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전원주택 정보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장
오늘 안소영저 "책만 보는 바보 : 이덕무와 그 벗들의 이야기"를 다 읽었다. 요즘 다른 공부를 하느라 독서할 시간이 좀처럼 없었다. 작년에 읽을려고 책을 사두었으나 오늘에서야 책 읽기를 끝냈다.
<책만 읽는 바보 / 안소영 저, 강남미 그림. 보림, 2008.9 (초판 14쇄). 288p.>
토 일요일은 맘내키는대로 책을 읽기로 했다. 이 책은 이덕무의 전기와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서자들의 차별과 비애는 너무나도 컷다고 본다. 이덕무는 이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세상을 원망하며 마지못해 살아가는 그런 생활이었다. 다행이 책이있어 위로를 받았고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있어서 서로 위안이 되어 주었다. 이런 차별은 조선시대 법전 경국대전에 따른 것으로 서자들을 차별해서 인재를 등용하는 한품서용법, 서얼금고법을 내용으로 한다. 한마디로 과거볼 생각을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서자들은 중인(통역, 기술직, 잡직, 무관)이 대부분이고 기술직 시험에 합격해서 입궐하게된다. 이덕무는 많은 생각을하였지만 다른 재주는 없었고 문관처럼 박학다식하고 백성을 생각했고 문장을 잘 짓는 것 뿐이었다.
다행이 이들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서 규장각 검서관(잡직, 임시직)을 재수한 정조도 한품서용을 깰수가 없었다. 조선후기는 개혁을 절대 바라고있었지만 완고한 양반들과 왕족들의 기득권 다툼으로 물거품이되었다. 정조는 실학자들과 개혁을 논의하고 실천할려고 노력했으나 정조 사후 반대파의 득세로 모두 중단되었다. 정조가 죽은 후 현실 변화에 부응하려는 일체의 노력이 조정에서 추방되었다. 서얼차별 철폐는 부역등 자원이 부족한 일제시대에 일본에의해서 사실상 폐지되었다. 조선은 멸망은 이런 개혁미흠으로 무너진 것이다. 백성에대한 수탈과 가난, 인재를 두루 쓰지못하고 농상공업의 천대로 백성들이 나라 망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양반 계급의 착취,관공서의 가혹한 세금,총체적인 정의의 부재,모든 경제(벌이)의 불안정,비개혁적인 정책 수행,음모로 물든 고위 공직자의 약탈 행위,하찮은 후궁들과 궁전에 한거하면서 쇠약해진 군주,널리 퍼져 있으며 민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미신,그리고 자원 없고 음울한 더러움의 사태에 처해 있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작가로 구한말 일본 중국 중동 등 세계 각처를 탐사한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에서 1890년대 한국의 모습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이런 내면에는 양반제도, 서얼차별, 개혁실패등 원인이 깊이 내재된 것이다. 부끄러운 기록이다.
현대판 서자차별은 1960년대까지도 있었다. 돈많은 부자들이 소위 작은부인(첩)을 두거나(딴살림을 차려준다), 이웃동네 가난한 여자를 건드려서 임신을 시키고 아들만 빼앗아가는 식으로 생활하였다. 본부인 애들은 대학을 보내고 작은 부인 애들은 학원이나 실업계학교를 나와서 장사를하거나 농사를 지었다. 재주가 있는 서자들은 학력차별 없는 공무원이나 직업군인이 되었다. 작은부인 생활을 비참했다. 늘 주위의 눈총을 받았고 주인이 생활비를 안주면 스스로 벌어먹어야 했다. 첩을 거느린 부자들은 첩(작은 부인)의 아들은 대려가고 딸은 안대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본부인의 투기가 심할때는 자식들까지 외면하였고 첩들은 친정에 자식을 맡겨놓고 스스로 직업전선을 헤매다가 (또는 도망쳐서) 재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사등으로 부자가 된경우도 많았다. 요즘은 전설같은 이야기지만 과거 60년대에는 법도 양반사회나 유교사회등을 고려하여 관례로 봐주었던 것같다.
조선시대 이덕무도 그런 서얼 출신이었다. 이덕무는 부드러운 문장가(수필가)이다. 또 강하게 자기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를 인용하면서 주장을 간접적으로 펼친 것같다. 庶子라 각별히 문장과 언행을 조심한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서얼차별은 심했던것 같다.
이덕무는 서얼(庶孼)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성대중(成大中) 등과 사귀고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정조는 한품서용을 들어서 이덕무를 규장각 검서관(학예연구관)으로 임명(규장각 각관의 추천으로 임금이 직접 임명)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필사하고 경연(왕과 신하들의 토론)을 기록하고 책을 간행하는 일을 맡았다. 이덕무는 이런 벼슬을 부담으로 생각하고(황송하게) 각별히 양반들 사이에 몸을 낮추며 언행을 조심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1792년 12월 20일 이덕무의 일기에 나온 글이다.
"퇴청을하고 서재 청장서옥(이덕무의 방)에들어오니 책들을 뽑아드는 것이 아니라 방문을 여는 순간 내 얼굴 빛과 표정으로 마음을 미루어 짐작한 책들이 스스로 몸을 움직여 다가 오는 것만 같다. 허지만 대궐에 들어간 뒤로는 이 방에서 책과 만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늘 아쉽기만 하다. 대궐(규장각)에서도 나는 언제나 책에 파묻혀 지낸다. 책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자료를 모아 책을 만들어내는 '검서(檢書)'는 몹시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책이 들여주는 목소리에 편안하게 젖어 있기보다는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글자라도 틀릴세라 꼼꼼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대궐에서 나는 책의 안과 밖을 지키기만 했을 뿐 책과 마주앉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지는 못한 것같다.
게다가 서자의 신분으로 꿈도 꿀수 없는 벼슬길에 오르게 된 나나 벗들로서는 몸가짐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궐에 들어거려 관복을 갈아입을때마다 감격스럽기는 했으나 허리에 매는 묵직한 띠가 가슴아래를 무겁게 누르기도 했다. 대궐에서 나라 안팎의 희귀한 책들을 대할 때면 반가운 마음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어렵게 빌린책을 놓고 한 글자라도 빠질세라 희미한 등불아래 꼼꼼하게 옮겨적던 지난날이 그리울때도 있다. 그 시절에 종이가 귀해서 나는 늘 글씨를 깨알같이 쓰곤했다. 벗들이 '파리머리문자(승두문자 蠅頭文字)'라 놀리는 나의 글씨는 그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 규장각 검서관: 아마 지금의 '학예연구사'의 역할같다. 조선 정조(正祖) 때 규장각 내에 부설한 실무직이다. 정직(正職)이 아닌 잡직(雜職)으로 서얼이 주로 임용되었으며 5~9품에 해당하는 군직(軍職)을 받았다. 임명 절차는 가문과 자질을 고려하여 전임자 2명이 추천한 다음, 규장각 각신(閣臣)이 다시 3명의 후보자를 갖추어 올리고, 왕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였다. 임명 절차가 까다로운 것은 잡직이기는 하나 정조가 이 직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 검서관에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1749∼1802) 등이 임용되었으며, 흔히 이를 사검서관(四檢書官)이라 부른다. 기본 임무는 규장각 각신을 보좌하고 각종 책을 교정하며 문서를 필사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문신들이 매월 강(講)을 할 때 왕과 신하들 사이에 논의되는 내용을 검서관으로 하여금 기록하고 서명하여 보관하게 하는 등 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참조: 이덕무의 생애
나는 책에 얽힌 이야기를 좋아한다. 서지학자이자 출판학자인 故 안춘근安春根 교수께서 들려주는 책 이야기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책만 보는 바보”는 청장관 이덕무의 평전과 같은 것이다. 특히 이 책의 저자 안소영씨는 이덕무와 관련된 여러 저서를 통독하고 활자뒤에
숨어있는 내용을 상상하여 맛깔스럽게 이덕무를 그려냈다. 각장을 다 읽으면 다음 내용이 궁금하도록 스토리를 전개하여 독자로 하여금 쉬지않고 책을 읽도록 재촉하고 있다. 안소영씨는 글을 맛깔스럽게 쓴는 작가다. 고미숙씨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가난하고 서자로 태어난 이덕무의 젊은날의 생활과 책 밖에 모르며 책을 통해서 친구들을 사귀였던 이덕무의 생활은 슬픔과 애통 그 자체였다.
이덕무는 자신을 “책만 보는 바보” 즉 간서치看書癡라고 말했다. 그는 방에 햇살을 따라 책상을 옮기며 글을 읽었다. “햇살은 내눈을 환하게 해주고 몸을 따듯하게 해 준 것만이 아니었다. 햇살을 받아 환해진 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누런 종이 위에 놓인것은 바둑알 같은 글씨들이 스물스물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는 서자로 과거시험을 볼 수도 없었고 몸이 약해서 무과 시험을 치를수 없었다. 매일매일 좁은 방안에 틀어박혀서 이덕무는 날마다 책속을 누비고 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빳다. 때론 가슴 벅차기도 하고 때론 숨 가쁘기도 하고 때론 실제로 돌아다닌 것 처럼 다리가 뻐근하기도 했다. 못보던 책을 처음 보기라도 하면 하루종일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세끼 밥을 꼬박 챙겨 먹을 수 없는 가난이 있었다. 흉년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두끼는 커녕 한끼만 제대로 먹어도 다행이었다. 아내의
삯바느질로 연명했다. 그는 한 겨울의 추위를 견딜 수 없어서 <漢書>를 이불삼고 <論語>를 병풍삼아 잠을 청했다. 그는 굶고있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더 이상 쳐다 볼 수 없어서 <孟子> 한 질을 팔아서 끼니를 해결하였다. 그는 “맹자께서 양식을 잔뜩 갖다 주시더군, 그 동안 내가
당신의 글을 수도 없이 읽어주어 고마웠던 것일세” 친구 유득공에게 울면서 말하였다. 유득공은 이 소리를 듣고 <春秋左氏傳>을 뽑아 술을 사오라 하여 함께 마셨다고 한다. 유득공 曰 “일년 내 내 맹자와 좌씨의 책을 읽어봐야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는가? 제 식솔 하나 구제 할 수 없는것을” 이라고 친구를 위로하였다.
이덕무와 벗들(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서상수徐常修, 이서구李書九, 백동수白東修)은 남산 아래 백탑(원각사지 10층탑)아래서 모여 토론하고, 책도 교환하고 서로의 정보를 주고 받았다. 서상수는 푼돈을 모아서 이덕무의 집에 서재를 하나 지어주었다. 그 사랑방 이름이 청장관靑莊館이다. 벗들도 이덕무를 청장관이라고 불렀다. 그의 친구 박제가의 성품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미가 불같고 입바른 소리를 잘한다. 박제가 曰 “나는 위아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예의를 지키라는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집안이니 신분을 따지는것이 아닙니까?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이는 것이 당연하다는게 말이됩니까? 그 사실의 옮고 그름이 분명해서 예를 지켜야 할게 아닙니까. 사람의 껍데기만 보고 고개를 숙이면 되겠습니까?” 박제가는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다녔다. 그의 어머니는 늘 옷을 단정히 입고 다니라고 나무라셨다. 박제가 曰 “어머니,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아무렇게나 입고 다녀도 저를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발 쓸데 없이 애쓰지 마십시오!” 그는 사물의 한 면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하였다.
“ ‘붉다’는 그 한마디 글자가지고 온갖 꽃을 얼버 부려 말하지 말라. 꽃술도 많고 적은 차이가 있으니 꼼꼼히 다시 한 번 살펴보아라” 라고 글을
썻다. 그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청나라 손수레를 자세히 그렸다. 우리 백성도 수레가 있으면 얼마나 편리할까를 생각했다.
박제가는 친구 유득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성격이 워낙 안되는 일에 연연하기 보다는 털어 버리기를 좋아해서 도무지 웃음기라고는 없는 우리 얼굴을 웃게한다.” 요즘 말로는 유머가 넘치는 친구이다. “유득공은 마음속에 우물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근심, 걱정도 한번 담갔다 하면 말끔하게 걸러져 밝은 웃음으로 몰라보게 하는 우물 말입니다.” 유득공은 우리나라의 역사 인식을 발해까지 확장 하였고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였다. 저술하면서 많은 사실을 직접 답사 하면서 수집하여 펴낸 책이다. 유득공은 역사이야기 하나하나를 큰 상자에 담아두었다. 이 큰 상자를 ‘보물상자’ 라고 자랑했다. 그의 방은 먼지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는 늘 옷소매 속에 종이와 붓을 넣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색다른 것을 보면 글로 써두었다. 책을 보다가도 기억해 두어야 할 내용이 나오면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모두 이 상자속에 들어있다. 유득공은 그의 어머님을 존경한다고 했다. 대개 서자들은 본가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장사도 못하고 과거에 응시조차 못한다. 비록 공직에 나가서도 등급이 제일 낮은 자리에 선다. 그래서 본가 아버지에대한 원한이 많다. 아버지를 외면하기 마련이다. 대개 독립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배우며 생계를 돌보고 지낸다. 어느 날 유득공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유득공이 한쪽 구석에 놓아둔 책을 가지러 가다가 그만 등잔을 넘어뜨려서 한창 바느질을 하고 있던 치맛감에 기름이 묻어서 얼룩이 졌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치마저고리에 공들인 어머니의 수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고급비단을 물어낼 능력조차 없는게 더 큰 문제였다. 유득공은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었지만 숨이 턱 막혀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왕 엎질러 진거 어쩌겠느냐? 너무 걱정마라” 다음날 어머니는 바느질 맡긴 집을 찾아가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용서를 받고 옷감만큼의 댓가로 바느질 삯으로 갚기로 했다. 그 일로 유득공을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았다. 유득공은 평생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처럼 어떤 위기가 있어도 차분하고 유머 있게 대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그를 감싸주며 다독이던 그날 밤 어머니의 목소리는 일생 그의 가슴에 따스한 피를 돌게 하였다. 무인 백동수(이덕무 처남, 후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완성)이야기, 사대부 양반 출신 이서구 이야기, 이서구는 책을 좋아해서 이덕무 집에서 책을 자주 빌려갔다. 이덕무의 서재(靑莊館)는 오늘날 사설 도서관 역할을 했다. 그 대출 반납에 얽힌 일화도 참 재미있다. 담헌 홍대용 선생 이야기, 박지원 선생 이야기, 정조대왕의 규장각 검서관들 배려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애뜻하고 재미있다. 이덕무(1741~1793)는 1793년 아이들에게 미래를 걸면서 52세의 일기로 죽었다.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사비 500냥을 털어서 그의 유고를 모아 <아정유고雅亭遺稿>를 편찬토록 했으며, 아들 이광규(2대 검서관)는 더 많은 자료를 함께 묶어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71권 33책을 펴냈다. 정조는 젊을 때 중국에 이름을 날린 이덕무와 그 친구들(4가시인)을 기억해 두었으며 1774년 그의 나이 38세때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하였다. 검서관의 녹봉이 일정치 않아서 적성 현감을 겸하게 하여 행정 능력을 펴도록 하고 생계 부족함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박제가, 유득공도 군수와 현감을 겸직하였다.
이덕무와 친구들은 독서광이었다. 서로 책을 빌려보았다. 어려울때 서로 도움을 주었다. 모두 시가의 달인들이다. 이덕무는 일상생활을 시로 썼다. 대개 산수와 왕조의 태평을 글로 썼으나 이덕무는 일상생활의 모습을 시로 그려냈다. 양반들은 혹평을하였으나 박지원은 칭찬을했다. 시가 삶을 떠나면 공상일뿐 허망하다는 것이다. 이덕무와 친구들은 홍대용, 박지원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배웠다.
이덕무와 친구들은 사신을따라 중국을 다녀왔다. 중국에서 보고 배운것을 책으로 펴냈다. 실용적인 백성을 위한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을 읽을때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오로지 저자의 관점에서 읽고 받아들였다. 책에대한 비판 보다는 긍적인 자세로 책을 읽었다. 스승을대하듯 책을 읽었다. 스승과 친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정조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조선시대의 생활상이나 서자들의 고통을 알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