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서 론(3장1)
미국 콜럼비아 대학의 맥스웰 말츠라는 성형외과 의사가 신체적 장애가 있고, 얼굴에 결함이 있는 사람들을 수술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열등의식과 불만과 분노로 가득한 성격과 인격이 돌변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아상이 달라지니 성격과 행동이 변화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자각하는 자아상이 있습니다. 이 자아상은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고 미래를 지배합니다. 인간은 그의 자아상 이상으로 성장하거나 발전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아상을 잃어버리면 정체성의 위기를 맞아 열등의식과 패배의식 속에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잃어버리는 자아 상실의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개성과 인격을 상실하고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잃어버린 참된 자아상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건강한 자아상을 회복하고 새롭고 건강한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확한 자아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은 너무도 귀하고 특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II. 본 론
1.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필요합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입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자녀를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너무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사랑은 평범한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지음 받았고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영향권 아래서 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 사함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1절)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 위해 주시는 엄청난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남 모 여중 2학년에 다니는 여학생이 신장에 병이 걸려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어떤 교회 집사님이 자신의 신장을 그 소녀에게 이식하여 주는 수술을 하여 성공을 하여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신장을 준 집사님이 기독교 방송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자기 신장으로 생명을 건지고 살아난 한 생명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감동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주고 생명을 살린 자신이 대견하고 그 학생이 귀하게 보이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이 자녀를 볼 때마다 사랑스러운 것은 여러분의 생명과 여러분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신이 베푸신 그 구원과 생명 때문에 우리를 흐뭇해하시고,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불러 주십니다. 이제는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고, 우리의 생활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시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버지"라고 그 이름만 부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비밀에 대하여 세상은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세상은 "도대체 당신들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밖에서부터 안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것을 무엇인지 식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은 우리 같은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바로 그 분의 엄청난 사랑의 행위를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았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내 모습이 잘 나왔으면 그 사진을 잘 나왔다고 합니다. 언제나 자기가 중심입니다. 자기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언제나 불만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내가 어째서 남보다 뛰어나지 못한가?'라는 열등의식에서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60억 인구 중에서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을 유일한 존재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으므로 남과 비교해서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며 위대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아상을 갖고 자녀되는 권세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열등감을 극복하고 뛰어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하여 "너는 내가 지었다. 너는 내 아들이야. 너를 잃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다시 샀어. 너는 내 것이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되찾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2.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기의 신분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망각하면 눈앞에 일어나는 일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넘어지는 근본적 이유는 우리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중요한 사실을 인식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분과 그 신분의 위대성과 위상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재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장래에는 영광의 자리를 향해 나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 살지만 장차 하늘의 집에서 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에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03). 예수님은 하늘의 영원한 집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돌아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 우리는 베드로후서 3:13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더 믿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8:29에 보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하신다고 곧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21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51-52에서는"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영화롭게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모하셨을 때 너무나 찬란한 영광 중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들은 주님의 영광의 광채 중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영화로운 영혼에 걸맞는 몸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분과 같아 질 것입니다.
대도 조세형은 어릴 때 깡통 들고 서울 거리를 방황하고 여러 곳의 고아원을 전전하였던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범죄를 배우고, 가혹한 체벌이 있는 소년원에서 범죄 기술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그는 전과 9범이고, 교도소에서만 30년을 보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1983년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온 몸이 쇠사슬로 묶이고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교도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부터 찬송을 소리질러 부르기 시작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트레스를 풀고 교도관들에게 반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변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구의 종말을 보여 주시고 난 후였습니다. 1990년 더운 감방에 있는데 갑자가 정신이 몽롱해지고 지구가 요동을 치고, 땅이 갈라지고, 사탄들은 이상한 낫을 가지고 사람들을 헤치며, 무덤들이 열리고 시체들이 나오는 아주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두려워 큰 바위를 붙들고 떨고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세형아, 네가 언제까지 나를 가지고 놀겠느냐. 네가 갈 길을 보아라." 주님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빛으로 환하게 펼쳐진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보는 순간 불안이 사라지고,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 길 끝에는 십자가가 크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벌벌 떨면서 비로소 무릎을 꿇고 "주님, 나는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후 성경 말씀이 살아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엉터리 예배드린 것을 회개케 하였습니다. 그는 죄 밖에 모르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은혜임을 간증하며 재소자를 위한 "늘빛선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보게 될 것이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 분처럼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복된 이상이요, 영광된 소망입니까? 우리는 보잘 것 없고 실수투성이며 죄악되고 무가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지고 그 분의 놀라운 영광을 대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자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니는 영광스러운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을 움켜잡고 이런 소망을 바라보며 이 소망을 매일 묵상하여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자녀의 성결이 있습니까?
그런데 천국에서 영광된 삶을 즐기기 전 거쳐야 할 몇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육신에 거하며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케 하느니라"(4절)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선하고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성결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 갈 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성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결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자들입니다. 그곳에 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금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것을 알기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며 성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결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성결의 삶은 어느날 갑자기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날마다 힘써 훈련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 후의 천국의 영광의 빛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제 이런 빛 가운데에서 너의 삶을 가꾸어 나가라. 그리고 주님이 정결하신 것같이 너 자신이 정결하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결이란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고 노력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16세기의 천재 미술가 메켈란젤로가 큰 바위 앞에 앉아서 열심히 조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다가 미켈란젤로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때 그는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난 지금 저 바위 속에 갇혀 있는 천사를 풀어주려고 하는 것일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이르기전 여러 시험과 연단의과정을 밟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압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케 하기 위해 죄악을 내버리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결의 삶을 힘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2,13에는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결은 신비로운 체험처럼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성결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9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깨끗하게 씻는다는 것은 내적 행위와 외적 행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겉으로는 악으로 오염된 것에서 구속되고, 안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본질적 성품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죄를 피하고 거부합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고 힘씁니다. 그냥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조세형이 교도소에서 은혜를 받고 주님 안에서 자유한 것을 깨닫고 늘 찬송하며 예배드리기 시작하자, 교도관들은 그를 볼 때마다 빛이 나고, 아주 밝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교도관들과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교도소에서도 놀라운 일들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이 언제 오실지알 수 없습니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면, 이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이제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거나 쓸데없이 소모할 수 없습니다. 가능한 언제든지 매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있도록 노력하며 언제나 그 분을 대면하여 살아야 합니다. 최선의 힘을 다하여 정해진 목적을 향하여 전력을 다해 나가기 바랍니다. 장차 도달하게 될 영광의 자리를 향하여 주님을 향하여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추석이 되면 귀성전쟁이 벌어집니다. 고향을 찾는 설레임으로 떠났다가 고속도로에서 여러 시간 지체하면 다시는 안 간다고 다짐하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에 도착하면 모든 불평과 고통을 잊고 만남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장차 천국에 가서 주님을 볼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아진다는 확신을 움켜잡고,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시간을 최대로 절약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어진 모든 순간들을 다 사용하며 살 것입니다.
III. 결 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허락하시고, 장차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과 우리가 같아지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왕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왕은 왕같이 살아야 합니다. 왕이 거지같이 살면 안 됩니다. 왕으로서의 기품과 품위를 지키고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고민과 고통과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로 영광스러운 주님의 자녀됨을 자랑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I. 서 론(3장7)
1. 요즈음 퓨젼 음식이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퓨전 음식은 동서양 음식이 구분없이 혼합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된장국에 피자, 빈대떡에 케첩, 스파게티에 조개된장국 등입니다. 이렇게 퓨전 음식들은 일정한 공식도, 틀에 박힌 형식이 없습니다. 구태어 특징을 말하자면 한없이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무한대로 마음껏 변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퓨전 음식의 자유로운 특징을 생각하면서 이것이야말로 21세기에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형태라고 느껴집니다. 아니 자유는 모든 세대에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신앙인들에게 이런 자유와 멋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과 전통에 매이고, 영혼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두움과 죄악은 떠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새로운 감격과 위대한 인생의 승리를 경험하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개발하고 멋있는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느날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베를린 교외의 한 적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우 늙은 노인 한 사람과 스쳐 지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대하게 되었을 때 대왕이 말을 건넸습니다. "당신은 뉘시오?" "나는 왕입니다." "왕이라구요? 그러면 어느 나라를 다스리고 계신가요?" "내 몸이 내 나라입니다. 나 자신을 다스리니까 이것이 곧 통치하는 것과 같지요. 그리고 내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니까 곧 신하가 되는 거지요." 이 노인의 말대로 우리는 스스로 왕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스스로를 다스리고 명령하기는 고사하고 유혹과 나태와 정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유대 외경 집회서에는 "길들이지 않은 말은 사나와지고 제멋대로 자란 자식은 방자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정욕을 잘 다스려 나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왕의 자녀로서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나를 다스리고 통제한다는 것은 좀처럼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입니다. 동시에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라고는 하지만 자유롭지 못하고 무엇엔가 눌리고, 세상에 속박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를 잃은 한 사람의 모습을 소개해 드립니다.
몇 해전에 쇼핑중독에 빠진 처녀가 있었습니다. 부잣집 외동딸로 자라면서 원하는 건 뭐든지 사주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별다른 목적없이 쇼핌만을 위해 백화점을 유흥가처럼 헤매이며 소비적이고 화려한 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부가 결혼하고 보니 샐러리맨이 갖다주는 월급으로는 불가능하습니다. 최고의 취미생활을 뚝 끊고 살아가려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친구의 권유로 백화점의 모니터가 되었습니다. 모니터는 자기가 속한 백화점에 월4회, 경쟁 백화점에 월2회, 최소한 월6회 이상을 백화점을 찾아 매장을 둘러보고 안내 데스크, 상품권판매소 등을 오후 12시부터 약 6시간 정도 점검하면 됩니다.
별다른 목적없이 헤매이던 때와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백화점을 다녀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다니다 보니 당당한 일터, 직장이 된 것입니다. 하루 종일 거의 백화점에서 살다보니 거짓말처럼 쇼핑중독 증세가 사라졌습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쇼핑객들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 내가 저랬겠지? 내 모습이 저렇게 한심했겠지?" 또한 그녀는 백화점 매장을 점검하고 월2회 보고서도 작성해서 제출하면서 자연스럽게 책상에 앉아 글쓰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학창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언제부터 내가 잘못되었을까?"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출발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다시 태어나는 거야. 학생처럼 공부도 하고 물질을 초월해서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거야." 그녀는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였습니다. 그가 만일 쇼핑중독이 심해져서 정신병원에라도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도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시험을 받는 세상에서 육신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II. 본 론
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은 두 종류의 인간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담의 자손과 아담의 자손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담 자손의 운명은 죄를 짓다가 죽고 그 후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니고 사죄와 은총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영광 중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을 통하여 아담의 후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증거하고 전해 주어서, 그들을 죽음의 운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하여 영생의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명과 책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한 사람을 가르킵니다. 이 말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요, 동시에 부활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믿고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죄에서 떠나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의로운 생활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평생 추구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한 자요, 죄를 이긴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의 세력을 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탄의 모든 세력을 꺽은 자들이요, 사탄의 모든 유혹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악과 유혹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가짜 그리스도인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로마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진정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변화의 능력은 의로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그것은 적극적으로는 의를 행하고, 소극적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죄가 있습니다. 죄를 생각하고, 죄를 짓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좌절감과 절망과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이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였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하는 유일한 비결은 죄를 이기시고, 우리를 보혈로 씻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넘어져도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 죄의 문제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가게 되면 죄사함을 받고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선을 행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착하고 싶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는 악을 저지르고 싶은 본능도 있습니다. 욕을 하고, 때리고, 죄를 짓습니다. 용서가 안되고, 분노하고, 절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악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은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집에 들어와 물건을 훔쳐가듯이 사탄이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와 우리를 유혹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죄의 결과로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는 두 가지 본성이 있습니다. 죄를 덜 짓고, 많이 짓는 차이가 있지만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입니다.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두 가지가 주어집니다. 쾌락과 이익입니다. 이상하게도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고, 짓지 말라는 죄는 더 짓고 싶고, 죄를 짓고는 은밀하게 숨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죄를 벗어버리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영혼을 덮고 있는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들이 하나씩 벗겨지게 됩니다. 요즈음 감기를 앓는 환자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서 건강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병들었다면 치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성을 떼어 버리고 싶은데 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영적인 전쟁이 생겨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우리의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전쟁을 하여야 합니다. 엄청난 전쟁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죄를 지을 것이냐 짓지 않을 것이냐, 선을 행할 것이냐 행하지 않을 것이냐 이것을 놓고 싸운 것입니다. 사람을 생각하고, 세상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를 행할 것인가를 결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이 있고,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육신의 길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을 변하게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환경과 가족이나 부모나 친구의 탓이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것은 대 환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바꾸려 하면 여기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우리의 성격이 변하고 삶이 변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의 영은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육의 본성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의 연약함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인간은 유리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아직도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의지와 방법으로는 육신의 욕망이 제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애써 철야하고, 금식하고, 노력해도 우리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고치면 고칠수록 더 악화되고 노력하면 할수록 좌절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서 우리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나는 혼자 절대로 승리하지 못합니다. 군인이 전투에 나갔는데 사방에서 적이 공격한다고 가정을 합시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방패와 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방에서 그를 향해 창을 던지고 활을 쏘아댑니다. 이 군인이 얼마나 견딜 수 있습니까? 일시적으로 버틸 수는 있어도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그런데 옆에 보니 요새가 있습니다. 이 요새로 뛰어들어가면 어떤 창도, 화살도 다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처가 났지만 그 요새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악을 피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지만 안 됩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강건케 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주님을 힘입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 속하여 있으면 어떤 사탄의 공격도 우리를 해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추악한 죄를 지어도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심판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회복됩니다." 찬송가 188장이 있습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피할 바위이십니다. 우리의 승리를 보장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괴롭혔던 육신 안의 죄와 사맘의 권세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성령님이 지배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속하시고, 주님의 권세를 인정하시면 모든 죄와 사망을 이기게 됩니다. 이것은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을 몰아내려고 싸우면 안 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영접하면 내 안에 있는 악은 자취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 왔던 여인을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용서와 새 삶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우리 안에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어떤 변화가 생깁니까? 죄가 우리를 다스리던 힘은 사라지고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게 됩니다.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육신의 것들을 좋아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면 이전 것들이 재미있지를 않습니다. 육신의 일들이 시들해집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짓기가 어려워집니다. 죄를 지으려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려면 고통스럽습니다. 이전에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생각없이 죄를 지었는데 이제는 죄를 지으려고 하면 두근두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재미없고 선을 행하는 것이 재미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격도 변합니다. 생각도 변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비판하던 말이 변하여 남을 격려하게 됩니다.
성경은 죄를 지으면 마귀에게 속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어 마귀에게 속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죄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이론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렇게 쉽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만만하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더립힙니다. 귀신은 더러운 영입니다. 그것들이 가는 곳마다 더러워집니다. 귀신은 속이는 자요, 우리를 죽이고, 우리 몸에 병을 일으킵니다.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고 열등감을 갖게 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폐쇄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마귀가 쓰기에 좋은 그릇으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모든 악의 세력들은 우리 몸을 꽁꽁 묶고 우리로 하여금 종노릇하게 합니다. 마귀가 묶어서 자기가 끄는대로 우리를 끌어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육의 욕망과 더러운 귀신들을 사용해서 우리를 이렇게 죽이고 멸망시키고 파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마귀가 쓰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행하시도록 합니다. 여러분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셔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드리는 시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배드리는 시간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예배 시간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면 마귀가 가져 갈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일 주일 내내 교회가고 예배드리는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음악회, 컴퓨터, 세상 모임, 계 모임 등에 따라다니다 보면 좋기는 하지만 죄 지을 확율이 높아집니다. 안 만나도 될 사람을 만나고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게 되는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을 하나님이 점령하게 만드십시오. 여러분의 시간을 마귀가 쓰기 전에 하나님이 쓰시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우리를 점령할 수 없게 됩니다. 중간지대에 놓아두면 마귀가 나를 점령할 확율이 높아집니다. 마귀는 우리를 유혹합니다. 나쁜 친구를 만나면 그가 우리를 끌고 다니면서 나쁜 일들을 가르쳐 주는 것같이 마귀는 우리를 끌고 다니면서 쾌락과 물질과 세상의 성공이라는 대가를 줄 것입니다. 파우스트가 마귀에게 자기의 영혼을 팔아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잠시 동안 세상의 쾌락을 느끼고, 잠깐의 명예를 가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시간과 물질과 몸을 마귀에게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려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지배하려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면 마귀는 저절로 우리의 몸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죄를 조정하고 죄를 생산합니다. 그는 원래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함으로 땅에서 쫓겨 난 것입니다. 모든 악이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모든 악을 지배합니다. 여러분 이제 마귀에게 속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머리와 몸을, 영혼과 생각을 내어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 된 것은 너무 기뻐서,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감동을 받고 눈물이 있고 손해와 힘든 일이 있어도 열정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요즘 인기인들에게 여학생들이 보여주는 환호와 아우성과 난리법석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인기인들의 머리카락이라도 가지려고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헌신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은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게임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밤을 세워서 합니다. 헌신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 헌신되시고, 하나님께 연합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생활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또 다시 죄의 노예로 살 수는 없습니다. 마귀의 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선언하시고 죄를 끊고 주님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두 종류의 인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상속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멸망으로 향하고 있는 마귀의 자식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의를 행하지만, 마귀의 자녀는 죄로 가득한 삶을 삽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아벨의 제물에만 기뻐하셨습니다. 생명있는 제물을 드렸고,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사람 가인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노로 가득하고 의로운 아우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다스려야 할 죄를 내어 버리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이 버림을 받고 헬레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귀절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개의 힘(칼과 정신)이 있는데 정신이 항상 칼을 이겨냈다." 올바른 생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세속적 성공의 무익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현세적인 권세와 물질적인 주권은 흘러 내리는 모래와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정신은 칼에만 아니라 모든 적수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항상 우리들의 정신 세계에는 싸움터가 있습니다. 즉 악과 선의 투쟁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면 영원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I. 서 론(3장13)
1. 중국 사람들의 말에 "종록자 불견산"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슴을 따라가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눈 앞의 작은 이익과 즐거움을 구하는 자는 인생 전체를 볼 수 없고, 현실의 만족과 성공만 추구하면 결국은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빠르게 도망하는 사슴 한 마리를 잡으려고 막 쫓아가는 사람에게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눈에 보이지 않고 마지막까지 따라가다 죽을 것을 모르고 자기가 죽을 자리로 들어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끌고 가는 것은 욕심이란 본능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열 살 때에는 과자에 움직이고, 이십대에는 연인에 끌리고, 삼십 대에는 쾌락에 끌리고, 사십 대에는 야심에 끌리고 오십 대에는 탐욕에 끌린다. 그러나 이렇게 무엇엔가 끌리고 있는 동안 인간은 허수아비일 뿐이다." 여러분들을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욕망의 포로가 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습니까? 우연이 젊은이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얘! 나 엎그래이드 하려다가 엎어졌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어 도전하였지만 역부족이 되어 인생에서 넘어지거나, 재미 좀 보려다 재미 커녕 별 볼일 없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되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의식을 가질 때, 그 때부터 인간입니다. 그러나 참된 인간과 삶에 대한 바른 해답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살아간다 해도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습관적으로 조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항상 조는 집사님을 깨우기 위해 설교 중에 "천국가고 싶은 사람은 다 일어나시오"하였습니다. 그러자 다 일어났는데 졸던 집사님은 일어나지 못하고 당황하였습니다. 다음 다시 졸 때 목사님은 "지옥가고 싶은 사람은 일어나시오"했더니 다 가만히 있는데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황하여 앉으면서 집사님은 "뭐 나 혼자 서 있는게 아니네!"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는 항상 진리를 말하지만 자신은 준비되지 않음을 꼬집어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 삶의 의미를 알고, 목표와 사명을 발견하여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가 되었다고 설명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넘침으로 우리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참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인생의 의미를 알고, 생명을 아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명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II. 본 론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 생활 속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예수님을 모셨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첫째는 세상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미움으로 가득합니다. 12절에 보면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세상에 속한 자의 표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영적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자들이며 저 안에 영생이 거합니다. 반면에, 가인에게 속한 사람들은 "사망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죄악가운데 여전히 죽은 자들이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저들 가운데 영원한 생명의 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삶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귀에서 속한 자로, 악한 자에게 속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삶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사탄을 근본적으로 타락하게 한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타락하였습니까? 그것은 자기 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이 더 많은 관심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이기적인 삶을 택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인 생각과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나만이 옳고 내 생각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기주의가 관철되지 않으면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두 친구가 수도자를 도와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두 젊은 친구는 한 사람은 욕심이 많고 한 사람이 시기 질투가 많습니다. 해질 녘이 되었을 때 수도자는 동행한 것이 고마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자네들의 소원을 들어 주겠네. 그런데 딱 한 가지만 말하게. 한 사람이 소원을 말하면 다음 사람은 자기가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먼저 소원을 구한 사람의 두 배를 가지게 되네." 그런데 처음 말한 사람은 하나를 받고, 그 다음은 배를 받게 된다니까 이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욕심과 시기 질투가 많아서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욕심많은 사람이 시기 질투 많은 사람에게 협박을 했습니다."이 놈아, 먼저 말해. 아니면 죽일거야!" 그랬더니 이 시기 많은 사람이 "내 눈 하나 빼 주세요." 정말 눈 하나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두 배를 받을 사람은 눈이 둘 다 빠졌습니다. 이것이 세상이고 인간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속한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선한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항하였고, 마귀에게 속한 자도 역시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백성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모두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급기야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내가 얼마나 정성껏 예배드렸는데 난 거들떠도 보지 않고 아우 것만 받으시다니..." 이런 관심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2. 세상에 나가면 세상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미워합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인이 곧 세상이 아벨을 그리스도인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경우를 봅니다. 다윗과 사울의 경우를 보아야 합니다. 사울은 철저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삽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합니다. 사울은 얼마나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악하게 대하였습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상의 사람들은 "저를 못박으시오!"라고 외쳐 댔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싫어합니다. 그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저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소유한 생명 때문에 우리를 미워합니다. 주님은 한번도 나쁜 일을 하시지 않으셨고,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주님을 싫어하였습니다. 주님은 완전하셨고, 그들의 잘못된 부분을 정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착하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신 그리스도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미움당해도 기죽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핵심은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되고,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격이 있다 없다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가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포기하지 말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부가 아니고 절대적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앞에서 자기 부족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 감사해 하고 감격해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제 그 사랑은 성자 하나님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 사랑이 필요한 형제들을 향해서 이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이것을 부여받았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본성을 부여 받음으로 이전에는 결코 소유해 보지 못한 생명의 원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 가운데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소유하고, 같은 인생관을 소유하고, 같은 소원을 가지고 사랑으로 삽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기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기뻐하며 책임을 다하는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 보니 사랑하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정작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랑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내가 지금 빚을 많이 지고 있는데 예수 믿는 채권자들이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면서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아요"라고 식의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 사람이 사랑하지 않나?' 용서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 사람은 왜 용서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용서하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희생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사랑이 없고, 목사, 장로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바르게 믿음의 성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두 기독 청년이 같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친구에게는 먹을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먹습니다. 그래서 빵을 좀 나누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 줍니다. 그래서 "넌 그리스도인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말씀도 모르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하는 구절도 있지 않느냐?"고 하더랍니다. 이 친구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질문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개의 손을 주셨다. 하나는 받기 위한 손이요, 하나는 주기 위한 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의사요 상담자인 폴 트루니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받는 데서 약간의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주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지고의 희열을 주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베풀 때에 거기서 사랑을 경험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제공해 줍니다. 이 사랑의 정신이 신앙의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 계명에는 하나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웃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눅10:27). 이 계명을 말하던 서기관이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어쩌면 이 명령을 회피하려는 요량으로 신학적 논쟁을 노렸는지도 모릅니다. 이때 예수님은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내 옆 집에 사는 사람만 내 이웃이 아니고 내 가족만 내 이웃이 아닙니다. 어느날 내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그가 내게 관심을 요구하고 내 애정을 요구하고 도움을 구한다면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이웃입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만나 쓰러져 피흘리는 이웃 그가 우리의 사랑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III. 결 론
지난 월요일에는 한 모임에서 여자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김태완 목사님은 유교의 가정에서 자랐고, 교회를 다니다 반대에 부딪쳐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공부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이러다가 진학하기도 힘들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학을 못하면 꼭 해보고 싶은 미팅을 할 수 없겠다 생각이 들어 공부했습니다. 결국 진학을 했습니다. 원하고 원하던 미팅을 해보았는데 별로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고, 2차를 청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미팅을 해도 별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인생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풀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서오경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책 중에 공자에게 제자가 질문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선생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4대성인 중 한 사람이지만 생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대목에서 더욱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한 모임에서 성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 표지에 "만일 이 책을 읽다가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이리로 연락을 주시오."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 책에 인생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성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이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그러다가 욥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이다"(1:21)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내셨다는 부분에서 깨달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자기는 공자보다 더 위대하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재 교도소의 죄수들에게 성경을 전하고 쓰게 하는 방법으로 전도를 하고, 광주에서 옥합교회를 시무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찾았는데 하나님을 만나며 참 생명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영혼을 찾는 일에 그의 인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가 진정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가운데 에릭 흐롬과 프로이드가 있습니다. 이들의 인간관은 매우 비슷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기적 인간이 추구해야할 삶의 모습을 설명하는데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이기적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서 인간다움의 의미를 찾아내려 합니다. 반면 기독교적 가치관에 가까웠던 에릭 프롬은 오히려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서가 아니라 그 욕망을 부인하는데서 인간은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목적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프로이드가 본능적인 삶을 인간다움의 충실한 삶으로 보는데 반해 프롬은 고상한 목적을 위해 자기의 욕망을 부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사회가 어두운 사회는 아닙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의 사람들이 일어난다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당신을 드린다면 세상은 밝아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대강절을 맞아 어떤 사랑으로 주님을 맞이할 것인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I. 서 론(3-19)
21세기가 불과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21세기는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불과 한 시간 뒤의 일도 알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것이요,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불안과 초조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나 어떤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안심이 되며 인생을 자신있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사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근심과 걱정 속에서 두려워하며 삽니다. 이 불확실하고 세상에서도 안심하고 담대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신학자 가운데 본 훼퍼가 '옥중서신'이란 유명한 책을 남겼습니다. 그는 독일의 젊은 신학자로서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죽이고 기독교까지 핍박하는 상황에서 저항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옥중에서 그가 썼던 편지들이 옥중 서신이라는 책으로 엮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 편지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확실히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는 옥중에 있으나, 히틀러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 안에 있음을 확신한다는 말을 남긴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있을 때에 즉 하나님을 더욱 알고 의지할 때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60년대 유명한 복음주의자이며 교회의 선지자 역할을 감당한 토저 목사는 오늘날 교회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첫째는 믿는 자가 성장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며 살만 찐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믿는 자가 교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오직 참관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믿는 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고 분열과 다툼만 일삼은 것입니다. 토저 목사는 이것을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알 때'만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II. 본 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은 한 마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삶에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즉 소멸되지 않는 불변의 힘을 가진 생명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는 삶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항상 생명의 관계를 이루는 삶입니다. '영생'하면 영원한 삶, 곧 한없이 오래 사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끝없이 오래 산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병들고 고생하면서 오래 산다면 결코 오래 산다는 것이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화가 될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홀로 영원을 소유하시고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영생을 갖고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길게 사는 것만이 영생이 아닙니다. 오래 살아도 그 질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평한 삶은 사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화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일생을 사는 동안 온갖 상황에서 언제나 따라 다니는 두려움에서 해방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영생은 좌절을 극복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능력이신 힘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그것은 환경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다윗은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27:1)라고 하였습니다. 이 영생이 능력이 되고, 평화가 되는 것은 영생이 궁극적으로 죄를 극복하고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성도라고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은 거룩한 옷을 입고 성결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9절과 20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죄함이 없는 삶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혹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있거든"이란 말은 나의 마음이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아주 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알게 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에 대해 알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훨씬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알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죄악의 절반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눈에 안 뜨이는 결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 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감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 앞에 나가면 우리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탐조등에 의해 그리고 엑스레이에 의해 관찰되고 검사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의 죄를 오히려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6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0:19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힙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담대함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자녀로 나갑니다. 물론 우리는 깊은 죄의식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책감과 동시에 우리에게 담대함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지금 광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송재식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불란서에서 개혁자들의 신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마피아에게 오인되어 기관총으로 배에 난사를 당하였습니다. 너무 위중하여 대충 꼬매는 정도의 수술을 하였고, 10여일 이상을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자기의 과거의 삶이 필림처럼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그의 신학의 방향은 온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영혼을 사랑하며 모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사고로 배꼽이 없어졌으나 하나님을 만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신앙의 핵심임을 알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면 잃을 것이 없습니다. 이미 세상을 작고한 미우라 아야꼬는 살아있을 때 많은 병으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척추 카리에스, 대상포진, 결핵, 직장암, 파킨스병등 난치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병으로 잃은 것은 오직 건강 뿐, 오히려 병으로 신앙과 소설 쓰는 즐거움을 얻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2000년전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 하면 우리의 마음에 담대함을 주십니다. 담대한 마음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마음 속에 모시지 못한 마음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시면 강하고 담대하고 평안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27에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마음에 담대함이 없고 평안이 없습니까? 진정으로 주님을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의 마음 속에 세상적인 것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비우지 않는 한 담대함과 평안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연세대 황수관 박사가 건강에 대한 강좌를 하면서 자기 몸의 건강을 체크하는 법을 말하였습니다. 눈을 감고 자기 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무 것도 없다고 느껴지면 건강한 사람이요 반대로 무엇이 있다고 느껴지면 바로 그 부분이나 그 기관이 건강치 못하다는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발가락이 있다고 느껴지고 그래서 가렵거나 통증이 있으면 발가락에 무좀이 있거나 동상이 있거나 여하튼 건강치 못하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심장이 튼튼한 사람은 심장이 있는지 없는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장이 약한 사람은 심장이 확실하게 있음을 잘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담대함이 있으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와 근심과 초조함과 죄책감이 있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올바른 관계가 없는 한 담대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할 때 무한히 담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고소를 당해 로마 군인에게 붙잡혀 매를 맞았습니다. 아주 심한 매를 맞고 감옥 깊은 곳에 갇혔습니다. 이때 바울과 실라의 마음은 오직 평안과 담대함이 가득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큰 소리로 찬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 앞에 있음을 알고 그 마음에 평안과 담대함이 넘쳤던 것입니다. '밤중'은 시간적 밤중만이 아니라 영혼의 밤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앞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거나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비결은 바로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13에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욱 강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21절에서는 우리는 구하는 바를 그는 응답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새 시대에 쓰실 일군을 찾으십니다. 어떤 사람을 지도자고 세우려고 하면 그가 얼마나 담대한 가를 보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함이 곧 지도력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담대한 사람입니다. 강인하고 담대함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강함은 하나님 앞에서 살 때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더욱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기회로 삼는다면 강하고 담대한 자로 주님께서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갈 때에 우리는 더욱 담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와 전 존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요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것이라"(렘29:11).
III. 결 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망의 계획을 세우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소망의 계획을 세우십니다.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시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문제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맥스 루카드란 기독교 작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우신 계획을 요약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열매가 없고, 어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왜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까? 백 여년 전 아일랜드 해변에 작은 집 한 채를 갖고 있던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자는 아주 부자이면서 검소하였습니다. 여자가 자기 집에 일착으로 전기를 들여놓겠다고 하였을 때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전기를 가설한 지 몇 주 지나 계량기 검침원이 찾아왔습니다. 검침원이 전기가 잘 들어오고 있는지 물었을 때 여자는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검침원이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부인의 계량기는 거의 제자리 걸음입니다. 전기를 쓰고 계신 겁니까?" "물론이죠, 저녁마다 해가 지면 촛불을 붙이는데 필요한 시간만큼만 전깃불을 켜지요. 그리고는 꺼버려요." 전기는 들어오지만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자의 집은 전기는 연결되어 있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구원받았지만 마음은 변화되지 않은 채로 연결되어 있지만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구원은 믿지만 변화에는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다 스윗치를 올릴 때도 있지만 대개는 어둠 속에 갇혀 지냅니다. 불을 계속 켜둔다면 어떤 변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광채 안에 거한다면, 그리스도 예수와 동행한다면, 성령님과 동행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