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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강 - 行由品- 9
祖- 復曰, 昔에 達磨大師- 初來此土하시니 人未之信故로 傳此衣하사 以爲信體하야 代代相承이어니와 法卽以心傳心하야 皆令自悟自解니 自古로 佛佛이 惟傳本體하시고 師師- 密付本心이시라
衣爲爭端이니 止汝勿傳하라 若傳此衣하면 命如縣絲하리라 汝須速去하라 恐人害汝하노라
慧能이 啓曰, 向三摩處去하오리까 祖- 云, 逢懷則止하고 遇會則藏하라 慧能이 三更에 領得衣鉢하고 云, 能은 本是南中人이라 素不知此山路 하니 如何出得江口리잇까 五祖- 言, 汝不須憂니 吾自送汝하리라하시고 祖- 相送하야 直至九江驛하야
祖令上船케하시고 五祖把艣自搖어시늘 慧能이 言, 請和尙은 坐하소서 弟子-合搖艣하오리다
祖云, 合是吾渡汝하리라 慧能이 云, 迷時엔 師度어니와 悟了엔 自度니 度名은 雖一이나 用處不同이니이다
慧能이 生在邊方하야 語音不正하오나 蒙師傳法하야 今已得悟하오니 只合自性自度니이다
祖- 云, 如是如是하다 以後로 佛法이 由汝大行하리라 汝去三年이면 吾方逝世하리라 汝今好去하되 努力向南하며 不宜速說이니 佛法은 難起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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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 復曰(조- 부왈),→ 조사가 말씀 하시기를,
昔(석)에→ 옛날
達磨大師(달마대사)→ 달마대사가
初來此土(초래차토)하시니→ 처음 차토에 오시니, 차토는 중국이지요.
인도에서 중국에 처음에 오시니,
人未之信故(인미지신고)로→ 사람들이 안 믿었잖아요.
사람들이 안 믿었어요.
이 불교는 처음에 민중들이 많이 信仰(신앙)을 했지만, 또 왕들이 신앙을 많이 했어요. 양 나라 때 달마대사가 왔는데, 그 때 무제라고 하는 임금이 인도에서 유명한 도인이 왔다고 하니까, 이분은 信心(신심)이 장해요.
절을 뭐 얼마나 여러 개를 짓고, 스님들을 얼마나 많이, 국가적인 사관생도 키워 내듯이 그런 식으로 길러내기도 하고 그렇게 했는데, 어쨌든 그렇게 신심이 있어요.
큰 스님이 오셨다고 하니까 초청을 했지요. 초청해서 물어 보니까 아 큰 스님이,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까지 와가지고, 뭐 그런 시시한 소리 주고받자고 한건 아니거든요.
“내가 큰 절도 많이 세우고, 스님들도 많이 만들어 내고, 불교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렇게 많이 발전을 시켰다. 그런데 얼마만한 공덕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달마대사가 있다가
“공덕 하나도 없다.”고...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선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까 무제가, 그래도 신심이 있으니까 그만하기는 했지마는, 얼마나 속으로 섭섭했겠어요.
거 좀 자랑 좀 하려고 했는데... 거 좀 인정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달마대사도 그렇지, 거 좀 인정 해주고 뒤로 달리 뭐 설법을 전해도 좋은데, 인정을 안 해주고 “공덕이 없다.” 이런 식으로 했지요.
그런 내용을, 그런 차원의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것이지요.
그것이 人未之信 이예요. 사람들이 못 믿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傳此衣(전차의)하사→ 그리고 이제 혜가대사에게, 혜가라는 제자를 만나서, 다행히 소림사 달마굴이 있어요. 소림사에 가면 그 위에 달마스님이 계셨던 소림굴이라 그래요.
소림사가 있고 소림굴이 있는데, 거기 혜가대사를 만나 가지고 공덕의 차원을 넘어서는. 자성을 깨닫는. 마음을 깨닫는 그 道理(도리)에 대해서... 이것은 마음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줬다. 받았다. 깨달았다. 아 그래, 네 깨달은 것이 맞다라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무 표가 없잖아요.
말은 날아가 버리는 것이고요. 그래서 옷을, 袈裟(가사)를 전했지요.
傳此衣(전차의)라→ 이 옷을 전했다. 이렇게 오도송을 짓고,
앞에서: (9강)
有情來下種(유정래하종)하니 因地果還生(인지과환생)이라.
無情旣無種(무정기무종)이라 無性亦無無生(무성역무생)이로다.→ 이것은 오조스님이 육조스님에게 전하는 傳法偈(전법게)입니다.
이런 것은 법을 전하는 偈頌(게송). 詩(시)다. “법을 전하는 시다.”그래요.
그렇게 하고 오조스님이 육조대사에게 다시 말하기를 달마대사가 처음에 여기 왔는데, 바로 이 禪法(선법). 마음과 마음의 문제. 마음을 깨닫는. 자성을 깨닫는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안 믿어 가지고, 가사를 전해 가지고서 그 어떤 신체를.
以爲信體(이위신체)라→ 믿음의 본체. 믿음의 주체를 삼았다.
그러니까 가사를 전해 준 걸로 봐서 옛날에 부처님은 가섭존자에게 전했고, 가섭존자는 아란존자에게 전했고, 이런 식으로 해서 달마대사에게 전해지고 달마대사는 그 다음에 혜가대사에게 전해지고 이런 식으로 전해진 것이 나에게 까지 왔어. 그리고 이 옷은 이젠 그대에게 전할 판이라. 육조혜능 자네에게 전할 판이니까 그렇게 알아라. 그리고 옷을 전해 받고,
代代相承(대대상승)이어니와→ 대대로 내려오면서 서로서로 이렇게 받들어온 것이다. 이어온 것이다. (석가모니→ 1가섭에게→ 2아란존자→→→ 33달마.→ 중국에선, 1조달마→ 2조혜가→ 3조승찬→ 4조도신→ 5조홍인→ 6조혜능에게 전했다.) 그러나 옷이 사실은 문제가 아니지요.
法卽以心傳心(법즉이심전심)하야→ 법인즉슨 옷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법은 이심전심이지요.
이심전심을 근본으로 한다 이겁니다. 마음으로서 마음에 전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자가 제대로 깨달았는가를 점검 해보고, 깨달았으면 “아, 그러면 됐어. 너는 내 법을 받은 거야.”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이상 뭐 없어요.
깨닫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요. 깨달았는가를 점검을 해보고 제대로 깨달았으면 “됐다.”라고 인가 해주고, 그 인가 해주는 것이 傳法(전법)입니다.
그래서 너무 싱거우니까 가사라도 전해주고, 발우떼도 전해주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皆令自悟自解(개령자오자해)니→ 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이해하게 했다.
自古(자고)로
佛佛(불불)이 惟傳本體(유전본체)하시고→ 부처님과 부처님은 오직 본체만 전해. 깨달음의 본체만 전했다 이겁니다.
이것은 석가모니부처님 이전으로 봐도 좋지마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깨달은 모든 사람은 전부 부처님이니까요. 이 불불 이라고 하는 것은 조사스님들로 봐도 좋습니다.
師師(사사)가→ 스승과 스승이
密付本心(밀부본심)이시라→ 본심을 밀밀히 비밀스럽게, 이것은 뭐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의 문제는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밀밀히 본심을 付. 준다. 줄 부 자 이지요. 부촉한다. 주심이라.
衣爲爭端(의위쟁단)이니→ (여기서는 당부의 말 이예요.) 옷 이라고 하는 것은, 가사라고 하는 것은 투쟁의 단서가 된다. 이겁니다. 투쟁의 단서가 돼요.
옷을 서로 가져가려고 한다. 이겁니다. 한사람 밑에 두 사람도 깨달을 수가 있고, 네 사람. 열 사람도 깨달을 수가 있는데, 아 너만 깨달았느냐 나도 깨달았다 해가지고 서로 가져갈 그런 단서가 된다. 그러니
止汝勿傳(지여물전)하라→ 그대에게서 그치고 더 이상 전하지 말라. 그랬어요. 그래 육조스님까지만 옷이 전해지고, 다음부턴 아니 전했어요.
그것을 아마 탑 쌓는데다가 넣었거나 그랬겠지요.
그래 육조스님에게까지만 가사하고 발우하고 전해졌다. 그런 내용이 이렇게 특히 명문화 되어 있습니다.
옷은 투쟁의 단서가 되니 그대에게서 그치고 전하지 말라.
若傳此衣(약전차의)하면→ 만약에 이 옷을, 이 가사를 전해 주기로 한다면,
命如縣絲(명여현사)하리라→ 목숨이 실에 달린 것과 같을 것이다. 왜냐? 그, 깨달은 사람이 많으니까요.
아 우리스님이 이 가사를 차지해야 된다라고 이렇게 해가지고, 서로 그 어리석은 제자들이 우직하게 덤비면 사람 목숨까지 잃게 되는 그런 상황도 벌어진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명여현사라. 그랬어요. 목숨이 실에 달린 것 같이 될 것이다. 그래 금방 목숨이 달아나는 수도 있다 이겁니다.
이 불교가지고 뭐 그렇게 하겠나 하지만 아닙니다.
이 사상문제. 이것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지요. 불교는 뭐 사상이 잘못돼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데, 구마라습이라고, 그 뛰어난 불교 대 도인을 모셔오기 위해서 ??이라고 하는 사람이 일부러 전쟁을 일으켰어요. 달라고 하니까. 그 스님 달라고 해도 안 주니까 나라를 침공을 해가지고 뺏어온 그런 경우는 있었어요.
결국은 성공도 못하고, 전쟁터에 있는 동안에 벌써 함몰당해 버리고, 왕궁을 빼앗겨 버린 그런 상황이 벌어지긴 했습니다마는,
이제 그런 문제가 앞으로 생길 것 같으니까 더 이상 전하지 말라. 이겁니다.
汝須速去(여수속거)하라→ 그리고 그대는 모름지기 이제 빨리 가라.
지금 한 밤중입니다. 한 밤중에 가사로서 문을 가려놓고, 금강경 일러주고 거기서 깨닫고, 오도송을 표현 하고, 그 다음에 전법게 주고 그리고 가사를 주고, 지금 이런 과정입니다 아주 매우 심각한 그런 순간이지요.
恐人害汝(공인해여)하노라→ 사람들이 그대를 해칠까 두렵다. 여기에 수백 명 대중이 있고, 신수라고 하는 걸출한 인물이 있어 가지고, 모두들 그 사람이 내 법을 받으리라고 하는 그런 여론이 파다하고, 또 그 사람의 제자도 많고 한데 만약에, 난데없이 무식한 행자가 하나 와서는, 오조스님의 법을 받아서 도망가 버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니까 이것이 아주 보통 심각한 아니다. 너는 얼른 가거라. 잘못하면 네 목숨이 달아날 그런 일이 생길수도 있다. 그랬어요.
慧能(혜능)이 啓曰(계왈),→ 물어 가로대,
向三摩處去(향삼마처거)하오리까→ 어느 곳을 가면 되겠습니까?
祖-云(조-운,)→ 조사가 이르되, 오조스님이 말하기를,
逢懷則止(봉회즉지)하고 遇會則藏(우회즉장)하라→ 이것이 豫言(예언) 이예요.
懷라고 하는, 품을 懷자가 들어있는 지방이름을 만나거든 그치고, 또 알 會자. 모일 會자. 이 會자가 들어있는 어떤 지방이름을 만나거든 거기서 숨으라. 藏. 감추라. 너 자신을 거기에 감추라. 이렇게 했어요.
뭐 꼭 구체적인 지방의 이름. “저 강원도 뭐 삼척쯤 가 있어.” 이런 식으로 한 것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예언 비슷하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慧能(혜능)이 三更(삼경)에 領得衣鉢(영득의발)하고→ 옷과 발우떼. 두 가지 였어요. 발우도 전해주거든요.
의발을 領受(영수). 받고는,
云(운),
能(능)은 本是南中人(본시남중인)이라→ 혜능은 본래 남쪽지방 사람이라,
素不知此山路(소부지차산로)하니→ 본래 이 산의 길을 전혀 알지 못 한다. 이 절에 온지 8개월이 됐지만, 계속 방앗간에서 방아만 찧었어요.
대중을 위해서 곡식만 찧어서 바쳤지, 한 번도 산문 밖을 나가본 적도 없고, 산에 올라가본 적도 없고, 뭐 다른 절에 산책나가본 적도 없지요.
전혀 길을 모르는 거예요. 오자마자 그저 방앗간에서 방아만 찧었지요.
길을 전혀 모릅니다.
如何出得江口(여하출득강구)리잇까→ 강구. 강 바깥으로. 강 입구로 어떻게 나가야 되느냐? 길을 전혀 모릅니다.
五祖- 言(오조- 언),→ 오조가 말하기를,
汝不須憂(여불수우)니→ 그대는 근심하지 말라.
吾自送汝(오자송여)하리라→ 내 스스로 그대를 보내 주겠다. 길 아는데 까지, 알만하는데 까지 내가 안내 하겠다. 이겁니다.
祖-相送(조-상송)하야→ 오조가 보내서
直至九江驛(직지구강역)하야→ 오조가 구강역 이라고 하는데 까지 한 밤중에, 3경이 지나고 대중들은 전부 고요히 잠든 그 밤에, 둘이 그렇게 산문을 벗어나서 가는 것이지요.
오조는 바래다주고, 육조스님은 도망가는 그런 상황입니다.
구강역 까지 이르러서,
祖令上船(조영상선)케하고→ 오조가 배에 오르게 하시고,
五祖把艣自搖(오조파노자요)어시늘→ 오조스님은 연세도 많고 그 지역에 오래 살았고, 그 강을 여러 번 건너봤고, 그러니까 강을 건널 때에 조그만 배가 있고, 거기는 누구든지, 오면 탈 수 있는 그런 입장이니까, 5조 스님이 저절로 스스로 노를 잡고 저으시는 거예요.
저어서 가는 거예요 그래
慧能(혜능)이 言(언),→ 혜능이 말하기를 (미안하잖아요? 제자가... 제자는 가만히 있고 스승이 노를 저어 가니까요)
請和尙(청화상)은 坐(좌)하소서 弟子-合搖艣(제자-합요노)하오리다→ “청컨대 스승은 앉아 계십시오. 제자가 합요노. 합당히 제가 노를 젓겠습니다. 제가 노를 젓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노를 젓는 것이 합당합니다.” 合자는 그런 뜻이예요. 그러니까
祖云(조운),→ 조사가 이르기를,
合是吾渡汝(합시오도여)하리라→ “아니다 내가 꼭 그대를 꼭 건네주겠다.”
慧能(혜능)이 云(운),→ 혜능이 또 말해요. 이 말이 멋져요.
迷時(미시)엔 師度(사도)어니와→ 내가 아무것도 모를 때, 미혹할 때는 스승이 나를 제도 하지요. 그렇지만,
悟了(오료)엔 自度(자도)니→ 깨닫고 난 뒤에는 내 스스로 내 자신을 제도 합니다. ←자도. 오료엔 자도. 스스로 제도 하느니,
度名(도명)은 雖一(수일)이나→ 제도한다는 이름은 수일이나. 비록 하나지요. 그렇지만,
用處(용처)는 不同(부동)이니이다→ 사용하는 곳은 같지가 않습니다.
아주 멋진 말이지요? 내가 모를 때야 스승께서 나를 제도 해주지만, 내가 깨닫고 나서 다시 무슨 스승의 제도를 받을 필요 있습니까? 내 스스로 건넙니다. 강물을 건너면서 인생의 그 어떤 고해를 건너고, 미혹의 바다를 건너는 것으로 이렇게 부합 시켜서 아주 참 멋지게 대화를 나누는 그런 대목입니다.
강을 건너면서, 말은 강 건너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용인즉은, 마음을 깨달은 문제! 또 어떤 번뇌의 강을 건너가는 그런 문제.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뭐 어느 정도는 스승이 해줄 수 있지요. 그러나 깨닫는 것은 자기가 깨닫고, 또 자기가 깨닫고 나서는 그 다음에는 전부 자신이 알아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慧能(혜능)이 生在邊方(생재변방)하야→ 혜능이 변방에, 시골 아주 변두리. 시골 촌구석에 살아 가지고서,
語音不正(어음부정)이라→ 어음이. 말이 사투리가 아주 심했던 모양입니다. 촌에서 시골사람으로 무식하게 그렇게 살아 가지고는, 말이 바르지가 못하오나,
蒙師傳法(몽사전법)하야→ 스승의 법 전해주는 것을 입어서,
今已得悟(금이득오)하오니→ 지금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니,
只合自性自度(지합자성자도)니이다.→ 다만 합당히 내 자성자리를 내 스스로 제도 합니다. 내 자성을 내가 제도한다.
祖-云, 如是如是(조-운, 여시여시)하다→ 5조가 말하기를 “그렇다. 말 듣고 보니까 그렇구나.” 그렇다고 뭐 노를 건네주고 했다는 그런 이야기까지는 불필요하고요. 그런 이야기도 없고요. 그래서 이렇게 법담을 서로가 헤어지는 마당에 나누고, 또 이것은 왜 이런 이야기를 여기에 삽입되느냐 하면, 육조스님의 깨달음이 철두철미하다. 마지막까지 이별하는 그 순간까지도 점검하고 그 점검은 너무 뚜렷하게 깨달음이 증명되었다 하는 것으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별하는 마당까지...
이런 법담이 오고가는 것이지요. 이것을 法談(법담). 또는 法擧量(법거량) 이라고 합니다. 법을 거량한다. 들어서 드날린다. 법거량 이라는 말을 쓰지요. 전번에 어디 무차대회. 無此禪會(무차선회)인가 거기서도 거량이 있었지요. 누가 질문하고 대답하고 하는 것. 그것을 擧量(거량)이라고 합니다.
以後(이후)로 佛法(불법)이 由汝大行(유여대행)하리라→ 내가 하나하나 뜯어보니까 그대야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후로 불법이 그대로 말미암아서 크게 행해질 것이다. 크게 펼쳐질 것이다.
좋은 그릇 하나 만났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5조 스님은 아주 얼마나 흐뭇했겠어요?
이런 제자 하나 만나 가지고 밤에 아무도 몰래 멀리 다른 지방으로 내 보낸다고 하는 것. 정말 6조 스님보다도 오히려 5조 스님이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평생 많은 사람 키워 가지고, 정말 큰 그릇 하나 마지막에 만나서, 이렇게 멀리 내보내면서 이 사람이 내가 죽은 얼마쯤 뒤에, 얼마나 세상에 불법을 크게 펼칠까 이런 상상을 한다면, 5조 스님의 가슴이 아마 더 뜨겁고 두근거리지 않았겠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불법이 유여대행하리라. 그대로 말미암아서 크게 행해질 것이다. 사실 그랬어요.
달마스님에서부터 육조스님에 이르기까지는 禪法(선법)이 微微(미미)했어요. 미미하고 그저 뭐 몇몇 사람에게만 계속 전해졌는데, 육조스님에게 와서는 많은 사람들의 제자가 나오고, 그 밑에서 청운행사와 남악. 회양. 이 육조단경 끝부분에 다 나옵니다.
다 나오는데, 그 두 사람 밑에서는 그냥 사정없이 가지가 벌어져가지고, 五家七宗(오가칠종)이라든지 뭐 그런 아주 禪(선)이 천하를 뒤덮게 되는,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소위 “선불교” “선불교” 서양에서는 “선불교” 라고 해야 알아줄 정도로 선불교에 대해서 그 만치 크게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 때서부터 지금까지로 보면 너무 느린 일이고, 또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나마 지금이라도 불법이 서양에 그렇게 크게 전해진다고 하는 것은, 그런대로 다행이지요.
汝去三年(여거삼년)이면→ 그대가 가고 앞으로 3년 뒤면,
吾方逝世(오방서세)하리라→ 내, 바야흐로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나서 3년 뒤에사 세상을 떠난다고 이렇게 딱 자기 죽을 시간을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汝今好去(여금호거)하라→ 그대는 지금 잘 가게. 이제 다시 볼 수 없고 나는 3년 뒤면 죽을 것이고, 다시는 볼 수 없으니 잘 가라.
努力向南(노력향남)하야→ 아주 노력하고 노력해서 부지런히 남쪽으로 향해가서,
不宜速說(불의속설)이라→ 속설하지 마라. 마땅히 부디, 빨리 자네의 법을 펴려고 그렇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佛法(불법)은 難起(난기)니라→ 불법은 그렇게 빨리 펴려고 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불법은 난기다. 일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충분히 그대도 좀 더 다듬어지고, 더 실력이 쌓이고, 그리고 시기가. 때가 성숙해야 그 때 비로소 자네가 세상에 불법을 펴게 되는 그런 때가 오지, 너무 빨리 불법 펴려고, 깨달았다고 너무 그렇게 설쳐대지 마라. 이런 당부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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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