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천리 사적지 혹은 단내 사적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당시 광주 유수부인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1804-1866년)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묘소이다. 한국 교회 안에 처음으로 신부를 모셔온 순교자 윤유일의 묘가 모셔져 있는 어농리 사적지와 불과 몇 리 떨어져 있지 않은 단천리는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있었던 유서깊은 교우촌이기도 하다.
영동 고속 국도에서 덕평 톨게이트로 빠져 나와 양쪽으로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논밭길을 7킬로미터 정도 달리면 왼편 언덕 위로 커다란 하얀 십자가가 보이고 그 아래 말끔하게 단장된 정은 바오로의 묘지가 눈에 띈다.
논둑을 따라 비탈을 20미터 정도 올라서면 파란 잔디에 둘러싸인 묘소와 그 옆에 삼 단으로 된 단 위에 단아하게 서 있는 성모상이 인상적이고 묘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논밭 사이로 구불구불한 길과 인근 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묘 주위에는 유난히 푸른 빛을 띠고 있는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마치 순교자의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는 듯하다.
이 사적지가 이렇듯 말끔하게 모습을 갖춘 것은 1987년 9월 15일, 이천 지역 출신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발족한 '이천 성지 개발 위원회'가 수원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집전으로 이 날 윤유일 순교자와 그 일가족을 기념하기 위한 어농리 사적지와 함께 이곳 단내 사적지를 축성하고부터이다.
동래 정씨로 그 조부 시절부터 실학 사상의 영향을 입고 일찍이 서학에 접했던 그의 집안은 이미 정은 바오로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촌형인 정섭과 정옥이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순교의 모범을 보여 준 바 있다.
신유박해가 지나간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난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에 입교하고 그 어머니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 역시 입교했다. 그들이 살던 이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산 밑 마을'은 103위 순교 성인 중 한 사람인 이문우 요한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단천리는 최초의 방인 신부인 성 김대건 신부가 머물렀던 은이 마을과는 1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김 신부는 1846년 귀국한 이후 동산 밑 마을을 들러 이곳을 방문, 신자들에게 고해 성사를 준 후 바로 이 묘소 앞 오방이 산모퉁이를 지나 배마실 공소를 거쳐 새벽 어스름에 은이 공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이 마을에도 휘몰아쳤고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고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이면 마을 뒤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또 올라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됐고 남한산성까지 가파른 산길로 끌려갔다. 이때 그의 증손자 정 베드로가 그의 체포 소식을 듣고 자진하여 천주교인임을 고백하고 함께 잡혀갔다고 한다. 한 달여를 남한산성에 갇혀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은 두 사람은 그 해 음력 12월 8일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덮어 숨이 막히게 해 죽이는 백지 사형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그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다. 그러나 증손자 정 베드로는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구산, 단내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순교
호국(護國)과 호교(護敎)를 위한 몸부림이 배어 있는 남한산성(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은 하남시 서부 성당에서 사적지 조성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이내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구산과 단내에서 시작된 신앙을 천상의 영복으로 영글게 한 남한산성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애환과 몸부림이 어려 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순교 터 매입과 사적지 작업은 어렵기만 한 상황이다. '순교자들이 살아서 들어갔던 동문과 배교하지 않고 시체가 되어 나온 시구문' 모두가 우리에게 한 시대의,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전구가 깃들어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4호(1999년 5월), pp.107-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