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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남 하백원의 태생지에 대한 지리와 지도 활용방안
향토지리연구소장 ? 문학박사 김 경 수
- 차례 -
1. 머리말
2. 二西面의 地理 槪觀
3. 野沙里의 야사마을 地誌
4. 地圖 活用 方案
1. 머리말
하백원의 호 규남(圭南)은 무등산 정상 천왕봉(1187m) 남쪽 해발 950m쯤에 꼿꼿하게 서 있는 “규봉의 남쪽이 고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규남 태생지는 야사리(들모실) 193번지로 규봉에서 바라보면 동쪽에 해당한다. 탯자리는 무등산 동사면 옴팍지의 서출동입(西出動入)한 냇물의 수구(합수?물목)에 해당한 곳으로 양지바른 뜻 그대로 명당이다.
진주하씨 하진성과 장택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규남이 성장한 야사리는 산자수명한 자연과 더불어 자드락 다랑이 논을 일궈 적당한 경제력도 지닌 곳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인 조건은 넉넉한 살림을 아니지만 여러 분야에 걸쳐 1만여 권의 책을 구해 읽을 만한 배경이 되었다. 더구나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석파 나경적의 도움과 영향을 받게 되었다.
동국지도와 만국전도와 함께 오늘날 양수기와 같은 자승차와 벽시계와 닮은 자명종도 발명했던 하백원의 업적은 향토에서 구한 아이디어가 밑바탕이 되었다는 가정 아래 이서면 야사리 일대에 대한 지리탐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우선 이서면 지역을 개관하고, 야사마을에 깃들어 있는 지리적인 내용을 지지적(地誌的)인 방법으로 언급하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은 곧 규남의 연구 성과물을 우리와 후배들이 어떻게 활용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가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그간 소개된 규남에 관한 자료를 기본으로 각종 고지도 ? 고문헌 ? 향토지를 검색한 뒤, 현지답사를 통해서 얻은 제보로 확인한 사실을 정리했다. 수행 과정에서 귀한 정보를 제공해준 주민들과 출향인들이 많았다. 마을회관에 걸려있는 하장호가 1999년에 그린 <서기 1945년 해방전 야사리전도>는 광복전후 경관을 복원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2. 이서면의 지리 개관
1) 위치와 영역
이서면은 광주시내에 보면 동쪽, 화순읍내에서 보면 동북쪽에 위치한다. 동쪽은 옹성산(573m)과 함께 있는 적벽산이 동복면과 갈려 있고, 서쪽은 호남정맥의 중심이자 가장 높은 봉우리인 무등산이 솟아 광주와 가름한다. 남쪽은 안양산(853m), 둔병재(396m), 화담봉(511m), 갈두재, 별산(690m)으로 이어진 능선이 화순읍 수만리, 동면 국동리, 청궁리, 마산리, 경치리와 접한다. 최남단은 서리 남쪽 묘치고개(225m) 근처이다. 북쪽은 무등산 자락이 북동으로 뻗어 북산(777m)에 못 미쳐 동편 상천골을 따르다가 구룡고개를 거쳐 방아재(271m)와 귀재로 이어지면서, 담양군 남면과 땅금을 대고 있다. 창랑천을 따라서 북면 임곡리, 와천리, 다곡리와 구분되며 적벽으로 경계가 이어져 있다. 사방으로 산지가 둘러싸여 있는 두메골로 영역의 모양을 그리면 동서방향이 길쭉하되 가운데가 잘록한 장구형이다.
하천은 무등산과 안양산이 있는 영평리, 인계리, 안심리에서 발원해 동으로 흘러 면사무소가 있는 야사리에서 이서천의 이름으로 합류해 동복댐으로 유입된다. <대동여지도>에는 이 냇물을 영신천(靈神川)으로 표기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영신사동에 철장(鐵場)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가장 깊은 계곡에 역사성을 반영한 듯 하다. 건설교통부와 한국수자원공사에서 펴낸 <우리 가람 길라잡이>에 따르면 이서천의 기점을 인계리쪽으로 보고 563번지에서 도석리 동복천까지 유로연장 13.43㎞, 유역면적 29.6㎢이다. 영신천은 장복천의 이름으로 영평리 858번지에서 이서천과 만나는 보월리 월정까지 유로연장 9.08㎞, 유역면적 6.91㎢이다. 안심천은 안양산 동편 안심리 153번지에서 야사리까지 유로연장 7.62㎞, 유역면적 10.14㎢이다. 1/5천 지형도를 통하여 곡선자로 확인한 결과 영평리쪽의 유로가 최장으로 장불재 동편 800m고도에서 야사마을앞 다리까지 7.7㎞로 인계리 발원지보다 1.3㎞가 길었다.
북면 백아산과 담양군 남면에서 흘러온 시내를 고산자는 이호천(耳岵川)과 배존천(裵存川)이라 했는데, 창랑리에서 동복댐에 유입한다. 이 댐에 합수된 물은 적벽을 굽이돌아 남쪽에서 동복천 명칭으로 주암댐으로 합류한다. 농토는 장불재에서 발원한 영신천을 비롯한 계곡수가 좁은 충적지를 따라 계단식 들이 형성되어 있고, 과거 내서면 지역은 모두 수몰되어 평야가 매우 좁아 졌다.
동복댐은 1차 공사를 1968년부터 1970년까지 하여 만수능력 360만톤 규모였다가 1981년 2차 공사 때 만수능력 670만톤으로 늘었났다. 1984년 3차 공사로 댐높이가 19.5m에서 44.7m로 높아져 만수능력 9,200만톤, 1일 취수량 32만톤, 수몰면적 6.6㎢에 달했다. 이로 인하여 이서면 지역은 서리, 월산리(월평?장월), 보산리(보암?난산), 장학리(장항?학당), 창랑리(창랑?물염), 도석리(석림?석보?전도)가 물속에 잠기게 되어 587가구 2,654명이 이주하게 되었다.
표1. 동복댐 확장시 리별 수몰현황(㎡)
리명 |
전 |
답 |
대지 |
임야 |
도로 |
하천 |
구거 |
제방 |
잡종지 |
유지 |
묘 |
계 |
가구 |
인구 |
계 |
99,302 |
110,734 |
15,325 |
254,808 |
39,402 |
11,497 |
1,561 |
374 |
426 |
37,443 |
550 |
571,422 |
587 |
2,654 |
서리 |
32,177 |
9,610 |
|
15,796 |
9,246 |
43 |
|
|
|
835 |
93 |
67,800 |
|
|
월산 |
13,737 |
566 |
|
56,932 |
4,047 |
|
1,122 |
|
|
1,320 |
377 |
78,101 |
36 |
131 |
보산 |
4,054 |
1,028 |
179 |
7,898 |
5,167 |
172 |
40 |
374 |
|
35,288 |
|
54,200 |
142 |
773 |
장학 |
12,260 |
8,761 |
3,842 |
89,798 |
945 |
344 |
|
|
426 |
|
17 |
116,393 |
71 |
300 |
도석 |
15,908 |
38,641 |
8,372 |
33,966 |
8,608 |
558 |
|
|
|
|
|
106,053 |
153 |
621 |
야사 |
|
11,018 |
|
93 |
7 |
105 |
|
|
|
|
|
11,223 |
|
|
창랑 |
13,913 |
23,623 |
757 |
24,133 |
3,611 |
5,237 |
141 |
|
|
|
63 |
71,478 |
75 |
309 |
와천 |
7,246 |
9,764 |
2,175 |
24,679 |
6,819 |
1,802 |
258 |
|
|
|
|
52,743 |
110 |
520 |
임곡 |
|
6,523 |
|
215 |
|
3,031 |
|
|
|
|
|
9,769 |
|
|
다곡 |
7 |
1,200 |
|
1,298 |
952 |
205 |
|
|
|
|
|
3,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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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화순군사(1993)>
수몰 전 이서지역은 산수가 좋았다. 물염정과 적벽같은 빼어난 경치를 자아내는 곳부터 우람한 산세가 반영되어 장군을 빗댄 풍수덕담이 전하고 있다. 안심리에는 장군대좌형 명당이 있는데 광대바위 언저리로 보며, 월산리 진들에서 도석리로 넘어가는 고개도 ‘장군재’라 칭한다. 인계리 송계에서 담양 남면 무동촌으로 넘는 구룡고개에는 구룡쟁주(九龍爭珠)형 길지가 있다고 전해진다.
길을 보면 신작로가 없던 시절은 둔병재를 넘어 화순읍과 오가고, 장불재를 넘어서는 광주와 왕래했다. 갈두재와 묘치고개는 동면으로, 방아재는 담양 남면으로, 고소치는 동복면으로 다니는 주요 통로였다. 도석리 석보에는 ‘방석원(方席院)’이란 원집이 있어 길손의 쉼터 역할을 했다. 1872년께 전라도지도 중 <동복현지도>를 보면 이 곳에 장터와 함께 사창(社倉)도 그려져 있어 요충지로 보인다(그림1). 보월리 보월마을 윗쪽에도 원말(역말)이 있었고 뒷등성이에 ‘마방등’이란 지명이 전하고 있다. 현재는 남쪽 묘치고개에서 군도 제21호선을 따라 싸리재를 넘어 야사리, 도석리, 방아재에 이르고, 군도 14호선은 야사에서 서쪽으로 보월리에 이른다. 군도 3호선은 남서쪽 갈두재에서 안심리에 이르고, 담양군 남면 무동리에서 인계를 경유 보월리로 들어오는 차길은 모두 포장되어 있다. 군도4호선은 북면 임곡리에서 이서 창랑리 물염정을 경유, 북면 다곡리와 이천리로 이어진다.
면적은 화순군 13면 중 11위로 전 3.3㎢, 답 3.7㎢ 임야 34.9㎢를 포함 52.69㎢이며 인구는 2004년 11월말 현재 주민등록상 호구는 508세대 1,036명이 거주하며 남자는 512명 여자는 524명이다. 현재 면소재지인 야사리를 비롯해 서리, 창랑리, 보월리, 인계리, 영평리, 안심리, 갈두리, 월산리, 도석리, 장학리, 보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월산리, 도석리, 장학리, 보산리는 동복댐 수몰지구에 편입되었다(그림2).
2) 자연환경
무등산 천왕봉은 북구 금곡동과 화순 이서면을 가르고, 영산강과 섬진강의 분수계를 이룬다. 백제 때 ‘무등산가’라는 노래가 있었다고 하니 그 이름은 유구하다. 먼데서 바라보면 무덤 같고, 가까이 다가서면 돌이 무수하여 ‘무덤산’과 ‘무돌산’로 부르다가 한자로 옮기면서 ‘武珍’과 ‘無等’으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둥그런 봉우리가 부모님처럼 포근함을 주고, 초가지붕 같은 모습으로 보여 친근감을 더해 광주시민과 화순군민들의 지주가 된 무등산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중생대 백악기(9천만년 전쯤) 화산활동으로 그 골격이 잡혔다가, 신생대 제3기에 현재 모습인 돔(dome) 모양의 꼭대기가 다듬어졌다. 제4기의 주빙하 환경을 거치면서 ‘너덜겅’이라고 부른 돌바다가 사면에 나타나기도 하고, 얇은 표면 흙이나 초목에 덮여 숨어있기도 한다. 영평리의 지공너덜과 인계리의 너덜이 그 본보기이다.
능선에 곧추 세워져 있다는 의미로 불려진 ‘서석 · 입석 · 규봉’이란 돌기둥은 매우 신비스럽고, 비수와 같다고 표현한 분도 있다. 깊은 땅속에서 겉으로 나온 바위는 수직방향으로 금이 나 있었다. 그 틈새로 물이 스며들어 얼게 되면 부피가 늘어나면서 석주벼랑이 형성되는데 학술용어로 ‘주상절리(柱狀節理)’라고 부른다.
긴골재(長佛峙)에서 석양에 동쪽을 바라보면 이서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영신천 골짜기 밑으로 옴팍지(盆地)가 형성되어 있다. 이 분지의 과거모습을 찾아본다. 고경명은 1574년 무등에 올라 영신골에 대한 소감을 <유서석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광석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송하대가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비스듬히 뻗은 산등성이를 타면 영신골이다. 그 곳으로 가는 오솔길이 꼬불꼬불 줄을 그어 놓은 듯해 소동파의 시에 이른 ‘길은 산허리를 감고 삼백굽이를 돌았구나(路轉山腰三百曲)’하는 구절이 떠오른다. 영신골에서 방석보에 이르는 사이 마을들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쓸쓸하고 고요하다. 이 곳 산골의 주민들은 띳집을 짓고, 돌밭을 일구어서 먹고 살며 개나 닭을 치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중국 무릉의 주진촌도 여기에 미치지 못할 듯 싶다. 동네를 지나 시냇물을 따라 남으로 500궁(1궁=6척)쯤 가노라면 바위가 첩첩이 쌓인 위에 울창한 소나무가 덮여 있다. 그 사이는 실낱같은 한 가닥 길이 나 있으니 사람들이 겨우 오가는 길이다.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김현수의 <무등산 산지지형 특색>에서 언급한 동사면에 대한 내용을 해석해 본다. 무등의 동사면은 대체로 직선상의 사면으로 약 350m 해발고도에서 경사변환대가 나타난다. 그 이상 높은 사면은 경사 22° 이상의 급경사를 이루고, 좁은 골짜기가 파여 있으며, 소나무와 낙엽활엽수림이 덮여 있다. 그 이하에서는 경사 10° 이하의 완경사를 이루고 6~7m 정도의 사면성 퇴적물(Colluvium:사면 이동에 따라 움직인 물질이 분급이나 층리가 불량한 상태로 기반암과 부정합면을 이루며, 덮여 있는 피복물을 말함)이 덮여 있다. 이 덮인 면은 현 하천에 의해 깊은 골짜기로 개석(開析)되어 있다. 완경사지는 논, 밭, 과수원 등 농경지로 이용하고 있다. 남동쪽의 950m에서 단절면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주상절리와 인계 너덜이 넓게 분포한다. 700~800m 사이에는 곳곳에 평탄면이 나타나고 있으며 억새군락이 나타난다. 그 중 이서분지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그림3.사진1).
이서분지는 무등산 동사면의 아래에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분지이다. 서부는 무등산이 있고, 동 ? 남 ? 북부는 낮은 산지와 구릉으로 쌓여있다. 분지 주변산지는 화산암으로 되어 있다. 분지 내부는 중생대 백악기에 관입한 화강섬록암이 기반암이다. 하천들은 대부분 1차수나 2차수의 하천이며, 두 줄기가 서로 흘러간다. 북쪽 하천은 동부의 보월에서 좁은 수구를 통해 분지를 벗어나고, 남쪽 하천은 갑동의 좁은 수구를 통하여 분지를 벗어난다. 분지 안에서 두 하천의 분수계는 10m 안팍으로 낮아 연결된 분지로 인식된다. 분지 내부는 산지 공급물로 인식되는 미립토와 각력이 섞여있는 7~8m 두께의 Colluvium층이 덮여 10°내외로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다. 평탄면 위에 3~5m에 이르는 거력이 돌출된 형태로 얹쳐저 있다. 약 해발280m 사마동 일대 구릉에는 Colluvium층이 6~7m정도 두께로 관찰된다. 퇴적층은 화산암 각력과 미립물질이 뒤섞여 있고 분급과 층리을 볼 수 없다. 상층부는 각력의 비율이 높으나 중층부는 미립토의 구성 비율이 높으며 하층부는 각력과 미립토의 구성 비율이 비슷하다. 상층부에 나타나는 각력은 장축이 사면 방향을 향하고 있고, 망치로 두들기면 쉽게 부서진다. 중층부 미립토는 붉은 색을 띠며, 엽상구조가 잘 발달해 있다. 하층부의 화산암질 각력은 구상풍화의 양상을 보인다. 또한, 2~3cm 정도의 풍화 띠를 보이며, 약한 힘을 가하여도 쉽게 떨어져 나온다. 표토는 얇은 유기물 부식층으로 소나무류가 주로 자라고 있다.
이와 같은 지형과 토양과 관련이 있기 때문인지 규남은 자승차(양수기) 발명했고, 그 풀이 책에 “땅이 비록한데도 열흘만 비가 오지 않으면 높은 지대의 곡식이 말라 주고, 흉년이 들기 때문에 이를 활용, 밤낮으로 물을 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지역의 지형 특성이 반영된 폭포에 대해 보도된 “무등산 호남최대 70m 폭포 발견”내용을 아래 소개한다.
광주 무등산(해발 1,187m)에서 호남 최대크기의 폭포가 발견됐다. 광주시 북구청은 30일 무등산 시가문화권 관광자원화를 위한 기초조사 과정에서 탐사에 나선 화순 이서지역 조사팀(팀장 양회 중·51)이 최근 "화순군 이서면 무동마을 무등산 꼬막재 아래 해발 700여m 부근에서 길이 70m가 넘는 장대한 규모의 폭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정도 규모의 폭포는 호남권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이 지역에서 현재 알려진 최대크기 폭포는 60여m크기의 지리산 불일폭포로 알려져 있다. 또 완만한 산세의 홑산이어서 큰 폭포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무등산에 이처럼 규모가 큰 폭포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산악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무등산에는 길이 5∼6m 정도 되는 용추폭포가 있었으나 그나마 일제시대 일본군이 폭파시켜 그 본모습도 찾을 수 없으며 현재는 3∼4m되는 원효폭포가 고작이다. 폭포가 발견된 곳은 화순군 이서면 무동마을 심우지기(일명 시무지기)계곡. 계곡 첫마을인 용강 마을에서 4㎞쯤 올라간 해발 700여m 능선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에서 3시간 정도 걸린다. 상단(25m)과 중단(15m), 하단부(32m)로 3단계로 나눠져 있는 이 폭포는 중간까지는 45도 각도를 이루며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마지막 하단부 5m 정도는 90도로 떨어지는 수직폭포다. 실측이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길이와 높이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탐사반이 줄자로 재본 결과 73m 정도. 하얀 물줄기가 포말을 이루며 떨어지는 모습이 주변 푸른숲과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하고 있다. 폭포로 진입하는 길은 과거에 약초나 산삼을 캐던 주민들이 오르내리는 정도인데 지금은 그마나 잡초 등이 무성한 원시림으로 오솔길조차 없다. 먼발치인 용강마을에서 보면 푸른숲 사이로 폭포로 보이는 햐얀 물줄기 흔적만 보일 뿐이다. 이 폭포는 무등산에 관한 문헌에도 전혀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등산관리사무소와 화순군청 등에서도 존재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용강마을 이장 정해기(71)씨는 "이 폭포는 시무지기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왔으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않고 오르면 사고가 난다고 믿을 정도로 신성시 돼 오르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며 "앉은뱅이가 찾아와 폭포물을 맞고 난 뒤 걸어나갔다는 전설을 들었다"고 말했다. 무등산권 문화유산 보존회 양회중씨는 "폭포 현장을 찾았을 때 폭 3∼4m의 폭포에서 많은 물이 쏟아져 내리고 물안개 위로 3∼4시간 무지개가 걸렸다" 며 "마을에 내려오는 심우지기라는 이름 도 무지개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趙一駿기자 : 광주일보 1999년8월31일자>
3) 행정구역 변천
이서면은 본디 동복 고을 땅으로 1914년 전국지방행정구역개편 과정에서 동복군이 없어지고 화순군 소속이 되었다. 동복지역은 마한 때 벽비리국, 백제 때 두부지현이 있었으며 신라 때부터 동복현이 설치되었다. 이후 조선말까지 격변이 있기는 했으나, 동복이란 이름을 유지했다. 갑오개혁(1895년)으로 나주부에 한 때 속하였으나, 곧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1914년 개편 때까지 전라남도 동복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복은 화순군의 1개면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서는 고려 때 동복현의 자치고을인 보령현의 관할하에 있다가 동복현에 중앙의 감무가 파견되면서 동복현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1759년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동복현은 읍내면, 내서면 외서면 내남면 외남면 내북면 외북면의 7개면으로 구성되고 이 중 이서면 지역은 내서면, 외서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면제가 시작되면서 내서, 외서의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리 김상운 소장 고문서 중 1720년 동복현감 확인의 김진화 준호구에 ‘내서면 경산촌’이란 주소가 있으며 1783년 김태흥 준호구에 ‘외서면 상신촌’이란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전국의 마을 이름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호구총수(1789년 간행)>에 따르면 내서면은 서촌을 비롯 12개리이고, 외서면은 야사리를 비롯해 10개리가 기록되어 있다. 1896년 전국 13도제 실시 때 내서면은 서촌리 포함 14개리이고, 외서면은 야사리를 포함 20개리가 되었다. 그리고 1910년 10월 면사무소를 내서면은 장월리 59번지, 외서면은 하반리 469-1번지에 각각 설치했다. 그러나 1914년 내서면과 외서면 통합과 동리를 개편해 ‘이서면’으로 이름하고 12개리로 조정했다. 면사무소는 외서면 지역이던 야사리 197-1번지에 두었다. 동복군 내남면 외남면을 합해 남면으로, 내북 외북면을 합해 북면으로 한 예처럼 내서면 외서면을 합해 서면을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옛 화순지역에 서면이 있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고자 이서면으로 칭한 것이다.
1949년 2월 여순사건의 영향으로 면사무소가 소실되자 도석리 석보마을 428-1번지에 있던 동복금융조합 창고로 잠깐 옮겼다. 1949년 9월 29일 도석리 임시 면사무소 청사가 소실되자 월산리 장월마을 285-2번지 주택으로 이전 임시 사무실로 사용했다. 1950년대 초에 월산리 장월마을 197-1번지 창고를 사무소로 쓰다가 9월에 6.25로 소실되자 504번지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된 1956년 7월 도석리 석림마을 444-2번지에 면사무소를 신축했다가 1984년 동복댐 수몰지구에 편입돼 야사리 태평동 652-1번지로 면사무소를 신축 이사해 오늘에 이른다.
3. 야사리의 야사마을 지지
1) 위치와 영역
야사 마을회관이 있는 166-1번지 일대는 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군도 14호선을 따라 2.5km 떨어진 동면중 이서분교 건너편에 있다. 도석리에 있던 방석보 장이나 학교를 다닐 때는 우데미는 학교 앞을 지나서, 아리데미는 짐대거리를 지나서 동쪽 길을 따라 2km 거리를 걸어 다녔다.
마을의 중심을 이룬 터는 우데미 180~200번지, 아리데미 150~171번지, 217~220번지, 갱변?c 115~120번지 일대이고 해발 고도는 175~180m이다. 마을 방향은 싸리재(265m)를 보고 남쪽을 향해 자리 잡았다. 동쪽으로 짐대거리, 물레방아걸, 진배미들, 그 너머로 도석리 석림마을터, 동복댐수원지, 서쪽으로 은행나무방천, 웃방천, 별대생이, 야사교, 갱변, 이서장터지, 보아들, 은행나무노지, 용호마을(도롱굴), 남쪽으로 보아들, 갱변보, 새보, 싸리재노지, 싸리재, 그 너머로 월산리 월산마을터, 북쪽으로 윗등, 뒷산몬댕이, 뒷골착, 뒷재몬댕이, 북동쪽으로 솔대봉(323m)이 있다.
2) 연혁과 입향
야사 마을은 처음에는 평사(平沙)라 했고 금사정이 지어졌을 때 금사(錦沙)라 했으며, 사촌(沙村), 사천(沙川)이라 하다가 야사(野沙)로 부른다고 한다. 야사마을의 뜻은 들모실(들에 있는 마을)로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평사도 같은 의미가 있다. 반면 야사2구인 산사(山沙)마을은 산 밑에 있는 산모실로 야사와 대비가 된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외서면 10개리 중 야사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4년 전국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동복군 외서면 용호리 태평리 산사리 갑동 야사리 사마리, 내서면 석림리 각 일부를 통합해 면 소재지가 되는 야사리 이름을 따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가 되었고 구제 실시에 따라 야사1구는 야사마을, 야사2구는 산사, 태평동, 야사3구는 용호마을, 야사4구는 갑동으로 편제되었다. 행정통명으로는 3통(야사) 4통(산사) 5통(용호) 6통(갑동)으로 부른다. 2004년 11월말 현재 주민등록상 호구는 60세대 122명이 거주하며 남자는 62명 여자는 60명이다.
고려말에 성씨 성장자가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이 처음이라고 전하는데 서당안산 앞에서 살면서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현재 성씨는 한 집도 없다.
1592년경 김해김씨 김해승(1566~?)이 충청도 충주 산척면에서 거주하다가 임진왜란을 피하여 야사로 들어 왔다가 석림으로 이사했다.
1600년경 진주하씨 사간공파(월당공파) 금사 하윤구(1570~?)가 전도에서 야사로 들어와 금사정을 짓고 살다가 영신으로 갔다고 전한다. 1650년경 진주하씨 사간공파 하우문(1632~1713)이 영신에서, 1720년경 진주하씨 사간공파(병암공파) 병암공 하영청(1697~1771)이 영신에서 들어와 정착했다. 1750년경 금성나씨 고사공파 나심좌(1710~1779), 나영좌(1730~1787)가 산사에서, 1770년경 영천이씨 이태근(1745~1794)이 모친 동래정씨와 함께 담양 대전면 한재마을에서 거주하다가 들어왔다. 1916년 동복오씨 오재상(1884~1945)이 동복면 독상리에서, 1930년 하남정씨 정도현(1902~1984)이 학당마을에서, 1935년경 해주최씨 판서공파 최일봉(1914~1974)이 안심에서, 1942년 전주이씨 이대영(1934~?)이 모친 정순덕(?~?)과 동복 월송에서, 1942년 창원정씨 정막동(1930~1975)이 동복 월송에서, 1957년 한산이씨 이순준(1955~ )이 모친 하순남(1929~ )이 동면 샘골에서, 1972년 경주정씨 정동오(1939~ )가 보산리 보암에서, 1976년 해주최씨 판서공파 최도현(1932~ )이 승주 주암에서, 1984년 문화유씨 유무용(1947~ )이 동복 천변리에서 도석을 거쳐 야사로, 1984년 남평문씨 문우송(1944~ )이 보산리 보암에서 도석리로 들어와 정착했다.
야사마을은 서로 다른 성씨들이 모여 사는 각성마을이다. 대표적인 성씨는 진주하씨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진주하씨로 처음 동복에 들어 온 사람은 13대조로 여산군수를 지낸 군수공 하치(河治)이며 절동에 살았다. 후손은 전도를 거쳐 야사, 영신에 주로 살고 있다. 남자를 기준으로 성씨별로 살펴보면 진주하씨 21호, 영천이씨와 금성나씨, 김해김씨 각각 3호, 해주최씨 2호, 하남정?동복오?한산이?함풍이?밀양박?문화유?전주이?창원정씨가 각각 1호이고 도석리 사는 남평문씨 1가구가 있다.
3) 자연환경과 땅이름
마을 주산은 해발 344m의 뒷산 몰랭이로 일제 때 신사당이 있던 산이다. 풍수지리설로 ‘현침혈’이 있다고 하는데 마을 남쪽 앞에 길게 동서로 뻗은 싸리재가 실로 바늘을 꿰는 형국이라고 한다. 대동산과 싸리재 된재가 마을의 안산이 된다. 다른 또 하나의 풍수형국론은 ‘배형국’이다. 마을이 배 형국이기 때문에 우물을 파면 망한다고 전해 오는데 우물을 판 사람마다 해를 입었다고 한다. 땅을 깊게 파면 모래가 나온다. 마을 동쪽 짐대거리에 매년 이월 하드렛날 마을의 재앙을 방지하기 위하여 장대위에 나무로 깎은 오리를 올려 놓았으며 두개를 세웠다. 마을이 배형국이라 돛대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산사쪽 사장등이 뱀이고 보아들이 개구리 모습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마을은 당산나무와 우체국, 학교가 있는 우데미와 마을회관이 있는 아리데미로 구분되며 2개반으로 운영하고 있다. 2004년 1월 기준 공시지가 중 최고지가는 대지 180-2번지로 ㎡당 18,800원이고 최저지가는 산 38-1번지로 231원이다. 마을에 전하는 땅이름과 주요시설에 대해 주민들의 제보와 하장호가 그린 마을지도를 참조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그림4와5).
? 부고촌 : 남서쪽 냇가 건너 정효자 비각이 있는 부근을 말하는데 이전에 나씨가 부자로 살았다고 한다. 기와편과 자기편이 출토되고 있다. ‘조리형국’이라 부자가 되면 나가야 하는 곳이라며 현재 유영선이 거주하고 있다.
? 거멍골(거문골) : 보 도랑이 없을 때 학교 뒤 골짜기에서 내려온 소량의 물을 이용하는 뒷구렁 논이 약간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밭이었다. 논이 있던 곳을 거멍골이라 한다.
? 새밭모시(들) : 동쪽 들로 밭으로 있을 때 모시밭이었으나 하병암 선생이 살 적에 하천에 뒷구렁보와 방아실보를 설치 해 물길을 낸 후 모시밭을 논으로 바꾸어 개간했다. 지대거리 동쪽이다.
? 절굴쏘 : 서북쪽 용호 마을 옆으로 정유년 홍수에 물길이 바뀌었다고 한다.
? 절터골 : 서북쪽 용호 옆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로 폐사되었다고 전한다.
? 된재 : 남쪽 산 157-2번지 일대 안산에 오르는 고개로 22구비가 있었으나 싸리재 도로 확장으로 구비가 없어졌다.
? 감남등골착 : 동북쪽 산약굴 안에 있으며 감나무가 서 있는 산등성이로 이전에 처사가 살았다.
? 뒷산 : 북쪽에 있는 산으로 산 37-1번지, 산 27-1번지 일대이다.
? 배가등 : 남쪽 정효자 비각이 잇는 부근으로 546-4,5번지 일대이다. 배작등이라 하며 흰까치가 죽지를 틀고 올라가는 모습이라 한다.
? 대동산 : 남동쪽 앞산 산 163-1번지로 높은 봉우리이며 월산리와 경계가 된다.
? 서당안산 : 서당(187번지) 건너편에 있는 산이 되므로 산 157-1번지 일대를 서당안산이라 했다.
? 솔대봉 : 동북쪽으로 산 34번지, 산31번지 일대 높이 솟은 봉우리이다.
? 사장등 : 남서쪽으로 산사 옆에서 뱀처럼 길게 뻗어 내린 542번지 일대 진등이다. 그 앞쪽에 있는 보와들이 개구리 형상이라 한다.
? 뒷구렁들 : 동쪽 새밭모시 1107-9번지 일대 논이다.
? 갱변들 : 하천가를 모두 갱변이라 하며 갱변에 만들어진 논이다.
? 봉주배미 : 경지정리로 1108-5번지에 속했으며 하응찬이 벌던 논이다.
? 마당배미 : 보와들에 있으며 신기우 논으로 경지정리 되었다.
? 대동배미 : 보와들에 있으며 한연호, 하응선 논으로 경지정리에 편입되었다. 논이 좋다고 알려졌다.
? 확독배미 : 벼락방아가 있던 논으로 방아확돌이 남아 있었다. 김용악 집 밑이 되며 최도연이 벌었다.
? 싸리재 : 남쪽 산 159-3번지 일대이며 월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방아박굴 : 도롱굴 북쪽 전 331번지이다.
? 가마터 : 495번지 일대로 논 밑에 자기 가마터가 있다.
? 기와점터 : 정효자 비각 뒷등에서 기와를 구워 산사 유참봉 재각을 지었다.
? 붉은독고개 : 기와점 터로 546, 546-8번지 일대 사장등 부고촌 위쪽이 된다.
? 배가등골착 : 546-2번지 일대 정효자 비각 뒤 골착이다.
? 동산굴(동상굴) : 남서쪽 배가등골착과 된재 사이의 골짜기이다.
? 학교뒤골착 : 201번지 학교 북쪽 작은 골짜기이다.
? 산약굴 : 동쪽 도로가에 있는 비전테크 북쪽 골짜기로 산2, 신3, 산 4번지 일대이다.
? 초장굴 : 동북쪽 골짜기 231-1번지로 송기순 밭이 있다.
? 가락굴 : 싸리재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월산리 오용원이 사는 집이 있다.
? 학교옆대생이 : 산 37-1번지로 학교 북동쪽 벼랑이다.
? 뒷구렁또랑 : 뒷구렁 1107-1~7번지에 물을 대던 도랑이다.
? 갱변들시암 : 하중호 집앞에 있던 샘이다.
? 바가치시암 : 전주네 주막에 있던 샘이다.
? 도내기시암 : 진배미로 내려 가는 길 1109-3번지 이주성 논에 있었다.
? 삼굿터와 삼굿거리 : 115-13번지 갱변?c에 있었다.
? 당산걸 : 당산나무 주변이다.
? 짐대거리 : 68번지 논가에 짐대가 있었다. 경지정리 후 1107-6번지에 편입되었다.
? 물레방아걸 : 129번지에 물레방아 있었다. 경지정리 후 1105-1번지에 편입되었다.
? 갈미봉쏘 : 동쪽 갈미봉 아래 있던 쏘이다.
? 산냑굴밭 : 산약굴 골짜기에 260번지 일대에 있는 밭이다.
? 동산밑에 아그장터 : 대동산 아래 산 163-1번지가 아그장 흔적이 많이 있다.
? 서당터(양정재) : 187번지에 규남 하백원 선생의 양정재 서당이 있었다.
? 물레방아터 : 129번지에 있었는데 경지정리 후 1105-2번지에 편입되었다.
? 자갈삼굿터 : 벼락방아 자리에 있었다.
? 연자방아터 : 갱변?c 115-4번지와 115-8번지 사이에 있었다. 연자매가 남아 있다.
? 숯굿터 : 511번지 은행나무 골착에서 하응도가 50년대에 숯을 생산했다.
? 별대생이 : 용호마을과 야사마을 사이 산 41번지 바위 벼랑으로 웃방천 상류가 된다.
? 웃방천 : 용호마을 별대생이 바로 아래에 있는 방천으로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천변에 돌을 쌓아 놓은 시설물이다.
? 아랫방천 : 웃방천과 은행나무 노지 사이 천변에 쌓아 놓은 돌무더기였다.
? 은행나무노지 : 은행나무 서쪽 하천에 놓아둔 독다리이다.
? 은행나무방천 : 은행나무가 있는 하천변에 쌓아 놓은 돌 무더기였다.
? 이서장터 : 은행나무방천 건너 갱변에 1984년 도석장(이서장 방석보장)이 수몰지구로 폐장되면서 이곳에 이주해 장옥을 지었으나 해가 갈수록 장이 쇠락해 2004년 봄에 장옥을 완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게이트볼구장을 신설했다.
? 보아들보 : 도롱굴 입구에 있는 보로 보앞들 보이다.
? 뒷구렁보 : 야사교 하류에 있는 보로 방아실보 상류가 되며 바로 동쪽에 오태모 약방이 있었다. 마을회관과 학교 앞을 지나가는 수로에 물을 대던 보이다.
? 방아실보 : 야사교 하류 뒷구렁보 밑에 있던 보로 물레방앗간에 물을 대던 보이다.
? 갱변들방천 : 방아실보 밑에 시설한 하천 변 돌무더기로 그 동쪽 옆에 유산각이 있었다.
? 갱변들보(갱변보) : 남쪽에 있는 보로 방아실보 하류에 있다. 마을 건너편 싸리재 밑 갱변들에 물을 대던 보이다.
? 싸리재 노지 : 깽변?c 115-4번지와 116-9번지와 사이에서 하천 건너로 싸리재로 거너가던 독다리이다.
? 새보 : 남쪽 갱변들보 하류로 1051-28번지에 있던 새로 만들었는데 동쪽으로 하천과 나란히 만들어진 수로에 물을 대던 보이다.
? 개내보 : 깽변?c 하류에서 물건너 대동산 밑 들로 물을 대던 보이다.
? 이서면사무소터 : 1914년 3월 1일 내서면과 외서면을 통합해 야사리 197-1번지에 이서면사무소를 건립했다. 1949년 2월 여순사건으로 청사가 소실되자 도석리 428-1번지 금융조합 창고로 이전했다. 당시 면사무소터는 학교부지에 편입되어 쌍느티나무 서쪽 운동장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 이서경찰관주재소(이서지서)터 : 1919년 야사리 191-1번지(주재소부장사택), 192-2번지(주재소사무실.소방기구실.종대.사이렌), 180-1번지 일대에 건립되었다. 1945년 8월 20일 이서지서로 변경했다. 1949년 2월 여순사건으로 청사 소실되자 월산리 583-3번지 가건물로 이전했다. 주재소가 처음 설치될 때는 병참이라 했다.
? 이서국민학교터 : 1927년 6월 7일 야사리 204번지에 이서공립보통학교 개교 후 1950년 4월 1일 이서국민학교로 개칭, 1962년 12월 29일 도석리 591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학교터는 1967년 3월 16일 이서중앙국민학교로 개교 해 1983년 3월 1일 학생수 감소로 이서초등학교 야사분교로 개칭되었다가 1985년 3월 1일 도석리 이서국민학교와 사립 신농중학교가 동복댐 확장공사로 수몰지구에 편입되자 야사분교와 합해 이서국민학교와 공립 동면중학교 신농분교로 변경했다. 1987년 3월 1일 동면중학교 신농분교를 이서분교로 고쳤다. 1992년 2월 28일 야사리 이서국민학교를 폐교하고 영평리 이서북국민학교와 통합 해 이서국민학교로 변경했다. 야사리 학교는 동면중학교 야사분교만 남아 있다.
? 정자근노미비와 제각 : 동복댐 수몰지구에 편입되어 보산리에서 1984년 야사리로 이건했다.
? 야사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303호로 조선 성종조에 심었다고 전한다.
4) 인구와 산업
2004년 11월말 현지 조사에 따르면 빈집은 5집이고, 실제 거주 가구는 43호 91명인데 남자 42명, 여자 49명이며, 혼자 사는 가구는 남자 3집, 여자 12집이다. 연령별로 동네 사람들을 보면 60대가 29명(남 12 여 17)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70대 18명(남 5 여 13), 40대 12명, 10대 11명, 80대 8명, 50대 7명, 20대 3명, 30대 2명, 90대 1명 순이다. 10대미만과 30대 여자, 90대 남자는 없다. 최고령자는 남자 동복 오종천(1919생 85세), 여자 서유촌댁 이양례(1912생 92세)이다. 직업별로 가구를 보면 대부분 농사에 종사하지만 이서가든, 현대떡방앗간, 야사부녀회가게도 있다.
경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은 나경주로 논 4,200평, 밭 1000평을 경작하고 있다. 하응한은 논 4,199평, 밭 538평이 있으며, 정기호는 논 3,272평, 밭 32평을 소유하고 농사를 짓는다. 대농으로 최호는 6천6백평, 이종석은 6천평 농사를 짓고 있다.
경운기는 1975년 하균, 김관수, 나경주가 처음 사용 했으며, 콤바인은 1982년 하종석, 트랙터는 1982년 하인호, 이앙기는 1984년 하인호, 관리기는 1987년 하인호, 이순준, 농산물건조기와 곡물건조기, 다목적건조기는 이순준이 1990년에 처음 도입했다. 다목적 건조기는 누에를 말리는데 사용하고 있는데 17대가 들어 와 있다. 가정용 정미기는 1994년 하인호가 처음 구입했다.
전기는 1972년에 가설했고 전화는 1973년 자석식 전화를 마을 취급소(회관)에 가설했다가 1984년 자동식 전화기를 각 가정에 설치했다. 가로등은 1992년에 설치했다. 화물차는 하인호가 1985년 처음 들여와 마을에 5대가 있다. 승용차는 김용악이 처음 등록한 후 3대가 있다.
주요 생산물로는 누에와 뽕나무를 재배하며 특산물로 이서전통쌀엿과 뽕엿은 12월 한달동안 12명이 작업해 음력설에 중심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순소득으로 1천만원을 벌어들이고 있다. 독립된 작업장 건립이 희망사항이다. 사업체로는 산약굴 앞에 비전테크가 있다. 가축은 대체로 소는 3집에 3마리를 키우고 염소는 가구당 2~25마리씩 카우며 개는 집집마다 한 두마리씩 있다.
5) 공동체 생활과 민속
동네 식수는 도랑물을 사용하다가 가정 우물을 모타로 끌어 올려 이용했고 1990년 웃방천 부근 산 40번지에 시멘트 물탱크를 처음 시설 한 후 1996년 플라스틱 물탱크 20톤으로 바꾸었다. 2004년 스텐레스 40톤으로 교체했는데 사업비가 1억7천만원 소요되었다. 집수정은 우체국 뒤편에 있다.
주막은 학교정문 정영기 밭 자리에 주막이 있었고, 210번지 쌍열각 옆에서 전주네가 운영하다가 이두연 모친이 한때 영업하기도 했다. 구판장은 새마을 소득사업으로 부녀들이 일정기간 돌아가면서 맡아 운영해 부녀회 기금을 조성하다가 폐지하고 학교앞에 가게를 내서 임대를 주고 있다. 일제 때 점방은 194번지에 있었고, 176-2번지에는 이발소와 점방을 겸하고 있었다. 167번지 옆 길에는 떡 할매집도 있었다. 김중갑은 210번지에서 제봉, 양복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디딜방아는 184번지 정한모집, 166번지 회관, 153-1번지 신목수, 197번지 하연종 증조 집에 있었고 벼락방아는 야사1교 건너 갱변 113-3번지 부근에 있었다. 물레방아는 129번지 위에서 하상호 부친이 시설했고 하명호가 이어서 하다가 1940년대 초에 중단했다. 혀재 1105-2번지에 편입되었다. 발동기 방아는 1051-10번지 갱변에서 최충식이 했고 하응찬도 발동기로 타맥을 많이 했다. 이후 하명호, 하민종이 했고 하연호 때는 마을 공용을 운영했으며 1984년 하종석이 170만원을 주고 매입해 지금까지 야사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다.
서당은 일제 때 187번지 하태열 집에서 하다가 학교가 개교되면서 폐했다. 야학은 6.25후 광주에서 대학생들이 와서 학교를 빌려 영어, 한문, 한글을 가르쳤다. 초등교육은 1927년 6월부터 이서공립보통학교로 다녔고 1967년 3월부터 이서중앙국민학교, 1983년 3월 야사분교, 1985년부터 야사리 이서국민학교를 다닌 뒤 1992년 3월부터 영평리에 있는 이서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중학교는 1966년부터 도석리 신농중학교, 1985년부터 동면중 이서분교를 다니고 있다. 고등학교는 화순읍내와, 능주, 곡성군 옥과로 진학한다.
이발은 하응천이 학교 정자나무 밑에서 왜정때 이발소를 차려 놓고 했고 이 후 방석보장이나 산사에 있는 만민이발소를 이용했으며 지금은 화순읍내로 나간다. 미용실은 화순읍 소재지나 광주 시내로 간다.
난방을 위해 예전에는 초목을 사용했는데 앞산, 뒷산, 별산으로 나무하러 다녔다. 1970년대 연탄을 때면서 동면 연탄공장에서 배달했으며 1990년초부터 난방용 기름보일러를 대부분 사용하고 취사용으로 엘피가스를 쓰고 있다. 장은 과거 도석장, 화순장, 야사장, 남광주장을 이용했다. 걸어서 도석장까지 2km이며 20분 가량 소요되었다. 지금은 화순장을 이용하며 군내버스로 40분이면 도착한다.
예전에는 금성여객, 중앙여객이 들어 왔으며, 군내버스는 1986년 11월 9일부터 화순교통이 운행중이다. 노선버스 270-1번은 하루 11회 운행하며 요금은 화순읍까지 1,900원, 광주까지 2,400원이다. 승장장은 학교 앞과 이서가든 앞에 있다. 전에는 버스종점으로 버스 기사들이 김용악, 유무용집에서 묵었으나 현재는 갑동으로 옮겨갔다. 영업용 택시는 1981년 하순복이 성일택시로 영업을 시작했으나 면내에는 운행하지 않고 있다. 택시를 부르면 화순읍내까지 1만5천원 광주까지 보통 2만원을 지불한다.
회관은 일제 때는 166번지에 초가로 있었다. 1980년대 166-1번지에 새마을회관을 건립했고 2000년 166-1번지 100평에 4천2백만원을 들여 방3개와 거실, 실외화장실을 두고 벽돌조 슬라브 단층 30평으로 건립했다. 유산각은 2003년 173번지에 정2 측칸으로 한옥목조기와 6평을 건립했다.
농악(메구)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치고 있다. 상쇠는 정점동, 하년호가 잘했다. 마당볼비는 마을 기금 마련을 위해 했다. 회관에 농악기가 있다. 당산제는 나라의 국운과 화평을 알리고 울음소리를 내어 전란과 나라의 불운을 알리는 신목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 나라의 번영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과거에 당산제 날을 편의상 좋은날로 잡아 제를 지냈더니 마을에 액운이 많아 정월대보름으로 환원하여 지내고 있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맨 먼저 금사정터에 있는 당산에 지내고 이어 학교에 있는 쌍느티나무에 지내며 마지막으로 은행나무에 와서 지낸다. 해방전에 해방을 알리며 울었고 6.25이전에 큰 울음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디딜방아 액막이는 마을에 전염병이 들지 못하도록 방에 몰래 산사, 갑동마을에 가서 디딜방 아를 가져다가 마을입구에 거꾸로 세우고 그 위에 고쟁이를 씌워 액막이를 하였다. 이렇게 하면 마을에 전염병이 오지 않아 주민들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농악은 당산굿, 시암굿, 마당볼비를 했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에 우대미, 아래대미(깽변?c)로 편을 갈라 했다. 화전놀이는 대동산에서, 천렵은 대동산 아래 괴내에서 즐겼다. 들돌은 당산에 2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짐대는 짐대거리에 1950년 중반까지 2기가 있었다.
위친계는 일제 때부터 이어져 오고 계장은 하태호이다. 마을공동재산은 동산 1백만원, 부동산으로 회관과 동답 800평이 있다. 공공시설물과 유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서우체국(1985. 5. 1 도석리 석림마을 428-3번지에서 야사리180-2번지로 이전), 동면중학교 야사분교(197번지) 이서면사무소터, 이서경찰관주재소, 이서국민학교터, 정자근노미정각, 신사당터(산 38-1번지), 야사은행나무, 쌍느티나무(이서초등학교 운동장), 야사1교(1990년 건립), 정사계기적비(1986. 3. 계원건립), 오공재규은덕불망비(무술(1898?). 2. 내서면건립, 석림에서 이건), 약와하선생채종시혜불망비(1937. 3. 소작인8인건립), 유학오병갑공덕불망비(1905. 12건립), 천재석시혜불망비(1930. 1. 14인 건립), 육군대장문형태공적비(1970. 3 기성회, 교장, 유지등 건립), 춘담최병채선생학덕비(1935. 2 8), 보리이삭명선돌(1기 전도마을에서 학교로 이전), 쌍열문(열녀충의위이득춘처하씨지려.열녀성균진사하대붕처오씨지려1775년 건립, 1935년 이건), 충노목산의비(1935년 건립), 병암처사하선생유허비(병암 하영청(1697~1771), 1983. 9. 후손건립), 금사정터(금사 하윤구 소축), 월담정터(하우문 소축), 양정재터(187번지 규남 하백원 서실), 규남문집(하백원저, 1977영인, 하응문외 소장), 금사병암유집(하윤구, 하영청저, 하응문외 소장)
6) 야사 사람들
<역대 이장>
이순범부친(일제구장1931), 이관범, 하응철(1950년 6.25직전), 하응봉(6.25후), 하명호, 이주두, 하인성, 나순구, 하응록, 하균, 하태주, 하인호(1983), 정기호(1984~1990), 이순준(1990~1992), 나경주, 이순준(1996), 하종석(현재)
표2. 야사마을 세대주 현황(가나다순)
성 명 |
지 번 |
성 별 |
생년(나이) |
본 관 |
댁 호 |
동거인 |
강귀님 |
195-1 |
여 |
1937(67) |
전주이대영처 |
남평 |
1 |
김경례 |
155 |
여 |
1941(63) |
진주하태주처 |
사평 |
0 |
김연순 |
194-1 |
여 |
1935(69) |
진주하양호처 |
덕산 |
0 |
김옥동 |
218 |
남 |
1923(81) |
김해 |
복녕 |
2 |
김용악 |
512-3 |
남 |
1951(53) |
김해 |
(영암) |
4 |
김형신 |
1051-10 |
남 |
1964(40) |
김해 |
|
0 |
나경주 |
115-1 |
남 |
1957(47) |
금성 |
본동 |
4 |
나금연 |
115-13 |
여 |
1941(63) |
창원정막동처 |
지와물 |
1 |
나판주 |
150 |
남 |
1961(43) |
금성 |
(청풍) |
4 |
남인순 |
193-4 |
여 |
1939(65) |
진주하광호처 |
옥촌 |
0 |
문우송 |
도석리567-2 |
남 |
1944(60) |
남평 |
(서울) |
0 |
박옥심 |
198 |
여 |
1932(72) |
진주하근호처 |
오산 |
0 |
박옥주 |
|
여 |
1922(82) |
진주하응문처 |
절골 |
0 |
성옥례 |
159 |
여 |
1939(65) |
영천이태로처 |
대촌 |
0 |
오복순 |
|
|
|
|
|
공가 |
오종천 |
115-5 |
남 |
1919(85) |
동복 |
구실 |
1 |
유무용 |
195-1 |
남 |
1947(57) |
문화 |
(도석) |
3 |
이길로 |
159 |
남 |
1941(63) |
영천 |
(보월) |
1 |
이순준 |
182-1 |
남 |
1955(49) |
한산 |
금동(도석) |
5 |
이재풍 |
120 |
남 |
1936(68) |
함풍 |
부안 |
1 |
이주성 |
115-4 |
남 |
1928(76) |
영천 |
본촌 |
1 |
정기호 |
115 |
남 |
1942(62) |
하남 |
오성 |
2 |
정동오 |
192 |
남 |
1939(65) |
경주 |
동면 |
1 |
조봉림 |
|
|
|
|
|
공가 |
조순현 |
151 |
여 |
1937(67) |
진주하영환처 |
삼내 |
0 |
최갑순 |
219 |
여 |
1936(68) |
영천이주남처 |
걸동 |
0 |
최도현 |
186 |
남 |
1932(72) |
해주 |
주암 |
1 |
최맹순 |
198 |
여 |
1925(79) |
진주하응선처 |
사래 |
0 |
최상현 |
248 |
남 |
1935(69) |
해주 |
월산 |
1 |
최애순 |
181 |
여 |
1926(78) |
밀양박 처 |
곡성 |
0 |
하계호 |
115-7 |
남 |
1924(80) |
진주 |
와촌 |
1 |
하 균 |
151 |
남 |
1935(69) |
진주 |
오동 |
1 |
하기호 |
168 |
남 |
1920(84) |
진주 |
평촌 |
1 |
하기환 |
169 |
남 |
1944(60) |
진주 |
본면(보월) |
1 |
하대호 |
168 |
남 |
1936(68) |
진주 |
규산 |
1 |
하동주 |
184 |
남 |
1929(75) |
진주 |
유종 |
1 |
하방호 |
|
|
|
|
|
공가 |
하분순 |
118 |
여 |
1939(65) |
금성나기주처 |
일곡 |
0 |
하연호 |
193-3 |
남 |
1925(79) |
진주 |
용암 |
1 |
하응중 |
1351-10 |
|
|
|
|
공가 |
하응찬 |
172 |
남 |
1922(82) |
진주 |
순천 |
0 |
하응한 |
172 |
남 |
1942(62) |
진주 |
안정 |
2 |
하종석 |
512-4 |
남 |
1936(68) |
진주 |
지실 |
1 |
하중호 |
115-8 |
남 |
1963(41) |
진주 |
|
1 |
하채호 |
160 |
남 |
1941(63) |
진주 |
조양 |
3 |
하태송 |
169 |
|
|
|
|
공가 |
하태호 |
162 |
남 |
1929(75) |
진주 |
솔치 |
1 |
한순복 |
187 |
여 |
1929(75) |
진주하민종처 |
외동 |
0 |
4. 지도 활용 방안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여 김백원(古山子)에게 물어 그것을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 졌는데 모두 23권이다. 이것은 세상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자산이다. 지리가 있는 곳에 따라 권형(權衡)이 있다.”
병조판서와 강화도조약 체결 때 판중추부사를 했던 신헌이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에 대한 내용을 ‘대동방여도서’에 적은 글의 일부이다. 고산자는 피나무에 <동여도>를 양각으로 새겨 초간을 1861년 완성하는데 바로 <대동여지도>이다. 이 지도는 그간 자세하고 정확하며, 한 평생을 걸고 제작했다는데서 지리분야 대명사로 회자되었다. 사실 세계지도학사까지 걸작으로 평가한 것은 국토정보를 모두가 공유하게 인쇄보급용인 목판화로 만들었다는 점과 분첩절첩 방식을 채용하여 열람 효율성과 실용성이 높은 지도이기 때문이다.
고산자의 위대한 업적에는 신헌의 지적처럼 많은 자료가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중 신경준, 위백규, 황윤석과 함께 ‘호남4대실학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화순 출신 규남 하백원(河百源1781~1844)이 그린 <동국지도>와 <만국전도>를 들 수 있다. 본디 동국지도는 한세기 전에 살았던 정상기가 축척을 사용하여 제작한 전국지도로 조선의 모습을 알린 대표적인 작품이고, 만국전도는 마테오리치 이후 알레니의 지도를 본 따 그린 것이다.
규남의 동국지도는 1811년 이후의 지리정보를 보안하여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지도첩은 가로 24.5㎝ 세로 37㎝ 높이 3㎝인데, 펼쳤을 때 69㎝와 107㎝ 크기로 모두 10폭이다. 전국도는 백두산부근이 크게 강조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신경준의 산경개념을 도입했으며, 고산자 지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도별도에서 전라도 지도를 살펴보면 광주와 화순간 무등산과 판치(너리재), 영산강의 사호강과 영산포, 섬진강의 보성강 줄기에 낙수진을 바른 위치에 선명하게 표시했으며, 역과 봉수터는 있는 곳마다 기호도 사용했다.
1821년에 제작된 만국전도는 보존상태가 좋고, 당시 세계지리정보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입장을 확연하게 보여준 국내 유일본으로 꽤 높은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여겨진다. 가로 132㎝ 세로 80.5㎝ 크기인 이 지도에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그 북서쪽에 사막표시, 중동의 홍해와 중국 황하는 바탕색이 적색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 땅은 백두산과 탐라 울릉도 를 똑똑하게 나타나 있고, 추자도와 흑산도까지도 작은 원으로 그려져 있다. 지방은 팔도 의 첫 자가 각각의 방향에 기록해 놓았다.
이상과 같이 규남의 지도는 그 가치로 보아 이제 ‘호남의 고산자’로 널리 알리고 그 작품에 대한 진가를 교육현장에서 활용해야 한다. 생가터인 193번지 일대와 동면중 이서분교터를 ‘지도 테마 공원’으로 가꾸어 그 업적을 이어가기를 제안한다. 옛 지도부터 현대 위성사진까지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국토는 물론 세계지리정보를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곳으로 꾸미는 것이다. 단순한 전시관 보다 모형도 만들고, 야외에 지도에 관한 내용을 담은 시설을 주위 환경과 어울리게 배치하면 좋겠다. 또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상시적으로 관람객이 방문하는 터전이 되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열정과 실력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와 해당기관이 협의하에 단계별로 안을 마련하여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혜정 경희대 석좌교수는 내년 초 동서양 옛지도 900여점을 모아 지도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교수는 “지도에 관심을 갖고 좋은 지도를 만든 ‘지도강국’은 역사적으로 큰 제국을 이뤘거나 다른 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반면 그렇지 못한 민족은 늘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지도박물관이 후학들에게 역사와 학술연구의 장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규남의 고향은 적벽과 더불어 물염정, 반계사, 정효자 사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등 수려한 경관과 문화유산이 어울려 있다. 더구나 김삿갓(병연)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서당터로 알려진 양정재에는 창평 식영정과 소쇄원처럼 규남 당시나 그 이전의 실력 있는 학자들이 회합한 곳이었다. 이와 같이 이서지역 일대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훌륭한 역사문화자원의 현장이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청소년 교육 나아가 시민 수련의 터전으로 활용되어 지리학의 측면에서 이미 입증된 질지의 진가를 제대로 매길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규남문집>에는 현실 개혁과 대응에 무능한 선비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한 대목과 함께 농?공?상도 모두 가치 있는 학문이라면서 공리공론의 유학에 휩쓸리지 말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학문을 닦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 책에는 지식인의 도리는 백성들의 의식주를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근대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하선생의 생각이 서려있다. 광주 월남동 주남마을 산77번지 묘(卯)방에 영면해있는 규남은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서 후배들에게 어떤 자세로 앞날을 진단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얼을 표했다.
그림 1. 동복현지도 중 이서면 일대(규장각 소장 No10458) 사진1. 화순군 이서면의 이서분지(촬영:김현수)
그림 4. 하장호가 1999년 그린 <서기 1945년 해방전 야사리 전도>중 일부
그림 5. 하장호의 <서기 1945년 해방전 야사리 전도>중 규남 탯자리 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