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전리(碌田里) 녹전리는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111호에 의하여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녹전리(碌田里)와 유전리(柳田里)에서 첫 자를 따서 '녹전리'라고 하였다.
원래는 상동면으로 면 소재지가 이곳 녹전리에 있었으나 상동광업소가 개광(1923년)되어 1973년에는 구래리의 인구가 3만이 넘자 녹전리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읍 소재지를 구래리(九來里)로 옮기게 되었다.
녹전리에는 중동면사무소와 녹전국민학교 녹전중학교, 지서, 농협, 우체국 등 관공서가 있다. 녹전리는 법정 4개 리로 294가구 1,106명(1992년 기준)의 인구가 녹전리, 행금벌, 응고개, 시누리, 유전리, 도화동 등지의 자연 부락에서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이목리(梨木里)의 선령약수(仙靈藥水)에서 장구목쟁이를 넘어 녹전리의 장승백이로
갈 수 있었다. 장승은 영월, 하동, 태백으로 가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길손들이 지나 다니는 교통의 중심지로 행인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 장고목재 31번 지방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람들은 장승배기에서 장고목재(장구목쟁이)를 넘어 선령약수가 있는 이목리를 지나 영월쪽으로 걸어 다녔다.
이곳은 양쪽 산마루가 볼록하고 허리가 잘록한 장고(杖鼓)의 목처럼 생긴 고개이므로 '장고목재'라 한다. 일설에는 옛날에 장군이 넘어온 고개라는 얘기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이야기다. 6.25때 녹전리의 청년 방위군이 이곳에서 북괴군을 맞아 싸우다가 10여명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국민학교 다닐때 여름날 더우면 장고목쟁와 어른목욕소라는곳에서 물장구치며 더위를 식히던 기억들이 새록 새록난다야 특히 이목리 친구들은 더 생각날것이다.
≫ 녹전리 서낭당 녹전중학교 앞에 있으며, 수령이 300년의 느티나무 신목(神木)이 있다. 단종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는 마을 사람들이 단종 대왕의 영정을 모시고 해마다 당제(堂祭)를 지냈으나 1972년 새마을운동 때 서낭당은 불태워 졌다.
이곳 서낭당은 소를 잡아 제물을 쓸 정도로 큰 당고사를 지냈으며 마을 사람들의 화합의 마당이 되기도 하였다.
어릴때 망우리(쥐불놀이)돌리고 놀다가 밤12시에 고사를 지내는데 그때가면 떡을 얻어 먹은 기억이 난다
≫ 녹전 경찰전적비(옛날 우리 초등학교때는 순경묘지라고 불렀음) 지금은 녹전4리 음지마을에 경찰전적비가 있지만 옛날에는 31국도 삽작 모레이를 돌아가면 도로가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있었지 국민학교다닐때는 계단이 무척 길고 힘들게 올라가 현충일 야생화를 조화로 순경묘지에 갖다놓고 행사에도 참석했었지 그쪽에 신영희동창, 노춘옥동창, 장명보 동창이 살았었다
강원 경찰의 최대 공방전이었던 녹전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한 비석이다. 6.25 당시 영월은 화력발전소, 상동중석광산, 마차광업소 등이 있었으므로 이를 사수하기 위해 김인호(金麟鎬) 총경이 파견되었다.
그 당시 상동에 주둔하고 있던 전경 제 1중대장 김해수(金海洙) 경위는 50명의 대원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영월화력발전소에 집결하려고 상동을 출발하여 솔치고개를 넘으면서 북괴의 척후병 2명을 사살하고 녹젼교 부근에 집결해 있는 1개 소대를 격퇴시켰다. 이어서 후방에 있는 적 1개 대대병력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숫적으로 불리한 경찰은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우리 쪽에서도 김해수 대장과 석상익(石商益) 경위 등 24명이 7월 7일 전사하고 나머지 경찰들도 대부분 중경상을 입은 대격전이었다.
≫ 행금벌 녹전리와 응고개(鷹峴) 사이로 행금벌 휴게소가 있는 마을이다. 태백산의 어평에서 발원하는 옥동천(玉洞川)은 천평리(川坪里)의 치랭이(칠랑이)골과 내덕리(內德里), 덕구리(德邱里)를 지나 솔고개에서 급경사를 이루며 행금벌 앞으로 흘러간다. 구한말과 일제때부터 천평리 상류인 어평(御坪)은 사금(砂金) 채취로 유명한 곳이며, 경북 봉화(奉化)와 강원도 상동(上東)의 경계인 덕구리(德邱里)의 금정(金井)도 금광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은 솔고개에서 급회전을 함으로 행금벌 앞에는 사금이 섞인 모래가 많이 쌓이게 된다. 70∼80년 전만 해도 이곳은 사금을 채취하여 행금질을 했던 벌판이었으므로 '행금벌'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옛날순경묘지 밑 음지마을 건너가는 강아래 쪽에 금광을 개발하던 굴이 있다.
일설에는 옛날 의병들이 이곳을 행군(行軍)하여 지나갔으므로 '행군벌'이라 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후 1923년에 상동중석광업소가 생기면서 중석 가루가 상동천으로 흘러내려 '보크'로 이것을 채취하여 광산에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패재의 공해를 막기 위해 1973년에 패재댐이 완성됨으로서 매일 1만 m²의 중석가루가 섞인 광물이 맑은 물로 변하게 되었다. 이연자,장병철 동창 집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 용바우소 행금벌 앞에 있는 소에 용머리 모양의 바위가 있다. 옛날 이곳에는 용으로 승천한다는 큰 이무기가 살았으므로 '용바우소'라고 불렀다. 지금도 수심이 깊고 항상 맑은 물이 고여 있는 곳이다. 어릴때 목욕하던 곳인데 무척 깊었지
≫ 응고개(鷹峴) 응현동(鷹峴洞)에서 솔고개로 질러가는 옛길로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사람의 정수리(머리 끝 부분)같이 뾰족하고 높은 산봉우리가 이곳에 있으므로 우리말로 '수리뫼'라고 불렀다. '수리'란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킨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수뢰뫼'의 '수리'는 '독수리'라는 뜻으로 차음화되어 '응고개(鷹峴)'로 변하게 되었다. 신재금 ,윤금화,살았고 김영래동창은 그고개를 넘어 좀더 가면 시누리라는 동네에 살았다
≫ 유전(柳田) 녹전초등학교 뒤쪽에 있는 마을로 하유전(下柳田)과 상유전(上柳田)이 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버들 방천이 많이 있다.
옛날에 이목리(梨木里)와 유전리 일대의 버드나무나 싸리를 이용하여 키나, 고리짝을 만들던 천민 집단 구역인 이목소(梨木所)가 이웃 마을인 이목리에 있었다.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들밭골, 버들아치'라고 했으나 한자식 표기법으로 '유전(柳버들유자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 『梨木所, 在郡東五十里』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녹전리와 유전리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서 '녹전리'가 되었다. 녹전초등학교를 지나 유전으로 가는 도로 좌측에 단종 대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유전리 서낭당이 있었다.
녹전과 응고개 서낭당은 1972년 새마을운동 때 미신 타파 정책의 일환으로 행정 기관과 새마을 지도자들에 의해 불태워졌지만 이곳 유전리는 당집을 불태운다는소문이 나자 마을 노인들이 서낭당에 기거하면서까지 반대하여 소실되는 것을 막았다.
유전리 서낭당은 태백산 산신령이 된 단종 대왕을 모시고 있다.
김영숙,김상철,장봉숙,최봉순,윤복기,박복수,진완갑동창이 살았었지
≫ 도화동(桃花洞) 조선 후기 정감록 같은 비기서를 신봉하는 강릉(江陵) 최씨 일가가 도화락지형(桃花落地形)의 명당인 이곳을 찾아와서 생활의 터전을 잡은 곳이다.
밖에서 보면 마을 입구가 좁고 사람이 살지 않는 동네 같으나 그 안은 넓고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고 6.25때도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즉 도화락지형국(桃花落地形局)의 명당이므로 '도화동'이라고 했는데 현재 삼성석회 광업소가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유전리에서도 갈 수 있으나, 자동차로 가자면 시누리를 지나 31번국도 좌측으로 들어간다.
함박꽃나무가 많았다
≫ 적벽(붉은 뱅이) 하유전과 상유전 사이에 있다. 해가지는 저녁 때가 되면 적벽산 주변의 암벽이 붉은 색을 띄므로 '적병' 또는 '붉은 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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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고향의 뿌리를 아는것도 중요하지요. 모두 공부해 봅시다.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창호후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