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의 도사요 사생의 자부이신 우리의 근본스승 석가모니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례 하옵니다.
오늘은 석가모니불에 대해서보다는 예불 문에 나타나 있는 석가모니불에 대한 정의 곧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의 세 낱말을 심도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三界導師
첫째 석가모니부처님을 삼계의 도사라고 하였습니다.
삼계의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계란 무엇인가?
삼계란 생사 윤회하는 중생의 세계로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들 세계는 중생의 속성인 삼독 곧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짙고 얕은 정도에 따라 각기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삼계 중에서 탐. 진. 치 삼독이 가장 많고 가장 저열한 세계가 욕계로서 특히 欲界는 탐욕이 많아 정신이 흐리고 거칠며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어리석게 살아가는 중생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欲界에 속하는 세계로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의 세계 와 28천으로 나누어지는 하늘나라 중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의 육욕천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지옥은 가장 짙은 삼독의 기운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고 타화자재천은 탐욕이 극히 미세한 중생들이 사는 세계이며 우리가 사는 人間界는 스스로가 하기에 따라서 三毒心을 극복할 수도 있고 三毒 속에 더욱 깊이 빠질 수도 있는 선택의 意志를 지닌 존재들이 사는 世界입니다.
色界는 비록 욕심은 떠났지만 아직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키는 미세한 진심과 치심이 남아있는 衆生들이 사는 世界입니다.
이 色界는 모두 하늘나라에 속하는데 범천에서부터 대자재천까지 18천이 있습니다.
無色界는 탐욕과 진심이 모두 사라져서 물질의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아직 “나”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데서 일어나게 되는 정신적인 장애 곧 치심이 남아있는 세계입니다.
이 無色界는 중생이 사는 세계 가운데 가장 깨끗한 세계로서 미세한 自我意識으로 인한 어리석음만 떨쳐버리면 완전히 解脫하여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 세계에는 공무변천. 식무변천. 무소유천. 비상비비상천 등의 四空天이 있습니다.
古代 인도인들은 지옥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비상비비상천까지를 땅 밑에서부터 허공으로 올라가면서 차례로 형성되어 있는 유형적인 世界로 인식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三界를 단순한 입체적인 공간으로 보지 않고 정신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衆生의 미혹에 따라 전개되고 修行의 깊이에 따라 펼쳐지는 세계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곧 三界를 戒. 定. 慧 三學을 성취함에 따라 전개되는 체험의 세계로 해석함과 동시에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정신적인 영역으로 해석하셨던 것입니다.
나아가 중국의 달마대사나 우리나라의 원효대사 등 수많은 고승들은 三界를 특별한 世界가 아닌 우리의 일상생활권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탐. 진. 치의 三毒心을 戒. 定. 慧 삼학으로 바꿀 때 곧바로 三界를 벗어나 解脫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마음속에 이와 같은 三毒心이 더하고 덜함에 따라 三界의 여러 세계를 그 때 그때 옮겨 다니게 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관련한 이야기 한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옛날 백은 스님께 한 무사가 찾아와서 여쭈었습니다.
“스님 부처는 그만두고라도 천당과 지옥이 정말로 있는 것입니까?”
‘당신 무엇 하는 사람이요?’
“예 저는 무사입니다.”
‘하하! 당신이 무사라고? 도대체 당신 같은 사람의 호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군. 머저리 같이 생긴 놈에게 생명을 맡기다니!’
모욕을 느낀 무사의 손이 허리에 찬칼로 옮겨 갔지만 백은 스님은 계속 그를 비웃었다.
‘그래 칼을 가졌군. 내목을 자르기에는 그 칼이 너무 무딜걸?’
무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들었을 때 스님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입을 열었다.
‘지옥의 문이 열렸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무사는 크게 뉘우쳐 칼을 다시 꽂고 무릎을 꿇었다. 그때 스님은 말씀하셨다.
‘천당의 문이 열렸구나’
지옥의 문과 천당의 문은 이렇게 열리고 이렇게 닫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三界의 실체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바요 三界는 오직 一心이다.” 라고 하신 원효대사의 말씀처럼 三界 속에 모든 세계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떠한 마음을 지니고 어떻게 한마음을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三界의 실체를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欲界. 色界. 無色界의 三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人間界에 비하면 너무나도 깨끗한 色界. 無色界조차 이상향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을 통하여 “三界에 편안함이 없음은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 三界의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의 경지로 인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삼계의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것일까?
<법화경>에서는 불타는 집 속에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는 아이(중생)들을 급히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아버지(부처님)가 취하는 방편 이야기인 화택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방법을 쉽게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수십 명의 아들과 함께 사는 한 부자가 매우 넓고 큰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는 출입을 할 수 있는 문은 단 하나밖에 없었으며 집은 낡아 벽은 떨어지고 기둥뿌리는 썩고 대들보는 기울어져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속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집 전체로 번져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부자의 아들 수십 명은 모두 집안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애들아 큰일 났다! 빨리 뛰 쳐 나가거라.”
그러나 재미있는 놀이에 심취한 아들들은 아버지의 외침을 듣고도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생각 하였습니다.
“이 집에 조금만 더 지체하게 되면 모두가 불에 타 죽을 것이다. 방편을 써서라도 이 아이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아버지가 너희들이 좋아하는 노리개 감을 준비했단다. 지금 너희가 이것을 갖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들이 지금 문밖에 있으니 빨리 나가 마음에 드는 수레를 골라서 타고 놀아라.
그 수레들을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
아이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앞을 다투어 뛰쳐나갔고 아들들이 불타는 집에서 무사히 벗어난 것을 본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아들들에게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된 아주 멋있는 큰 수레 하나씩을 주었는데 그 수레는 털빛이 깨끗하고 몸체가 좋은 흰 소가 끄는 것이었습니다.
이 흰 소는 힘이 셀 뿐 아니라 걸음걸이도 평정하고 빠르기가 바람과 같았습니다.
이 비유속의 아버지는 부처님이고 아들들은 衆生이요 불자들인 것입니다.
衆生들은 바로 내 마음의 불집 속에서 매일같이 속을 태우고 볶고 끓이고 썩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 불집 속에 들어가 속을 태우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衆生의 삶이며 집이 불타고 있는 데도 그 집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기에 바쁜 존재가 바로 衆生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衆生들 각각에 맞게 적절한 방편을 베풀어서 그들이 불타는 집 밖으로 나오게끔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즉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聲門의 성품을 지닌 이에게는 양의 수레를 , 홀로 조용히 명상하기를 좋아하는 緣覺의 성품을 지닌 이에게는 사슴의 수레를,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菩薩의 성품을 지닌 이에게는 소의 수레를 주어 이끌어 들인다.
그러나 부처님의 慈悲는 결코 성문. 연각. 보살의 경지에 멈추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방편으로 세 종류의 수레를 제시하지만 결국에는 그들 모두에게 흰 소가 끄는 大白牛車 곧 一佛乘의 가르침을 내려 三界를 벗어나고 마침내 부처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禮佛時에 부처님을 일컬어 삼계도사 즉 “삼계의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스승”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불 문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을 四生의 慈父라고 하였습니다.
四生은 모든 생물이 생겨나는 형식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胎生. 卵生. 濕生. 化生이 그것입니다.
胎生은 사람이나 소. 말 등과 같이 어미의 뱃속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모습을 갖춘 다음 태어나는 중생들이고
卵生은 새나 고기처럼 알에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지칭하는 말이고
濕生은 아메바나 세균류 등처럼 습한 곳에서 스스로 분열 번식하는 중생이요
化生은 의탁할 것이 없는데도 홀연히 변화하여 태어나는 중생을 가리키는 데 예를 들면 지옥이나 천상에 태어날 때는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 하지 않고 곧바로 나아가 化生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러한 사생 중생 곧 모든 중생의 자상한 어버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물론이요 하찮은 미물에까지도 어버이와 같은 자비를 베푸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특징인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신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부처님만의 특징인 것입니다.
흔히 타종교에서는 인간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또 타종교의 신들은 자기를 믿는 인간만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푼다고 합니다.
인간 이외의 生命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얼마든지 죽이고 이용할지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달랐습니다.
一切 衆生을 모두 평등하게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철두철미한 不殺生의 정신아래 하찮은 미물에까지 자비를 베푸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폭이 그 어떤 성인들보다 크고 넓었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가 나와 한 몸이요 모든 중생이 하나”라는 폭넓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상(我相)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잘났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로 이 我相만 버려도 성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생각(人相). 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 생명체라는 생각(壽者相=命相)마저 남김없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나. 인간.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면 온 우주와 저절로 하나가 될 수 도 있고 참다운 깨달음이 스스로 다가오며 일체를 나의 몸과 같이 돌보는 慈悲는 저절로 샘솟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아끼고 돌보는 부처님의 크나큰 慈悲가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린 크나큰 깨달음 속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예불 문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시아본사’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是我本師란 글자 그대로 “나의 근본 스승”이라는 뜻인데 왜 하필이면 석가모니불만을 시아본사로 삼는 것인가?
불자들 중에는 관세음보살을 스승으로 삼아 일평생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사람도 있고 아미타불만을 열심히 찾는 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지장보살을 어떤 이는 존경하는 스님이 가르침만을 따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각자가 믿고 따르는 스승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불보살도 석가모니불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고 모든 스님들 또한 거슬러 올라가면 석가모니불의 맥을 이은 분들인 것입니다.
불교는 이분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이분은 모든 衆生을 부처로 사바세계를 佛國淨土로 바꾸고자 한평생을 설법하고 교화하며 衆生과 더불어 살다 가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 사바세계를 불국정토로 바꾸기 위하여 또 잡된 것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중생들의 마음을 평온과 행복이 깃든 마음으로 바꾸기 위해 이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문을 여는 선구자가 되셨든 것입니다.
깨달음의 길을 찾고 깨달음을 이루어 그 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길을 열어 보이는 자상한 스승이 이었기에 또 예불을 드리는 우리에게 해탈의 씨를 심고 우리에게 해탈의 문을 열어준 가장 근원적인 스승이기에 예불 문에서 석가모니불을 是我本師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三界의 대도사요 四生의 慈父이며 우리들의 근본스승이신 석가모니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한 차례의 절을 올리면서 깊은 믿음의 씨를 심고 가르침을 잘 준수하겠다는 결심을 한다면 그 결심과 함께 우리는 나날이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