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폐렴과 간이 좋지 않으신 상태로 관절이 심해 누워 지내시다가 등에 욕창까지 생겨 건강이 더욱 악화된 상황이셨습니다.
지난 10월 22일 신탄진 한일병원에 입원하셔 지내시다가 오늘 아침 7시 28분경 갑자기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고 1시간여 만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래도 큰 고생 안하시고 편히 가셨습니다.
현재는 대전 성심병원 장례식장 3빈소에 모셨습니다.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여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러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가시는 길을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약력
1920년 3월 2일 평안북도 구성 출생.(84세)
1940년 3월 결혼
1945년 9월 민주청년동맹 구성.(25세)
1945년 10월 의주교육과장.
1946년 1월 평북도 교육부 간부과장
1950년 6월 25일 전주 교육과
(당시 신의주 사범학교를 나오셔 평양 교직생활 중 전쟁발발시 전근)
1951년 12월 5일 상주에서 체포(39세)
1952년 12월 20일 대구 고등군법 사형선고.
1953년 4월 25일 무기징역.
1973년 8월 15일 광주교도소 20년 만기출소.
1975년 사회안전법으로 청주감호소 수감.
1980년 출소
2002년 5월 8일 대화동 거주.
2003년 10월 15일 대화동 노인병원 입원(17일 퇴원)
2003년 10월 22일 신탄진 한일병원 입원.
2003년 10월 27일 오전 7시 28분 심장마비 증상으로 8시 50분 사망.
참고>
2003년 2월 대전양심수후원회에서 선생님을 만나 뵙고 인터뷰하여 소식지에 실린글입니다.
내가 만난 장기수 선생님.
빈들교회에 장기수선생님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연락이 닿아 인터뷰를 할 기회를 가졌다. 대화동에 자리잡은 빈들교회는 평일임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학교를 마친 초등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다. 교회에 대한 첫인상이 그다지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향기가 나는 곳이었다. 철없는 아이들의 웃음과 장난, 봉사자들의 헌신이 눈에 띄었다. 목사님을 만나 뵙고 싶었지만 출타중이어서 뵐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다음으로 뵐 시간을 미루면서 안내를 받아 직접 장기수 선생님을 찾았다.
목사님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간단하게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받고 싶었지만 시간이 좀 촉박했고 이번 기회에 직접 양심수와 관련한 당사자들을 만나보고픈 생각도 있어 직접 인터뷰를 시도했다. 형식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무겁지 않게 진행했다. 일생생활부터 수감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하되 민감한 주제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으나 글의 목적과 성격에 맞추기 위해 약간의 도전이 필요했다. 선생님의 성함은 장광영, 1922년 3월 2일 생 올해로 82가 되셨다. 건강한 편이셨으나 이년전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선생님께선 어떠한 경로로 남한에 오셨으며 수감생활을 하게 되셨습니까.
-나는 신의주 출신으로 평양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상은 공산주의지만 내가 수감된 이유는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전쟁중 이남으로 내려왔다는 것 뿐이다. 전라북도로 전근을 오게 되었는데 때마침 전쟁이 났고 이북출신인 나는 의심을 받아 1950년 12월부터 수감 생활이 시작되었다.
수감 생활을 하신 기간동안의 일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다녀 어떠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고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이승만 정부 시절엔 대구 교도소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형집행이 계속 미뤄지다가 4.19가 터져 장면이 무기로 감형시켜줬다. 20년 동안의 수감생활을 했지만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호감호소에서 10년동안 있었다. 그건 완전히 어거지로 붙잡혀 있던거나 다름없다. (웃음)
비전향 때문에 받은 불이익이나, 수감기간동안에 가혹행위는 없었습니까? 또 중간에 전향과 비전향사이에 갈등은 없으셨는지요.
특별히 전향하라고 물리적인 고통을 당한 적은 없다. 그냥 다른 수형자들과 비슷한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꾸준하게 전향을 위한 권유는 받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신체의 안위를 위해서 전향하고픈 마음이 왜 안 들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남한에 가족도 없었고 나와서 나를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굳이 내 신념을 부정하면서까지 나갈 이유는 없었다. 지금도 그 선택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전향한 동료들과 간혹 만나는 경우는 있지만 그들의 자격지심인지 잘 만나려 하질 않는다.
형기를 마치고 사회생활은 어떠셨습니까?
-처음엔 고물장사로 연명하며 살았다. 특별한 재주도 별로 없고 신분이 이러하니 누가 마음놓고 나를 고용했겠나. 밖에 나와서도 계속 감시받고 살았다. 최근에는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별로 신경안쓰는 것 같았는데 최근에 또 전화가 와서 불같이 화를 냈다. - 감정이 복받치셨다.- 이야기하려면 떳떳하게 만나서 할 것이지 전화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남한테 그런식으로 이야기하나.
요즘은 또 다리가 좋지 않아서 잘 움직이지도 못해 일하기도 힘들다. 그냥 집에서 책읽고 또 조금씩 글을 쓰며 지낸다.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되 정부에서 30만원씩 주는 것으로 근근히 살고 있다.
대전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빈들교회와는 어떤 인연이 있으셨는지요.
- 나는 기본적으로 종교를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빈들교회 사람들과는 잘 알고 지내지만 특별한 인연이 있어 대전으로 온 것은 아니다. 가끔 교회에 나가기는 한다. 하지만 아직 종교를 갖고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이북에 있는 친지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
- 왜 없겠나. 나는 남한에서 사회생활한지 꽤 되었지만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든 개인적인 욕심은 이제 포기한 상태다. 이젠 나이도 많고 몸도 불편하다. 송환을 추진하는 노력이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대강 한시간 정도 이야기를 마치고 난 후 다음에 다시 찾을 것을 약속드리며 집을 나왔다. 약간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80평생을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어려움을 감수하신 것이 존경스러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좀더 내 주변의 이웃을 위해 관심을 가질 것, 나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할 것을 다짐하게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