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에는 우리 나라 최대 최고임을 자부하는 우리 화학회가 2년이 넘게 준비했던 "창립50주년기념 세계 한민족 화학학술대회"를 무사히 마쳤다. 4,500명이 넘는 회원 중에서 1,600여명이 등록하고, 874편의 주옥같은 학술논문이 발표되었으며, 미국, 유럽, 일본, 중국, 우즈베키스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화학자를 비롯하여 70여명의 외국 손님까지 참석한 성대한 잔치였다. 미국, 중국, 일본의 화학회장도 직접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고, 세계적인 석학 일리야 프리고진 교수의 강연도 있었다. 화학회의 행사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상당히 높았고, 미국 화학회에서는 홍콩에 주재하는 기자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창립기념 행사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화학회의 위상에 걸맞는 알찬 행사였는지에는 확신이 없다.
막대한 예산과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치렀던 성대한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는 단순히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를 자랑하기 위한 것만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창립 50주년을 계기로 앞으로 곧 다가올 60주년과 75주년, 그리고 100주년을 준비하는 비전을 제시하고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기회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행사의 작은 문제점이라도 들춰 내보고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성대하고, 더 의미 깊은 창립 60주년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그렇다는 뜻이고, 화학회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도 그런 자기 반성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행사의 뒷마무리가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화학회 역사에 기리 남아야 할 중요한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행사의 준비와 진행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겨질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행사에 대한 회원들의 평가가 체계적으로 모아질 가능성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2년 이상을 애써 왔던 "기념사업위원회"도 행사가 끝나자마자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이제 60주년 행사는 과거의 관행과는 상관없이 깨끗한(?) 백지 상태에서 치를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50주년 기념행사가 단순히 화학회가 먹은 나이를 자축하는 수준에서 그쳐버린 것 같아서 아쉬운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어렵고 힘든 여건에서 국내 최고의 학회로 우뚝 솟게 된 화학회의 역사를 돌아보는 프로그램도 없었고, 그렇다고 화학회의 앞날에 지표가 될 회원들의 아이디어를 모으는 프로그램도 없었던 것 같다. 50주년 기념행사가 화학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급속한 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로 활용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2년 전에 마련했던 "화학이 지구를 더 푸르게"라는 50주년 구호도 "화학세계"의 표지를 장식하는 수준에서 머물러 버렸다. 그나마도 프리고진 교수 덕분에 화학회의 존재를 우리 사회에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었던 점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중국, 일본 화학회장과의 좌담회도 기획을 조금만 신중하게 했더라면 우리 사회에 화학의 중요성을 알리는 좋은 행사가 될 수도 있었다.
기념사업회 사무진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애썼지만, 회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기념학술대회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 이외에는 기념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 같다. 하루아침에 바쁘게 준비한 행사도 아니었는데 왜 우리 회원에게조차 행사의 중요성과 내용을 제대로 알릴 수 없었는지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기념사업회에 무려 11개의 위원회를 설치하였지만, 기념행사에 대한 전반적인 구상도 없었고,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의 선정도 즉흥적이었던 때문인지 대부분이 기념행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점도 문제였다. 공식적으로는 화학회 창립 50주년 행사의 일부인 CHEMRAWM을 비롯한 다양한 IUPAC 국제학술대회도 실질적으로는 학회의 50주년과 연계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분명히 개선되어야 할 문제이고, 기념사업회가 화학회의 집행을 맡고 있는 간사진과의 원활한 협력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창립 기념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소의 총회 및 연회를 열던 날도 아닌 "부처님 오신 날"을 선택한 무감각이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연세대학교 어느 교수님의 말씀에 웃을 수밖에 없었고, 어려웠던 시절에 화학회를 위해서 노력했던 원로 회원이 단순한 방관자로 기웃거리시다가 돌아섰다는 이야기도 아쉬웠으며, "화학회 50년사"가 아직도 뼈대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사정도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 화학회의 행사가 몇몇 사람의 희생으로만 치러질 수 있는 한계는 지나갔다. 세계 속의 화학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회원이 화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고, 화학회의 업무를 직접 담당하는 회원은 더욱 철저한 책임감과 희생 정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李悳煥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