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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늘 4월 12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도 대승찬. 大乘(대승)가장 큰 수레! 불교의 궁극의 가르침을 대승의 가르침이다. 또는 대승불교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뭐 소승과 대승의 그런 차별된 마음에서 하는 대승이라기보다는, 불교의 궁극의 가르침! 또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이나, 지공화상께서 깨달으신 내용이나, 인간이 깨달을 수 있는 최고의 어떤 경지. 그 경지에 대한 가르침을 大乘讚(대승찬)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교재 80번.
80. 不解佛法圓通(불해불법원통)하고 徒勞尋行數墨(도로심행수묵)이라. 이렇게 했습니다.
불법의 원통함을 알지 못하고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뭐 대승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요.
또 아주 깨달음의 진리. 진리 그 자체를 그대로 불법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眞理(진리)의 속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원통 한다는 것입니다.
圓通(원통)! 원만히 통 한다. 어디에든지 막히는 데가 없고, 어떤 문제에든지 안 통하는 것이 없다.
뭐 다른 거 생각할 것 없고요. 사람이 사는 길이지요.
불법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대도. 지극한 도. 이런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 그 미혹하고 어리석을 때는, 아주 좁고 험난하고 힘들고 그런데, 이치를 알고 보며는 정말 원만히 통해 가지고, 이리가도 괜찮고 저리가도 괜찮고, 온갖 것이 현재 내 사정에 있어서 내 입장에서 통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것이 불법입니다.
그래서 뭐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다. 금강경에 그런 말 아시지요?
모든 법이 다 불법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佛法圓通(불법원통)이지요. ‘일체 법이 다 불법이다’라고 했으니까 얼마나 원통합니까? 원만히 통합니까?
뭐 불법이 산에만 있다. 출가한 사람들에게만 있다. 또는 절에만 있다. 불교경전 속에만 있다.
이런 식으로 제한을 한다면 그것은 불법일 수도 없고, 또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일체 법이 다 불법이다.’하는 가르침하고는 전혀 위배되기 때문에 안 맞는 말이지요.
참 불법은 그래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뭐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우리가 불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나름대로 틀을 만들고 선을 긋고 해가지고 그 불법 속에 얽매어 가지고, 우리가 이게 불법인데 왜 이 불법에 맞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데서, 다 해탈하고 해방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갓 수고로이 尋行數墨(심행수묵)이라. 글줄을 찾고 먹을 헤아린다. 이것은 글자를 헤아린다.
墨이란 것은 글자를 헤아린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경전의 글줄을 찾고 먹을 헤아린다. 라고 하는 말은, 경전의 그 글자 속에서 뭔가 어떤 이치가 있는가?
또 경전의 어떤 이런 저런 말씀이나 또는 계율 같으면, 계율의 條文(조문)이나, 뭐 이것만이 불법인양으로 그렇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일체 법이 다 불법인데, 또 불법은 원통한 것인데, 어찌 그 경전의 구절에 불법이 있겠습니까?
경전의 구절가지고 불법을 설명은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하나의 방편이지요.
그야말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고, 진짜 달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진정한 진리이고 달이고 그렇지요. 그 삶을 이렇게 사는 것이 좋다. 저렇게 사는 것이 좋다. 뭐 이렇게 많이 경전 상에서 이야기 해 놨지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글자라는 것입니다.
81. 頭陀阿練苦行(두타아란고행)하며, 그래서 경전에서 좋은 방법을 제시를 많이 했지요.
頭陀 라고 하는 것은 抖擻(두수). 다 떨어 버린다. 그래요.
가섭존자! 부처님의 제일제자 라고 하는 가섭존자가 두타제일!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뭐든지 다 털어버린다.’이겁니다. 물론 가지고 있는 소지품이라 든지, 재산이라 든지, 집안에 우리 집안을 한 바퀴 이렇게 눈을 한번 돌려 보며는 얼마나 가진 것이 많습니까?
저만 하더라도 구태여 구하려고 아니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래저래 그냥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은 책부터, 온갖 것이 불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두타라고 하는 말이 좋은 것이, 그런 물건들로부터 다 털어 버리고, 사실은 마음에서부터 번뇌를 털어 버리는 것을 두타라고 그러지요.
번역을 하면 떨 抖(두)자. 떨 擻(수)자. 가섭 존자가 그런 行(행)에 있어서는 제일이다. 두타제일 가섭존자! 그렇게 하지요.
또 阿練(아란)이라고 하는 것은, 阿練若(아련야)라고 하는 아주 적정처. 아주 고요한 곳. 저 깊고 깊은 산 속. 높고 높은 그 산 봉우리. 우정 그런데다 암자를 짓고, 토굴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또 그런 방편의 가르침도 불교 안에 많이 있습니다. 있으니까 또 그것이 자기 성격에 맞던지, 자기 마음에 들었던지... “아! 그것 참 그 가르침 내 마음에 든다.”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은 또 그 가르침을 따라서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깊숙한 산 속에 들어가서 사는 것. 그것이 “ 阿練若에 산다.”그래요.
그리고 또 고행합니다. 苦行(고행). 아주 뭐 이것저것 온갖 고행. 팔을 태우고, 뭐 온갖 그 몸을 태우고, 또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아주 그 힘든 행은 다 합니다.
그 두타나 아련야에 사는 것이나, 고행하는 것.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서 수행이라고 하면서...
希望後身功德(희망후신공덕)한다. 그랬어요. 後身의 공덕을 희망한다. 그렇게 해가지고 결국은 죽고 난 뒤에, 後身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몸, 이후의 몸. 그러니까 다음 몸을 말 하는 것이지요.
그 때 아주 근사하게 잘 사는 그런 것을 바라고 두타행도 하고 적정 처 아련야 에서도 살고 고행을 한다하는 것입니다.
너무 깊은 산속에 외롭게 그렇게 살고, 혼자 그렇게 살아 버릇 하는 사람은요. 결국 그것이 업이 돼가지고, 내생에도 그렇게 저 두메산골이나 아주 외딴 집에 살게 됩니다.
당분간, 어떤 자기 계획한 바의 그 공부를 성취하기 위해서, 잠간 그렇게 사는 것은 가하나, 그것이 업이 되어 버리면 그건 뭐 바람직하지 못하지요.
왜냐? 불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 불법이고, 사람을 위하려면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부처님이 언제 뭐 그렇게 살았습니까?
한 동안, 어느 과정 동안만 그렇게 했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공부 하고 나서는 바로, 시내로 사람을 찾아 나섰지요.
특히 불교수행을 내생에 뭐 아주 뭐 근사하게 살겠다. 하는 그런 그 희망을 가지고 불교공부 한다고 하는 것. 대개 그런 생각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렇게 바라서는 안 됩니다. 불법만치 아주 현실주의 적인 그런 가르침이 없습니다.
가장 그 현실을 존중하고 현실의 삶을 아주 충실히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또 불교예요.
그래서 다음 생을 말 아니하는 것은 아니지만, 금생을 잘 살며는 다음 생은 저절로 잘 살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欲知來生事(욕지내생사)인댄, 내생에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은가? ‘그것은 내가 금생에 하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다.’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글쎄 그런 것을 희망하는 것은...
82. 希望卽是隔聖(희망즉시격성)이라 그랬지요? 그런 그 내생의 어떤 공덕을 바라보는 것은, 그것은 어떤 聖(성)스러운 일. 聖人(성인)의 마음. 성인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隔. 떨어져 있다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大道何由可得(대도하유가득)이리요. 큰 도를, 정말 바람직한 도.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어떤 행복한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얻어질 수 있겠는가? 무슨 因由(인유)로서 얻어질 수 있겠는가?
大道 라는 것이 그겁니다. 佛法圓通(불법원통)그랬지요? 또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라고 했듯이, 그런 큰 도.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뭐 大道無門(대도무문) 이라는 말도 잘 아시지요?
그런 것을 어떻게 얻어질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내생의 어떤 삶을 희망해서 닦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83. 譬如夢裏度河(비여몽리도하)라. 비유 하며는 꿈속에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꿈속에 강을 건넜다고 합시다.
船師度過河北(선사도과하북)이지요? 뱃사공이 그 강북 쪽으로 건네주었다. 이것입니다.
강북 쪽. 강남 쪽도 가능한데, 우리나라는 대개 강을 동서로 건너도록 되어 있어요. 보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는데, 중국은 전부 西出東流水(서출동류수)입니다.
그 뭐 우리나라에서도 西出東流水가 귀하다고 해서, 서출동류수를 아주 좋게 생각하지요.
서쪽에서 나와 가지고 동쪽으로 흐르는데...
중국에 뭐 장강이나 황하강은 전부 西出東流水 예요.
서쪽에서 발현을 해서 동쪽을 향해서 흐릅니다.
그러니까 강을 건너려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건너거나.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거나, 당연히 그렇게 되지요.
어쨌든 뭐 어느 방향으로 건너던 간에, 그렇게 뱃사공이 강을 건네주었다. 이 것입니다. 그런데 꿈에서 건넜기 때문에...
84. 忽覺床上安眠(홀교상상안면)이니, 홀연히 꿈을 깨고 나면 침상위에서 편안히 자고 있더라. 이겁니다. 覺. 꿈깰 교로 읽습니다.
꿈속에서 뭐 그 먼 길을 걸었고. 또 큰 강이 있어서 강을 건너기 위해서 하룻밤 자고, 또 거기서 강을 건너는데 뭐 품삯을 준다든지, 온갖 과정을 다 거쳐 가지고, 또 이제 강을 건너서 그 쪽 건너편에 가서 내렸어요. 짐을 가지고 내린다든지, 이런 그 과정들을 다 겪었는데, 꿈을 깨고 보니까 전혀 그런 일이 없었고, 침상에서 편안히 자고 있었더라.
그 失却度船軌則(실각도선궤칙)이라 그랬어요.
度船軌則. 내가 법칙이라는 꿈을 꾸지 않고, 건너야 한다. 그랬는데, 법칙이라기보다는 度船軌則.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법칙인데 그것은 여러 가지 절차입니다.
그런 절차를 다 잃어버렸다. 하는 말은 그런 절차가 하나도 없다. 이겁니다.
왜냐? 안 갔으니까요. 깨 보니까 배를 타고 건넌 것이 아니라, 그대로 침상위에 편안히 누워 있더라. 이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무슨 배를 타고 건너가는 그런 절차가 있겠습니까? 전혀 그런 절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며는, 우리가 뭐 대도를 깨닫기 위해서 또는 불법을 깨닫기 위해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도를 통하기 위해서 성불하기 위해서, 뭐 어떤 표현도 좋습니다. 그런 어떤 그 불교에서 어떤 마음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 경지에 이르러 가는 데는, 어떤 地位漸次(지위점차) 이야기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다 방편이고 사실은 地位漸次가 전혀 없다.
바로 앉은자리 선 자리. 내가 현재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이 순간 여기에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다.
열반이면 열반. 깨달음 이면 깨달음. 성불이면 성불. 견성이면 견성. 대도면 대도. 이 모든 것이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한 이 자리에 다 구비되어 있더라. 그 말입니다.
그것을 여기 강을 건너는데, 복잡한 과정을 다 거쳐서 건넜지마는, 깨고 나니까 전혀 움직임이 없고, 침상에 편안히 잠자고 있더라. 라고 하는 그런 표현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심명이나 증도가나 이 대승찬이나 끊임없이 수정을 부정하는 그런 그 최상의 가르침!
불교 최첨단의 가르침을 이야기했습니다.
‘修定(수정)을 不定(부정)한다.’라고 하는 말은, 닦고 증득 한다. 라고 하는 것을 부정 하는 것이지요.
그 뭐 조사스님들 어록에도 보면 많이 나오는 이야기인데, 대개 방편을 이야기 하며는 52位(위) 漸次(점차)라든지, 뭐 별별 그런 地位漸次(지위점차)를 이야기하게 됩니다마는, 정말 첨단 불교. 그 궁극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며는 본래 성불을 이야기해야 그게 옳은 것입니다.
본래 성불은 修定을 不定하는 거예요. 닦아 증득 하는 것을 인정 하지를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꿈 깨는 것과 같은데, 꿈 깨는데 무슨 닦아 증득 하는 것이 있습니까?
자던 잠, 자던 꿈 그냥 깨면 그 뿐 이예요.
무슨 三阿僧祇劫(삼아승지겁)이라는 세월을 걸려서, 52位(위) 地位漸次를 밟아 올라가듯이 그렇게 되어있는 게 아닙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런 이야기가 많은 것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가 많은 것은, 또 그런 근기들을 위해서 방편으로 설해 놓은 것이지요. 그렇게 이해를 해야 옳습니다.
여기의 방금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85. 船師及彼度人(선사급피도인)은, 船師. 뱃사공이나 또 저 건너가는 나그네는,
兩箇本不相識(양개본불상식)이라. 두 사람은 본래 서로 아는 바가 없지요. 잠자고 있었는데 뭐 혼자 꿈꾸었지, 언제 뭐 뱃사공을 알아서 무슨 꿈꾸었던 것도 아니고, 배를 뭐 보았던 것도 아니고, 뱃사공하고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 꿈속에서야 뱃사공을 만나서 뱃사공에게 품삯을 주고, 건너가는데 여러 가지 과정이 있었겠지만, 꿈 깨고 나면 전혀 그 사람하고 관계없습니다.
그 속에, 꿈속에 있었던 모든 것은 다 부정됩니다.
거 없다는 것이지요. 본래 없었는데 공연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兩箇本不相識(양개본불상식)이라. 두 사람이 본래 서로 알지를 못한다. 아주 참 미묘한 표현이고, 아주 능수능난한 의미심장한 그런 표현을, 참 대승찬을 읽어보면 읽어 볼 수록 그런 표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86. 衆生迷倒羈絆(중생미도견반)하며, 중생은 미혹해서 얽혀있고 그래서 삼계에 왕래하면서, 지극히 피로하다. 피로하기가 끝이 없다.
疲極(피극)이라. 피로함이 지극하다. 너무 세상에 휘둘리고 찌들리고, 그러면서 어떤 우리 현실에 그만 미혹이 되어서 꿈을 깰 줄 모르지요. 벗어날 줄을 도대체 모릅니다.
87. 覺悟生死如夢(각오생사여몽)하면, 생사가 꿈과 같은 것을 깨닫고 날것 같으며는,
一切求心自息(일체구심자식)이라. 일체 구하던 마음이, 열반을 구한다. 뭐 온갖 그런 부처님에게 와서, 조르던 일들. 그 머리를 찧어 가면서 화두를 들고 기도를 하고, 하던 그런 그 마음들. 그것이 저절로 쉬어진다.
이 이치 아는 것 이예요. 불교는 이치 아는 것입니다.
이치 아는 것이 마치 잠자다 꿈 깨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꿈 깨는데 무슨 과정이 필요하고, 뭐 무슨 다른 地位漸次(지위점차)가 필요합니까?
깨면 그 뿐 이예요. 못 깨면 꿈꾸는 것이고, 꿈꾸다가 깨버리면 그 뿐입니다.
그 頓悟頓修(돈오돈수)니 하는 소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頓悟頓修 예요. 그걸 뭐 굳이 그런 소리 쓸 필요도 없지마는, 기왕 있는 용어를 활용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88. 悟解卽是菩提(오해즉시보리)니 깨닫고 나면, 곧 그것이 菩提다 이것이지요. 菩提. 道(도)라는 것이지요.
깨닫고 나면 그대로 보리다. 도 다. 이거예요.
了本無有階梯(료본무유계제)니라. 여기 그랬네요. 근본을 깨달을 것 같으면 無有階梯라 계단이 없다.
地位漸次가 없다. 이겁니다.
階梯라고 하는 것은 계단이라는 뜻인데, 계단 내지 사다리. 지붕에 올라가는데 예를 들어서, 그 사다리가 線(선)이열 개 내지 스무 개 서른 개 이렇게, 그어져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지요?
그와 같이 중생에서 성불에 이르기 까지, 地位漸次(지위점차)를 대개 52 位(위) 地位漸次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階梯(계제)라 그래요. 근본을 깨닫고 나며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89. 堪歎凡夫傴僂(감탄범부구루)하나니, 곱사등 같은 범부들을 탄식하나니, 그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며는, 범부가 모두 곱사등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성한 사람이 아주 그 곱사등을 하고 있는 그런 사람을 보며는, 참 그 애석하고 안타깝기 이를 데가 없지요.
제대로 걸음을 걷습니까? 뭐 어떻게 모습이 제대로 갖춰졌습니까? 생활 하는데 보통 불편 하겠어요?
그와 같이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범부들의 삶이 그렇게 보인다.
八十不能跋蹄(팔십불능발제)로다. 팔십에 능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구나. 이것은 굳이 팔십이 아니라 하더라도 늙었다는 뜻이지요.
부처님도 팔십에 열반을 하셨고, 또 당시로서는 팔십이 定命(정명)이다. 그래요.
그래서 팔십 이상도 살고 팔십 이하에도 죽고, 하기는 하지마는 대개 정명을 팔십으로 보며는, 그래서 인간의 수명을 팔십으로 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팔십까지 살기는 살지마는, 참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그 살아가는 모습이, 이치를 모르고 살아가니까 그야말로 참 너무 답답하고 안타깝다. 하는 그런 그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90. 徒勞一生虛過(도로일생허과)하며, 한갓 수고로이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 딴에는 뭐 수행을 한답시고, 공부를 한답시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고, 경을 보면서 뭔가 눈을 뜨려고, 삶에 눈을 뜨려고 하지마는, 제대로 이치를 알지 못하고 하니까 참으로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 같이 그래 보이지요.
不覺日月遷移(불각일월천이)로다. 모르는 결에, 모르는 결에 日月이 옮겨 가는 도다. 세월이 흘러간다. 이것이지요. 모르는 결에, 세월이 흘러가는 도다. 그러고 혹 다행히 우리가 경전을 공부하고 법문을 듣는다 할 것 같으면,
91. 向上看他師口(향상간타사구)가, 위를 향해서 스승의 입을, 저 스승의 입을 보고 있는 것이, 그러니까 법문을 하는 사람은 높은 법상에 앉고, 밑에 앉아 가지고 그저, 그 때는 뭐 어떤 경전이라든지 기타 법문에 대한 정보가 아주 귀했으니까, 오로지 법문하는데 가서 그 법문하는 소리를 그저 듣고, 무슨 말이 나오는가 하고 입만 그저 바라볼 뿐이지요. 그런 상황입니다.
오늘 우리 범어사에서 보살계도 끝났습니다마는, 보살계에 보며는 법문한다는 소리를 듣고 가서 듣지 아니함을 경계한다. 그랬어요. 가서 듣지 아니하면 계를 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랬어요. 그런 정도로...
어디 가서 법문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거기 가서 듣지 아니할 것 같으면, 破戒(파계)가 돼요, 破戒.
그런 정도로... 지금은 책이라든지 라디오라든지 T.V라든지,녹음기 라든지 또 이 인터넷이 발달해 가지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얼마든지 오래된 법문, 또 새 법문 얼마든지 골라 가면서 들을 수 있습니다마는, 옛날에는 너무 그게 귀했기 때문에, 우리 어릴 때만 하더라도요. 사찰에 법문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도들이 뭐 불공하러 와도, 법문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해주지도 않았고...
그저 스님들만 초하루 보름으로, 제대로 여법하게 사는 사찰에만 초하루 보름 하거나, 아니며는 결제하는 날. 그 다음에 해제하는 날. 한 번 더하면 반 결제 중에...
결제 날. 반 결제. 그리고 해제. 그리고는 3개월 동안 없지요. 그리고 또 새 결제 시작하면 결제 날. 반 결제 날. 해제 날. 이렇게 일년에 6번 그저 법문 들으면 기껏 듣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저 뭐 스승의, 법문하는 스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상황이...
뭐 신도나 스님이나 그렇게 됐었습니다.
여기는 이 스님께서 그런 상황을 보시고서,
恰似失嬭孩兒(흡사실미해아)로다. 마치 어머니를 잃어버린 아이와 같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저 자나 깨나 어머니를 찾는 그런 그 간절한 마음이지요.
법문 듣는다는 사람들이 스승의 입을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입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꼭 어머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다.
92 道俗崢嶸集聚(도속쟁영집취)하야, 도교인이나 속인들이 다투어 모여와서, 이 道자는 도교인을 말한 것이고, 대개 이 당시는 그 도교가 성했습니다.
불교가 들어와서 크게 오래 안 되었고, 일반화가 안 되었던 때이기 때문에, 중국에는 유교는 종교라고 할 수가 없고요.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道敎(도교)였습니다.
그래서 道俗(도속). 道俗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道敎를 믿는 사람들. 또 俗人(속인)은 도교도 미쳐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갖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모여와서,
終日聽他死語(종일청타사어)로다. 하루 종일 그 사람의 죽은 말만 듣고 있는 도다.
지공스님께서 그 당시 상황을 보니, 마치 그와 같더라 하는 것이지요.
93. 不觀己身無常(불관기신무상)하고, 자기 자신이 무상하다고 하는 것을 관찰하지 아니하고,
心行貪如狼虎(심행탐여낭호)로다. 마음으로 탐을 행하는 것이 마치 이리나 호랑이와 같더라.
이리나 호랑이가 얼마나 사납고 무섭습니까?
그런데 뭐 그 자기의 이해관계요.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면 그저 누구나 이리가 되고 호랑이가 됩니다.
뭐 단돈 1000원을 가지고도 그저 뭐 그냥 완전히 안면몰수 하는 그런 사례들이 적지가 않지요.
94. 堪嗟二乘狹劣(감차이승협열)하니, 이승들의 좁고 못난 그런 마음들을, 이승들의 좁고 못난 마음들을 내가 슬퍼하나니, 二乘은 성문 연각을 말 하는 것인데, 불교에서 二乘하면 아주 소견 좁은, 그리고 편협한, 편협한 사고를 가진. 佛法(불법)은 圓通(원통)하다고 처음부터 말씀드렸고,
또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다. 금강경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정도인데, 만약에 거기에 어떠한 그런 그 넓은 마음을 갖지를 못하고, 불법이니 무슨 대도니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람이 사는 길이니까요.
사람이 바람직한 어떤 삶을 사는 길을 제시한 것이 불법이고, 대도고 지극한 도인데, 어떻게 잘 못 배워가지고요.
아주 좁은 소견을 갖게 되며는,
要須摧伏六府(요수최복육부)로다. 요컨대 모름지기 오장육부를 갖다가 항복시킨다. 이겁니다. 억눌러서 항복시킨다. 꺾을 摧에 항복 받을 伏자 지요?
5장 6부. 우리 몸을 항복 받는다 이거예요.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마는, 어떻습니까? 거 참 남악회양화상과의 그 대화. 소가 수레를 멍에 했을 때, 수레가 가지 아니하면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차를 모는 운전수가 엄연히 있는데도, 차를 가자고 할 때
운전수 보고 해야 옳은지 차체를 보고 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그것 참, 뭐 이야기 같지도 않은 이야기지요.
그런데 말 같지도 않은 말이 해당이 되니, 우리들의, 중생들의 좁은 소견이라고 하는 것이 참, 기가 막히고 인간의 한계가 그런 것인가? 싶은 정도로 생각이 나지요.
그 5장 6부를 항복받는 이것이 아니잖아요.
그럼 수레를 보고 가자고 때리는 것이지, 소를 때리는 것이 아니고... 차바퀴를 툭툭 차면서 가자고 하는 것이지, 운전수 보고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게 돼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95. 不食酒肉五辛(불식주육오신)하며, 邪眼看他飮咀(사안간타음저) 뭐 이것을 오신채나 주육을 권장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꼭 안해야 된다. 라고 아주 치우쳐서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不食酒肉 술이나 고기나 내지 오신채를 먹지 아니하며 또 삿된 눈으로, 아주 이상한 눈으로 꼴쳐 보고 있다. 이겁니다. 그런 거 먹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마시고 먹는 것을 꼴쳐 보고 있다.
삿된 눈으로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이겁니다. “아, 저거 몹쓸 사람.” 술이나 한잔 했다든지, 오신채를 했다든지, 고기나 뭐 좀 먹었다든지 그러며는, 으레히 자기 안하는 그것 가지고 그저 아주 송충이 보듯이 그렇게 바라보고, 무슨 뭐 지네나 뱀 바라보듯이 그렇게, 지나치게 그렇게 사람들을 혐오하는 마음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하던 사람들이 결국은 얼마 아니 가서, 아예 수행을 포기해 버리고 공부하는 것을 포기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 배워가지고 그렇게, 편벽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개 보면 잘못돼요. 대개 보면 잘못된다고요.
아주 뭐 별 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 지공스님께서도 이런 문제에, 계율 문제에 너무 치우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잘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남이 못한다고 그렇게 삿된 눈으로 바라보는 것. 이건 뭐 차라리 자기 자신도 잘못하고, 남을 삿된 눈으로 안보는 것. 그것이 낫지요.
자기 실컷 좀 잘했다 하고, 남을 삿된 눈으로 보고, 삿된 눈으로 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비방, 입에 거품을 물고 비방을 퍼부으면, 자기 조금 잘 하고는 뭐 다 까먹고, 몇 배로 까먹어 버리니까 무슨 그 소득이 있습니까?
계율 문제뿐만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잘못의 문제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뭐 틀림없이 상대는 잘못했고, 내가 잘했다손 치더라도 그 잘못한 것을 너무 지나치게 그렇게 폄하한다든지 무시하고, 욕을 한다든지 비난을 한다던지, 자기 잘 한 것을 자랑을 뭐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던지, 그러면 차라리 자기도 잘못 하고 자랑도 안 하고, 남 잘못 하는 것 허물 안 하는 것이 차라리 훨씬 낫지요.
96. 更有邪行猖狂(갱유사행창광) 거기다 또 다시 더 붙여서, 삿된 행으로서 猖狂이라. 아주 뭐 어지럽게 미친 듯이 날뛰는 경우. 좀 잘 한다고 하는 사람들. 이것이 이승들의 좁은 소견으로 하는 짓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많이 보지요? 우리가 살면서...
아! 참 이, 뭐 수행을 떠나서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런 삶에도 아주 큰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修氣不食鹽醋(수기불식염초)로다. 기를 단련, 기운을 단련해서 도 닦는, 神仙道(신선도) 닦는 사람 처럼요. 기운을 단련해서 소금도 안 먹고 초도 안 먹어. 식초 같은 것도 안 먹는다. 이겁니다.
이런 것이 다 무슨 神仙道 닦는다던지, 기운을 단련한다던지 하는, 그러니까 이것은 기껏해야 마음의 문제가 아니고, 육신의 문제가 돼버려요.
지금같이 이렇게 정보가 널려있고, 뭐든지 다 알만치 알 수 있는 이런 시대에도, 이렇게 이런 좁은 소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97. 若悟上乘至眞(약오상승지진)하며는, 만약에 上乘. 最上乘(최상승). 大乘(대승) 大道(대도) 至道(지도) 그것을 여기서는 上乘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上乘의 지극한 진리를 만약에 깨닫는다면, 깨달으려며는,
不假分別男女(불가분별남녀)하라. 남녀의 분별을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상대적인 편견을 갖지 마라. 이 말입니다. 뭐 남자를 여자로 알고 여자를 남자로 알아라는 뜻이 아니고, 남자다 여자다 옳은 일이다 그른 일이다, 이건 옳고 저것은 그르다, 이렇게 치우쳐 있는 것. 이것은 절대 금물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 신심명이나 증도가나 대승찬이나 한결같이 중도적인 그 삶을 아주 크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상대적인 차별상에 떨어지는 것. 이것을 제일 금기사항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어떤 차별상에 치우쳐 있는 것. 그것을 다 수용하지마는, 그것의 어느 한곳에 치우쳐 가지고, 절대적으로 옳다. 절대적으로 그르다. 이렇게 하며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제가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갈 때, 그 양쪽 언덕이 있어서 강이 형성되어 있어서 배를 타고 내려가지마는, 그렇다고 언덕 어느 곳에도 가서 닿으며는, 더 이상의 진행은 이뤄지지가 않지요.
그와 같이 中道(중도)적 삶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 어떤 차별상을 부정도 해선 안 되고, 또 긍정도 해서는 안 되고, 부정과 긍정을 空(공)히 부정할 때 부정하고, 그러면서 한편 긍정하고, 긍정하면서 또 한편 부정하면서, 이렇게 해서 아주 조화를, 정말 원만한 조화를 이뤄가면서 사는 것.
이것이 중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것이 上乘이요. 大乘이요. 큰 도[大道]고 至極(지극)한 도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대승찬이 10수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에, 여기까지가 9수라고 그래요. 대개 9수라고 그러고, 한 수가 떨어져 나갔다. 그래요. 그래서 여기저기 다 찾아보아도 이 이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떨어져 나갔다면 조금 떨어져 나갔겠는데 참 아쉬운 일이지요.
그러나 뭐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팔만대장경의 요체를 다 이야기했고, 당신이 하시고 싶은 그 어떤 가르침을 다 이야기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에 계율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거론을 하면서, 옳다 그르다 이것을 너무 치우쳐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이런 말을 했어요.
불교에서 계율을 이야기할 때,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도 가능하다.”그랬습니다.
“살인도 가능하다.”왜냐? 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우려가 있는 사람이라며는, 그 한 사람을 내가 죽이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겠다.
그래서 나는 딴 사람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그 사람을 죽이고, 내가 그 과보를 받고, 차라리 내가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 길을 택하겠다. 하는 이것이 불교의 소견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한 사람은 죽었지만 다른 많은 사람이 살게 되는 것이지요.
소위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그런 경우는 “살인도 가능하다.”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된다 라고 하는 것만 딱 알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 문제가 많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도라고 하는 것을 시종일관 중도라는 낱말 한 마디도 없지만, 시종일관 어디에도 치우치지 말고 너무 부정도 하지 말고 긍정도 하지 말고, 부정할 때 부정하되 긍정을 가지고 있고, 긍정할 때 긍정하되 또 역시 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그런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고, 그것이 大乘(대승)이고 大道(대도)고 至道(지도)다. 하는 그런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최후의 결론도 그런 말씀으로 매듭을 짓겠습니다.
그동안 그 신심명과 증도가와 이제 참 대승찬이라고 하는 아주 귀한 법문이고, 참, 세 분 다 아주 도인으로서도 아주 큰 깨달음을 성취하셨고, 또 독특한 삶을 사셨던 그런 분들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하고, 이번에 특히 보통 이제 신심명과 증도가는 많이들 만날 수 있고 공부도 하는데, 이 대승찬을 소개해서 저도 공부하고, 여러분들에게도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저에게는 아주 큰 이익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 가지 이제 마쳤고, 당분간 좀 휴식을 좀 취하고요. 그 전에 쉬었듯이 그렇게...
언제 또 시작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은 교재가 생각이 나며는 또 다시 시작할 날이 있을 겁니다. 어느 날 문득 염화실 게시판에 강의가 공고 되며는, 그때부터 또 강의가 시작되는 걸로 그렇게 아시면 되겠습니다.
미륵골님이 “책 걸이” 라고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여여선당에서 내일모레 14일날 법회를 한다고 했는데, 글쎄요. 뭐 봄도 됐고 한번 찾아보고 싶다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오겠다고 해서 이왕이면 법회 날 그렇게 모이며는, 법회도 참석하고 법어사도 한번 이렇게 들리실 분 들리시고 하는게 좋겠다고 이렇게 우연히 이야기가 되었는데, 또 마침 세 가지 좋은 선시들이 끝나서, 책 걸이 겸해서 이렇게 한번 모이게 됐습니다.
그럼 여여선당 법회에서 가능하신 분은 와서 참석하시도록 하고, 그때 뵙겠습니다.
그동안 들으시느라고 애쓰셨습니다. 다음에 또 좋은 강의가 준비 되며는 그때 공고 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기록: 수경심. 정리: 대원성.
감사합니다
좋은 선시와 인연 맺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좋은 법회 주관해 주시는 큰 스님의 자비에 깊은 존경을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_()()()_ 귀한 법문 잘 들었습니다. 염화실이 여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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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법문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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