유비의 법칙이 적용에 있어서 중요하다. 즉 하나님은 영원하며 동일하신 반면에, 인간은 구약이나 예수님 당시나 현대나 불의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그 상황이 우리와 비슷하여 직-간접적으로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살인하지 말라 혹은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하지 않는 것과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요 명령이며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제한된 명령이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금하고 있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요한이 금하고 있는 이단과 세상과의 타협을 다루는 본문은 우리 시대의 문화와 종교적 상황에서 그 유비를 교차-문화적으로 발견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성경의 불변하는 초문화적-초시간적 가르침은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본문의 주장점이 오늘 상황에 적용될 수 없는 경우는 그 주장점에서 일반적인 원리를 도출해야 한다. 적용을 할 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본문에서 내가 지켜야 할 명령은 무엇인가?
(2) 내가 믿고 따라야 할 약속은 무엇인가?
(3) 내가 따라야 할 본과 모범은 무엇인가?
(4) 내가 피하거나 고백해야 할 죄는 무엇인가?
(5) 내가 찬양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유)은 무엇인가?
(6) 본문은 하나님, 나, 이웃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그리고 구약에 어떤 주제가 등장할 때(비록 그것이 신약과 동일한 용어라고 할지라도) 섣불리 직접 적용하지 말고, 먼저 구속사적 발전을 고려하여 다음 질문을 해야 한다.
(1) 새 언약이 주는 영적인 복은 무엇인가?
(2)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주는 은택은 무엇인가?
(3)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복은 무엇인가?
7. 성경신학적 신약해석
개혁주의 진영에서 성경신학을 연구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 구원계시사를 모르면 성경 해석과 설교는 예화 덩어리가 되거나 모범적으로 흐르기 쉽다. 구원계시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려면 성경신학에 관한 책들을 소화해야만 한다.
1) 성경신학의 기원
성경신학의 기원은 교의학의 원리를 지지하는 성경본문 모음집에 있으며, 그 다음에는 메마른 교의학에 대한 18세기 경건주의자들의 반동에서 또 하나의 성경신학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J. P. Gabler는 1787년에 교의학으로부터 성경신학이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교의학과 성경신학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교의학은 성경 66권 전체에서 어떤 교리를 조직화하기에 계시역사의 점진성이나 계시역사가 주어진 환경에는 관심이 적다. 즉 교의학은 무역사적인 면이 강하다. 분명한 것은 교의학이 성경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만 그 본래의 기능과 목적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의학의 토대는 바로 성경신학이다.
‘성경신학의 아버지’인 게할더스 보스에 의하면 성경신학은 “성경에 담겨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발전 과정을 다루는 주경신학의 한 분야이다.” 주경신학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성경의 실제적 내용에 대한 연구, ② 저자문제, 기록 연대와 장소, 가능한 자료를 포함한 기원의 문제와 관련된 총론, ③ 정경론, ④ 성경의 성문화 배후에 있는 시간과 공간 가운데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실제적인 자기 계시에 관한 연구인 성경신학이 그것이다. 따라서 성경신학은 주경신학의 한 분야이며 그 최종 열매이다.
2) 성경신학의 본질
(1) 계시를 받던 과정에 나타나는 역사적 점진성을 중시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한 번에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원시복음(창 3:15)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시대마다 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중심 목표이시다. 예수님은 계시의 중심일 뿐 아니라 그 절정에 위치한다.
(2) 역사 안에서 계시의 실제적인 구현을 취급한다.
이 경우 행위계시와 말씀계시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계시가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과 사건을 도구로 계시한다. 둘째로 말씀계시는 행위계시보다 앞선다. 왜냐하면 말씀이 선포되면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약속의 성격을 종종 띠는 이유이다. 셋째로 계시는 역사이다. 특별계시역사는 역사적이나 역사학은 아니다.
(3) 성경신학은 성경 전체의 유기적 완전성-통일성에 집중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전진하면 계시도 전진하고, 구속이 정지 상태이면 계시도 정지 상태이다. 구속과 계시는 보조를 같이 한다. 구속의 역사가 활발할 때 계시 역사도 역동적으로 나타난다. 구약의 경우, 구원과 계시가 활발할 때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그리고 남유다의 멸망 직전과 같은 시대이다. 신약의 경우는 당연히 예수님의 공생애 중인데, 그 중에서도 마지막 1주일 정도에 계시가 집중된다. 구약과 신약의 원저자가 하나님이시라면, 계시역사를 찾는데도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이 불연속성보다 더 고려되어야 한다. 이 말은 불연속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불연속성이란 말은 성경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강조점’과 관련된다. 하나님께서 유기적으로 영감된 말씀을 주셨다면, 신약 저자들은 구약을 그들의 강조점을 위해 변형시켜 인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이다.
(4) 계시역사 전체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전진하기에 항상 그 성취나 완성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구약) 계시의 결정적인 성취는 예수님 안에서이며,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 때이다. 계시가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인 성취를 보았기에,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는 물론 주님이 누구이신가도 잘 알아야 한다.
3) 구원계시사적으로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다루기에 우리는 구원계시사적으로 성경을 읽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그 때 성경의 구원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성경 전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원리를 찾는 ‘해석학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계시사적인 통찰력은 전문 성경학자와 일반 성도 모두에게 주석과 적용을 위해 중요하다. 대략 다음의 절차와 단계를 따라 구원계시사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
(1) 관주성경을 사용하여 구약관련 구절을 다 살펴보라.
(2)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과 관련된 언약의 성취의 사항을 살펴보라. 이 때 특별히 예수님의 다양한 이름들이나 은유를 잘 살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를 철저히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3)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의 흐름을 살펴라. 구약의 구원 사건은 사실 신약의 구원사건과 유사성이 많다. 이유는 하나님이 동일하시며, 인간의 죄성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4) 하나님 나라, 언약의 성취, 심판과 구원 등 성경의 전체를 엮을 수 있는 주제가 본문 속에 나타나있는지를 살피라. 이것을 위해 본문에 등장하는 중요 단어들의 어휘에 담긴 구원계시사적 중요성을 살피는 것이 유익하다.
(5) 신약의 종말론의 틀인 ‘이미와 아직 아니’를 잘 고려하라. 하지만 계시의 전진을 고려해 볼 때, 만유이신 예수님의 온 교회적 인격에 기초하여 ‘이미’의 측면을 더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신약 안에도 언약의 중첩 및 계시의 전진이 나타난다.
(6) 신약의 구원계시사적인 주석의 결론이 교의학적 틀에서 벗어나면 일단 유보하는 게 좋다. 우리가 구원계시사적으로 성경을 읽기 위해서 한 가지 요령은 표쥰적인 성경신학 책들 뒤에 나오는 성경 구절 색인을 통해서 그 구절의 구원계시사적 의미를 역추하는 것이다.
8. 복음서에 대하여
1) 공관복음의 유래
공관복음 문제는 “첫 세 복음서들 사이의 문헌학적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로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간의 일치와 차이라는 이상하고 복잡한 상호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정의한다. 그러나 ‘공관복음 문제’는 공관복음을 이해하려고 할 때 사람에게 발생하는 어려움이지 하나님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공관복음 문제’라고 부르기보다는 ‘공관복음 유래’라고 부르자는 제안이 설득력을 가진다. 이 공관복음 유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시도되어 온 해결방안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공관복음 유래의 해결 방안들
① 원복음 가설: 원래는 하나의 복음서가 존재했다는 가설이다.
② 단편가설: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현재의 복음서 이전에 짧고 긴 단편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가정한다.
③ 구전가설: 복음 전승이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는 ‘구전’이 복음서의 기초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④ 상호의존 가설: 공관복음서들이 문서상으로 서로 의존해 있다는 가설이다.
⑤ 문서설: 공관복음의 유사성과 다양성은 두 자료(마가복음과 Q)를 사용한 결과라는 주장이다.
(2) 마가복음 우선설의 근거와 비판
● 많은 사람들이 마가복음 우선설을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 내용에 있어서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르며, 마태와 누가가 마가의 순서를 따르지 않을 때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의 내용을 대부분 포함한다.
② 짧은 마가복음의 원시적이고 거친 문체(예: 생생한 현장감을 위한 구어체, 아람어 표현 군더더기 표현 등)는 마태와 누가에 의해 다듬어졌기에 길어졌다.
③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8개의 아람어가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하나, 누가복음에는 없다. 아람어를 첨가하는 것 보다 빼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다.
④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간적인 감정들이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생략 혹은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이 후대에 점증하였다는 증거이다.
⑤ 막 8:29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비교 마16:16, 눅 9:20), 그리고 막 6:14의 ‘왕’이라는 칭호(비교 분봉왕, 마 14:1, 눅 9:7)와 같은 경우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 비교해볼 때 분명하지 못한데 이런 현상은 마가복음 우선설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이다.
● 위의 주장을 비평해보자.
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일치하는 구절이 마가복음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혹자는 마가복음 대신에 가설적인 문서인 ‘원 마가복음’을 마태와 누가가 의존했다고 가정한다.
② 마가복음 우선설에 기초한 자료설은 성령님의 영감설을 배제하지 않는가?
③ 누가가 마가복음을 참고했다면 누가복음에 생략된 마가복음의 중간 부분인 막 6:47-8:26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④ 마가복음 전체에서 5.5% 분량을 차지하는 hapax legomena(총 75개)를 마태와 누가는 왜 자신들의 복음서에서 반영하지 않았는가?
⑤ 문체에 있어 예를 들어, 변화산 사건을 다루는 마 17:5가 막 9:7보다 더 생생한 모습을 전한다.
●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을 자료로 삼아 복음서를 기록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처럼 된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게 있어서 마가복음은 정경으로서의 권위를 갖지 못하고, 단순히 변경하면서 사용할 수 있었던 자료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반드시 마가복음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자세히 살펴보면, 마가와 마태-누가 사이에는 어휘적 연관성이 생각만큼 크지 않다. 그리고 공관복음 사이에 대체로 병행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복음서의 분량은 복음서 저자 개인의 성향 문제이지, 기록 시점 혹은 의존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문체 역시 저자 개인의 성향 문제이다. 신학적인 변형도 저자 개인의 신학적인 성향 차이로 볼 수 있다.
(3) Q
① Q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마가복음에 나타나지 않는 자료인 Q는 250절 정도로 양이 비교적 많은 동시에 언어적 유사성 및 내용의 순서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에 마태와 누가는 어떤 공통 자료를 사용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또 하나의 이유는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두 번 등장하는 동일한 말씀이 있는데 한번은 마가복음에서, 다른 한번은 Q에서 인용한 것으로 본다. 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교리교육을 위해 Q가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② Q의 내용
a. 준비: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선포(마 3:7-10, 눅 3:7-9)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마 4:1-11, 눅 4:1-13).
b. 말씀들(산상수훈): 팔복, 원수에 대한 사랑, 판단에 대해, 말씀을 듣는 자와 행하는 자(마 5-7장, 눅 6장)
c. 기사들: 백부장의 하인, 세례요한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마 7, 11장, 눅 7장)
d. 제자도에 관하여: 제자가 치러야 할 대가, 제자 파송 시 예수님의 명령, 회개치 않는 갈릴리 사람에 대한 저주(마 11:20-24, 눅 10:13-15).
e. 예수님의 가르침들: 기도의 모범, 기도응답, 바알세불 논쟁, 더러운 악령, 선지자 요나의 표적, 빛에 관하여.
f. 강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마 23:1-36, 눅 11:37-21:1).
g. 더 자세한 말씀들: 담대한 신앙고백, 땅 위의 일에 대한 염려, 신실함, 시대 분별을 위한 징조, 대적과의 화해에 대하여.
h.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마 13:31-33, 눅 12:57-59).
i. 그 외의 말씀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루살렘에 대한 부르짖음, 제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마 5:13, 10:37-38, 눅 14:26-35), 두 주인을 섬기는 것, 율법과 이혼, 실족케 함, 용서와 믿음, 인자의 날에 관하여.
③ 평가
무엇보다도 Q의 내용과 관련하여 중요한 질문은 Q에 예수님의 ‘수난기사’가 포함되어있는가이다. Q에 복음의 핵심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Q복음서’라고 부를 수 있는가? 더불어 과연 Q에 주제적인 통일성이 있는가라는 질문도 제기된다. 그리고 기적에 관한 내용은 왜 이렇게 적은가……
2) 복음서를 어떻게 공부할까?
(1) 본격적인 신학적 해석을 하기 전의 예비적 단계
우선 해석하고자 하는 본문을 한글 성경과 헬라어 성경 그리고 영어 성경을 같이 병행해서 반복해서 읽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헬라어 성경과 한글 성경 사이의 번역의 차이점과 앞뒤 문맥을 살펴야 한다. 또한 본문이 어떤 종류의 이야기 혹은 가르침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즉 이야기 타입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비유인가, 묵시적 타입인가, 혹은 구약의 인용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본문의 구조가 어떠한가, 혹시 본문을 구성하는 작은 단락들 사이에 병행이나 교차대칭 구조가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또한 이 본문의 중심 개념이나 주제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며, 이 때 중요 단어의 어휘 의미 연구가 유용하다.
(2) 그리스도 예수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대해 어떤 이론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내가 곧 진리이다”(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이해는 곧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뿐 아니라 시- 공간적 배경, 특정 표현이나 제스처나 행동 등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서에서 이러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예수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3)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구약에서 예언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 땅에서 성취된다. 마태복음 11:4-6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표적임을 언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구속사적 메시지와 연관 지어 예수님의 사역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4) 계시의 전진을 구약과 주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들을 점진적으로 계시하고 있다. 신약에서 계시의 전환을 이루는 것은 부활이기에 부활 이전과 이후의 계시의 전진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구약과 복음서의 간본문을 통해 구원계시사적인 안목을 그리스도 중심과 삼위 하나님 중심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5) 사복음서의 조화 이전에 각 복음서의 독자적인 문맥과 사상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사복음서는 우선 각 복음서의 상황과 문맥에 따라 읽어야 하며, 각 복음서를 서로 비교하여 각 저자의 강조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복음서의 조화를 섣불리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한 분 예수님의 네 가지 모습에 대한 지각없는 혼합은 복음서 저자들의 독창성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며, 예수님에 대한 이상한 시각을 갖게 한다.
(6) 복음서의 1차 수신자를 고려해야 한다.
사복음서가 각기 다른 공동체를 독자로 삼고 있다면 그 독자들의 구성 성분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1차 수신자를 고려함으로 인해 저자와 본문에만 초점을 맞춘 해석 방법에 유용한 교정 수단이 되어 균형 있는 해석으로 이끌어준다.
3) 각 복음서의 특징들
(1) 마태복음의 특징
구약과 신약의 가교로서 마태복음은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강조한다. 마태는 예수님의 왕적 위엄과 권위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불신 유대인에 대한 책망을 언급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종말론이 비유와 강론들 속에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쌍으로 표현되는 2중적 모티브(마 8:28-33, 20:29-34, 21:6-7)와 베드로에 대한 다양한 언급이 마태복음의 특징이 된다.
(2) 마가복음의 특징
마가복음에서는 갈릴리를 중점지역으로 다루고 있다.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며 마가는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을 비밀리로 하셨음을 강조한다. 마가복음에서는 “즉시”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42회 등장하여 사건의 긴박성을 강조하는 행동의 복음서로 불릴 만하다.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실패가 다양하게 강조되며, 예수님의 여러 감정들이 다른 복음서보다 많이 등장한다. 전체 마가복음의 5분의 2는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고난을 위해 할당된다.
(3) 누가복음의 특징
누가복음은 이방인도 구원계획 속에 포함되어있음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비유 중 18-20개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타난다. 누가는 성령님의 사역을 자주 강조하였으며, 이사야 53장과 40-66장을 빈번하게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사회적 약자, 여인과 아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이 강조되었다. 식사에 대한 언급은 19회 등장하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것은 13회이다.
(4) 요한복음의 특징
요한복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간결하면서도 심오하게 소개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 간의 관계가 일관되게 등장하는데, 성자의 자기 계시는 성부를 반영한다. 요한은 편집적인 설명을 22개나 하고 있는데 이 중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무지가 예수님을 거부한 것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과 나누신 개인적인 대화를 여러 번 언급한다. 예수님의 일곱 표적과 “나는 ~이다”라는 표현, 일곱 명의 증인 등 완전수에 대한 언급과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강조가 요한복음의 특징이 된다.
4) 요한복음의 시간법
공관복음에 등장하는 시간은 유대식 시간이지만 요한복음의 시간은 유대인이 아닌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기에 로마식 시간이었다. 로마식 시간은 현대의 시간법과 동일하였다. 요한복음의 수신자가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근거로 요한복음 2:6, 13을 보면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등의 표현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결례와 절기를 말해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48을 보더라도 독자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더 자연스럽게 읽혀진다.
요한복음에 언급되는 시간을 유대인의 시간으로 계산한다면 시간과 상황이 부적절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시간법에 따라 볼 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시간은 저녁 6시이며(요 4:6), 왕의 신하가 병이 나은 시간은 오후 7시였으며(요 4:52),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했던 시간은 오전 6시였던 것이다(요 19:14).
5) 복음서 요약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로서 성경계시의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부동한 사람의 관점에서 그린 예수님의 상은 서로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조화를 이루는 한편 동일한 용어로 기록된 부분에서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강조를 나타내고 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부터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즉 그리스도의 왕권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을 특별히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태는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한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마태복음 23장은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에 대해 다른 복음서와 동일하게 그 사역이 말씀의 사역과 능력 행함의 사역이라고 정의하는 한편 특별히 그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라는 것에 초점을 둔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보훈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통치자로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의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의 핵심 장인 13장에서 여러 가지 비유로 언급되어있다. 마태는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인 “임마누엘”로 마태복음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것으로 간주되며,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로 종으로 묘사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사역은 다른 복음서의 견해와 동일하게 말씀의 사역과 능력 행함의 사역인 한편 그 중에서 예수님의 행함의 사역이 강조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마태복음과 같이 많은 비유를 언급하지 않고, 18개의 기적을 언급하고 있다. 송교수님의 “신약주석”에서는 마가복음을 “행동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마가는 예수님의 공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의 유아시절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한편 마가는 다른 복음서 보다 예수님의 수난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는 이사야 53장의 수난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문학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도 언급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다른 복음서와 동일한 견해로 말씀의 사역과 능력 행함의 사역이라고 정의하는 한편 그 사역이 특히 성령님에 의한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의 소명에 대해서도 성령 충만을 언급하였고, 예수님의 사역을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말씀(이사야 61:1)의 성취라고 정의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그 후편으로 동일한 저자인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의 사역과 능력 행함의 사역인 한편 그 사역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이루어지는 사역임을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간결한 문체로 다른 복음서에 그려지지 않은 예수님의 상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의 독특성이 93%나 된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간음 중에 잡힌 여인, 마르다 등 개별적인 인물들과 하신 대화를 언급함으로 신앙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9. 사도행전에 대하여
1) 사도행전을 어떻게 공부할까?
(1) 정확한 역사적 배경 연구 및 재구축
사도행전은 유대적 세계와 헬라적 문화 세계 그리고 로마적 정치- 군사적 세계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삶의 정황을 가진다. 그러므로 비록 누가가 세계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도행전은 1세기의 유대 넓게는 그레코 로마 세계의 빛 속에서 읽혀져야 한다.
(2) 복음 중심적 해석
사도행전은 복음을 중심 주제로 읽혀야 한다. 누가복음의 제 2부로서 사도행전은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거듭나게 함과 죄 사함을 통한 유쾌케 하시는 사역을 그리고 있다. 이 천상의 사역은 지상의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하는 동시에 성령님을 통한 사역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원리적인 면에서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의 중심 메시지는 복음인 것이다.
(3) 삼위 하나님 중심의 구원 계시사
하나님의 사역은 삼위의 사역이다. 삼위의 사역은 언약의 중첩과 긴장이 종결된 A.D. 70년 이전까지는 복합적이고 미묘한 양상을 띤다.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심이 있은지 40년 동안이나 유대주의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은 견고히 서 있었던 것이다. 누가가 그리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제할 수 있으며, 성령님께서 다스리시는 역동적인 교회였다.
사도행전의 계시사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되는데 다음의 다섯 가지 주제를 포함한다.
① 약속과 성취(예: 욜 2:28-32, 행 2:6-39)
② 기독론(시 16:10, 행 13:35)
③ 공동체의 사명 혹은 공동체의 지침(암 9장, 행 15:15-18)
④ 이방인에 대한 명령(사 49장, 행 13:15)
⑤ 이스라엘에 대한 도전과 경고(시 2:1-2, 행 4:25-26, 사 6:9-10, 행 28:26-27)
(4) 간본문적 해석
원래 2부작으로 의도된 작품의 후속편인 사도행전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 전편인 누가복음의 빛 속에서 읽어야 한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사역은 이 간본문의 빛 속에서 볼 때 더욱 연속성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사도행전 내의 간본문적 해석은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복음서의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바울 사이의 유사점은 능력 있는 사역, 예루살렘 입성, 고난과 체포 그리고 재판 등인데 세밀한 간본문적 해석을 필요로 한다.
2) 스데반과 빌립은 집사인가?
헬라어 성경의 사도행전 6:1-7에서는 스데반과 빌립을 집사라고 부르지 않고 있다. 단지 성경이 한글로 번역될 때 “집사”라는 단어가 임의로 삽입된 것이다. 비록 스데반과 빌립을 포함한 일곱 명이 구제 또는 식탁 봉사를 위해 선출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이며 그들의 근본적인 사역은 복음증거였다. 사도행전 6장은 교회의 제도를 세우기 위해 집사라는 직분을 세웠음을 보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선택된 일곱 명은 회계의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언급되지 않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일곱 명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열두 사도들의 사역에 버금가는 사역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3) 사도행전 요약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사역을 성령님에 의한 사역으로 정의했듯이 누가복음의 후속편인 사도행전에서도 누가는 사도들의 사역을 성령님에 의한 사역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보편적으로 성령행전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왕적 통치의 역사이기에 성령행전보다는 예수님의 행전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릴 것이다. 누가복음 24:47-49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사도행전에서는 그러한 약속의 말씀이 사도들의 삶을 통해 성취되고 있다.
사도행전의 주요내용은 1장 8절에 요약되어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종말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역동적인 면을 그리고 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과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왕권을 이 땅에 펼치신다. 예수님의 왕적 통치는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역사인데, 특별히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빛으로 삼으셨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구약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 바울의 사역에 대한 이해는 뒤에 이어지는 바울서신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10. 서신서에 대하여
1) 서신서를 어떻게 공부할까
(1) 서신서의 장르
서신서는 신학을 집대성한 논문으로 우선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먼저 1세기 특정한 수신자에게 특정한 상황과 문제에 대한 설득, 경고, 책망, 권면, 영적인 목회적 가르침을 위한 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서신서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쓰여진 상황문서들이다. 서신은 상황적이되 신학적이다.
(2) 서신의 형식
일반적인 헬라의 서신은 인사말, 감사의 말, 본론, 마지막 인사말로 구성된다. 신약 서신에는 그 당시의 다양한 문학적인 전통들을 수용했는데, 예를 들면, 당시의 수사학 양식들, 설득 양식 등을 사용했다.
(3) 서신이 읽혀진 방식
빌레몬서 그리고 요한 이, 삼서와 같은 몇몇 개인적인 서신을 제외하고 서신들은 주로 예배 중에 크게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그 이유는 사도의 부재 중 서신이 그 사도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기록된 문서의 시대라기보다는 구전의 시대였기에 하나의 편지로 여러 사람이 듣고 말로 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4) 서신서의 수사학적인 기교
서신이 낭독될 때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수사학적인 기교를 사용했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고전적인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에 대해 “화자가 청자를 위해 설득을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지칭했다. 고전수사학의 종류들에 대해 종합적으로 고려함이 균형 잡힌 서신서의 해석을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서신서는 하나님의 설득으로서의 서신이기 전에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서신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5) 로마제국 안에서 서신을 통한 복음 전파의 용이성
통일된 로마제국에는 발달된 교통망이 갖추어져 있었기에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서신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언어적으로는 코이네 헬라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서 언어적인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 어느 시대보다 1세기의 로마제국은 복음이 효율적으로 증거되는 기반이 조성되었던 시기였다.
(6) 서신의 특성
① 서신서 중 예외적으로 사적인 것도 있기는 하지만 교회에 주어 보내진 것이기에 공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대화와 현존: 마치 송신자가 독자 가운데 있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을 택한다.
③ 설교체: 강한 감정과 애정, 목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④ 보편적인 특성으로 헬라 편지는 의식적이고 상투적인 틀을 유지했다. 그러나 서신서는 계획적이지만 형식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7) 서신서 해석의 원칙
① 사회, 문화, 정치, 종교, 역사적 상황을 본문과 보조 자료를 사용하여 재구축해 본다.
② 기초적인 역사적 배경을 숙지한 후 편지를 전체로 읽음으로 전체의 감과 맥을 잡는다.
③ 논리의 흐름을 따라 사고의 시작과 마감이 분명한 좀 더 세부적인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④ 문학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즉 핵심단어와 반복되는 용어, 그리고 수사학적 표현을 중심으로 연구한다.
⑤ 신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구약의 인용을 통한 계시사의 전진, 그리고 기독론적인 은유 혹은 그레코- 로마의 문화에 반하는 기독교적 강조 등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⑥ 유비를 통한 적용을 해석의 마지막 단계로 해야 한다. 서신서 역시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기에 모든 시대의 교회에 그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롬 1:18-5:21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에서 예수님을 특이하게 소개한다. 로마서 1:18-5:21에서 바울은 계획된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예수님은 구약 교회를 자신의 인격 안으로 포섭하는 ‘그 남은 분’이시며, 신약교회를 재창조하여 확대시키시는 ‘마지막 아담’이심을 강조한다. 이런 바울의 기독론 이해는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는 신학자들 사이에 만연한 현상인 예수님을 과거의 위대한 한 인물로 보는 것, 혹은 이것보다 좀 더 낫기는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자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을 극복하도록 한다. 예수님은 구약과 신약의 중심이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중심(혹은 절정)이시며, 구속사의 중심이시며 전환이시다. 아래는 단락별로 살펴본 로마서 1:18-5:21의 교차대칭 구조이다.
A. 인류 (이방인)
모든 불의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 (1:18-32)
B. 유대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2:1-11)
유대인의 율법은 안전한 대책이 못됨 (2:12-16)
유대인의 특권은 안전한 대책이 되지 못함 (2:17-24)
유대인의 할례는 안전한 대책이 되지 못함 (2:25-29)
하나님의 신실함과 유대인 (3:1-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인임 (3:9-20)
C.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하나님의 의 (3:21-31)
B'.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이신칭의 (4:1-12)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실현된 약속 (4:13-22)
아브라함의 믿음과 성도의 믿음 (4:23-25)
A'. 인류 (우주적 교회)
칭의에서 구원과 화평으로 (5:1-11)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이 마지막 아담 안에서 누리는 생명 (5:12-21)
로마서 1:18-5:21에서 저자 바울의 사고의 흐름은 교차 대칭적으로 ‘(타락한) 인류→ (타락한) 유대인→ 예수님’에서 ‘예수님→ (거듭난) 유대인(아브라함)→ (거듭난) 인류’로 흐른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C)께서 중심이시다. 바울은 고도의 문학적인 구도 속에 자신의 신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 죄악과 심판의 흐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종결된 반면에, 의와 구원의 흐름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인 새로운 유대인과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고 있다. 결국 창세기에서 시작된 구속 사역은 계시록까지 ‘하나의 구원사’로 전개된다. 이것이 하나인 것은 ‘아담-그리스도 기독론’에서 볼 수 있다(롬 5:12). 바울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사이의 실제 역사 및 구속 역사적으로 (대조되는)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다. 바울과 신약 저자의 모형론적 해석은 구약에서 특별히 ‘창조’와 ‘언약’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으로 하나님의 구속사가 종결되지 않고, 점점 더 전진해간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구속 받은 사람들의 충만한 숫자로 확장되어 간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한편으로는 감축 운동, 다른 한편으로는 확장 운동을 해 왔다. ‘주전’은 숫자가 줄어드는 것으로, ‘주후’는 숫자가 늘어나는 것으로서 이 감축과 확장의 운동을 잘 알 수 있다. 중심 사건이 사건의 점진적 진행 과정을 결정해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교회를 포섭하시는 동시에, 신약의 백성의 확대의 출발점이 되신다. 예수님이 유일한 남은 자이시기에,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게 정화되어 재창조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온 교회적 인격’이며, 그분의 사역은 종말의 은사이신 성령님과 신약 교회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다.
3) 갈라디아서의 수신자에 대하여
사도행전 16:6에는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자 바울과 동료들이 제 2차 전도여행 중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지나간 것을 언급한다. 사도행전 18:23은 제 3차 전도를 시작할 때 바울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의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바로 이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인가?
첫째는 남부 갈라디아설로서 넓은 지방 가설이라고 한다. 남부 가설은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 중에 설립된 교회들과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이 다시 방문했던 도시들에 있는 교회들과 관련 있다. 둘째로 북부 갈라디아설은 지금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를 중심으로 한 좁은 지역 가설로서 실제 갈라디아 땅에서 수신자를 찾는다. A.D. 3세기경에는 남쪽 지방은 갈라디아에서 분리되고 북쪽 지역만 갈라디아로 불리게 된다.
우리는 북부 갈라디아설을 지지하는데, 그 근거는 누가가 구체적인 도시나 지역을 언급할 때 그 앞에 지방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예: 비시디아의 안디옥, 루가오니아의 루스드라와 더베). 따라서 지방 이름 없이 사용된 갈라디아라는 이름은 지역 혹은 구체적인 도시를 언급하는 것이다.
4) 야고보서에 나타난 창조 상징주의
첫째로, 야고보서 1:14-15에서 야고보는 임신과 출산을 시험이 범죄로 이끄는 과정을 위한 유비로 사용한다. 시험에 넘어감으로 정욕은 임신케 하고 그 다음에 죄를 낳게 된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당한 시험을 이와 연관지어볼 수 있다. 하와는 먼저 선악과를 열망했고 임신함으로써 즉 마음에 품음으로써 그녀의 욕망은 죄를 낳았고 죄는 사망으로 인도했다.
야고보가 임신과 출산 이미지를 계속해서 전개하는 야고보서 1:17-18을 살펴보면 위의 구절들이 창세기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람은 죄를 낳지만, 반대로 하나님은 죄의 아버지가 아니라 빛의 아버지이시다. 야고보서 1:17에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둘째로, 야고보서 3:7-8에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언급이 있다. 비록 야고보가 말하는 동물들의 순서가 창세기에서 말하는 순서와는 다르지만 야고보서 3:7은 창세기 1:26-28의 문화명령을 분명히 암시한다. 비록 이 명령이 인간에 의해 완성되었지만 인간은 그의 독기 가득한 혀를 아직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야고보는 언급한다(약 3:8).
5) 서신서 요약
(1) 바울서신
서신서는 복음이 지역교회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준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그 당시 지역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상황과 문제에 대해 설득, 경고, 책망, 권면, 목회적 가르침을 주기 위해 편지를 쓴다. 이렇게 기록된 서신들은 초대교회의 공적인 예배에서 읽혀지게 되었다.
로마서는 구원의 교리를 심도 있게 다루는 바울의 서신으로서, 서론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의 절박한 필요에 처해있음을 서술한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는 교리를 중심으로 전반부에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을 서술한다.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 바울은 표면적인 유대인과 외면적인 유대인을 대치시키며, 율법의 한계와 복음의 우월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순종하는 삶의 실재를 다루고 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했던 고린도교회의 내부에는 교리와 성도들의 삶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여러 지도자에 따라 분쟁이 생기는 문제, 성적 부도덕에 대한 문제, 결혼과 독신에 대한 문제, 우상에 드려졌던 음식을 먹는 문제, 예배 중에 여인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 주님의 만찬에 대한 문제, 영적인 은사에 대한 문제, 그리고 부활에 대한 문제에 대해 바울은 목회적 사명을 가지고 바른 가르침과 권면을 주기 위해 편지를 쓴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한 교회였고, 또 바울이 마음을 가장 많이 쏟았던 교회였다.
고린도후서는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의 갈등이 해결된 후 바울이 기록한 서신으로서, 화해와 기쁨의 서신이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의 목회자가 되기에 정당한 사도적 권위가 있음을 변증하며, 고린도교회가 거짓 사도들의 교훈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끝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와의 관계 회복을 확신하며 그들에게 다른 교회와 더불어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 헌금을 모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기록된 서신이다. 바울은 믿음과 자기 의,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 성령님과 육신, 자유 함과 노예 됨 등의 이원론적인 대립을 통해 율법주의 신앙의 한계와 십자가의 복음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바울은 율법주의 신앙을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아들에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율법주의 신앙에는 참 자유가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행위에 의한 신앙이며,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반면 자유로운 여인 사라에게서 약속에 따라 난 아들 이삭은 참 신앙을 대변하며, 이를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에베소서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성도가 소유하게 된 세 가지 복을 열거하고 있다. 첫째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복, 둘째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복, 셋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 치신 복이다. 이어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화목을 우주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송교수님의 “신약주석 Ⅱ”에서는 에베소서의 기독론을 “우주적 기독론”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계속하여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케 된 교회 공동체와 성도 개인이 경건한 삶으로 영적 전쟁에 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더불어 옥중에서 쓴 서신이다. 바울의 투옥으로 인해 수치를 느끼는 성도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에 대해 기뻐하는 대적들도 있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투옥을 통해서도 복음의 진보를 이루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위축되기보다는 오히려 기쁨으로 편지를 쓴다. 이 기쁨은 예수님 안에서의 기쁨이기에 바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예수님만 자랑하고 있다. 송교수님의 “신약주석 Ⅱ”에 의하면 바울은 빌립보서 3:7-8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명예와 수치를 재정립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투옥을 명예와 기쁨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위해 기도함으로 골로새서를 시작한다. 그리고 골로새교회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리고 있다. 골로새교회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2:8), 금욕주의의 가르침(2:23), 그리고 천사숭배의 문제(2:18) 등 여러 가지 거짓 교리에 대해 방어해야 했으며,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로 골로새교회를 권면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2:19).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경건한 삶에 대해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고 하면서 칭찬이 섞인 어조로 권면하고 있다.
데살로니가교회에는 예수님의 재림의 문제에 대해 오해와 혼란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날이 이미 이르렀으므로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주님의 날이 벌써 온 것이 아니라, 장차 올 것이기에 기다리는 삶에 대해 언급해야 했고, 올바른 종말론적인 삶으로 권면해야 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바울은 부지런함과 경건함으로 주님의 날을 기다려야 함을 교훈하였다.
디모데전후서는 디도서와 더불어 바울의 목회서신으로 불려진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디모데에게 교회의 예배에 대해, 거짓 교사들을 경계할 것에 대해,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 성도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올바른 목회적 지침을 주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 같이 위로하며, 그가 목회의 소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예수님의 영적인 군사로 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그레데에서 목회하던 디도에게 편지를 보내 목회적 지침을 주고 있다. 디도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 거짓 교사들을 경계할 것에 대해, 그리고 성도들에게 바른 교훈으로 가르칠 것에 대해 디도를 권면을 하고 있다.
빌레몬서는 바울의 가장 사적인 서신으로 알려진다. 바울은 과거에 빌레몬의 종으로 있다가 도망쳤던 오네시모를 복음을 통해 믿음의 동역자로 세워준다. 고린도전서 7:22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자발적인 결단으로 복음 안에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유롭게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2) 공동서신
칼빈은 히브리서의 저자를 로마의 클레멘트나 누가로 보았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섬세하게 구약을 주해하고 있다. 송교수님의 “신약주석 Ⅱ”에 의하면 “아들”과 “대제사장”은 히브리서의 기독론의 핵심을 이룬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A.D. 62년경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록한 편지이다. 1장 22절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기록되었듯이 야고보서는 서신서들 중에서도 삶의 실제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믿음이 이론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실재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야고보서는 혀를 다스리라는 권면을 비롯하여 성도들의 삶의 실재를 다루고 있다.
베드로전서는 A.D. 60년경 베드로에 의해 로마(바벨론이라는 은유를 사용)에서 기록되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진 이방인 성도들이 어떻게 고난을 극복해야 할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는 교회에서 일어날 배교와 이단들에 대하여 수신자들에게 경고한다. 송교수님의 “신약개관”에 의하면 베드로후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종말론과 고등 기독론(벧후 1:1, 11, 2:20)이다.
요한서신은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으로서, 그 주요내용은 이단과 적그리스도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요한일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제일 되는 계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한 서신의 단순한 표현 속에는 심오한 신앙이념이 배어있으며, 이는 실제 삶의 적용으로 성도들을 이끌어주고 있다.
유다서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A.D. 60년경에 교회를 위협하던 거짓 선생을 경계하기 위해서 기록한 편지로서, 수신자들이 믿음의 도를 굳게 붙잡도록 권면하고 있다.
11. 계시록에 대하여
1) 계시록을 어떻게 공부할까?
(1) 계시록의 부분적 과거론적 읽기
계시록의 과거론적 해석에 의하면 본문의 의미를 1세기 요한 당시로부터 찾는다. 계시록의 중심 주제를 배교한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통한 새 언약의 파트너인 교회의 시대 개막으로 보기 때문에 A.D. 70년의 예루살렘 파괴는 하나님의 계시의 전진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2) 기독론 중심의 종말론
요한은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인 일곱 교회의 관계를 종종 구속의 관점에서 밝힌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은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서 볼 수 있던 종주권 언약인데, 이것은 일방적인 관계에서 맺는 언약을 말한다. 큰 왕이신 예수님과 그의 신하인 교회의 언약적인 관계는 측량할 수 없는 영광과 가치를 선명히 보여준다.
(3) 계시록의 개혁주의적 간본문적 읽기
① 계시록 전체의 빛 속에서 본문 말씀을 해석해 보아야 하며, 성경 전체와 본문 말씀 사이의 관련성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는 A.D. 1세기의 중요한 역사가의 책들과 요한 당시의 사회, 문화, 정치적인 관습들을 비교 연구해 보아야 한다.
② 간본문적 해석과 계시록의 반복 이론의 상관성에 따라 일곱 대접과 일곱 나팔의 재앙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강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요한계시록 요약
송교수님의 “신약주석” 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이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 당시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위해 기록된 편지이기에 그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요한계시록에서 미래에 있을 일로 보는 것은 예수님의 최종 재림 때에 있을 최후의 심판과 신천신지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부분적 과거론”에 의해 읽혀져야 한다는 송교수님의 견해는 올바른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상징적인 표현들도 대부분 구약에서 빌려온 상징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구원과 심판이다. 요한계시록은 음녀 바벨론으로 묘사된 불신 유대인과 로마 제국을 심판하실 것을 일곱 인과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의 재앙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일곱 대접과 일곱 나팔은 동일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서 강조되었을 뿐이다.
3)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경우,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사회적 배경에 집중하기보다도 요한계시록이 어떤 신학적 메시지를 주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주제는 하늘의 왕권이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함을 인증하는 것이다. 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의 상징적인 표현들은 생소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만 적용되는 독특한 해석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적인 표현에 대하여 세부적으로 다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일일이 알아야 해석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초림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우리는 초림에 근거한 메시지를 “어린 양”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한편 삼위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정치와 경제와 관련되며,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종교와 관련된 것인데,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볼 경우, 성부 하나님께서는 용을 이기시며, 예수님께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이기시며, 성령님께서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이기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아래의 도표와 같이 3막으로 구성된 드라마로 볼 수 있다.
본문 |
내용 |
장소 |
특징 | |
1막 |
1-3장 |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
교회 |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하여 언급(보좌에 계신 하나님) |
2막 |
4-11장 |
일곱 인, 일복 대접, 일곱 나팔 즉 세상에 대한 심판 |
세상 |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심판하심이 맞물려 진행된다. |
3막 |
12-22장 |
성육신, 신천신지, 전체 역사 안에서의 구원의 적용 |
역사 |
하나님의 초월성은 어린양을 통해 내재성으로 바뀐다. |
12. 신약의 중심주제로서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이라는 개념은 예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처음으로 제시한 주제가 아니다. 구약에서 이 용어 자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구약에 그 사상은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초기 유대주의 그리고 (후기) 유대 묵시 문헌에도 이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의 경향은 신약의 사실이나 주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실재의 관점에서 먼저 보지 않고 상징이나 은유로서 접근함으로 그 사건이나 실제의 역사성을 약화 내지 부정하는 잘못된 흐름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은유는 실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하는 장점이 있지만, 실제를 은유로만 보려는 입장은 무시간적이며 무역사적인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천국은 일차적으로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1) “Let your Kingdom come” - L. F. 슐츠 교수
성경이 가르치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관점은 단지 심리적, 정치적, 사회적인 필요를 위해 인간의 조력자로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현대 서구인들의 사고를 반대한다. 주기도문에서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의 탄원은 교회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을 무엇보다도 먼저 구하도록 명령하지 않는가! 하지만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은 더 이치에 맞지 않다.
사회복음은 마치 우리의 열정과 노력으로 (수평적인 차원에서) 이상적인 정의와 복지가 구현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복음주의 운동은 산업화와 자본주의에 의해 발생한 복잡한 현대 사회에 기독교의 원리들을 적용하려는 하나의 시도인데, 주로 미국에서 1890년에서 1940년에 발흥했다. 그 목적을 현 세대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인간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주장은 복음서의 천국 개념에 철저히 뿌리를 두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우리는 고린도전서 3:9의 바울의 말 즉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맡기고 교회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왕권을 이루어갈 수 없다. 우리가 동역자라고 불릴 때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재능을 받아 충성되게 섬기는 종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계속 불순종하면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인간의 불순종도 그분의 나라의 임함을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오심은 과거로부터 오고 있는 ‘진행형’이다. 이 점에서 아직도 ‘이미와 아직 아니’의 원칙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천국은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때에 도래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아 어린아이처럼 그 안으로 들어갈 뿐이다(마 22:2-10, 눅 14:16-24). 혼인잔치는 주인에 의해, 주인의 때에, 주인의 방식대로 준비되고 손님은 단지 초청을 받게 된다는 유비가 제일 분명히 이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변명으로 초청을 거부한다 해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초청하여서라도 그 잔치를 성취하신다.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에 있어서 이것은 사회복음주의자와 해방신학자와 별 차이 없는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자’라는 말을 할 때,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도래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이것은 역사적 사고의 형태에 의해서 발견되는 인간의 역사의 불변의 법칙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환언하면, 성육신과 주님의 인격과 사역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독특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 모든 장소에 동일한 효력을 발생시켰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을 응하려 함이라’는 구절은 주님의 천국 사역은 구약에서 예언된 것을 성취한 차원이기에 신구약의 하나님의 나라는 우선적으로 연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구약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사랑과 공의 역시 동일하기 때문이다(시 89:14). 물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완성을 소망 중에 기다리고 있다. 주님의 초림이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구약의 성취로 이루어졌다면 주님의 재림도 초림만큼이나 확실하기에 천국의 완성은 확고한 기초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천국의 원리를 아는데 그치지 말고 이 원리를 우리의 시대에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윤리적 삶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태는 우리를 천국의 제자 된 새 서기관으로 부르지 않았던가(마 13:51-52)?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나라를 원리를 수용하고 순종할 때에만 우리가 외치는 하나님 나라는 허공에 맴돌고 있는 인간의 웅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임한 하나님 나라처럼 확실하게 임할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11:36이 밝히듯이 미래도 하나님 통치 속에 있고 처음이요 나중이신 하나님이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적-역동적-주권적-종말론적 통치’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응 역시 중요하다. 지옥도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요소인 것이다. 여기서 영역은 문화사명과 관련된다.
천국의 영역적 특징은 마태복음 8:11에서 말하듯이 천국과 바깥 어두운 곳이 구분되고 있는 것처럼 여러 곳에서 천국의 장소성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는 영역으로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화해에 기초하여 피조물이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사역을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계속 이루고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어떠한가?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최종 parousia 때,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한 순간에 우주적인 갱신의 방법으로 대 격변적으로 도래하여 완성될 것이다.
3) 신구약 성경의 큰 광맥인 하나님의 나라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연구가 신약에 비해 큰 관심을 받지 못한 느낌을 가진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주의와 보편주의의 관점에서 설명되는 것 같다. 전자(특정주의)는 선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이기에 이스라엘과 주변 이방나라의 이원론적인 대결 구도가 강조되고, 후자(보편주의)는 주로 선지서의 후반부에 나오는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펼쳐질 (우주적인 보편적) 회복을 언급하는 부분에 나타난 우주적인 천국을 의미한다(예: 겔 48:30-35, 슥 14장). 하지만 이 두 사상은 배타적으로 긴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충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시편 95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온 땅’을 다스리시는 분인 동시에 ‘우리 목자’이신 하나님으로 그린다.
구약이 오실 메시아를 예언한 것이라면 구약은 천국을 예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정적이면서도 영원한 것(시 10:16, 145:11-13, 146:10)인 동시에 역동적이며, 점진적인 것(단 2:37, 4:3, 34, 5:21, 6:27, 7:14)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구약 안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아니’의 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신약에서 복음서는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이루어진 천국을 다룬다. 역사서와 서신서는 이 복음이 구체적인 교회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다루기에 역시 그 중심은 천국 복음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 상담학, 선교학, 교회 성장학, 교회사, 설교학과 같은 신학의 각 분과에 핵심주제로 분명하게 연구될 수 있다.
4)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 이미와 아직 아니 그리고 성취와 완성
이미(현재성- 마 10:7, 11:21, 12:28, 막 1:15, 눅 17:21 등)와 아직 아니(미래성- 마 7:21, 25:34, 26:29, 막 8:11, 9:47-48 등)는 여전히 가장 확실하게 천국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온 교회적 인격의 독특성은 천국 논의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교회를 포함하는 인격을 가진 분이시다. 예수님의 출애굽인 죽으심과 부활은 온 교회의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온 교회가 이미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승천하여 하늘 보조에서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엡 2:5-6). 이것은 다름 아닌 우주적인 대 변혁이다. 하늘에서는 사탄이 추방당했다(눅 10:18, 계12:10). 이제 우리는 하늘의 지성소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일성을 파괴할 수 없다. 이 이유로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에 천국이 임하였다는 사실을 예수님 개인에게만 한정하면 안 되고, 온 교회에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구약 본문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여 신약 교회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구속계시사적인 해석이 기독론 중심으로 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혹은 교회 중심으로 전개되며 종말론적으로 전개된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완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기보다는 3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개념은 두 가지 측면 즉 개인적인 성취(개인의 심령과 삶 속에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우주적 성취(새 하늘과 새 땅 즉 교회 공동체의 회복과 갱신과 온 피조물의 갱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개념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예수님이 주님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달=스릴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이며 존재론적인 측면이다. 나머지 하나는 3위께서 교회를 완전한 복락으로 이끄심 하나님 나라의 종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만드시는 미래적인 측면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측면은 존재론적이라기보다는 타락 전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회복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