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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KBS 성우 23기로 경력을 시작한 구자형 성우는 그 동안 <마법소녀 리나>의 제로스나 <슬램덩크>의 정대만, <하얀마음 백구>의 백구, 그리고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 등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널리 알려졌다. 그런 그가 최근 한국에서 처음으로 더빙 방송된 일본 드라마 <화려한 일족>(XTM, 목요일 밤 11시)의 주인공 만표 텟페이(기무라 타쿠야)의 목소리를 맡았다. 일본 방영 당시 경제 부흥기 일본을 재현한 화려한 세트와 인기 배우들의 캐스팅으로 화제가 된 이 작품은 이미 한국에도 많은 팬들이 존재하는 드라마로, 특히 기무라 타쿠야의 팬들은 더빙 방송에 대해 지지와 비판을 동시에 보내기도 했다. 구자형 성우가 말하는 성우라는 직업과 <화려한 일족>, 그리고 더빙 방송과 자막 방송에 대한 의견들을 들어봤다.
바뀐 미디어 환경이 성우도 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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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화려한 일족>에서 기무라 타쿠야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구자형: 사실, 아내가 '기무타쿠'의 팬이다. (웃음) 나는 팬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일본 드라마가 거의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올 즈음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해서 보기도 했다. 기무라 타쿠야의 작품은 <엔진>과 <프라이드> 정도를 봤는데, 그래서 처음 제의가 들어왔을 때에는 솔직히 ‘왜 나한테?’라는 기분이었다. (웃음) 그리 많이 접하진 않았던 일본 드라마에서도 일본어는 고유한 뉘앙스가 있고 개성이 드러나더라. 특히 기무라 타쿠야는 고유한 어떤 억양이나 느낌이 있는데, 그게 내 목소리와 딱 맞는다는 생각은 못했기 때문이다.
Q : 그러면 막상 연기를 하면서 주목했던 지점은 뭔가. 기무라 타쿠야의 한국 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순 없었을 것 같다. (웃음)
구자형: 그래서 처음에는 참 어색했다. (웃음) 그래도 연기하면서 집중한 부분이라는 게 있긴 한데, 그건 크게 보면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 성우라는 직업에 대한 개념이 바뀐 부분과 상통하는 것 같다. 사실 원작의 배우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성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비슷한 느낌의 성우를 찾게 되는 거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그렇게 생각해도 딱 어울리진 않았으니까, 어쨌든 욕은 먹겠구나, 싶었다. (웃음) 대신 접근방법을 좀 바꿔보자고 생각했다. 기무라 타쿠야라는 인물을 지우고 작가나 감독이 그리려고 한 <화려한 일족>의 만표 텟페이에 집중하자. 그러면 될 것 같았다. 신념과 야망을 가지고 한 시대를 뚫고 나가는 젊은이,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자고 마음먹었다.
Q : 지금까지 애니메이션도 많이 작업했다. 많은 팬들이 아직도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나 <마법소녀 리나>의 제로스나 <바람의 검심>의 켄신으로 당신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 같은데,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구자형: 형식이 다르니 차이야 당연히 있는 것 같다. (웃음) 그런데 조금 더 나누자면, 애니메이션도 미국과 일본, 유럽 쪽 작품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 애니메이션은 자체제작을 빼면 거의가 일본 애니메이션인데, 원작이 있는 작품들이 많다. 원작의 캐릭터를 보던 사람들에게 실제로 목소리를 들려주며 성우의 개성을 함께 표현해야 하는 게 이 직업의 특성이라면 특성인데,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원작의 성우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대신 원작 코믹스를 보면서 내가 이해하고 해석하는 부분을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한 것 같고. 나 같은 경우엔 연기할 때 그 캐릭터 속에 나를 집어넣는 편인데, 그게 제대로 하는 연기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도 그렇게 배웠고. 그런데 실사 영화는 조금 다르다. 예전에는 성우라는 직업은 또 다른 창조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미디어 환경이 변하면서 그런 생각도 변하게 되더라. 쉽게 말해 예전에는 <600만불의 사나이>나 <원더우먼>, <맥가이버>의 원래 목소리를 알 길이 없으니 성우들이 캐릭터를 나름대로 재해석하며 제 2의 창조까지도 가능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게 어디 가능한가. 그래서 연기에 제약을 좀 받더라도 원작의 느낌, 배우의 감정들을 우리말로 쉽게 전달하는 서비스도 필요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됐다.
<하얀마음 백구>가 가장 인상 깊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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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성우라는 직업이란 뭘까?
구자형: 아까 말했듯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거창하게 얘기를 하자면 번역자의 역할을 하는 부분도 있고, 자기가 해석하는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부분도 있다. 총괄적으로 그런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직업을 단순히 테크닉적인 부분으로 얘기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단순히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쉽고. (웃음)
Q: 92년에 KBS 성우로 데뷔했는데, 처음 성우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가 궁금하다.
구자형: 성우가 되고 나서 성우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사실은 오디오 엔지니어, 음악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는데, 누군가 성우 시험을 보게 해줬다. 말 그대로 원서도 내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그러니 가서 시험만 보라고 했다. 특별히 단박에 뽑힐 정도로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한 건 아니라서, 아마도 내가 서울에서 자라서 특별히 사투리라든지 독특한 억양이 없어서 뽑힌 게 아닐까, 생각한다. (웃음) 그래서 성우가 되고나서 보니, 아나운서와는 다르게 ‘전달’이라는 부분에서 아나운서처럼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 목소리로만 감정을 컨트롤하며 연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험에 붙고 나서야 오히려 성우공부를 열심히 했다.
Q: 첫 작품이 뭔지 기억하고 있나.
구자형: 보통, <시카고 메디컬>이라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흑백 러시아 영화였다. 제목이 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단역이었다. (웃음) 성우가 되는 방법이라는 게 그때는 KBS와 MBC의 공채 밖에 없었는데, 보통은 의무적으로 3년 전속 기간을 가진다. 그 기간 동안 KBS는 라디오 드라마만 맡았다. 전속이 끝나면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게 된다. 그래도 KBS 공채 출신이니까 성우를 뽑지 않는 SBS와 KBS에서 일을 많이 했다.
Q: 개인적으로 인상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것들인가.
구자형: 사람들이 스파이크나 제로스를 좋아하는데, 팬들 중에 애기 엄마들도 있다. (웃음) <세일러 문>도 기억나고 <텔레토비>도 기억난다. 물론 캐릭터를 꼽자면 스파이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하얀마음 백구>가 그래도 인상에 남는다. 자체제작 작품이기도 하고, 그래도 타이틀롤이었으니까. 최근에는 <건 스워드>의 연기를 사람들이 봐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건 정말 나한테서 들을 수 없는 연기인데. (웃음) 마음내키는 대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서 그런데, 이게 위성으로만 나와서 그런지 반응이 별로 없더라. 빨리 딴 데서도 나오면 좋을텐데. 지금까지 연기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아직 남아있다.
성우의 권리가 소외되는 방송환경이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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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성우들은 저작권과 관련해서 별도의 계약을 하나. 어떤 식으로 계약이 이뤄지는지도 궁금하다.
구자형: 그게 참, 답답한 부분들도 있는데... 더빙이라는 게 작품을 수입해서 2차로 창작하는 개념이다. 원작을 사와서 더빙을 입히면 그게 2차 저작물이 되는데, 그 권리는 해당 방송사가 가지게 된다. 원작에 대한 저작료는 원작자에게, 거기에 대한 음성 판권은 더빙한 방송사가 가지고 있다. 특히 애니메이션이 심한데, 저작인접권이라고 성우의 권리가 있긴 하지만 그걸 따로 계약하지는 않는다. 예전에 그런 조항을 넣으려고 총대를 멘 것처럼 된 적도 있었는데, 안되더라. 성우들은 편당도 아니고 한 번에 몰아서 받는다. 일본의 경우는 그나마 저작인접권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는 편이라서 사실, <건담>의 성우들이나 <도라에몽>을 연기한 성우들은 그렇게 수입을 낸다.
사실 일본이나 한국이나 큰 환경의 차이는 없는데, 가장 중요한 게 그런 부분들이다. 다큐멘터리의 더빙도 마찬가지고 광고는 말할 것도 없다. 계약할 때 그와 관련된 조항이 있긴 하지만 참 표현이 애매하다. ‘방송물에 있어서는 특약이 없는 한 제작자가 소유권을 가진다’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특약이라는 건 결국 다시 계약서를 쓴다는 의미라서 그런 얘기를 하면 어느 정도의 추가 지급만 되고 마는 경우가 있거나 아예 그런 얘기를 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EBS 정도만 그런 계약서를 쓰고 있지, 사실은 우리들은 아직도 대부분 구두 계약을 한다. 케이블TV가 나왔을 때는 좀 달라지겠다 싶었는데, 크게 달라지지 않더라. 그런 게 좀 가슴이 아프다.
Q : 요즘에는 특히 인터넷으로 원작을 쉽게 접할 수 있으니 그걸 TV에서 방영할 때 더빙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몇 년 전에도 외화는 자막방송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구자형: 그게, 내 생각엔 오리지널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라는 생각도 한다. 더빙에 대한 반감이 강한 건 영어에 대한 강박증이라는 부분과도 연관되는 것 같고. 그런데 결국 아까 말했듯이, 더빙이란 서비스의 일종이다. 원작을 그대로 이해하는 건 2개 국어 사용자가 아닌 한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다. 지상파의 경우는, 자막 방송보다 더빙 방송이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으니 지금은 돈을 좀 들여서라도 더빙 방송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거기에 지상파 방송이든 공영방송이든 결국 국민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고. 전에는 케이블 채널들도 더빙을 했지만 IMF 이후에 전반적으로 더빙하던 분위기가 사라진 건 사실이다. <화려한 일족>은 이런저런 비판들도 있지만, 더빙과 자막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빙 방송은 선택의 폭을 넓힌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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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프리랜서라면 시간 관리가 어려울 것 같은데.
구자형: 이런저런 일들도 있어서, 나는 이제 다품종 소량작업을 하는 편이다. (웃음) 요즘엔 주로 다큐멘터리나 기업 홍보물을 작업하고 있다. 방송사에서는 애니메이션의 고정 캐릭터 같은 걸 맡기도 하는데, 다음 주부터 <나나>를 시작한다. 보통 성우들은 경력 10년을 기점으로 급이 나뉘는데, 최근 프리랜서들은 경력 5년 차에 집중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경력이 높아질수록 일거리가 줄어드는 기이한 형태다. 실제로 한창 활동하던 분들 중에 이민 가버린 분들도 있다. IMF 이후에 수입이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줄어들었으니까. 회사에서는 더빙을 투자비용으로 생각해서 제작비를 줄이려고 그러는데, 그보다는 퀄리티를 고려하는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프리랜서라는 게 그렇다. (웃음) 시간 관리도 중요한데, 요즘엔 어떻게든 9시부터 6시까지 하루 일과를 정리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일과가 끝나면 운동도 좀 하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