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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天 無比 큰스님 염화실 인터넷 법문]
[如天 無比 큰스님]
염화실 방송-2006년 02월 10일 신심명 제7강 (不見精皺불견정추~)
안녕하십니까?
염화실 인터넷방송법문 2월 10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심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금 다른 말을 한가지 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어제도 우리 방송 중에 해킹이 되었는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들어와서 방해를 했는지 조금 불상사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데 그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는 그런 일들이 그와 유사한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늘 겪는 일이죠.
가정에서나, 친구사이에서나, 어떤 회사에서나, 어떤 모임에서나, 또 뭐 늘 만나던 동료들 사이에서나, 또 이렇게 큰 절에서 1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생활을 할 때는 뭐 더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그런 불협화음 같은 것을 많이 겪게 됩니다.
강원도 그렇고, 승방도 그렇고, 무슨 어떤 단체, 어떤 모임에서 어느 사찰에서 불협화음 없는 데가 없죠.
그랬을 때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일이 많이 있어가지고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수행한다고 하고 이렇게 서로 사양하고 양보하고 겸손하고 하심하고 불교에서 아주 아름다운 말 중 하나가 하심(下心)아닙니까?
그래 행자실에 가면 의례히 하심(下心)이라고 써 붙여 놓았거든요.
절에 들어왔을 때 처음 마음가짐이 일단 하심이다 이걸 가르치기 위해서 행자실에는 의례히 하심이라고 써 붙여놓고 하심을 마음에 새기는 그런 교육을 시키고 그럽니다.
단체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관계에 있어서 불협화음이 언제든지 뭐 자의든 타의든 뭐 일어날 그런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제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에도 역시 그래서 섭니다. 인간사회란 게 예나 지금이나 똑 같죠.
그래서 이제 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시달리다가 아무리 뭐 수행하려고 들어왔고 도 닦으려왔고 하지만 대게 그런 일이 생기면 못 참잖아요.
못 참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그래서 또 말이 커지고 문제가 더 크게 발전하고 그러는데 그래서 이런 문제를 부처님입장에서는 어떻게 이런 문제 해결 하는가 ?
사실 상당히 관심사죠. 그래서 그 당시 제자가 물었습니다.
부처님 이런 이런 일들이 뭐 그 당시는 경전에 나타난 사람들로서는 제바달바를 위시해서 육근비구 있고요, 육근비구니가 있고, 그래 말썽을 대게 지기는 여섯명의 비구가 있고, 아주 대표적인 사람들이죠.
여섯명의 비구니가 있어서, 경전상 육근비구, 육근비구니 이렇게 거는 어떤 상징적인 숫자도 있습니다만은 어째던 그런 말썽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선량하고 참으로 수행을 잘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큰 방해가 되고 해서 부처님께 물었어요.
어떻게 이런 문제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되겠습니까?
이것 단체로 재판을 해야 되는 건지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부처님께 물었죠,
그랬더니 부처님 대답이 그겁니다. 악성비구는 정식으로 질문하는 게 그렇게 되있어.
악성비구는 어떻게 우리가 대해야 합니까?
악성비구 육근비구 육근비구니 제바달바 이런 사람들이 말하자면 성품이 악하다는 거죠
악성비구를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됩니까 ?
묵빈대치(默擯對治)하라
묵빈대치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나도 어쩔 수 없다 나도 타이르기도 하고 뭐 별별 방법을 다 써도 부처님의 덕으로도 어떻게 안 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묵빈대치(黙擯對治)한다
묵빈대치(默擯對治)하라
묵묵할 묵(黙) 빈척한다고 해서 손수 옆에 손빈 하는 건데 쫒아낸다 하는 빈자죠
대치(對治)라고 하는
묵빈대치(黙擯對治) - 묵묵히 대해주는 것으로써 그 사람을 쫒아낸다 이런 뜻입니다.
묵묵히 대치하고만 있는 거예요 그냥 묵묵부답입니다. 어떻게 할 길이 없죠
그 뭐 잘한다고 예를 들어서 전화 잘못 걸려와 가지고 왜 전화를 잘못 걸었느냐 하면
이렇게 하면은 당연하게 말이 따르게 마련이죠
또 뭐 너무 친절하게 해주면 상대방이 또 이건 무슨 봉이라도 걸렸나 싶어서 또 거기에 또 무슨 이야기가 또 이어질 수도 있고 인간사회라는 게 참 우리가 조심하면서 살아야 되죠.
아주 뭐 지금같이 복잡한 세상에선 더 조심하면서 특히 사람조심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친절하게 할 수가 없고 또 그렇게 아주 냉담해서 모든 일을 처리 할 수도 없고 그렇습니다.
묵빈대치(默擯對治)가 제일 좋죠
묵빈대치도 뭐 사람 말이 말 같이 않게 여기느냐? 왜 대답이 없냐?
또 이렇게도 따질 수도 있고 그렇긴 해요. 그래도 그것도 모순이 있지만 그래도 부처님이 내리신 해결방법은 묵빈대치 라고 했습니다.
절에서는 스님들이 생활할 때 묵빈대치를 제일 잘 써요. 뭐 어떻게 할 필요가 없죠.
상대를 안 해 버립니다. 말 않고 상대를 안 해 버리는 거죠. 그러면서 그 자리를 피한다든지 그 방법이 제일 낫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오직하면 그런 방법을 쓰겠습니까?
우리 인터넷상에도 보면 염화실만 하더라도 여러 번 지나갔죠. 나는 뭐 깊이 까지는 잘 모르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것이 조금 오해를 했는지 당신마음에 또 안 맞았는지 거기에서 꼬리말을 꼬리말에 또 꼬리말을 또 달고 그러다보면 말이 부풀어지고 얼굴을 대하지 않고 말만 주고받다 보니 말을 마음 놓고 마음대로 하는 경우도 많잖습니까?
그러다보면 문제가 더 커지죠. 그래서 마주보고 하면은 이렇고 저렇고 선․ 후를 이야기해서 오해를 풀기도하고 하겠는데 그만 마음이 상해가지고 휙 떠나버리는 거죠.
그리고 다시는 탈퇴해 버리고 안 들어온다던지..
거기서 시비가 너무 크게 붙어서 결국은 폐쇄를 해야 하는 그런 상황들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염화실에도 몇 번은 지나가긴 했습니다 만은 그런 약간은 불미스러운 말들이 오고 갔었죠.
제일 아주 현명한 방법이 묵빈대치(黙擯對治)하는 것입니다.
어제 같은 경우도 그냥 뭐라고 하든지 그냥 가만히 있어 버리는 것이 아무대답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 버리는 것이 제일 나아요. 그럼 상대가 상대 나름대로 생각을 하겠죠. 이건 얼른 나가버린다든지 아니면 또 내가 여기에 있을 곳이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한다든지..... 여러 가지로
부처님께서 내리신 처방이 제일 나아요. 꼭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일 낫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제 집안에서나 어떤 모임에서나 단체에서나 어디에서나 정말 그런 문제가 생기면 묵묵히 끝까지 묵묵히 해야 해요. 참다 참다 못 참아서 이거는 그동안 참은 게 아무소용이 없죠. 참다 참다 못 참아서 참는데도 한계가 있지, 인내도 한계가 있지 이렇게 나가면 헛수고에요. 그동안 참은 게 헛수고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끝까지 끝까지 묵묵해야 제대로 묵빈대치(默擯對治)한다 하는 그런 뜻 입니다.
미륵골님이 아주 묵빈대치(默擯對治) 라고 정확하게 잘 써서 올렸네요 글짜가 좀 작아서 잘 안보입니다만
이런 것도 우리가 실질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관계에서 일어나기 쉬운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공부죠. 어쩌면 신심명보다 더 중요한 공부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합니다.
부처님당시 제바달다 위시해서 육근비구 육근비구니 이런 등등 악성비구가 많았는데 그들을 대치하는데
묵빈대치(黙擯對治로)써 부처님은 가르쳐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신심명 30번부터 이것은 내가 표시해놓은 교재번호인데
대게 2구절로 한 다락을 잡아서 그렇게 계산을 하면 오늘부터 할 차례가 30번이 되죠.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1번으로 치고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2번으로 치고
요렇게 숫자를 매겨놓으면 공부하기가 쉽죠. 여러분들 아마 교재를 출력해서 가지고 계시면 번호를 매겨놓으면 외우기도 쉽고 쓰는데 헷갈리지도 않고 좋으리라 믿습니다.
불견정추(不見精麤) 영유편당(寧有偏黨)
정과 추을 보지 않는데 어찌 편당이 있을 수가 말은 그런 거죠
일공동양(一空同兩)이라 하나의 공은 양단과 결국 같다 모든 게 살아난다.
빈자가 손수변 빈 물가빈고요 그것은 글자가 틀렸네요.
손수변에 손빈자 한 것입니다 손수변 손빈
하나의 공으로 통일이 되었을 때 그야말로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된다는 거죠.
참으로 공하면 묘하게 있는 게 되니까 일공이면 양단 상대가 다 살아난다.
그래서 둘이다 양단이 같다 둘이다 같다
상반되는 것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화가 되고 상조가 되는 거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서로 돕는 그런 입장이 되니까 같다는 그런 표현을 씁니다.
제함만상(齊含萬象) 상반되는 두 개가 조화를 이루면 나머지 다른 일체 삼라만상이 전부 그 속에 무르녹아서 조화를 이룬다. 제함 가지런히 만상을 함하고 있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너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가 이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쌀과 겨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 겨는 겨대로의 가치가 있고 그 역이 있는 거예요.
사실 쌀 못지않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있죠.
쌀은 쌀 대로의 가치를 역시 지니고 있고 그런 동등한 가치의 입장에서 보면 정과 추가 없습니다.
정은 정밀로울 정(精) 세밀하다
추(麤) 거칠다 하는 건데 그런 것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가치와 그 공릉을 똑같이 우리가 서로 인정해주는 거죠.
집에서 예를 들어서 살림사는 사람이나 밖에 나가 돈 버는 사람이나 그 역할이 달라서 그렇지 그 가치는 똑 같이 있습니다.
누가 뭐 나가서 돈 번다고 해서 더 한 것도 아니고 안에서 살림한다고 해서 더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똑 같이 가치가 있고 소중하죠.
그게 정과 추를 보지 않는 그런 이치입니다.
그 정추라는 말은 초발심자경문 배울때 부득흔염정추(?)
음식에 대해가지고서 반찬이 너댓가지라 하더라도 거기에 자기가 마음에 드는 음식이 있을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이 있을 것 일수 있습니다.
삭발목요일쯤 되면 모처럼 나오는 김이라든지 두부라든지 머 조금 나은 반찬이 몇 가지 조금 올라요.
그러면 안 보던 반찬이고 조금 마음에 드는 반찬이라고 해서 반찬이 한상에 오면 4~5명에게 내려가고 많으면 5~10명까지 내려가는데, 위에서 좋은 반찬 다 덜어 놓아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밑에 있는 사람에게는 안돌아가고 좋지 안이한 반찬만 돌아가게 갈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것을 아주 주의를 심하게 하고 있어요.
정 추를 정한 곳을 좋아하고 추한 곳을 싫어하고 그렇게 하지마라.
반찬도 똑같이 마음에 드는 반찬이든 마음에 안 드는 반찬이든 똑같이 덜어서 조금씩 조금씩 먹을 만큼 똑같이 덜어서 먹도록 그렇게 하라고 훈련을 야무지게 시키죠.
처음에 절에 들어오면 초발심자경문을 통해서 대중생활에서 이제 그런 걸 시킵니다.
그런 것을 안보면 말하자면 그런 문제가 안 생길 텐데 그런 것을 보게 되고 눈에 띄게 되고 이제 그렇죠.
사실 뭐 음식도 따지고 보면 그 나름대로 전부 장점이 있고 역할이 있고 성분이 다 있고 어느 것이 더 낫고 어느 것이 못하고 그런 게 사실은 없죠.
우리가 제대로 파악을 못해서 그렇지 그래서 정하고 추한 것을 보지 아니 할 것 같으면 어디로 치우치는 일이 없다
누가 잘났다 누가 못났다 이렇게 해서 치우치는 일이 없다. 영유편당(寧有偏黨)
사람관계 이렇게 특히 사람관계 잘~ 사람 사는 사회에서 제일문제데 그 여럿이 한절에서 또는 승방 같은데서 살다보면 참 거 묘하게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어요.
묘하게도 마음에 안 드는데 그거는 내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에요.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데 그것을 이제 나쁜 사람이라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대게 그래요 자기 판단가지고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 사람은 내인데 서는 내가 보기에는 나쁜 사람이고 아무리 계산을 해도 나쁜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데, 다른데 가면 환영받고 훌륭한 사람이고 멋진 사람이고 아주 매너 좋고 아 이런 소리 듣는다고요.
참 신기하죠 이건 뭐 틀림없이 그런 뭐 모르겠습니다.
어디에 가서든 나쁜 사람도 물론 있지만은 보통사람은 한쪽에서는 나쁘다는 소리를 듣지만 한쪽에서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한쪽에서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한쪽에서는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돼있어요
뭐 그 기준을 우리가 사실은 정하는 것이 전부 내 감정을 가지고 기준을 정하죠.
그게 편당(偏黨)입니다
아전인수격으로 내 잣대 내 감정 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점수를 메기다보니까
그렇게 치우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사람 개개인가치를 똑 같이 인정해주고 또 그 나름의 장점과 그 나름의 쓸모를 우리가 다 이해해줄 수만 있으면 따로 정하고 추하고 잘나고 못나고를 보지 않죠
그러면 어디로 치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돌담을 이렇게 쌓아 놓을 때 우리가 가만히 보면 대게 담이 이렇게 그 절에서 그전에 우리가 직접 쌓아보면 큰돌이 빨리 쌓이죠. 그런데 큰돌이 받치기 위해서는 작은돌을 꼭 고입니다. 그런데 작은돌이 마땅한 것이 없으면 큰돌을 깨어서 큰 돌 밑에 작은 돌 역할을 받칩니다.
그럴 때 한번씩 생각하는 게 작은돌 조그만 저 작은돌 없으면 저 큰돌이 그 자리 있을 수 없다 지탱이 안된다 이거요.
그 역할이 똑 같다고요 뭐 어느 것 하나 작은 돌이라고 해서 그 역할이 적거나 큰 돌이라고 더 많거나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참 묘하죠. 큰돌 작은 돌의 역할이 똑 같다는거..
우리가 보기에 무식한사람 유식한사람 그것도 사실은 똑 같습니다
골찌가 있어야 일등이 있는 거지 골찌 없는 일등은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어찌 보면 역할이 똑 같은 거죠
그러면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 속 시원하게 그렇게 꿰뚫어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절대로 치우쳐서 보지 않죠. 편당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자식이 몇이 된다고 할 경우 거기에까지 편당 있다면 그건 참 곤란하죠.
우리가 대중생활에서 남남끼리 모여 사는 대중생활에서는 모르지만은...
대도체관(大道體寬)하여 무이무난(無易無難)이라
대도(大道) 지도(至道)라고 했지요 처음에는 지도무난(至道無難) 했습니다
여기는 무의무난(無易無難)이라 그랬어요. 지도나 대도나 말이 달라서 그렇지 같습니다.
정말 바람직한 삶이라고 내가 이제 그렇게 해석하는데 그것은 그 체가 본체가 너그럽다 넓다 이거죠
대도체관이라 큰 도란 뭐겠습니까 가슴 툭 터진 인생입니다. 시원한 인생이에요
그게 대도죠. 그거밖에 달리 무슨 대도가 또 따로 뭐 있겠습니까, 있을 필요도 없고요.
사람 사는데 좀 시원하게 어디에도 걸릴게 없고 무엇이나 다 거울처럼 비쳐볼 수 있는 그런 어떤 마음가짐 삶 이것이 대도죠. 그 대도는 체가 너그럽다.
우리가 가지고 마음의 본래의 모습만 우리가 제대로 파악이 되고 그것이 내손에 어떤 뭐 연필 내손에 잡히듯이 확 내손에 잡혀 오면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그런 어떤 무한이 넓고 무한히 광대하고 무한이 깊고 무한이 높은 그런 마음이 바로 내가 돼 버리는 거죠. 내가 그 마음이 돼버리고 그 마음이 내가 되고 그렇게 돼 버립니다. 그래 돼 버리면 이건 정말 체가 한없이 너그럽고 크죠.
그래서 모든 걸 다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런 것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으면서 사실은 내가 조금밖에 빙산의 일각도 못되게 조금밖에 수용을 못하고 있는 거죠.
그럼 무궁무진한 것이 우리 속에 그대로 아직 남아있습니다.
이걸 얼른 부처님의 좋은 솜씨로 가지고 자꾸 이제 캐고 캐서 개발을 해내야 이게 정말 내 것이 되고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는 거죠.
대도체관(大道體寬)하여 무이무난(無易無難)이라
어려움도 없고 쉬운 것도 없고 어려울 것 없것만은
쉽다 어렵다 저 앞에서 지도무난 첫머리에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했지만은
여기에서는 체가 너그러워가지고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 그랬습니다.
표현이 조금 달라서 그렇지 어긋난 그런 표현은 아닙니다.
이제 사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체가 아주 너그러운데 그걸 우리가 참 제대로 내 것으로 확대시켜 못 쓴다는 것 큰 아쉬움으로 큰 화두로 우리에게 늘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자꾸 스스로 개발 못하면 이런 선지식들 조사스님들 부처님의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크게 개발을 해서 내 살림살이를 이제 만들어야 되겠죠. 이게 우리들의 과제고 화두입니다.
소견호의(小見狐疑)하여 전급전지(轉急轉遲)로다
소견은 작은 견해로는
호의(狐疑)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여우호자지만 의심호자입니다. 이럴 때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그러니까 의혹이 많다는 거예요.
우리는 마음이 확 터져 버리지가 못하고 뭔가 찝찝한 게 남아있어 곧 터질듯 터질듯하면서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거죠. 그래서 그게 이제 호의라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거죠
전급전지(轉急轉遲)로다.
급한 마음에 자꾸 더 급하게 하는 거야. 급하게 할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내가 그전에 어떤 스님 이야기를 했잖아요. 봉암사에서 같이 살다가 송광사에서도 같이 살게 되었는데 화두 들어도 도대체가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법당 마루바닥에 이마를 찧어 박아 가지고 법당에 피가 흥건할 정도로 그렇게 이마를 찧어 박더라...
그게 이제 바로 급하게 하려고 해서 그렇고 이치를 몰라서 그런 거죠. 도대체 마음이 터지지 않는 거죠
전급전지라 급하게 할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전급전지
우리들의 어떤 공부하는 모습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 한 그런 느낌이고 또 승찬스님의 삶과 같은 그런 참 힘든 삶이 또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런 힘든 삶을 다 끝내고 마음이 툭 터져가지고 대중들을 이렇게 거느리고 공부하는 모습들을 이렇게 굽어보면서 그게 눈에 들어오는 별 별 근기의 사람들을 이렇게 보고 그런 것들이 참 어떤 안타까움으로 마음에 남아있고 그래서 아마 이런 이야기도 여기에 올리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소견호의(小見狐疑)하여 전급전지(轉急轉遲)로다.
작은(좁은) 견해로써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급하게 할수록 더욱 더디어지는 도다.
집지실도(執之失度)
너무 집착을 하면 법도를 잃어버려. 법도라 하는 것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것이 법도입니다.
그런데 너무 집착하다보니까 너무 집착하다보니까 그만 그 어떤 이치를 깜박하는 거죠.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필입사로(必入邪路)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서게 된다.
기도가 그렇고, 참선이 그렇고, 간경이 그렇고, 돈버는 일도 그래요, 돈버는 일도 너무 위치도 모르고 무턱대고 자기소견대로 그냥 이렇게 이렇게 하면 벌어지려니 만 생각하고 무턱대고 그래 봐요.
결국은 더 망하기만 하는 거죠.
여기서 사로(邪路)라는 것은 돈 버는 사람에게는 망하는 것이고 회사가 망하는 것이고.
급한 마음에서 퇴직금 타가고 아이구 이것 가지고 평생 어떻게 사나?
이렇게 걱정을 미리 해가지고 그것 뭐 사실 절약하고 살면 살도록 되어있는데, 아이구 이것 가지고 안된다고 그냥 미리 조급한 마음이 들어가지고 그것가지고 무슨 일 시작하다가 그것마저 1~2년 사이 홀딱 다 날려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집착이에요.
집지실도 그냥 좀 기다려 보는 거야 좀 느긋하게.
배가 바람에 흔들흔들하니까 배가 넘어지겠다. 생각을 하고 먼저 물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
배가 넘어지기 전에 먼저 물로 뛰어든다. 조사스님들이 그런 비유를 참 많이 썼어요.
예나 지금이나 뭐 별별 근기가 수 백 명씩 혹은 수 천 명씩 모여서 그렇게 살다보니까
별 별 근기와 별 별 능력을 가진 사람들 많이 보았잖습니까?
그러니까 저 사람은 보니까 배가 넘어지지도 전에 먼저 물로 뛰어든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배가 또 안정이 되어 배는 그대로 무사히 가더라. 그럼 물에 뛰어내린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예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집착을 하면은 그 법도를 자연스러운 법도를 잃어버린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삶의 지혜, 사는 한 방법입니다
뭐 불교가 특별히 밥 먹여 줍니까? 밥 먹여주는 거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삶의 지혜고 사는 하나의 생활태도이고 불교적인 지혜로서 불교적인 안목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영위해 갈 것인가? 이거죠. 그 열쇠를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 조사스님 가르침에서 빌리자는 것이고 그것이 익숙해지면 내 열쇠가 바로 내 것이 되는 거죠.
내 것이 되기 전에는 하는 수 없이 이제 선각자들의 지혜를 빌어야죠.
불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어떤 인생태도이기도 하구요
집지실도(執之失度)도라 필입사로(必入邪路)요
집착하면은 그 법도를 잃어버린다, 반드시 삿된 길에 들어설 것이다.
공부하는 것의 이야기하기도 하고 뭐 장사하는데 필요한 이야기도 되고 사업상에 필요한 이야기가 되고 사람관계에 필요한 이야기도 되고 뭐 어디에 해당 안되는 게 없죠.
방지자연(放之自然)이라 체무거주(體無去住)라
놓아버리면 저절로 그러함이라 저절로 그러하다
여기서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현상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놓아 버리면 저절로 그러하다
저절로 그러해진다.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거예요
체무거주라 그 본체가 우리의 심체 뭐 대도체관 할 때 그 체죠. 삶의 본체 삶의 당체가 거주가 없다
가도 가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머물러 있다고 해서 그냥 머물러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갈 때는 가고 머물 때는 머무는 거죠 그게 체무거주(體無去住)입니다.
가기만 하지도 않고 머물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갈 때는 가고 머물 때는 머문다. 갈 때 가야 되고 머물 때 머물러야 되죠. 우리는 갈 때 안가고 머물 때 안 머물고 무조건 머물러 있고 무조건 가고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지 못하고 저절로 그러하지가 못 하죠. 저절로 그래서 물 흐르듯이...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앉을 자리 설 자리만 잘보고 앉고 서도 그 사람 어지간히 된 사람이다 라고 우리가 그러지 않습니까?
갈 때와 머물 때를 이때를 잘 아는 것, 또 갈 곳과 머물 곳 이걸 또 잘 아는 것 장소와 시간을 잘 알아서 생활한다면 참 멋진 모양이 되죠. 이 모양새입니다.
불교의 지혜를 빌어서 삶의 모양을 갖추자는 거예요. 지혜를 빌어서 삶의 모양 부처님의 가르침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빌어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양을 어떻게 그려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모양새가 저절로 그러하지 못 하는 것 자연스럽지 못 하는 것 그냥 알잖아요.
본인이 알고 남이 알고...
방지자연(放之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라
참 뭐 구절구절 하나하나가 이건 뭐 평생을 두고도 한 구절만 가지고도 평생의 삶의 거울이 되고 인생의 지침이 되고 그렇습니다.
임성합도(任性合道)요 소요절뇌(逍遙絶惱)이라
임성합도(任性合道)요 소요절뇌(逍遙絶腦)이라
내가 아는 어떤 스님은 직지사스님인데 그 스님은 평생을 신심명가지고 도통을 하신스님이에요.
저는 새삼 도통했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글씨를 잘 썼어요. 유교공부를 많이 하고 절에 들어와서도 불경공부도 아주 많이 하고 머리도 좋고요 서예를 아주 옛날고책을 얼마나 썼는지 고대로 고책을 그려낼 정도로 글씨를 잘 쓰신 스님인데 나중에 이제 신심명 쓰는 걸로 그냥 모든 수행으로 삼았어요.
펜으로도 쓰고 붓으로도 쓰고 뭐 외우고 외운 것을 듣고 거~ 자나 깨나 신심명이야 당신이 외워서 눅음 해놓고 그 녹음을 당신이 또 듣는 거에요.
늘 귀에 꽂고 듣고 손엔 펜을 가지고 있으면서 객으로 가나 차에 있어나 늘 끊임없이 쓰고 붓으로 쓸 때는 붓으로 쓰고 아마 수 십 만 번을 썼을 것 같아요.
그래서 신심명을 잘 써가지고 더러 걸어놓기하고 그랬는데 그분의 호가 임소라 임소산인이라
임성합도 소요절뇌 전체 신심명중에서 이 구절이 제일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임소 임성합도 소요절뇌 임자와 소자를 붙여서 임소산인이라 당신의 호를 그렇게 했더라고요
성품에 맡기면 도에 합한다.
도 란게 어디에서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조각하듯이 차츰 차즘 쪼아서 어떤 조각품을 이루어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요.
그게 그래서 무슨 공덕을 짓는다고 무슨 도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 이치를 알아서 맡겨두는 거라 본성에 맡겨두는 거라 인성 본성에 맡겨둬 인성이라 성품에 맡겨둔다 그러면 도에 합하는 것
대도에 합하는 것 툭 터진 인생이 된다는 거죠. 행복한 인생 평화로운 인생 자유로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요절뇌 한다 소요자재라 해서
이것은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 하고 아무리 가난해도 가난한데 걸려있지 않고 아무리 부자라도 부자에 걸려있지 않고 높은 벼슬을 해도 높은 벼슬에 걸려있지 않고 아무 그냥 명색이 없는 삶을 살아도 거기에 걸려있지 않는 거라.
그런 문제 외적조건은 이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소요자재죠
몸이 뭐 어디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해서 그게 소요자재가 아니죠.
그런데 내가 방금 말씀드린 그 스님은 정말 몸도 소요자재해요. 어디 저 설악산토굴에가 있다가, 히말라야 토굴에도 가 있다가 뭐 머리를 안 깎아서 일부러 기른 게 아니죠. 안 깎아서니까 길어졌지 그러다 어느 날 생각이 나면 싹 깎기도 하고 정말 살기도 그렇게 사시더라고요 지금 어디가 있는지 못 본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마는 .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 참 좋은 말이죠.
소요자재해서 괴로움을 다 끊었다
뇌는 번뇌라고 할 때 뇌자고
괴롭다는 것이고 또 뭐 아~ 골치 아프다는 뇌자고 , 시끄럽다는 것이고 뇌롭다. 말하자면 신경쓴다하는 뜻도 되고 신경 쓰이게 한다, 신경스스로 쓴다, 괴롭다, 번민한다. 골치 썩는다. 이런 등등의 의미가 뇌자에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런 인생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런 게 하나도 없이 뚝 끊어졌다
소요절뇌 정말 좋은 말이에요
그렇게 될 라면 다른 어떤 공덕을 지어야 된다. 육바라밀을 닦아야 된다. 참선을 해야 한다 기도를 해야 한다 경을 많이 봐야한다 이런 조건이 아닙니다.
그냥 인성합도 우리본성에 그냥 맡겨 두는 거 그러면 도에 합하는 거지
참 말은 간단한데 물론 좀 어렵습니다마는 그러나 뭐 이것밖에 달리 다른 가르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신심명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을 토요일, 모레도 일요일이고 이틀간 휴강입니다
그동안 좀 쓰시기 바랍니다. 한자 한자 쓸 때요 한번 쓰는 게 10번 읽는 것하고 맞먹습니다.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좀 쓰시기를 부탁드리고 오늘 공부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법문정리:울라)
*2월 10일 법문정리는 울라님이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신심명 녹취불사에 동참하실 분은 언제든지 의견을 주시면 균등한 공덕의 기회가 열려있습니다.
*울라님! 전생의 무량한 공덕으로 인하여 불사를 모시기로 발심하신 인연을 찬탄할지언정
고맙다는 말로 감히 그 공덕을 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끝까지 묵묵해야 제대로 묵빈대치(默擯對治)한다. 고맙습니다._()()()_
방지자연(放之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라...놓아버리면 저절로 그러함이라 그 자체에 가고 머뭄이 없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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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지실도(執之失度)도라 필입사로(必入邪路)요 집착하면은 그 법도를 잃어버린다, 반드시 삿된 길에 들어설 것이다..._()()()_
所見狐疑 轉急轉遲...작은 견해로 의심하소 의심해서 급하게 할수록 더욱 더디어진다.고맙습니다._()()()_
감사 감사합니다.
진실로 감사 감사합니다.
임성합도 소요절뇌 감사합니다 잘들었읍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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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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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고 그냥 보고가기에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감사함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任性合道 逍遙絶 惱 감사합니다 . 성불하십시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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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