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봄내살림이 있기도 전 이미 지금의 생명밥상과 같이 농민과 소비자가 직거래 시스템으로 지역에서 생산된 친환경 농산물을 교류하는 로컬푸드 운동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의 생명밥상의 모태인 '생명이 꽃피는 밥상‘ 이 그것이다. 경신씨는 바로 그 밥상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은 생명밥상의 회원인 그녀에게 초창기 밥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초창기 밥상은 어땠어요?
"생산자 한 분이 20여 가구가 참여해서 시작했습니다. 소비자는 1 년 동안 월 회비를 지불하고, 생산자는 1년간 수확되는 농산물을 나눠주는 것 이였어요."
당시 나는 ‘생명이 꽃피는 밥상’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우연히 관련 홍보물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촌스러운 A4 한 장 자리에 쓰였던 내용들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늘이 짓는다는 농사의 어려움을 함께 공유합니다. 장마철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을 땐 공급되는 생산물이 줄 수도 있지만 농사가 잘 되었을 땐 덤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내 돈 내고 운 좋으면 잘 먹고 운 나쁘면 못 먹을 수도 있단 말인데 굳이 농사의 어려움을 함께 감수하자는 위험한 홍보문구가 잔잔한 울림을 줬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춘천에서 농민-소비자 회원직거래 사업(CSA)인 ‘생명이 꽃피는 밥상’이 첫 선을 보였다.
홍보문구가 그렇다 해도 그 해 농사가 잘 돼 잘 먹게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당시 20여 가구 회원들은 농민과 어려움을 공유하게 되었다. 기대치만큼 근사한 수확물을 받진 못했던 것이다. 첫 시작은 지촌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던 한주희 목사님이셨고 20가구를 책임지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팔릴 농산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단 20가구를 위해 키워진 농산물을 받을 수 있다는 설레임은 어떨까.
생산자 또한 무차별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내가 아는 20가구를 위해 농산물을 정성껏 키워내는 그 마음 또한 어땠을까.
그런데 그 설레임은 기대감으로, 기대감이 큰 만큼 실망감으로 이어진 슬픈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주희 목사님과 가까이 지인들을 모아 시작했습니다. 지인들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해서 20가구 정도 모을 수 있었어요. 처음이기도 하고 규모가 작기도 하니 품목 선택을 할 수 없고 농민이 주는 대로 그냥 잘 받아 먹자란 식으로 시작했어요. 하지만 점차 먹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기 시작했어요. 소비자들이 너무 풀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물론 농산물이니 당연히 풀밖에 없죠. (웃음..) 하지만 너무 다양하지 않은 풀(야채류)들이 계속 가게 되었어요. 그게 문제가 된 거죠.."
이후 품목을 다양화시키기 위해 양파, 옥수수, 토마토가 연계 물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어 고탄 지역에 있는 젊은 농부들(지금의 생명밥상 생산자)이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최청용 농부의 경우 과수원을 하고 있었기에 과일도 들어가게 되면서 한결 풍성해진 꾸러미가 소비자에게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처음부터 모든 회원에게 고탄 지역의 농산물이 골고루 들어간 것이 아니라 지촌의 한주희 목사님의 농산물 꾸러미를 받는 회원과 고탄의 여러 농부들의 농산물 꾸러미를 받는 회원이 나눠져 들어갔기에 불만은 더욱 증폭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토끼 논쟁.
“지촌엔 목사님 혼자였는데 고탄은 젊은 윤요왕 분들의 연계 작업이 있어서 다양해진 품목으로 만족도가 상당히 높아졌어요. 특히 최청용 생산자의 경우 과수원을 하니 과일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보기에도 비교가 된 거죠. 결국 지촌 대 고탄으로 비교가 되고,, 그러다 지촌 회원들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하면서 생산자 소비자 만남을 가졌는데 그때 있었던 논쟁이 유명한 토끼 논쟁이었습니다.(웃음.. )”
토끼논쟁의 내용은 이렇다. 일주일 동안 계속 먹어야 할 만큼 많은 양의 쌈채가 들어왔는데 맨날 고기를 구워서 쌈을 먹을 수도 없고, 반찬이 너무 일편적이라 항의를 한 것이다. 그러면서 외친 말이 ‘우리는 풀만 먹는 토끼가 아니다’라 했던 것. 이에 한주희 목사님은 고기를 빼고 쌈을 싸먹는 것이 맞고, 원래 그렇게 생식을 많이 하는 것이 자연적으로 맞다고 대응하셨고, 그렇게 격렬한 토끼논쟁이 일었던 것이다.
"물론 목사님께선 자신의 농산물을 통해 회원들에게 변화가 오길 바라셨을 거예요. 요즘은 워낙 무분별한 식습관이 넘쳐나니까요. 하지만 먹을거리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강요하면 힘들죠.. 이 모든 상황들이 첫 시도이고, 서로가 훈련되지 않은 과정이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논쟁이 있은 이후 생산물이 모든 회원에게 골고루 분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실무자였던 경신씨는 늘 곤혹스러운 일 투성이었다고 한다.
"사실 중간 통로인 저희가 상품성에 대한 기준이 별로 없었어요. 그냥 받아서 갖다 주는 식이였는데, 억센 쌈채류나 야구방망이만한 주키니 호박이 들어가기도 했어요. 일반 소비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농산물이었죠. 배송하시는 분은 전달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해하셨어요. 일단 밥상을 갖다 주면 사람들 표정이 안 좋으니 마음이 무거운 거죠. (웃음.. )그러다 하루는 무가 왔는데 저흰 그냥 알타리 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타리 무 만큼 작은 일반 무였던 거예요.(웃음..) 이걸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견이 분분 했었어요. 그러다 배송하시는 분이 거의 파업자세의 수준을 보이셨어요. (웃음..) ‘이건 내 얼굴이나 마찬가지다’하셨거든요. 그래서 당장은 넣지 않고 무 대신 시래기를 말려서 나중에 보내자 결정이 내려졌었는데요.. 저희가 또 참 무지했던 것이 (웃음..)시래기를 잘 엮어서 말리긴 했는데 그걸 햇볕에 말린거예요.. 나중에 보니 다 부서지더라구요. (웃음..)."
토기논쟁부터 무시래기 사건까지 당시엔 힘들고 불편한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재미있는 일화로 남아 얘기를 듣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원시적인 생명밥상’
경신씨는 그때의 ‘생명밥상’을 원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지금 생명밥상은 분명 진보했습니다. 굉장히 먹을 만 해 진 것이죠. 다량의 채소가 한 번에 들어오면 다 못먹을때도 있잖아요. 그럴 땐 저도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하지만 그렇게 원시적이었어도 생산자 소비자 간의 소통이 지금의 생명밥상보단 활발했던 것이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작은 규모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한주희 목사님 같은 경우는 매번 손수 편지를 써서 회원들과 소통을 꾸준히 해주셨었어요. 그리고 고탄의 경우 그런 편지는 없었지만 다양한 생산물로 소통이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예를 들면, 오늘 복숭아가 참 좋았다. 하는 식으로.. "
초기 2008년 생명밥상과 소식지의 모습들 0803-7/18 <이야기 꽃피는 생명밥상> 식구(食口) 여러분 밤에도 식지 않는 열기에 밤잠 설치지는 않았는지요.
다 알다시피 화석연료의 지나친 남용은 지구온난화를 불러왔고, 그 결과 우리는 나날이 높아가는 물가와 경제적 압박, 정치 사회의 불안 속에서 그 돌파구를 인류는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때를 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지난 18-20세기보다 21세기 현재 태양열이 상당히 높아져 지구가 열받는 일이 시방 벌어지는 것이기도 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무튼 지나친 열에 적응하기에 많은 스트레스와 고생이 뒤따를 것은 분명합니다. 농부의 생각은 세상만사 서로 열내고 열받는 일 자제하고, 순리를 따르는 한가한 걸음걸이에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면 합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마석(수동면)에서 건강교실을 진행하고, 춘천불교방송에서 내일(오후 5시) 방송예정인 프로그램 녹음을 하고, 밭으로 달려가 채소들을 거두었습니다. 금새 해가 저물어 고추도 따지 못하고, 아욱도 베어오질 못했습니다. 비름나물도 그저 쳐다만 보았습니다. 비가 자주와 그런지 쑥쑥 잘도 자랍니다. 웃자라 자시기에 불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렇다고 한 주간에 두 번 배달을 할 수도 없고…. 제때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김매기가 여러 날 미뤄져 마음이 부산합니다. 밀벤 자리엔 온 동네 산비둘기와 꿩이며 이름 알 수 없는 새들의 집회장소요, 야유회 장소인 듯하고, 논엔 청둥오리 떼와 황새가 우렁이 까먹는 건지, 아님 벌레 잡수시는지 흙탕물을 만들며 노닙니다.
이번 주 밥상에 오를 먹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무, 얼갈이배추 1통(쌈으로 드세요), 상추와 쌈채류, 조림용 감자와 큰 감자, 강낭콩 약간씩, 쥬키니 호박 등입니다. 가정별로 각 농산물의 정량을 재어 담는 일이 성가시기도 하고, 마치 가족에게 상인이 되어 파는 듯싶어 넉넉히 손에 잡히는 대로 넣기로 하였습니다. 이 점 이해바랍니다. 더 넣어왔다고 역정을 내시진 않겠지요? (반대로 때로는 덜 들어갈 수도 있음을 …) 모든 가정에 평화를 빕니다. 農夫 한 주 희
2009년 봄내살림 탄생후 변화된 생명밥상과 소식지
종종 다른 지역에서 봄내살림을 방문한다. 일주일에 한번 씩 지역 친환경 농산물을 주는 대로 먹는 소비자 있다? 봄내살림에서 하고 있는 생명밥상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견학을 오는 것인데 인터넷 뉴스마저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의 취향과 선호도를 중시하는 요즘 감히 소비자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사업을 벌인다는 것이 모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희귀한 형태의 회원 직거래 사업, 회원 수가 넉넉하지 않아도 그런 밥상 거래가 국내에서도 벌어지고 있고, 또 밥상을 신청하는 회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기도 한다.
그 희귀한 생명밥상. 그 사람들이 과거의 생명밥상의 모습을 마주한다면 얼마나 더 놀랄까. 사실 지금의 생명밥상은 경신씨가 말하는 ‘원시적인’ 그 때의 생명밥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생각의 변화이기도 한데 ‘주는 대로 먹는다’는 불편함 대신 요즘처럼 너무도 많은 걸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해방시켜주는 서비스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무얼 해 먹을지 하는 고민 대신 이것도 해먹어 볼 수 있게끔 도움을 주는 것. 그래서 최대한 농산물로 식단을 구성해주고, 레시피도 첨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1차 농산물과 더불어 가공품이나 육류도 종종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런 부분에선 과연 지금 생명밥상이 정말 더 발전적인지 따져볼만 할 일인 것 같기도 했다.
또한 예전 생명밥상이 원시적이었다고는 하나 철저히 나눔의 방식이었다. 소비자들은 생명밥상을 통해 편리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껴안았다. 기존의 식습관을 억지로 깨야 했고, 그 것이 싫을 땐 생산자와 기꺼이 논쟁을 벌여야 했다. 또한 20가구가 저소득층 1가구와 밥상 꾸러미를 나누기도 했다. 밥상의 역사, 나눔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농산물도 빈번히 변경되고, 심지어 나오는 농산물이 없어 빈 꾸러미일 때도 있을 만큼 주먹구구식이었지만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공동체적인 끈끈함과 나눔의 모습들이 있었다. 이런 나눔의 철학들, 지금의 생명밥상이 다시금 껴안아야 하는 것들이 아닐까.
밥상의 역사를 들으면서 현재의 밥상을 다시금 보고, 또한 미래의 밥상을 그려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허락해준 경신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춘천여성민우회 활동가 경신씨가 전하는 함께해요! 메세지
|
출처: 살림하는 개구지 원문보기 글쓴이: 개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